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열쇠
A. J. 크로닌 지음, 황관순 옮김 / 상서각(책동네)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천국의 열쇠’는 누구에게 주어질까?


A. J. 크로닌 저, ‘천국의 열쇠’를 읽고.

제목 ‘천국의 열쇠’는 ‘무엇’이 아닌 ‘누구에게’라고 읽어야 한다. ‘천국’이 무엇인지, ‘천국의 열쇠’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만약 그런 열쇠가 있다면 과연 누구에게 주어질지 독자 스스로가 진지하게 질문하도록 만드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신학이나 철학 책이 아닌 소설이기에, 스토리 이면에 감춰진 저자의 목소리는 문학만이 제공할 수 있는 특유의 다면체 모습을 통해, 저자와 전혀 다른 시공간을 살아가는 현재 우리들의 삶까지 닿아 공명을 일으키며 마침내 우리를 깊은 생각에 잠기도록 만든다. 

 

유념할 것은, 이 작품에 사용된 ‘천국’이란 단어가 단순히 가톨릭이나 개신교에서 말하는 ‘천국’ 혹은 ‘하나님 나라’와 같은 의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아닌 타 종교나 철학, 이를테면 불교에서 말하는 ‘피안’이나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현세를 등지는 듯한 장소를 떠올린다면 더 큰 왜곡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저자 크로닌이 말하고자 했던 천국은 종교적, 철학적 의미를 훌쩍 넘는다. 그것은 보다 넓고 풍성한 의미로써 개인의 종교관, 철학관을 넘어, 인간이라면 누구나 질문하고 사유할법한 ‘인간다움’이나 ‘바른 삶’과 같은 보편적인 의미를 아우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C. S. 루이스가 말했던 ‘도덕률’이나 존 바턴이 말했던 ‘자연법’ 등이 조화롭게 지켜지고, 구약 성서에서 강조되는 정의와 공의가 순조롭게 행해지는 세상, 사람답게 살만한 세상, 살고 싶은 세상을 떠올리는 편이 이 작품 속 ‘천국’의 이미지에 더 가까울 것이다. 

 

비록 작품 속 주인공이 가톨릭 신부이고, 저자 또한 기독교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이 작품이 종교와 민족과 시공간을 초월하여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가 된 이유도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은 인간이라면, 특히 중년을 거쳐 인생의 낮은 점과 높은 점을 두루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멈춰 서서 진지하게 자신과 삶을 돌아보고, 타자와 세상을 향한 자세를 점검해볼 수 있을 것이며, ‘보다 나은 인간’과 ‘보다 나은 세상’을 마음속에 그려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독자들은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 안에 내재된 신학자와 철학자의 영혼이 마침내 깨어나는 순간을 잠시나마 마주하게 될 것이다.

줄거리를 요약하는 방법보다는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숨겨진 두 가지 중요한 대립 구도를 하나씩 살펴보며 이 글을 풀어볼까 한다. 궁극적인 질문은 앞서 언급했듯이 “천국의 열쇠는 과연 누구에게 주어지는가?”이며, 내가 해석한 두 가지 포인트는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으로써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의 고민에 작은 길잡이가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저자가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적으로 등장시키는 두 인물이 있는데, 이들을 간단하게나마 소개해야겠다. 먼저, 주인공 프랜치스 치셤.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인물 안셀모 밀리. 이 둘은 어릴 적부터 친구로서 같이 자랐으며, 같은 가톨릭 신학교에 다녔고, 같이 사제가 되었다. 작품의 마지막, 그러니까 그들이 너무나 상반된 삶을 살아낸 후 나이가 일흔이 넘을 무렵까지, 저자는 그들의 전 인생을 통해 두 사람을 끊임없이 (그러나 조용히) 대비시킨다. 어쩌면, 비약이 있겠지만, 내가 파악한 이 작품의 주요 질문은 이 두 사람을 향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천국의 열쇠는 과연 프랜치스 치셤에게 주어질까, 아니면 안셀모 밀리에게 주어질까?”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두 가지 대립 구도 중 첫 번째는 이 두 사람의 대비와 같은 맥락에 있다.

