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문제란 터질 때 터지는 모양입니다. 마음에 익혀두었던 것이지만 꺼내들지 못한 문제를 정색하고 꺼내들게 하니 말입니다. 한 소설가의 표절 문제로 말미암아 아직도 문단은 물론 우리사회 전체가 웅웅거리고 있습니다. 문학·문학인하고 그다지 서로 의미로운 인연 지닌 사이도 아닌 저 같은 사람도 자꾸 되풀이해서 이 이야기를 들먹이는 것을 보면 적잖이 심각한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

 

제가 다시 한 번 이 이야기를 꺼내는 까닭은 표절 논쟁에 참여했던 한 문학인이 한 ‘현재 한국문학의 초라한 처지에서 볼 때 권력 이야기는 가당치 않다’는 내용의 말 때문입니다. 권력 이야기는 단 두 사람 사이에도 성립한다는 진실을 모를 리 없는 지식인이 그런 발언을 했다는 것은 커다란 객관적 사실을 전경으로 내세움으로써 내밀한 진실의 고갱이를 은폐하려는 의도를 숨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회자되는바 문단 내부 간의 권력관계는 어차피 외부인이니 잘 모르기도 할 뿐만 아니라 우리사회 어느 분야든 패거리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다지 입 댈만한 흥미로운 사항은 아닙니다. 저는 다만 독자의 처지에서 여전히 대한민국은 문학·문학인 ‘과잉’ 사회라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사회는 적어도 조선 이후 양반관료·도학道學지식인·문인을 하나로 인식하는 오랜, 그리고 강고한 전통을 지닌 사회입니다. 그 전통은 식민지 시대에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민주주의 시대인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러므로 이제 전통이 아니라 인습의 몽당비에 지피는 귀신같은 관념입니다.

 

문학인이 누리는 특별한 지위는 독자들의 대우에서만 연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학인 스스로가 의식·무의식 간에 그 자리를 향해 올라갑니다. 대가나 스타 급 인사들은 말할 것조차 없습니다. 등단만 해도 바로 자세를 바꿉니다. 아마도 대부분 자신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할 것입니다. 문학에 대하여 자신들끼리 공유하는 조소와 자신을 일치시키는 제스처를 취할 것입니다. 만일 그게 제스처뿐인 것이 아니라면 왜 그들은 그 조소를 넘어 기어코 문학인이 되었을까요?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빤한 겸양 떨기라는 사실을 그들만 모르거나, 더욱 영악하게 알고도 일부러 그리 하거나 둘 중 하나일 테지요.

 

문학인의 이런 태도는 정치인을 그대로 닮아 있습니다. 오늘 한국사회에서 정치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거기서 무엇인가 변화를 일으켜보겠다고 각고 끝에 입문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배지를 다는 순간 그들은 제스처를 통과의례 삼아 바로 ‘나리’ 반열로 올라갑니다. 그렇게 ‘나리’가 되면 유체이탈 어법을 단박에 습득하고 이내 곳간 불리기에 돌입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대한민국의 표절 문제는 문학의 표절 문제가 아닙니다. 문학인, 문학인의 의 삶의 표절 문제입니다. 문학인의 삶을 정치인의 삶에서 표절해 들이는 문제입니다. 치명적으로 치명적인 표절입니다. 인간을, 삶을 표절한 문학인이 표절 없는 문학을 빚어내는 일은 과연 어떻게 가능한지, 문학·문학인의 꿈조차 꾸지 못하는 무지렁이에게는 심히 궁금한 사항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최근에 생활습관 하나를 바꾸었습니다. 아침밥을 먹지 않은 심한 공복 상태에서 빠른 걸음으로 30분 이상, 그러니까 3km 이상을 걸어 한의원으로 출근합니다. 잠시 땀을 들인 뒤 단원의 아이들 250명의 이름이 담긴 문서를 엽니다. Jacqueline Mary du Pré의 <Larmes Du Jacqueline>를 켭니다. 삽시간 명상에 듭니다. 눈을 떠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릅니다. 호피 기도를 시작합니다. 기도가 끝나면 집에서 싸가지고 온 소박한 도시락을 엽니다. 1인분으로 251명이 함께 아침식사를 합니다. 한의원의 하루하루를 이렇게 엽니다.

