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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ㅣ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평점 :
이제 타인의 죽음을 어떤 것의 더는 존재하지 않음으로 경험하는 것은 모든 부정적 사고, 곧 변증법적 사고의 전제조건이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변증법의 거부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부정의 부정의 부정이랄까.·······부정적인 변증법 사고의 길을 활짝 열어주는가 싶더니, 그 길을 들어서기 무섭게 막아버린다. 죽음은 그 어떤 긍정적인 것도 가지지 않는 부정이기 때문이다.(184쪽)
죽음, 그러니까 늙어감의 종착점에 관한 장 아메리의 사유는 이제 거의 막바지에 이른 듯합니다. 예의 그 단호한 어조가 더욱 결곡해졌습니다. 급기야.
“부정의 부정의 부정”
대체 이 얼마나한 칠흑의 풍경이란 말입니까. 더는 나아갈 수 없는 절망과 무의미의 냄새가 와락 끼쳐오는!
그가 말하는 변증법이 어떤 변증법인지 물론 불확실합니다. 분명한 것은 헤겔의 그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통속한 이해일 경우, 지양을 통해 합이 나오는 그런. 아니면 본디 헤겔이 말했다 하는, non A를 품은 A가 스스로 실체변환을 일으키거나, non A를 품은 A가 non A와 같아지는, 그런 변증법이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적어도 장 아메리에게 죽음이란.
‘부정의 부정’을 변증법이라 하면 그 뒤에 오는 세 번째 부정은 변증법을 “무섭게 막아버린다”는, 그러니까 “거부”로서, 어찌 보면 장 아메리의 마지막 언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여 이렇습니다.
“없음은 그저 없음이다. 동어반복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이것뿐이다. 아니 이마저도 말하지 말아야 한다.”(185쪽)
저는 여기가 끝이라고 느꼈습니다. 그가, 장 아메리 스스로가,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데, 감히, 누가, 더, 말을 이어간다는 것입니까. 나치에게 뼈가 으스러지도록 고문당한 장 아메리한테 죽음이란 “없음은 그저 없음이다.”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아니 이마저도 말하지 말아야 한다.” 딱, 이뿐입니다. 끝이라고 말하기조차 민망한 그 끝. 한 실존, 인간으로서 저는 여기서 얼어붙습니다. 죽습니다.
죽어서 눈을 뜨니, 원효가 턱 하니 나타납니다. 저는 원효의 변증법을 온 변증법의 완성이라 여깁니다. 그러니까 변증법이 아닙니다. 일심一心, 또는, 화쟁和諍, 또는 무애無碍라 합니다. 헤겔이든, 장 아메리든, 서구 변증법은 “닫는” 변증법입니다. 원효의 일심-화쟁-무애는 “여는” 변증법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변증법이 아닙니다.
무엇이 다를까요? 서구의 “표준”인 형식논리학에서는 부정의 부정이 긍정입니다. 사실, 형식논리학을 넘어섰다 하는 헤겔도 이 표준에 터하고 있습니다. 장 아메리의 변증법 또한 부정의 부정이 긍정이고, 하여 그 뒤에 다시 오는 부정은 곧 논리의 마감입니다. 그러나 원효에게서는 부정의 부정이 긍정, 아닙니다. 부정否定의 부정否定은 부정不定입니다. 부정不定은 uncertainty, 그러니까 자유입니다. 그 뒤에 오는 부정否定은 부정不定의 무한 연쇄입니다. 그것이 원효의 무애無碍입니다. 걸림 없음, 그러니까 거침없음입니다.
원효의 논리학은 논리의 완성이자 논리의 파괴입니다. 구태여 긍정과 부정을 들어 말한다면, 원효에게서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아니라 대大긍정입니다. 대大긍정은 부정을 포함包涵합니다. 포함包含이 아닙니다. 포함包涵은 지양 통합도 아니고, 실체변환도 아니고, 같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포함包涵은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닙니다. 포개지나 쪼개지고, 쪼개지나 포개집니다.
원효에게 죽음은 죽음이자 죽음이 아닙니다. 죽음이란 홀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삶을 전제로 하여 존재합니다. 죽음을 말하려면 반드시 삶을 말해야 합니다. 삶은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죽음은 말할 수 없는 것이라면, 말할 수 있는 것을 극진히 말할 때, 말할 수 없는 것의 짙푸른 진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삶을 충만히 말하면 곧 죽음이 됩니다. 장 아메리의 결정적, 그러니까 치명적 결함은 삶을 충분히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그러니까 죽음으로 향하는 늙어감을 말하기 위해 너무나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장 아메리에게 죽음은 너무 일찍, 너무 크게 들이닥친 절대 운명이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1912년에 태어난 그가 1943년, 그러니까 서른한 살에 ‘저 무서운’ 게슈타포에 끌려가 죽음“보다 더” ‘무서운’ 고문을 당했습니다. 뼈가 으스러지도록. 서른한 살, 죽음의 ‘질량’을 증득證得할 나이가 결코 아닙니다. 삶의 ‘에너지’를 만끽할 나이입니다. 이런 때에 선-체험한 죽음, 아니 그보다 더 무서운 죽음에의 육박, 형언할 수 없는 외상外傷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에게 죽음이란. 그에게 죽음으로 가는 가파른 경사로, 늙어감이란. 그에게 이 「늙어감에 대하여」는 불치병에 대한 증상 보고서입니다. 하여 원효의 진실이 더욱 아프게 속살을 파고듭니다.
아픔은 장 아메리를 떠나 우리를 엄습합니다. 죽음에 대하여, 너는 무엇이냐, 고 멱살을 잡습니다. 아니, 삶에 대하여 너는 무엇이냐, 고 비수를 들이댑니다. 장 아메리처럼 죽음과 30cm 가까이한 적이 없다면, 아픈 시늉하지 말고, 삶을 말하라고. 대체 너는 지금 어찌 살고 있느냐, 고. 아니, 너는 도대체, 살고는 있느냐, 고.
오늘 우리에게는 장 아메리의 죽음보다 원효의 삶이 끽긴한 과제입니다. 죽음은 맹골수도 250꽃별들로 차고 넘칩니다. 쌍차로 충분합니다. 기륭전자로 됐습니다. 우릴랑은 살아야 합니다. “부정의 부정의 부정”을 깨뜨리고 “부정否定의 부정否定인 부정不定”을 성취해야 합니다. 부디 자유로워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