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 - 그침, 쉼, 받아들임, 향연
마르바 던 지음, 전의우 옮김 / IVP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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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투명하고 불완전한 인생에서 온전함을 경험하는 삶


마르바 던 저, '안식'을 읽고


한 해의 마지막 날 이 책을 손에 들고 생각에 잠겼다. 모든 것이 멈추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 시간을 아껴서 하나라도 더 채워 넣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그 생각들로부터 오는 강박으로 인해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또 쫓기고 있었던 것 같다. 쫓는 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쫓기는 자는 자신이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법이다.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일단 멈추는 것이다. 자기 객관화는 멈춘 다음에 온다. 쫓는 자의 정체를 파악하는 건 또 그다음이다. 멈추니 깨달아졌다. 아, 내게 필요한 건 안식이었구나.


내가 아닌 남을 향한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을 하고 나름대로 그 모토에 부합하는 삶을 살려고 부단히 애쓰고는 있지만, 아직 초보 혹은 아마추어여서 그런지 무엇을 해도 잔뜩 힘이 들어가는 것 같다. '되어지는 상태' 이전에 뭔가를 자꾸 '하는 상태'에서 나는 여전히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상태로는 그 어떤 선하고 아름다운 일을 해도 내겐 일이 될 뿐이다. 온전히 누리며 나누는 삶이 아니라 여전히 성취하고 채우려는 삶을 연장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 멈추는 것. 그리고 돌아보는 것. 나에게 필요한 건 안식이라는 것. 2024년 마지막 날에 이런 순간을 맞닥뜨려 감사하다는 생각이다. 


이 책은 안식일 지키기가 가져다주는 많은 결과를 소개한다. 안식일 지키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잘 알다시피 십계명에 하나로 제시되어 있다. 그만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 나아가 존재 자체와 깊은 연결이 될 만큼 중요한 사항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계명을 밥 먹듯이 무시하고 거절한다. 복음이 아닌 율법주의에 매이지 말아야 한다며, 십계명은 구약의 유물이라며, 시대착오적인 계명일 뿐이라며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변명도 이미 시스템화되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마르바 던은 당당하게 말한다. 안식일 지키기는 우리를 율법주의에 매이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율법주의에서 자유케 한다고. 


물론, 저자도 강조하다시피, 안식일 지키기는 결코 법적인 강제가 아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이 하던 방식을 나를 포함한 많은 개신교도들이 그대로 답습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대와 문화와 상황에 맞춰, 나아가 각자 자신의 환경과 헌신에 맞게 서로 다른 방법으로 안식일을 지킬 수는 있다. 예수가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고 사람을 살렸던 것처럼, 우리도 안식일을 지키라는 하나님 말씀의 본질을 살리면서 우리의 상황에 맞춰 안식일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책은 안식일 지키기의 개념이 얼마나 실제적이고, 안식일을 지킬 때 얼마나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 준다. 저자는 이를 총 네 가지로 설명하는데, 곧 그침, 쉼, 받아들임, 향연이 그것이다. 아래 발췌문은 그것들의 요약이다. 


| 안식일 지키기의 그침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창조하려고 한 여러 가지 방법을 뉘우치는 회개의 깊이를 더한다. 안식일 지키기의 쉼은 하나님의 완전한 은혜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해 준다. 안식일 지키기의 받아들임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믿음의 진리를 취하여 우리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에 실제적으로 적용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안식일의 향연은 우리의 종말론적 소망 의식을 고취시킨다. 하나님의 사랑을 현재에 경험하는 기쁨을 누리며 오는 기쁨을 미리 맛볼 수 있게 한다. |


기독교 내부의 안식일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나는 안식일 혹은 휴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엿새 일하고 하루 쉬는 패턴은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는 패턴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더 효율적이고 건강하며 지속 가능한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그 하루를 어느 날로 정할지는 각자의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렇게 멈추고 (그치고) 쉬고 돌아보는 시간은 전체 삶을 더 윤택하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된다. 멈추고 쉬고 돌아보는 시간을 하나님의 임재를 오로지 경험하는 시간으로 받아들이고 누리는 것이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창조주이자 구원자이신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영적인 사실을 다시 각인시키며 모든 것을 점검하고 다시 하나님을 향한 방향키를 바로 잡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안식일은 엿새 일한 뒤 찾아오는 휴식일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새로운 한 주를 위한 시작일의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도 숙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안식일을 일주일 중 가장 중요한 날로 삼는 일. 전체 삶의 속도를 맞추고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 기억하며 내가 누구인지, 지금, 여기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는 시간으로 안식일을 삼는 일. 그리고 나 혼자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와 함께 사랑을 나누며 하나님 나라를 맛보는 시간으로 안식일을 삼는 일. 깨어 있지 않으면 언제나 쫓기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이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숙지해야 할 일이라 믿는다. 이런 삶이야말로 세상에 속하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구별된 삶을 살아내는 초석이지 않을까 싶다. 깨달음을 넘어 구체적인 실천으로 넘어가 실제로 살아있는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불투명하고 불완전한 삶을 살아내는 우리들도 안식일의 온전함을 매주 경험하게 되면 소망과 기쁨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IVP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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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북꾸 에디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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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상상력을 넘어서는 모호함

