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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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대로, 정보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더 좋은 결정이 내려지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직관은 주어진 정보를 초월하여 자기 고유의 논리를 따라간다.·······종종 더 적은 지식과 정보가 더 많은 작용을 한다. 생략과 망각의 부정성이 생산적인 효과를 일으키는 일이 드물지 않다. 투명사회는 정보의 공백도 시각의 공백도 용인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유도 영감도 어떤 빈자리를 필요로 한다.(19-20쪽)

 

조치훈趙治勳이라는 기사棋士가 있습니다. 바둑을 즐기는 사람들에겐 신화적인 존재입니다. 이 조치훈은 중요한 기전을 하루 앞두면 바둑판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고 밤새 마작을 즐긴다고 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 말은 매우 기이하게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기이한 “생략과 망각의 부정성”이 일으킨 “생산적인 효과”를 확인하면 전혀 다른 유의 기이함에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대삼관大三冠이란 일본의 3대 기전棋戰인 랭킹1위 기성전, 랭킹2위 명인전, 랭킹3위 본인방 타이틀을 동시 보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히 천하통일이라 할 만한 위업으로서 초절정고수가 아니면 달성할 수 없습니다. 일본 바둑 역사상 최초로, 바로 그 조치훈이 1983년에 대삼관을 이루었습니다. 1996년부터 3년 연속 다시 대삼관을 이루었습니다. 그 뒤 2013년 이야마 유타가 대삼관을 이루었을 뿐 다른 기록은 아직 없으니 조치훈이 이룬 대삼관은 실로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치훈은 “공백”과 “빈자리”가 얼마나 어떻게 사유와 영감을 심화· 증폭시키는지 일찌감치 깨달은 천재였습니다. 바둑을 잘 둔 것은 그 결과일 따름입니다. 우리 같은 범재들은 공백은 메우고 빈자리를 없애야, 그러니까 밤새 바둑 공부를 더해야 더 잘 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정보와 지식이 더 좋은 결정을 내리게 하고, 더 많은 작용을 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삼당사락三當四落이란 말이 그래서 생겼습니다. 망국적인 사교육 문제가 그래서 생겼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이수 과목이 많고 수업 시간이 긴 중등교육 과정이 그래서 생겼습니다. 공백과 빈자리를 빼앗긴 아이들의 사유는 ‘암기’가 되고, 영감은 ‘찍기’가 되었습니다. “정보를 초월하여 자기 고유의 논리를 따라”가는 힘을 잃은 아이들의 직관은 ‘말 잘 듣기’가 되었습니다. 이 암기와 찍기, 그리고 말 잘 듣기의 끄트머리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죽음 위에 세워진 투명공화국에 화 있을진저.

 

한의원에 온 사람들 대부분이 쭉 하니 병의 증상을 나열한 뒤에 꼭 한 마디 덧붙입니다.

 

“왜 이런 거죠?”

 

이 질문은 액면대로만 들으면 자기 병에 대한 곡진한 관심에서 나온 것이지만 실은 대단히 복잡한 복선을 깔아놓은 전략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이 바로 투명사회가 부추기는 정보강박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TV 통해 듣고 인터넷 검색까지 해서 손에 쥔 정보를 들고 와서 ‘어쩌나 보자’하는 식으로 던지는 질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자신의 병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의 여부는 관건적 중요성을 지니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전문가로서 의료인은 잡다한 정보를 걸러 정확한 의학 지식을 쉽고 친절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정보강박이 빚어내는 쇼핑과 헌팅 수준의 의료유람이 이 투명공화국의 또 다른 퇴폐상임을 알기에, 이따금 저는 “무지에의 의지(19쪽-니체 인용의 재인용)를 깨우치기 위해 이렇게 되묻습니다.

 

“알면 고쳐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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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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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영혼은 분명 타자의 시선을 받지 않은 채 자기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을 필요로 한다. 불투과성은 영혼의 본질에 속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투명하지 않다.·······그러니까 인간 정신은 균열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자아가 자신과의 일치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해진다.·······사람들 사이에도 틈새가 벌어진다. 그리하여 서로에 대해 투명한 인간관계는 결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타자가 투명하지 않다는 사실 자체가 관계를 살아 있게 해준다.······· 투명성의 강제에는 바로 이러한 섬세함, 즉 결코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다름에 대한 존중이 결여되어 있다. 오늘날 사회를 사로잡고 있는 투명성의 파토스에 맞서기 위해서는 거리의 파토스Pathos der Distanz를 위한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거리와 부끄러움은 자본, 정보, 커뮤니케이션의 가속화된 순환 과정 속으로 통합되지 않는다.(16-18쪽)

