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 수업 - 새로운 시대를 위한, 양희송의 기독교 세계관 이야기
양희송 지음 / 복있는사람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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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지만 겸손한 내러티브들의 향연.


양희송 저, '세계관 수업'을 읽고.


자신의 세계관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살아오면서 심각한 모순이나 갈등에 부딪혔던 경험이 있다는 증거다. 세계관은 의식세계 이면에 존재하기에, 무엇이든 당연하게 여겨왔던 일차원적인 세상에선 그 존재를 자각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서 우린 숙명처럼 낯설고 불편한 세상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 동안 별 문제 없었던 ‘나’만의 작은 세상에서 드디어 ‘너’와 ‘우리’, '그들'로 이루어진 큰 세상을 만나게 되고, 그 안에 존재하는 위계질서 속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뉜 채, 섞이지 않는 혼합물처럼 어쨌거나 다수와 함께 살아간다. 수평적일 뿐 아니라 수직적이기도 한 이 '다양성'이라는 무시 못할 변수를 처음 만나게 되는 순간, 우린 비로소 ‘세계관’이란 실체를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살면서 이러한 불가피한 충돌은 때론 한 사람의 인생을 전환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에겐 지금까지의 모든 기준이 무너져 내리는, 길고 어두운 터널과도 같은 시기가 되고, 또 누군가에겐 아주 오래된 숙제가 마침내 풀리는 해방과 자유의 순간이 되기도 한다. '자아인식'이 '나'가 아닌 타자를 만날 때에야 비로소 진행되는 것처럼, 세계관의 자각은 두 세계관의 충돌로 말미암아 시작되며, 그 충돌은 누군가에겐 두 번째 인생의 시작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시작의 사활은 새로운 세계를 과감히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와 더불어 옛 세계를 기꺼이 파괴할 수 있는 용기에 달려있을지도 모른다. 새가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오듯,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하며, 저자도 간파했듯, 낯선 세계와의 조우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머리가 아닌 가슴, 즉 지식이 아니라 용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길을 알려주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은행의 위치를 기준으로 알려줄 수도 있고, 커피숍이나 편의점, 관공서, 아니면 특별히 크거나 화려하여 주변 건물들과 비교했을 때 눈에 잘 띄는 건물 위주로 길을 알려줄 수도 있다. 똑같은 길이라도 알려주는 사람 머리 속에 존재하는 지도 위에 어떤 건물이 표기되어 있는지에 따라 길은 다르게 알려질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눈을 감고 어떤 길 위에 놓인 건물을 떠올려보자. 그리고 그 주위의 건물도 함께 떠올려보자. 모든 건물이 아닌 어떤 특정한 건물 몇 개만이 주로 기억이 날 것이다. 매일 지나다니는 길이었음에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보이는 건물을 발견할 때를 우린 종종 경험하지 않는가). 이러한 차이는 곧 세계관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동일한 세상을 바라보아도, 우린 모두 다른 눈으로 그것들을 인식하고 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세계관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는지에 따라 세상과 '나', '나'와 '너'의 관계가 형성되며, 나아가 '나'의 정체성 또한 확립되기 때문이다. 


우린 누구나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간다. 지금 21세기는 근대라는 시기를 지나 메타내러티브 (거대담론)가 해체되고 작은 내러티브들이 이곳 저곳에서 터져 나와 다양성을 이루고 있는 포스트모던 (탈근대 혹은 후기 근대) 시대다. 나는 세계관의 의미가 적어도 기독교인에게는 남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가 그저 많은 신 중 하나를 택하여 섬기며 나름대로의 구원을 찾는 여러 종교 중 하나에 불과하다면, 그리고 성경에 기반한 기독교의 가르침이 그저 인간의 생활수칙이나 윤리규범 정도에 그친다면, 기독교의 유일성은, 이미 유럽을 비롯하여 전 세계적으로 천천히 확산되고 있듯, 결국엔 퇴색되고 말 것이다. 개인적으로 기독교의 의미는 그것보단 더 크고 더 깊은 그 무엇이어야 한다고 보는데, 난 그것을 가장 잘 설명하는 개념이 바로 세계관이라고 생각한다. 


때마침 '세속성자'의 저자이자 '청어람'의 대표, 양희송의 신간, '세계관 수업'을 만났다. 이 책에는 약 20년 간 쌓여온,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저자의 연구가 차곡히 담겨있다. 자칫 어려울 수 있는 세계관이라는 주제를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기본적인 개념에서부터 국내외 최근 연구결과까지 반영하여 정리한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 한 권을 통하여 우린 저자의 인생이 담긴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깊은 우물에서 길어낸 통찰의 물을 마실 수 있다. 특히 나처럼 성공지향적인 가치관 (혹은 세계관)으로부터 하나님나라 중심의 가치관으로의 변화를 경험하며 두 번째 삶을 시작한 사람에게는 더없이 좋은 위로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세계관의 개념과 이론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주는 1부 '세계관', 세계관이라는 각도에서 성경 본문의 내러티브를 해석해보는 2부 '성경', 세상살이에 상응하는 기독교 신앙의 재조정과 방향을 제안하는 3부 '현대'로 구성된 이 책은 순서에서부터 저자의 의도 (혹은 바람)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 책은 단지 기독교 세계관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개론서나 성경 읽는 또 하나의 방법을 제안하는 방법서에 그치지 않는다. 대신, 현재 우리가 맞이한 포스트모던 시대에 있어서 기독교 세계관이 어떤 방식으로 인식되고 전개되어야 하는지, 실제 현장에서 치열하게 고민한 저자의 살아있는 호흡과 정성이 묻어있는 책이다. 어떤 철학적인 개념이나 방법을 넘어, 기독교 세계관은 실제 살아있어 기독교인과 함께 숨쉬며 일상을 하나님나라로 살아내는 기독교인의 눈이 되어주는 것이다.