 

이렇게 바뀐 생활습관 때문에 한 동안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은은히 오른쪽 옆구리가 아프기 시작하더니 사라지지 않고 오랫동안 머무릅니다. 체중이 줄어듭니다. 무엇보다 얼굴의 살이 현저하게 빠집니다. 급기야 초췌한 몰골이 드러납니다. 목에서 쉰 소리가 나옵니다. 갈증이 일어납니다. 눈이 흐릿해집니다. 머리가 맑지 않아 붕 뜨고 투미한 상태가 지속됩니다. 대변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슬그머니 의심이 들기 시작합니다. 암의 현저한 가족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할머니, 아버지, 형님, 누이동생·······.

 

몇날 며칠 뒤척거리다 문득 한 마디 말을 떠올렸습니다.

 

“청초淸楚의 땅 앞에는 초췌憔悴의 강이 가로놓여 있다.”

 

일어나 거울을 봅니다. 찰나에 초췌憔悴의 강을 건너는 생명을 감지합니다. 찰나에 청초淸楚의 땅으로 들어서는 생명을 감지합니다. 영혼의 울음과 웃음이 회오리치는 것을 목도합니다. 물론 이것이 결론은 아닙니다. 또 다른 시작입니다.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작은 신호입니다. 지나온 삶의 초췌를 마치 들이닥치는 불치병처럼 느끼고서야 비로소 청초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진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고서야 삶의 가치 딱 한 줌을 거머쥘 수 있다는 진실. 훗날 어떤 변화의 결에서라도 이 깨달음만은 감사할 것입니다.

 

세월호사건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터에 메르스마저 과따티고 있는 지금 비슷한 처지의 다른 이들의 삶과 마찬가지로 이 가난한 마을 한의원은 그야말로 말이 아닙니다. 함께 일하는 간호사는 물론 찾아오시는 환자들까지 민망해할 정도입니다. 70대 초반은 젊은이라고 할 만큼 고령의 어르신들이 드나드시는 한의원인데 그 분들이 꼼짝 못하시는 상황이니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도 홀로 의로우신 신께서는 초췌의 강을 파 엎어버리고 청초의 땅만을 전유하고 계십니다. 과연 거룩하고 또 거룩하십니다. ㅠㅠ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5-06-25 1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 메르스대란으로 체감하다시피 대한민국은 국가가 앞장서서 모든 영역의 공공성을 파괴하는 나라입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이 불가피한 상황으로 국민을 몰아가는 것이 정치의 도리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권력과 돈, 그리고 종교가 장악되어 있어 당분간 이 추세는 가속일로를 치달을 것입니다. 웰 빙, 힐링이라는 부드럽고 따뜻한 개념도 긍정주의 자기계발을 거쳐 멘토의 대박 몰이에 걸리면 꼼짝 없이 각자와 그 패거리만 살리는 쪽으로 휘말려들고 맙니다.

 