무라카미 하루키 저,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고

무려 761 페이지 장편소설을 8시간 정도에 독파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하루키의 필력 때문일 것이다. 역시 하루키는 타고난 이야기꾼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작품들을 수차례 시도만 했을 뿐 이 작품을 포함하여 지금껏 네 편밖에 읽지 않았는데 거기에 내 본심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너무 유명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하루키 작품은 다분히 관념적이고 몽환적이며 이 작품의 핵심 메시지라고 생각되는 '현실과 비현실이 중구난방으로 섞여 있는 모호함'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그의 작품을 끝내 읽지 않게 되는 나를 설명하기에 더 적절하지 않나 싶다. 여기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단어는 '모호함'이다. '난해함'이 아닌 '모호함'. 이 벽돌책에 대한 나의 감상의 단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을 네 편밖에 읽지 않은 독자의 성급한 일반화일지도 모르겠지만,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 그의 모든 작품 중 가장 (혹은 탑 3 이내) 모호한 작품이지 않나 싶다. 집중해서 읽어냈음에도 여전히 이 작품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단순한 문학적 상상력이 허락하는 자유를 거뜬히 넘어서는 모호함이 내 안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노릇이다. 읽는 내내 지루함을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오히려 책 속으로 빨려 들어 술술 읽어냈으니 말이다. 아마도 이것이 하루키의 매력이지 않나 싶다. 

나름대로의 해석을 펼쳐보고 싶은 생각도 잠시 했으나 그러지 않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별 의미가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작가인 하루키 역시 어떤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쓴 작품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필력이 좋은 이야기꾼이 자신의 상상력을 계속해서 따라가며 텍스트로 받아 적은 이 작품은 장편소설이 아니라 어쩌면 한 편의 거대한 시라는 장르에 속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이성으로 냉철하게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 흠뻑 빠져들어 느끼는 작품이 바로 이 소설의 본질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제대로 읽은 듯하다. 한 편의 꿈을 꾼 듯한 느낌이 아직 남아 있다. 몽상 속의 몽상, 관념 속의 관념, 꿈속의 꿈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강하다. 만약 냉철하게 이성적으로 이 작품을 분석하려고 시도를 한다면 정신분석학이라는 채널이 적당하지 않을까 한다. 하루키라는 이야기꾼의 오랜 세월에 걸친 집요한 상상력의 시작과 과정과 끝이 이 장편 속에 녹아있지 않나 싶기 때문이다. 물론 하루키 자신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내면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마음 (혹은 잠재의식)의 이야기로 이 작품을 읽고 하루키라는 이야기꾼의 정신을 분석하는 시도가 얼마나 의미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이 작품을 읽고 한 편의 꿈같은 이야기를 들은 것 같으면서도, 그것보다는 창작자인 하루키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본 기분이다. 

내가 이 작품을 '모호함'으로 압축하는 중요한 이유는 작품 속에서 사용되는 몇 가지 단어의 의미의 모호성 때문이다. 도시, 벽, 그림자, 시간, 사랑, 믿음,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비현실 등, 익숙한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는 의미와 다른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생겨나는 불가항력적인 모호함이 나에겐 이 작품을 읽으며 느낀 지배적인 인상이었다. 또한, 이 단어들을 한 번에 꿰는 어떤 일관된 논리랄까 관점이랄까 하는 것도 모호하여 각 단어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작은 메시지들이 파편적으로 산재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하나의 파편적인 이야기를 읽을 땐 뭔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그것들을 한데 모아 하나의 이야기로 종합하려는 시도에서 여러 번 막히고 말았다. 이것은 내가 이 작품을 읽고 어떤 하나의 큰 메시지가 잡히지 않는다고 말한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고 '역시 하루키는 하루키구나'라는 생각을 공고히 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관념과 몽상으로도 인간의 본성이나 심리를 해부하여 드러내는 도스토옙스키를 떠올렸다. '하루키는 역시 하루키'라는 말속엔 뼈가 있다. 그가 뛰어난 이야기꾼인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결론에 나는 결국 다다르게 되기 때문이다. 하루키만의 매력이 분명히 있지만, 내겐 뭔가 부족하다. 아쉽다는 마음이 지배적이다. 앞으로 내가 하루키를 더 읽을진 잘 모르겠다.

