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4장 본문입니다.

 

子曰 道之不行也 我知之矣. 知者過之 愚者不及也. 道之不明也 我知之矣. 賢者過之 不肖者 不及也. 人莫不飮食也 鮮能知味也.

자왈 도지불행야 아지지의. 지자과지 우자불급야. 도지불명야 아지지의. 현자과지 불초자 불급야. 인막불음사야 선능지미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나는 알겠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나치고 어리석은 사람은 모자라다. 도가 밝아지지 않음을 나는 알겠다. 어진 사람은 지나치고 못난 사람은 모자라다. 사람이 마시고 먹지 않음이 없으나 그 맛을 아는 경우가 드물다.” 

 

2. 중용의 도가 실행되기 어려운 이유는 이미 앞 장에서 암시한 바 있습니다. 최고의 경지이니 그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대뜸 실천에 옮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이 어려움을 신비와 탈속의 차원에서 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불가佛家나 선가仙家의 ‘공부工夫’ 식이라면 처음부터 중용을 말할 까닭이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그것은 인간의 사회적, 문화적 삶 속에서 행해질 수밖에 없는, 또 그래야 하는 수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어려움은 중용 자체의 경지 문제라기보다는 우리가 형성하는 사회, 문화 관계의 문제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근거가 제시됩니다.

 

지혜로운, 또는 아는 사람은 지나치고 어리석은, 또는 모르는 사람은 모자란다고 공자께서 진단하셨습니다. 여기서 지자知者와 우자愚者가 대비된 것은 문자 그대로 보면 이상합니다. 우자가 모자란 것은 당연한데 어찌하여 지자는 지나친 것일까요? 참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그럴 리 없지 않겠습니까?

 

결국 여기 지자는 ‘이른바’ 아는 사람이란 뜻이지요. 스스로 그리 여기는 사람이라고 보아도 별 무리는 없겠지만, 제 생각에는 사회적인 의미에서 지자로 여겨지는 집단으로 보는 게 더 나은 이해인 듯합니다. 요즘 잘 쓰는 말로 사회 지도층인 셈이지요. 권력, 돈, 지식을 통해 사회를 쥐락펴락하는 지배층이 바로 그들입니다. 

 

지배층의 앎은 어리석은 자들과 선을 그은 상태에서 규정된 정치적 차원을 획득하게 됩니다. 당연히 어리석은 사람들, 즉 일반 백성은 ‘아랫것’이 되는 것이지요. 하여 그들은 입만 열면 백성을 훈계하려 듭니다. 우리사회에서 그 표본을 너무나 여실히 목격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앎은 소인의 앎입니다. 그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군자의 앎, 곧 대지大知가 제6장에 나옵니다. 대지는 자신과 어리석은 사람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여기 지자는 사회를 분열시킴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기득권을 유지하는 천박한 지배층, 즉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의 정글 법칙을 구가하는 집단입니다.

 

어리석은 사람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스스로 패배주의에 빠진 개인들을 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지배집단에서 배제된/분리된 사회정치적 존재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전자는 후자를 만든 전략의 산물일 테니 말입니다. 

 

3. 중용의 도가 밝게 펼쳐지지 않는 까닭 또한 이치적으로 동일합니다. 이른바 어질다고 하는 사람은 지나치고 이른바 못났다고 하는 사람은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지자와 현자를 구태여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知와 행行을 연결하고 현賢과 명明을 연결한 것은 어찌 보면 엇갈린듯하지만 오히려 이론과 실천을 통일적으로 이해하는 실사구시의 관점이라고 이해하면 훨씬 선 굵은 읽기가 가능하겠지요. 

 

4. 지나치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특별하다’는 뜻입니다. 특별하려면 극단적 프로세스를 써야 하고 극단적 프로세스를 쓰려면 소통을 거절해야 하므로 중용을 어긴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소통을 거절하면서 ‘아랫것’들의 무지를 탓하겠지요.

 

모자란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특별한’ 자들에게 소외, 억압당하는, 그래서 소통에서 제외된 상태를 뜻합니다. 또한 그것을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결국 그 상태는 이른바 어리석고 못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존재에 반하는 선택을 하도록 몰아갑니다. 지난 세월 동안 우리사회에서 수도 없이 목도한 바 있으니 더 이상 군더더기를 붙일 까닭이 없겠군요.


5.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마시고 먹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단순히 생명 유지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여긴다면 구태여 맛을 거론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 분위기대로라면 맛과 그것을 아는 것은 중용의 도를 설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봐야 합니다.  

