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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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아메리가 『늙어감에 대하여』를 펴내고, 제4판에서 결정적인 부분을 고쳐 쓴 뒤, 스스로 삶을 마감하기까지 10년, 그 중간 어디쯤 시간에 제 인생이 서 있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삶을 사랑으로 보듬고, 존경으로 예우하며, 최상으로 매듭지은 시간의 결과 겹을 제 삶의 감각과 사유, 그리고 행동에 포개기 참으로 적절한 기회였습니다. 지난 두 달, 때로는 서성이고 때로는 가부좌 틀고 때로는 누우며 그 포갬 속에 머물렀습니다. 쪼갬이 여명을 드러냈습니다.

 

저는 이 주해 리뷰를 쓰는 동안 홀연히 향아설위向我設位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향아설위는 수운水雲선생께서 태동시키시고 해월海月선생께서 완성한 위대한 제의祭儀 혁명입니다. 단도직입으로 말하자면 하느님을 내 맞은편 벽에 세우는 것, 그러니까 향벽설위向壁設位가 아니라 내 안에 세운다는 말입니다. 절이든 기도든 나를 향하여, 내게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이 진리는 붓다께서도 그리스도께서도 이미 설파하신 것입니다. 다만 그를 따른다 말하는 자들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을 따름입니다. 하여 오늘 여기 자신을 향하여 절하는 불자도 없고 자신을 향하여 기도하는 기독자도 없습니다. 그들이 절하고 기도하는 맞은편에는 다름 아닌 우상이 서 있을 뿐입니다. 불자에게 붓다는, 기독자에게 그리스도는 실제로 모두 우상일 따름입니다. 저는 불자도 기독자도 아닙니다. 아니 그런 우상숭배자이기를 거절합니다. 어느 새벽 문득 일어나 제게 절하였습니다. 어느 새벽 문득 무릎 꿇고 제게 기도하였습니다. 비로소 거기서 저 아닌 저를, 우상 아닌 붓다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느닷없는 향아설위 향벽설위 이야기와 장 아메리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궁금하실 것입니다. 향벽설위는 이원론적 세계관의 산물입니다. 장 아메리가 저 치열함과 결곡함에도 깨부수지 못한 은산철벽이 바로 서구 이원론적 세계관입니다. 도처에 모순 감각과 역설 지향이 번득이지만, 그에게 죽음은 끝내 아我가 아니었습니다. 끝내 벽壁이었습니다. 그러면 길은 일원론에 있을까요? 이미 아시다시피 아닙니다. 제가 제게 절하고 기도함으로써 저 아닌 저를, 우상 아닌 붓다 그리스도를 만났듯, 진정한 향아설위는 불이불일不二不一의 세계관입니다. 여기가 길입니다.

 

제가 향아설위를 실행에 옮긴 것은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이 아닙니다. 사십 년 동안 축적해온 비대칭적 대칭의 사유가 변곡점에 도달하면서 일으킨 질적 전환입니다. 그 변곡점에 장 아메리라는 변수가 작용하였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프리모 레비와 함께입니다. 그들이 변수로 작용한 것은 외부에서 “습격”해오는 죽음의 문제, 그 상처에서 오는 죽음의 문제를 저와 우리 공동체가 긴급하고도 치명적인 현안으로 떠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문제의식과 제 문제의식은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같은 부분은 함께 다지고 다른 부분은 홀로 열면서 저는 제 길을 가야 합니다. 이 깨달음의 결과가 바로 향아설위입니다.

 

제게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모릅니다. 모르므로, 그저 모를 뿐이므로 갑니다, 극진히 갑니다. 희망도 지나고 절망도 지나서. 낙관도 지나고 비관도 지나서. 나도 지나고 붓다 그리스도도 지나서. 마침내 삶도 지나고 죽음도 지나서. 오직 이뿐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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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1 23: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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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2 09: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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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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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경멸받아 마땅한 조건 아래서 고른 죽음만이 부자유한 죽음이며, 때가 아닌데 선택한 죽음은 비겁자의 죽음이다.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고른 죽음은 다를 수 있다. 자유롭고, 충분히 의식했으며, 외부로부터 그 어떤 습격도 받지 않았다.” 자유죽음에 열광하는 광인의 이야기다.(202쪽)