* 하루키 읽기
1. 노르웨이의 숲: https://rtmodel.tistory.com/655
2.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https://rtmodel.tistory.com/820
3. 양을 쫓는 모험: https://rtmodel.tistory.com/1211
4.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https://rtmodel.tistory.com/1913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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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트루트 헤르만 헤세 선집 5
헤르만 헤세 지음, 황종민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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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과 합일, 개성과 창조성

헤르만 헤세 저, ‘게르트루트’를 다시 읽고 

우리 안에는 어두움도 밝음도 있다. 우리는 고통도 기쁨도 느낀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는 부정적인 자아와 긍정적인 자아가 따로 있는 것일까? 부정적인 자아는 어두움과 고통에, 긍정적인 자아는 밝음과 기쁨에 각각 반응하는 것일까? 그게 아니면, 하나의 자아가 양극단의 자극에 모두 반응하는 것일까? 우리 안의 자아는 하나인 걸까, 둘 이상인 걸까? 지금 내가 인지하고 느끼고 있는 나는 어떤 나일까? 헤세를 읽을 때마다 하게 되는 질문들이다. 헤세의 초기작 중 하나이자 한국 독자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게르트루트'를 7년 만에 다시 읽으며 그때와 동일한 질문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자아의 분열과 합일을 나는 다시 숙고했고, 그것과 예술과의 관계를 작품 속 주인공을 포함한 여러 음악인들을 통해 관찰할 수 있었다. 또한 초독 때 놓쳤던, 아니 그땐 잡아낼 수 없었던 부분에 대해서도 이 글에서 조금 풀어볼까 한다. 

작품 속 화자인 쿤, 그리고 오페라 가수 무오트는 각각 열등감과 오만함의 상징이다. 열등감과 오만함은 정반대의 감정처럼 보이지만 근원은 같다. 바로 교만이자 자기애다. 자칫 열등감이 어떻게 교만이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자기중심적인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미성숙함을 그대로 대변한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잘난 척하는 오만한 자만이 자기중심적이지는 않다. 또한 열등감과 오만함은 모두 자존감이 현저히 낮아진 상태에서 비롯된다. 여기서도 어떻게 오만함을 낮은 자존감과 연결시키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자존감과 자존심을 분별하지 못한 처사다. 오만한 자는 자존심을 부리는 것일 뿐이다. 그 이유는 자존감이 낮기 때문이다. 즉, 자존감이 낮은 자는 자존심을 부려 자신을 크게 보이려고 애쓴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오만하다고 말한다. 가지지 못한 자가 가진 것처럼 보이기 위해 가진 척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진짜 가진 사람은 가진 척하지 않으며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허세를 떨지 않을뿐더러 오만방자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교만은 사람의 천성과 상황에 따라 두 가지 중 하나로 발현되기 쉽다. 즉, 교만이라는 뿌리는 열등감과 오만함이라는 두 열매를 맺는다. 

재독을 하면서 이 작품에서 다뤄진 음악이라는 존재와 그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처음 읽을 땐 그저 헤세가 예술에 조예가 깊고 음악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여겨 묻지도 않았지만, 이번에 내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은 '왜 음악이어야 했을까?'였다. 이 질문을 달리 하면 다음과 같다. '열등감과 오만함이라는 양극의 감정을 다루며 자아의 분열과 합일을 보여주는 작품에서 음악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양극에 위치한 쿤과 무오트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유일한 매개체가 음악이었다는 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음악이 아니었다면 과연 이 두 사람이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음악이 아니었다면 서로가 서로를 가장 혐오하거나 거리끼는 스타일의 사람으로 여기며 평생을 살아가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헤세는 왜 이 둘을 굳이 친구로 만들었으며, 그 매개체로 음악을 선정했을까? 나는 그 이유를 작품 초반에 소개되는, 쿤이 홀로 스위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고 손꼽히는 어느 마을 여관에서 가을까지 몇 주간을 묵는 동안 경험했던 사건에서 찾는다.