가난한 삶도 함께 나누던 풍경은 진즉 사라졌습니다. 흔들어서 떨어지는 사람은 아예 사람 취급 하지 않는 살풍경으로 변한지 오래입니다. 이치로 따지자면 ‘그러므로 혁명해야 한다.’인데 현실은 ‘그러므로 혁명은 물 건너갔다.’입니다. 권력과 돈, 그리고 종교를 장악한 자들은 대놓고 함부로 이런 풍조를 만들어 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인간성이 이미 대기권을 이탈하였기 때문입니다. 몰이를 당하는 필부필부는 당연하지 않습니다. 기어이 여기에 맞서는 영적 의지를 세워야 합니다. 참된 삶의 전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 하지 않으면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가축으로서 도살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지옥 같은 상황에 맞서 영적 의지를 세우는, 그러니까 참된 삶의 전사가 되는 일은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말일까요? 아마도 이 질문에 대한 답만큼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도 없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이니까요. 평범한 사람 하나하나 유관순 열사 윤봉길 의사 되라고 몰아붙일 수는 없습니다. 자기 삶의 몫을 각자 성실히 살려면 연대만이 길이라고 물색없이 역설을 들이댈 일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너만이라도 살아서 후일을 도모하라.’는 신파조 말을 흘릴 수도 없습니다. 난감무인지경입니다. 실마리 하나를 챙기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세월호사건과 메르스대란을 무능을 가장한 전능으로 돌파한 권력이 마침내 이미지에 꼭 맞는 총리 하나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를 가리켜 한 언론인이 ‘후흑厚黑총리’라 했습니다(한겨레신문 2015년 6월 17일자). 후흑은 면후심흑面厚心黑으로 뻔뻔하고 음흉하다는 뜻입니다. 이에 대하여는 구태여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주의를 기울인 것은 본디 이 후흑의 개념은 청나라 말 이종오라는 사람이 밀려오는 외세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창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몫인 삶을 수탈자에게서 지켜내기 위해 갖추어야 할 건강한 덕목이 바로 후흑이라는 말입니다. 이 뜻을 우리 처지에 맞게 되새겨보겠습니다.

 

뻔뻔해야 한다는 말은 지나친 윤리적 엄숙주의를 넘어서라는 것입니다. 윤리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통용되는 하나의 약속체계입니다. 어느 한쪽이 인간이기를 거절한 상태에서는 윤리가 설 수 없습니다. 매판독재분단세력이 이미 인간성을 거두어들인 마당에 염치와 싸가지를 말하는 것은 순수 아닌 순진입니다. 냉정한 득실 계산에 터한 ‘밀당’의 마인드가 전사의 필수품입니다.

 

음흉해야 한다는 말은 진정성에 터하여 현상과 본질을 일치시키려는 소박주의를 넘어서라는 것입니다. 양두구육은 매판독재분단세력의 유구한 전술이자 그들 자체입니다. 그러나 수탈당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100% 당하고 있습니다. 진실은 진실이어서 뺨맞고 용서는 용서여서 뺨맞는다는 사실을 익히 알면서도 되풀이해서 당하고 있습니다. 불투명성에 터하여 앙큼한 가면놀이를 할 줄 알아야 비로소 영적 의지를 세울 수 있습니다.

 

어디 한 번 후흑전사가 되어볼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 문제를 놓고 한국 문단 전체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문학인 아닌 사람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없는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하여 독자 입장에서 몇 마디 하고자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원로 소설가 이동하 선생, 그리고 중견 시인이자 소설가인 김선우 님과 작은 인연이 있습니다. 그럴 리 없지만, 만일 이 분들 가운데 누군가 표절 시비에 휘말린다면 과연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자문해 봅니다. 아무래도 직접 입 대기는 힘들 듯합니다.

 

개인적 인연도 쉽지 않고 객관적 비판도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실제로 비호에서 비난까지 다양한 평가가 난무하는 반응들로 말미암아 당분간 더 뒤엉킨 상태로 문제는 표류할 모양입니다. 심지어 우리끼리 싸우면 일본이 좋아한다는 등의 해괴한 발언까지 등장해 비본질적 지평으로까지 번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당사자는 침묵하고·······.

 

오늘 아침 안도현 시인이 자신의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작가의 표절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 기회에 또 우리는 스스로 ‘자기표절’은 없었는지 돌아봐야 한다.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동어반복 말이다. 강연을 다니면서 느끼는 괴로움이 바로 동어반복의 괴로움이다. 반성하는 자의 뇌가 녹슬지 않는다.”

 

저 또한 어줍지 않은 이런 글을 쓰다보면 허다히 동어반복의 ‘자기표절’을 하게 됩니다. 작은 하나의 모티브를 키워 큰 글로 만드는 과정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자기표절’은 독자에 대한 모독이거나 강요이므로 할 짓이 못 됩니다. 늘 깨어 있어, 늘 경이로움 앞에 서야 하는 것이 어떤 글이든 글 쓰는 자의 ‘자기의무’입니다.

