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일이송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이대남은 정말 극우화되고 있는가? 투표 결과를 놓고 펼쳐지는 갑론을박. 한쪽에선 이대남이라는 세대 전체로 라벨링을 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또 한쪽에선 확실한 극우화를 주장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유럽과 북미, 동아시아에 걸쳐 이대남의 극우화 여부를 놓고 여러 의견이 격렬히 각축하는 형국이다. 2024년 초 파이낸셜 타임즈, 이코노미스트, 컨버세이션 등 여러 유명 매체들이 전 세계 청년층 사이에 '성별 정치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는 분석 기사를 올린 바 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고용 위기와 경제적 불안정이 증폭된 시기를 경유하며 불만이 증가하고 지위 하락의 불안을 느끼는 20대 남성들을 극우정당이 기민하게 자극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가령, 2024년 조사에 따르면 유럽에선 젊은 남성의 21%가 극우정당을 지지했다. 그런데 같은 연령대 여성의 경우엔 14%만 지지했다. 이러한 성별 격차는 2020년 이후 급격히 벌어지고 있다.
심지어 유럽에서 좌파색이 강한 포르투갈에서도 최근 극우 세력이 점점 성장하고 있는데, 얼마 전 조사에서는 젊은 남성이 여성보다 극우에 투표할 가능성이 5배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최근 총선에서 나치의 재도약으로 호명되며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독일의 AfD의 경우에도 18~24세 남성의 27%가 이 당을 지지했다. 반면에 젊은 여성은 정반대로 이동했다. 약 35%가 급진좌파 Linke당에 투표한 것이다.
그러면 미국의 경우는 어떨까? 18세에서 29세 사이 남성의 약 절반이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에게 투표했고, 젊은 여성의 61%가 카멀라 해리스에게 투표했다.
이렇게 몇 가지 통계만 배열해 놓아도 20대 연령층의 성별 격차 심화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왜 북미, 유럽, 동아시아의 20대 남성은 극우에게 표를 주는 걸까? 물론 이에 대한 분석이 다각도로 이루어져야 한다. 계급투쟁을 문화전쟁으로 전환시킨 극우운동의 득세, 그리고 극우가 이토록 번성하도록 조건을 형성해준 신자유주의 폐해 등 다각도의 연구가 필요하다. 또 미국 부통령인 JD 밴스를 비롯해 북반구 극우들이 근자에 들어 이민 문제 못지 않게 남성성과 테스토스테론을 부각해 20대 남성을 사로잡는 전략상의 변화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하지만 그에 앞서 두 가지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첫째, 정말 20대 남성들만 극우화되는 걸까? 유럽이든 미국이든 유권자들 전반적으로 극우와 보수 세력을 지지하는 경향이 심화되고 있다. 이번 한국 대선에서도 다른 연령층 유권자들이 내란정당과 김문수에게, 또 일부는 이준석에게 많은 지지표를 던졌다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두 번째로 우리가 확인해야 할 지점은 혹시 20대 연령층의 '성별 격차'의 심화가 20대 남성의 극우정당 지지를 상대적으로 돋보이게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유독 '좌경화'되고 있는 20대 여성들 때문에 극우 세력을 찍은 20대 남성들의 우경화가 부각되는 것 아니냐는 분석.
이 두 가지 사실에 기초해, 한국에도 잘 알려진 극우 포퓰리즘 연구가인 카스 무데는 발상의 전환을 제안한다. 며칠 전 가디언 기고글에서 20대 남성의 극우화만 지적하는 현상은 일종의 '정치적 왜곡'일 수 있다고 분석한다.
언론들이 젊은 남성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여전히 사회를 지배하는 남성의 시선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남성의 행동과 생각이 본질적으로 더 중요하고 학문적-정치적 관심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여길 뿐 아니라, 남성의 세계관을 하나의 규범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발생한다. 이는 결국에 국우 세력을 더 성장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따끔한 지적이다.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건 20대 여성들이 '좌경화'다. 세계가 전반적으로 우경화되는 가운데, 도대체, 왜 20대 여성들은 홀로 왼쪽으로 걸어가냐고 질문하는 것이 이 세계를 위해 더 유의미하다는 것이다.
왜 그녀들은 낙태권과 페미니즘, 기후와 환경, 그리고 경제적 재분배를 더 지지하는 걸까? 단지 학문적 질문만이 아니라 더 나은 정치를 위해서라도 이 질문에 초점을 맞추고 정치적 대안을 발명하고 구성하자는 카스 무데의 제안은 확실히 탁견이 아닐 수 없다.
이번 대선에서 한국 20대 남성의 일부는 '위선적인 거대 양당이 싫어서', '군 문제로 자신들을 위로해준 유일한 후보를 찍고 싶어서', '페미니즘이 싫어서' 등 여러 이유로 개혁신당과 이준석을 지지했을 것이다. 극우를 지지하는 이유는 다양하고, 또 극우의 얼굴도 다양하다.
이준석은 필시 퇴출시켜야 하는 극우 정치인이지만, 20대 남성 일부를 이대남으로 라벨링하고 악마화하는 것은 당연히 지양되어야 한다.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문제를 들여다봐야 한다. 자기 삶의 불안정성을 타인의 책임으로 돌려놓고 '오인된 분노'의 경로를 면밀히 추적하고, 불안이 축소된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극우 산불을 근원적으로 진압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 카스 무데가 제안한 것처럼, 그간의 관성적이고 남성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대남에 대한 과잉 담론화는 그 일부의 정치적 경로를 '정상화'하고 또 극우 세력의 확장을 돕는 악순환을 거듭할 여지가 농후하다. 오히려 질문을 거꾸로 뒤집어 물구나무 세워보자.
젊은 여성은 왜 좌경화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