 

마시고 먹을 때 그 음식의 맛을 알고, 모르는 것은 대체 어떤 맥락에서 중용의 도를 설명하는 핵심 사례가 되는 것일까요? 아마도 맛에 탐닉하는 자들과 맛조차 모른 채 허겁지겁, 또는 딴 생각에 사로잡혀 마시고 먹는 자들의 극단을 염두에 두면서 한 말이었을 것입니다.

 

‘특별한’ 자들은 자체 생명인 음식의 고유한 향미를 넘어선 즐거움을 탐하므로 중용을 어겼습니다. ‘아랫것’들은 맛은커녕 연명에 급급하여 생명인 음식의 가치로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둘 다 음식의 형태로 마주선 생명과 소통하지 못했습니다.

 

수운 최제우의 사상에 동의함으로 말하건대, 음식은 하늘입니다. 하늘이 하늘을 기르는[양천養天] 거룩한 사건이 마시고 먹는 것입니다. 이런 어법대로라면 음식의 맛을 아는 것은 바로 그 거룩함을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마시고 먹는 사건의 거룩함은 유미주의와 실용주의를 가로지르는 경계에서 피는 꽃입니다.

 

6. 마시고 먹는 일상의 사소한(!) 일을 예시하신 공자의 의중은 무엇일까요? 길고 깊게 수런거릴 일 없습니다. 중용 자체가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 그렇고, 그 평범함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시공간이 바로 사소한 일상이니까 그렇습니다. ‘사소함은 과소평가된 위대함’이란 사실을 간파한 통찰이 숨 쉬고 있습니다.

 

마시고 먹는 일은 관통과 흡수로 요약되는 중용의 본령이 가장 구체적 현실로 드러나는 장場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일/놀이와 잠, 대화, 성性, 호흡 등도 동일한 중용 도량道場임에 틀림없습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이런 일상의 거룩함에 터 잡지 않은 가치,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이념, 사상, 종교 따위의 이른바 거룩함은 죄다 뜬 구름일 따름입니다. 그야말로 사소한 예 하나로 대소大小, 성속聖俗 이분법이 즉각 사망 처리됩니다. 지우知愚, 현불초賢不肖 이분법은 더 이상 숨 쉴 수 없습니다.  

 

7. 이치와 달리 현실 세상은 수직이분법의 세상입니다. 공자의 절망, 중용의 좌절은 바로 세상을 둘로 갈라야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특별한’ 소수 집단이 권력, 돈, 지식을 독식한 데서 연유합니다. 그들의 독단은 언제나 도를 넘어섭니다. 공자의 앞에서도 그러하고, 오늘 우리 앞에서도 그러합니다.


 

국민은 죽어나가는데 연일 웃는 얼굴 아니면 짐짓 엄숙한 얼굴로 대문짝만 하게 신문, TV에 나오는 사람들이 나라를 말아먹고 있는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은 도리어 국민에게 끊임없이 뭔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숭배든, 복종이든, 희생이든, 표든.......대놓고 함부로 취합니다. 음식 맛 아닌 제 입맛에 맞추어 거리낌 없이 욕설을 퍼부으면서 독식사회를 구축해 갑니다. 걸핏하면 편향, 변덕, 무지를 들먹이며 ‘아랫것’을 꾸짖습니다. 자신들만 중용의 도를 실천한다고 스스로 속이면서 바로 이 순간도 세상을 위아래로 갈라놓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특별한’ 무리들은 매판·독재·분단고착을 통해 나라를 망치고 도를 망칩니다. 이들에 맞서 자주·민주·통일을 이루려면 어리석다, 모자라다 낙인찍힌 사람들, 평범한 변방의 사람들이 사소한 일상에서 삶의 감각을 되찾아야 합니다. 모국어 맞춤법은 틀리면서 영어 몰입 교육 운운하는 자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산화탄소를 이산화가스라고 하면서 5개 국어 한다고 떠드는 자에게 휘둘리지 말아야 합니다. 아니 그보다 먼저, 매일 마시고 먹는 음식의 맛부터 제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진짜 혁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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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3장 본문입니다.

 

子曰 中庸 其至矣乎 民鮮能久矣.

자왈 중용 기지의호 민선능구의.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중용은 최고의 도리다. 백성들은 오래 지속하기 어렵다.”