 

저는 안도현 시인이 언급한 동어반복의 ‘자기표절’ 문제를 오늘의 한국문학 전체에 적용해보려 합니다.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한국문학은 모두 ‘자기표절’이라 일반화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시인이든 소설가든 거의 모든 작가가 세월호사건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하여 각자의 상상력을 가지고 서로 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래서 어떻다는 말을 표현만 바꾸어 똑같은 내용으로 반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론가들도 거의 예외 없이 그런 작품들을 그런 인지 도식 안에서만 논의하고 있습니다.

 

내용적 동어반복이랄 수 있는 이런 현상은 문학이 도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다시 묻지 않는 데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불의한 권력이 세월호의 진실을 가지고 허구를 조작할 때 문학은 그 허구를 가지고 세월호의 진실을 구축해야 하는 게 맞는다면, 세월호사건 이후 한국문학이 구축해온 진실은 불행히도 호곡號哭의 지평을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아이고~ 아이고~”

 

누가 내든 곡소리는 곡소리일 따름입니다. 무슨 하소연이 변주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정도의 호곡문학을 가지고 세월호사건으로 넘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일으켜 세울 수는 없습니다. 충분한 애도가 필요하다고 할 것입니까. 2015년 6월 22일 오늘로써 433일이 지나고 있습니다. 대체 얼마를 더 기다리면 “아이고~ 아이고~” 소리 아닌 소리를 낼 것입니까.

 

저는 신경숙을 모릅니다. 어디 신경숙뿐이겠습니까. 모르는 작가가 아는 작가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나 한국문학 전반에 걸쳐 나름 애정을 가지고 살피는 독자입니다. 애정 어린 충고라면 진부한 말일 테지만 그래도 그리 하겠습니다.

 

“한국문학, 지금 특정인 특정 집단의 권력 이야기 가지고 떠들 만큼 한가하거나 떳떳하지 않습니다. 호곡문학인 주제에 독자 위에 군림하고 있으니 한국문학은 통째로 권력입니다. 세월호 영령들 앞에서 더 이상 호곡하지 마시라. 표절하지 마시라. 권력의 협잡에 부역하지 마시라. 왜냐고 묻지 않으려거든 붓을 꺾으시라.”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CREBBP 2015-06-22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소리를 여기서 하고, 저기서 하고 자기표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작가가 얼마나 될 지 궁금하군요. 그래서 저는 여러 작품을 쓴 작가들의 대표작만 읽는주의가 때로 합리적 선택이라고 보여지기도 합니다. 더 웃긴건, 책 하나에서 계속 똑같은 소리를 주어 서술어 순서만 바꿔서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죠. 요즘 인기있는 자기계발류책들 대표적..
 

 

평화학 연구자로 소개되며 스스로는 생계형 글쓰기 노동자라 부르는 파워라이터 정희진의 어느 글 가운데 자신이 겪은 일에 관해 쓴 대략 이런 내용을 기억합니다.

 

어느 강연에서 화장실 다녀올 사람들을 위해 휴식 시간 5분을 주자 휠체어를 탄 장애인 한 사람이 와서 부당함을 지적했다. 그는 즉시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그 장애인은 이렇게 말했다. “미안하다고 하지 마십시오. 미안하다는 말은 다음에 또 그러겠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김정욱과 인터뷰한 오늘(6월 13일) 한겨레신문 기사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김정욱은 뜬금없이 “공장 안에 있을 때 작업복 입는 걸 꽤나 좋아했다”는 말을 꺼냈다. 그러면서 그는 “저는 대공장 사업장에 있으니 더 잘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상황이 자꾸 있어서 작업복 입고 집회 나가는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고 말했다.

 

-자꾸 미안하다는 말을 하세요.

 

“저도 과도하다고 느낄 때가 좀 있어요. 그래도 뭔 생각을 하거나 이야기를 하다 보면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낄 때가 있는데, 그게 ‘미안하다’는 말로 표현되는 것 같아요.”