1. 위엄, 품위, 권위 vs. 겸손, 소박함, 진정성

안셀모 밀리와 프랜치스 치셤은 모두 가톨릭 신부로서 평생을 살았다. 같은 고향, 같은 신학교, 그리고 같이 신부가 된 이후 같은 성당에서 함께 일하기도 했던 그들에겐 표면상 성직자로서의 동일한 기회가 주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삶은 너무나도 달랐다. 두 사람의 삶은 마치 출발점은 같으나 각도가 달라 갈수록 벌어지는 두 수직선처럼, 생애 마지막까지 둘의 차이는 점점 커져만 갔다. 안셀모 밀리는 제1보좌신부, 교구 해외 선교단 비서, 주교좌 성당의 참사위원, 그리고 가톨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직분 중 하나인 주교 자리까지 단 한 번의 뒷걸음질도 없이 승승장구하며 오른, 위엄과 품위를 갖춘 성공한 신부의 표본을 보여주었다. 반면, 프랜치스 치셤은 신학생 시절부터 엉뚱한(?) 문제를 일으켜 여러 위기에 처하는 등 남들과 사뭇 다른 가치관으로 인해, 전통적인 (그러나 판에 박힌) 신앙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순응하는 여느 신학생들이나 신부들의 아니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어딘가 처음부터 빗나간 화살처럼 보였던 것이다. 

사실 그는 안셀모 밀리와는 달리 신부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어릴 적 심하게 비 내리던 어느 날 사랑하는 부모님을 한꺼번에 사고로 여읜 사건과, 마음속으로 사랑했던 노라의 비극적인 자살은 그로 하여금 고뇌 그 자체인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하늘의 성약을 받아들이기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치기로, 무슨 일이 있어도 사제가 되기로 결심을 굳히게 만들었다. 태어날 때부터 신앙심이 두터운 유복한 집안에서 외아들로 태어나고 자랐으며, 어릴 적부터 신학교에 가기로 결정되어, 가족과 스승 할 것 없이 주위 모든 사람들로부터 축복을 한 몸에 받으며 아무런 어려움 없이 성직의 길을 탄탄대로로 달려온 안셀모와는 시작부터가 달랐던 것이다. 프랜치스는 외모 또한 작고 바짝 말라 볼품없었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한심스럽게 쳐다보거나 불쌍하게 생각했다. 그들의 눈에는 프랜치스가 괴짜 내지는 무가치한 존재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진짜를 알아보는 눈은 언제나 소수이지만 존재하는 법. 프랜치스와 안셀모가 다녔던 신학교의 교장이자 나중엔 주교의 자리까지 지낸 맥납 신부는 프랜치스의 진가를 일찍부터 알아보았다. 산 모랄레스 신학교에서 4일간 꼬박 자취를 감춰 퇴학당할 위기에 처했던 프랜치스를 구해주고 보호해준 사람도 맥납 신부였다. 그는 프랜치스를 어린애 같은 단순성과 논리적인 솔직함과 진지함이 묘하게 혼합된 보기 드문 사람으로 평가했다. 또한, 전통적이지만 참된 의미를 상실하여 껍데기만 남은 신앙 규칙의 상투성에 환멸을 느낀 프랜치스를 제대로 손봐줘야겠다고 맘먹은 타란트 신부와는 달리, 맥납 신부는 같은 상황 같은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다. 그가 프랜치스를 중국 선교사로 파송하기 직전 여러 오해와 좌절에 빠져있던 프랜치스에게 했던 말은 다음과 같다. 우린 여기서 정통이라는 허울 안에 갇혀 말라가는 내실을 가진 성직 체계 내에도 비록 소수이지만 여전히 진정성을 가지고 존경받아 마땅한 겸손한 성직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어쨌든 자네는 뻔한 규칙을 보물처럼 지키는 자네의 동료들과 잘해 나가지 못하더라도 역시 교회 안에 속한 인물이야. 자네는 실패하기는커녕 대단한 성공을 거두고 있어. 자네는 흔히 있는 교회의 잡화상은 아니야. 그 무엇이든 모두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기 편리하게 간단한 봉투에 넣어 버리거나, 가볍게 정리해 버리는 그런 따위가 아냐. 게다가 자네의 가장 좋은 점은 말이야. 프랜치스, 신앙이라기보다는 교리에서 생기는 거만스러운 면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일세.”