쿤은 이미 썰매 사고로 인해 다리를 저는 불구자가 된 상태였다. 바닥까지 내려앉을 수 있었던 자존감을 다행히 어느 정도 회복하여 괴로워하지 않고 체념과 유머로 견뎌 내는 습관을 들이고 있는 상태였다. 전에 없던 자신의 결함을 기꺼이 끌어안고 살아갈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스스로도 그 고지대에서 보낸 몇 주를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때라고 고백할 정도로 쿤은 홀로 떠난 여행에서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고 체험하게 된다. 나는 그 가치가 바로 음악이 가지고 있는 본질, 그리고 음악이 만들어낸 합일의 열매인 창조성이라고 보았다. 쿤은 그곳에서 첫 소나타를 작곡하게 되는데, 그가 어떤 내면의 변화를 겪은 결과로 나타났다. 그는 낮의 찬란함과 밤의 비참함 모두를 들었고, 그 목소리에 마음 상하지 않고 귀 기울일 수 있었으며, 향락과 고통을 분간하지 않게 되었고,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똑같이 느껴졌으며, 둘 다 고통스럽기도 하고 감미롭기도 했다고 적는다. 또한, 그가 달콤함이나 괴로움을 느끼고 있는 동안 창조력은 초월적인 곳에서 조용히 아래를 내려다보며, 빛과 어둠은 한 형제이고 고뇌와 평화는 한 위대한 음악의 박자인 동시에 힘이자 일부임을 깨달았다고도 쓴다. 양극단의 가치들이 한데 모여 하나가 되는 상태, 즉 합일을 그의 내면에서 경험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창조성이 발현되어 작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쿤의 내면세계에서 일어난 합일이 창조성으로 발현되어 작곡이라는 형태로 가시화되었던 것이다. 바로 음악이라는 영역 안에서 말이다. 

그 이후 쿤에게는 어릴 적부터 느꼈던 뜻 모를 자신감이랄까 운명이랄까 하는 강한 자기 계시를 확신하게 되고 음악인의 정체성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쿤은 음악에서 만큼은 어떤 초월적인 세계를 경험한 자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 경험이 없었다면 무오트와의 관계가 지속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비록 무오트와 만나게 된 동기가 가시적으로는 그가 쓴 가곡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쿤에게는 무오트의 인정이 단순히 자신의 곡이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훨씬 뛰어넘는 의미가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비록 불구가 되었지만 그 불구를 전혀 느끼지도 못하고 불구이든 아니든 아무 상관이 없는 어떤 초월적인 합일을 경험한 자신의 존재가 받아들여지고 인정받게 되는 시작이지 않았을까. 그렇기 때문에 오만한 무오트의 무례함도 견딜 수 있지 않았을까. 음악은 실로 쿤에게 자신의 결함도 초월할 수 있을뿐더러 정반대의 세계도 받아들일 수 있는 통로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나중에 게르트루트 앞에서는 그의 열등감이 도져 끝내 사랑을 잡을 용기를 내지 못하게 되지만, 어쨌거나 쿤은 완벽하진 않지만 성장을 이뤄냈던 거라 해석할 수 있겠다. 

비록 쿤이 오만한 무오트를 친구로 받아들였고, 그 무례한 무오트만이 가진 강점, 즉 아이처럼 순수한 음악에의 동경, 열망, 그리고 현재를 누릴 줄 아는 능력을 알았지만, 그의 모든 점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쿤을 사로잡은 음악이 쿤에게서 사람을 보는 객관성까지 빼앗지는 못했던 것이다. 쿤이 사랑했으나 자신의 결함 때문에 용기 내지 못했던 게르트루트를 무오트에게 빼앗긴 후 무오트를 향한 그의 감정은 폭발 직전까지 가게 된다. 나는 이 부분이 꽤 맘에 들었는데, 아무리 어떤 것을 빠지게 될 정도로 사랑하게 되어도 그것으로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주관적인 판단에 쿤이 사로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작품 속에서 유일하게 내면의 성장과 성숙을 경험하는 인물이 쿤 밖에 없다는 내 해석의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쿤은 자신의 결함을 극복해 냈고, 사랑하는 여자를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감정으로부터도 끝내 이겨냈으며, 객관성을 유지하여 결말에서는 미망인이 되어버린 게르트루트마저도 연민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삶의 양극을 구부려 서로 다가가게 하고 삶의 이중 화음을 기록하는 일'을 자신의 사명이라 여긴 작가 헤세는 쿤의 인생 여정을 통해 자아의 성장과 성숙, 분열과 합일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 이외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쿤이 절친 둘을 비교하는 부분이었다. 타이저와 무오트의 대비는 눈여겨볼 만하고 생각한다. 타이저는 놀랄 만큼 음악에 밝았다. 그는 예술에서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아도 거기에서 만족을 느끼는 그런 사람이었다. 명인도 아니었고 작곡도 하지 않았지만 바이올린을 만족스럽게 연주했고 그 기법에 통달하고 있다는 걸 내심 기뻐했다. 어느 지휘자 못지않게 전주곡이라는 전주곡은 다 꿰고 있었으며, 정교하거나 화려한 대목이 나오거나, 어떤 악기가 아름답고 독창적으로 찬란히 울리는 대목이 나오면, 환하게 웃으며 극장의 어느 누구보다 더 즐겼다. 타이저는 행복했다. 도달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으로 괴로워하지 않았다. 그는 예술에 예민하게 넋을 잃고 기쁨을 느꼈지만, 예술이 그에게 주는 것 이상의 것을 욕망하지 않았다. 예술 밖에서는 훨씬 쉽게 만족을 느꼈다. 친구 몇 사람이 있고, 때때로 좋은 포도주 한 잔을 마실 수 있으면 됐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걷기를 좋아했으므로 휴일에는 야외로 소풍만 갈 수 있으면 충분했다. 신지학의 가르침이 믿을 만하다면, 이 사내야말로 거의 완벽한 인간임에 틀림없었다. 본성이 더없이 착했고, 격정이나 불만은 그의 마음속에 들어서지 못했다. 

