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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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인간이 지닌 가장 지극한 진정성이다.(71쪽)

 

새삼스럽게, 정색하고, 멱살 잡아 온 몸을 흔들어대는 추상같은 말입니다. 이 말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저는 열흘 동안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입 닫은 열흘이 까마득하기 그지없습니다. 그 열흘의 한가운데 쯤 저는 한의원 문을 닫고 10,000리 밖 코타키나발루로 날아갔습니다. 제 손에는 크리스틴 콜드웰의『몸으로 떠나는 여행』딱 한 권이 들려 있었습니다. 사흘 동안 이 한 권의 책 속에 들어앉아 있었습니다. 절반도 채 못 읽은 채 돌아와 다시 들어앉았습니다. 오늘 오후 비로소 푸시시 깨어나 책 밖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의도醫道에 입문한 날의 기억은 하마 가물거릴 지경인데 인간의 몸을 치료한답시고 살아온 세월이 마치 시커먼 공동空洞처럼 느껴졌습니다. 무수히 손 댄 아픈 이들의 몸을, 하물며 그 “지극한 진정성”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자책감에 짓눌려 단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제 자신의 몸조차, “지극한 진정성”으로 대하지 못하였다는 통렬한 각성 때문에 그야말로 몸 둘 바를 모르고 삥삥매었습니다. 더군다나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일에 삶의 중심이 기울어진 뒤부터 몸을 마음의 은유로 읽는 ‘악습’이 생겼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여 돌연 진료를 멈추었습니다. 죽는 날까지 저는 이 열흘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열흘이 제게 무슨 큰 성취를 가져다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삶의 진실에 대한 각성·인정·수용·실천 모두가 몸에서 일어나 몸으로 돌아간다는 깨달음의 각인을 다시 뚜렷하게 남겼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몸이 마음의 몸이기 전에 먼저 마음이 몸의 마음이었다는 진실을 사무치게 느끼는 순간순간을 마주하게 했다는 사실만은 틀림없습니다. 필경 이것은 향후 제 인생 행보에 지속적으로, 아니 확산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것입니다. 몸을 뒷전 하는 마음 치료가 더는 행해지지 않아야 한다는 육중한 경고음을 날로 무겁게 발할 것입니다.

 

의자醫者인 제게 이토록 큰 충격인, “몸은 인간이 지닌 가장 지극한 진정성이다”라는 장 아메리의 통찰은, 그러면 어디서 온 것일까요? 장 아메리의 구체적 삶과 연결해야 정확한 이해가 가능합니다. 이 문장의 단호한 긍정성, 절대적 타당성과는 달리 앞뒤 문맥에는 깊고 푸른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사실은 결정적 시사를 던져줍니다. 장 아메리의 늙어감에 대한 인식은 몸에 대한 인식으로 응축됩니다. 몸에 대한 인식은 뼈가 으스러지도록 당한 고문의 경험으로 응축됩니다. 뼈가 으스러지도록 당한 고문의 경험보다 더 “지극한 진정성”으로 “생명의 권리를 담보하는”(71쪽) 것이 또 있을까요? 죽음과 그대로 맞닿아 있는 가혹한 폭력의 한복판에서 “생명의 권리를 담보하는” 몸의 “지극한 진정성”을 두고 그 누가 차마 희망을 말할 것입니까. 절망의 심연에서 건져 올린 장 아메리의 이 래디컬한 말은 부박한 몸 담론 모두를 단칼에 베어버립니다.

 

래디컬한 말은 본디 자기 영지를 지니지 않습니다. 장 아메리가 몸소 그것을 증명해주었습니다. 문제는 남아 있는 우리입니다. 장 아메리가 남긴 수직의 진실에서 얼마간 타협한 사선을 타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과연 우리 몸을 어떻게 “지극한 진정성”으로 삼을 수 있을까요? 이제 여기서 정말 몸을 느끼고는 있을까요? 고통에 찬 몸의 소리를 알아차리고 삶의 필연적 일부로 인정할 수는 있을까요? 어두운 몸도 사랑으로 껴안을 수는 있을까요? 내 몸이 남의 몸과 닿고서야 비로소 인간이라는 진실을 실천할 수는 있을까요?

