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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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명사회는 쾌락에 대해 적대적이다.·······투명성의 강제는 쾌락의 놀이 공간을 파괴한다. 명백성은 유혹 대신 절차만을 허용한다. 하지만 유혹자는 돌아가는 길, 갈라진 길, 미로처럼 꼬인 길을 걸어간다. 그는 다의적인 기호를 동원한다.·······다의성과 양가성, 비밀과 수수께끼의 유희는 에로틱한 긴장을 고조시킨다. 투명성과 명백성은 에로스의 종언을 초래할 것이다. 즉 포르노의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다.·······환상은 쾌락의 경제학에서 본질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전혀 가려지지 않은 대상은 환상을 차단한다.·······상상 속의 서사적 우회로를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 직접적인 향락은 포르노적이다.·······상상력은 선명하지 않은 것, 불명확한 것을 필요로 한다. 상상력은 스스로에 대해 투명하지 않다. 자신에 대한 투명성은 이성의 특징이다. 그래서 이성은 놀지도 않는 것이다. 이성은 명확한 개념을 가지고 일한다.(38-41쪽)

 

혹시, 혹시 말입니다. 사는 동안, 이런 의문을 품으신 적 있으십니까?

 

“내가 왜 여기 있고, 또 왜 이렇게 살아가나?”

 

그 의문에 어떤 답을 내린 적 있으십니까? 답을 내린 뒤에 어떤 감정이 따라오는지 느낀 적 있으십니까?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현재 삶을 당연하다고 전제하고 살아갑니다. 돌아보는 일 없이, 질문 없이, 본디 가던 길을 더욱 더 열심히 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믿습니다. 이런 삶은 일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아니 삶 자체가 일이 됩니다. 일로서의 삶은 의미에 매달리게 됩니다. 의미에 매달리면 결국 그 끝에 똬리 틀고 있는 허무를 마주하게 됩니다. 아이러니입니다.

 

자신의 현재 삶이 당연하다는 전제를 깨뜨리면 과연 어찌 되겠습니까? 돌아보면, 질문하면 일단 멈출 수 있습니다. 멈추면 제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대로 생각하면 삶에서 놀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니 삶 자체가 놀이라는 진실을 깨닫게 됩니다. 놀이는 의미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의미에 매달리지 않으면 허무를 마주하지 않게 됩니다. 아이러니입니다.

 

투명사회는 삶에 깃든 유희성을 착취하여 노동성을 극단화합니다. 감성을 수탈해 이성 숭배의 제물로 바칩니다. 이런 사회는 짝퉁 쾌락, 그러니까 “상상 속의 서사적 우회로를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 직접적인 향락”인 “포르노”로 쾌락을 오로지 배설의 세계로 쪼그려 붙입니다. 포르노 향락은 노동성 극단화를 위한 마약일 뿐입니다. 결국 투명사회는 인간으로 하여금 마약 먹어가며 노동만하다가 허무로 스러지도록 하는 저주 시스템입니다.

 

인간이 이 저주를 풀려면 본디 지닌 “상상력”을 되찾아 “다의적인 기호”를 해석해가며 “돌아가는 길, 갈라진 길, 미로처럼 꼬인 길”을 가는 놀이로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치를 따지더라도 인간의 생명 자체가 놀이의 산물이지 일의 산물은 아닙니다. 사랑을 일이라 하며, 색사色事sex를 일이라 하는 자 그 누구입니까. 이치를 따지더라도 인간의 삶 자체가 놀이이지 일은 아닙니다. 놀이 위한 일인 것이지 일 위한 놀이인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일도 거룩합니다. 단, 놀이에 깃든 일일 경우에 그러합니다. 투명사회의 근원적 죄악성은 이렇게 본말을 전도한 것에서 용서할 수 없는 무엇으로 드러납니다.

 

오늘, 5.18의 태양 아래서 문득 생각합니다. 35년 전 그 날, 계엄군이 잡은 총은 일의 총이었습니다. 투명사회를 위해 복무하다 허무로 스러진 잘못된 일이 바로 그들의 총질이었습니다. 시민군이 잡은 총은 놀이의 총이었습니다. 투명사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기꺼이 즐거이 싸우다 그들은 의미 충만한 죽음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죽음 앞에서 공포를 꿰뚫고 “사랑해!”를 외친 4.16의 아이들이 여기 포개집니다.