 

2. 평범함에서 늘 벗어나지 않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실천의 덕목입니다. 자신의 기득권에 대한 애착과 집중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같은 정도로 대우해야 하는 상대방과 소통하려면 필승의 전략이 아닌 공감의 진정성을 지녀야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성으로 세상을 살기 얼마나 어려운가, 그런 자세로 살면 백전백패할 것인데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영혼 깊숙이 동의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2장에서 보았듯이 ‘특별한’ 존재로 인정 받고, 거리낌 없이 사는 사람들이 세상의 권력, 돈, 지식을 거머쥐고 있는데 그들 밑에서 힘없이, 궁핍하게, 더듬거리며 한 평생을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리 애쓰며 살아도 고작 백년 안쪽인데 도덕이며, 가치며, 아름다움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런 생각에 누군들 빠져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소인에 맞서 상생의 세상, 대동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군자의 길에 선뜻 나서, 내내 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마도 여기 백성, 곧 민民이라 함은 소인다운 삶의 자연Sein적 매력과 군자다운 삶의 당위Sollen적 기품 사이에서 흔들리는 다수 시민을 가리킬 것입니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특별한’ 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존재이므로 참 소통의 길, 즉 군자의 길에 목말라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소인의 저 ‘특별한’ 소유도 가없는 열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어느 순간 분연히 떨쳐 일어나 군자의 결기를 세워 보지만 이내 주저앉게 됩니다. 자긍심에 상처 입은 처자식의 슬픈 눈망울을 뿌리치는 일이 권력, 돈, 지식을 뿌리치는 일보다 쉽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신의 남편이, 자신의 아버지가 중용의 삶을 살아갈 때 흔쾌히 동의하고 동참할 아내와 자식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 길을 모델로 제시하며 따르도록 강요할 권리를 가진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오래 지속하기 힘듭니다. 그들은 하루하루를 눈물겹게 살아가기에도 버거운 몫을 지니고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입니다. 


3.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비록 오래 지속할 수는 없으나 백성은 때때로 화산이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짧은 순간 집중된 결기로 중용이 수직적 성취를 이룰 수 있게 하는 거대한 힘이 된다는 것 말입니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백성의 존재는 숭고합니다. 또 그래서 백성이 백성인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중용의 도를 오래 지속하지 못하는 백성을 두고 한탄하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닙니다. 본디 중용의 도를 지속시키는 것은 군자의 몫입니다. 군자는 그 길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그가 선택한 만큼이 그의 삶이니 그로써 군자 되는 것이 군자의 숙명입니다. 군자라면 그 숙명 속에서 백성을 만나 그들과 소통함으로써 변혁의 여울목으로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중용의 여정은 군자 다로 백성 따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군자 따로 백성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크게 하나大同입니다.


4. 우리 역사를 잠시 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물경 일천오백 년에 걸친 매판사적인 이익을 위하여 외국 자본의 앞잡이가 되어 제 나라의 이익을 해치는 일이나 사람의 장구한 역사 가운데 인조반정 이후 단 한 번도 패권을 놓아본 적이 없다는 서인 노론 시대 이야기(신영복 선생의 주장에 대한 기본적 동의를 전제한 것임.)만 간추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 군자연君子然했으며, 그 무엇보다 중용의 도를 지켰다고 자부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앞장서서 제 나라 조선을 일제에 팔아먹었습니다. 식민지 35년 동안 충실히 부역했습니다. 그들이 매판으로 떵떵거리며 사는 동안 백성은 독립혁명투쟁을 일으켰습니다. 3.1혁명을 비롯한 여러 만세운동이 그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장투쟁이 그것입니다.


해방 뒤에도 서인 노론 집단은 반성은커녕 반공주의를 무기 삼아 다시 집권세력이 되었습니다. 매판과 독재, 그리고 분단체계를 하나로 묶어 지금까지도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매판으로 떵떵거리며 사는 동안 백성, 그러니까 국민은 또 다시 목숨 걸고 자주·민주·통일을 위한 혁명 투쟁을 일으켰습니다. 4.19혁명이 그것이고 5.18혁명이 그것이고 6.10혁명이 그것입니다. 촛불집회 또한 같은 맥락에 있는 것입니다.


국정원과 군부의 명백한 선거 개입, 심지어 개표 시스템 조작을 통한 총체적 부정이라는 문제 제기까지, 이른바 정통성 시비에 휘말린 현 집권세력은 급기야 세월호사건을 일으키고 사고로 조작했습니다. 서인 노론 식 공작정치의 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제 국민은 어떻게 화산이 될 수 있을까요? 과연 중용의 수직적 성취를 이룰 수 있을까요?



