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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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나이를 먹어 가면 갈수록 살덩이라는 질량이 되어버리고 힘을 잃어버리는 것처럼,·······정신 역시 마찬가지다. 정신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둔중하고 무거워지는 나머지 새로운 표시의 도전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154쪽)

 

인근에 사시다가 제법 먼 경기도 어느 도시로 이사 가신 뒤에도 한사코 제 진료실을 찾아오시는 70대 여성 한 분이 계십니다. 침 치료 중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눈 대화입니다.

 

“무엇으로 소일하세요?”

“TV 끌어안고 살아요. 하루 종일 종편 틀어놓고 정치 얘기 보면서 열 올렸다 내렸다 해요. 난 야당 싫어요. 무조건 박근혜 대통령 편이에요. 국가가 중요하잖아요? 입대하는 오빠한테 엄마가 울면서 여비를 태극기로 싸주시던 어릴 적 기억이 지워지지 않아요.”

“자신의 삶 안에서 생각하기 마련이지요. 제 증조부는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항일의병장이셨습니다. 조부는 30년 넘게 일본경찰에 쫓겨 다니셨죠. 집안이 쫄딱 망했습니다. 제가 독립군 때려잡던 일본군 장교 딸 편을 들 수 없는 이유지요.”

“·······”

 

그 분이 제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분명히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고 설득하거나 비판하려 했다면 그 분은 저를 반국가적 인물, 심지어 빨갱이쯤으로 여겼을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특별히 이상한 분 아닙니다. 대한민국 노인의 평균적인 모습입니다. 왕과 국가를 동일시했던 봉건적사고 틀을 여전히 지닌 채 살아가는 대한민국 노인, 그들은 21세기의 화석입니다. 화석이 자주와 민주라는 “새로운 표시의 도전”을 받아들일 리 없습니다.

 

노인의 보수화, 아니 노화의 또 다른 이름인 보수화는 보편적 현상입니다. 유난히 대한민국에서 극단적인 양상을 띠는 것은 민주주의 혁명을 가로막고 등장한 식민지 경험에서 일차적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식민지교육을 받은 세대가 어버이연합 따위로 상징되는 대한민국 노인의 주류적 정체성을 구축하였습니다.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한 저주의 예언은 적중했습니다.

 

“일본은 패했지만 조선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이 제 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보다 훨씬 더 긴 세월이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국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지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 조선인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지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우리사회 지배층과 그 마름집단에서 우리는 아베 노부유키의 아바타를 수없이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 아바타들은 매판의 자본을 거머쥐고 떵떵거리며 삽니다. 사회 각계의 뜨르르한 명사celebrity가 되어 명예를 누리고 있습니다. 식민 지배를 대놓고 예찬합니다. 독립혁명의 전사들을 테러리스트, 여자 깡패라 비아냥거립니다. 단 한 번도 독립혁명에 가담한 적 없는 이승만을 국부로 치켜세웁니다. 역사 교과서를 날조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의 보수 세력은 자기 나라를 위해 역사를 왜곡하건만 대한민국 보수 세력은 자기 나라를 침략하고 지배했던 나라들을 위해 역사를 왜곡합니다. 이처럼 비참한 국가적·국민적 노예노화奴隸老化는 지구상에 다시없을 것입니다.

 

이 치욕의 세월을 견디고 마침내 이겨내려면 우리 부디 늙지 말아야 합니다. 늙지 않으려면 “새로운 표시의 도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새로운 표시의 도전”을 받아들이려면 진실의 경이로움 앞에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는 사람이 스스로를 깨뜨릴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깨뜨릴 수 있는 사람이 불의한 세상을 깨뜨립니다. 할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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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04-08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 아메리의 책 일고 좀 멍했드랬습니다.
내가 유태인 수용소에 있었더라면 과연 버텨냈을까....
 
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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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각종 표시는 그것을 창조한 사람만이 알 수 있다.(145쪽)

 

구청장에 당선된 사람의 개인 금고가 당선 직후부터 금괴와 5만 원 권 지폐 다발로 속속 들이차는 장면을 일전 어느 TV 드라마를 통해 보았습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어머니에게 그 부도덕한 정치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찍어준 도장 하나로 떼돈 벌게 된 사람들이 감사 표시로 주는 것이니 아무 문제없어요.”