 

우리가 아무런 이의 제기 없이 어려서부터 배운 그림그리기 방식은 먼저 그리고 싶은 대상의 경계선을 그린 다음 나중에 그 내부를 색칠해서 채워 넣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치를 정확히 따지자면 본디 사물의 경계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물의 자체 연장延長이 멈춘 곳이 경계선처럼 보일 따름입니다. 말하자면 경계선은 관념의 산물입니다. 이 관념을 기축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마치 보편적 방식인 듯 오해되고 있지만 그리스-서구 전통입니다. 동아시아나 고대헤브라이 전통은 처음부터 사물의 자체 영역을 채워 그리다가 그 연장이 멈춘 곳을 자연스럽게 경계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른바 근대화, 아니 서구화가 진행되면서 망각된 진실 가운데 하나입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 이런 이치를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인간이 유한한 생명현상으로서 그릴 수 있는 것은 삶의 내용뿐입니다. 죽음은 그릴 수 없습니다. 사후세계에 관한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나 엄밀히 말하면 죽음을 삶의 또 다른 양상으로 보는 세계관에 터한 묘사이지 죽음 자체에 관한 것은 아닙니다. 죽음이란 삶의 내용이, 그 운동이 멈춘 다음의 알 수 없는 사태입니다. 산 사람이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산 사람은 자기 삶의 마지막 모습을 선택하고 그에 따른 연장을 멈출 수 있을 따름입니다. 장 아메리가 부자유한 죽음, 비겁한 자의 죽음, 자유죽음의 선택에 관하여 말한 모든 것은 그리스-서구 전통입니다. 장 아메리가 나중에(이 책의 4판 서문에 언급하고 내용에서도 자유죽음 문제를 바꾼 것과 『자유죽음』을 펴낸 것이 1977년이고 그 이듬해 그는 이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선택한 자유죽음이란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 시공간에 일어나는 생명사건을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비록 자신의 전통에 따른 어법을 구사했지만 장 아메리가 실제에서는 죽음의 자유를 구가한 것이 아니라 삶의 최종적 자유를 구가한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있는 근거가 있어 다행입니다.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가 늙어감에 대하여 그토록 단호하고 결곡한 어법으로 일관한 것은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였습니다. 그토록 사랑한 인생이기에 마지막 사건의 선택과 실행도 그 사랑의 연장에서, 최고의 연장에서 극진히 치르고자 하였습니다. 자기 삶, 자기 생명에 대한 최고의, 최후의 예우이며 헌정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장 아메리의, 장 아메리에 의한, 장 아메리를 위한 삶의 길이었습니다. 누구도 그의 죽음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도 그의 죽음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든 그가 사랑한 그의 인생을, 삶을 말해야 합니다. 누구든 그가 사랑한 그의 인생을, 삶을 말할 수 있습니다.

 

비인간적 권력집단 나치에 맞서 싸운 전사 장 아메리가 치열하게 말해온 늙어감과 죽음이 이야기를 읽고 이제 여기 우리가 뼈에 새길 것은 생명의 존엄과 삶의 자유라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장 아메리의, 장 아메리에 의한, 장 아메리를 위한 삶이 곧 우리 자신의, 우리 자신에 의한, 우리 자신을 위한 삶입니다. 그 선택의 즉각적 결과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논쟁중인 안락사나 존엄사 문제에 대하여 관점을 정면으로 뒤집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죽음을 말하기 때문에 대뜸 살인죄 문제가 대두되는 것입니다. 삶을 말해야 도리어 인권과 존엄의 문제가 옹골차게 논의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세월호사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비인간적 권력이 저지른 가장 극악무도한 패악은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 자체가 아닙니다. 자기 생명과 삶을 사랑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짓밟고, 자유로운 선택을 가로막은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라.”