현실 상황으로 판단컨대 고전적 혁명의 가능성은 낮아 보입니다. 사회정치적 모든 지표가 여실히 전해주고 있습니다. 빅 데이터의 예측이 그리 말하고 있습니다. 지표와 예측을 넘어서는 어떤 순간을 우리는 기다립니다. 기다리기 위해 우리는 먼저 길을 나섭니다. 그 길이 바로 인문의 길입니다. 인문의 길은, 혁명을 오래된 미래로 품고 있습니다. 화산의 풍경을 삭힌 감성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때리지 않고 울려서 성벽을 무너뜨립니다.


오늘 여기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인문 역시 고전적 인문은 아닙니다. 허구와 관념적 성찰의 영지에서 떠올리는 문학이나 철학이 주도하는 인문은 무력하고 한가합니다.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고 지향하는 경험의 서사가 지휘하는 실재the Real인문이 우리의 길입니다. 픽션과 논픽션, 문학과 의학, 철학과 과학, 심리학과 사회학, 시와 소설이 서로 경계를 가로지르며 실재 세계를 구성하는 길이 실재인문의 길입니다. 실재인문의 숨결에 우리 공동체의 마지막 감동이 달려 있습니다. 그 마지막 감동을 화산이게 하지 못하면 우리 공동체는 소멸하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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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장은 어기語氣나 내용이 기획적인 것으로 보아 후대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증 여부와 상관없이 그런 판단에 의거, 맨 뒤에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2. 제2장의 본문입니다.

 

仲尼曰 君子 中庸 小人 反中庸.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

중니왈 군자 중용 소인 반중용. 군자지중용야 군자이시중, 소인지중용야 소인이무기탄야.


중니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중용을 하고 소인은 중용을 거꾸로 한다. 군자가 중용을 하는 것은 군자다우면서 때에 알맞게 하고, 소인이 중용을 거꾸로 하는 것은 소인스러우면서 꺼리는 것이 없다.” 이하 기본적으로 이기동의 『대학·중용 강설』 역을 따름.

 

3. 군자라는 용어는 익숙한 만큼 어려운 말입니다.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게 함정이지요. 그래서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으로 둥둥 떠다니는 겁니다. 무엇보다 미리 전제된 개념이라는 인식이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 구체적 문맥에서 군자의 내포를 찾지 않고 막연한 카리스마를 부여함으로써 은연중에 통치자나 지배집단과 등치시키는 상징조작에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구체적 문맥에서 보면 중용을 실천하는, 그러니까 “중용하는” 사람이 군자입니다. 구체적 문맥을 보편적 지평으로 재빨리 전환하는 전술이 바로 주어와 술어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지요. 중국인들이 전가의 보도로 쓰는 어법입니다. 검증 과정 없이 역명제를 연역법의 선두에 세우는 일,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중용을 실천하고서야 비로소 군자가 될 수 있기에 중니께서는 뒤에 “도가 아마 행해지지 않을 것이다.”(제5장)라고 하여 군자가 ‘형성’될 수 없는 세상을 한탄하셨습니다. 바로 다음, 순 임금의 실천을 근거로 들며 “이로써 순이 되었다.”(제6장) 즉 “중용을 실천함으로써 군자가 되었다.”라고 갈파하셨습니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기본적으로 군자는 순 임금의 실천을 따르는 공자 자신을 가리킵니다. 이는 마치 신약성서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人子’라 하신 것과 같습니다. 제자들이 하느님을 보여 달라고 하자 “나를 본 것이 곧 하느님을 본 것이다.”라고 일갈하신 것과도 같습니다. 결국 이를 신성모독으로 간주한 모세종교 집단의 손에 예수가 죽었듯이 군자-자의식을 가진 공자는 끝내 제후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공자가 군자면 저들은 필연적으로 소인일 테니 말입니다. 

 

이런 맥락의 연장선에서 보면 군자란 공자를 대표단수로 하는 당시 사대부 계층 혁신 세력, 그 사상, 그 실천의 지향점을 가리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늘날 표현으로 바꾸면 “깨어 있는 민중 지성” 정도라고 할까요. 지나친 비약이 아닌 까닭은 다시 제6장에 나옵니다. 순 임금이 “묻기를 좋아하고 평범한 말을 살피기를 좋아했다.”는 사실 말입니다. 평범한 말이 무엇인 줄 안다면 군자를 이렇게 아래로부터, 그리고 집단적으로 자리매기는 데 이의를 달기 어려울 것입니다. 