 

오늘도 몸의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들과 하루를 살았습니다. 한의원 문을 닫고 홀로 앉아 제 몸을 생각합니다. 만집니다. 소리를 듣습니다. 냄새를 맡습니다. 거울을 통해 들여다봅니다. “지극한 진정성”에 가만히 깃들어 봅니다. 아직 벼락같은 느낌이 오지 않습니다. 언제 쯤 제가 그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을는지 기다려 달라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끝내 아무 소식이 없거든 그냥 잊으십시오. 하기는 이 남루한 언어들이야 잊으려 하기 전에 잊히고 말겠지요. 적요 뒤에 홀연히 몸, 그러니까 바로 그 몸이 온다면 지복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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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3 21: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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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4 09: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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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3 22: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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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4 10: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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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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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동시에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된다는 역설이랄까. 그 극단에 빠진 경우가 바로 나르시시즘에 사로잡힌 멜랑콜리다.(66쪽)

 

장 아메리가 멜랑콜리를 의학적 우울장애와 같은 의미로 썼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가정할 경우, 놀랍게도,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다’ 운운하는, 그러니까 우울장애를 기분장애 정도로 생각하는 미국식 주류의학보다, 의학과 무관한 그가 우울장애의 본질을 훨씬 더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멜랑콜리를 나르시시즘과 모순관계에 놓고 그것이 한 인격 속에 역설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으니 말입니다.

 

우울장애는 단순한 기분장애가 아닙니다. 깊고 질긴 우울감은 우울장애의 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울장애의 핵심은 자기인정·자기신뢰의 붕괴입니다. 비교적 가벼운(!) 정도의 자기비하에서 무거운 자기무화無化까지 일련의 자기부정 스펙트럼이 드러내는 병리적인 양상을 우울장애라 합니다. 우울장애의 모든 증상은 이 자기부정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자기부정의 경향성이 깊어질수록 그 맞은편에 뚜렷이 맺히는 허상이 있습니다. 나르시시즘입니다. 나르시시즘의 근원은 자기를 부정하게 하는 허구적 대전제인 이상적 자아상입니다. 이 이상적 자아상은 대개 순수·지선至善·진정성 등의 윤리적 결곡함을 속성으로 지닙니다. 윤리적으로 완벽한 자아상에 대한 애착이 바로 나르시시즘입니다. 이 허상의 기준점이 높을수록 나르시시즘은 멜랑콜리를 강화합니다. 멜랑콜리가 강화될수록 나르시시즘이 강화됩니다. 인과因果가 맞물린 채 악무한으로 치달아갑니다. 이것이 우울장애의 자기운동입니다.

 

세밀히 말하자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울장애는 ‘단극單極성’우울장애입니다. 나르시시즘이 멜랑콜리 울타리 안으로 포개져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나르시시즘에 사로잡힌 멜랑콜리”라는 장 아메리의 말을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나르시시즘을 사로잡은 멜랑콜리”입니다. 이에 비해 흔히 조울증이라고 말하는 ‘양극兩極성’장애는 나르시시즘과 멜랑콜리가 둘로 쪼개져서 널을 뛰고 있는 것입니다.

 

나르시시즘과 멜랑콜리는 본디 대칭 구조를 이루는 양극입니다. 둘은 온전히 포개진 하나여서도 안 되고 온전히 쪼개진 둘이어서도 안 됩니다. 이런 극단에 육박한 것일수록 심각한 질병입니다. 전자를 우울장애라 하고 후자를 양극성장애라 합니다.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상태가 유지되도록 역동적 거래가 이루어질 때, 그러니까 모순이 역설적 공존 운동을 할 때 건강한 것입니다.