 

이 한 마디가 칼보다, 총보다, 더 잔악무도한 흉기였습니다. 이 흉기는 세월호선장의 것이 아닙니다. 이 흉기는 매판독재반통일 권력집단의 것입니다. 이 흉기는 단순 사건으로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일천오백 년 매판독재반통일 역사의 집장태集藏態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제 대한민국이 참된 국가이려면, 그 국가가 우리 자신이려면 세월호사건, 그러니까 아이들의 원통하고 참혹한 죽음 이후, 우리의 삶은 우리의, 우리에 의한, 우리를 위한 삶으로 혁명적 전환을 기해야 합니다. 장 아메리의 자유죽음은 맹골수도 바다 건너에 남겨진 우리의 자유삶이여야 합니다. 장 아메리가 그 곡진함으로도 뚫지 못한 삶과 죽음의 화쟁和諍은 오늘 여기 우리의 과제로 남습니다. 자기만의 행복을 넘어 공공의 삶에 참여함으로써 큰 수레의 장엄한 삶을 살다 간 장 아메리를 다시 한 번 온 영혼으로 추모하며, 아직 추모해서는 안 될 아이들을 온 영혼으로 끌어안습니다. 부디 죽음의 신화는 역사가 되고 삶의 역사는 신화가 되는 날 오기를!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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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끈질긴 느낌인 ‘두려움’. 그것은 쉽게 놓아주지 않는 질긴 손길로 내 인격의 일부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두려움을 가졌다”라고 말할 수가 없다. 오히려 “나 자신이 두려움이다”라고 말할 따름이다.(195쪽)

 

지난 일주일은 슬픔과 분노, 그리고 허탈이 뒤범벅된 나날들이었습니다. 세월호사건 일주기중심의 정국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권력집단이 보여준 행태는 오로지 패악과 협잡뿐이었습니다. 국정, 아니 바로 이 세월호사건 최고책임자는 국가를 이탈하였습니다. 정치권 수뇌부는 재보선에 정신 팔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 식민지 경찰은 유족과 시민에게 캡사이신과 물대포를 쏘아댔습니다. 희생된 아이의 부모를 목 조르고 방패로 찍었습니다. 신문기자를 포함한 시민 100여 명을 연행하였습니다. 이 때 동원된 경찰병력은 무려 172개 부대 13,700명이었습니다. 차벽트럭 28대를 비롯한 470여 대 차량으로 이른바 ‘산성’을 쌓고 시민과 유족의 이동을 가로막았습니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이 상황의 진실을 관제언론은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유족과 시민을 폭도로 모는 왜곡 보도를 자행하였습니다. 익숙한 풍경입니다. 이 익숙함에 실려 목하 대한민국은 깊은 두려움 속으로 침륜되어 가고 있습니다.

 

두려움. 그것은 이제 대한민국 국민 각자의 인격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움을 가졌다”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나 자신이 두려움이다”라고 말할 따름입니다. 크게는 전쟁 위협에서 작게는 집회 현장의 ‘채증’ 위협까지 도무지 헤어날 길 없는 두려움을 내재화한 채 숨죽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권력집단이 노상 훤화喧譁하는 바, 국론통일이며 민생안정입니다. 스스로 두려움이라는 정체감을 지니는 국민. 이것은 저 일제가 규정한 황국신민皇國臣民입니다.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의 주권자인 국민이 결코 아닙니다. 절대적 권위 아래 무릎 꿇어야 하는 신민에 지나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휘몰고 온 저주입니다. 아, 감히 어쩌지 못 할 이 국가적 차원의 도저한 두려움이라니.

 

두려움은 숙명에 육박하는 무게를 지녔습니다. 두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옴짝달싹 못한다는 것입니다. 폭력성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두려움의 대상에 의심을 품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초월성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무기를 다 가지고 있는 두려움의 생산자는 죽음입니다. 죽음을 움켜쥐고 두려움으로 광범위하게 우리를 억압하는 세 주체가 바로 정당성 없는 권력과 매판 자본, 그리고 타락한 종교입니다. 지금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치명적인 위험성은 바로 이 세 주체의 동맹이 더없이 강고하다는 것입니다.

 

국가의 보호에 깃들면, 자본의 풍요에 실리면, 종교의 구원에 기대면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라 여겨 너나없이 충성하고 헌신하고 몰두한 결과, 도리어 노예가 되어버린 이 국민에게 역사가 베푸는 자비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수탈과 살해가 반복될 뿐입니다. 그러면 대체 이 땅에 태어나 겪을 수밖에 없는 이 모멸에서 어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요?