4. 이렇듯 주희의 뜻과는 상관없이 군자는 약육강식, 승자독식을 추구하는 기득권 특수층 세력에 맞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혁신적, 저항적 주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군자의 사회적 행동의 강령인 중용은 약육강식, 승자독식에 맞서는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맥락에서 볼 때 중용은 거의 모든 주석들이 답습하는 것처럼 명사적 어법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명사적 이해에서는 중中이 핵심 가치이고 그 중이 불변하는 법칙임을 천명하는 게 용庸이라는 식으로 규정됩니다. 명사로서 중이 무엇이냐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지만 사실은 그럴수록 관념성만 깊어질 뿐입니다. 명사라는 것이 그 본령 상 추상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중용 자체를 동사 구문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 동사 구문 전체가 군자의 사회행위를 드러내는 술어가 됩니다. 중은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을 지닌 동사입니다. 용은 말 그대로 “평범하다.”는 뜻입니다. 결국 중용은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간결한 뜻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약육강식, 승자독식 사회에서 강자, 승자가 되려면 극단적 프로세스를 선택하는 ‘특별함/특수함’을 무기로 지녀야 합니다. 뭇 제후가 공자에게 바란 것이 바로 이런 ‘특별한/특수한’ 프로세스였고 그들이 그것을 통해 휘몰아가는 세상이 바로 춘추전국의 피바람이었지요.  

 

권력, 돈, 그리고 종교(지식)의 삼각동맹으로 사회이익을 독점하려고 준동하는 제후의 탐욕에 맞서 평범한 다수의 삶의 가치에 굳건히 닻을 내리려 했던 공자의 몸부림이 다름 아닌 중용입니다. 그러면 평범한 다수의 가치인 그 ‘평범함’은 무엇일까요?

 

평범하다는 것은 그저 그렇다는 뜻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산다는 뜻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산다는 것은 모순적 대칭구조로 이루어진 세계를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 대칭의 경계에서 부단히 모순의 공존융통을 위해 ‘거래’하는 삶이 바로 평범함입니다.

 

거래는 상호 ‘관통과 흡수’를 전제합니다. 쌍방향적 관계 형성입니다. 소통입니다. 제후적인 일방통행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쌍방향 소통을 하려면 자아의 중中, 곧 가운데를 버리고 ‘경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기득권으로서 중을 버려야 비로소 중용을 이룬다는 역설이 여기에서 성립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동사로서 중의 실질적 내용은 “끊임없이 경계로 나아간다.”는 역동적 경향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경계를 향해 나아가는 주체적 결단에서 늘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경계에는 자신과 동등한 주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와 만나 일구어내는 ‘서로 주체성’철학자 김상봉의 용어의 세상이 바로 군자의 세상입니다. 군자의 세상은 거창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습니다. 상호 소통, 거래, 관통과 흡수가 일어나는 일상적 사건 그 자체입니다. 그것이 용입니다. 그 용을 바르고 아름다운 흐름으로 만드는 것이 중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종래 중용 이해는 거꾸로 된 것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주희와는 맞는지 모르나 공자와는 맞지 않는, 아니 우리와는 맞지 않는 식민지적 해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용도 실천이요 중도 실천이니 둘 다 동사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도리어 용에 있습니다.

 

5. 대칭구조로 된 현실세계에서 모순을 ‘공존융통’시키는 건강한 거래, 공정한 소통은 시의성, 곧 시중時中이 생명입니다. 찰나마다 서로 주체의 상황은 변하므로 그에 알맞게 소통해야 합니다. 영원불변하는 규범이란 논리적인 차원에서라면 모르되 현실적으로는 무의미한 것이지요. 죽어도 해야 한다, 죽어도 해서는 안 된다, 이런 강박적 기준은 제후의 가치입니다. 군자는 때에 맞추어 그저 올바르게 할 따름입니다.

 

6. 중용의 공간적/공시적synchronic 지평은 서로주체성의 평등, 평화 사회이념으로 나타나고 시간적/통시적diachronic 맥락은 투명한 혁신, 저항의 역사의식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이해야말로 평범한 사람, 즉 중용의 사람이 읽는 중용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주희와 그 아류를 따르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7. 군자가 위와 같이 자리매겨진다면 소인은 당연히 ‘홀로주체성’에 입각해 분열적, 강박적으로 강자의 길, 승자의 길을 추구하는 저 춘추전국 시대의 제후 무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주희 아류의 사람 또한 거기에 소속되겠지요. 더 나아가 오늘 우리를 살펴본다면 약탈적 자본주의,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지배집단이 바로 소인입니다.