 

여전히 5.18에도 4.16에도 빨갱이 책동이 있다고 신앙하는 투명사회의 주구들이 날뜁니다. 가능성 희박한 일이기는 하되 제 기도에 어떤 신께서 응답하신다면 이 주구들에게 질문하는 축복을 내려주십사 두 손을 모으겠습니다.

 

“내가 왜 여기 있고, 또 왜 이렇게 살아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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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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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는 내적 논리에 따라 모든 형태의 거리를 제거한다.·······거리가 사라짐에 따라 어떤 심미적 관찰도, 어떤 머무름도 불가능해진다.·······거리가 없다는 것은 가까움을 뜻하지 않는다. 거리의 소멸은 오히려 가까움을 파괴한다.·······투명성은 모든 것을 탈거리화하여ent-fernen 똑같이 거리가 없는 존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존재로 만들어버린다.(36-37쪽)

 

진부한 이야기지만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닙니다. 무관심입니다. 미움은 관계의 상존尙存입니다. 무관심은 관계의 부재입니다. 관계에는 거리 개념이 성립합니다. 관계의 부재에는 거리 개념 자체가 제거됩니다. 이것이 “탈거리”의 핵심 의미입니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사랑은 상호작용입니다. 상호작용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을 전제합니다. 완전히 같은 사람, 그러니까 한 사람 (사이(?))에 사랑은 애당초 있을 수 없습니다. 거리 개념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탈거리”의 핵심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존재”라는 말은 적절한 거리에 있는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멀다, 가깝다’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거리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완전 쪼개지거나 완전 포개진 존재라는 뜻입니다.

 

투명성의 “내적 논리”는 폭력적 단일화를 강제합니다. 여기에 따르지 않는 존재는 ‘그래도 관계가 잔존하는 변방’에 두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비존재로 만들어버립니다. 드라마에서 부자가 빈자에게 던지는 이 한 마디, “저 물건 치워!”가 웅변입니다.

 

시방 대한민국의 권력은 득의만면 탈거리화의 강력 드라이브를 걸고 있습니다. 영구집권의 신천지가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37% 요지부동의 투명신도가 확보되었으니 나머지 물건들을 치워버리면 됩니다. 팔아서 돈을 만드는 것이죠. 참 쉬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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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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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은 전염, 긴장 해소, 또는 반사의 양상으로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심미적 반성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전시가치로 채워진 이미지들은 복합성을 띠지 않는다.·······살펴보고 성찰하고 숙고하게 만드는 굴곡진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의미는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고속순환에 방해 요인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투명성은 의미의 공허와 긴밀하게 관련된다.(35-36쪽)

 

재벌을 두둔하는 자들은 마치 재벌이 수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듯 말하지만 진실은 정반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착취하여 재벌의 부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독재를 두둔하는 자들은 마치 위대한 영도자 한 사람이 국민을 지켜내는 듯 말하지만 진실은 정반대입니다. 국민의 목숨 값으로 독재자의 권력이 승승장구하는 것입니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잘난 영웅이 세상을 구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영웅은 다만 신화로 존재할 따름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자는 못난, 이름 없는, 돈 안 되는, 그러니까 느린 자들입니다. 광주민중항쟁 때 전두환 일당의 탱크를 막아낸 것이 가녀린 손 맞잡아 인간 띠 만든 수녀들이었듯 말입니다.

 

고속투명사회는 세 부류의 사람을 죽여 그 목숨 값에 편승하여 질주합니다. 아름다움을 피워내는 사람. 대칭성을 빚어내는 사람. 가치를 일구어내는 사람. 거꾸로 말하면 이 세 부류 사람의 희생으로 그나마 이 인간세상은 파멸을 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아름다움을 피워내는 사람.