인생의 후반전을 살고 있어서 그런지 헤세가 묘사한 타이저 같은 사람은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나이가 들수록 타이저와 같은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나 쿤은 나와 다른 눈으로 타이저를 바라보는 것 같다. 쿤은 타이저와 같이 되고 싶지 않았다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가치관의 차이일 수도 있겠으나 쿤이 연이어한 말을 들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는 '나 아닌 어느 누구도 되고 싶지 않았으며, 가끔 너무 꽉 낀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나 자신의 껍질을 벗고 싶지 않았다'라고 쓴다. 그는 타이저의 장점을 잘 파악했지만 자신은 다른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만의 개성을 발견하고 그 개성을 따라 고유한 삶을 살아가겠다는 다짐이 의미심장하고 결연하게 느껴지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 고유한 개성이 타이저의 장점을 어느 정도 흡수하는 행위를 배제해야만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오히려 타이저와 같은 사람이 되려고 어느 정도 노력하는 건 아름다운 시도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한다. 내게 타이저는 열등감과 오만함으로 이루어진 양 갈래의 늪에 빠지지 않고 건강한 자존감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십 대의 쿤에게는 타이저의 모습이 그저 두루뭉술하고 아무런 개성이 없이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예상컨대 아마 쿤도 나이가 사십 대가 되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어쩌면 타이저가 쿤의 미래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으며, 그렇게 되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져보게 된다. 나의 개성을 찾았다면, 나의 목소리를 찾았다면, 이젠 내가 아닌 남을 향한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의 인생 후반전은 그렇게 살아가리라.

* 헤세 다시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1898
2.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1912

* 헤세 처음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449
2. 싯다르타: https://rtmodel.tistory.com/453
3.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463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468
5. 황야의 늑대: https://rtmodel.tistory.com/488
6. 크눌프: https://rtmodel.tistory.com/499
7.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529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https://rtmodel.tistory.com/579
9. 데미안: https://rtmodel.tistory.com/469
10. 유리알 유희: https://rtmodel.tistory.com/708
11. 요양객: https://rtmodel.tistory.com/826
12.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430
13. 헤세로 가는 길 (by 정여울): https://rtmodel.tistory.com/1552

#현대문학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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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처럼 나이 들 수 있다면 - 탄생, 노화, 다양성을 이해하는 발생생물학 수업
김영웅 지음 / 생각의힘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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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과학과 통찰 뿐 아니라 연말연시 가슴 따뜻해지는 책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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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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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기억, 그리고 사랑

김연수 저,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읽고

이토록 평범한 미래
동반 자살로 인해 사랑하는 두 사람은 임사체험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 두 번째 삶은 시간이 거꾸로 간다. 속도는 같으나 방향이 반대다. 오늘 밤을 지나면 내일이 아니라 어제가 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그들이 처음 만났던 날까지 두 번째 삶을 거꾸로 살게 된다. 그들이 처음 만날 때 서로를 바라보던 그 사랑스러운 눈빛과 가슴 벅찬 얼굴, 그 설레던 마음까지 그대로 다시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세 번째 삶이 시작된다. 이번엔 시간이 다시 반대로 간다. 동반자살하기 전과 같은 시간을 다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두 번째 삶이 이미 서로가 경험한 삶을 하루하루 다시 되짚어가는 것이었다면, 세 번째 삶은 첫 번째 삶을 두 번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미래를 알고 있기에 세 번째 삶은 첫 번째 삶과 다를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미래의 기억을 가졌기에 현재를 충만히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이 단편소설 속에 소개되는 이야기, 그러니까 책 속의 책 이야기에 나는 이 작품의 핵심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 여행을 통해 알게 되는 현재의 소중함. 지금, 여기에서의 삶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순간들의 연속이며 우리가 실제로 살아내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하다. 그것이 터무니없이 평범하더라도, 그것이 과거의 내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더라도, 그것은 내게 주어진, 내가 살아내야 할 고유한 시간인 것이다. 

