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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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적 자아는 몸으로 직접 체험하는 자아 못지않게 우리의 본래적 자아다.(89쪽)

  이제 좋든 나쁘든 자아는 사회의 좌표이기 때문에, 관계 좌표·······를 잃어버린 노인의 자기소외·······는 몸의 통증과 물질화로 이룩한 자아 발견보다 더 끈질길 뿐만 아니라, 보다 결정적이다.·······더욱 더 현실적이라고 할까. 현실이라고 하는 것도 관계를 통해 빚어진 것이며, 동시에 여전히 변화하며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더욱 절박하고 안타깝게 다가오는 것은 사회에서 관계할 힘을 잃어버린 자기 소외다.(88쪽)

 

20대 중반의 젊은, 아니 아직은 어린 여성과 인문의학적인 치유상담을 하고 있습니다. 그와 나누는 대화의 주제 가운데 가장 기초基礎적이고도 기축機軸적인 것이 사회관계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자기 경계를 설정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누구에게도 중대현안이 될 수밖에 없는 문제지만 그에게 유독 더욱 날카로운 연유가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방으로 들어올 때 노크를 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의 방에는 아예 잠금장치가 없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이에 대하여 아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가족이니까, 아버지니까, 당연하다고 합니다. 이런 침습을 끊임없이 받고 살아온 그는 가장 기본적인 경계 감각을 갖추지 못한 채 사회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처음 보는 사람이 인사를 건네 올 경우 대체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로 응대를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자신의 말을 듣고 짓는 상대방의 표정을 통해 그 감정 상태를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사소한 일상에서조차 경계를 세우지 못하여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을 그의 아버지는 물론 심지어 어머니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과 맺는 관계가 딸이 맺을 모든 사회관계의 근간임을 모를 리 없음에도 이렇게 딸에게서 관계의 힘을 빼앗아버린 그의 부모는 세상에 둘도 없는 엄마며 아빠라고 자처합니다. 그는 이런 학대를 내면화하여 끈질기게 자기 자신을 스스로 소외시킵니다. 문제를 직시하는 반복된 훈련을 하면서 현재 조금씩 천천히 나아가고 있습니다.

 

어디 이 여성뿐이겠습니까. 어디 한 개인뿐이겠습니까. 이 땅의 지배집단은 단박에 수백, 수천, 수만의 사회적 노인을 폭력으로 만듭니다. 정치로 눙칩니다. 법으로 못 박습니다. 세월호사건 진실 규명을 가로막는 입법예고가 떴습니다. 저 협잡이 제노사이드의 명백한 증거입니다. 사회적 노화, 아니 살해 공작을 기필코 저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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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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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란·······변증법적 격변의 순간이다. 파멸을 막아보려 안간힘을 쓰는 내 몸의 양量은 변형된 나라는 새로운 질質이 되어버린다.

그래도 우리는 인간인가? 그럼 뭐가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가? 한밤중에 치통 때문에 깨어난 A는 격렬한 통증의 집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79쪽)

·······A가·······온전히 자신의 고통으로 몰입하는, 그래서 본격적인 진리가 밝혀지기 시작하는 과정이 열리는 ‘고통의 축제’의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게 아닐까.(85쪽)

 

양의 축적이 질의 변화를 낳는다는 마르크스의 말이 이렇게 쓰이는 것은 참으로 뜻밖입니다. 문맥상 장 아메리의 결곡함과 자연스럽게 아귀 맞추기가 쉽지 않습니다. 노화라는 커다란 문맥 안에 통증이 놓이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지만 “인간의 본질”, 나아가 “본격적인 진리가 밝혀지기 시작하는 과정이 열리는 ‘고통의 축제’”에 이르면 노화의 문맥이 붕괴되는 느낌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일단 이런 난제를 유보한 채 통증에서 출발하여 고통의 축제로 이어지는 문맥을 토대로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통증은 인간의 본질로서 축제의 성격을 지닌다.”

 

이 문장이 장 아메리의 본의를 전하는 것이라면 실로 경탄할만한 깨달음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에 육박하며 원효의 실천에 접근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통증은 인간 존재의 숙명임에 틀림없습니다. 태어나서 죽는 그 순간까지 통증은 몸과 마음을 구성하고 작동시키는 원인이며 결과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편하거나 즐겁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편의와 쾌락으로 경도된 문명화로 나아가면서 통증의 숙명성에 체계적으로 저항하였습니다. 급기야 무통문명. 통속종교와 의약자본이 이 무통문명의 쌍끌이입니다.

