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에 시달리던 딸아이가 조금 여유를 찾은 듯 어제, 일요일 이른 밤 영화 한 편 예매를 해놓았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함께 영화를 보았습니다. <26년>.


개인적으로 저는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바른 인식 덕분에 70년대 중반학번으로서는 늦깎이로 삶의 방향을 바꾼 사람입니다. 하여 영화 시작 이전부터 뻐근하고 뜨거운 흉통이 제게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영화 중후반부부터는 신열이 온 몸을 휘감으며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한 찰나, 특정 인간을 죽여야만 한다는 간절한 염원 때문에 두 손을 으스러지도록 맞잡은 생애 최초의 경험으로 빨려들고 말았습니다. 누군들, 가슴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뒤섞이다 이내 단 하나의 비원(悲願)으로 비수 끝처럼 예리해진 생명 감각이 온 영혼을 정적으로 몰아넣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후의 총성과 함께 칠흑이 된 화면이 뜬 바로 그 순간, 저는 냉정하게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영화 아닌 현실, 그것이 아닙니다. 염원 아닌 현실, 그것도 아닙니다. 오직, 있어야 하는데 있지 않은, 바로 그 현실입니다. 그 현실로 돌아오자 제 눈에는 전혀 다른 의미의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영화는 영화입니다. 그러나 영화도 사회행위의 일부입니다. 그 사회행위는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의미와 재미가 어우러져 또 하나의 사회행위를 이끌어내기 마련입니다. <실미도>를 보십시오. <도가니>를 보십시오. 이제 <26년>의 차례가 아닐까요. 마지막 장면 그 젊은, 아니 어린 의경의 눈초리를 불씨로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이 영화가 해피엔딩 아닌 것이 퍽 다행스럽습니다. 해피엔딩은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민중에게 허위의식을 심어줍니다. 현실이 그렇지 않음에 대하여 눈감게 만듭니다. 그렇게라도 위안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위안은 중독일 따름입니다. 중독인 위안이 현실을 더욱 어둡게 합니다. 아프디 아프게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당하지 않습니다.


돌아와서 트위터에 이렇게 글을 남겼습니다.

 “5.18은 12.19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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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9 10: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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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1 14: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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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05 15: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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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06 16: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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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배웅하며


요즘 아이들 95%가 을 일상적으로 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를 혹시 접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이들이 욕하는 문제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최근 청소년들과 상담치료를 하면서 알게 된 내용은 의자(醫者)로서, 아니 그 이상으로 깊은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중고등학생끼리는 말할 것도 없고 초등학생끼리도 가입해서 활동하는 부모, 교사 욕하기 사이트 수가 매우 많다고 합니다. 작게는 몇 십 명 정도 크기에서 많게는 몇 천 명에 이르는 큰 것도 있다고 합니다. (2-3만 명 되는 것도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의 손 전화 단축키에 저장된 엄마, 아빠의 호칭부터 일단 욕으로 되어 있습니다. 회원끼리 대화할 때 엄마, 아빠라는 호칭을 써도 안 된다고 합니다. 부모 당사자가 이런 사실을 알면 큰 충격을 받을 테지만 저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럴만한 상황 그럴만한 시공간에서 일어난 지극히 자연스러운 증후라고 생각합니다.


욕의 표면에는 보통 분노와 경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와 경멸의 이면은 공포와 불안, 그리고 그 침전물인 우울로 가득 차 있습니다. 결국 아이들의 욕은 이 사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사회 전반을 거머쥐고 있는, 특히 지배집단 어른들에 대한 공포와 불안, 그리고 우울의 감정을 담은 것입니다.


좀 더 명쾌하게 연결하지요. 아이들의 욕은 우울증의 대표 증상입니다! 아이들이 욕하는 문제를 성품이나 윤리의 차원에서 접근하면 길은 없습니다. 아이들은 지금 아프다고 울부짖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최소한의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는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자, 어떻게 하시렵니까? 인제 아이들의 울부짖음에 어른이, 부모가, 엄마가 답을 할 차례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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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쌤, 엄마한테 꼭 말씀해주세요!