 

차관급 단체장이 이 정도라면 장관급 단체장은 어떻겠습니까. 장관은 어떻겠습니까. 국회의원은 어떻겠습니까. 하물며 대통령은 어떻겠습니까. 드라마 하나로 이 무슨 비약의 사다리냐, 이의를 제기하실 분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오늘의 대한민국에서는 말입니다. 정계와 재계는 이렇게 야합해서 떼돈을 벌어들여 지상낙원을 누리며 살고 있고 그 가운데 작은 일부, 그러나 물경 1,850조란 돈을 국외로 빼돌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이 “창조한” 문서·사업·법령·제도 등 국정 전반에 나타나는 “사회의 각종 표시”를 일반 국민은 알지 못합니다. 의문을 제기하면 빨갱이라 욕하는 사람은 본디 그렇다 치고 양식깨나 있는 사람조차 음모론이라고 꾸짖으니 당최 설 자리가 없습니다. 알고 싶어 하지도 못합니다. 무지는 더욱 깊어집니다. 수탈은 더욱 강화됩니다.

 

수탈의 대표적인 “표시” 가운데 하나가 토건입니다. 4대강사업이 그렇고, 주택·도로 건설이 그렇고, 주소 변경 사업이 그렇습니다. 국민의 쾌적하고 행복한 삶을 위한 것이라고 명분을 내걸지만 실제로는 오직 그 프로젝트를 만든 자들의 돈벌이 수단일 뿐입니다. 예컨대 MB정권이 주소 변경 사업을 벌였을 때, 저는 대체 무슨 이유로 바꾸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바뀐 주소가 내게 무슨 유익과 편의를 가져다주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렇게 큰일을 일으키려면 어마어마한 돈이 들 것이고, 누군가는 떼돈을 벌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그 대가로 어마어마한 돈을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만은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분명한 것은 아직도 바뀐 새 주소를 잘 모른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저만 이럴까요?

 

수탈의 또 다른 대표적 “표시”는 민영화입니다. 민영화라는 이름을 모르는 국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민영화의 이름을 아는 바로 그 국민 거의 모두가 민영화의 실체를 모르고 있습니다.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민영화는 국민의 재산을 개인에게 팔아먹는 것입니다. 얼마에 팔리는지, 받은 돈이 주인인 국민에게 돌아오는지 아는 국민은 거의 없습니다. 아니. 민영화의 실체를 알지 못하므로 그 뒷이야기에 관심조차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공공성이 사라지고 나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러다가 종당 정부까지, 아니 나라까지 팔아먹는 것은 아닌지 생각할 리 없습니다. 매판세력이 나라 팔아먹는 골을 불과 100여 년 전에 목도하였고, 35년 동안 식민지를 겪었으며, 이른바 해방 후에도 여전히 그 매판세력 적자들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국민답게 너무나도 극심한 무력무지 상태에 빠져 헤어나질 못합니다.

 

지금 우리“사회의 각종 표시”는 오직 “그것을 창조한” 매판집단만이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그것은 완전한 진실입니다. 그 완전한 진실만이 투명한 것으로 모든 국민에게 선포됩니다. 그밖에는 어떠한 것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것만이 긍정되어야 합니다. 그것만으로 도배된 정보망 안에 있어야 안전합니다. 안전의 협박은 국민을 공포·불안과 우울로 몰아넣습니다. 공포·불안과 우울에 갇힌 국민은 옴짝달싹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늙어감입니다. 357일 째 저 어둡고 차가운 바다에서 올라오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을 놓아두고 우리 이렇게 속절없이 늙어가도 되는 것일까요? 이렇게 4월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영원히 저주로 남아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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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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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faux, c'est la mort.(121쪽)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기우제는 100% 성공합니다. 왜냐하면 비가 내릴 때까지 계속해서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가볍게 들으면 실소 흘리고 지나갑니다. 정색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의 의문이 떠오릅니다. “이것을 과연 기우제라고 할 수 있는가?” 그 기우제를 지내지 않았더라도 때가 되어 올 비가 온 것이라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면 답은 자명해집니다. 이 합리성은 객관적 사실에 입각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세계관적 표현일 따름입니다. 자연과 인간은 하나인가 둘인가 하는 범주적 질문 앞에서 답 하나는 옳고 다른 하나는 그르다 말할 수 없습니다. 북아메리카 원주민에게는 기우제가 없었다면 비도 없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진실의 관점에서 보면 둘 다 옳고(皆是) 둘 다 그른(皆非) 것입니다. 둘 다 옳은 까닭은 둘 다 진실 아닌 것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둘 다 그른 것은 진실의 전체를 모두 말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둘 다 그름의 영토를 줄이고 옳음의 영토를 넓히려면 자기 경계를 넘어 상대의 진실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가로지름의 실재the Real를 얼마나 어떻게 구현하느냐에 따라서 천지가 갈립니다.

 

Le faux, c'est la mort.

