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가 되는 법 - 읽고 쓰는 사람으로 책 세계를 만끽하기 위하여 땅콩문고
김성신 지음 / 유유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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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문으로 읽고 쓰는 사람이 되어 책 세계를 만끽하기


김성신 저, ‘서평가 되는 법‘을 읽고


전문 서평가 김성신이 쓴 이 책의 부제는 ’읽고 쓰는 사람으로 책 세계를 만끽하기 위하여‘이다. 제목인 ‘서평가 되는 법‘과 연결시키면, 부제에서 말하는 읽고 쓰는 사람이란 곧 서평가를 뜻한다. 이 책을 통한 저자의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서평가가 되어 책 세계를 만끽하라.‘ 정도가 될 것이다. 분량도 적고 쉬운 문체로 써졌기 때문인지 수영 강습받는 아들을 한 시간 동안 기다리며 책을 다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저자의 메시지에 대체적으로 공감을 하면서도 서평 혹은 서평가라는 단어에 대한 생각이 조금 달라 전적인 동의는 할 수 없었다. 


저자처럼 나 역시 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인터넷과 스마트폰과 동영상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독서문화가 사라지거나 사그라들지 않고 오히려 확산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시대의 흐름은 딱히 긍정적이진 않으나 대세가 어떻게 되든 나는 죽는 날까지 독서운동가로서 살아갈 운명을 느끼고 있으며 그렇게 살다 가고 싶다. 어떻게든 책의 유용성과 독서의 묘미를 주위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싶다. 그래서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동영상 시청을 자제하고 책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늘어날 수 있도록 애써볼 요량이다. 그 한 가지 방법으로 나는 독서모임을 권하곤 하는데, 그것과 곁들여서 꼭 권하는 게 있으니, 그건 독후감상문을 짧게라도 써보라는 것이다. 이는 이미 '도스토옙스키와 저녁식사를' 독서모임을 일 년 반 동안 함께 하며 실제로 검증된 방식이기도 하다. 


눈치 빠른 독자는 금세 알아챘을 것이다. 그렇다. 내가 저자의 메시지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던 이유는 서평과 감상문의 차이 때문이다.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부터 감상문이 아닌 서평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사용한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줄 안다. 그러나 서평과 감상문을 구분하고 둘 중 감상문을 선호하는 나로서는 서평이라는 단어가 가진 위압감 아닌 위압감이 불편하다. 또한 책 세계를 만끽하기 위해 굳이 서평가가 될 필요까지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서평이 아닌 감상문을 쓰는 정도로도, 아니 서평이 아닌 감상문을 쓰는 방법이 오히려 더 책 세계를 만끽하기 쉽다고 생각하고, 이 방법이 더 대중적으로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언젠가부터 나도 읽고 쓰는 사람이 되어버렸는데 서평이 아닌 감상문 쓰기가 나의 첫걸음이었다. 지금도 나는 서평은 모든 사람이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감상문을 쓰면서 독서를 마무리하는 습관만 가져도 충분히 독서의 맛과 힘을 체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 그렇다면 서평과 감상문의 차이는 무엇일까?


저자는 책을 치우치지 않게 객관적으로 소개하여 미래의 독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돕는 글을 서평이라 정의하는 것 같다. 이 책에서는 어떤 책을 읽고 그 책에 대해 쓰면 서평이다,라고 쉽게 말하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저자 스스로도 동의하지 않는 정의일 것이다. 이어지는 글에서 저자 역시 서평다운 서평은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서평이 가져야 할 중요한 조건으로써 공공성을 꼽는다. 단지 책이 잘 팔리게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쓰는 서평은 서평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하면서 말이다. 서평과 광고를 엄격하게 구분하면서, 공공성이 결여된 서평은 서평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 부분에서 나는 저자의 말에 완전 공감했다. 생각보다 많은 서평들이 현실에서는 객관성을 잃은 채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수단으로 편파적이고 정치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얼마나 비일비재한가.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공공성이란 객관성, 공정성, 정확성 등을 지칭하는 용어와 같은 의미일 것이다. 즉, 저자가 정의하는 서평이란 책을 객관적이고 공정하고 정확하게 소개하고 평가하는 글인 것이다. 