[질문]


저는 3~4년간 우울증을 앓아왔고, 지금은 우울증으로 인해 학업에 실패하고, 대학진학도 포기하고, 사람에 대한 기피현상이 심해져서 일반적이 사회생활이 힘들 정도입니다. 사람자체가 싫어 친구들과 연락을 끊은 지도 1달이 넘어가고, 가족들과의 상태는 우울증을 겪으며 급속히 나빠졌고, 저는 지금 가족들, 특히 엄마에 대한 많은 실망과 배신감들로 괴롭습니다.


자살충동을 자주 느끼고, 자살시도는 한번 있었고, 자살에 대한 생각들도 많이 합니다. 삶이 허무하기만 하고, 공허한 마음만 듭니다. 가끔은 세상 속에 있는 제가 투명한 막에 휩싸여 둥둥 떠다닌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인간이 작게 보이고, 저는 그보다 작게 보입니다. 열등감이나 외로움과 같은 갖가지 부정적인 감정들로 힘이 듭니다.


대학 진학을 다시 결심했지만 공부는 잘 되지 않고, 나아갈 방향도 잡지 못하겠습니다. 흥미가 있는 것도 없고, 절 그나마 오래 붙잡아 두는 것은 판타지, 무협 같은 소설이나 만화책 그리고 TV를 보는 것뿐입니다. 그것조차 좋아하는 감정보다는 지루하고, 재미없지만 그저 멍하게 보는 수준입니다. 이것조차 안하면 제가 정말 인간같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니까요. 어느 것도 제게 긍정적인 마음이나 관심은 끌지 못하고, 그래서인지 꿈도 없습니다. 무언가를 시도해보려고 해도, 인간관계나 여러 능력 면에서 저는 너무 작아져서 생각에 그칠 뿐입니다. 갈수록 소심해지고, 신경질적이게 됩니다. 잘해나가고 싶지만, 사람들 말처럼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도움의 손길이 너무도 필요하지만 주위에는 그럴만한 인물이 없습니다. 병원에는 두 달 정도 다녔지만 의사선생님과 만나면 자꾸만 긴장을 하게 되고, 말을 잘 하지 못했었고, 여러 상황들로 상담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병원을 다니고 싶지만 가족 특히 엄마에게서 또다시 같은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이 두려워 그럴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엄마나 가족들은 제가 유별나다고 생각하고, 공부하기 싫어 핑계를 대는 거라 생각합니다. 저를 전혀 이해해 주지 못하고, 그런 가족들과 대화하는 것이 저에게는 상처일 뿐입니다.


지금 병원을 다닌다면 돈 때문에 가족들에게 말해야할 텐데, 아니 적어도 한사람에게는 말해야할 텐데 가족 중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습니다. 비밀로 해달라고 해서 지켜질 보장도 없고요. 알바를 해서라도 병원비를 구하고 싶지만, 알바 할 때 부딪힐 사람들을 생각하면 포기하게 됩니다. 도움이 필요하지만 주위에는 그런 사람이 없고, 병원을 다니고 싶지만, 그럴 수 없고....... 주위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나아질 방법이 필요합니다. 가족들에게 알리는 게 가장 좋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부모님을 모시고 병원에 갔었지만 부모님에 대한 제 실망만 커졌을 뿐입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가족들에게 알리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선생님....... 저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울증이란 병에서도, 그리고 제 인생에서도 아무런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답변]


1. 그야말로 사면초가시군요. 글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제 인생의 어떤 길목들과 겹쳐지는 바람에 가슴이 자꾸 가라앉는 걸 느꼈습니다. 이 상황에서 어떤 위로의 말이 귀에 들어 오겠습니까만 그래도 곁에 계신다면 등 한 번 따스하게 도닥여 드리고 싶은 마음은 꼭 전하고자 합니다.


2. 지금 상태를 이론이든 임상사례든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도 그닥 마땅해 보이지 않네요. 스스로 아시는 바대로 깊이 있는 대화/상담치료와 약물치료를 시급히 받으셔야 합니다. 이런 때일수록 판단은 간결하게 하셔야 해요. 이것저것 고려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핵심 하나만 붙잡으세요. 우울증에 사로잡힌 자신의 생명을 구출하는 일밖에 달리 선택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돈 걱정하다가 생명 놓치는 일을 선택하실 것입니까? 아직은 이 땅에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그 '사람' 속에 의사도 있는 법입니다. 돈 없다면 치료 안 하겠다는 의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3. 용기를 내셔서 직접 연락을 주시면 좋겠군요. 도와드릴 방도를 찾아보겠습니다. 사시는 곳이 어딘지 등 상세한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제 안타까움도 막연할 수밖에 없거든요. 자, 일단 그 힘부터 내 보세요. 홧팅!


