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는 파랗게 높은 하늘도 이유가 있고,
조심히 익어가는 과실이 애틋하며,
아침 이슬에 반가워 하다가 또 깊어가는 밤이 서글퍼지기도 한다.
수시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마음 깊은 곳을 시 한편으로 채워보라는 듯 때마침 시 읽는 이벤트를 하는 곳이 있어서,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속 길게 풀어놓은 사연중 <저녁의 소묘 5> 를 함께 한다.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저녁의 소묘 5
죽은 나무라고 의심했던
검은 나무가 무성해지는 걸 지켜보았다
지켜보는 동안 저녁이 오고
연둣빛 눈들에서 피가 흐르고
어둠에 혀가 잠기고
지워지던 빛이
투명한 칼집들을 그었다
(살아 있으므로)
그 밑동에 손을 뻗었다
- 한 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본문 p 137 중에서
작가의 저녁은 모르겠다. 그러나.
나의 시간은 단단해져가는 나무들이 있고, 상처투성이 고목이 되어 온몸에 옹이구멍 투성이로 저녁을 맞이하는 애틋한 나무도 있고......
그래도.
가을에는 평온한 밤이 되어주길 바라며, 시인의 투명하고, 어둡고, 진한 저녁까지 엿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