1부에서 저자는 세계관의 개념과 이론을 간단하게 설명한 뒤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다양한 세계관을 낳는 "삶의 다양성을 대면하면서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원초적인 태도는 겸손함"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기독교 세계관은 이런 의미에서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자기 확신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겸손과 경청의 자세로 드러나는 관점이라고 덧붙인다. 이는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며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때 마땅히 갖춰야 할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자세를 가르쳐주는 듯하다. 기독교의 '원죄' 개념을 '자기애' 또는 '교만'으로 해석하고 그에 따른 '겸손'이 기독교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한다면, 기독교 세계관은 결코 진리를 수호하고 퍼뜨린다는 이유로 폭력을 휘두르는 '교만'이 아닌,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사랑하고 섬기는 '겸손'의 관점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의 최전선은 다름 아닌 우리가 맞닥뜨린 삶의 현장, 일상이라고 난 생각한다. 기독교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삶은 '작지만 겸손한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내러티브적 접근' 방법을 통하여 기독교 세계관을 논한다. 이야기 형태로 세계관이 유지, 공유, 확산된다고 보는 '내러티브적 접근'은 네 가지 간단한 질문 -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 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야기를 통해 해나감으로써 기독교 세계관을 정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제 예로 이 책의 2부는, 구약에선 창세기 1장 창조 이야기, 신약에선 사복음서에 나오는 예수 이야기를 톰 라이트를 비롯한 여러 신학자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읽고 해석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는 신화냐 아니냐를 떠나 창세기가 쓰여졌던 그 당시 고대 근동 지방에 팽배했던 세계관과의 충돌로 (특히 신과 인간,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 해석할 수 있으며, 역사적 예수의 행적 또한 유대-팔레스타인의 지배적 세계관과의 투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저자는 우리의 삶 또한 내러티브의 장 위에서 구성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우리 자신이 속한 이야기를 제대로 갖지 못한다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경고한다. 또한 우린 삶의 내러티브를 어디서 구할지 묻는 것이 가장 절실한 시대적 질문이며, 이런 점에서 교회의 비극은 성경 내러티브가 활성화되지 못하고 죽은 말씀으로 여겨지고 있을 때라고 말한다. 오늘날 성경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기독교가 개독교로 인식되고 있는 이유도 어쩌면 교회가 성경의 내러티브를 충실히 수용하지 못하고 획일적인 성경 읽기와 가르침으로써 기독교인을 대량생산하듯 양산해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저자는 '성육신적 성경 읽기'를 제안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를 통하여 육신이 되었듯, 우리가 자신의 몸에 성경의 이야기를 새겨 넣고, 그것을 현장에서 살아내고자 고투하는 가운데 자기 몸에 체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저자가 간파한대로, 성경의 말씀이 살아서 성도들의 삶에 실제로 적용되는 것을 보기 전까지 결코 사람들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기에, 우리 삶의 내러티브를 일차적으로 성경에서 구하고, 각자의 독창성과 고유성을 간직한 채 각자의 내러티브의 창의적 재현과 변형과 복귀로 표현되어지는 삶을 지향할 때 기독교 세계관은 비로소 그 본질에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에게 요구되는 신앙생활이란 어떤 것일까? 기독교 세계관은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어떤 방식으로 접합 가능할까? 3부에서는 이러한 부분에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과의 대비를 통하여 장단점을 살펴보며 기독교 세계관의 위치와 방향을 논한다. 저자는 개성이 강조되는 작은 내러티브들이 들려지는 이 시대에 필요한 기독교 세계관 논의는 새로운 문법과 언어로 예수의 이야기를 써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옛 관점과 해석에 갇히지 말고 성경을 다시 읽고 예수를 다시 이해하려고 할 때,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면모가 부각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 부분에 있어서 나는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신론과 유신론 같은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넘어, 보다 근원적인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만약 그 관점이 전형적인 모더니즘의 결과물처럼 그저 가장 강력한 거대담론으로 자리매김하여 사람들에게 강제성을 부여하는 역할만을 한다면, 기독교 세계관의 본질은 오히려 흐려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독교인들이 일상에서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며 만들어내는, 작지만 겸손한 내러티브들이 이곳 저곳에서 꽃필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이 바로 포스트모던 시대에 필요한 기독교 세계관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교회에서도 성경과 교리를 가르치면서 단지 착하게 살라거나 서로 사랑하라는,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표층적인 메시지 ('메시지'라 쓰고 '메아리'라고 읽는다)에 머물지 않고, 한 사람의 세계관을 재건할 수 있는 심층적인 메시지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하여 이루어진 기독교 세계관으로의 전환이야말로 어쩌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born again (거듭남)’이 아닐까.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732?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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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근동의 눈으로 읽는 성경 (구약편) - 낮은 자의 하나님을 만나는 중근동의 눈으로 읽는 성경
김동문 지음, 신현욱 그림 / 선율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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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섦'을 환대하며 하나님 알아가기. 