 

결혼이란 이 세상에 나와 똑 같은 우선순위로 배려해야 할 사람이 또 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삶의 출발점입니다. 상대방이 나와 똑같은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면 평생 뼛속 깊이 새겨야 할 문장이 있습니다.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니다.” 예상 밖이겠지만 이것이 진실입니다. 이 진실을 지키려면 평생 뼛속 깊이 새겨야 할 어법이 있습니다. 살다보면 서로 싸울 일이 반드시 생기는데, 그럴 때 “너!” 하고 시작하는 2인칭 어법을 쓰면 안 됩니다. 너는 내가 아니므로 네가 지닌 진실을 내 진실처럼 알 수 없음에도 대뜸 “너!” 하면 그게 아무리 천하 없는 진리라도 상대방은 즉각 돌아앉습니다. “나!” 하고 1인칭 어법으로 시작하셔야 합니다. 존중의 시작입니다. 존중하면 싸움의 대부분을 웃음으로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더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신랑을 향해) 김미희는 이연호가 아닙니다. 이연호와 똑같은 우선순위를 지닌 타인입니다. 예의를 다해 맞으시기 바랍니다. (신부를 향해) 이연호는 김미희가 아닙니다. 김미희와 똑같은 우선순위를 지닌 타인입니다. 예의를 다해 맞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출발해야 부부일심동체의 꿈을 그나마 꿀 수 있습니다.

 

지난 5일 부산, 김미희와 이연호의 결혼예식에서 제가 한 주례사 일부입니다. 스스로에게도 투명할 수 없고 스스로도 투과할 수 없는 인간이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하면서 처음부터 운위하는 일심동체라는 말은 성급함을 넘어 이치적으로 맞지 않는 것입니다. 게다가 사실상 남성가부장 중심사회가 여성 순종을 강요하기 위해 그 저의를 감추고 쓰는 미사여구라면 더욱 고약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나, 너는 너로 존중하는 “섬세함”을 전제하고서야 비로소 기품 있는 부부의 삶이 가능해집니다. 저자는 이 문제를 “자기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 “균열” “틈새” “결코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다름”으로 변주를 거듭하다가 드디어 “거리의 파토스”로 매듭을 짓습니다. 거리 없이 존중 없습니다. 존중 없으면 적나라해집니다. 적나라해지면 외설이 됩니다. 외설은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하여 저자는 “부끄러움”, 그러니까 염치廉恥를 단도직입으로 소환하여 거리와 연대하게 합니다. 신영복 선생에 따르면 인간사회의 척도가 다름 아닌 염치입니다. 염치를 잃은 집단은 도무지 인간사회가 아닙니다. 오늘 여기 대한민국의 문제가 바로 이 몰염치, 아니 파렴치의 문제입니다.

 

정치는 윤리가 아닙니다. 정치는 전략과 타협이 불가피한 현실거래의 장입니다. 때로는 부도덕한 협잡과 공작이 날뛸 수도 있습니다. 필요악의 경계를 이탈하고 인간의 금도를 넘어선 파렴치가 기조를 이룬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대한민국의 현 집권세력은 태생부터 파렴치를 기조로 하고 있습니다. 조선을 일제에 팔아 부귀영화를 누린 왕족과 서인 노론 집단, 그리고 식민지 부역집단의 카르텔이 저들의 정체성입니다. 지엽적인, 그것도 부풀린 경제 업적 따위로 상쇄될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설혹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목하 저들이 자행하고 있는 살인과 수탈의 패악은 저들 자신은 물론 우리 모두를 파렴치로, 그러니까 인간 아닌 지경으로 몰아가고 있기 때문에 더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시급히 거리의 파토스를 복원해야 합니다. 불투과성을 본질로 지닌 인간 영혼을 되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상생의 공동체로서 대한민국이 가야 할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 377일째 2014년 4월 16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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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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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부정성의 사회는 소멸하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새로운 사회는 긍정성을 위해 부정성을 해체해가는 중이다. 그리하여 투명사회의 일차적 모습은 긍정사회Positivgesellschaft로 나타난다.

   사물은 모든 부정성을 떨쳐버릴 때, 매끈하게 다듬어지고 평탄해질 , 아무 저항 없이 자본과 커뮤니케이션과 정보의 흐름에 순응할 때 투명해진다.·······사물은 고유한 개별성을 상실하고 스스로를 오직 가격으로만 표현할 때 투명해진다. 돈은 모든 것을 비교 가능하게 만들면서, 사물의 통약 불가능성과 고유성을 완전히 철폐한다. 투명사회는 동일한 것의 지옥이다.