[두 번째 질문]


안녕하세요. 답변을 읽기 전까지 많은 망설임 끝에 읽고, 또 이런 글을 쓰기까지 한 10번은 썼다 지웠다....... 반복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글이 안 써지는지.......


저는 돈이 아깝다거나, 돈이 아까워 치료를 받지 않겠다거나 하는 생각을 절대 해본 적이 없습니다. 상담하는 일이라고 해도 될까요? 그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짐작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제 상황에는 치료가 필요하다는 걸 예전이나 지금이나 제 자신이 느끼고도 있고, 그 치료에 응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제 자신도 진지하고 끈기 있게 치료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돈이 없어 걱정하는 게 맞지만 뭐랄까....... 돈 구할 데는 있지만 뭐든 하기 전에 숨이 턱 막힌다는 게 문제이지요.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알바를 하거나,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거나 가족 중 누구 한사람에게라도 말하여 금전적 지원을 받는 것....... 셋 다 딱 이거다 마음 내켜 할 만한 게 없고, 그나마 알바가 차라리 낫지만....... 이 생각 저 생각 안하려 해도 망설여지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저는 조그만 거에도 상처받고, 또 그 상처받는 거에도 스트레스 받고, 그 스트레스 받는 것에 또 제 자신에게 실망하고....... 그렇게 진행될 것들이 눈앞을 스치니 깜깜하기만 합니다.


저는 **에 살고 있고, 작년까지는 고2때부터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서울에는 친 언니, 오빠가 있어서 부모님과 떨어져서 살았는데 외지 살다보니 건강도 나빠지고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 다시 **로 온 것입니다.


직접 연락한다는 것이 전화말씀이신지? 02-***-**** 이리로 하면 되나요? 선생님이 직접 받으시나요? 아니면 간호사 언니들이.......?


오늘 따라 말투가 이상한 것 같습니다. 제가 느끼기로 공격적인 것도 같고....... 왜이런지 잘 모르겠지만 혹시 선생님도 그렇게 느끼셔서 기분이 상하시지는 않을지 걱정이네요.


[두 번째 답변]


1. 그렇게 망설이면서도 글을 쓰고, 또 읽으시는 일 자체로 이미 치유의 길에 들어서신 것입니다. 우선 그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격려하시면 내면의 힘이 생길 것입니다. 조금 더 용기를 내 보시기 바랍니다.


누군가를 향해 글을 쓰고, 또 그 상대방의 글을 읽는 일, 쉽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어려워해요. 저도 그렇습니다. 많이 망설이고, 또 고치고.......그럽니다. 무슨 일이든 시작할 때 숨 막히고 가슴 조이며 오만 생각 다 하게 되는 거, 웬만한 사람들 다 그래요.


자, 일단 심호흡 한 번 하세요. 그리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세요. 저 많은 사람들이 **님보다 훨씬 강하고 유능하고 행복해 보이겠지만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을 테지요. 중요한 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눈입니다.


물론, 고통은, 당하는 사람에게, 세상에서 가장 큰 법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예민하고, 힘들고, 숨 막히는 느낌이 들게 되었는지 연유를 잘 생각해 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직시함으로써 문제는 해결을 향하여 본격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2. 스스로 공격적이 된 사실을 알아차리신 것도 훌륭해요. 하지만 대뜸 상대방 걱정으로 넘어간 대목이 문제네요. 왜냐하면 상대방도 자신처럼 상처 받지나 않을까, 사실상은 그랬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돈 이야기를 꺼낸 것은 결코 **님이 돈 아끼느라 치료를 안 받으시려 한다거나, 돈 안 내고 어디 치료 받을 데 없나 두리번거린다는 의미에서가 아니었습니다. 전체 문맥을 살피면 능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님이 스스로 공격적이라고 느끼실 만하게 예민한 반응을 보이신 것은 상대방의 현실적인 배려를 나름대로 공격으로 인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반응은 약도 되고 독도 됩니다. 약이 되도록 하는 게 우리 공통 목표 맞지요?


