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죽음과 관련해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도’를 ‘는’으로 바꿈-인용자) 사회 전체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풀리지 않은 채 남을 따름이다. 이 문제를 책임 있게 다뤄야 할 당국은 오히려 이미 깨끗이 처리된 것처럼 뻔뻔하게 처신할 뿐이다.(177쪽)

 

이명박 이후 매판세력 떼거지가 지니는 윤리적 특성을 한 마디로 말하면 ‘뻔뻔하다’일 것입니다. 조금 더 분명하게 한다면 ‘대놓고 뻔뻔하다’가 되겠지요. 이처럼 기막힌 우리말이 있다는 사실에 고마운 마음이 일다가 대뜸 아픈 생각 하나가 솟아올랐습니다. “지난 1500년 동안 대체 얼마나 매판세력 떼거지가 설쳐대어 왔으면 이다지도 기막힌 언어를 민중이 조탁해냈을까?”

 

‘뻔뻔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부끄러워할 만한 일에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염치없이 태연하다’입니다. 이 설명을 들으면 찰나적으로 그려지는 얼굴들이 있습니다. 국민을 죽이고도 태연 넘어 파안대소 날리던 소시오패스. 소시오패스가 미진해서 활짝 웃다가 돌연히 악어 눈물 흘리던 연기파 사이코패스. 이름 석 자 대지 않아도 그 뜨르르한 면상들이 선연하게 떠오릅니다.

 

오늘로 365일째를 맞은 세월호사건. 여기 연루된 대놓고 뻔뻔한 자들이 어디 하나둘이리요만, 세월호사건에 대한 정부와 언론의 고의적 호도를 적극 두둔하고 유족을 떼쓰는 사람들로 매도한 자, 세월호특별법 제정 자체를 반대하고 ‘일베’ 글을 퍼 나른 자를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으로 들이민 자들과 그 당사자만큼 대놓고 뻔뻔한 자들이 다시 있을 것입니까?

 

이 자들은 어느 신문의 표현대로 ‘트로이 목마’로 들어와 특조위를 망하게 하려는 야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자들이 노리는 바는 특조위가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세월호사건이 마치 “깨끗이 처리된 것처럼” 끝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각에도 증거를 인멸하고 진실을 훼손하는 일에 골몰하고 있을 것입니다.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고 사는 자들의 이 대놓은 뻔뻔함이여!

 

대놓고 뻔뻔한 자들의 세상에서 염치를 아는 사람들은 그러면 어찌 해야 할까요? 태연하지 않아야 합니다. 평소와 달라야 합니다. 착해서 버림받는 사람의 어리바리를 버려야 합니다. 이제는 싸워야 합니다. 바르고 결곡한 전사로서 우락부리를 마다하지 않아야 합니다. 맹골수도에서 자식 잃은 부모가 거리로 나섰듯 우리 모두 인문전선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인간이기 위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보라, 부자의 삶은 가난한 자의 빈곤한 그것과 엄청나게 다르다. 그렇다면 거듭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죽음 앞에서 평등하다고 하지만, 죽어가는 과정에서조차 평등하지 않다.·······돈만 있다면 죽음도 훨씬 더 편안하게 맞는다.(177쪽)

 

거대 부역언론은 한사코 덮고 비틀었지만 1년 전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었습니다. “아이들 부모 가운데 국회의원 한 명만 있었어도 저렇게 했을까?” 실제로 권력과 그 주구들은 아이들 부모의 가난을 비아냥거렸고 배·보상금 문제를 띄우며 시체장사 운운하였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엄마가 준 용돈을 되돌려준 아이가 있었습니다. 새로 사준 운동화를 끝내 신지 않은 아이가 있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엄마 고생 면하게 해드리겠다 약속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맞습니다. 그들은 가난했습니다. 가난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수백 명 죽여 봤자 가난한 부모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을 계산했을 터입니다. 배·보상해 봤자 부자들의 그것에 비해 푼돈일 것임을 계산했을 터입니다. 가난은 개인적 무능으로 몰고, 진상규명 요구하면 무능한 자들이 떼쓴다고 몰면 된다는 계산을 했을 터입니다.

 

살아서는 가난했던 아이들의 꿈을 모독하던 국가가 가난을 표적 삼아 죽여 놓고 그 죽음을 다시 모독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을 때 아이들한테 한없이 미안하게 만들었던 국가가 눈앞에서 아이들을 죽여 그 부모의 가슴을 다시 갈기갈기 찢고 있습니다. 과연 전능합니다.

 

가난한 사람의 삶을 털어 부자에게 돈을 더해주는 국가가 가난한 사람의 죽음까지 털어 부자에게 편안을 더해줍니다. 매판자본이 성육신한 이 국가는 이렇게 신이 됩니다. 가난한 사람은 ‘완전’ 고통스럽게 살다가 ‘완전’ 고통스럽게 죽어갈지어다. 신의 거룩한 계명입니다.