   ·······투명성은 타자와 이질적인 것을 제거함으로써 시스템을 안정시키고 가속화한다. 이러한 시스템의 강제로 투명사회는 곧 획일적 사회가 된다. 바로 이 점에 투명사회의 전체주의적 특성이 있다. “획일화를 표현하는 새 단어: 투명성.”(13-15)

   

우리는 대부분 충치 예방=불소(화합물)의 등식을 투명한진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사악한 권력과 자본의 협잡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불소는 나치가 집단수용소에서 포로의 정신력을 저하시키려는 목적으로 음식에 타 넣으면서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소련도 집단수용소, 유형지에서 사용하였습니다. 충치 예방을 내걸고 수돗물에 넣기 시작한 것은 미국이었습니다.

 

1997년 제니퍼 루크는 불소가 대뇌 송과선에 악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불소는 송과선을 경화시켜 호르몬 분비를 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제니퍼 루크 이후에도 많은 연구가 불소의 해악을 증명하였지만 그 사용은 오히려 세계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수돗물, 정수 장치, 치약, 콜라 등에 주입되고 있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불소가 내분비계 교란을 통해 일으키는 치매나 양극성장애와 같은 위중한 질병은 물론이거니와 무엇보다 사람들의 지적능력을 저하시키고 현실 상황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하며 비판을 통해 사회적 인격을 형성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당연히 정부를 비롯한 권력기관이나 사회 이익단체의 활동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일은 점점 더 난망해집니다. 이런 식으로 인류는 불투명성의 투명성이 강제하는 긍정획일주의에 중독되어 파멸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불소는 사악한 권력과 자본의 인간 조작 기술 가운데 아주 작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대문명 그 자체가 사유를 계산으로, 지혜를 계략으로, 궁리를 음모로, 행복을 향락으로 대체하는 거대한 퇴폐 패러다임입니다. 퇴폐의 흥청거림에 맞춤한 인간의 조건은 부정성을 떨쳐버릴, “매끈하게 다듬어지고 평탄해질, “순응할, “고유한 개별성을 상실할 것 등입니다. 이 퇴폐 행렬의 선두에 서기 위해 너나없이 긍정의 힘으로 자기계발 하고, 성형수술하고, 종편 보고, 선거 때 죽으나 사나 1번 찍으며 동일한 것의 지옥판에서 뒹굴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보면 불소 따위가 무슨 대수일까 싶습니다.

 

부정성의 사회를 복원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거칠고 울퉁불퉁한 마음, 의문을 제기하는 자세, 노예적 안정을 깨뜨리는 움직임이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이대로만 간다면 자주와 민주, 그리고 진정한 통일의 비원悲願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선이 이미 그어져 있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아이들을 두 번 죽이는 범죄를 용인해서는 안 됩니다. 이 비겁한 긍정, 이 뻔뻔한 투명을 응징할 길이 열리느냐, 마느냐가 바로 여기서 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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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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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 요렇게 생긴 책을 위한 사마천司馬遷의 헌사, 단소정한短小精悍. 투명 블루에 소략한 디자인. 행간 넓혀 애써 늘여마지 않았음에도 본문은 물경 90쪽. 내장비만 전무全無. 옥에 티, 잦은 대가大家 인용.

 

투명성이 신뢰를 낳는다. 이것이 요즘 유행하는 믿음이다. 이 때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은 하필이면 신뢰가 급격하게 의미를 잃어가고 있는 사회에서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대단히 높아졌다는 사실이다.(5쪽)

 

투명성과 신뢰는 본디 상호모순입니다. 투명성은 앎의 영역입니다. 훤히 들여다보여 드러나지 않음이 없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신뢰는 모름의 영역입니다. 알지 못함에도 믿고 그렇게 여긴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치에 터하면 “투명성이 신뢰를 낳는다.”는 “믿음”은 잘못된 것이고, 잘못된 믿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회 상황은 적실한 것입니다.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최대한 드러내라고 요구하는 것이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드러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정작 문제는 뒤집힌 맥락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투명성의 요구는 맥락을 뒤집어 놓은 누군가의 기획입니다. 기획자의 투명성은 그 기획의 경계 밖에 있는 불투명성의 투명성입니다. 불투명성의 투명성은 불투명성을 호위하기 위한 설정 투명성입니다. 설정 투명성이기 때문에 절대성을 강제합니다.