 

첫 걸음은 이것입니다. “나 자신이 두려움이다.” 장 아메리의 고백owning을, 그 직시를 온 영혼으로 하는 것입니다. 직시한 두려움이 바로 용기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할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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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타인의 죽음을 어떤 것의 더는 존재하지 않음으로 경험하는 것은 모든 부정적 사고, 곧 변증법적 사고의 전제조건이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변증법의 거부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부정의 부정의 부정이랄까.·······부정적인 변증법 사고의 길을 활짝 열어주는가 싶더니, 그 길을 들어서기 무섭게 막아버린다. 죽음은 그 어떤 긍정적인 것도 가지지 않는 부정이기 때문이다.(184쪽)

 

죽음, 그러니까 늙어감의 종착점에 관한 장 아메리의 사유는 이제 거의 막바지에 이른 듯합니다. 예의 그 단호한 어조가 더욱 결곡해졌습니다. 급기야.

 

부정의 부정의 부정

 

대체 이 얼마나한 칠흑의 풍경이란 말입니까. 더는 나아갈 수 없는 절망과 무의미의 냄새가 와락 끼쳐오는!

 

그가 말하는 변증법이 어떤 변증법인지 물론 불확실합니다. 분명한 것은 헤겔의 그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통속한 이해일 경우, 지양을 통해 합이 나오는 그런. 아니면 본디 헤겔이 말했다 하는, non A를 품은 A가 스스로 실체변환을 일으키거나, non A를 품은 A가 non A와 같아지는, 그런 변증법이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적어도 장 아메리에게 죽음이란.

 

‘부정의 부정’을 변증법이라 하면 그 뒤에 오는 세 번째 부정은 변증법을 “무섭게 막아버린다”는, 그러니까 “거부”로서, 어찌 보면 장 아메리의 마지막 언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여 이렇습니다.

 

없음은 그저 없음이다. 동어반복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이것뿐이다. 아니 이마저도 말하지 말아야 한다.”(185쪽)

 

저는 여기가 끝이라고 느꼈습니다. 그가, 장 아메리 스스로가,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데, 감히, 누가, 더, 말을 이어간다는 것입니까. 나치에게 뼈가 으스러지도록 고문당한 장 아메리한테 죽음이란 “없음은 그저 없음이다.”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아니 이마저도 말하지 말아야 한다.” 딱, 이뿐입니다. 끝이라고 말하기조차 민망한 그 끝. 한 실존, 인간으로서 저는 여기서 얼어붙습니다. 죽습니다.

 

죽어서 눈을 뜨니, 원효가 턱 하니 나타납니다. 저는 원효의 변증법을 온 변증법의 완성이라 여깁니다. 그러니까 변증법이 아닙니다. 일심一心, 또는, 화쟁和諍, 또는 무애無碍라 합니다. 헤겔이든, 장 아메리든, 서구 변증법은 “닫는” 변증법입니다. 원효의 일심-화쟁-무애는 “여는” 변증법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변증법이 아닙니다.

 

무엇이 다를까요? 서구의 “표준”인 형식논리학에서는 부정의 부정이 긍정입니다. 사실, 형식논리학을 넘어섰다 하는 헤겔도 이 표준에 터하고 있습니다. 장 아메리의 변증법 또한 부정의 부정이 긍정이고, 하여 그 뒤에 다시 오는 부정은 곧 논리의 마감입니다. 그러나 원효에게서는 부정의 부정이 긍정, 아닙니다. 부정否定의 부정否定은 부정不定입니다. 부정不定은 uncertainty, 그러니까 자유입니다. 그 뒤에 오는 부정否定은 부정不定의 무한 연쇄입니다. 그것이 원효의 무애無碍입니다. 걸림 없음, 그러니까 거침없음입니다.

 

원효의 논리학은 논리의 완성이자 논리의 파괴입니다. 구태여 긍정과 부정을 들어 말한다면, 원효에게서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아니라 대大긍정입니다. 대大긍정은 부정을 포함包涵합니다. 포함包含이 아닙니다. 포함包涵은 지양 통합도 아니고, 실체변환도 아니고, 같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포함包涵은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닙니다. 포개지나 쪼개지고, 쪼개지나 포개집니다.