그럼, 아시는 바, 그 번호로 전화를 주세요. 제가 드릴 수도 있지만 스스로 전화하시는 것 자체도 하나의 치유행동이며, 성숙한 사회행동이기 때문에 그리 권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시면 간호사가 그 즉시 저를 바꿔 줄 겁니다.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그 때 나누기로 하지요. 힘!


2008년 초, 이 소녀와 실제로 만나 밥까지 먹여가며 하는 무료 상담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뒤 몇 차례 이메일을 주고받았지요. 그러나 획기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바로 엄마, 다른 하나는 돈. 바로 이게 우리사회의 좌우 아킬레스건입니다. 그중에서도 우선은 엄마.


사회적, 경제적 자립이 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엄마는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우주 자체지요. 엄마가 앞장서면 모든 길이 열립니다. 엄마가 가로막으면 모든 길이 닫힙니다. 이 소녀 가슴에는 분명히 이런 소원이 간절했을 것입니다. 제발, 우리 엄마가 제 상황을 꼭 알았으면 해요! 그런데 상황은 뒤집혀 있습니다. 2010년 벽두에 13살짜리 소녀하고 이런 대화를 했습니다.


[질문]


안녕하세요아직13살인데이런글올려도될지모르겠네요

마음상담실이라고해서올리는건데요

친구들이다들절싫어해요왕따는아니구요그냥대놓고

제가싫다고말하네요그리고엄마도많이아프세요

엄마가혼자일하세요왜냐면부모님이이혼했거든요

저정말마음도아프고힘드네요

친구들은저정말많이싫어하구요저이제중학교올라가는데요

입학식날친구들이절어떻게볼지걱정되네요

방금도많이울었어요엄마아픈것만생각하면진짜눈물나구요

친구들도절싫어하구요어떻해야되죠위로말씀듣고싶네요

정말자기전에안우는날이없습니다힘드네요


[답변]


1. 13살 소녀도 인격이며 생명입니다. 아플 수 있습니다. 위로 받을 권리도 있습니다. 이렇게 온라인으로나마 도움을 청해주셔서 고마워요. 그 용기와 진정에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2. 부모의 이혼에 따른 상처, 어머니에 대한 걱정, 그리고 친구들 때문에 느끼는 소외감....... 누군가 감싸주지 않으면 홀로 감당하기 힘든 아픔이군요. 우선 무조건의 위로를 전합니다. 다만 섣부른 격려는 일단 보류하지요. 이 상황에서 힘내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부추김인지 잘 아는 까닭입니다.


그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 한 가지만 쉽게 말씀드려 볼까 해요. 이렇게 글을 쓰신 것처럼 되풀이해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도록 하세요. "나 아파, 나 슬퍼, 나 외로워!"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듣고 스스로 고개를 끄덕여주세요. 아플만하고 슬플만하고 외로울만하다고 스스로 지지해주세요.


아파해선 안 돼, 슬퍼해선 안 돼, 외로워해선 안 돼, 이러지 마세요. 아니, 나 인제 안 아파, 안 슬퍼, 안 외로워, 이러진 더더욱 마세요. 부정하고 외면할수록 아픔과 슬픔과 외로움은 더 깊어지기 때문이지요. 따뜻하게 자신의 아픔과 슬픔과 외로움을 안아주고 다독여주세요.


부정하고 외면하는 것은 상처에 대하여 병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받아들이고 함께하는 것은 치유를 위해 감응하는 것입니다. 좀 어려운 표현이죠?^^ 하지만 무슨 뜻으로 드리는 말씀인지 알아차릴 수 있죠?^^ 좋아요! 일단 이렇게만 하더라도 마음의 힘이 조금씩 생긴답니다.