 

역동적 거래니 모순의 역설적 공존 운동이니 하는 따위의 말을 애써 만들었지만 실재를 엄밀하게 드러내기 어렵습니다. 장 아메리의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리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몸은 가지지 않아야 완전히 소유한다. 다시 말해서 느껴지지 않는 몸이 건강하다.

 

자기긍정의식도 자기부정의식도 “가지지 않아야” 건강한 마음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자만도 자학도 “느껴지지 않는” 마음이 건강한 것입니다.

 

완전한 건강을 자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머무르지 않는다.······건강한 사람은 세상의 일과 사건에 충실할 따름이다.

 

마음이 완전하게 건강한 사람은 자기 마음 안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세상의 일과 사건에 충실할 따름”입니다. 나르시시즘에 머무르는 사람은 세상의 일과 사건을 먹어치웁니다. 멜랑콜리에 머무르는 사람은 세상의 일과 사건에 먹히고 맙니다.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세상의 일과 사건에 충실할 따름입니다.

 

마음의 이러한 논리는 곧장 사회정치 현실로 이어집니다. 나르시시즘에 걸린 상위 1%는 제 곳간만 채웁니다. 멜랑콜리에 걸린 다수 민중은 제 곳간을 털립니다. 건강한 중산층이 든든하게 형성되어야 사회를 인간다움으로 가꿀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나르시시스트의 악정으로 중산층이 급격하게 몰락하고 있습니다. 양극화사회로 돌진하고 있습니다. 중증 정신장애의 폐쇄병동으로 급변하고 있습니다. 나르시시스트가 도발한 세월호사건, 이것이야말로 우리사회의 병적 상황을 극명하게 드러낸 대표적 증상입니다. 그 진실 규명 여부가 이후 우리사회의 향방을 결정할 것입니다. 멜랑콜리에 빠져들어 거기 머무르지 않으려면 평범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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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건강을 자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머무르지 않는다.······건강한 사람은 세상의 일과 사건에 충실할 따름이다.······건강한 사람은 자기 바깥에 머무른다. 그에게 속한 공간에, 떼려야 뗄 수 없이 자아와 맞물린 세계에 나아가는 게 건강한 사람의 태도다.(69-70쪽)

 

미국정신의학협회가 만드는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은 정신의학계에서 경전적인 권위를 지닙니다. 2014년 발표된 그 다섯 번째 판DSM-5에는 20개 범주 아래 300여 가지 정신장애가 열거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정교하고 엄격해 보이는 진단 기준을 제시합니다. 일반인이 생각할 때 정교하고 엄격해 보이는 이 진단 기준이 사실은 매우 느슨한 것이어서 질병 인플레이션을 유발한다고 전문가들은 비판합니다. DSM-4 작업을 주도했던 앨런 프랜시스가 최근 그의 저서「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원제: 「Saving Normal」)을 통해 이 문제를 정면 거론하고 나선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내부고발과 다름없는 이런 이야기는 과연 왜 나왔을까요? 미국정신의학협회가 이 DSM를 수익 창출의 도구로 쓰고 있다거나 제약회사 로비가 병의 등재 여부와 진단 기준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회적 부조리 문제는 생략하고 의학적인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의 병은 외부조건과 단절된 고립체에 일어나는 폐쇄적 사건이 아닙니다. 외부조건과 함께 일으키는 상호작용의 결과입니다. 그 외부조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일상의 삶입니다. 특히 정신장애는 대부분 일상의 삶 한가운데서 발생하고 치유됩니다. 검사·진단·치료가 일상의 삶과 결합되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무엇보다 검사와 진단이 삶의 전체적 맥락과 괴리되면 쉽게 기계적·도식적 판단에 따라 병의 여부를 결정하게 됩니다. 물론 병인 것을 병 아니라고 할 가능성도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고 그래서 우리가 문제 삼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다시피 한 번 어떤 정신장애 환자라고 규정되면 개인은 물론 사회적 차원에서도 거기서 헤어나기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미국식 의료 시스템에서는 뇌를 타깃으로 삼는 화학합성약물을 거의 무조건 복용해야 합니다. 대부분 차단제인 이 증상억제제는 근본 치료를 못 함은 물론 수많은 부작용과 생체 진동수 저하를 일으킵니다. 함부로 정신장애 진단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신중을 기하려면 기계적·도식적 검사·진단 너머 삶 전체의 맥락을 살피고 구체적 일상에 대한 관심과 수행 여하를 점검해야 합니다.