이에 반하여 내가 정의하는 감상문은 독자의 고유한 생각과 느낌을 담아내는 글이다. 주관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다른 사람이 읽었을 땐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 글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객관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정확하지도 않은 글일 가능성이 농후한 글이 바로 감상문이라는 말이다. 나는 서평이 아닌 감상문을 쓰는 것이 오히려 책을 더 사랑하게 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말하는 공공성이 없어도 충분히 책 세계를 만끽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공성은 서평의 요체이긴 하지만, 책 세계를 만끽하기 위해 독자들이 꼭 가져야만 하는 요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현실에서도 누군가가 읽은 책이 읽고 싶어질 때는 그 사람의 주관적인 반응과 개인적인 변화 때문이지, 그 책이 가진 객관적이고 정확한 가치가 파악되었기 때문이 아니지 않은가.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쓰인 서평을 읽으면 그 책의 정체성을 공정하게 파악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읽고 싶어지는 마음이 항상 따라오는 건 아니지 않은가. 누가 운동하는 습관과 건강한 식습관을 몰라서 안 하는가? 정확한 지식이 과연 우리를 행동으로 이끄는가? 나는 아니라는 데 한 표를 던진다. 인간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고 살아온 대로, 습관을 좇아 사는 존재이며, 이성보단 감정에 의해 행동으로 더 자주 옮기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공공성을 띠고 잘 쓰인 서평이 아닌, 주관적이고 개인적일지라도 어떤 내 안의 정서를 자극하거나 어떤 은밀한 감정과 접점을 이루는 감상문이 그 책을 손에 들게 만들 확률이 나는 더 높다고 생각한다. 


정리하자면, 나는 저자와 같은 지향점을 가지지만, 저자와 다른 방식, 즉 서평이 아닌 감상문을 씀으로써 책 세계를 충분히 만끽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서평은 필요하다. 그러나 서평을 쓰는 사람은 소수여도 된다고 생각한다. 모든 독자가 서평가가 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대신 독서의 마지막 단계로 감상문을 짧게라도 쓰는 습관을 들인다면 누가 뭐라고 하든 책과 사랑에 빠질 확률이 더 높을 것이고, 책이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기록할 수 있으며, 그러다 보면 어느덧 읽고 쓰는 사람이 되어있을 거라고 믿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서평가도 감상문을 쓰는 것을 먼저 시작해서 진화하는 게 정석이지 않을까 싶다. 개인의 고유한 생각을 글로 풀어내지 못하면서 공공성을 띤 글을 쓴다는 건 AI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즉 감상문을 쓰는 사람이 많아지고, 그중에서 몇몇이 서평가로 활동하면 이상적이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이 책은 주로 저자가 만난 여러 사람들을 서평가로 살게끔 했던 여러 사례들을 소개하는 꼭지들로 이뤄져 있다.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과연 저자의 방법이 대중화될 수 있을진 의문이 들었다. 저자가 방송 출연을 하는 유명인이 아니었다면 과연 그 방법이 먹혔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유명인이 아니라 단지 좋은 취지만 가진 일반인이었다면, 과연 한때 유명했던 코미디언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30년 넘게 요리사로 일한 중년의 셰프가, KBS 방송국에서나 만날 수 있을 북한 작가가 서평가로 활동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들이 저자의 권유를 받아들인 건 단지 저자의 공공성을 띤 취지 때문만이 아니라 저자가 방송계와 언론계와 출판계에서 가진 영향력이 한몫을 담당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내게 그 꼭지들은 평범한 대중들과는 상관이 없는 소수의 유명인이 서평을 쓰게 된 사례로 읽혔을 뿐이었다. 그러나 저자가 시작했던 '비평연대'는 응원하게 된다. 특정 유명인이 아니라 젊은 일반인들이 함께 하는 공동체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유유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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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삶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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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골 기질이 쓴 '평생 단 한 번 쓸 수 있는 책'