 

아름다움은 추함의 반대말이 아닙니다. 추함은 접힌 아름다움입니다. 아름다움은 추함을 품습니다. 품어 발효되기를 기다립니다. 발효되면 펼쳐냅니다. 펼쳐진 추함은 향기를 피워내는 아름다움으로 복귀합니다. 적어도 인간세상에서 이 일은 자연 과정이 아닙니다. 피땀 어린 애씀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이 애씀은 속도를 포기해야 합니다. 돈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 포기로써 느린 불투명사회의 불씨를 그나마 지켜가는 것입니다. 이런 바보짓 하는 사람의 아픔을 저는 심미장애, 그러니까 예술장애라 부릅니다.

 

다음, 대칭성을 빚어내는 사람.

 

진리는 하나라고 말할 때, 그 하나는 하나둘의 하나가 아닙니다. 그 하나는 전체를 말합니다. 전체는 대칭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대칭으로 서로마주하는 짝은 완전히 다르지도 않고 완전히 같지도 않습니다. 완전히 다르지도 않고 완전히 같지도 않으므로 둘 사이에서 무한한 복합성의 스펙트럼이 빚어집니다. 이렇게 빚어지는 복합성은 느림과 기다림의 산물입니다. 느림과 기다림이 배어나오는 주름진 골짜기에서 돈이 쏟아져 나오지는 않습니다. 이런 바보짓 하는 사람의 아픔을 저는 화쟁장애라 부릅니다.

 

끝으로, 가치를 일구어내는 사람.

 

생명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습니다. 아니 그 자체로 가치입니다. 가치를 일구어낸다는 말은 그러므로 무가치를 강요하는 힘에 대한 저항입니다. 버림받은 사람은 무가치를 강요받은 사람입니다. 버림받은 사람은 끊임없이 가치를 일구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일구어내는 힘을 빼앗겨버렸기 때문에 자신 밖의 모든 존재에게서 가치를 일구어냅니다. 이것이 다름 아닌 의미화입니다. 의미화는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가치를 일구어내는 상상력은 돈을 긁어낼 수 없습니다. 이런 아픔이 우울장애입니다.

 

아픈 사람이 아픈 세상을 지킨다는 진실은 이미 유마힐이 천명한 바입니다. 이 진실을 사는 사람은 끝내 아픔을 안고 갈 것입니다. 세상이 아픈데 혼자만 멀쩡하게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완벽하게 나을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세상과 함께 아픈 사람은 비애를 받아들이면서 장엄을 향해 숭고의 의지를 버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여전히 아픈 채 바로 이 순간 길을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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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는 느리다. 의미는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고속순환에 방해 요인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투명성은 의미의 공허와 긴밀하게 관련된다.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거대한 더미는 공허에 대한 공포Horror vacui에서 생겨난다.(36쪽)

 

오랫동안 우울증을 상담으로 치료해온 제 경험에 따르면 우울증 앓는 사람은 예외 없이 근본적으로 똑똑하고 착합니다. 착하다는 이야기는 다른 기회로 미루고 똑똑하다는 이야기만 여기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똑똑하다는 것은 의미 맥락에 대한 섬세한 감각을 지녔다는 말입니다. 의미 맥락을 섬세하게 따라가다 보면 두 가지 불이익을 만납니다.

 

하나는 “의미는 느리다.”와 관련된 것입니다. 고속의 투명사회에 착취당한다는 것이 불가피합니다.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고속순환”에 치이고 밀리면서 사회의 변방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의미 있는 삶을 통해 인격의 성취를 꿈꾸지만 인생의 성공에서 소외됨으로써 ‘똑똑한데 무능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맙니다. 하여 우울증으로 침륜되어 들어갑니다.

 

다른 하나는 재미를 놓치는 것입니다. 사람 삶의 두 축은 의미와 재미입니다. 두 축이 균형을 이루면 기품 있는 행복을 구가할 수 있습니다. 의미의 결에 너무 기울어지면 자연히 재미에서 멀어집니다. 재미란 것이 처음에는 부박하게 보이고 중간에는 하찮아 보이고 나중에는 부도덕해 보입니다. 이렇게 재미와 절연되면서 종당 우울증으로 미끄러져 내려갑니다.

