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론 : 과학 시대 창조 신앙
김정형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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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창조 신앙으로.

김정형 저, ‘창조론’을 읽고.

하나님을 문자 안에 가두는 우를 범하면서도 스스로 기독교 정통임을 자처하는 근본주의자들이나, 고작 반지성/반과학적인 주장 (이름하여 유사과학)에 머무르면서도 감히 과학이란 단어를 빙자하여 자신들의 주관적 해석을 진리인듯 자신있게 강요하는 동시에, 자칭 하나님과 기독교 신앙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는 창조과학자들. 이들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공통된 입장을 가진다. 영어로 ‘Creationism’이라 명명된 이 입장은 우리말로 넘어올 때 ‘창조론’으로 오역되어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지 않은 혼란을 가져왔다. 저자 김정형은 책의 서두에서 이 오역을 먼저 바로 잡는다. 근본주의자들이나 창조과학자들의 반지성적인 창조에 관한 입장은 ‘창조설’로, 이에 반해 ‘창조론’은 ‘기독교의 전통 교리에 해당하는 것으로, 창조에 관한 교리’라고 정의한다. 이 책의 주제이자 제목이 ‘창조설’이 아닌 ‘창조론’임을 주목할 때, 우린 저자가 창조과학의 오래된 논쟁적인 문제를 넘어서 하나님의 창조에 관한 바른 이해를 추구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실제로 저자는 우리의 창조 신앙이 창조설에서 창조론으로 나아가길 염원한다. 더불어, 과학 시대를 맞이한 지 이미 오래인 현대인들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현대 과학을 배척하지 않고 품는 창조론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에 따라 이 책의 부제는 ‘과학 시대, 창조 신앙’이다.

저자가 밝히고 있는 이 책의 기본 구조는 ‘소박한 창조 신앙’에서 ‘성숙한 창조 신앙’으로의 진화 과정이다. ‘첫 번째 순진성’이라고 본인이 명명한 ‘기독교 전통의 창조론’에서 출발하여, 자신과 전통이라는 한계를 넘어, 더욱 풍성해진 창조론, 즉 ‘두 번째 순진성’에 다다르기까지의 여정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저자는 이 여정에서 험준한 산과 깊은 골짜기를 지나야만 했다. 이는 아마 나를 포함하여 8,90년대 대학시절을 보낸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도 겪은 비슷한 여정일 것이다. 가치관과 믿음의 혼란을 불러오는 그 어두운 나날들. 하지만, 확신의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의심의 어두운 숲을 통과해야만 한다. 이는 사탄의 유혹이 아닌 연단의 과정이다. 두렵고 힘들지만 그 여정을 통과하면,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더욱 커지고, 개인의 협소한 구원론 위주의 사적인 기독교 신앙에서 벗어나 그 경계를 넘어 더욱 풍성한 다양성과 함께 성숙한 창조 신앙을 고백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저자의 성숙한 창조 신앙도 이러한 연단의 과정을 겪어낸 열매일 것이다.

에세이 형식까지 겸하고 있어 이 책의 앞부분은 읽어나가기가 어렵지 않다. 반면, 중간 부분을 읽어나갈 땐 상대적으로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이 부분에 저자의 치열한 고민과 연구, 성숙한 신앙과 믿음을 가능하게 했던 피와 땀들이 가득하기 때문에, 비록 신학과 철학을 아우르는 저자의 학문적인 이야기를 다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곧이어 뒷부분에 등장할 저자의 성숙한 열매를 기대한다면 천천히 시간을 내어 읽어볼 가치가 있다. 그리고 마침내 다다른 성숙한 창조 신앙 편에서는 과학 시대를 맞이한 우리들의 창조 신앙의 현 위치를 검토할 수 있으며, 창조에 관련된 오래된 논쟁을 넘어 우리가 가져야 할 바른 창조 신앙이 어떤 방향을 향해야 할지 가늠하는 데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구원론이 지나치게 강조된 기독교 신앙에서 벗어나 건강한 창조론이 한국 교회에서 함께 강조되길 소망한다. 그러면 나를 구원하신 예수만 감사할 게 아니라,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나아가 나뿐만이 아니라 타자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더욱 풍성한 감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창조과학을 포함한 여러 창조설로 인해 신앙과 과학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책을 통해 하나의 방향과 답을 얻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부디 이 책이 창조과학 논쟁이 자취를 감추고 건강한 창조론이 회복되는 데에 있어 하나의 작은 등불이 되길 기원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055?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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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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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소망: 글을 쓴다는 것.