김영하 저, '단 한 번의 삶'을 읽고


반골 기질 때문일까? 천성적인 아웃사이더 성향 때문일까? 내로라하는 베스트셀러 작가들의 책을 무의식적으로 피하는 유치한 경향을 가진 나는 지금까지 김영하 작가의 작품을 두 권밖에 읽지 않았다. 그것도 소설 한 권 (살인자의 기억법), 에세이 한 권 (여행의 이유)이었다. 그랬던 내가 잔뜩 밀려있는 책을 제쳐두고 출간된 지 석 달 채 되지 않은 그의 신간을 구입해서 먼저 읽었다. 예상 밖의 행동에 스스로 놀라면서도 나는 즐거움을 느꼈는데, 이것 역시 반골 기질, 천성적인 아웃사이더 성향 탓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부한 제목인데도 진리를 담고 있어 이목을 끈 이 책은 내 손에 들어온 지 두 시간 만에 읽혀버렸다. 책을 덮고 한 사람의 생을 단 두 시간 만에 읽었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죄책감을 느꼈던 것도 잠시, 70억이 넘는 지구인 중에서 한 사람의 인생을 두 시간 집중해서 읽었다는 사실에 금세 우쭐함을 느끼며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었다. 나아가, 내가 평소에 궁금해하는 사람도 아닌,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의 인생에 집중했다는 건 실로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까지 하면서 나는 마치 누군가의 고백을 두 시간 동안이나 조용히 경청한 착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도 느꼈다. 어느덧 나는, 재미있게도, 물론 나만의 상상 속에서, 일개 독자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베스트셀러 작가의 고해성사를 들어준 성당 신부로 격상했던 것이다. 


저자가 후기에 쓴 대로, 내게도 이 책은 김영하 작가가 평생 단 한 번 쓸 수 있는 책으로 읽혔다. 그리고 저자가 바로 뒷문장에 이어서 쓴 대로, 그가 그런 책을 너무 이른 나이에 쓴 게 아닌가 하고 느꼈던 두려움에 공감이 되었다. 그가 68년생이니 나와는 9년 차이밖에 나지 않고, 아직 환갑도 지나지 않았는데 인생을 회고하는 책을 냈다는 것이 긍정적으로만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평균 기대수명이 82세를 넘기고 있는 시대이고, 평생 단 한 번 쓸 수 있는 책이라면, 그것도 인생을 회고하며 쓰는 책이라면 적어도 70세는 넘기고 써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책을 덮고도 뜻밖의 아쉬움이 남는다. 필력만이 아닌 인생의 무게가 더해지면 책 속의 문장들 또한 더 큰 무게를 갖게 되고 책의 무게 또한 가중될 텐데 말이다. 그러나 김영하 작가 역시 스스로가 밝히듯 그가 가진 반골 기질 때문에 이런 일도 어쩌다가 툭 질러버린 게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것 역시 책 속에서 그가 밝힌 그의 인생의 결정들과 그에 따른 예상치 못했던 인생 항로의 연장선에 놓인 일이지 않나 싶다. 한 마디로 김영하다운 판단과 행동의 결과일 수 있겠다 싶다. 그래서일까. 나와 비슷한 반골 성향을 가진 그가 이 책을 내고 기다린다는 '미래의 운'이 부디 그에게 가 닿길 진심으로 기원하게 된다. 