 

전혀 다른 문맥처럼 보이지만 장 아메리의 통찰은 이 문제의 정곡을 찌르고 있습니다. 건강한가, 아닌가는 “세상의 일과 사건에 충실”한가, 아닌가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 테두리 안에 “머무르지” 않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바 거기 머무르며 그 존재의 느낌을 가지는 것이 바로 병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실제 임상에서 DSM이든 ICD(세계보건기구의 국제질병분류)든 보조 자료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제 최종 판단과 결단은 상담을 청하신 분과 깊이 대화하여 그가 (아무리 멀쩡해 보여도) 현재 자기 자신에만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가, (아무리 힘들어 보여도) 세상의 일과 사건에 성실히 참여할 수 있는가,를 따져서 내립니다. 또한 특별한 예외를 빼고는 상담을 청한 분이 서양의학의 병명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이끕니다. 병명보다 병이 크고, 병보다 사람이 크고, 사람보다 삶이 크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삶에 대한 숭고한 에너지가 편재하는 기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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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가지지 않아야 완전히 소유한다. 다시 말해서 느껴지지 않는 몸이 건강하다.(53쪽)

 

日出而作 日入而息

일출이작 일입이식

鑿井而飮 耕田而食

착정이음 경전이식

帝力於我何有哉

제력어아하유재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쉬네.

우물 파서 물마시고, 밭 갈아 밥 먹네.

임금 힘이 내게 어찌 미치리.

 

요堯임금 통치시대의 격양가擊壤歌, 그러니까 땅을 두드리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선정이 베풀어지는 사회에서는 백성이 임금의 존재조차 알 필요도 없이 태평하게 살아간다는 사실을 말할 때 늘 인용되는 것이 바로 이 격양가입니다.

 

요즘 우리는 정반대로 통치자의 존재를 알리려 광분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잘못한 것은 덮어서 비틀고 잘한 것은 뻥 튀겨서 마치 통치자 한 사람을 위해 온 백성이 존재하는 것인 양 날뛰는 무리들 때문에 잔잔할 겨를이 없습니다.

 

왜 이러는 걸까요? 정당하지 않은 권력을 지키고 그 권력에 깃들어 제 곳간을 채우기 위함입니다. 저들의 전방위적준동 그 모든 것이 거대한 토건土建입니다. 젖먹이 아기에서 죽음 앞의 노인까지 백성의 사소한 일상 깊숙하게 권력의 ‘갑질’이 들쑤시고 들어가 돈 바람을 일으키도록 몰아치는 것입니다.

 

백성은 결마다 겹마다 몸서리치도록 권력을 느낍니다. 백성은 결마다 겹마다 몸서리치도록 돈의 힘을 느낍니다. 느낄수록 부질없는 소유욕망이 몸부림치기 때문에 삶은 아프고 아픕니다. 국민 ‘멘토’가 넘쳐나고 개나 소나 ‘힐링’을 떠들지만 번지는 것은 공포와 우울입니다.

 

우리가 이 판국에 요堯까지야 바랄 리 있겠습니까. 임금 힘이 미치더라도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쉬는 삶에 자조自嘲 없는 나날이면 좋겠습니다. 임금 힘이 미치더라도 우물 파서 물마시고, 밭 갈아 밥 먹는 삶에 자조自嘲 없는 나날이면 좋겠습니다. 애쓰며 사는 동안 눈물 흘릴 수야 있겠지만 스스로 비웃고야 어찌 살아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스스로를 비웃지 않는 삶을 살아가려면 우리 삶을 돌아보고 느껴지는 바를 추상같이 알아차려야만 합니다. 병든 몸이 각 장기臟器의 존재를 강하게 느끼듯 고난에 찬 백성은 통치자의 권력을 강하게 느끼는 법입니다. 장기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면 이미 그 전부터 문제가 발생했다는 뜻이듯 통치자가 그 권력을 강하게 드러내면 이미 그 전부터 문제가 발생했다는 뜻입니다. 장 아메리의 진실은 우리에게 이런 대구對句를 건넵니다.