아고타 크리스토프 저, '어제'를 읽고.

주인공 토비아스 호르바츠는 시계 공장에서 일하는 단순 노동자다. 그는 오래 전 다른 나라에서 도망치듯 이곳으로 왔다. 성인도 되기 전, 살인 미수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엄마와 내연 관계에 있었던 학교 교사, 그의 생물학적 아버지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의 유일한 사랑 린의 아버지이기도 했던 남자 상도르의 등에 칼을 꽂았었다.

창녀이자 거지였던 엄마 에스테르가 그를 버리지 않고 키웠던 유일한 이유는, 그가 크면 일을 시켜 돈을 벌어내기 위해서였다. 상도르는 토비아스를 그런 식으로 키워선 안 된다고 주장하며 반대했다. 에스테르를 토비아스로부터 떼어놓으려고 했다. 언제나처럼 잠자리였던 부엌에서 이 이야기를 엿듣던 중 토비아스는 엄마와 자기를 떨어뜨리려고 하는 상도르를 불쑥 죽이고 싶어졌다. 그래서 엄마와 포개져 있을 때 상도르의 등에 칼을 깊숙이 찌르면 아래에 있는 엄마까지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아이가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둘의 생사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토비아스는 그렇게 조국을 황급히 떠났었다. 그리고 이 떠남은 자연스럽게 린과의 작별을 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후, 토비아스는 언제나 린을 기다린다. 그가 기다리는 린은 조국을 떠나기 전 학교를 같이 다니던 배 다른 여동생 린이 아니다. 그가 기다리는 린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여인이다. 그 누구도 될 수 없고, 또 되어선 안 되는 린. 그런 그녀를 그는 항상 기다린다. 그리고 그는 매일 같이 글을 쓴다. 마음 한 켠에는 언제나 죄책감으로 가득 찬 상태로, 아무런 연고도 없고 언어도 다른 타국에서 일개 노동자로 외로이 살아가는 이민자와 소수자의 애환은 린과의 불가능한 만남을 소망으로 소환하며 기다리는 토비아스의 마음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시계 공장에서 일하지만 그 공장의 누구도 완성된 시계를 만들 수 없는 비극처럼, 불완전한 토막으로 살아가는 삶. 저자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단문의 향연으로 거침없이 드러내는 메시지의 핵심이 아닐까.

그런데 어느 날, 그 린이 왔다.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아니 어쩌면 불가능해야만 했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결혼을 하고 어린 아이를 낳은 채로 의사인 남편을 따라 타국에 1년 간 방문하게 된 것이었다. 그 기간 동안 토비아스와 같은 공장에서 일과 시간을 보내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토비아스는 꿈만 같았다. 꿈이 벌컥 실현되어버린 것이었다.

토비아스의 삶은 그 이후로 완전히 바뀐다. 눈에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던 소망이 어느덧 현실 가운데 스며들어와 보이고 만질 수 있는 대상으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매일 그녀와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이 점심을 먹는다. 일이 너무나도 단조롭고 외로워 자살까지 시도했던 토비아스. 그는 이제 차라리 쉬는 주말보다 일하는 주중이 기다려질 만큼 공장 가는 날이 더 좋아졌다. 그 동안 주말에 아무런 사랑도 없이 만나 잠자리를 같이 하거나 별 말도 없이 시간을 함께 보내던 욜란드에게 찾아가는 일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린에게는 남편이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집을 비우고 일을 해야 할 시간에 그를 우연히 마주친 토비아스. 그의 주위에는 다른 여자들이 있었다. 토비아스는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칼을 하나 들고 린의 집으로 찾아가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푹!" 토비아스의 두 번째 살인미수였다. 이번에도 칼이었다. 누군가를 죽이지도 못하는 칼을 이번에도 휘둘러버렸다.