3. 오늘은 요기까지. 다시 한 번 위로의 마음을 전해드려요. 쌤이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럼.......^^


13세 초등학생 소녀가 아픈 엄마를 진심으로 걱정합니다. 그래서 눈물 흘립니다. 자기 자신의 우울증을 의심하면서도 엄마를 살피는 마음이 제 온 영혼을 적셔 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 긴 제 임상 기간 동안 딸이나 아들을 위해 이렇게 간절한 마음을 전해 온 엄마가 전혀 없었다는 기억이 새삼 저를 전율하게 합니다. 어떻게 된 걸까요? 도대체 어찌하여 우리가 이런 삶을 살게 된 걸까요?


물론 엄마들 개인의 잘못으로 몰아갈 일, 아닙니다. 아니 엄마들이 더 힘들겠지요. 그들이 산 세월, 얼마나 신산했는지 모르는 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아픔 또한 어디선가 흘러왔을 것입니다. 책임이 있다 해도 온통 뒤집어씌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각성은 고통을 겪은 자에게서 먼저 일어나는 법입니다. 먼저 각성한 자가 먼저 길을 여는 것, 또한 이치입니다. 엄마들의 각성은 잘못한 것에 대한 윤리적 책임 때문이 아니라 왜곡되고 억압된 자신과 자녀의 영혼을 본디 모습으로 되돌리기 위한 생명적 의무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마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진실을 보아야만 합니다. 내 자식이 깊이 병들어 있습니다. 내 자식이 발달불균형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내 자식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의 핵심에는 사회 체제가 있습니다. 이 사회 체제를 주도하고 있는 헤게모니 블록을 상대로 내가, 이 엄마가 싸워야 합니다. 혼자서는 안 됩니다. 연대해야 합니다. 생명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이들이 죽어가면서 사무치게 엄마를 부르고 있습니다. 절통한 마음으로 제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쌤, 엄마한테 꼭 말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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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 무엇보다 사회제도 개혁과 인식 전환이 선결문제 아닐까요?


우울증은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특히 아이들의 우울증은 어른이, 그들이 주무르는 사회가, 제도가, 인식의 틀이 만든 것입니다. 그럼에도 어른들은 아이들 개인 문제로 치부합니다. 사회가, 제도가 얽어매는 족쇄를 풀어줄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아이들을 기성 체제와 가치의 노예로 만들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현실에 대한 어른들의 인식을 전환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아이들 탓만 하고 있습니다.


2010년 12월 8일 어느 일간신문 보도 내용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우리나라 만 15살 학생들의 읽기·수학·과학 실력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가운데 1~4위에 올라 학업성취도가 최상위인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읽기 학습’에 대한 흥미도가 낮고 혼자 읽고 공부하는 능력이 다른 회원국 학생 평균보다 크게 떨어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오이시디는 34개 회원국과 31개 비회원국의 만 15살 학생 약 47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2009년 국제학업성취도 국제비교연구’(PISA 2009) 보고서를 7일 공개했다. 우리나라에선 137개 고등학교와 20개 중학교 학생 5123명이 참가했다.

보고서를 보면, 우리나라는 오이시디 회원국 가운데 읽기 1~2위, 수학 1~2위, 과학 2~4위로 모두 최상위권이었다. 피사 결과는 통계 오차 등을 고려해 순위를 1~2위처럼 범위로 표시한다. 읽기와 수학의 평균점수는 각각 539점, 546점으로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았는데, 특히 수학에선 ‘만년 1위’ 핀란드(541점)를 처음으로 앞질렀다. 과학(538점)은 핀란드(554점)·일본(539)에 뒤졌다.

평가에 참여한 65개국 전체를 비교한 결과에서도 우리 학생들은 읽기 2~4위, 수학 3~6위, 과학 4~7위를 기록해 최상위권이었다. 과학은 2006년 평가 때는 7~13위였으나 이번에 순위가 크게 올랐다. 전체 참여국 비교에서 순위가 약간씩 떨어진 것은 중국의 대도시인 상하이가 새로 평가에 참여해 모든 분야에서 1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피사는 오이시디 회원국 평가를 중심으로 하되, 비회원국은 경제협력 파트너 자격으로 도시 단위로 참여할 수 있다.