 

절대군주인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를 신하 삼으면서 수탈의 진화는 정점을 찍었습니다. 모순을 전술로 쓸 정도이니 절정고수, 깨달은 악마 경지에 다다른 것입니다. 그 화신이 대한민국에 강림하였습니다. 안의 불투명한 킬킬거림과 밖의 투명한 눈물을 완벽하게 공존시킴으로써 자기 자신의 불투명성의 투명성과 국민의 투명성을 일치시키는 신공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신공의 기운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가고 있습니다. 매판이 애국으로 투명해지고 있습니다. 독립 혁명가가 테러리스트로 투명해지고 있습니다. 한해에 200번 넘게 통화하는 사이가 별로 친하지 않은 사이로 투명해지고 있습니다. 단원고등학교 아이들 250명은 가난한 주제에 제주도 놀러가다가 단순 교통사고로 죽어 투명해지고 있습니다. 신기방기무인지경.

 

이 슬프고도 우스운 신기방기무인지경 속에서 가만 생각해봅니다. 이 땅에서 투명성이란 것은 진실을 희화하기 위한 정치적 사투리가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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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입문 - 알기 쉽게 풀이한 초기불교의 핵심교학
각묵 스님 지음 / 이솔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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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어떤 종교도 어떤 철학도 불교라는 바위 앞에서는 달걀입니다. 그 사상의 광대무변廣大無邊함은 췌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광대무변함이야말로 불교의 치명적 약점이라는 진실을 덮어버릴 만큼.

 

1. <시사인>에 실린 장정일의 『예수는 괴물이다』 서평 가운데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무신론자인 지젝은 외부의 충격과 만나기를 피하지 않으며, 사랑하기 위해 선택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기독교를 높이 산다. 반대로 불교는 자아를 비우고, 무차별심을 연마하고, 모든 정념을 억누르고자 한다. 이런 입장은 타자의 심연이나 외상과 거리를 두는 형태를 취하지만, 배면에는 유기적이고 조화로운 세계가 전제되어 있다. 그 때문에 불교는 파시즘이나 국가주의와 쉽게 결합될 뿐 아니라, 광란의 경쟁이 벌어지는 자본주의에 효율적으로 참여한다. 자본주의가 발전한 나라일수록 불교의 선이나 동양에 기원을 둔 뉴에이지 종교가 높은 인기를 얻는다.”

 

지젝이 말한 기독교가 (실제로 그런지와 무관하게) 불교와 선명하게 대비되는 부분을 인용합니다.

 

“외부의 충격과 만나기를 피하지 않으며, 사랑하기 위해 선택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기독교)

 

“타자의 심연이나 외상과 거리를 두는” (불교)

 

다시, 이 대비에서 불교 부분만을 꺼내 생각하겠습니다. 불교가 타자의 심연이나 외상과 거리를 두는 것이 맞을까요? 얼핏 보면 잘못된 통찰이라 여겨집니다. 그도 그럴 것이 불교는 자비의 종교라는데. 싯다르타 왕자가 고통으로 신음하는 궁 밖의 백성을 보고 출가했다는데. 이 문제에 관해 통속불교의 행태 아닌 붓다 원음이라 일컬어지는 빨리어 경전을 바탕으로 하는 이른바 초기불교 내용으로 판단해보기로 합니다.

 

 2. 『초기불교입문』은 저자인 각묵이 직접 접한 초기불교 경전의 가르침에 터하여 쓴, 빠짐도 군더더기도 없는, 정갈한 입문서입니다. 불교신문에 연재하고, 불자들이 인터넷 매체에 올려놓을 때부터 틈틈이 읽어온 내용을 단행본(2014년 9월 30일 출간)으로 다시 촘촘히 읽었습니다. 그 동안 이리저리 흩어져 뒹굴던 생각들이 단정하게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동시에, 그 동안 품고 키워왔던 의문이 더욱 깊어지는 것도 함께 느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불교의 핵심은 사성제四聖諦로 집약됩니다. 사성제의 고갱이는 고苦입니다. 고苦의 문제를 풀어 열반, 그러니까 행복에 이르는 길이 다름 아닌 불교입니다. 일一에서 팔만사천八萬四千까지 허다한 숫자들로 가득 찬 온갖 가르침의 목록, 그 번다함이 부질없어지는 요약입니다. 고苦의 진경으로 들어가야 불교의 속살이 드러납니다.

 

3. 고苦는 빨리어 dukkha를 번역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번역 자체를 문제 삼을 수 있습니다. 한자문화권에서는 고통苦痛이라는 합성어를 오랫동안 써왔기 때문에 일상의 차원에서 둘을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고苦는 정신적 괴로움suffering이고, 통痛은 육체적인 아픔pain입니다. 물론 둘은 서로 관통하고 흡수합니다. 정신의 괴로움은 육체의 아픔을 유발하고, 육체의 아픔은 정신의 괴로움을 유발합니다. 하지만 완전히 포개지지는 않습니다. 구분은 불가피합니다.