김동문 저, '중근동의 눈으로 읽는 성경 - 구약편'을 읽고.


성경은 모든 답을 알려주는 마법 책이 아닐 뿐더러, 인간의 성공과 번영을 위한 참고서도, 또 자기계발서도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려주고, 하나님과 인간과 세상 사이에 생긴 관계의 단절, 그 단절로 인한 결과, 그리고 그 불가항력적인 결과로부터의 해방과 구원, 회복의 메시지가 담긴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목적은, 김근주 교수의 '나를 넘어서는 성경 읽기'에서도 강조되듯,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 성경을 읽는다'가 참이라면, '성경을 읽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도 참이다. 이런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의 안위와 유익만을 위해 보험이나 부적 같은 용도로 신앙생활을 하는 기독교인 (무늬만)도 이 세상엔 적지 않지만, 만약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다면 (은혜 아닌가!), 다음과 같은 질문이 하나 생기게 된다. '어떡해야 성경을 바르게 읽을 수 있는가?' 


성경 읽는 방법에 대한 책과 강연은 이미 넘치도록 많다. 그러나 여기, '성경을 낯설게 읽어보기'를 권하는 특이한 책이 있다. 책의 부제라고 할 수 있는 '낮은 자의 하나님을 만나는'이라는 표현만으로도 이 책은 벌써 내 주의를 충분히 끌었지만, 책을 열어 프롤로그에 쓰인 '낯설게 만나는 성경'이라는 제목을 읽었을 땐, 이미 내 마음은 이 책에 대한 기대로 충만해졌다. 어제 밤, 아니 오늘 새벽, 커피를 마시지 않아도 될 만큼 또렷한 정신으로 난 이 책을 단숨에 읽어버렸다. 그림과 글이 절묘하게 어울려, 저자가 드러내고자 하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었고, 읽는 이에게 지루함을 줄 틈도 제공하지 않을 정도로 군더더기가 전혀 없었으며, 가능한 천천히 읽으려 해도 자꾸만 책장이 넘어갈 수밖에 없을 만큼 강한 흡입력을 가진 책이었다. 높은 곳에 서서 함부로 결론을 지은 뒤 낮은 곳에 위치한 독자에게 교훈이나 지침을 던져주려 하지 않았으며, 함께 생각하고 고민해 볼 수 있도록 독자의 자리로 내려와 독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자연스럽게 요구하는 책이었다. 책의 부제에 포함된 '낮은 자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이미 저자가 책을 구성한 의도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저자와 독자가 함께 읽는 책. 아마 이 책을 손에 든 독자는 누구라도 나와 비슷한 느낌을 가지리라 생각한다.


이 책은 오랜 기간 중동 선교사로서 그들의 낮은 자리의 삶을 직접 함께 하며 살아낸 저자의 일상의 호흡이 배여 있는 책이다. 낯설게 성경을 읽어보자는 그의 바람은 성경이 주어졌던 '그때 그곳'의 관점에서 성경을 바라보자는 의미를 내포한다. 성경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지만, 동시에 성경은 '그때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에 의해 쓰여졌던 책이기에, 현재 우리가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관점은 성경이 처음 주어졌던 독자들이 이해했던 관점과 똑같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하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오류가 없을 거라는 논리의 비약으로 이루어진 오류로부터도 벗어나야 하며, 한낱 개인의 위로나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용도로 성경을 읽는 사적인 복음의 관점으로부터도 벗어나야만 한다. '그때 그곳'의 관점에 대한 이해는 시간과 공간과 문화가 다른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낯설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런 낯섦을 거부하지 않고 환대할 때, 우리의 성경 이해는 더욱 풍성해질 수 있으며, 그 결과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인 김동문 선교사의 겸손한 도움으로 이러한 여정에 뒤늦게나마 발을 내디딜 수 있어 난 참 다행이다. 선교사님께 고마움을 전한다.