이후 프랜치스는 평생 같은 스코틀랜드 출신인 맥납 신부를 마음속에서 잊지 못한다. 아마도 그가 가장 존경했고 따르고 싶었던 진정한 스승이자 성직자의 모습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맥납 신부라는 존재가 프랜치스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지 못했다면, 아마도 프랜치스는 여러 환난을 만났을 때 혼자 힘으로는 버거워 무너져 버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단 한 명이라도 자신의 중심을 알아봐 주고 진심이 통하는 사람을 가졌다는 사실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 중 축복일 것이다.

이에 반해, 안셀모 밀리는 언변과 수완이 훌륭하고 겉으로 비친 성품 또한 나무랄 데 없어서, 윗사람 아랫사람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았으며, 예민한 눈으로 위로 올라갈 기회가 포착되면 절대 놓치지 않는 빈틈없는 사람이었다. 저자 크로닌은 안셀모의 숨겨진 인간성을 한 번도 책에서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저자의 의도에서 현실 경험에서 우러난 삶의 지혜를 엿본다. 잘 포장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몰락한다거나 보기 좋게 당하는 일 따윈 현실세계에서는 좀처럼 일어나기 힘들다는 사실을 저자는 안셀모라는 가상인물을 통해 넌지시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악인은 일반적으로 끝까지 승승장구하고, 의인은 끝까지 비참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다. 권성징악의 기적적인 플롯은 어지간해선 동화 속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며, 평균 수명 80세인 인간의 한 세대에서 일어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닌 것이다. 이 작품 속에서도 안셀모의 승리와 프랜치스의 실패는 (물론 표면적이지만) 깊숙한 중심을 보지 못하는 인간의 눈에는 보란 듯 현저한 차이를 낸다. 이는 우리가 천국의 열쇠가 누구에게 주어질지, 과연 누가 의인이고 누가 악인인지, 안셀모와 프랜치스의 평생을 관찰하고 나서도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직접적인 묘사 대신 저자는 안셀모의 말과 행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가 어떤 중심을 가진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마침 페스트로 홍역을 치르고 기적적으로 챠 씨의 도움을 받아 지었던 성당이 홍수로 인해 무너져버려서 프랜치스가 극심한 어려움에 처해있을 무렵, 안셀모가 중국 파이탄으로 프랜치스를 방문한다. 그는 해외 선교단 비서로서 해외 순방을 하던 차에 업무상 중국을 찾은 것이었다. 그는 보고할 사항들을 일주일 간 관찰하고 떠나기 전 프랜치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프랜치스는 성당 재건을 위해 심각한 고민과 좌절에 빠져있던 찰나였다. 

“자네가 상류계급의 호상들과 조금만 더 친밀해지도록 노력했다면 아무 걱정도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네. 자네 친구인 챠 씨만이라도 신자로 만들었다면 얼마나 좋겠나?...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이 곳 본당 현황에 난 몹시 실망했네. 예를 들어, 이 곳의 개종률은 다른 곳과는 비교도 안 되게 현저히 떨어지지 않나. 본부에는 각 지역의 전교율이 모두 그래프에 정확히 나타나 있는데, 자네 본당의 성적이 제일 나쁘다네. … 전교회장을 두게나. 다른 본당에서는 으레 다 두고 있지 않나? 한 달에 40냥씩 주고 세 사람만 두어 보게. 천 명을 영세시키는 데 중국 돈으로 단돈 1천5백 달러밖에 안 든다는 계산이 나오네. … 자네 생활도 지나치게 가난하네. 가난한 백성들에게는 어느 정도 위엄을 보이는 것이 필요하다네. 가마나 하인도 두게. 겉치레도 좀 해야 하는 거야.”