집으로 가 누군가 자기를 잡으러 올 때를 기다렸지만, 정작 찾아온 사람은 린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칼에 맞았지만 치명상은 아니었으며, 토비아스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경찰에 보고하지 않았다고 했다. 대신, 고국으로 돌아가는 즉시 이혼하기로 합의를 봤으며, 아이 또한 남편이 데리고 가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고 전했다. 마침 두 번째 아이를 가졌다가 유산까지 하게 된 린. 그녀는 이 모든 상실이 토비아스 때문이라 여겼다. 토비아스에게는 소망의 실현이었던 린과의 만남이 이렇게 끝나버린 것이었다.

린은 그렇게 떠났고, 토비아스는 모든 걸 잃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자살을 하거나 상실감에 젖은 불행한 사람으로 전락하지 않았다. 그는 욜란드와 결혼해서 두 아이를 가진다. 첫째는 딸, 이름은 린. 둘째는 아들, 이름은 토비아스. 그는 여전히 시계공장에서 일한다. 그러나 공장으로 가는 버스에는 이제 아무도 타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글도 더 이상 쓰지 않는다. 그러나 왜 이런 마지막 상황이 내겐 행복으로 비쳐지지 않았던 걸까.

토비아스에게 찾아온 린은 과연 소망의 실현이었을지 생각해본다. 그에게 소망이란 차라리 실현되지 않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소망할 땐 마음껏 기다리고 가슴 부풀기도 하며 언제나 상상하고 글도 쓰면서 일상의 따분함과 이민자의 비애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었는데, 소망이 실현되고 또 떠나버린 자리에는 자유가 사라진 채 현실 안주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자유에의 의지가 꺾였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소설적 장치가 아니었을까. 그가 이루지 못한 자살은 글을 쓰지 않는다는 행위에서 비로소 실현된 게 아니었을까. 글을 쓴다는 것의 의미를 나는 다시 조용히 내게 묻는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042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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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의 눈으로 읽는 성경 1 - 쉽게 시작해 깊게 이해하는
박민근 지음, 신현욱 그림 / 선율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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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난 하나님을 온전한 하나님으로.

박민근 글, 신현욱 그림, ‘조직신학의 눈으로 읽는 성경’을 읽고.