이 만화책을 이루고 있는 총 18개 짧은 꼭지의 공통분모는 '낮은 자의 하나님'이다. 이 책을 통하여 우리는 '낮은 자의 하나님'을 이해해 보며 '낯설게 성경을 읽는'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알아갈 수 있다. 교회에서 익숙하게 수없이 많이 들어왔던 성경 본문만이 아니라 그다지 설교 본문으로 많이 사용되지 않은 부분까지 고루 담겨 있는데, 때로는 허를 찔린듯한 기분으로, 때로는 뒤통수를 맞은듯한 기분으로 난 감탄과 함께 각 꼭지를 읽어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인간은 고대 근동 신화에서 소개되는 것처럼 신을 대신하여 일하도록 지음 받은 노예 같은 존재가 아닌, 하나님 형상대로 지어져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임무를 부여 받은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도록 지음 받았다는 사실. 난 이 사실 덕분에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묵상할 수 있었고, 기독교의 구별됨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었다. 또한 아브라함과 소돔/고모라의 나그네를 대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 (환대 vs. 천대)을 대비하는 부분에서 난 저자의 말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배제와 혐오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방법이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신앙의 완전체 이미지로 알려진 이삭 이면에 있는 아픔과, 그로 인한 하나님의 아픔도 아브라함 입장이나 설교자 입장이 아닌 이삭과 하나님의 입장에서 신선하게 (낯설게)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며, 출애굽 이후 40년 광야생활에서 새로운 거룩함을 알려주신 하나님의 방법이었던 성막의 실체 (민낯)와 그 안에서 마치 3D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처럼 낮은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섬겼던 제사장의 고군분투했던 삶도 저자가 제공하는 그때 그곳의 현실적인 해설 덕분에 사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이외에도 짧지만 많은 이야기들이 재치 있는 (때론 폭소를 유발할지도 모른다) 그림과 함께 책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나면 아마도 책을 책장에 꽂아놓지 않고 나처럼 책상 위에 둘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또 읽고 싶어서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말한다. 독자들이 "무엇보다 하나님은 힘 있고 권세 있고 풍족한 이들보다 나그네, 이방인, 여성, 노동자, 마이너리티, 상처 받은 사람, 연약한 사람, 소외된 사람 등 낮은 자에게 온 관심이 있으셨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으면 이 책의 소임을 다한 것"이라고 말이다. 저자의 바람은 적어도 나에겐 성취되었음을 밝힌다. 이러한 낯설게 읽는 성경 읽기 방법이 이 책을 통해 시작되어, 몰랐거나 희미하게 알았던 하나님을 밝고 선명하게 알아가는 또 다른 시작이 되었음을 믿는다. 신약편이 기다려진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731?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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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자 1 - 20세기의 봄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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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역사에서 다시 인간을 보다.


조선희 저, '세 여자'를 읽고.


조선희 작가의 ‘세 여자’는 팩션 (faction)이다. 역사적 사실 (fact)이 작가의 상상력이란 옷을 입고 탄생한 소설 (fiction)이기 때문이다. 책 끝머리에서 작가는 “역사기록에 반하는 상상력은 자제했고, 소설이 역사를 배반하지 않도록 주의했다”고 썼다. 책에 이름 석 자로 등장한 사람들은 모두 실존인물이다. 정확하게 표기된 날짜들은 모두 실제 역사기록이다. 역사도 해석의 산물이기에, 더군다나 불완전하며 불연속적인 기록의 파편들로 짜깁기될 수밖에 없는 시대를 다루고 있는 책이기에, 작가가 이 책을 쓰는 입장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책을 완성하기까지 실로 방대한 연구와 고증 절차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작가가 이 책을 출판하기까지 걸린 12년이란 세월은 웅숭깊은 그녀의 정성이 그대로 담겨있는 듯하다. 작가는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의 눈이 되어 1920년부터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생생한 한국 역사의 현장을 바라보며 이 책을 썼지만, 12년이란 긴 시간은 이 책을 네 여자의 이야기로 만들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여진 이 책의 숨은 화자는 네 번째 여자, 조선희 작가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난 비교적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우리나라 20세기 전중반의 암울한 역사와 다분히 가려졌던 시대정황을 작가의 눈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났던 그 숱한 일들이 살아나 한 편의 흑백영화가 되어 그 필름이 아직도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세 여자를 모두 소환하여 마치 나도 그 현장에 있던 것처럼,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느끼고 아픔과 한을 공감할 수 있게 만든 건 분명 작가의 역량일 것이다. 