 

삼백예순네 번째 날이 밝아 삼백예순네 번째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휘파람 불며 즐거운 ‘이탈’을 준비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 무리의 행복한 휘파람은 가난한 사람들의 살해를 지시하는 잔혹한 시그널 음악임이 분명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간에 저항해서도 안 되며, 시간의 꽁무니를 따라다녀도 안 된다.·······

·······시간으로 파괴될 위험에 처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바로 이 시간으로써 보존되는 것이 아닐까.(165쪽)

·······그는 영웅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일 뿐이다. 그리고 늙어 죽어가는 그 누군가와 마찬가지로 영웅적이다.(170쪽)

 

시간에 관해 물리학이나 철학의 언어를 동원해 낯설게 말하는 것은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다지 재미나 의미가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시간 속에서 우리가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주의해서 살펴보면 흐르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변화, 우리의 흐름은 두 측면에서 진행됩니다. 하나는 자기 동일성同一性의 측면입니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같은가, 하는 문제입니다.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합니다. 같기만 하지도 않고 다르기만 하지도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내가 변하거나 시간이 흐름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시간 속에서 변하기도 하고 변하지 않기도 하는 것입니다. 같다와 다르다가 공존하는 전체 진실은 결국 다르다, 그러니까 변한다가 맞습니다. 변화를 허락하는 ‘기다림’이 시간인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의 자기 단일성單一性의 측면입니다. 나는 나만의 나로 그 경계를 유지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나를 나이게 하는 경계는 동시에 남이 내 속으로 들어오는 입구이기도 합니다. 내가 빠져나가 남이 되는 출구이기도 합니다. 나는 나이며 너입니다. 시간이 흘러 내가 너이거나 시간이 흐름에도 내가 나인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시간 속에서 나이기도 하고 너이기도 한 것입니다. 나와 네가 공존하는 전체 진실은 결국 내가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다가 맞습니다. 소장消長을 허락하는 ‘기다림’이 시간인 것입니다.

 

‘기다림’으로서 시간은 흐르지 않습니다. 쌓입니다. 쌓이는 시간 속에서 인간이 변화와 소장을 깨달아 상상常相과 아상我相을 깨뜨리는 것이 진리의 구조이며 운동입니다. 그러지 못할 때 시간은 흘려버려집니다. 흘려버려지는 시간의 앞뒤에서 인간의 괴로움이 솟아오릅니다.

 

이제 이틀 남짓 ‘지나면’ 4월 16일입니다. 우리에게 363일의 시간은 쌓인 것일까요, 흘려버려진 것일까요? 아이들을 죽인 우리 못된, 못난 어른들은 변하였습니까, 그대로입니까? 아이들을 죽인 우리 못된, 못난 어른들은 자신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있습니까, 여전히 알량한 나 자신에서 머무르고 있습니까? 지금 이 순간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은 “그저 누군가일 뿐”인 우리 하나 하나가 스스로 변하고, 스스로 깨뜨려 이루어내는 각자 자신의 “영웅”이 아닐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sub specie aeternitatis', 곧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려 한다는 것은 아무 것도 보지 않겠다는 태도·······다.(164쪽)

 

하루살이가 나비와 놀았습니다. 날이 저물었습니다. 나비가 하루살이에게 말했습니다. “내일 또 놀자.” 하루살이는 고개를 갸우뚱 했습니다. 나비가 참새와 놀았습니다. 계절이 저물었습니다. 참새가 나비에게 말했습니다. “내년 봄에 또 놀자.” 나비는 고개를 갸우뚱 했습니다.

 

하루살이에게 내일은, 나비에게 내년 봄은, 인간에게 영원과 같습니다. 기껏 살아야 백 년 남짓인 인간이 “영원의 관점”을 지닌다는 것은 당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럴 수 있다 하여도 이미 그것은 비인간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오직 찰나적으로 나타나는 영원의 홀로그램을 얼핏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관점을 지녔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 경계를 넘어 직관이나 상상으로 떠드는 영원이라면 허영 또는 탐욕임에 틀림없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천국·영생, 불교가 말하는 극락·열반 대부분 이런 차원에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허랑하게 영원을 말하기 때문에 앞마당을 세속 권력과 자본주의에 내주고도 반성할 줄 모릅니다. 영생을 누릴 천국이 본향이라면서, 이 세상은 나그네 삶이라면서, 독재 세력과 한 통속이 되어 호가호위하는 대형교회 목사와 고위직 신부들을 우리는 익히 보아왔습니다. 도를 깨쳤다면서, 살아 있는 부처라면서, 매판 세력과 한 통속이 되어 수탈체제에 부역하는 ‘큰스님’들을 익히 보아왔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관념 언어에 자신을 일치시킨 자들 때문에 빚어진 비인간 이야기입니다.