#복복서가

#김영웅의책과일상 


* 김영하 읽기

1. 살인자의 기억법: https://rtmodel.tistory.com/1315

2. 여행의 이유: https://rtmodel.tistory.com/1110

3. 번의 : https://rtmodel.tistory.com/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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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나의 30년 친구, 독서회
무카이 가즈미 지음, 한정림 옮김 / 정은문고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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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독서모임에 대한 사랑


무카이 가즈미 저, '다정한 나의 30년 친구, 독서회'를 읽고


저자 무카이 가즈미는 번역가와 사서로 살아오며 평생 책을 가까이했다. 학생 시절 번역 선생님의 권유로 독서회에 참석하게 된 이후 어느덧 선생님은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시고 저자는 30년이란 세월을 넘기며 독서회를 지속하고 있다. 하나의 일을 10년 넘게 한 사람을 소위 전문가라고 부른다면, 저자는 번역가라는 직업만이 아닌 독서회 리더로서도 베테랑 중 베테랑에 해당되는 경험과 노하우를 습득했음이 틀림없다. 이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독서모임에 참석하고 있거나 기획하고 있는 독자들은 이 책의 내용이 무척이나 궁금할 것이다. 나 역시 그랬고 책이 출간되자마자 구입해서 읽었다. 


제목에서도 강조하고 있듯 30년이라는 세월은 누군가에겐 전부일만큼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다. 책을 사랑하고 독서모임을 사랑하는 나로선 그 기간 동안 같은 독서회를 지속했다는 그것 하나만이라도 상을 받아 마땅한 이유라 생각한다. 독서모임은 직업과는 달리 수익이 창출되기는커녕 오히려 돈이 드는 일이다. 적어도 책을 사고 모이는 장소를 마련하고 다과를 함께 하기 위해선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독서모임은 시간을 잡아먹는 하마이기도 하다. 한 달에 책 한 권을 읽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따져보면, 250페이지 분량의 소설을 한 시간에 50페이지 읽을 수 있다고 가정할 때, 총 5시간이 소요된다. 대부분의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5시간을 내리 집중하며 책을 읽으라는 건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기에 그 5시간은 10시간으로 늘어나기도 하고, 그것마저도 며칠, 혹은 몇 주일에 걸쳐 조각나는 게 보통이다. 독서 시간이 늘어지고 조각날수록 책의 내용은 점점 더 망각의 세계로 넘어가게 되고 급기야 강박이 생기기도 하며 스트레스가 되어 독서모임의 무용성을 주장하게 되기도 한다. 일에 치여 쉼을 얻고자 독서모임을 시작했는데, 독서모임에 치이게 되는 역설적인 현상이 벌어지게 되는 경우도 왕왕 생긴다. 누군가에겐 아름다운 일로 여겨지는 독서모임이 또 누군가에겐 시간 낭비, 돈 낭비, 에너지 낭비로 여겨지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을 통해 알고 싶었던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어떻게 그렇게 긴 시간 동안 같은 독서회를 지속할 수 있었는지, 즉 지속 노하우에 대해서였다. 나머지 하나는 독서회에 대한 저자의 태도였는데, 번역자와 사서라는, 책과 떨어질 수 없는 직업이라는 이유가 독서회를 지속하는데 얼마나 기여를 했는지 알고 싶었다. 그 직업이 아니더라도 저자는 과연 독서회를 지속할 수 있었을지 궁금했던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에 대한 답을 모두 얻을 수 있었다. 


지속 노하우에 대한 특별한 비법은 없었다. 누구든지 이 방법대로만 하면 30년 독서모임 지속할 수 있습니다,라는 노하우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환상일지 모른다. 독서모임 가족들이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는지, 그들의 독서모임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지, 그들 하나하나가 독서를 얼마나 일상 속에서 누리고 있는지, 독서모임에 나와서 다른 구성원들과 얼마나 적절한 거리를 두고 소통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책을 선정해서 함께 읽어나갈 것인지, 어려운 책이라도 함께 읽으면 완독은 물론 깊고 풍성한 이해로 인해 삶도 깊고 풍성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등등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느 독서모임이라도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진 않지만, 어떤 비법 같은 노하우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아서 나는 오히려 그게 더 현실적이고 또 정답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독서모임의 지속은 리더의 열정이 중요하긴 하지만 결코 그것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사람과의 만남은 성취하는 게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라고 믿는 내게 이 결론은 내가 몸담고 있는 독서모임에서도 역시 감사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나의 열정을 묻어나게 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길 수 있게 해 주었다. 