그리고 그는 언제나처럼 “자네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겠네. 자네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있기를”이라며 마지막 말만 남기고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채 가마를 타고 떠나버렸다. 안셀모가 어떤 사람인지 단박에 눈치챌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한다. 그는 언제나 프랜치스를 위해 기도한다고 말했지만, 과연 그가 무엇을 기도했는지 나로선 도저히 모르겠다. 안셀모로부터 나는 허영과 가식, 거짓과 위선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쨌거나 안셀모는 자신이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모든 사람들에게 각인시켰으며, 그의 풍채에서 묻어나는 품위와 위엄은 그가 가진 권위가 마치 좋은 신앙의 열매라거나 하느님의 축복임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했다. 프랜치스는 그게 늘 불편했다. 그러나 언제나 눈 앞에 벌어진 자신의 처참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안셀모로 대변되는 신앙의 모습이 차마 거짓이라거나 잘못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었다. 프랜치스야말로 늘 실패의 연속을 달리는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 모든 게 다른 사람들과 다른 자신만의 신앙 때문인지, 그래서 처참한 상황을 계속 맞이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으로 파견되어 프랜치스와 처음 만날 때부터 갈등을 빚어왔던 베로니카 원장 수녀는 페스트 한가운데 어려움에 처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온몸을 바쳐 헌신했던 프랜치스가 안셀모로부터 굴욕적인 말을 듣는 모습을 보고는 결단을 하고 용기를 내어 그에게 다가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나는 이 고백을 읽고 속에서 맺혔던 응어리가 풀리는듯한 기분이었다.

“제가 신부님께 너무 나빴어요. 처음 뵈었을 때부터 빗나가 버렸기 때문에 잘못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오만이라는 악마 때문이에요. 어렸을 때도 화가 나면 유모의 얼굴에 물건을 내던지는 심한 짓을 하곤 했지요. 그때부터 오만은 제게서 떠나지를 못했어요. 벌써 몇 주일 전부터 신부님께 이런 사죄 말씀을 드려야 한다고 결심하고 있었지만, 오만과 고집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어요. 요즈음 더욱 괴로웠어요. 신부님의 구두끈도 풀 자격이 없는 천하고 속된 인간으로부터 신부님이 받은 경멸과 굴욕감은 저 자신도 참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제 자신이 더욱 미워질 뿐이에요. 저를 용서하세요. 저는 지금까지 누구를 존경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너무나 아름답고 고결한 영혼을 가지신 분입니다. 신부님을 힘껏 도와드리겠어요. 우선 오빠에게 편지를 하겠어요. 오빠에게 이 곳에 성당을 세워 달라고 부탁하겠어요. 오빠는 굉장한 부자예요. 성당을 세우는 것쯤 아무것도 아녜요. 오히려 기뻐할 거예요. 신부님께서 저를 도와주신다는 것을… 오만을 겸손으로 바꿔 놓으신 것을 알면…”

진정성이 깃든 소박하고 거짓 없고 겸손한 행동은 느리지만 언제나 소수의 누군가에겐 귀감이 되는 법이고, 철벽같이 막혔던 마음의 담을 강한 바람이 아닌 따뜻한 햇빛의 힘으로 허물고, 오만을 겸손으로 바꿔놓고야 마는 힘을 지니는 것이다. 자, 어떤가. 만약 천국의 열쇠가 있다면, 품위와 위엄과 권위를 가진 안셀모와 겸손과 소박함과 진정성을 갖춘 프랜치스, 이 둘 중 누구에게 주어질 거라고 생각하는가. 

2. 배타성, 박대 vs. 포용성, 환대

프랜치스의 생애 첫 비극은 부모님의 죽음이다. 이 책의 기본 뼈대는 약 40년 중국 선교를 마치고 일흔이 넘어 노쇠해진 몸으로 고향에 돌아와 노신부가 된 프랜치스의 회고다. 그가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릴 때 처음으로 등장하는 큰 사건도 부모님의 죽음이다. 이는 프랜치스로 하여금 신부가 되길 마음먹게 하는 첫 번째 강한 동기가 되어주기도 했지만, 부모님의 죽음 이면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그 당시 스코틀랜드에서 잦았던 기독교 장로교파와 가톨릭 사이의 분쟁이 바로 그것이다. 