성적은 최상위권이지만, 우리나라 학생들의 학습 흥미도는 여전히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번 평가의 집중 분석 과목인 읽기 영역에서 흥미·즐거움 지수가 65개 나라 가운데 28위에 그쳤다. 또 읽기 성취도에 영향을 주는 학습전략 가운데 ‘암기 전략’은 오이시디 평균을 웃돌아 37위로 나타났지만, ‘통제 전략’(자기학습관리능력)은 최하위권인 58위를 기록해 남의 가르침 없이 스스로 공부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3년 평가에서도 우리나라는 집중 분석 과목이던 수학 성적이 상위권이었지만 흥미도와 학습동기에서 전체 41개 나라 가운데 각각 31위와 38위였고, 과학이 집중 분석 과목이었던 2006년 평가에서도 흥미도가 오이시디 평균을 밑돌아 단순 암기식 교육의 부정적인 결과라는 지적이 나온 바 있다.


후반 밑줄 그은 부분은 대개 생략된 채 보도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의 보도 사실 자체가 우리사회의 커다란 문제점을 여지없이 폭로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교육이 단순암기식, 주입식이어서 아이들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을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도적으로 은폐해야 할 만큼 부끄러운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런 교육 제도, 그 제도를 뒷받침하는 지배집단의 전략, 그 전략의 노예로 살아가는 침묵하는 다수의 굴종이 우리 아이들을 이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아이들이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무엇이든, 인간에게 의미를 부여해주고 행복하게 하는 것은, 흥미를 느껴 스스로 하는 일에서 생겨납니다. 흥미를 느껴 스스로 하는 일은 인간을 경이로움에 열려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게 하는 가장 고귀하면서도 힘 있는 끌개는 바로 경이로움입니다. 이것을 박탈당한 사람은 살아 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말하자면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입니다. 바로 우리 아이들이 그렇습니다. 그게 다름 아닌 우울증입니다.


해결의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아이들을 경이로움의 세계에 풀어놓아야만 합니다. 교육, 입시 제도를 총체적으로 혁파해야 합니다. 주입된 지식을 암기해서 성취하는 능력은 종당 자기 자신을 사악한 체계의 노예로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하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이걸 누가 할 수 있으며, 그래서 누가 해야 할까요? 


정치인들로 대표되는 이른바 국가에 맡길까요? 어림없습니다. 피해 당사자인 아이들에게 맡길까요? 물색없습니다. 그 경계에 선 존재, 바로 엄마입니다. 엄마들이 뭉쳐야 이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럼 엄마들이 어떻게 뭉칠 수 있을 까요? 이 또한 오직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바로 지금 내 아이의 심리적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일입니다. 내 아이가 우울증으로 신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프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여기서 바야흐로 경천동지할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엄마들! 그들의 현주소는 어딜까요? 책의 들머리 초등학생 이야기에서 보셨듯이, 아이들의 현실과 고통을 가장 민감하게 감지해야 할 엄마들이 사실은 문제의 최전선에 서 있습니다. 물론 이 문제 또한 그 어머니 개인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미리 말씀드려 두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어느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망치고 싶겠습니까. 그들 하나하나 물어보면 누군들 자기 자식 사랑한다고 대답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어떤 사회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지, 그게 자식에게 어떤 상처가 되는지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성가부장적 경쟁 사회 속에서 자신들조차 그 희생양이 되어 아이들을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가 비극의 자궁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어머니를 깨워야 합니다. 모성을 복원해야 아이들을 살려낼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과 손길로 아이들을 돌보지 않으면 우리 미래는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자신의 어머니 됨을 사무치게 각인하고 떨쳐 일어나 이 포악한 세상을 뒤집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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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강의 요법(Lecture Therapy)이란 게 있다면서요?


그 동안 적지 않게 아이들과 개별적으로 상담하면서 겪었던 것 중 하나는 반드시 일대일로 만나 대화하는 것만이 힘 있는 상담치유의 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상담하면서 틈틈이 강의를 나가 적게는 십 수 명, 많게는 몇 백 명과 소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때 강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일대일 상담 이상으로 후련한 소통, 가슴 뭉클한 감동, 홀가분한 해방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 번 경험하였습니다. 