저자가 번역자와 사서라는 일을 평생 해 왔다는 사실이 독서회를 지속하는 비결이 되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늘 참석하는 독서모임 구성원들은 리더의 직업이나 성향, 이력 등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저자가 몸담고 있는 독서회도 저자 이외의 번역자가 두세 명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를 잘 말해준다. 그러나 딱 여기까지인 것 같다. 다른 구성원들은 저마다 다른 직업과 삶의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독서회의 지속은 직업적인 부분이 어느 정도 도움을 주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오히려 더 중요한 키는 책에 대한 사랑이 아닌가 싶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책을 읽으며 저마다 가진 풍성한 삶을 나누는 모임이 바로 독서모임이고, 그것이 가능하게 만드는 요체는 아무래도 책에 대한, 강요할 수 없는, 애정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에서 독서모임 구성원들이 가져야 할 적당한 거리에 대해서도 쓴다. 책을 나누다 보면 삶을 나누게 되어 있는데, 그 나눔이 잡담으로 이어지거나 책과 상관없는 곁길로 가는 경우를 주의해야 한다고도 쓴다. 책을 함께 읽고 만남을 계속 가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서로 가까워지지만, 독서모임 시간에는 회포를 푸는 게 아니라 책을 중점적으로 나눠야 한다고도 쓴다. 독서모임을 거의 십 년간 지속하고 있는 나는 이런 저자의 말들에 연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나에게 이 책은 여러 위로와 도움이 되었다. 한 번도 독서모임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보다는 적어도 책을 사랑하고 독서모임을 참석한 경험이 있거나 독서모임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 책은 더 크게 울려 퍼질 거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책을 읽지 않는 시대이기도 하거니와, 문화가 다른 일본에서의 이야기라 여기 한국이라는 맥락에서 얼마나 작동할지에 대해 우려도 되지만, 책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가치를 지니고, 그 가치를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므로, 나는 그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정은문고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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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 - 안나 도스토옙스카야의 회고록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옙스카야 지음, 최호정 옮김 / 엑스북스(xbooks)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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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도스토옙스키


안나 도스토옙스카야 저,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을 읽고


러시아의 대문호, 19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 광기어린 천재 등 도스토옙스키를 수식하는 문구들은 한결같이 최정상의 탁월함 혹은 비범함을 나타낸다. 명실상부 인류를 대표하는 작가 혹은 인류의 유산 리스트에 올려도 반대할 사람 없을 작가 도스토옙스키. 그를 작가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존경하고 숭배하고 사랑하고 보살폈던 단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도스토옙스키의 두 번째 아내 '안나 도스토옙스카야'이다. 


이 책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15년간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했던 나날들에 대한 안나의 기억들을 담고 있다. 기술적으론 안나의 회고록이지만 이 책에서 독자들은 안나만이 아닌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안나는 도스토옙스키를 이렇게 불렀다.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도스토옙스키는 성이니까)를 그 어느 작품에서보다 가깝고 친근하게 만날 수 있다. 안나가 일인칭 관찰자로 등장하여 도스토옙스키 바로 곁에서 그의 작품 밖 일상을 서술한 책이라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이 책에서 작가 도스토옙스키만이 아닌 인간 도스토옙스키를 대면할 수 있다. 이 고유한 특징만으로도 이 책은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하는 독자라면 읽어볼 가치가 충분할 것이다. 