 

긴 세월 동안 거짓된 “영원의 관점”을 전유해왔던 종교가 그 패권을 자본에게 넘긴 오늘날, 감당할 수 없이 많은 돈을 가진 극소수 사람들이 최상품의 거짓된 “영원의 관점”을 소유한 채 저주의 역사를 쓰고 있습니다. 가령 대한민국은 소득 상위 10%가 전체소득 48.05%를, 하위 40%는 불과 2.05%만을 가져가는 사회입니다. 그 격차는 양극으로 갈수록 더욱 벌어집니다. 대한민국 상위 1%는 그 감당할 수 없이 많은 돈과 자신을 일치시킵니다. 그 영원한 돈의 은총으로 그들만 모든 것을 압니다. 그들이 아는 것만 진실입니다. 그 영원한 돈의 은총으로 그들만 모든 것을 합니다. 그들이 하는 것만 선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비인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비인간이 인간을 잡아먹고 있습니다. “영원의 관점”을 영원히 내려놓는 길만이 인간의 존속 조건일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0년 동안 정신적으로 깨어 있는 삶을 살려 시도해왔다. 오늘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30년 동안 그저 이런저런 착각에만 빠져 살았다.(163쪽)

 

현대사회는 중독사회입니다. 중독사회는 자본주의의 요람입니다. 자본주의는 중독에 ‘빠져 있는’ 영혼을 빨아먹고 자라 리바이어던이 됩니다. 리바이어던은 결국 인간사회를 파멸시킬 것입니다. 파멸을 향해 질주하는 현대사회에서 ‘깨어 있는’ 인간이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중독 문제를 깊이 말씀드리면서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중독이라 하면 대뜸 알코올이나 마약 같은 물질을 떠올리고 거기에 ‘빠져 있는’ 상황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중독의 핵심은 다른 데 있습니다. 핵심은 대상 물질이 아닙니다. 습관도 아닙니다. 고통을 줄이고 즐거움을 찾는 과정에서 있는 그대로의 몸 감각을 떠나 격정상태를 만족시키는 보상으로 나아가는 병리적 반응운동 과정이 중독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성에 상처를 입은 사람은 그 부분에 대해 격정emotionalism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격정은 본디상태의 감성이 왜곡되어 지나치게 예민하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둔한 반응reaction을 하는 것입니다. 예민함은 능동적으로, 둔함은 수동적으로 본디상태의 몸과 함께 외부 자극에 감응response하는 것을 회피하는 격정 방어 작용입니다. 격정 방어 작용은 쌍방향으로 흐릅니다. 고통에서 도망치는 쪽이 그 하나입니다. 여기서는 거짓pseudo 안도감을 보상으로 받습니다. 즐거움을 좇는 쪽이 다른 하나입니다. 여기서는 거짓pseudo 행복감을 보상으로 받습니다.

 

이 과정을 알코올, 그러니까 술을 예로 들어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술 중독은 대부분 모성애 결핍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술은 인간 시생대의 젖을 은유합니다. 술은 안도감과 행복감을 준다는 점에서 젖과 같습니다. 실제로 적정량의 술은 뇌의 GABA신경계를 활성화하여 불안을 제거하고 긴장을 완화해줍니다. 그러나 두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술은 본디상태의 몸 감각을 왜곡하기 때문에 적절하게 조절이 안 된다는 것이 그 하나입니다. 젖은 아기로 하여금 맛있게 먹고 그 감각에서 스스로 멈춘 다음 질 높은 수면을 취하게 합니다. 술은 중독자로 하여금 어느 순간부터는 맛을 느끼지 못한 채 마시는 행위에 집착해 조절 능력을 잃고 계속하다가 질 낮은 수면에 떨어지게 합니다. 술이 중독자에게 가져다주는 안도감과 행복감의 끝은 허망감이라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하여 술은 중독자의 불안과 우울을 가중시킵니다. 거짓pseudo이라 표현한 소이가 여기 있습니다.

 

젖과 술 문제를 이제 다시 너른 지평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기가 젖을 먹는 행위는 몸 감각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집니다. 맛을 못 느끼는데도, 배가 부른데도 한사코 집착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중독자가 술을 마시는 행위는 몸 감각이 죽어 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집니다. 맛을 못 느끼는데도, 배가 부른데도 한사코 집착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거짓pseudo 행위 자체에 ‘빠져 있는’ 상태입니다. 바로 이런 것을 장 아메리는 “착각에만 빠져 살았다.”고 묘사하였습니다. 장 아메리의 고백이 겸양만은 아닐 것입니다. 아픕니다. 이 아픔은 오늘 여기 우리의 아픔입니다. 우리의 착각, 우리의 중독은 무엇입니까?

 

일제의 패망으로 35년에 걸친 종살이에서 놓여났지만 군정부터 시작된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그리고 민족통일의 왜곡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런저런 착각”의 무더기를 쌓아올렸습니다. 반공, 한미혈맹, 근대화, 선진조국 창조, 안보애국, 새마을, 유신, 국론통일, 한국식민주주의, 국가보위, 민영화, 국민행복, 창조경제.......모두 다 우리에게 거짓pseudo안도감과 행복감을 심어준 중독의 도구들이었습니다. 70년 동안 이 중독에 빠져 있었음에도 각성하지 못한 우리에게 밀어닥친 참담한 결과가 세월호사건,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 여기서 우리 각자가 중독이 주는 허망감을 벗어나 스스로 치유하고, 나아가 ‘깨어 있는’ 상태를 복원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딱.

 

오늘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