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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대학로 - 성균관 유생과 반촌 사람들
안대회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2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칠십 평생 서울을 오가며 참으로 많은 변화를 목격했다. 전차 소리가 들리던 거리에는 지하철이 들어섰고, 낮은 기와집들이 모여 있던 골목은 거대한 빌딩 숲으로 변했다. 그중에서도 혜화동 ‘대학로’는 우리 세대에게 젊음과 낭만, 그리고 예술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안대희 교수의 저작 <조선의 대학로>는 우리가 알던 20세기의 대학로를 넘어, 18세기 조선의 지성과 예술이 꽃피었던 ‘진짜 대학로’의 뿌리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 책은 성균관 주변, 즉 ‘반촌’이라 불리던 동네를 주목한다. 오늘날 우리가 대학로라 부르는 성균관대 앞 일대가 조선 시대에도 이미 젊은 유생들의 지적 열기와 중인들의 예술적 감수성이 충돌하고 융합되던 거대한 문화 특구였음을 저자는 치밀한 고증으로 증명해내고 있다. 70대의 눈에 비친 이 대목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우리가 그저 ‘공부하는 곳’으로만 알았던 성균관 주변이 사실은 시와 술, 음악과 토론이 밤낮없이 이어지던 조선의 심장이었다는 사실은, 서울이라는 도시를 다시 보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성균관 유생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뒷바라지하며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던 반촌 사람들, 즉 ‘반민’들의 삶을 입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신분 질서가 엄격했던 조선 사회에서 반촌은 유교적 원칙과 세속적 활력이 공존하던 경계의 공간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우리 세대가 겪었던 격동의 시기를 떠올려봤다. 시대의 경계에서 치열하게 삶을 일구었던 우리네 모습이, 수백 년 전 반촌에서 시를 짓고 소고기를 팔며 새로운 문화를 만들던 그들의 모습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저자가 발굴해낸 반촌의 에피소드들은 박제된 역사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살아 숨 쉬는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처럼 생생하다.

70대에 들어서면 산책은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세상과 대화하는 과정이 된다. 이 책은 대학로라는 익숙한 공간 위에 ‘역사’라는 투명한 지도를 덧씌워준다. 혜화동 로터리를 지날 때, 성균관 담장을 따라 걸을 때,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조선 문인들의 필치와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저자의 유려한 문장은 마치 해박한 지식을 가진 노학자와 함께 호젓한 고궁 뒷길을 걷는 듯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인문학적 깊이가 있으면서도 문장이 명료하여, 눈이 침침해진 노년의 독자에게도 막힘없이 읽히는 배려가 고맙다.

이 책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공간이 가진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건물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어도 그 땅이 품은 기운은 사라지지 않는다. 조선의 유생들이 고민했던 정의와 진리, 중인들이 탐닉했던 예술의 향기가 오늘날 소극장이 가득한 대학로의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통찰은 노년의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이 책은 서울을 사랑하는 동년배들에게는 추억을 반추하는 보석 상자가 될 것이고, 손주 세대들에게는 자신들이 걷는 거리에 깃든 자부심을 가르쳐주는 훌륭한 교과서가 될 것이다. 인생의 황혼에서 만난 이 책 덕분에, 나의 다음 대학로 산책은 훨씬 더 풍요롭고 찬란할 것 같다. 역사를 잊지 않는 민족에게 미래가 있듯, 공간의 기억을 소생시키는 안대희 교수의 노고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 책을 덮고 나서 다시금 혜화동 지도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단순히 지식을 채우는 것을 넘어, 우리가 사는 공간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다정한 안내서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