700 페이지가 넘는 장편소설인 이 책은 오래된 흑백사진 한 장에서 시작한다. 주세죽과 박헌영의 딸인 비비안나 박이 한국을 방문할 때 들고왔던 여러 사진 중 하나다. 사진 속엔 세 여자가 단발을 한 채 청계천에 발을 담그고 있다. 1920년대 한국은 근대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봉건적 잔재가 압도적인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정황을 감안할 때, 그 사진이 지닌 혁명성은 그들의 운명을 벌써부터 예견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 세 여자는 모두 시대가 만든 혁명가였다. 주목할 점은, 그들이 남자가 아닌 여자였고, 자본주의가 아닌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사회의 마이너리티에 속했던 여자와 공산주의자라는 조건을 지닌 혁명가의 눈으로 이 책은 한국의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까지의 역사, 그리고 그 이면까지도 함께 바라보게 해준다. 학창시절 국사 시간에 배운 역사와는 많이 다를 수도 있다. 정치, 경제, 사회적 강자였던 남자이자 미국 제국주의 영향을 짙게 받은 자본주의자의 입장에서 서술되었던 역사와는 질적으로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는 왜곡됐던 사실을 바로 아는 기회가 될 수도 있고, 사실인 줄 알았으나 치우친 해석에 불과했던 역사적 진실을 비로소 마주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학창시절 국사 시간을 가장 싫어했던 나는 부끄럽게도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무지했고 관심도 없었다. 역사에 관심도 없고 공부도 하지 않는 자의 머리 속에는 형편없는 지식이 들어있을 수밖에 없다. 정리되어있지 않을 뿐 아니라 아예 정리 자체가 불가능하다. 믿고 싶은대로 믿었던 주관적 지식의 파편들과 이곳저곳에서 주워들은 (대부분 승자와 강자의 해석일 것이다) 이야기 조각들, 그리고 사지선다의 정답으로 채택되었던 교과서적 지식으로 난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마흔이 넘은 내 머리 속에 들어있던 한국 20세기 전중반에 대한 역사지식은 거의 전무했다. 3.1 운동, 유관순 누나, 윤봉길 의사, 안중근 의사,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 제 2차 세계대전, 미국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뜨린 원폭으로 인한 일본의 무조건 항복, 해방, 8.15 광복, 그리고 김일성과 이승만, 한국전쟁, 맥아더 장군, 3.8선, 휴전, 미국과 소련을 양극으로 하는 냉전체제의 시작 등의 단편적인 지식들이 헝클어져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 당시 여자들이 혁명가로서 역할을 했다는 사실과 자본주의가 아닌 공산주의가 그 시대에 항일운동을 비롯한 혁명을 이끌었다는 사실은 내겐 일종의 충격이었다. 1980년대, 새우깡 한 봉지가 100원 하던 시절, 포장지 끄트머리에 적혀있던 ‘멸공, 통일’이란 글자를 무심히 보면서 과자를 뜯어먹던 나에게 공산주의는 적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바로 알게 된 사실 한 가지는, 80년대 당시의 공산주의는 이미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한참을 벗어나 김일성이 내건 주체사상에 입각한 개인숭배를 전제로 한 해괴한 파시즘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848년의 팸플릿에서 시작된 19세기의 이론은 20세기에 세계적 규모의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전개됐지만 세기가 바뀌기 전에 종료되었다. 한반도 북쪽의 소비에트 실험은 일찍이 공산주의 트랙에서 튕겨나와 해괴한 파시즘으로 가버렸다.” 또한 ‘작가의 말’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설은 세 여자와 그들 남자들의 인생과 함께 1920년대에서 1950년대에 걸쳐 한국 공산주의운동의 탄생부터 소멸까지를 다뤘다. 나는 1955년 주체사상이 나오고 1956년 연안파가 숙청되는 것으로 한국의 공산주의는 종료됐다고 보았다.” 즉, 70년대 중반에 태어나 80년대에 새우깡을 먹기 시작했던 내가 알았던 공산주의는 엄밀한 의미에서 공산주의가 아닌 셈이었다. 이 책에서 세 여자가 공산주의자였다는 것은 김일성의 주체사상이 나오기 이전, 그러니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 해방의 피묻은 뿌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김구가 아닌 여운형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고, 주세죽과 김단야가 사후 수십년이 지난 뒤 소련과 한국에서 복권되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로 이름을 올렸으며 건국훈장을 받았던 이유일 것이다.


작가의 필력에 연신 감탄하며 책을 읽었다 (사실 이 감상문이 오점이 되지 않을까 내심 걱정도 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 읽어주고 싶은 부분도 참 많다. 그러나 에필로그에서 한 부분만 발췌해 본다. 책에 흐르는 사상과 감정을 관통하여 간략히 정리도 해주는 글이다. “그들은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착취하면 안 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하면 안 된다고 믿었다. 농부는 자기 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아프면 돈이 있건 없건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사람이 평등해야 존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이들은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흥망성쇠를 자신의 생애로 겪어냈고 과학이라 믿었던 역사법칙의 오작동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들은 온전히 시대의 자식들이었다. 폭격 맞은 나라에서 파편처럼 주변으로 튕겨나간 사람들, 그것은 절박하고도 다급한 디아스포라였으며 슬프고도 고난에 찬 글로벌 라이프였다. 그들 대부분은 무덤조차 남기지 못했다. 그들 부류의 삶 전체가 하나의 실수로 취급되었고 뒷날의 사람들은 그 얼룩을 지우고 싶어 했다.”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났었더라면 나는 어땠을까 자문해본다. 난 혁명가였을까. 머리는 냉철하나 몸은 비겁하여 눈치보기에 급급한 중도주의자였을까. 아니면, 냉철한 머리를 스스로 세뇌시켜 비겁한 몸을 위해 사용한 우파였을까. 


그리고 21세기 현재는 과연 달라졌는가 묻는다. 피를 토하며 목숨을 앗아가 내일도 기약할 수 없는 전쟁이라는 참극이 사라졌을 뿐, 여전히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들에서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른다. 여전히 좌우의 논리를 가진 싸움은 지속된다. 어쩌면 최창익이 허정숙에게 말했던 마지막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다음과 같다. “이상적인 제도를 감당하기에 우리 인간이 너무 이기적인 존재인지도.” 그렇다. 이기적인 인간의 속성.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기독교의 원죄로 해석되기도 했던 자기애, 교만과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결코 변하지 않는 인간의 속성. 비록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실패로 돌아갔고, 자본주의가 세상을 장악했지만, 인간의 이기적인 속성은 그대로 머물러 있다. 혁명과 이념은 지나가지만, 인간의 이기심은 남는 것이다.