 

입만 열면 “국민을 위한다.”면서 말끝마다 국민을 향한 훈계를 달고 사는, 아마도 속으로 자신들을 군자라고 생각할, 이른바 사회지도층이 바로 소인 집단임에 틀림없습니다. 저들은 스스로 중용한다고 함으로써 오히려 소인임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으니 소인답습니다. 저들은 부정선거, 뇌물 수수, 부동산 투기, 주가조작, 이중국적 취득, 탈세, 병역 기피, 위장 전입, 심지어 살인까지 거리낌 없이[무기탄無忌憚] 행하고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니 가히 소인의 중용답습니다.

 

되는 대로 지껄이고 닥치는 대로 말을 바꿉니다. 개인적 신념과 국가 경영철학을 혼동합니다. 사적 처지와 공적 지위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 한다면서 지역감정에 편승합니다. 양극화가 극으로 치달으며 서민경제는 파탄의 나락으로 떨어지는데 민영화 운운 제 곳간 채우려는 궁리만 합니다. 과연 기탄없습니다.


무엇보다 이 소인배는 소통을 거부합니다. 자기 말만 하고 귀를 닫습니다. 유체이탈 어법으로 초월자 놀이를 물색없이 즐깁니다. 자기 잘못을 남에게 투사합니다. 악행을 저지르고 정의구현을 외칩니다. 거짓말을 하고 정직을 훈계합니다. 이런 뻔뻔한 일방통행, 그 사이코패스가 낳은 최악의 범죄가 바로 2014년 4월 16일의 세월호사건, 저 천인공노할 대량학살genocide입니다. 일방적으로 저지르고 일방적으로 조작하고 일방적으로 왜곡했습니다. 지금도 일방적으로 역사에서 지우려고 온갖 협잡을 마다하지 않고 있습니다. 소인배도 이런 소인배는 다시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막히게도 이들이 바로 우리사회를 이끌어가는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권력, 돈, 종교(지식)를 석권한 ‘뜬 사람’celebrity입니다. 이들 눈에는 ‘평범한’ 국민들이 중용과는 아무 관련 없는 무지렁이로 보이겠지요. 허나 그들의 그 ‘특별함’이야말로 ‘무기탄’과 동의어임을 어느 누가 부인할 것입니까?


8. 군자는 늘, 때에 알맞게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않음으로써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기득권적 중심을 버리고 스스로 경계로 나아가 타인과 소통함으로써 대동大同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 그러므로 그의 영혼은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시대정신에 맞서는 투명한 날카로움으로 빛납니다. 군자의 영혼이야말로 원철학적 혁명이요, 기품 있는 좌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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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고전읽기를 하는 까닭은 삶에서 어떻게 시공의 질서와 변화가 이루어지는가, 어찌하면 그 삶의 참된 주체로 설 수 있는가를 탐색하기 위함입니다. 어떤 고전이든 숱한 눈길을 거치며 세월보다 더 많은 의미 덩이들을  끌어안고 있겠지만 오늘 나의 눈으로 새롭게 읽지 않는 한 화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무엇을 읽느냐 하는 문제보다는 어떻게 읽느냐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겠지요. 어떻게 읽으면 『중용』이 우리 시대에 살아있는 고전이 될까요?

 

『중용』이란 텍스트는 본디 예기에 속해 있었는데 남송의 주희가 독립시켰다고 합니다. 주희는 『중용』뿐만 아니라 『대학』도 그리 했고, 나아가 유가 경전 전체를 재구성하여 이른바 사서삼경이란 개념 자체를 만들었습니다. 결국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최종 텍스트로서 유가 경전 체계는 주희 한 사람의 편집 작품입니다.  