어느 봄날, 가난했지만 모처럼 음악회에 참석하고 싶어 하는 어머니와 어린 프랜치스는 아버지가 일을 끝내고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이었고, 와야 할 시간에 오지 않는 아버지를 찾으러 프랜치스의 어머니는 불길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프랜치스와 함께 집을 나선다. 이윽고 근처 오두막 안에서 술주정꾼 샘 멀리스의 형편없는 간호를 받으며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채 누워 있는 아버지를 발견하게 된다. 샘의 말을 들어보니, 아버지가 일을 보러 갔던 ‘에탈’이라는 곳에서 장로교파들의 가차 없는 탄압에 상처를 크게 입은 것이었다. 어머니는 놀란 가슴을 애써 달래며 아버지를 어서 따뜻한 집으로 데려가서 의사의 진찰을 받게 해야겠다는 결단을 내린다. 프랜치스를 먼저 돌려보내며 의사를 부르라고 명령한 뒤 아버지를 부축하고 빗속으로 나간다. 둘러 가는 길이 안전하긴 했지만 시간이 촉박하다는 생각에 무리를 해서 지름길을 택한다. 그런데 그게 실수였다. 트위드 강을 건너야 했는데, 이미 물이 많이 불어나 있었고 물살이 강했던 것이다. 성하지 못한 몸으로 버티던 아버지는 순간적으로 미끄러졌고, 아버지를 구하려 반사적으로 어머니가 아버지를 꽉 붙잡는 순간, 그만 난간의 로프를 놓쳐 버리고 만다. 그날 밤 프랜치스는 밤새도록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다렸지만, 끝내 두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프랜치스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제각기 믿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일까? 똑같은 하나님을 제각기 다른 말로 사용하여 예배한다 해서 왜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프랜치스에게 있어서 그것은 온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은 수수께끼였다. 그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 시절부터 종교 간 탄압을 목격했으며, 그 불행한 시대의 희생자였던 것이다. 그것도 다른 신을 믿는 종교끼리의 분쟁이 아닌, 같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믿는 기독교라는 큰 우산 아래 있던 가톨릭과 개신교 장로교파 사이의 분쟁이었다는 점은 아마도 프랜치스에겐 평생 마음속에 응어리로 맺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프랜치스에게 남다른 신앙관을 가져다준 중요한 기억으로 자리 잡게 된다.  

또 한 가지 그의 신앙관을 형성하게 만든 사건은 합리적인 불신자 가정의 친구 윌리 탈록의 집을 방문했을 때 벌어진다. 덜컥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버린 프랜치스를 맡아서 키운 집 (이 집도 형식적으로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으로 그려진다)에서 차별과 학대를 받다가 처음으로 느껴본 가족의 평화를 교회나 믿는 가정이 아닌 철저한 불신자의 가정에서 맛보게 되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 윌리 탈록의 집에는 그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이 집 사람들이 왜 이렇게 상냥하고 행복하며, 만족스럽게 보이는가 하는 것이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무시하는 것 같은, 아무런 신앙마저도 갖지 않은 합리주의자에게 교육된 이 집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에 처해져야 하고, 지옥의 불길이 이미 그 발목을 핥고 있어야 할 터인데…|

저자 크로닌은 종교 간 분쟁을 넘어 무신론자 가정에서도 평화가 깃들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여기서의 방점은 물론 신을 믿든 안 믿든 평화와는 아무 상관없다는 메시지가 아니라, 형식적이고 타성에 젖은 종교라는 울타리 안에 썩어가는 거짓된 거룩함과 위선이 만연한 삶을 꼬집는 것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겉으로만 번지르르한 종교의 옷을 입었으나 삶으로 번역되지 않는 신앙 따윈 천국과는 상관 없다는 메시지를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참고로 윌리 탈록은 나이가 들어 아버지의 직업을 따라 의사가 되었고, 아버지처럼 철저한 무신론자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는 의사로서 언제나 맘만 먹으면 충분히 취할 수 있었던 돈과 명예를 좇지 않고, 그 어떤 기독교인보다도 가난하고 소외되고 억눌린 자들의 건강을 위해 헌신을 했다. 중국에서 페스트로 허다한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직접 중국까지 날아와 프랜치스를 도운 사람도 바로 그였다. 그리고 그는 페스트로 중국 땅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 마지막 순간 프랜치스는 윌리 탈록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다음과 같다. 끝까지 신의 존재를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윌리의 말에 답변하는 장면이다.