‘중근동의 눈으로 읽는 성경’에 이어 출판사 선율이 또 일을 저질렀다. 성경 읽는 또 하나의 렌즈를 대중에게 획기적으로 소개하며, 하나님을 더 깊고 풍성하게 알 수 있는 방편을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읽고 그 안에 흐르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거대서사나 그 서사가 내포하는 핵심 메시지를 간과한 채 아무런 체계 없이 그저 개인적인 위로나 교훈을 얻는 목적 따위로 전락해버린 오늘날 성경 읽기 풍토에 이 책은 작지만 의미있는 폭탄이 되어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 수 있는 하나의 돌파구를 열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전작의 렌즈가 ‘중근동’이었다면, 이번에는 ‘조직신학’이다. 통상 조직신학이라 하면, 신학자나 목회자들만의 고유한 영역이라 여겨진다. 소위 평신도는 범접할 수도 없는 어렵고 난해한 학문으로 알려져있다 (조직신학이라는 단어조차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도 수두룩하다). 그러나 이 책은 담대하게도 그 경계를 허문다. 하나님을 더 알길 원하고 성경 읽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고 흥미를 느낄 수 있는 형식으로 조직신학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촌철살인처럼 쉽고 재미난 그림은 그저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는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조직신학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유익과 그것을 이루는 핵심 메시지를 하나도 놓치지 않을 뿐더러, 글이 잘 전달하지 못하는 뉘앙스까지도 효과적으로 처리해낸다. 그래서 책에 빠져들어 킬킬대다가 진지해졌다가 또 가슴 아파하며 공감도 하다보면 어느새 책이 끝나게 되는데, 머리와 가슴에 남는 건 쓰나미처럼 한바탕 휩쓸고 간 허망한 유머가 아닌, 기독교를 이루고 있는 전통적 교리들에 대한 이해와 이를 통해 조금 더 깊이 깨닫게 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주먹구구식으로 성경을 단편적으로만 읽다보면 쉽게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성경 본문끼리 상충되는 부분도 의외로 많고, 읽다보면 (특히 설교에 잘 인용되지 않는 본문들) 자신이 알고 있었던 하나님의 모습과 다르거나 정반대의 모습을 만나기도 하면서 해석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무한하고 변치 않으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상황에 따라 모순되고 변덕스런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도 생각보다 많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라도 알면 다행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에 무관심한 채 종교생활에 천착해있는 게 현실이다. 자신이 잘못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은 희망이다. 이제 바로 알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은 단지 읽는 행위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해석하고 전체의 흐름에 어긋나지 않게 이해해야 하는 작업이 필수다. 그저 개인적인 위로나 교훈 따위로 은혜 받았다고 지껄일 목적이라면, 어차피 자기 마음대로 해석할 것이기에, 굳히 성경 해석이 필요하지 않겠지만,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기 위해 가장 중요한 방법은 어쩌면 올바른 성경 해석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성경 해석의 중요성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의 우물에 갇혀 있지 않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깊고 풍성하게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성경 해석에 있어서 치우치지 않고 건강한 렌즈가 필요하다. 

이런 면에서 ‘중근동의 눈으로 읽는 성경’은 성경의 원독자나 원청자들의 세계관과 그들의 한계까지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독자들을 도와주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오늘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전하고자 하시는 말씀을 그릇되거나 과장되지 않은 눈으로 볼 수 있게 도와준다. 

또한 이 책, ‘조직신학의 눈으로 읽는 성경’은 중구난방으로 이해하고 있거나 자신이 원하는대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성경을 통해 쉽게 풀어주는 동시에, 성경 해석에 있어서 하나의 체계적인 기반을 마련해준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신론 부분에서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부분을 읽고나면, 아마도 여태껏 오해하고 있었거나 잘못 알고 있었던 하나님의 모습을 제대로 밝히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머리 속에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온전한 형체가 되어지는 경험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조직신학의 눈으로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성경을 완전히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조직신학은 하나님을 알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조직신학의 우물에서 길은 물을 마신다면, 적어도 우리의 성경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질 것이고 조각조각난 하나님을 조금이나마 더 온전한 형체로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2편도 기다려진다. 두꺼운 조직신학 책 읽기가 두렵다면, 나는 여기 이 책을 통해 조직신학의 숲을 구경해보길 서슴없이 추천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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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sunhye 2022-11-19 08: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편 찾고 있었는데 아직이군요~ 감사합니다
 
첫사랑 펭귄클래식 19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최진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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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풋함과 알싸함의 공존.

이반 투르게네프 저, '첫사랑'을 읽고.

손님들이 대부분 돌아가고 난 어느 늦은 밤, 방 안에는 세 명만이 남았다. 적적함을 달래보고 싶었는지 느닷없이 집주인이 돌아가며 첫사랑 이야기를 하자고 한다. 자기 순서가 다가오자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는 먼저 자신은 말솜씨가 전혀 없다고 운을 뗀 뒤, 첫사랑 이야기를 말로 하는 대신 기억나는 모든 것을 글로 써서 다음 번 만날 때 읽어주겠노라고 말한다. 썩 믿음직스러운 말은 아니었지만, 그는 두 주 뒤 보란 듯 그 약속을 지킨다. 이 책은 블라디미르가 쓴 자신의 첫사랑에 대한 회고록인 셈이다. 또한 실화에 입각한 저자 투르게네프의 자전적인 수기이기도 하다.