혐오와 배제가 사라진 세상을 꿈꾼다. 서로 칼끝을 겨누는 좌우의 대립이 아닌, 약육강식과 승자독식 체제가 아닌, 정의롭고 공의로운 세상을 꿈꾼다. 마르크스주의도 해결하지 못했고, 자본주의도 해결하지 못하는 있는 ‘인간’의 문제가 이기심이고, 우리들은 모두 그 이기심이라는 병에 걸린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나’를 넘어서서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사랑을 나누는 행위는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분명 해독제가 될 것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754?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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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2 (반양장) - 사랑과 진정한 자립에 대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2
기시미 이치로.고가 후미타케 지음, 전경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1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어른이 된다는 것.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게 저, '미움 받을 용기 2'를 읽고.


이 책의 전작, '미움 받을 용기'에서 청년은 철학자를 통해 아들러의 가르침을 전해 듣고 깨달음을 얻은 뒤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었다. 더 이상 과거의 덫에 얽매이지 않고 미움 받을 용기와 행복해질 용기를 낼 수 있었고, '지금, 여기'를 살아내기 위한 새로운 결단도 내렸다. 그것의 일환으로 청년은 자신의 열등감이 얽혀있던 직업을 그만두고, 아직 인생의 때가 묻지 않은 아이들에게 아들러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학교 선생이 되었다. 그러나 깨달음만으로는 부족했던 탓일까? 의욕이 넘쳤던 청년은 아이들 교육 분야에서만큼은 아들러의 가르침이 엉터리이고 속임수이며, 심지어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위험한 사상이라고 단정짓게 된다. 아들러의 사상은 이해 가능하고 가치관 개혁에 도움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현실 사회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탁상공론에 불과하다고 여기게 된다. 아들러의 가르침에 무릎을 꿇고 그것의 전도사가 되기로 작정하고 실제 행동으로도 옮겼건만, 청년이 끝내 마주하게 된 것은 아들러를 버려야만 한다는 결론이었다.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청년은 다시 철학자를 찾아왔다. 이것이 예정에도 없었던 이 책 '미움 받을 용기 2'가 쓰여진 이유와 배경이다.


철학자와 청년은 3년 전에 함께 했던 행복했던 일을 모두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재회는 뜻밖의 감정으로 시작되었다. 철학자는 청년의 분노가 섞인 아들러 사상에 대한 불만과 불평, 그리고 현장 경험이 가득 담긴 청년의 이유 있는 반론으로 재회를 시작해야만 했다.


철학자는 청년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아들러의 가르침이 실천 능력이 전무한 이론에 불과한 사상이 아니라, 청년이 아들러를 오해하고 있다고 말이다. 이어서 뜬금없이 '사랑'을 알아야 하며 실제 삶에서 '사랑을 해야만' 아들러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인생 최대의 선택'이며, 청년은 그 선택을 할 만큼의 용기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된 결론에 도달했다고 분석한다. 청년은 어이가 없었지만 따지고 싶었고 답을 알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다시 긴 밤이 시작되었다.


아들러의 가르침에 따르면 칭찬과 야단은 수직관계의 인간관계를 형성할 뿐 아니라 상대방을 구속시키는 효과를 내기 때문에 일시적인 효과는 낼 수 있을지언정, 길게 보았을 땐 오히려 교육 방법으로는 부적절하다. 아들러 사상의 핵심은 수평적 인간관계와 공동체 감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3년의 실무 경험을 가졌던 청년은 칭찬과 야단이 교육 현장에서 필수였음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론과 실제가 다름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울분을 토하며, 바보 같은 이론을 실행에 옮기다가 선생으로서 권위까지 잃게 되었다고 토로한다. 과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교육의 목표는 위에서 아래로의 지식이나 경험 전달이 아니라, '자립'이라고 철학자는 분명히 말한다. 교육이란 '개입'이 아니라 자립을 위한 '지원'이라고 덧붙인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교육의 핵심은 '인간이해'에 달려 있으며, 이를 통해 교육이 자립이라는 목표를 내세울 때, 그 입구는 '존경'에 있다고 역설한다. 청년이 그 동안 알고 있던 존경의 개념과는 달랐다. 청년은 '동경'을 존경으로 알고 있었던 반면, 철학자는 그 동경은 공포이고 종속이며 맹신이라고 반박한다. 철학자의 존경에 대한 정의는 에리히 프롬이 내렸던 것과 같았다. "존경이란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사람이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아는 능력이다. 존경이란 그 사람이 그 사람답게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게 배려하는 것이다." 존경은 사랑과 함께 어떤 권력자도 강요할 수 없는 것이라고 덧붙이며, 철학자는 말한다. "존경부터 시작하라. 교육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의 토대는 존경에서 비롯된다"고 말이다. 이는 곧 청년은 그 동안 학생을 가르치고 도와준다는 신념 아래, 선생과 학생 관계를 수직관계로 설정하고 그들을 지배하려고 했을 뿐, 학생과 수평관계를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첫 단추부터가 잘못 꿰매어졌다는 말이었다. 또한, 학생과의 관계에서 존경과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리 칭찬과 야단을 금한다고 해도 아무런 효과가 나지 않았던 것이라는 냉철한 분석이었다. 뼈아픈 지적이었다. 그러나 청년은 여전히 아들러 사상은 이론에 불과하며, 현실과 무관한 이상주의적 사상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이 부분에서 철학자는 아들러 심리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문제행동 배후에 작용하는 심리를 5단계로 나누어 생각한다고 알려준다. 1단계 '칭찬 요구'부터, 2단계 '주목 끌기', 3단계 '권력투쟁', 4단계 '복수', 그리고 5단계 '무능의 증명'까지,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의 행동을 분석한 아들러의 통찰인데, 단계가 올라갈수록 더 큰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고 한다. 인간은 먼저 자신이 속한 인간관계에서 (특히 선생과 학생 관계처럼 수직적으로 인식된 인간관계에서) 칭찬을 바라고, 이어서 주목 받기 위해 애를 쓴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권력투쟁을 일으키고 복수에 나선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신의 무능함을 과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청년은 3년간 경험해온 학생들의 행동을 마치 철학자가 꿰뚫고 있는 듯했다. 철학자는 이어서 말했다. 이런 문제행동을 유발할 수 있는 심리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백신 역할을 바로 아들러의 '공동체 감각'이 해준다고 말이다. 청년은 의아했다. 이미 알고 이해하고 있다고 여겼던 개념이기 때문이었다.