“하나님 쪽에서 자네를 알고 있네. 인간의 괴로움은 모두 회개의 행위라네.”

그리고 이 장면을 가만히 옆에서 지켜보던 베로니카 원장 수녀가 그렇잖아도 맘에 들지 않던 프랜치스와 나눈 대화는 다음과 같다.

베로니카: “그분은 가톨릭 신자도 아니고,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은 분이 아니었습니까?”
프랜치스: “당신이 말하는 그리스도교도란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7일 중에 하루만 교회에 나가고 나머지 6일은 거짓말도 하고, 중상모략으로 남을 속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겁니까? 탈록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남을 돕다가 죽어갔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처럼.”
베로니카: “그분은 자유사상가였어요.”
프랜치스: “베로니카 수녀님, 그리스도께서는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위험한 자유사상가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죽임을 당하셨던 겁니다.”
베로니카: “감히 그런 비교를 하다니. 불경이 지나치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

프랜치스: “확고한 신앙만 지니고 있다면 누구든지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렇습니다. 불교도이든, 회교도이든, 도교의 신봉자이든, 아니 선교사를 죽여 그 고기를 먹어 버렸다는 무지한 식인종까지도. 스스로가 돌아보아 가책이 없는 성실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구원을 받을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넓으신 사랑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최후의 심판 때에 신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사람을 보시더라도 절대로 진노의 채찍을 내리시진 않을 겁니다. 이런 말씀 정도는 하시겠죠. 보아라 나는 여기 있다. 네가 그토록 부정하려 했던 나와 천국이 여기 있다. 자 들어오너라.”

이 사건이 있은 이후, 앞에서 이미 언급했다시피 베로니카 수녀는 프랜치스에게 마음을 바꿔 먹게 되고 존경하게 된다. 프랜치스는 그녀가 평생 성직에 있으면서 처음으로 목격한, 예수를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도무지 이상적으로만 존재할 그런 사람을 머나먼 이국 땅에서, 그것도 볼품없는 외모에 품위, 위엄, 권위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평신부에게서 그녀는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보았던 것이다. 말과 결단으로만 머물던 신앙이 아닌 몸으로 체화한 신앙을 보고서 그 진정성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프랜치스의 말에서 기독론이나 구원론을 들먹이거나 정통주의인지 자유주의인지를 판단하려고 시도하는 건 의미 없는 일일 것이다. 나는 프랜치스의 태도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환대’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간이 흘러 프랜치스가 일하는 성당과 지척에 위치한 곳에 미국 감리교단의 개신교회가 화려한 건물을 자랑하며 생기게 되는데, 프랜치스는 이런 상황에서도, 어릴 적 부모를 잃었던 그 기억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 담임인 피스크 목사와 절친이 되고 서로의 신학을 존중하게 된다. 책의 마지막에서 피스크 목사는 순교를 당하게 되는데, 프랜치스와 함께 죽음 앞에서 그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극심한 고문과 죽음이 눈 앞에 와 있는 상황에서 가톨릭인지 개신교인지가 과연 무슨 문제일까 생각하면 종교 간 분쟁은 한낱 우스개 거리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프랜치스는 부모가 넘지 못했던 개신교도와의 분쟁을 넘어섰고, 그것을 품었다. 그들을 배타적으로 배제하고 박대하지 않고 포용하며 환대로 맞이했던 것이다. 