지금 아이들이 처한 현실은 수공업적 일대일 상담으로 풀어나갈 상황을 넘어선 측면이 있습니다. 여러 아이들을 한꺼번에 모아놓고 강의를 통해 집단적 소통과 해방이 일어나게 하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종교적 강론/설법이나 단학, 기공 강의에서 치유가 일어나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종교지도자나 수행의 스승이 아니라고 해서 이런 효과가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몰입하는 말하기와 듣기는 모두 고급한 실용 명상입니다. 강의자와 수강자, 그리고 수강자 상호간에 진심어린 교감이 일어난다면 강의요법은 예상 밖의 시너지로 증폭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을 고려할 때 강의 요법(Lecture Therapy)은 정신치료의 새로운 아침을 여는 빛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현실 여건상 그 많은 아이들이 일일이 상담전문가를 찾아가 개별상담을 받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경제적 부담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시간적으로도 그렇고요. 결국 이런 식의 해결 방안은 너무나 많은 사회적 비용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 무엇보다, 부모 된 처지에서, 내 자식이 우울증이다, 생각하고 상담실 문을 두드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누구라도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개된 강의 구조를 통해 현실적 난관을 일거에 해결한다면 모두에게 행복한 일이 될 것입니다.


(6) 의학은 결국 양육의 문제 아닌가요?


마음의 문제를 가진 분들과 만나면서 갈수록 깊어지는 생각이 있습니다. 의사가 지니고 있는 어떤 의학적 도식에 따라 그들의 고통을 일방적으로 이해하는 게 얼마나 안일한가, 아니 옳지 않은가, 하는 깨달음이지요. 의사라면 으레 무슨 병이라고 진단하고 약 처방하는 게 할 일이다,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만 고통을 겪는 당사자한테는 그런 행태가 모욕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병이라고 해야 할 것을 병이 아니라고 함으로써 고통에 빠진 이를 더욱 깊은 고통으로 몰아넣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의사란 본디 사람의 생명과 삶, 즉 생명현상의 전 과정에 관여하는 조력자이며, 나아가 안내자, 더 크게는 스승이어야 합니다. 사회의 성격이 변화하는 데 따라 신성한 사제에서부터 싸구려 기술자까지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 놓이지만, 인류가 갈수록 심각한 위기 상황으로 치닫는 작금의 현실을 볼 때, 의사가 그 본분에 대해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문제의식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앞에서 말씀드린 <발달장애를 깨닫지 못하는 어른들>의 저자 호시노 요시히코의 견해를 참조해 의학의 좀 더 깊은 바다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가 말하는 발달장애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이른바 자폐증과 아스퍼거증후군을 아우르는 광범성발달장애(PDD), 학습장애(LD)를 모두 담아내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그 장애라는 표현이 주는 편견을 고려하여 저자는 발달장애를 발달불균형증후군으로 다시 고쳐 말합니다. 발달불균형증후군이 또 하나의 병명으로 인식되든 아니든, 그게 저자의 의도이든 아니든, 우리는 사람의 고통을 인식하는 데 "발달"이란 말에 주의를 기울이는 게 중요합니다. 


발달이란 말은 '신체, 정서, 지능 따위가 성장하거나 성숙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장, 성숙이란 말로 바꿔 써도 무방하겠지요. (이 모든 한자말을 아우르는 순 우리말 "자람/자라남"을 필요에 따라 쓰겠습니다.) 발달 문제가  우리에게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는 이유는 유독 인간이란 종(種)만이 긴 성장기를 거치기 때문입니다. 다른 동물에게는 이런 문제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이 긴 성장기에 어떤 형태로든 상처를 입으면 발달의 균형이 깨지고, 바로 거기서부터 수많은 고통이 일어납니다. 