 

帝力於我此悍哉

제력어아차한재

임금 힘이 내게 이리도 사납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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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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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반항을 시작한 사람은 다른 이들과 어울릴 수 없다. 그는 세상에 조롱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자신을 스스로 비웃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자 안간힘을 썼기 때문이다.(51쪽)

 

지난 해 한가위, 세월호사건 진실 규명을 촉구하는 여러 시민들과 함께 광화문에서 단식을 하였습니다. 의자醫者인 만큼 여러 날 단식 중이신 분들의 건강상태를 살피고 간단한 치료도 하였습니다. 저는 거기서 국가가 왜 아이들을 죽였는가, 질문하는 시민을 조롱하는 자들을 보았습니다. ‘종북세력 북한으로 가라’는 현수막 걸어놓고 찬송가를 부르는 개신교집단이었습니다. 오후, 청운동 주민 센터에서 농성중인 가족을 찾아가 건강상태를 살피고 간단한 치료를 했습니다. 저는 거기서도 국가가 왜 아이들을 죽였는가, 질문하는 가족을 조롱하는 자들을 보았습니다. 짐짓 진지하게 실은 시시덕거리며 사사건건 가족을 통제하고 있는 경찰병력이었습니다.

 

가족은 자신을 스스로 비웃었을까요? 생각해 마땅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자 안간힘을 썼으니 말입니다. 세상은 저 개신교집단과 경찰로 대표되는 부류가 하는 생각만이 생각할 수 있는 생각이니 말입니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자 안간힘을 쓴 것은 맞지만 가족은 스스로 비웃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이들의 죽음을 앞에 놓고 어찌 그럴 수 있었을 것입니까. 아이들한테 미안해서 그러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이들한테 부끄러워서 그러지 못했을 것입니다. 가족은 필경 목숨 걸고 국가 앞에 서 있었을 것입니다. 국가의 실체를 알아가는 저 혹독한 과정에서 자조自嘲할 틈이 있었다면 수도 없이 자책自責을 했을 테지요.

 

모름지기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 비웃을만한,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은 저와 같이 비굴한 소인배가 아닐까 싶습니다. 조롱하는 인면수심 저 무리에 차마 가담할 수는 없으되 마땅히 내로라하고 할 일도 없으니 마음만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낑낑거리기를 거듭할 따름입니다. 되도 않는 글 한 줄 써놓고도 가슴이 벌렁거립니다. 이런 저런 관련행사 기웃거리다 알량한 손길 남기고 와서는 마음의 짐을 뒤적거립니다. 진료 쉬는 날이면 거의 어김없이 모순의 언저리만을 배회하다 돌아옵니다. 이도 저도 아닌 변방에서 자기 자신의 삶이 아닌 것만 같은 삶을 살아가면서 찰나마다 느끼는 도저한 남루襤樓. 존재 자체에 대한 우울로 육박하는 웅숭깊은 자조.

 

나치에 맞서 싸운 레지스탕스 장 아메리가 느끼는 자조는 저 같은 무지렁이가 느끼는 것과는 아무래도 다를 것입니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자 안간힘을 쓴 것은 같다 하더라도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한 행위는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체포되어 수용소에서 가혹한 폭력에 시달리면서 느끼는 형언할 길 없는 감정 일부로서 자조라면 더욱 잔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자조조차 변두리 경험에 머무르고 만다는 자조에 휩싸이기 십상인 것이 제 운명이지 싶습니다. 단. 이 운명이 굴레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저는 남은 삶의 시간 모두를 들여 딱 한 글자만을 바꾸려고 합니다. 자조自嘲에서 자조自照로.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면 바뀔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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