프랜치스의 신앙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를 ‘환대’라고 생각할 때, 이것은 현재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나에게도 강한 울림을 준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타종교인들이나 무신론자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혹시 나는 기독교의 그릇된 배타성을 그리스도인의 참된 정체성으로 착각한 채 그들을 차별, 배제, 혐오하진 않았을까. 거짓 신이나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빌미로 삼아 그들의 삶까지도 모두 부정해오고 있진 않았을까. 그렇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란 어떤 것일까. 내가 믿는 교단을 제외한 모든 교단과 모든 종교는 전부 사탄의 노리개이거나 지옥에 떨어질 존재들일까. 과연 그 배타적인 믿음이 예수의 복음을 반영하는 것일까. 이방인을 위해 일부러 곡식도 남기곤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화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타자를 박대한다고 해서 과연 우리의 순수한 신앙을 지킬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의 그 순수한 신앙이라는 것이 겨우 남을 제거해야지만 지켜낼 수 있는 수준밖에 안 된다는 것인가. 프랜치스의 삶은 이러한 수많은 질문들에 한 가지 빛을 비춰주는 것 같다. 환대라는 단어로써 말이다.

이제까지 두 가지 대립 구도를 통해 이 책을 해석해 보았다. 이 글을 읽기 전과 읽은 후 처음에 내가 던졌던 질문은 조금 다르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처음 가졌던 생각이 더욱 힘을 얻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처음과는 전혀 다른 답으로 생각이 옮겨갔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신학 책이 아닌 소설이 가진 힘이다. 열린 결말, 열린 답. 우리는 문학작품을 통해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으며, 생각지도 못했던 깊은 깨달음과 치유를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자, 어떻게 생각하는가. 천국의 열쇠는 과연 어떤 사람에게 주어질 거라고 생각하는가.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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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 열린책들 세계문학 116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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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된, 그리고 이율배반적인.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분신’을 읽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읽다 보면 등장인물들이 내뿜는 장광설에 휘말려 수백 페이지를 거뜬히 넘기는 활자들의 바닷속에서 길을 잃기 십상이다. 말로만 듣던 도스토예프스키를 어디 한 번 읽어보겠노라고 굳게 다짐까지 했던 많은 독자들이 여러 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책을 덮게 되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장광설 때문일 것이다. 마치 전혀 뜻하지 않은 시공간에서 엉뚱한 적을 만나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처참하게 패배하고 만 것 같은 당혹감이랄까. 여기가 어딘지, 이건 누가 말하고 있는 것인지, 나는 도대체 무엇을 읽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딴소리들의 향연은 끝도 보이지 않는 파도가 되어 어느새 독자들을 덮쳐온다.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는다는 것은 여태껏 그 어느 작가도 데려가지 않았던 당혹감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일지도 모른다. 

불행하게도, 도스토예프스키가 선사하는 당혹감은 장광설 말고도 하나 더 있다. 인간의 이율배반성, 그것을 날것 그대로, 때론 기괴하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등장인물들의 독백, 대화, 행동이 바로 그것이다. 저 위대한 망치의 철학자 니체도 무언가를 배울 수 있었던 단 한 사람의 심리학자로서 도스토예프스키를 꼽을 만큼, 도스토예프스키의 심리 묘사는 탁월하다는 말조차 무색하게 만들 정도인데, 이는 인간 심리의 입체성을 소설이라는 장치를 통해 현실보다 더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입체성이란 곧 인간의 분열된 의식과 이율배반성에 기반을 둔다.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착한 놈, 나쁜 놈의 평면적인 구분, 혹은 선과 악의 선형적이고 이분법적인 대립 따윈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인간은 사실 선하기도 하면서 악하기도 하고, 열등감과 자기 비하에 빠져 있다가도 어느새 오만하고 이기적인 자기애에 심취하기도 하며,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다가도 갑자기 호연한 대장부가 되어 스스로 자기 안의 심리적 붕괴를 극복해내곤 하는 유일한 존재자이지 않은가. 도스토예프스키를 한 번도 읽지 않은 사람은 많아도, 한 번만 읽은 사람은 없다는 말은 아마도 도스토예프스키만의 독특한 세계에서 두드러지는 의식의 분열과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심리에 독자들이 깊게 공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두 번째 소설이다. 그를 화려하게 작가로 등단시켜준 첫 번째 소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벨린스끼는 이 두 번째 소설 ‘분신’에 대해서는 혹평을 남겼기로 유명하다. 안타깝게도 도스토예프스키 스스로는 이 작품이야말로 자기를 유명한 작가의 반열에 들게 해 줄 거라고 확신에 찬 기대까지 가졌었지만 말이다. 과연 이 소설은 어떤 작품이길래 두 세기가 지나는 오늘날까지도 어쩌면 불명예라 여겨질 수도 있는 이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는 것이며, 어째서 그런 오점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사람들에게 계속 읽히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앞서 언급한 두 번째 당혹감에 있다. 이율배반성과 의식의 분열. 이 작품은 이 두 가지가 본격적으로 등장인물을 통해 발현되기 시작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첫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가난한 사람들’에서도 남자 주인공 마까르 제부쉬낀을 통해 그런 모습을 간간히 보여주기도 했었지만, 작품의 중심축을 이룰 만큼 중요한 무게를 가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분신’이라는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분열된 자아와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심리가, 환상이 환상인지도 모를 만큼 심각한 정신병에 걸린 주인공을 등장시키면서 리얼하게 드러난다. 