 

경전을 만들 당시 빨리어 전통에서 dukkha는 통痛과 구분되는 고苦였을까요? 만일 그렇다면 불교, 아니 붓다의 근본 가르침에 큰 구멍이 뚫려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번역 당시 고苦로써 통痛까지 포괄했다는 증거가 없는 한) 번역이 잘못된 것이므로 적어도 한자문화권 불교 전체에 일대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두 경우 모두 큰일입니다!

 

dukkha 언어학적 검증은 제 능력 밖의 일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번역이 바르다고 전제하고, 그러니까 붓다의 가르침이 고苦를 중심으로 전개된다고 보고 이를 화두 삼는 것입니다. 과연 『초기불교입문』전체에서 통痛이 전면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전혀 없습니다. 물론 고苦를 ‘해체하여’ 설할 때 ‘육체적 괴로움’을 포함하기는 하지만 ‘육체적 괴로움’은 이치상 부정확한 표현일뿐더러 거의 전혀 존재감 없는 고苦의 하위개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명백히 고苦-패러다임입니다.

 

붓다는 왜 통痛을 범주로 인식하지 않았을까요? 생태문화적 맥락을 먼저 고려해볼 수 있습니다. 고대 인도는 정신주의의 본향이었습니다. 정신주의는 채식문화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채식문화의 육체에 대한 감각·인식은 식물적입니다. 식물적 감각·인식을 지닌 사람에게 육체의 통痛은 정신의 고苦에 비하면 거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육식문화의 전통에서 형성된 서구의학이 진통鎭痛적 본질을 지니며, 심지어 정신조차 진통제적 성격의 차단 약물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금방 수긍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사회정치적 지평도 고려할만합니다. 어떤 연구에 따르면 불교가 인도 사회에 깊고 넓게 뿌리내리지 못한 까닭은 붓다 자신이 그렇듯 10대 제자 거의 대부분이 크샤트리아 이상의 신분을 지닌 사람들이었다는 상징적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기층 민중에게 어필하는 면이 약했다는 지적입니다. 기층 민중에게는 통痛이 훨씬 더 민감하고 절박한 문제입니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해 육체적으로 더 쉽게 많이 아픈 문제는 분명히 통痛의 문제이지 고苦의 문제가 아닙니다.

 

붓다 이후 제자들은 이 문제를 인식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보완하여 현실 삶의 아픔을 보듬는 쪽으로 나아가지 않은 듯합니다. 적어도 『초기불교입문』에 정리된 바에 따르면 그 문화적 한계를 극복하는 것보다는 스승의 ‘해체’설법을 번다한 소박 분석체계로 만들어 도그마 짓는데 심혈을 기울였던 듯합니다. 모든 종교·사상의 에피고넨이 걸었던 길을 그들도 따라간 것입니다.

 

4. 통痛과 고苦를 이치에 따라 처음부터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앞서 통痛은 육체에, 고苦는 정신에 일단 귀속시켰습니다. 상호침투에 대해서도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얼개를 전제하고 볼 때 적어도 현실의 인간 생명현상에서 통痛을 앞서는 고苦는 없습니다. 육체가 있고서야 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가 없는 정신 현상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인간의 영역 밖입니다. 『초기불교입문』에서 나타나는 바 고苦의 대표적 원인인 갈애渴愛는 기본적으로 목마름입니다. 육체로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집착적 욕망인 갈애를 정신 현상으로까지 확대한다 해도 뿌리는 결국 육체입니다. 고苦 앞서 통痛이 갑니다. 통痛이야말로 인간의 숙명입니다. 고苦는 거의 대부분 선택의 문제입니다. 고苦를 푸는 도道로 풀리지 않는 통痛이 있습니다. 그 통痛은 의학의 영역이라 할 것입니까. 그러면 고苦 또한 정신의학의 영역이라 하면 그만일 것입니다. 좀 더 쫀득하게 촘촘하게 진실에 육박하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그게 『초기불교입문』에서 저자가 자주 말하는 “고구정녕한” 붓다의 정신이 아닐까요.

 

0. 『초기불교입문』 앞에 향 맑은 마음으로 다시 앉습니다. 아니 이 가르침을 내린 붓다 앞에 삼가 온몸으로 엎드립니다. 문득 질문 하나 솟아오릅니다.

 

“일 년 넘도록 딸의 시신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다윤 엄마의 울부짖음을 고苦라 할 것입니까?”

 

대답이 “그렇다.” 하면 저는 붓다의 따귀를 후려갈기고 돌아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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