칭찬 받는 것이 목적인 사람들이 모이면 그 공동체에는 경쟁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경쟁이 일어나는 곳은 권모술수와 불의가 따르게 되어 있다. 이것이 세상이 돌아가는 경쟁원리에 입각한 인간관계이다. 그러나 상벌도 경쟁도 없는, 경쟁원리가 아닌 협력원리에 입각한 공동체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들러 심리학이 주장하는 수평관계를 관통하는 것도 바로 이 협력원리인데, 이러한 원리로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가 곧 아들러가 바라는 세상인 것이다. 아들러에 따르면 이런 공동체를 살아내기 위해선 개인 안에 내재된 공동체 감각을 발굴하여 감각으로 공유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개인은 과거의 덫에서 해방되어 '지금, 여기'를 살아낼 수 있는 용기 (미움 받을 용기, 행복해질 용기, 평범해질 용기와 같은 맥락)를 내야만 하고, 자기중심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타인의 눈으로 보고 타인의 귀로 듣고 타인의 마음으로 느끼는, 다시 말해 타인을 공감하는 기술을 통해 타인을 존경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고 존중해주는 것이 존경이며, 자기중심성에서 탈피하는 것이 진정한 자립임을 기억할 때, 사랑은 곧 진정한 자립이라고도 역설한다. 그리고 이것이 곧 인간이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말을 마무리 짓는다.


동쪽 하늘이 밝아지기 시작했을 무렵, 청년은 자신의 3년을 돌아보며 첫 단추부터 잘못 꿰매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교육자로서의 역할은 무언가를 전달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바로 '관계'였다. 신뢰와 존경, 배려, 사랑의 원리로 작용하는 수평적 인간관계였던 것이다. 아들러가 잘못된 게 아니었다. 청년이 아직 인생 최대의 선택을 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었다. 열등감에서 해방된 것 같았지만, 여전히 학생들을 구원함으로써 자신을 구하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하는, 일종의 메시아 콤플렉스에 빠져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인정해야만 했다. 교육의 목표가 자립임을 직시할 때, 선생인 자신이 먼저 자립이 되어 있지 않았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모든 것은 용기로 환원되었다. 그러나 철학자를 다시 만나고 청년은 다시금 용기를 내었다.


책을 읽으면서도 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나라의 모습과 아들러가 바라는 세상에 많은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강자와 약자가 나뉘지 않는, 차별이 없는 세상. 따지고 보면 배제와 혐오도 수직적 인간관계에서만 기인되는 것일 테다. 아들러가 강조하는 공동체 감각은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를 살아내야 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중요한 메시지가 되리라 생각한다. 성경이 인간에게 주어졌고, 모든 말씀과 율법이 인간을 위해 주어졌음을 생각할 때, '개인 심리학'을 주창하여 인간의 심리를 분석하며 일생을 보낸 아들러의 가르침은 단지 심리학에 머물지 않고 철학이자 사상, 그리고 인간의 삶의 태도에 대한 훌륭한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어쩌면 정의와 공의가 사라지고 불의가 횡행한 이 시대는 이 책에서 말하는 진정한 어른이 없어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왜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배제와 혐오를 일삼으며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에 천착해 있을까? 아들러라는 한 사람의 연구도 뛰어넘지 못하는, 사적인 복음에 갇힌 기독교는 과연 무슨 힘이 있는 걸까? 그런 기독교의 방향이 과연 하나님나라로 직결될 수 있을까? 많은 질문들이 떠오르지만, 우선 이 책을 통해 다음과 같이 작은 결론을 하나 내려보면 어떨까. "거룩함과 구별됨을 운운하기 이전에 먼저 어른이 되자."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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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사랑 에버그린북스 12
막스 뮐러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정확하고 아름다운 필체가 순수함을 담아낼 때.


막스 뮐러 저, '독일인의 사랑'을 읽고.