'매핑 도스토옙스키', '도스토옙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등으로 이미 오래전에 석영중 선생님으로부터 친절한 소개와 안내를 받아서인지,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가득 채우며 안나가 묘사하는 도스토옙스키의 모습들은 내게 전혀 낯설지 않았다. 한국어로 번역된 도스토옙스키 전작을 거의 다 읽은 (일부러 몇 작품은 아껴두고 있는 중) 나의 눈에 비친 그 모습들은 저 위에서 홀로 빛나는 천재 작가의 이미지보다는 한 여자를 아끼고 헌신하고 사랑했던 남편, 아이들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겼던 아버지, 그리고 가능한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사려 깊고 친절했던 한 명의 어른으로 다가왔다. 안나의 눈과 마음을 통해 나는 작가 도스토옙스키가 아닌 인간 도스토옙스키, 즉 한 여자의 남편이자 , 네 자녀 (두 자녀는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의 아버지이자, 간질 (뇌전증)이라는 지병에 평생을 시달렸고, 폐질환이라는 질병에 생의 무릎을 꿇은, 유한한 육체를 가진 인간 도스토옙스키를 몇 주에 걸쳐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인상적이었던 점 세 가지만 추려볼까 한다. 이 세 가지는 내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이 책을 통해 다시 숙지하며 감동한 도스토옙스키,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도스토옙스키, 나아가 나의 보편적인 인간과 인생에 대한 관점을 모두 아우르는 사항들일 것이다. 


첫째, 도스토옙스키의 인품에 대해서다. 도스토옙스키 작품, 그중에서도 대표작이라 불리는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은 독자들에게 도스토옙스키가 어떤 사람일 것 같으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각 작품에서 받은 인상에 기반해서 심오하다거나 무겁다거나 어둡고 냉철하다거나 심지어 괴팍하다는 이미지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나 역시 절반은 그랬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안나의 눈에 비치고 마음에 담기고 입으로 고백된 도스토옙스키는 내가 생각한 나머지 절반, 그러니까 사려 깊고 선하고 고결하며 어린아이 같은 순박함을 머금은 어른이었다. 그리고 도스토옙스키 자체가 그의 작품에서 종종 등장하는 유로지비 (Holly Fool, 바보성자)의 이미지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도스토옙스키 인생의 전환점이 된 시베리아 유형 전후 그의 모습에 많은 변화가 찾아왔을 거라고 해석할 수 있겠지만, 어쨌거나 안나를 만난 이후 그의 모습은 정말 인간다웠던 것 같다. 아내를 대하는 모습에서나,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에서도 한결같이 그는 따스하고 자상했으며, 심지어 그를 모함하고 이용해 먹는 파렴치한 친지들에게조차 그는 선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가 늘 지니고 있었고 고통받았던 간질병 (뇌전증) 때문에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느라 그랬던 게 아니냐고 누군가는 따질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안나에게 비친 도스토옙스키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지병 때문에 그는 자신을 더 낮추었던 것 같고, 그것 때문에 더 인간의 한계를 직시할 수 있었던 것 같으며, 또 그것 때문에 육체와 같은 가시적인 물질이 아닌 마음이나 정신, 영혼 혹은 본성 같은 비가시적인 것들을 더욱 깨끗하고 세심한 눈으로 관찰하고 성찰하여 깊은 통찰을 이끌어냈던 것 같다. 자신의 약점으로 보일 수 있었던 것들이 그에게는 오히려 인간의 중심을 꿰뚫는 길의 역할을 해주었던 게 아닌가 싶다. 