이 메시지는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주인공이 시간 여행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현재를, 지금, 여기의 삶을 마치 두 번 사는 것처럼 만끽하며 살겠다는 의미심장한 다짐과 맥을 같이 한다. 인생, 그렇게 인상 찌푸리고 아등바등하며 살 필요 없다. 여유 있는 마음으로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을 맛보고 사랑하면서, 즉 현재를 누리면서 살고 싶다.


난주의 바다 앞에서
이 작품의 키워드라고 생각되는 '세컨드 윈드'는 '운동하는 중 고통이 줄어들고 운동을 계속하고 싶은 의욕이 생기는 상태'를 뜻한다. '세컨드'라는 단어로 유추할 수 있듯, 이는 운동 중 고통이 극에 달하는 사점이 지나면 고통이 줄어들 뿐 아니라 호흡도 순조로워지며 계속 운동할 수 있는 상태다. 퍼스트 윈드라고 부를 수 있는, 즉 사점 이전의 의욕이 가득한 때와는 달리 세컨드 윈드는 사점을 극복해 낸 다음이므로 일종의 초월적인 상태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작품 속 김 선생의 말마따나 대학 시절 같은 동아리에서 친구로 지냈던 두 남녀가 삼십여 년이 지나 남해의 한 작은 섬에서 우연히 재회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정현과 은정은 그렇게 낮은 확률로 섬에서 재회했다. 작가인 정현이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에 초청을 받아서 섬으로 왔는데 거기서 우연찮게 은정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은정은 더 이상 은정이 아니었다. 손유미라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개명하여 손유미가 된 건 그녀의 인생이 현재 퍼스트 윈드가 아니라 세컨드 윈드를 살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정현은 강연 후 유미에게서 그녀가 어떻게 세컨드 윈드를 살게 되었는지를 듣게 된다. 유미는 정난주라는 조선시대 여인에 관련된 이야기를 각색하여 정현에게 들려준다. 자신의 죽음으로 아들을 살리려는 결연한 의지를 실행으로 옮겼으나 기적적으로 죽지 않고 살아남은 정난주는 하느님을 만나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야만 아들도 살 수 있다는 기도를 드리게 되고 결국 그 기도가 응답되어 두 번째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정현이 강연 차 찾아온, 그리고 은정이 아닌 유미로 살아가고 있는 바로 그 섬에서 말이다. 은정은 이른 나이에 아들을 잃어 마음에 상처가 컸다. 남편과도 이혼한 뒤 살고 싶은 마음을 잃어 죽고 싶었던 것 같다. 그때가 은정의 인생에서는 사점과도 같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마치 죽을 자리를 찾기 위해 흘러 흘러 어쩌다 그 섬까지 오게 된 은정은 정난주의 바다를 보고는 마음을 고쳐 먹은 것이었다. 그녀 역시 난주처럼 세컨드 윈드를 살기로 다짐했던 것이다.

두 번째 삶. 인생의 사점을 지나 비로소 마음이 평온해진 삶. 유미는 은정이었을 때 바랐던 추리소설을 출간하기도 했다. 사점이 목을 죄어올 때 순응했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성취이자 행복이었을 것이다. 은정에서 유미로의 전환은 첫 번째 삶과 전혀 다른 삶을 뜻하진 않을 것이다. 그녀의 두 번째 삶은 첫 번째 삶을 잊지도 버리지도 않고 그대로 끌어안은 채 초월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일 것이다. 죽음으로 끝나야만 했다고 여겼던 그녀의 삶이 다시 살아있기를 선택함으로 더 온전한 삶을 살게 된 것이리라. 책을 덮으며 나는 그녀의 삶을 응원하는 마음이 되었다.


