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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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은 전염, 긴장 해소, 또는 반사의 양상으로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심미적 반성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의 심미화는 비심미적이다. 예컨대 ‘좋아요’와 같은 취미 판단을 위해 오랜 시간을 두고 대상을 감상할 필요는 없다. (35-36쪽)

 

이른바 산업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돈이라는 척도로 다른 모든 가치를 제압한 이데올로기에 부역한 사람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여행과 관광을 혼동하는 것입니다.

 

여행은 낯선 삶에 깃들어 심미성을 탐색함으로써 자기 삶을 광활함spaciousness 또는 영성spirituality 차원으로 열어가는 일입니다. 관광은 낯선 삶의 바깥에서 기웃거리며 ‘좋아요’ 하고 돌아다니는 일입니다. 여행에는 “심미적 반성이 개입”합니다. 관광은 “전염, 긴장 해소, 또는 반사의 양상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둘의 이런 차이에는 시간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심미적 반성은 머물러 있을 시간을 요청합니다. 전염, 긴장 해소, 반사는 신속한 반응과 확산·회전을 요구합니다. 전자는 돈이 안 되고 후자는 돈이 됩니다. 그러고 보면 저 산업화의 부역자들은 여행과 관광을 혼동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여행과 관광을 혼효混淆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의적 혼효로 대박을 기획하는 일은 이제 우리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힐링입니다. 힐링은 본디 심미적인 차원을 지닌, 그래서 치료와는 전혀 다른 고품격 치유를 의미하는데 이 불량한 전시사회·투명사회가 싸구려 전염, 긴장 해소, 반사 상품으로, 그러니까 즉석치료로 졸지에 전락시켜버렸습니다.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연예인과 그에 버금가는 종교인 등을 동원하여 숙성·발효 안 된 인스턴트 힐링을 마구 팔아 젖히고 있습니다. 힐링이든 뭐든 빠른 속도로 돈만 만들 수 있다면 닥치는 대로, 함부로 덤비는 이 불량한 전시사회·투명사회의 제1강령은 이것입니다.

 

심미성을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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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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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의 강제는 가시적인 것을 착취한다.·······전시의 강제는 결국 우리에게서 얼굴을 빼앗아간다. 자신의 본래 얼굴로 머물러 있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다.(35쪽)

 

사십년 전 봄날 기억 하나를 불러내봅니다. 군인이 일반대학생에게도 군사훈련을 시키던 어두운 시절이었습니다. 그 군사훈련을 교련이라 불렀습니다. 어느 교련 시간에 교수부장이라는 자가 돌연 지휘봉으로 제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이발하고 와! 안 그러면 학점 안 준다.” 교련 학점 없으면 졸업이 불가능했지만 저는 그 길로 강의실을 나와 수업에 복귀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이십 년 가까이 저는 삼단 같은 머리채가 바람 불면 어깨를 쓸고 지나가는 치렁치렁한 헤어스타일을 고수했습니다.

 

군인이 남자 대학생 머리카락 길이를 강제했다니, 오늘의 대학생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어찌 생각할까요? 아니! 경찰이 여자 대학생의 치마 길이를 강제했다는 말을 들으면 대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머리카락도 치마도 일사불란한 전시성 속에 도열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 시대의 투명한 암흑을 모르는 것으로 편안히 살아간다면 오늘의 대학생은 과연 이 공동체의 주체일 수 있을까요? 이 무지로 말미암아 또 다시 그런 투명한 암흑이 엄습하고 있는 상황에서 오늘의 대학생은 과연 무엇일까요?

 

대학생 한 명의 살해에 분노하여 무수한 대학생들이 짱돌을 들고 거리에 섰던 시대를 우리는 아프고도 아름다웠던 역사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고등학생 이백 쉰 명이 살해되었음에도 괴괴히 침묵하는 대학생으로 넘실거리는 이 시대를 우리는 장차 어찌 기억하게 될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 시대 대학생이었던 사람의 아들딸이 지금 이 시대 대학생이 되었고, 그 사회는 또 그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이 사회의 이 대학생은 움직이지 않으니 이 아프고도 또 아픈 풍경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요?

 

실로 경천동지할 일들을 겪어낸 시간이지만 지난 사십년은 “결국 우리에게서 얼굴을 빼앗아간” 세월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독재자의 죽음에서 시작된 울퉁불퉁한 자주민주통일의 길은 결국 매판독재반통일 세력의 화려한 복귀로 매끈하게 재포장되어 전시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자, “자신의 본래 얼굴로 머물러 있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다.”고 절망해야 하는지요. 사십년 전 봄날, 머리카락, 아니 얼굴을 착취당하지 않으려 발길 돌렸던 대학생, 오늘 거울 앞에 섭니다. 얼굴 남아 있나 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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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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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가치는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외양에 달려 있다. 그래서 전시의 강제는 성형수술과 피트니스클럽에 대한 강박을 낳는다. 성형수술의 목표는 전시가치의 극대화에 있다. 오늘날에는 내적 가치를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외적인 척도를 제공하는 자가 모범으로 여겨지고, 사람들은 폭력적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그러한 척도에 자신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전시의 명령은 가시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절대화를 초래한다. 비가시적인 것은 전시가치, 주의를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에 존재하지조차 않는 것이 된다.(34-35쪽)

 

일부 서구 언론들은 대한민국을 성형수술의 Capital이라 부릅니다. 몸 숭배 문화라며 그 저급함을 비웃습니다. 저들의 말이 다 옳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인구 대비 성형수술 건수가 압도적인 세계 1위인 게 사실이고 보면 마냥 부인할 처지 또한 아님에 틀림없습니다.