 

의미 맥락의 주름을 걷어내어 매끄러운 표면만 남긴 뒤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고속순환”을 즐기는 것이 다름 아닌 고속투명사회입니다. 재미의 “거대한 더미”로 구축한 향락사회입니다. 향락의 끝은 공허입니다. “허에 대한 공포Horror vacui”로 향락사회는 더더욱 재미에 집착합니다. 재미에 집착할수록 중독된 영혼은 제3의 강령에 매달립니다.

 

“의미성을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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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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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가치로 채워진 이미지들은 복합성을 띠지 않는다. 그런 이미지들은 단순 명료하고, 그래서 포르노적이다. 여기서 살펴보고 성찰하고 숙고하게 만드는 굴곡진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복합성은 커뮤니케이션의 속도를 늦춘다. 비심미적인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가속화를 위해 복합성을 축소한다.(36쪽)

 

한의원에 와서 진단 받는 분들 가운데 적잖이 물어오는 것이 다름 아닌 체질 여하입니다. 거의 예외 없이 저는 “각자 자신의 경향성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조금 더 분명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한평생 변하지 않는 개념으로서 체질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 체질은 사상‘요법’의 네 가지 가운데 하나인가, 하는 질문에 저는 모두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먼저, 체질은 변하지 않는가에 관하여.

 

우리사회에서 체질이라는 용어는 이미 변하지 않는 타고난 성질이라는 뜻으로 굳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설혹 타고난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한 사람의 몸 전체를 주도하지는 못합니다. 전체적 관점에서 보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당최 불가능합니다. 사람의 몸은 자체 구조 못지않게 외부조건과 상호작용하는 사건으로서 측면이 크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상‘요법’의 경우 이제마가 처음부터 이런 불변의 체질을 전제했다면 이는 그가 지니고 있는 삶의 조건에 터한 하나의 사유 프레임일 것입니다. 개인의 사유 프레임에 인간의 몸을 맞출 수는 없습니다.

 

다음, 체질은 사상‘요법’이 구별하는 그 넷뿐인가에 관하여.

 

넷이라는 숫자는 그저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방편은 실재를 드러내기 위한, 하여 실재보다 작은 도구입니다. 마치 무수한 중간색의 존재를 빨주노초파남보로 묶어낸 일곱 빛깔 무지개 개념과 같습니다. 구태여 이름 하면 수많은 “점이체질”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점이체질이 아닌 전형적인 체질이 도리어 예외적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좀 더 날카롭게 말하면 전형에 완벽히 부합하는 체질의 소유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이치상 맞습니다. 이는 마치 현실세계에서 100% 입자이기만 한 빛도, 100% 파동이기만 한 빛도 존재할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사람의 몸은 “단순 명료”하지 않습니다. “포르노적”이지 않습니다. “복합성을 띠”고 있습니다. “살펴보고 성찰하고 숙고하게 만드는 굴곡진 구석”으로 가득합니다. 사람의 몸을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복합성을 축소”하는 일이 아닙니다. “속도를 늦”추는 일입니다. 시간을 들여 살펴보고 성찰하고 숙고해야 합니다. 무한한 주름 속에서 그 결과 겹을 더듬어가야 합니다. 체질이론은 다만 하나의 편법일 뿐입니다.

 

대단한 것처럼 보이는 MRI를 포함한 서구의학의 모든 기계진단 기술은 물론 정교한 진단명, 치료 매뉴얼과 화학합성 약물 모두 사람의 몸을 기계로, 그러니까 투명한 사물로 전제한 것들입니다. 서구의학은 투명사회 건설에 의학이라는 이름으로 부역하는 세력의 신념체계입니다. 서구의학이 전시하는 사람의 몸은 단순 명료합니다. 굴곡진 구석이 없습니다. 삽시간에 떼돈을 벌어다 주는 포르노입니다. 의학이든 뭐든 빠른 속도로 돈만 만들 수 있다면 닥치는 대로, 함부로 덤비는 이 불량한 전시사회·투명사회의 제2강령은 이것입니다.

 

복합성을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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