열여섯 살. 소년과 성인의 경계에 선 나이. 블라디미르는 첫사랑을 경험했다. 그 낯설지만 압도적인 이미지. 순간이 영원이 되는 것만 같았고, 기꺼이 한 여자의 노예가 되리라 다짐까지 하며,  멈춰진 시간 속에서 폭풍처럼 뛰는 심장을 움켜잡던, 그러나 어느새 덧없는 바람처럼 흘러가버린 나날들. 그에게 첫사랑은 열정의 시작이었고, 동시에 고통의 시작이었다. 풋풋한 감성으로 덧입혀진 것만 같은 기억 속에는 너무나도 아프고 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억들까지도 공존하고 있었다. 

세밀한 감정까지 기억해내며 노트에 옮기기까지의 두 주 동안 과연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처음에는 아마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어떤 불가항력적인 이끌림으로 폭풍 같은 기억 속으로 돌아가 다시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가슴 아파 울기도 하며 분노하기도 하고 자책도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흘러가버린 세월 앞에서 인생의 덧없음과 추억의 잔상이 전해주는 애잔함에 흠뻑 젖고는 다시 겨우 현실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아, 그 기억을 일일이 들춰내어 글로 옮기기까지 그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지나이다. 블라디미르의 첫사랑. 그녀는 스물한 살이었다. 갓 성인이 된 나이. 그와는 다섯 살 차이. 블라디미르의 마음을 단번에 앗아간 그녀는 그녀를 추종하는 여러 명의 성인 남자들의 마음을 주무르면서도 계속해서 자신을 숭배하게 할 만큼 영악하고 조숙한 여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소년이었던 블라디미르에게 지나이다는 성인들의 세상으로 진입하는 문이기도 했다. 그에게 첫사랑의 이미지는 이성을 향한 호기심이나 동경과도 같은 낭만으로만 채색되지 않았다. 그의 첫사랑은 소년에서 어른으로의 변화를 겪는 시기와도 겹쳐졌다. 이러한 면에서 블라디미르는 아마도 통 종잡을 수 없는, 마치 수수께끼와도 같았던 혼란스러움과 불안과 초조를 동반한 감정으로 그의 첫사랑을 기억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첫사랑 기억이 전혀 평범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결코 잊을 수 없을 충격적인 실체와 대면해야만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고인이 되어버린 지나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지나이다를 한창 숭배하던 그 불꽃 같던 시절, 블라디미르는 불현듯 그녀의 마음이 누군가를 향하고 있음을 눈치채게 된다. 그 사람이 자신이 아닐까 내심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이내 자신이 아님을 알게 된다. 자존심이 무척 상하기도 했으나, 본인이 생각해도 자신은 아직 소년이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블라디미르는 다행히 적어도 돈키호테는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여신과도 같았던 지나이다의 마음을 훔쳐간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게 된다. 가히 충격이었다. 어느 깜깜한 밤, 그녀의 창이 보이는 정원에 몰래 숨어있던 블라디미르는 갑작스런 아버지의 출현을 목격하게 되고, 당황하여 잠시 넋을 놓았다가 그녀의 방을 쳐다봤을 때 침실 안 불빛이 잠시 비쳤다가 커튼이 조심스럽게 창틀까지 내려지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사랑이란 거구나, 했다. 마침 누군가의 폭로로 아버지와 지나이다의 은밀한 관계가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자, 블라디미르는 왠지 모를 분노와 기사도 정신과 흥분이 마구잡이로 혼합되어 온전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충분히 버거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사를 감행하고 난 이후 다행히 블라디미르는 곁길로 새지 않고 원래대로 공부하여 대학까지 들어가게 된다. 그러다가 만난 지인 덕분에 몇 년 만에 지나이다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데, 결국 그는 그 기회를 일부러 놓쳐버리고 만다. 두려웠던 것이다. 용기가 안 났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며칠 뒤 들은 소식은 그녀가 아기를 낳다가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후회했다. 쉽게 잊혀질 후회가 아닌 영원한 후회가 되었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첫사랑의 풋풋함과 아픔의 공존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었다. 정도와 디테일은 다르겠지만, 누구에게나 있을 어수룩하고 부끄럽기만한 첫사랑의 기억. 할 수만 있다면 얼른 수정하고 싶은 마음이 돌연 들다가도, 그냥 그대로 놔두는 게 아름다움이라며 손을 절레절레 흔드는 건, 나도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탓일까.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040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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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채
A. J. 크로닌 지음, 구혜영 옮김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2003년 2월
평점 :
절판