발달의 불균형은 전체적 관점에서 정리한 것입니다. 불균형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러 할 것입니다. 즉, 어떤 부분은 지나치게 자라지 못하고, 어떤 부분은 지나치게 자라고, 또 어떤 부분은 알맞게 자람으로써, 두루 고르게 자라지 못하는 것이지요. 물론 현실적으로는 지나치게 자라지 못하는 부분이 문제가 되겠지만, 실은 지나치게 자란 부분도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부분 때문에 다른 부분이 소홀히 되어 실제 삶이 기우뚱거리고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들쭉날쭉한 발달이 생각, 언어, 행동의 조화와 협동을 깨뜨림으로서 나타나는 다양한 고통을 마주할 때, 우리가  지녀 온 몇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첫째, 이 문제를 인격적, 윤리적 차원에서 다루는 것입니다. 성질머리가 더럽다, 성격이 까칠하다, 배려심이 부족하다, 제 생각만 한다, 조신하지 못하다, 경망스럽다, 게으르다, 우유부단하다, 지저분하다, 예의바르지 못하다, 변덕스럽다, 정신력이 약하다, 못나빠졌다....... 말하자면 고통스러운 사람에게 인격, 성격, 윤리적 감수성, 가치관, 따위의 틀을 뒤집어 씌워 책임을 묻고 다그치는 태도입니다.


둘째, 앞의 태도와 전혀 다른, 거의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특정한 부분에서 뛰어난 자질을 보일 때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요. 뭔가 남다른 사람의 개성, 즉 ‘기인(奇人) 다움’으로 보는 것입니다. 가령, 여성편력이 심하다든가, 약물 의존 상태에 빠져 있다든가, 할 때, 아, 보통 사람과 다르니까 그럴 수도 있지.......뭐, 그렇게 넘어가는 것이지요. 


셋째,  의학적 차원에서 장애나 병으로 인식하는 태도입니다. 물론 이 책은 이런 태도를 취합니다. 뇌의 특정 영역이나 신경체계 문제라고 보는 것이지요. 저자가 이 문제를 인격적, 윤리적 차원의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나아가 장애라는 말에 덧씌워진 편견을 불식시키기 위해 발달불균형증후군이란 용어를 쓰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현재로서는 이 태도를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발달불균형증후군을 만병의 근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생각을 철저하게 밀어붙여서 이렇게 바꾸어야 한다고 봅니다. 


"만병은 발달불균형증후군이다." 


이렇게 되면 모든 병은 발달의 문제로 바뀝니다. 발달은 결국 양육 문제입니다. 양육은 무엇입니까? 아이를 보살펴서 자라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근본 문제입니다. 윤리보다 깊고, 윤리보다 앞선 문제입니다. 아이가 덜 자란 것은 결코 그의 인격적 책임이 아닙니다. 그는 어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육은 치료보다 깊고, 치료보다 앞선 문제입니다. 아이가 덜 자란 것은 결코 병이 아닙니다. 그는 어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윤리도 의학도 어른의 기준으로 어른을 말하는 표준담론(!)입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살피면 그 표준담론을 들이대는 장본인이 대부분 제대로 된 어른이 아닙니다. 그가 제대로 된 어른이려면 자라지 못한 채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아이에게 어른의 기준을 들이대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겉모습은 어른이지만 그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아이를 통찰할 수 있어야 어른인 것이지요. 


결국 정도 차이는 있지만 인간은 대부분 발달의 문제를 지니고 있고 양육이라는 보살핌이 필요한 미완의 존재입니다. 인간, 우리 모두는, 제대로 자라지 못한 것입니다. 나쁜 게 아니라 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훈계하려고 달려드는 것을 엄히 금합니다. 아픈 게 아니라 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치려고 달려드는 것을 엄히 금합니다. 오직, 있는 그대로, 이 현실을 공감/동조하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고, 보살피는 삶의 흐름에 맡기는 것만을 허합니다. 


그 동안 깊은 우울증으로 고통 받는 분들을 만나면서 그 분들의 내면에 학대 받은, 그래서 자라지 못한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깊이깊이, 또 깊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무엇보다, 아이들! 그들은 지금 여기서 상처 받고 있는 아이, 그 자체가 아니던가요. 아이들의 우울증 또한 내밀하게 살피면, 자기 자신의 생명과 그 가치를 업신여김으로써 자라나는 것을 막고 있으니, 이는 다만 기분장애가 아니라 훨씬 더 근본적인 발달 불균형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우울증 치료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어루만져 보살피는" 일입니다. 하여 사람을 자라(나)게 하는 일입니다. 결국 어머니의 마음을 지녀야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성으로 감싸 안고 전인적 접근을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과연 어떤가요? 문제의 깊은 본질에서 너무나 아득히 멀리 떨어져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리는 일부터, 지금, 당장, 시작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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