진주의 결말
사건의 결말은 나지 않았다. 유진주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홀로 모시다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혐의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 ‘사건의 결말‘ 티브이 프로그램이 몰고 가듯 그녀가 능동적이고 계획적인 살인범인지, 아니면 범죄심리학과 교수이자 이 작품 속 화자의 예측대로 수동적인 피해자인지는 결론 나지 않았다. 확실한 사실도 하나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녀가 아버지와 살던 집에 불을 지른 사람이라는 사실은 밝혀졌다. 흥미로운 건 그녀가 자신이 방화범이라는 사실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고 아무런 거짓도 없이 순순히 자백했다는 점이다. 그녀는 그저 소방관들이 불 난 집 유리창을 깨부수는 장면을 보고 속이 시원하다는 느낌과 함께 자유함을 맛보고 제주로 훌쩍 떠났을 뿐이었다. 도주도 잠적도 아니었던 것이다. 

작품을 다 읽고도 여전히 모호한 부분이 남는다. 특히 그녀가 불을 지른 이유에 대해서 이 작품은 말을 아낀다. 시원하게 답이 되지는 않지만 그녀가 직접 밝힌 바에 따르면, 그녀는 치매에 걸려 우연히 떠오른 생각을 의심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믿는 아빠의 마음을, 마치 치매에 걸린 것처럼 사전 경고도 없이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는 신의 마음을 이해한 사람처럼 살아보기로 해서, 그래서 불을 질렀다고 한다. 거기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오직 이해만 있었을 뿐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이유는 없고 이해만 있었을 뿐이라니…

선뜻 와닿지 않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화자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궁금해진다. 작품의 마지막 단락은 그녀를 따라 들어간 박물관 안에서 내부인지 외부인지 모를 정도로 바람이 불고 있었으며, 유진주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났다고, 귀에 들려오는 건 오로지 바람소리일 뿐이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나는 여러 번 생각을 했지만 아직 이 수수께끼 같은 결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없고 이해만 있는 행동은 그저 무책임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힘을 얻고 있으며, 유진주가 얻은 자유라는 게 과연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사건의 결말은 진주의 결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주관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사건의 결말은 이유를 묻고 따진다. 논리 정연해야 설득력도 높아지는 법이고, 범행과 범인의 관계 또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란 언제나 원인과 결과에 입각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일들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아니, 절반 이상의 일들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거나 우리의 이해가 다다를 수 없는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 같다. 모든 일의 이유를 밝히고 싶은 마음은 이십 대 시절의 몽상일지도 모른다. 이유는 없거나 모르지만 이해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어쩌면 우리가 현실에서 더 자주 맞닥뜨리는 일들의 본질과 더 가까운 건 아닐까. 바로 이때 진주의 결말은 우리가 처한 현실적 문제와 맞닿게 된다. 일을 일어나고, 이유는 없거나 모르며, 어쨌거나 차후에 이해를 필요로 하는 상황의 연쇄는 곧 우리의 인생이다.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은 시간이었다. 광막하다는 표현도 모자랄 만큼의 사무친 그 시간은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아내 정미, 그리고 그녀와 함께 했던 순간들이었다. 폭풍처럼 지나가버린 나날들이 몽골의 사막에서, 그 먼 이국 땅에서 열병이 걸려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에야 작품 속 화자를 한꺼번에 찾아왔던 것이다. 슬픔은 감정이라기보다는 해석이다. 언제나 지나고 나서야 느껴지는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은 슬픔이기도 했다. 지나간 시간, 지나간 사랑, 그리고 늙어버려 아직도 살아있어 아픔을 느끼는 나. 그 모든 생각들이 얽히고설킨 채 울란바토르에서 그를 쓰러뜨리고 펑펑 울게 만들었던 것이다. 

먼 기억 속에 묻힌 옛 추억의 이야기가 어느 날 도둑 같이 찾아올 때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밖엔 없다. 그 시간이 치열하면 할수록, 애틋하면 할수록 더 그렇다. 새까맣게 잊혔다가 뜬금없이 나타나 모든 시간과 공간을 삼켜버리는 그 압도적인 힘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마지막으로 한 가지 작품 속 화자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얼마나 사랑했기에 바얀자그까지 가서야 그 기억의 성벽이 무너졌느냐고, 얼마나 그녀 없는 삶을 연극하듯 살아왔기에 그렇게 속절없이 무너질 수 있었느냐고. 답을 듣지 못한 나는 그저 애도할 뿐이다. 


엄마 없는 아이들
상실을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상실인 걸까? 상실감을 느끼고 고립을 경험한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상실을 경험한 다른 사람인 걸까? 코로나 예방접종을 위해 명준이 방문했던 병원에서 명준을 알아보고 편지를 보낸 혜진으로 인해 명준은 대학 시절을 회고하게 된다. 명준은 한때 혜진에게 잠시 사랑을 느낀 적도 있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해, 명준은 연극단에서 혜진을 처음 만났고 해변에서 혜진 역시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동병상련을 느낀 명준은 혜진에게서 적잖은 위로를 받았으리라. 