THE CITADEL: 거대하고 견고한 구조적 악의 실체.

A. J. 크로닌 저, '성채'를 읽고.

이미 고전이 된 이 책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세세한 줄거리를 파악하거나 상투적인 교훈 따위를 끄집어내는 것은 그리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대신, 제목이 가진 의미를 곰곰이 따져 물으며 책 전체에 깔려 있는 저자의 메시지와 이 책이 쓰인 시대적 상황을 파악하는 편이 더 나은 방법일 것이다.

작은 글씨로 빼곡히 400 페이지를 메우고 있는 이 책에서 '성채'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본문은 단 세 군데다. 다음과 같다.

1. "...자네는 바빌론의 성채를 때려부수려는 거지. 나에게도 젊은 시절은 있었다네."
2.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인생이란 미지의 것에 대한 공격이며 격렬한 돌격전이라고 곧잘 말씀하시던 것 말이에요. 정상에 있는 것만을 생각하면서,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성채를 한사코 점령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당신은 그런 기백을 가지셨어요."
3. "이윽고 그가 발길을 돌려 시간에 늦지 않도록 급히 나가려 할 때 보니, 눈 앞의 하늘에서 성채의 흉벽 모양의 구름이 뭉글뭉글 밝게 떠올라 있었다."

성채. 영어로는 Citadel. Wikipedia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A citadel is the core fortified area of a town or city. It may be a castle, fortress, or fortified center." 즉, 우리가 디즈니 영화 앞부분에서 보는 것처럼, 아름다운 공주나 멋진 왕자가 살고, 하늘 위로 불꽃놀이가 펼쳐지며, 뾰족하고 높은 첨탑을 가진 '성 (castle)'과는 사뭇 다른 의미임을 알 수 있다. 낭만적인 상상보다는 오히려 현실적인 측면, 즉 방어를 위한 군사적 목적을 떠올려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의 원제도 'The Castle'이 아닌 'THE CITADEL'이다. '성채'보다는 '요새' 정도로 해석하는 편이, 비록 문학적 뉘앙스는 조금 떨어질지 모르나, 제목을 이해하기에는 좀 더 적절한 것 같다. 이를 조금 더 풀어서, '어떤 거대하고 견고한 벽 같은 존재', 혹은 '도저히 한 사람이나 소수의 힘으로는 무너뜨릴 수 없는 거대한 구조적 실체' 정도로 이해한다면, 적어도 이 책이 함의하는 바가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 앤드루 맨슨은 의사다. 저자인 A. J. 크로닌도 이 책을 쓰기 전 의사였다. 앤드루는 크로닌의 분신인 셈이다. 이는 이 책이 크로닌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그리고 이를 제목과 연결시켜 이해해본다면, '성채'는 아무래도 일반적인 의미라기보다는 의사의 눈에 비쳐진 '의사 사회의 구조적 악' 정도의 좁은 의미로 해석하는 편이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엔 훨씬 더 도움이 된다. 저자가 앤드루를 의사 자격을 갓 취득한 신참내기 의사로 등장시킨 이유 역시 '성채'의 거대함과 견고함을 더욱 강조하기 위한 장치라고 해석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그 당시 영국 의사 사회 내부의 보이지 않은 폐단을 고발하는 메시지를 과감하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앤드루는 성인이 되기 전 부모를 잃었다. 하지만 운 좋게, 빈곤하고 유망한 장학생에게만 지급되는 장학금을 (비록 의사 자격 취득 후 성실히 반환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있는 장학금이었지만) 받으며 의대까지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다혈질의 스코틀랜드 남성인 그에게는 여전히 의사로서 순수하고 선한 동기가 살아있었으며, 한 인간으로서의 양심과 정의감도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한 번도 때를 묻혀보지 않은 백지와도 같이 나이브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백지는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점점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장학금을 갚아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에 그는 남 웨일스의 벽촌, 블레넬리까지 일부러 찾아왔다. 의사 자격증을 딴 지 얼마 안 되는 조수로서는 최고의 보수를 받을 수 있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공식적인 의사로서 일을 시작하게 된 첫 도시, 블레넬리에서부터 앤드루는 '성채'의 그림자랄까, 꼬리랄까, 아무튼 혼자의 힘으로, 혹은 순수한 의사의 동기만으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거대한 구조적 폐단을 인지하게 된다. 하지만 블레넬리는 탄광 도시이자 벽촌 중 벽촌이었기에, 그가 느낀 성채는 시골 마을이면 의례히 가지는 보수성과 빈약한 시스템 정도로 충분히 해석할 여지가 있었다. 저자는 앤드루의 첫 직장을 블레넬리에 위치하게 했고, 마지막 직장을 런던 중심에 부유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에 위치하게 했는데, 이러한 순서는 앤드루가 블레넬리에서 인지한 '성채'가 시골만의 문제가 아닌 가장 번화하고 발달된 도시 한복판에서의 문제와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성채'의 규모는 문명의 발달이나 사람들의 경제와 지식 수준에 따라 차이가 날지는 모르나, 그 속성과 본질은 동일하다는 것이 작가 크로닌이 말하고 싶었던 중요한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자고로 악의 본질은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다. 