 

그러나 이 불편하고 성가신 통증은 생명을 열고 이어주는 신호이며 전언입니다. 자연치유의 증거입니다. 만일 이 통증이 편하고 즐거운 것이었다면 인간은 진작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면역 진화를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편하고 성가신 것이야말로 생명에게 주어진 자연의 위대한 선물입니다. 통증에는 분명히 축제의 성격이 내재해 있습니다. 밤이 있어야 꽃이 피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자기 파괴적 탐욕인 무통의 추구를 멈추어야만 합니다. 불편하고 성가신 통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통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우리에게 부가되는 축복이 두 가지 더 있습니다. 하나는 통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그러니까 직시하면 역설적으로 불편함과 성가심이 현저하게 줄어든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통증만이 인간에게 주는 깨달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깨달음을 통해 인간은 비로소 깊이의 차원을 획득하게 됩니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통증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장 아메리의 통찰이 책 전체를 관통했더라면 혹시 우리가 더 주옥같은 그의 글들을 접하는 행운을 누리지 않았을까, 하는 상념이 한 동안 맴돌았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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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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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몸을 통해 늙어가면서 몸을 적대시하는 나다. 젊었던 시절의 나는 몸을 등한시하면서도 몸과 더불어 나였다.(79쪽)

 

얼마 전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을 내린 바 있습니다. 이 판결에서 다수의견에 가담했던 두 재판관이 이른바 대역불사론大逆不赦論을 펴며 이례적으로 보충의견을 내놓았습니다. 맹자와 한비자를 동원해가며 사뭇 비분강개한 어조로 민주주의 수호의 결기를 드러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언어는 민주주의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봉건주의 언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사법 판단에 의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추론 판단에 의거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통합진보당 정체성 문제나 헌법재판소 판결 문제를 직접 거론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보충의견에 나타나 있는 병리적 정서 상태를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두 재판관이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는지, 자신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대중을 염두에 두고 그리한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글이 실체적 진실에 터하지 않은 훈계조의 선동문임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그런 주장과 선택의 배후에는 공포와 불안, 적어도 그것을 이용하려는 심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공포와 불안은 문제를 과도하게 의식하도록 조종합니다.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조직을 전제하고, 실제로 미미한 수준에 지나지 않는 힘을 부풀림으로써 의도적으로 전선을 형성하게 합니다. 바로 이것이 “적대시”라는 병리적 정서 반응reaction입니다.

 

정반대의 경우가 “등한시”입니다. 문제를 소홀하게 여기거나 문제에 무관심함으로써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병리적 정서 반응입니다.

 

적대시도 등한시도 문제에 대한 과민한 반응입니다. 반응은 문제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병적인 행위입니다. 등한시는 외면의 전형입니다. 적대시는 외면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 또한 외면입니다. 있는 그대로 문제를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일까요? 적대시와 등한시의 경계에 있는, 바로 이것입니다.

 

직시.

 

직시는 과대화도 과소화도 하지 않은, 고요하고 맑은 건강한 감응response입니다. 감응은 문제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려는 치유적인 행위입니다. 감응이 문제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은 그것을 긍정적으로 판단한 데서 나오지 않습니다. 부정적으로 판단하지 않은 데서 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부정 판단도 긍정 판단도 하지 않은 데서 옵니다. 모든 판단을 멈추고 그냥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직시입니다. 판단을 멈춘 마음은 고요하고 맑습니다. 고요하고 맑은 마음은 문제의 불투명성을 그대로 끌어안습니다. 장 아메리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까닭이 바로 이 경계사건을 일으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적대시와 등한시의 모순이 그에게는 은산철벽銀山鐵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안타까움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은산철벽 앞에 서보지 못한 자들의 싸구려 중도中道가 끼치는 해악을 우리는 너무나 처절하게 목도해왔기 때문입니다. 최고 경지의 대승불교라 자부하는 대한민국 불교 조계종이 세월호사건 직후 왕생극락 기원하는 현수막이나 내걸면서 붓다의 길을 따른다고 떠드는 것이 극명한 예입니다. 차라리 찰나마다 은산철벽에 부딪치며 피 흘리는 장 아메리의 비애가 숭고를 넘어 장엄에 육박하는 진실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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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의 과정에서 몸은 갈수록 질량이 되며, 갈수록 에너지를 잃는다·······(77쪽)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세우기 전까지 질량과 에너지는 본질이 전혀 다른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질량과 에너지는 동등성equivalence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물질이 다른 물질로 변할 때 질량이 줄어들면서 에너지가 되는데 그렇게 발생되는 에너지에 대한 방정식이 바로 저 유명한 E=mc²입니다(E는 에너지의 양, m은 감소된 질량 값, c는 광속).

 

여기서 동등성equivalence의 문제를 조금 더 엄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 동등성을 지닌다는 것은 상당相當하다는 것입니다. 동일Oneness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입자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한 빛에서 입자와 파동은 동일한 것이 아님과 같은 이치입니다. 세계의 진실은 완전히 쪼개지지도 완전히 포개지지도 않는 비대칭적 대칭으로 드러납니다.

 

장 아메리가 질량과 에너지를 말한 것은 일종의 유비analogy이면서 또한 유비가 아닙니다. 100% 질량이 시체임을 생각하면 인간의 생명 과정에서 질량성이 증가할수록 에너지성이 감소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진실입니다. 인간 생명에서 질량과 에너지는 훨씬 더 광활한 내러티브를 품고 있음 또한 진실입니다. 그 내러티브가 장 아메리의 고뇌를 깊게 합니다.