 

물론 몸 숭배, 정확히는 외모 숭배가 다른 어떤 숭배에 비해 더 저급하거나 해괴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외모 숭배는 돈 숭배, 권력 숭배, 종교 숭배의 맥락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돈·권력·종교는 인간을 “내적 가치”로 판단하지 않고 “외적인 척도”로 판단하는 3대 근거입니다. “그러한 척도에 자신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충성이자 헌정인 한 성형수술이든 뭐든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문제는 성형수술의 그 충성·헌정 행위가 인간 자신의 몸에 칼을 대는 “폭력적 수단”이라는 데 있습니다. 돈과 권력과 종교의 타락상을 급기야 인간 생명의 물적 구현인 몸에 새긴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도 “전시가치의 극대화”를 위한 “아름다운 외양”만을 만들어 넣는다는 데 있습니다. 이로써 투명사회가 육화embodiment되었습니다. 악마의 성육신Embodiment이 마침내 완성되었습니다.

 

악마가 노리는 바는 간단명료합니다. 생명의 깊이를 강탈하여 표면으로만 존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깊이는 생명에 있습니다. 더 깊은 삶이 있느냐에 대해 논란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더 얕은 삶은 엄존한다는 사실입니다. 표면으로 투명성을 확립하고 그것에 사로잡힌 삶, 사로잡혔으면서 사로잡았다고 착각하는 삶, 소유의 대박을 영혼의 대박이라 굳게 믿는 삶 말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으로 가득한 세상이 바로 악마의 대동大同입니다.

 

악마의 대동은 물론 전 지구적 프로젝트입니다. 성형수술을 필두로 한 이른바 허영소비의 세계 시장 규모는 4조 5천억 달러에 달합니다. 이 시장의 성장을 한국·중국·인도가 주도한다고 합니다. 특히 18.4%에 이르는 한국의 가파른 성장은 세월호사건 유가족을 세금 도둑으로 모는 현실과 대비되어 실로 통렬한 아이러니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외모의 결함이 어떤 사람에게 정신장애의 요인이 될 수 있어 성형수술로써 건강한 삶을 되찾아주었다는 개별적 진실과 어떤 나라가 ‘성형공화국’이라는 사실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오늘 여기서 직면하고자 하는 것은 ‘성형공화국’입니다. 그 공화국의 국민입니다. 주권을 가졌다고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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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되는 사회는 포르노적 사회다.········

  숨겨져 있는 것, 접근 불가능한 것, 비밀스러운 것과 같은 부정성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과도한 가시성은 외설적이다. 다름의 부정성이 전혀 없는 과다 커뮤니케이션의 매끄러운 흐름 역시 외설적이다. 모든 것을 커뮤니케이션과 가시성의 영역에 내던지는 강압적 힘은 외설적이다. 포르노적 구경거리로 내놓은 육체와 영혼은 외설적이다.(32-34쪽)

 

하필 포르노만 외설적이고, 하필 외설만 색정적이고, 하필 색정만 쾌락적인 것은 아닙니다. 현대사회 자체가 망상적 쾌락에 중독된 향락사회입니다. 포르노와 외설을 돋을새김 하는 까닭은 색sex 문제가 제의-전시, 공적 윤리-사적 욕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월등한 도발적 쟁점이기 때문입니다.

 

향락사회의 전반적인 음탕함과 난잡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정치를 보면 그 풍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정치적 음란의 기본은 “대놓고” 해먹는 것입니다. 여기에 “함부로”를 더하면 그야말로 설상가상입니다. 대놓고 해먹는 짓도 기가 찰 판인데 함부로 해먹는 짓과 맞닥뜨리면 기도 안 찹니다. 바로 이 경지에 오른 이명박 정권 이후 집권세력의 정치적 음란은 단군 이래 단연 발군이라 할 만합니다.

 

저들이 함부로 음란함을 드러내는 것은 발칙한 자신감에서 비롯하였습니다. 그 자신감은 뇌 없는 부동의 추종자들과 알량한 기득권에 눌러앉아 꽃놀이 패 하고 있는 야당에 힘입은 바 큽니다. 하지만 이 모든 질탕한 힘은 제 나라를 팔아 스스로 외설적 삶에 빠져든 매판집단과 식민세력의 계략에서 온 것입니다. 저들의 준동이 극에 달했다는 느낌과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라는 느낌이 동시에 드는 것은 암울한 전망 때문일 것입니다.