 

물론 내용은 저자로 가탁된 사람의 직접 언술도 포함하겠지만 후대의 가필과 수정도 있습니다. 고대의 책 쓰기는 지금과 전혀 달라 단일 저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홀로 써 완성한 경우는 없습니다. 이를테면 사회역사적 집단 창작이지요. 그러므로 깊이 있는 본문 비평이 필요한 것입니다. 일점일획이 다 성현 말씀이다, 이래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오늘 우리의 안목으로 사서삼경을 재구성할 수도 있습니다. 주희에게 있던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다면 사서삼경은 종교적 권위를 획득하게 되는데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겠지요. 체계 전체를 문제 삼지 않더라도 부분적인 구성이나 의미 해석에서는 이미 수도 없이 재구성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내용이든 형식이든 끊임없이 흔들리며 시대마다 새롭게 태어나야 오히려 참된 권위를 지닌 고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주희는 그 본보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주희만큼의 치열성이 있다면 누구라도 사서삼경을 우리의 문제의식에 맞게 재구성, 편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희가 활동했던 남송 시대의 사대부에게는 크게 두 가지 화두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통치 이념으로서 정통유가의 헤게모니를 확립하는 것입니다. 특히 불교 사상의 도전에 직면한 유가의 위기의식은 주희에게서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난 바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른바 오랑캐에게 수모를 당하고 남으로 밀려난 한漢족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중화 이념의 확립을 통해 중원 패권의 옛 영광을 대체 복원하는 것입니다. 이 두 흐름을 한 데로 묶는 정치경제학적 연결고리가 바로 중산층 사대부의 존재였습니다.

 

주희는 사대부 시각에서 한족 주체의 중국 전통 질서와 체계를 중심으로 모든 가치를 통합, 안정화하는 명사적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명사적 어법으로 텍스트를 재구성하고 읽어냈습니다. 이런 접근법으로 그가 처한 시대의 난관을 돌파했다는 점에서 주희는 참으로 탁월한 존재입니다. 

 

주희는 주희의 탁월함으로 빛납니다. 우리는 우리의 탁월함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과연 주희의 어떤 관점이 유효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보기에는 우리 사회가 주희와 너무나도 판이한 과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그만큼 다른 각도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의 과제는 무엇일까요? 앞서 품은 의문에 집중하여 생각하면 세월호사건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진실에 따른 사회정치적 실재를 세우는 일, 바로 그것이 우리의 과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월호사건은 단순한 대형 해양교통사고가 결코 아닙니다. 짧게는 지난 50여 년 동안 개발독재 세력이 저질러온 정치적 범죄의 전형이자 집적물입니다. 길게는 이 나라를 1400년 동안 수탈해온 매판적 지배세력의 헤게모니 유지·강화 전략의 전형이자 집적물입니다. 세월호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일은 이 나라 암울한 역사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일입니다. 세월호사건의 진실에 따른 사회정치적 실재를 세우는 일는 이 나라 견고한 지배구조를 전복시키는 일입니다.



이런 과제 앞에서 『중용』을 읽으려면 두 가지 다른 독법이 필수적입니다. 우선, 주희(와 주류 해석자들)처럼 명사적 어법으로 읽어서는 안 되고 반대로 동사적 어법으로 읽어야 합니다. 동사적 어법으로 읽을 때, 세월호 아이들은 살아 있는 역사가 됩니다. 그리고 주희(와 주류 해석자들)처럼 『중용』을 개인 수신 텍스트로 읽어서는 안 되고 정치 텍스트로 읽어야 합니다. 정치 텍스트로 읽을 때, 『중용』은 이 나라 자주·민주·통일을 위한 변혁의 텍스트가 됩니다.


우리 과제와 거기 따른 우리 독법에 유념하면서 이제 『중용』 세계를 열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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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지기 고전은 고전인 까닭이 있습니다. 자고 나면 새로운 베스트셀러가 ‘떠서’, 마치 그것을 읽지 않으면 크게 뒤쳐지기라도 할 듯 요란 떨지만, 묵묵한 고전에서 날로 새로운 깨우침이 일어나는 법입니다. 세월의 더께 때문에 고전은 날로 가벼워져 묻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전이 고전인 까닭은 오늘 여기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비록 권위 있는 어떤 시공간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된 텍스트가 있을지라도 고전은 신성불가침의 경전이어서는 안 됩니다. 경전으로 떠받들리는 찰나 그것은 이미 고전이 아닙니다. 경전이 만들어내는 믿음에는 거짓의 독버섯이 무성합니다. 거짓을 걷어내고 살아 있는 진실을 마주하려면 경전을 가차 없이 베어버려야 합니다. 경전을 베는 마음 고갱이에는 의문이라는 용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의문은 내 앞에 놓인 삶의 고통이 빚어낸 눈물입니다. 그 눈물 없이는 당최 고전의 존재이유가 없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우리는 절체절명의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사건과 급격하게 마주쳤습니다. 꽃 같은 아이들 이백오십 명의 생명이 시시각각 죽어가는 것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바라보아야만 했습니다. 사건이 터지자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국가는 온통 거짓과 조작, 그리고 다양한 폭력을 동원해 국민을 우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수많은 날들이 흐른 지금까지 진실 규명은커녕 아무런 실질적 후속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희희낙락 살아가는 자들의 훤화 소리만 낭자하게 흩어지고 있습니다.