 

장 아메리가 인용한 장 폴 사르트르의 말입니다. 어떤 문맥에 이 문장이 놓여 있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진의를 정확히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프랑스어임을 감안한 고심의 흔적이 보이는 번역자의 번역도 의미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직역하면 “오류, 그것은 죽음이다.”입니다. 간단해서 복잡한 속살을 알기 어려운 대표적인 문장입니다. 앞에서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기우제 이야기를 먼저 꺼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죽음은 삶의 영역에 있는 사람이 쓸 수 없는 말입니다. 죽음(의 실상)을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설혹 안다고 해도 산 사람이 자기 죽음을 언급하는 것은 그 자체로 오류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죽음을 염두에 두는 것도 실은 거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직 죽음에 ‘관하여’ 말하고 생각할 뿐입니다. 죽음에 ‘관하여’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타인에게서 들려오는 풍문일 뿐입니다. 자기 자신의 죽음에 ‘관하여’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삶의 끄트머리, 죽음에 육박한 최후 시각, 그러니까 ‘23시 59분 59초’에 느껴지는 경계 감각입니다. 문제는 사실상 이 경계 감각입니다.

 

사이후이死而後已.

 

제갈량諸葛亮의 후출사표後出師表에 나오는 말입니다. 처음 원문을 보았을 때, 저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죽음이란 끝난 다음(일)일 뿐이다.” 따라서 죽음이라는, 산 사람 영역 밖의 생각에 홀리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런 뜻이라고 말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이런 해석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최근 우연한 기회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해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죽은 뒤에야 그만둔다(멈춘다).” 아, 그렇기도 하겠다, 싶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런 표현과 새김은 오류입니다. 죽은 뒤에는 그만둘 주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갈량도 해석자들도 모를 리 없습니다. 수사학적 표현임은 물론입니다. 그러고 넘어가려다 다시 정색하고 곰곰 생각합니다. 삶의 끄트머리, 죽음에 육박한 최후 시각, 그러니까 ‘23시 59분 59초’에 느껴지는 경계 감각이 다만 그뿐일까, 하는 의문이 솟아오릅니다. 말하자면 삶의 마지막 감각이 죽음의 첫 감각에 가닿을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 생각은 북아메리카 원주민이 기우제를 지내는 마음과 같은 유類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어떤 연속처럼 삶과 죽음의 어떤 연속 또한 진실의 분명한 특이점 아닐까요?

 

Le faux, c'est la mort.

 

정색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저는 맹골수도의 아이들에게 죽음의 바다를 건너 지금의 역사로 돌아오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수사학적 표현이 아닙니다. 삶과 죽음에 어떤 분명한 연속이 있다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 마음 실재의 요청입니다. 여전히 죽음은 산 사람에게 오류입니다. 산 사람이 죽음을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저는 아이들의 죽음을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삶의 마지막 감각으로 아이들의 죽음 첫 감각에 가닿고자 하는 것입니다. 더없이 절실하고 거룩한 거래입니다. 이 거래가 변화를 낳을 것입니다. 아니 새로움을 지을 것입니다. 산 사람의 삶이 광활함the Spaciousness으로 나아가는 꼭 그만큼 실재는 현실이 될 것입니다. 실재가 현실이 되는 이 과정에서 우리는 Le faux, c'est la mort.라는 논리와 철학의 문장이 다음과 같은 정치경제학비판의 문장으로 변화되어 다시 태어나는 것을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Le faux de Corée, c'est la mort lycéene 250 de 2014. 4. 16. 어떻게 말하고 생각하고 변화하더라도 죽음의 오류를 진실의 화엄으로 끌어안는 것은 산 사람의 숙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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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고향은 존재의 세계가 아니라 소유의 세계·······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존재는 가진 게 얼마나 되느냐는 소유의 문제를 밝힘으로써 비로소 주어질 뿐이다.·······소유의 사회는 개인의 자율성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소유해야만 한다는 요구의 압력 아래, 개인은 타인의 시선 앞에서 자신의 뜻을 펼쳐나가는, 자기만의 전망을 추구하는 인격체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소유의 세계는 나날이 자신을 새롭게 기획해보는 아웃사이더를 갈수록 더는 허락하지 않는다.(108-110쪽)

 

아무리 자본에 제압된 세상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돈에 대한 탐욕이 덜해야 할 직업이 있습니다. 법조계, 종교계, 그리고 의료계. 저는 이 세 계통과 직간접적인 인연을 맺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비교적 소상히 그 내막을 아는 편입니다. 적어도 이 땅에서는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이야기입니다.