지난 주말도 가족과 함께 중고 서점에 들려 많은 책들에 둘러싸인 채 한 시간 정도 책을 읽었다. 이런 생활도 벌써 수 개월째 지속하고 있으니, 어느덧 우리 가족의 일상으로 자리를 잡은 셈이다. 난 일상에 흩어진 행복의 조각을 찾는 듯한 심정으로 매주 이 시간을 기다린다.


늘 여러 책을 뒤적거리지만, 서점에 들어서서 항상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새로 들어온 책 코너를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다. 매주마다 새로운 책이 눈에 띄는데, 저번 주는 아주 오래된 고전 하나가 내 관심을 끌었다.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 중학생 시절, 어머니 덕에 문학을 알게 되어 한동안 고전문학에 빠져있을 무렵 접했던 책 중 하나였다. 아주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한 기분으로 이 책을 손에 잡은 순간 내 마음은 금새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때의 감수성이 단박에 되살아나는 기분을 느꼈다.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기억은 주인공 여자가 아주 쇠약해서 결국엔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 뿐이었다. 얼굴에 여드름이 나던 시절, 사랑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애송이였던 내게 이 책이 남긴 흔적인 것이다. 하지만 약 25년이 지난 지금, 한 여자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했던 한 중년 남성으로서, 곧 사춘기가 시작될 아들을 키우고 있는 마흔이 넘은 한 아버지로서, 그리고 세상살이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나름대로의 높고 낮은 곳을 경험해본 한 인간으로서 난 이 책을 다시 읽어냈다.


줄거리 위주로 소설을 읽어내던 어린 시절을 지나 어느새 어른이 되어버린 난 소설을 읽을 때면 작가의 필체를 통해 작가의 내면을 느껴보려 노력한다. 줄거리야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또 잊어버릴 테지만, 필체에 흐르는 작가의 마음을 공감한다면 그 작가의 혼을 조금이라도 흡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여덟 꼭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모두 과거에 대한 회상이다. 아주 어릴 적 유년시절부터 성인이 된 이후까지 시간 순으로 구성된 일인칭 주인공 시점의 소설이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이야기의 진행과정에서 반전 하나 일어나지 않는다.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남자가 소년일 때부터 사랑해온,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는 부잣집 소녀가 있다. 성인이 되고 타지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그녀를 자신의 자아처럼 여길 정도로 그는 그녀를 늘 마음 속에 담아두었다. 어느 날, 고향으로 돌아와 그녀와 재회를 하게 된다. 둘은 떨어져 지낸 시간이 무색할 만큼 서로를 인지했고, 사랑을 확인한다. 그러나 여느 소설이나 드라마 속에 나오는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이미 심장병을 앓고 있다는 설정이 되어 있었고 늘 침대에 머물렀기 때문에 그녀의 죽음은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주인공 남자의 사랑을 끝내 받아들이지만, 그 순간이 둘 사이의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줄거리만 보자면 형편없는 소설이라 치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이 한국인의 사랑을 받은 고전문학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던 이유는 결코 단순한 줄거리에 있지 않을 것이다. 마흔이 넘어 글 읽고 쓰는 일에 관심이 많아진 내 눈에는 보였다. 그것은 작가의 필체에 있었다. 어쩜 이리도 적재적소에 필요한 단어와 문장으로 한 단락 한 단락을 써냈을까 싶을 정도로 작가의 필체는 정확했고 또 아름다웠다.


신형철이 그의 신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의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나도 글짓기는 집 짓기와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가 언급한 글짓기의 준칙 중 두 번째, "정확한 문장을 찾을 것"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책이 바로 이 책,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이라 생각한다. 신형철의 '건축에 적합한 자재를 찾듯이, 문장은 쓰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라는 말, '특정한 인식을 가감 없이 실어 나르는 단 하나의 문장이 있다'는 말, 그리고 '그런 문장은 한번 쓰이면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다'는 말을 이 책은 모두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독일인의 사랑'이 말하고자 했던 사랑은 소유하지 않고,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줄수록 풍성해지고 맑아지는 사랑일 것이다. 자신의 죽어감을 언제나 자각하고 있기에 주인공 남자의 사랑 고백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녀의 마음이 내게 전달되었을 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운명을 받아들이듯 사랑을 받아주고 인정해달라는 남자의 순수한 마음이 전달되었을 때도, 결국 그 마음을 받아들이고 서로 하나가 되었던 그 짧은 순간에 흘렀던 풍부한 감수성이 전달되었을 때도, 비록 결말을 충분히 예측한 이야기 전개였음에도 불구하고, 난 어린아이처럼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헤르만 헤세의 '게르트루트'가 떠올랐고,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의 여러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모두 남녀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지만, 그 장면들이 이리도 강렬히 기억에 남는 이유는 아마도 그 사랑의 순수함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결국 저자의 유려한 필체도 진정성 어린 순수함을 담아낼수 있었기에 비로소 독자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것이다.


공감을 자아내면서도 진정성 있고, 순수함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정확한 집을 짓듯 적당한 단어와 문장으로 쓰여진 책. 살면서 이런 책을 만나게 되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나도 언젠간 이렇게 누군가에게 행운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글을 쓸 수 있을까?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743?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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