둘째, 돈 문제에 대해서다. 도스토옙스키가 궁금해서 인터넷 등을 통해 조금이라도 공부를 해본 독자라면 그가 얼마나 경제적인 궁핍에서 평생을 살았는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내만큼 이 문제에 대한 사실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안나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 그랬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가 죽기 불과 몇 년 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빚을 청산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많은 빚을 진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할 것이다. 나 역시 절반은 잘못 알고 있었다. 나는 그가 도박벽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편집자를 잘못 만나 이용당했기 때문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빚은 친형의 죽음 이후 그 가족들 모두를 부양했기 때문이고, 첫 번째 아내가 죽고 남긴 의붓아들 파벨을 책임졌기 때문이며, 도스토옙스키가 따지지도 않고 잘 도와준다는 사실을 알고 그 선함을 되려 이용해 먹는 친지들이 요구하는 돈을 거절하지 못하고 할 수 있는 한 모두 충족시켜주려 했던 도스토옙스키의 태도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도스토옙스키의 선한 인품이 그와 그의 가족 (아내와 친자식들)을 평생 궁핍하게 만들었던 셈이다. 그나마 안나가 지혜로운 대처를 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도스토옙스키는 죽는 그날까지, 아니 죽은 이후에 자식에게까지 빚을 물려주지 않았을까 싶다. 모든 방면에서 안나가 도스토옙스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 주었지만, 적어도 돈 문제에서만큼은 안나가 그의 구원자였던 것 같다. 


셋째, 그의 작가 천성에 대해서다. 그의 작품만으로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지만, 가장 곁에서 지켜본 아내의 고백으로도 도스토옙스키는 타고난 작가였다. 그의 삶은 읽고, 쓰고, 산책하는 일상으로 이뤄졌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도스토옙스키는 규칙적이고 치열하게 다방면의 글, 이를테면 분야나 언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책이나 신문, 잡지 등을 읽었고, 늘 밤 11시경부터 새벽 3시경까지 치열하게 썼으며, 저녁 먹기 전과 후에 늘 장거리 산책을 즐겼다. 지병에 시달렸고 말년에 가서는 폐질환까지 겹쳐서 체력적인 한계를 느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산책하는 시간만큼은 사수했다. 그의 산책은 단순한 걷기를 넘어 작품 구상은 물론 새로운 것들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과 그것을 흡수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들과 통합하는 성찰,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종합하여 끌어내는 통찰을 지속하는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도스토옙스키의 모든 글은 책상 위에서 탄생한 게 아니라 산책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장된 표현은 아닐 것이다. 덕분에 내가 생각하는 작가의 삶을 시간과 공간이 상이한 곳에서 먼저 살아낸 도스토옙스키가 작가로서 더욱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안나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의 선한 인품과 그것으로 인해 생기는 돈 문제와 타고난 작가 천성 때문에 우리가 아는 도스토옙스키, 즉 그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5대 장편을 썼던 시절의 도스토옙스키는 역사에서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도스토옙스키를 향한 나의 존경이 가능했던 근거가 안나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나는 안나 도스토옙스카야에게 무한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도스토옙스키는 정말 아내를 잘 만난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도 모두 위에서 내가 지적한 세 가지 항목 때문이었을 것이다. 역사에서 사라질 수도 있었을 이유가 역사에서 지워지지 않는 존재로 만든 동일한 이유였다는 이 놀라운 사실. 이런 면에선 그의 존재만이 아니라 아내와의 만남도, 아내의 도움으로 가능했던 그의 후기 작품들도 모두 기적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다시 한번 안나 도스토옙스카야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한다.


* 도스토옙스키 처음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10.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17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rtmodel.tistory.com/1194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

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

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96

18.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429

19. 악몽 같은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435

20. 악어: https://rtmodel.tistory.com/1436

21. 인간 만세!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488

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

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

24. 백야: https://rtmodel.tistory.com/1659

25. 뽈준꼬프: https://rtmodel.tistory.com/1702

26. 정직한 도둑: https://rtmodel.tistory.com/1703

27.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https://rtmodel.tistory.com/1704

28. 꼬마 영웅: https://rtmodel.tistory.com/1706

29. 약한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707

30.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711

31. 농부 마레이: https://rtmodel.tistory.com/1717

32. 보보끄: https://rtmodel.tistory.com/1719

33. 백 살의 노파: https://rtmodel.tistory.com/1721

34. 우스운 사람의 꿈: https://rtmodel.tistory.com/1722

35. 온순한 여자: https://rtmodel.tistory.com/1723

36.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 https://rtmodel.tistory.com/1724