 

법조계는 이미 삼척동자도 다 아는바 권력을 통해 돈을 대놓고 노리는 일등 집단이니 췌론의 여지가 있을 리 없습니다. 법의 힘으로 정의의 문제를 다루는 자들이 돈에 눈이 멀면 무슨 짓까지 저지를 수 있는가, 이 땅의 검사, 판사, 변호사들이 모든 전형을 보여주었고, 보여주고 있으며, 보여줄 것입니다.

 

종교계는 가장 고결한 언어로 추악함을 가리고 자신들이 숭배하는 신성한 존재를 돈에 팔아넘긴 가장 비루한 집단입니다. 영혼과 구원의 문제를 다루는 자들이 돈에 눈이 멀면 무슨 짓까지 저지를 수 있는가, 이 땅의 목사, 신부, 승려들이 모든 전형을 보여주었고, 보여주고 있으며, 보여줄 것입니다.

 

의료계는 과학이라는 사이비 진리 담론에 빙의되어 제약회사, 의료기기회사의 하수인 노릇하며 돈에 인격을 파는 첨단 영매 집단입니다. 생명과 건강 문제를 다루는 자들이 돈에 눈이 멀면 무슨 짓까지 저지를 수 있는가, 이 땅의 의사들이 모든 전형을 보여주었고, 보여주고 있으며, 보여줄 것입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소유가 늘어갈수록 영혼은 파리해진다.” 이 땅의 부자는 돈 없는 사람을 ‘근본 없는 것’이라 멸시합니다. 그럼 이 땅의 부자에게 ‘영혼 없는 것’이라 하면 존경의 표시겠군요. 근본 없어도 사람이지만 영혼 없는 것은 당최 사람이 아닙니다. 결국 소유가 사람을 야차로 만들었습니다.

 

야차의 세상은 다르게 사유하는 독립된 주체의 자율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돈 앞에서 무색투명한 클론만 일방통행로를 행진할 뿐입니다. 제가 한의사라 말하면 으레 묻습니다. “어느 동네에서 하십니까?” 매출이 얼마나 될지 가늠해보겠다는 말입니다. 돈이 아니면 묻지 않습니다. 오직, 돈만 궁금합니다.

 

생명과 진실엔 아랑곳없이 돈만 궁금한 권력은 세월호‘사건’을 교통‘사고’로 왜곡하고 그에 다른 ‘보상’ 수준을 정합니다. 권력의 주구는 세월호사건 유족한테 퍼줄라고 담뱃값 올렸다 떠들어댑니다. 다른 모든 가치를 먹어치운 돈의 식욕은 언제쯤 멈출까요? 제 주인을 먹어버리고 배가 터진 바로 그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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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적 모순일지라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죽음은 애초부터 우리 안에 숨어서 애매함과 모순이 생겨날 여지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나는 나인 동시에 내가 아니다.·······부정은 곧 우리 자신의 긍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낮과 밤이 여명 속에서 서로 맞물리듯이.(93-94쪽)

 

언제 어느 때든, 아니 결정적일 때는 반드시 장 아메리 앞에 나타나는 난제가 다름 아닌 모순 또는 이율배반입니다. 현실 삶 속에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이므로 그의 언어는 “논리적 모순일지라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식의 방어적 평서문입니다. 그리고 “부정은 곧 우리 자신의 긍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식의 유보적 의문문입니다. 끝내 ‘일지라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림자 안에 있는 유럽인에게는 A가 참이면 non A는 반드시 거짓이어야만 합니다. 이것만을 인정하는 이치二値논리를 저들은 표준논리라고 합니다. “나는 나인 동시에 내가 아니다.”가 평온하게 삶의 한가운데로 들어올 리 없습니다. 장 아메리의 고뇌는 늙어감 자체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늙어감에 대한 사유 논리에 이미 고뇌의 DNA가 심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아시아인은 일찍부터 A가 참일 때 non A도 참인 것이 진리의 기축임을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세워진 다치多値논리에 따르면 논리적 모순‘일지라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논리적 모순‘이므로’ 기꺼이, 그러니까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모순이 이미 논리 안에 들어와 있으므로 받아들이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본디부터 있었으니 말입니다.

 

장 아메리에게 낮과 밤은 여명 속에서 맞물리지만 아시아인에게 낮과 밤은 여명 속에서만 맞물리는 것이 아닙니다. 한낮에도 밤이 들어와 있습니다. 한밤에도 낮이 들어와 있습니다. 삶과 죽음 또한 그러합니다. 늙어감에 대한 장 아메리의 사유에 아시아인의 이 논리가 흘러들어간다면 과연 어떤 내용을 담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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