앤드루의 두 번째 직장은 애버라로라는 고장이었다. 여전히 시골 마을이었지만, 블레넬리보다는 규모가 크고 거주 인구도 많고 좀 더 번화한 곳이었다. 이곳에서도 앤드루는 또 다른 규모와 색깔의 '성채'와 맞닥뜨린다. 블레넬리와 애버라로에서 그가 공통적으로 대면한 '성채'의 속성은 돈과 권력이었다. 블레넬리에서 애버라로로 옮기게 된 이유도 앤드루의 금전적인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한편, 애버라로에서는 돈 뿐만이 아닌 학위, 즉 명예의 힘을 인지하게 된다. 덕분에 그는 산골에 처박힌 시골 의사 직으로부터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영국 의학회 회원증을 따낼 수 있었고, 블레넬리에서부터 순수한 동기로 심혈을 기울여 연구해 온 진애흡입에 관한 논문으로 의학박사 학위까지 따낼 수 있었다. '성채'의 진화는 그가 가졌던 백지의 진화도 유도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괜찮았다. 자고로 한 사람이 타락하기 직전의 위치는 일반적으로 높은 곳인데, 그 높은 곳에 아직은 기름칠이 덜 되어 있어서 미끄러지기 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이 미끄러워지기 위해선 불의와 위선과의 타협이라는 단계를 거쳐야만 했다. 저자 크로닌은 단계적으로 앤드루를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유인하고, 그 높은 곳을 스스로 기름칠하게 만들어 미끄러져 넘어지도록 작업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일터는 런던에 위치했다. 그의 박사 논문 덕에 정부의 전담 의무관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제 인맥까지 갖추기 시작했고, 지위는 물론 어느 정도 경제까지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에도 '성채'는 존재하고 있었다. 앤드루는 그곳에서 정부 관료 사회에 고여있던 폐단을 마주한다. 그리하여 표면상으로는 지극히 안정적으로 보이는 자리를 마다하고, 용기 내어 런던의 허름한 변두리 지역에서 개업을 한다. 그리고 그의 오랜 친구 햄프턴과의 만남이 재기된다. 햄프턴은 이미 닳고 닳은 불의한 의사 사회에 우뚝 서 있는 성채에서 대활약을 하며 배를 불리고 있는 인간이었다. 소설 속에서 끝까지 선과 정의의 편에 서서 앤드루를 사랑하고 응원해 마지 않던 천사 같은 아내 크리스틴이 가장 못마땅해 하고 경계했던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축복 뿐만이 아닌 재앙도 언제나 어떤 만남으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앤드루는 자신이 증오하고 기피했던 관료사회의 부패함, 즉 돈과 명예로 권력을 사들이고 불의한 일에 연루된 비슷한 사람들끼리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안전지대를 만들어 은밀히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부류 속으로 점점 물들어갔고, 그 열매로 그는 점점 성공가도를 달린다. 반면, 아내 크리스틴과의 관계는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다. 변해가는 남편의 모습에 아내는 적잖은 실망을 하면서도 끝까지 그를 사랑하고 믿어주었다. 