 

에너지로서 인간 생명은 자유·평등·행복의 추구와 구가로 나타납니다. 자유·평등·행복 추구와 구가가 위축되는 것이 질량이 되는 것입니다. 질량은 그러므로 억압·차별·착취의 결과입니다. 장 아메리가 말하는 늙어감에는 당연하게도 개인의 생물학적 노화 넘어 사회적 부조리에 따른 ‘산화酸化’가 포함됩니다. 그의 언어가 신랄해질 수밖에 없는 소이입니다.

 

250명의 생떼 같은 목숨을 끊어놓고도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가족들에게 종북이니 세금도둑이니 하며 날뛰는 불의한 자들의 에너지가 넘칠수록 의로운 사람들은 질량이 되어갑니다. 국가를 사적 도구로 전락시킨 매판집단의 에너지가 강할수록 자주시민은 질량이 되어갑니다. 344번 째 2014년 4월 16일 오늘 우리는 얼마만큼 에너지이며 얼마만큼 질량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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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5-04-05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0% 질량이 시체라는 말은 인상적입니다. 질량과 에너지라는 자연과학의 가치중립적인 개념이 인간사회를 설명할 때는 하나는 부정적인 의미로,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는군요. 아메리의 원문을 읽어보아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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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가는 사람에게 세상이 등을 돌린다는 우리의 말은 진실이다.(74쪽)

 

비교적 가깝게 지내는 40대 중반 후배와 최근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새로 구상한 사회적 시도에 관해 언급했더니 그는 대뜸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이, 형님! 지금 연세가 얼마신데······. 아무도 주목하지 않아요. 전면에 나서지 마시고 뒤에서 지도만 하세요.”

 

취중이긴 했지만 그의 말은 분명히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잠깐 서늘한 생각에 잠길 즈음, 음식점 대형 TV 화면은 노래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운 지절거림과 춤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운 우줄거림을 장착한 아이돌그룹으로 어지러이 채워지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저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판 과두寡頭 ‘근본 있는’ 늙은이들-엄밀히 말하면 이들은 늙은이가 아니다-과 그 떨거지의 관음증을 만족시키기 위해 대중문화 전반이 기획 작품인 젊은, 아니 어린 기능인들의 학예회 판으로 변한 이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늙어가는 ‘근본 없는’ 것들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늙어가는 ‘근본 없는’ 것들은 돈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늙은이에게만 있을 수 있는 지혜·기품은 “개나 주어버려”야 할 것이 된지 오래입니다. 늙은이에 대한 존경이 사라진 세상에서 멘토는 그저 대박의 과외교사로 고용됩니다. 늙은이의 따끔한 꾸짖음에 “헐~”로 대응하는 세상에서 힐링은 그냥 “네가 최고다”를 되뇌는 아첨의 기술입니다. 늙은이는 경로석으로 격리됩니다. 늙은이는 달랑 1500원 들고 한의원 가면 풀코스(!) 치료 받는 박리다매 상품으로 처리됩니다. 급기야 대학에서 문과가 폐지되듯 늙은이는 세상에서 폐지됩니다.

 

세상에서 폐지된 늙은이는 자신을 폐지한 세상에 도착적으로 매달립니다. 자신을 폐지한 세상이 자신을 지켜왔고, 지키고 있으며, 지켜갈 것이라 굳게 믿습니다. 이 뒤집힌 신앙은 정치폭력집단을 형성합니다. 자신이 늙어가는 과정을 훼절하고 기만하며 수탈하는 불의한 매판독재세력의 주구 노릇을 자청합니다. 늙은이는 이렇게 자신의 늙어감에 예의를 표하고 품위를 지켜줄 인간다운 세상 만드는 일에서 등을 돌립니다. 마침내 늙은이는 스스로에게서 등을 돌립니다. 불치병으로서 늙어감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적어도 이것은 대한민국에서 현재 분명히 일어나고 있는 잔혹사건입니다. 늙어가는 사람에게서 세상이 등을 돌리는 것이 보편적 진실인 그 이상으로 대한민국에서는 늙어가는 사람이 세상에서 등을 돌립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등을 돌리는 늙어가는 사람이 늙어감에 대한 장 아메리의 말을 알아들을 리 만무합니다. 정녕 등을 돌리는 대한민국을 똑바로 보는 늙어가는 사람만이 그 뼈 시림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결국 늙어감이란 시간 경과에 따른 생물학적 사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직면하고야 맙니다. 늙어감은 정치경제학적 공간 사건이기도 합니다. 아니 그 의미가 더 중요하거나 본질적입니다. 매판독재분단세력이 자행하는 억압과 착취의 대상이면 그것이 바로 늙어가는 사람입니다. 졸지에 올라버린 담뱃값에 스트레스 받는 노동자면 25세라도 늙은이입니다. 세금 면제로 부를 더 축적한 재벌총수면 75세라도 젊은이입니다.

 

이제 모두에 말씀드린 제 후배의 말은 이렇게 고쳐야 합니다.

 

“어이쿠, 형님! 지금 때가 어느 땐데요······. 아무도 나서지 않아요. 전면에 대의 내걸지 마시고 뒤에다 슬쩍 장식만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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