현재의 명준은 그때를 회상하며 생각한다.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이 연극이 끝나고 함께 사라져 버린 혜진을 잃어버림과 함께 영영 떠나버렸다는 것을. 상실은 그 상실을 잠시 채운 것 같았던 그 어떤 것의 잃어버림과 함께 잊히게 되는 걸까.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이 작품 또한 어느 날 문득 날아든 편지 한 통이 이야기를 이끈다. 십여 년 전 만나 인디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일본으로 둘이서 여행까지 갔던 희진으로부터 온 긴 편지였다. 보낸 곳 주소는 한국이 아니라 일본의 요쓰야였다. 희진은 K-Culture진흥회로부터 한국 인디 가수 대표로 초대되어 일본 요쓰야에 위치한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공연에서 여덟 곡을 부른 후에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이었다. 편지에 적힌 자초지종은 한 편의 소설과도 같았다. 희진과 함께 여행했던 해, 스피커로부터 들려오는 '하얀 무덤'이라는 노래에 이끌려 찾아온 한 일본인이 희진의 서명이 남겨진 카페 방명록을 주인 몰래 찢어 간직하다가 많은 세월이 흐르고 나서 그 서명에 의지하여 희진일지도 모르는 한국 인디 밴드 가수를 초대했던 것이다. 그 일본인은 그 당시 자살을 결심한 상태였는데, 우연찮게 들려온 '하얀 무덤'이라는 노래 덕분에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희진은 그저 그 노래가 담긴 CD를 카페 주인에게 틀어 달라고 부탁했을 뿐이고, 또 깜빡하고 CD를 찾아가지 않았을 뿐인데, 그 실수인지도 모를 우연이 한 일본인 영혼에게 구원의 통로가 되었던 것이다. 그 구원의 기쁨을 보답하고자 그 일본인은 자수성가한 이후 계속해서 희진을 찾다가 기어코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희진은 작년 혼자서 배 타고 제주도로 가던 밤을 떠올린다. 인천부터 제주까지 긴 여정 중 출항 직후부터 멀미 때문에 고생했던 그 밤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를 이야기한다. 작품 속 화자와 함께 갔던 일본 여행 중 가와무라기념미술관에서 본 마크 로스코의 벽화 연작들을 떠올리며 노래를 부르다가 그 노래의 뒷부분 가사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라는 가사. 희진은 그 가사에 빠져 흥얼거리며 그 고약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자살의 문턱에서 한 사람 희진을 찾겠노라고 많은 세월을 보낸 그 일본인을 떠올리며 희진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희진에게 한 사람이란 누구였을까? 카페 방명록에 희진에게 프러포즈를 하는 듯한 글귀를 써놓은 그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희진의 편지는 작품 속 화자에 대한 사랑을 회상하는 것이었을까?


사랑의 단상 2014
이 단편소설 역시 지나간 사랑에 대한 기억을 기술한다. 사랑하는 대상은 과거에 머물 뿐이고 그래서 사랑도 끝난 것 같지만, 그 시간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종종 작품 속 화자의 현재 일상 속으로 침투하여 상념에 잠기게 만든다. 사랑은 기억되는 한 끝나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면 기억하려고 애쓰는 행위는 그 사랑에 영원성을 부여하는 것일까? 혹시 그건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야 되는 건 아닐까?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게 되어도 남아 있는 옛사랑에 대한 기억 때문에 그 사랑은 결코 완전히 새로울 수는 없다는 말일까? 여러 해석되지 않는 질문들이 남는 작품이다.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임종을 앞둔 할아버지의 기억 속에는 세 명의 바르바라가 있다. 시대를 달리하지만 이 세 명의 바르바라는 공교롭게도 어떤 신앙 혹은 신념 때문에 명을 다하지 못하고 타인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작품의 주제를 고려하며 이를 바라보면, 육체의 삶은 연결되지 않지만, 정신적 삶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이어진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육체는 이번 생을 살다갈 뿐이지만, 정신은 전해지는 이야기와 기억으로 말미암아 이전 생과 다음 생까지도 살아있다는, 다소 상상력이 필요한 해석도 이 소설은 요구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만큼은 이 소설집을 이루는 나머지 일곱 편의 단편소설처럼 시간고 기억이 만들어내는 어떤 이야기의 일환이라는 것만 이해할 수 있을 뿐, 정작 저자 김연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는 모호하기만 하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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