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평점 :
분리(secret, secretus), 구획, 폐쇄의 부정성은 제의가치의 본질적 구성 성분이다. 사물들이 모두 상품화되어 전시되지 않으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는 긍정사회에서 사물들의 제의가치는 전시가치에 밀려 사라지고 만다. 전시가치의 관점에서 볼 때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자기 안에 조용히 있는 것, 홀로 머물러 있는 것은 더 이상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사물들은 오직 보이는 한에서만 가치를 획득한다.(28-29쪽)
현대사회 또는 서구문명을 시각독재로 규정하는 일은 매우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남성 가부장의 ‘중심시각’에 들어오는 상품으로 “전시되지 않으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는”, 오직 그렇게 “보이는 한에서만 가치를 획득”하는 사물들로 가득 찬 세상이기에 말입니다.
그 사물들 중에 명품으로 전시된 인간이 가장 좋은 상품임은 물론입니다. 하여 인간은 대박 나는 상품이 되기 위하여 자신을 전시하는 일에 죽기 살기로 몰입합니다. 각종 대중매체에 전시되어 돈과 명성을 쓸어가는 이른바 ‘셀렙’celebrity의 언행 모두가 전시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전술의 산물입니다. ‘셀렙’은 자기 패거리를 만들어 대박을 더 집중시킵니다. 그럴수록 ‘루저’looser의 쪽박은 확산됩니다. 대박과 쪽박의 양극화, 궁극적으로 신노예제 사회를 완성하는 것이 전시사회 프로젝트입니다.
“자기 안에 조용히 있는 것, 홀로 머물러 있는 것”의 향기는 시각독재 사회에서 가치가 없습니다. 아니, 존재 자체가 없습니다. 오직 눈에 띄어야 합니다. 눈에 띄는 것은 없어도 있는 것입니다. 코로 맡아지는 것은 전혀 무의미합니다. 코로 맡아지는 것은 있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 김선우는 진실을 이렇게 밝혀줍니다.
“후각은 생의 비밀, 낮은 지대의 뒷골목에 가장 핍진하게 밀접해 있는 감각이며 가장 능동적으로 어딘가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감각이다.”(『김선우의 사물들』130쪽)
능동적인 흐름으로서 존재하는 도저한 생의 감각은 무엇입니까? 그 이름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 자체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생의 비밀, 낮은 지대의 뒷골목이란 인간이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트라우마의 거처이며, 가장 예민한 감정의 결이며, 인격적 사회적 본질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따라, 사건을 따라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그것이 나自입니다. 나는 그런 것입니다.
요컨대 나는 관계 맺는 존재로서 인간이 상처를 따라 그려 나아가는 신음과 치유의 궤적입니다. 신음은 반응reaction이며 치유는 감응response입니다. 물론 감응은 반응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반응의 불을 댕기는 것이 바로 후각입니다. 냄새 맡지 못 하면 결국 치유는 없는 것입니다. 하여, 살아야 하는, 살아 내야만 하는, 생명은 끊임없이 냄새를 좇아 흘러가는 것입니다.
나를 가리키는 한자, ‘스스로 자自’는 갑골문자 형태로 볼 때 코를 본뜬 것이라고 합니다. 고대 동아시아인은 왜 코로써 자기 자신, 그러니까 자아를 환유換喩 또는 제유提喩하였을까요? 그들이 꿈꾼 존재, 그들이 사랑한 가치는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紛郁郁其遠蒸兮분욱욱기원증혜
滿內而外揚만내이외양
情與質信可保兮정여질신가보혜
羌居蔽而聞章강거폐이문장
고운 향기 물씬물씬 멀리 퍼지니
안에 가득 차서 밖으로 날리는 것이네.
진실과 기품을 미쁘게 지키면
아! 가려 두어도 그 내음 모두 맡으리.
굴원屈原의 〈사미인思美人〉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가려 두어도 모두 그 내음을 맡을 수 있는 그런 사람, 전시되지 않아도 가치 있는 그런 사람이 모름지기 참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 그런 삶, 그런 사랑을 되찾기 위해 이제 여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후각혁명의 길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