 

세월호사건, 이후 처리 과정을 보면 착잡하기 그지없습니다. 아이들의 희생이 우리사회의 ‘발효’제로 작동하지 못하고 도리어 ‘부패’를 심화시키는 계기로 악용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놓고 함부로 저지르는 권력의 외설적 악행이 이제는 “거침없다”는 느낌으로 가고 있습니다. 외설 매판이 주도하는 포르노 국가, 그 국민으로 태어나 사는 인연, 슬프고 또 슬픕니다.

 

정작 슬픈 일이 남아 있습니다.

 

망각.

 

그렇습니다. 포르노 국가의 지휘 아래 포르노 언론은 아이들이 살해되는 과정을 “과도한 가시성”으로 “과다 커뮤니케이션의 매끄러운 흐름”에 실어 실시간 “전시”했습니다. 이 기억을 잊는다면 오늘 여기는 저주받은 슬픔의 시공일 것입니다. 죽는 날까지, 아니 죽어서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최소한 불망不忘의 제의로라도 포르노 외설 판에 맞서야만 합니다. 이것이 역사에 대한 예의입니다. 아이들에 대한 예의입니다. 아니, 인간으로서 우리 자신에 대한 예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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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secret, secretus), 구획, 폐쇄의 부정성은 제의가치의 본질적 구성 성분이다. 사물들이 모두 상품화되어 전시되지 않으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는 긍정사회에서 사물들의 제의가치는 전시가치에 밀려 사라지고 만다. 전시가치의 관점에서 볼 때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자기 안에 조용히 있는 것, 홀로 머물러 있는 것은 더 이상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사물들은 오직 보이는 한에서만 가치를 획득한다.(28-29쪽)

 

현대사회 또는 서구문명을 시각독재로 규정하는 일은 매우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남성 가부장의 ‘중심시각’에 들어오는 상품으로 “전시되지 않으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는”, 오직 그렇게 “보이는 한에서만 가치를 획득”하는 사물들로 가득 찬 세상이기에 말입니다.

 

그 사물들 중에 명품으로 전시된 인간이 가장 좋은 상품임은 물론입니다. 하여 인간은 대박 나는 상품이 되기 위하여 자신을 전시하는 일에 죽기 살기로 몰입합니다. 각종 대중매체에 전시되어 돈과 명성을 쓸어가는 이른바 ‘셀렙’celebrity의 언행 모두가 전시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전술의 산물입니다. ‘셀렙’은 자기 패거리를 만들어 대박을 더 집중시킵니다. 그럴수록 ‘루저’looser의 쪽박은 확산됩니다. 대박과 쪽박의 양극화, 궁극적으로 신노예제 사회를 완성하는 것이 전시사회 프로젝트입니다.

 

자기 안에 조용히 있는 것, 홀로 머물러 있는 것”의 향기는 시각독재 사회에서 가치가 없습니다. 아니, 존재 자체가 없습니다. 오직 눈에 띄어야 합니다. 눈에 띄는 것은 없어도 있는 것입니다. 코로 맡아지는 것은 전혀 무의미합니다. 코로 맡아지는 것은 있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 김선우는 진실을 이렇게 밝혀줍니다.

 

“후각은 생의 비밀, 낮은 지대의 뒷골목에 가장 핍진하게 밀접해 있는 감각이며 가장 능동적으로 어딘가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감각이다.”(『김선우의 사물들』130쪽)

 

능동적인 흐름으로서 존재하는 도저한 생의 감각은 무엇입니까? 그 이름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 자체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생의 비밀, 낮은 지대의 뒷골목이란 인간이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트라우마의 거처이며, 가장 예민한 감정의 결이며, 인격적 사회적 본질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따라, 사건을 따라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그것이 나自입니다. 나는 그런 것입니다.

 

요컨대 나는 관계 맺는 존재로서 인간이 상처를 따라 그려 나아가는 신음과 치유의 궤적입니다. 신음은 반응reaction이며 치유는 감응response입니다. 물론 감응은 반응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반응의 불을 댕기는 것이 바로 후각입니다. 냄새 맡지 못 하면 결국 치유는 없는 것입니다. 하여, 살아야 하는, 살아 내야만 하는, 생명은 끊임없이 냄새를 좇아 흘러가는 것입니다.

 

나를 가리키는 한자, ‘스스로 자自’는 갑골문자 형태로 볼 때 코를 본뜬 것이라고 합니다. 고대 동아시아인은 왜 코로써 자기 자신, 그러니까 자아를 환유換喩 또는 제유提喩하였을까요? 그들이 꿈꾼 존재, 그들이 사랑한 가치는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紛郁郁其遠蒸兮분욱욱기원증혜

滿內而外揚만내이외양

情與質信可保兮정여질신가보혜

羌居蔽而聞章강거폐이문장

 

고운 향기 물씬물씬 멀리 퍼지니

안에 가득 차서 밖으로 날리는 것이네.

진실과 기품을 미쁘게 지키면

아! 가려 두어도 그 내음 모두 맡으리.

 

굴원屈原의 〈사미인思美人〉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가려 두어도 모두 그 내음을 맡을 수 있는 그런 사람, 전시되지 않아도 가치 있는 그런 사람이 모름지기 참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 그런 삶, 그런 사랑을 되찾기 위해 이제 여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후각혁명의 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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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07 14: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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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07 14: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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