대체 아이들은 왜 죽었을까? 아니 왜 죽였을까? 이 사건을 단순 사고로 눙치고 이렇게 넘어가야 할까?


이 의문 앞에서 저는 아프디아프게 『중용』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문제가 야기한 이른바 촛불정국 때 저는 중학생인 딸과 함께 ‘왜?’라는 의문 속에서 『중용』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의문은 풀리지 않았고 세상은 더욱 두려움에 잠기고 말았습니다. 침묵의 시간을 흘려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침묵을 깨뜨린 아이들의 죽음이 저에게 다시 『중용』 읽기를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질문하기를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결국 그 때 그 아이들의 의문이 지금 이 아이들의 의문의 죽음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권력이 그 아이들에게 ‘종북’ 딱지를 붙였듯, 지금 이 권력 또한 이 아이들을, 부모들을 ‘종북’으로 몰아 고립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 그 아이들을 죽이지 못한 분풀이를 이제 이렇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의문을 품는 것은 물론 갑절로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두렵기 ‘때문에’ 다시 읽기 시작하려 합니다. 바다 속 아이들은 이보다 더 두려웠을 테니 말입니다. 두려움의 연대로 인문의 새벽을 열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든 또 이런 비극은 일어날 테니 말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고전 하나 들어 올려 아이들에게 헌정하는 일이 불가피한 때입니다.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면서 중용 헌정의 길로 삼가 걸어 들어가겠습니다.


고해인 김민지 김민희 김수경 김수진 김영경 김예은 김주아 김현정 문지성 박성빈 우소영 유미지 이수연 이연화 정가현 조은화 한고운 강수정 강우영 길채원 김민지 김소정 김수정 김주희 김지윤 남수빈 남지현 박정은 박주희 박혜선 송지나 양온유 오유정 윤민지 윤솔 이혜경 전하영 정지아 조서우 한세영 허다윤 허유림 김담비 김도언 김빛나라 김소연 김수경 김시연 김영은 김주은 김지인 박영란 박예슬 박지우 박지윤 박채연 백지숙 신승희 유예은 유혜원 이지민 장주이 전영수 정예진 최수희 최윤민 한은지 황지현 강승묵 강신욱 강혁 권오천 김건우 김대희 김동혁 김범수 김용진 김웅기 김윤수 김정현 김호연 박수현 박정훈 빈하용 슬라바 안준혁 안형준 임경빈 임요한 장진용 정차웅 정휘범 진우혁 최성호 한정우 홍순영 김건우 김건우 김도현 김민석 김민성 김성현 김완준 김인호 김진광 김한별 문중식 박성호 박준민 박진리 박홍래 서동진 오준영 이석준 이진환 이창현 이홍승 인태범 정이삭 조성원 천인호 최남혁 최민석 구태민 권순범 김동영 김동협 김민규 김승태 김승혁 김승환 남현철 박새도 박영인 서재능 선우진 신호성 이건계 이다운 이세현 이영만 이장환 이태민 전현탁 정원석 최덕하 홍종용 황민우 곽수인 국승현 김건호 김기수 김민수 김상호 김성빈 김수빈 김정민 나강민 박성복 박인배 박현섭 서현섭 성민재 손찬우 송강현 심장영 안중근 양철민 오영석 이강명 이근형 이민우 이수빈 이정인 이준우 이진형 전찬호 정동수 최현주 허재강 고우재 김대현 김동현 김선우 김영창 김재영 김제훈 김창헌 박선균 박수찬 박시찬 백승현 안주현 이승민 이승현 이재욱 이호진 임건우 임현진 장준형 전현우 제세호 조봉석 조찬민 지상준 최수빈 최정수 최진혁 홍승준 고하영 권민경 김민정 김아라 김초예 김해화 김혜선 박예지 배향매 오경미 이보미 이수진 이한솔 임세희 정다빈 정다혜 조은정 진윤희 최진아 편다인 강한솔 구보현 권지혜 김다영 김민정 김송희 김슬기 김유민 김주희 박정슬 이가영 이경민 이경주 이다혜 이단비 이소진 이은별 이해주 장수정 장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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