 

-그 미안함이 김정욱이 오랫동안 싸워온 원동력이었나요?

 

“네, 그런 것 같아요. 그게 아….”

 

갑자기 눈물을 글썽였다.

 

“그 말이 저를 좀 건강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제가 이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힘이기도 하고요. 저를 지탱하는 원동력이 사람들에게 있는 것 같아요.”

 

-생각나는 일이 있어서 눈물을 흘리신 건가요?

 

“주변 사람들이 제게 ‘미안하다는 말, 고맙다는 말 좀 그만해라’고 말해요. 그런데 항상 받는 건 많은데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많지 않고, 그런 것에 대한 미안함이 좀 있어요. 좀 더 건강하게 뭔가를 좀 더 해야 하는데….”

 

인터뷰는 김정욱의 ‘미안하다’는 말로 끝났고 기자는 그의 ‘미안하다’를 곡진히 해석함으로써 기사를 끝냅니다.

 

긴 인터뷰가 끝나자 김정욱은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 말은 이랬다. “우리도 이 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살아왔다고 생각을 하는데, 버려졌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국가가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생각이죠. 우리가 끊임없이 얘기했던 ‘함께 살자’는 말의 의미를, 우리는 여전히 묻고 있는 것 같아요. 많은 분들이 노력하고 있지요. 고맙고 미안하고 그렇습니다.” 여지없이 마지막 말은 ‘미안하다’였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미안하다는 김정욱의 말은 함께 살자는 말이다. 굴뚝과 세상이 남긴 상처에도, 김정욱은 먼저 돌아서지 않고 여전히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두 개의 ‘미안하다’가 있습니다. 상처 입히는 사람의 작은 자아가 들이미는 못 깨친 ‘미안하다’가 그 하나입니다. 상처 입은 자의 큰 자아가 내미는 깨친 ‘미안하다’가 또 다른 하나입니다.

 

물론 상처 입힌 사람의 ‘미안하다’에는 그 어떤 진심도 들어 있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상처 입은 사람의 ‘미안하다’에는 그 어떤 어두움도 들어 있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함께 살려는 낮은 연대의 생명감각 유무가 둘 사이를 분명하게 가른다는 말입니다.

 

이제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그 동안 어떤 ‘미안하다’를 입에 올리며 살아 왔는가?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한 상념들로 일렁이다가 문득 인터뷰 기사 중 한 대목을 다시 떠올립니다.

 

“·······사람들이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말해요. 왜 미안하다고 말하는지 궁금했어요. 그런데 나중에야 ‘아… 우리가 대신 싸우고 있는 거구나. 우리가 울타리 역할을 하고 있구나.’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힘들다는 생각보단 사람들 만나면 에너지가 쌓이는 느낌이 들었죠.”

 

지난 몇 년간 이 땅의 처참한 싸움터를 기웃거리며, 그 소식을 들으며 느껴온 감정 가운데 가장 뚜렷한 것은 ‘부끄럽다’입니다. 또 하나 결코 떨칠 수 없는 것이 가장자리에 서 있는 사람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초라하다’입니다. 이 두 감정을 한 데 묶으면 제 인생은 ‘남루하다’라고 쓰고 ‘미안하다’라고 읽어야 할 무엇이 됩니다. 싸움터 한복판에 서 피 흘리는 분들에 대한 ‘미안하다’. 알량한 제 삶의 인연 자체에 대한 ‘미안하다’.

 

저는 제 이 '미안하다'가 앞서 말씀드린 세상의 저 두 '미안하다'의 경계에 서 있는, 아직은 이름 올릴 수 없는, 끝내 김정욱의 ‘미안하다’로 흘러가야 할, 생성중인 ‘미안하다’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그 ‘미안하다’에 몸 기운을 불어 넣기 위해 김정욱이 걱정한 이창근, 그의 아내 자영에게 전화부터 해야겠습니다. 그럼 이만 총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