 

원효에게 죽음은 죽음이자 죽음이 아닙니다. 죽음이란 홀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삶을 전제로 하여 존재합니다. 죽음을 말하려면 반드시 삶을 말해야 합니다. 삶은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죽음은 말할 수 없는 것이라면, 말할 수 있는 것을 극진히 말할 때, 말할 수 없는 것의 짙푸른 진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삶을 충만히 말하면 곧 죽음이 됩니다. 장 아메리의 결정적, 그러니까 치명적 결함은 삶을 충분히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그러니까 죽음으로 향하는 늙어감을 말하기 위해 너무나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장 아메리에게 죽음은 너무 일찍, 너무 크게 들이닥친 절대 운명이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1912년에 태어난 그가 1943년, 그러니까 서른한 살에 ‘저 무서운’ 게슈타포에 끌려가 죽음“보다 더” ‘무서운’ 고문을 당했습니다. 뼈가 으스러지도록. 서른한 살, 죽음의 ‘질량’을 증득證得할 나이가 결코 아닙니다. 삶의 ‘에너지’를 만끽할 나이입니다. 이런 때에 선-체험한 죽음, 아니 그보다 더 무서운 죽음에의 육박, 형언할 수 없는 외상外傷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에게 죽음이란. 그에게 죽음으로 가는 가파른 경사로, 늙어감이란. 그에게 이 「늙어감에 대하여」는 불치병에 대한 증상 보고서입니다. 하여 원효의 진실이 더욱 아프게 속살을 파고듭니다.

 

아픔은 장 아메리를 떠나 우리를 엄습합니다. 죽음에 대하여, 너는 무엇이냐, 고 멱살을 잡습니다. 아니, 삶에 대하여 너는 무엇이냐, 고 비수를 들이댑니다. 장 아메리처럼 죽음과 30cm 가까이한 적이 없다면, 아픈 시늉하지 말고, 삶을 말하라고. 대체 너는 지금 어찌 살고 있느냐, 고. 아니, 너는 도대체, 살고는 있느냐, 고.

 

오늘 우리에게는 장 아메리의 죽음보다 원효의 삶이 끽긴한 과제입니다. 죽음은 맹골수도 250꽃별들로 차고 넘칩니다. 쌍차로 충분합니다. 기륭전자로 됐습니다. 우릴랑은 살아야 합니다. “부정의 부정의 부정”을 깨뜨리고 “부정否定의 부정否定인 부정不定”을 성취해야 합니다. 부디 자유로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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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04-18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운명도 스스로가 거두어간 장 아메리...책일고 한동안 멍했습니다...리뷰 잘 봤어요.감사드립니다.

bari_che 2015-04-18 14:19   좋아요 0 | URL
감사하신다니 감사드립니다.^^
보잘 것 없는 사색의 길이나마 그저 이렇게 쭉 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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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는 분명하다. 그것은 죽음이다.(168쪽)

 

자, 이제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죽어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죽음, 아이들의 죽음, 아이들의 분명한 죽음입니다. 아이들의 분명한 죽음을 우리 각자의 실재 속에 들여놓아야 합니다. 아이들의 분명한 죽음을 우리 각자의 역사로 만들어야 합니다. 아이들의 분명한 죽음을 우리 공동체의 실재 속에 들여놓아야 합니다. 아이들의 분명한 죽음을 우리 공동체의 역사로 만들어야 합니다.

 

자, 이제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것은 죽임이었습니다.

 

아이들의 분명한 죽음을 우리 공동체의 역사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것이 매판독재세력의 고의에 따른 제노사이드였음을 밝혀야 합니다. 근거는 충분하고도 명백합니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1년 동안 이 사건에 대하여 집권세력이 저질러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협잡은 이른바 직접증거보다 훨씬 더 웅변적으로 실체적 진실을 드러내줍니다. 근거의 결정판은 뭐니 뭐니 해도 최종 책임의 공백입니다. 2014년 4월 16일에는 한나절의 공백이 있었습니다. 2015년 4월 16일, 오늘은 물경 열하루의 공백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이탈입니다.

 

이탈은 고의적인 직무유기입니다. 고의적인 직무유기는 책임주체의 정치적 자기살해입니다. 책임주체의 정치적 자기살해란 그러면 과연 무엇일까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자, 이제는 분명하다. 그것은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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