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1960년대 서울의 성북구 동소문동 616번지는 달동네의 대명사였다. 가로세로 두 뼘 크기 창문을 열면 남산 정상이 빤히 건너다보이는 그 동네 오막살이집에서 10대의 10년을 살았다.

 

수많은 기억 가운데 가난의 표지인 우동국수가 오도카니 자리하고 있다. 동네 큰길 한 켠에 왕가 성을 가진 아저씨네 국수공장(!)이 있었다. 기계에서 뽑아낸 기다란 국수를 높다란 건조대에 널어 말리는 풍경은 매우 익숙하고도 아득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국수에도 급이 있었기 때문이다.

 

넙데데하고 누런, 그래서 값싼 우동국수와 날씬 동글하고 뽀얀, 그래서 값비싼 소면국수. 이 둘의 차이는, 적어도 어린 내 눈에는, 하늘과 땅이었다. 사실 이런 느낌은 '면' 자체보다 완성된 상태의 '국수'에 대한 것이었다.

 

그 시절 허다한 아버지들이 그랬듯 오랜 실직 상태에 있었던 선친의 가난 탓에 간장 국물로 삶은 우동국수를 그나마도 하루 두 번 마시면(!) 호사였다. 주린 배를 움켜쥔 소년에게 그윽한 멸치 국물 아니면 빠알간 무채 김치와 어우러진 소면의 그 도도하고 낭창낭창한 자태란 가히 로망이었다. 언감생심 밥은 꿈도 꿀 수 없는 환상이었고.

 

오십 년 세월 흐른 어느 날 지하철역에 걸린 이상국의 <국수가 먹고 싶다>를 읽는다. 문득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소면 국수가 먹고 싶다. 소면은 내게 로망이었다, 아니, 이다, 아니, 일 것이다, 쭈욱~. 가난한 한의사의 허름한저녁식사여서 더욱 소담할 소면 국수. 치유가 걸어온다, 도도하고 낭창낭창한 자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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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메리카 원주민 호피족은 연평균 강우량이 200mm 정도인 척박한 애리조나에서 농사를 지으며 삽니다. 비는 절대적 필요이므로 비가 오지 않으면 그들은 기우제를 지냅니다. 그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100% 비가 내립니다. 그토록 영험한 까닭은 비가 내릴 때까지 계속해서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 동안 익히 들어온 ‘인디언 기우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행위에 대한 허무개그 식 비아냥거림이 들어 있는 한 이 이야기는 진실을 왜곡한 것입니다. 비가 올 것이라 믿는 긍정적인 마음과 인내를 제시하며 성공하는 삶의 비결을 말하는 자기계발류의 해석은 더욱 교묘하게 진실을 왜곡한 것입니다. 심지어 인식과 실천을 일치시키는 윤리적 의지로 읽는 것조차 진실에서 벗어난 것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비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비가 올 때까지 계속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개신교를 포함한 통속적 종교의 기도 관념을 투영한 왜곡된 해석일 뿐입니다. 그들은 먼저 진심으로 모든 조건에 감사하는 기도를 한답니다. 그 감사 대상에 끔찍한 가뭄이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입니다. 바로 여기가 여느 기도나 긍정심리학과 첫 번째 다른 점입니다.

 

그 다음, 그들은 여러 가지 감사의 조건 가운데 하나인 비를 고요히 ‘선택’한답니다. 바로 여기가 여느 기도나 긍정심리학과 두 번째 다른 점입니다. 이 선택은 필요에서 멈춰섭니다. 탐욕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 그들은 선택한 비를 온몸으로, 오감으로 느낀답니다. 바로 여기가 여느 기도나 긍정심리학과 세 번째 다른 점입니다. 이성으로 의지로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가 오는 드넓은 조건을 향하여 자신의 모든 생명감각을 열어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비굴하게 애걸하는 기도를 하지 않는답니다. 바로  여기가 여느 기도나 긍정심리학과 네 번째 다른 점입니다. 그들의 기도는 사사로운 이익의 추구가 아닙니다. 그들의 기도는 이웃과 민족 전체를 위한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과 아픈 사람, 그리고 약한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실로 참되고 착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기도가 어찌 당당하지 못할 것입니까. 이 당당한 기도가 어찌 인식과 실천을 하나 되게 하지 못 할 것입니까.

 

 

세월호사건 이후 어느 시점부터인가 기도를 시작하여 이제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차고 어두운 바다에 버려진 이백 쉰 명의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기도함으로써 하루 일과를 시작합니다. 그 영혼들을 위해, 아니 그 영혼을 성령으로 모셔 그들에게 기도합니다. 그들이 이 실재 역사에 함께하기를, 그 함께함으로 말미암아 이 나라가 민주자주통일의 길로 나아가기를, 버려진 사람이 끝내 버린 자까지 구원해내는 대동 세상 오기를 간절히 빕니다. 이 기도가 앎과 삶을 하나로 이어주는 인력인 것을 느끼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이제 여기서, 새삼 정색하고 점검합니다. 죽임의 조건까지 감사히 받아들이고 있는가? 필요를 넘어서지 않고 있는가? 아이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기운을 온 영혼으로, 오감으로 느끼고 있는가? 당당하게 두려움을 꿰뚫어 나아가고 있는가? 이 질문과 대답이 영글어가는 과정에서 제 삶은 하나의 제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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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

누가 보냈는지 모르

 

꽃 바구니

 

언젠가

누가 누가 보냈는지 모를 만큼의

스승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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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만 보면 인간은 오염을 쑤셔 박는다

틈만 보면 자연은 청정을 뽑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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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는 선택이다

선택은 경계 세움이다

경계 세움은 부정성이다

부정성은 변혁이다

변혁은 숭고다

숭고는 장엄으로 간다

장엄으로 가는 지향감성이 바로 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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