아마도 아내마저 없었다면 앤드루는 파멸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아내의 기도가 이뤄진 것이었을까. 어느 날, 앤드루는 그가 스스로 선택한 불의의 현장에서 무고한 지인의 죽음을 방관하게 된다. 충분히 살 수 있는 환자였는데, 어처구니 없는 돌팔이 친구 외과의사의 짓으로 단 10분 만에 죽어버린 것이었다. 이 사건은 드디어 앤드루에게 양심에 가책을 가해왔다. 아니, 그건 벌써부터 왔었지만, 자신이 살인에 버금가는 짓을 저질렀다고 여겨지자 그는 그제서야 '제자리'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게 된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회심'은 곧장 아내 크리스틴에게로 돌아가는 길과도 같았다. 크리스틴은 기뻐했다. 그리고 그를 두 팔 벌려 맞아주었다. 둘은 물질적인 행복이 가져다 주는 족쇄로부터 비로소 해방 받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소설이 이렇게 끝나버리면 너무 소설 같은 법. 저자는 아내 크리스틴을 죽음으로 내몬다. 아마도 앤드루에게 죄값을 치르는 과정을 의도적으로 넣고자 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이 책엔 가톨릭 신앙이 녹아있다). 남편이 회심하여 집으로 돌아온 날, 기쁨에 못 이겨 허기진 남편을 위해 일부러 남편이 좋아하는 치즈를 사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비극이었다. 들것에 실려온 아내 크리스틴의 왼쪽 손가락에는 여전히 그가 좋아하는 치즈가 담긴 조그만 보퉁이의 끈이 휘감겨 있었다. '제자리'로 돌아오는 길이 이렇게도 커다란 희생을 치러야만 했던 것이었을까. 앤드루는 완전히 얻어 맞은 것처럼 한동안 실성한 듯한 상태가 된다.

소설에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메시지는 '성채'에 대한 고발이다. 작게는 그 당시 영국 의료 사회의 부패함을 적발하고 고발하는 것이겠고, 크게는 일반적인 구조적 악에 대한 고발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구조적 악의 핵심은 돈으로 산 권력이다. 이는 이 책이 첫 출판된 1937년 당시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성채'는 시간이 갈수록 고도로 진화를 거듭했다. 82년이 지난 2019년에 이 책을 처음 읽은 나는 오히려 거의 백 년 전에도 그렇게나 거대하고 견고한 구조적 악이 존재했음에 입을 쩍 벌릴 뿐이다.

한 인간의 백지와도 같은 순수함이 타락되어가는 과정, 그리고 회심으로 구원에 이르는 여정이 이 책에는 고스란히 담겨 있다. 누군가는 이 책을 읽고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의 상투적인 교훈 따위로 만족할 수도 있겠지만,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내 눈에는 작가 크로닌의 서사와 묘사의 전개 방식과 어떻게 핵심 메시지를 이야기 안으로 자연스레 스며들게 하는지를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 책을 소개해준 니콜 님에게 감사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969?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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