37. 영원한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823

38. 아홉 통의 편지로 된 소설: https://rtmodel.tistory.com/1825

39. 쁘로하르친 씨: https://rtmodel.tistory.com/1827

40. 도스토옙스키의 철도, 칼, 그림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867

41. 여주인: https://rtmodel.tistory.com/1917

42. 뻬쩨르부르그 연대기: https://rtmodel.tistory.com/1930

43.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 (by 안나 도스토옙스카야): https://rtmodel.tistory.com/1995


*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3.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39

4.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44

5.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761

6.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776

7.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1807

8.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819

9.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1849

10.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1882

11.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1921

12.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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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뒷모습 안규철의 내 이야기로 그린 그림 2
안규철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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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의 순간들이 글이 될 때


안규철 저, '사물의 뒷모습'을 읽고


'뒷모습'이라는 단어에 끌렸다. 미리 보기로 '책머리에'를 읽었다.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이라는 제목이었다. 읽고 나서 생각했다. 아, 이런 단락으로 책을 열다니. 수집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어 아래에 옮긴다.


|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 사이의 대화가 끊기고 낯선 정적이 흐르는 순간을 독일어나 불어에서는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이라고 부른다. 이 표현을 빌리면 이 책의 글들은 내 안에서 천사가 지나간 시간들의 기록이다. | (4페이지 첫 단락 발췌)


이어지는 단락에서 나는 그가 미술을 전공한 예술가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이 책은 꼭 읽어봐야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었다. 작업실에서 혼자 침묵 가운데 보내는 시간, 그러다가 어느 순간 단순한 침묵이 아닌 정적의 시간이 찾아올 때 그는 모든 사물들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고 적는다. 그 시간이 곧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이고, 그는 그 시간 속에서 세밀한 예술가의 눈으로 모든 것을 관찰하고 성찰하여 그만의 고유한 통찰을 내놓았다. 어떤 분야 전문가의 눈으로 나와 타자와 세상을 바라보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통찰을 이끌어내는 글을 나는 사랑한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었다. 


동일한 사물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재해석되며 때론 새로운 의미까지 부여받게 된다. 미처 몰랐던 그 사물의 존재 의미를 고요하고 다정한 시선으로 조용히 드러내는 것. 나는 이것이 작가가 해야 할 사명이라 느낀다. 이 책의 저자는 미술을 전공했지만 이런 면에선 명백한 작가였다. 이렇게 다른 관점에서 우러나온 통찰을 발견한 이상 어찌 읽지 않고 지나칠 수 있으랴.


한 꼭지를 이루는 분량이 A4 한 페이지 채 되지 않는 짧은 단상들의 모음이지만, 나는 여백이 풍부한 이 책을 일부러 천천히 일주일에 걸쳐 읽었다. 짧은 글은 보통 농밀하고 내밀한 경우가 많고 나는 그 농축된 진액을 음미하길 좋아한다. 그러려면 물리적인 시간과 심리적인 여유가 필수인데 그 준비가 되어 있다면 비로소 저자와 말 없는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물의 뒷모습이라는 표현은 그 사물에 대한 고유한 재해석을 의미할 것이다. 기존의 알고 있던 사물의 해석이 아닌 낯설고도 새로운, 그리고 살아온 인생의 굴곡과 흘러간 시간을 관조하며 거치게 되는 재해석은 그 사물의 뒷모습으로 침투하여 본질을 꿰뚫는 힘이 있다. 그 시선에 따른 재해석을 통찰로 우려내어 글로 담아내는 것.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행위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나도 나만의 고유한 통찰을 글로 담아 보편성을 깊숙이 터치하는 에세이를 쓰고 싶다. 


#현대문학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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