헤세를 읽어내는 키워드는 아무래도 자아의 발견과 성찰, 성장과 성숙이라 할 수 있다. 헤세는 작품들을 통해 분열된 자아를 자주 선보인다. 가령, ‘황야의 늑대’, ‘페터 카멘친트’, ‘싯다르타’에서는 자아가 두 개로 분열하여 한 인물 안에 공존하면서 변증법적인 성장을 이루고 있으며, ‘수레바퀴 밑에’, ‘게르트루트’, ‘데미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는 이미 분열된 두 개의 자아가 독립된 두 인물로 등장하여 갈등과 대립을 통해 합일을 지향한다. ‘합일성’이야말로 헤세의 모든 작품에 걸친 그의 사상을 한 번에 정리해주는 단어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헤세가 ‘분열’이라는, 자칫 부정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개념을 작품 속에서 사용하는 이유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헤세에게 있어 모든 분열은 온갖 시련과 고뇌를 통해 결국 하나로 합쳐지는 ‘합일성’을 향한 과정, 혹은 발판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이 작품 ‘분신’에서 나타나는 분열의 방향은 결국 정신병원을 향한다. 헤세에게 있어서 ‘합일’을 위한 수단 혹은 과정으로 사용되었던 ‘분열’이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더 심화되어 ‘자기 파괴’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헤세의 해피엔딩이 도스토예프스키 버전에서는 새드엔딩으로 나타난다고나 할까. 두 위대한 작가 모두 인간 심리를 파헤치고 심연을 들여다본 번뜩이는 통찰을 우리에게 선보이지만, 이토록 그 끝이 다른 것은 두 작가의 작품을 읽어내는 말 못 할 즐거움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단, 생각 같아선 성인이 되기 전의 독자들에겐 도스토예프스키보다는 헤세를 권하는 게 건전하지 않을까 싶다. 그들은 도스토예프스키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아직 덜 되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플롯은 아주 간단하다. 첫 작품 ‘가난한 사람들’과 비슷한 분량으로 약 250 페이지 정도밖에 되지 않는 중편소설이라 분류할 수 있다. 주요 등장인물은 단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는 9등 문관, 즉 하급관리 신분으로 살아가는 뻬뜨로비치 골랴드낀이라는 한 중년 남자다. 저자는 느닷없이 책의 앞부분에서 골랴드낀이 아침에 일어나 정신 산만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의사를 만나 그 앞에서 쭈뼛쭈뼛하며 한 문장도 제대로 속 시원하게 내뱉지 못하는 답답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책을 다 읽고 난 이후 다시 그 돌아가 보면 그 장면의 의미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작품의 초반부터 주인공은 뭔가 이상한 증상을 보여주다가, 작품이 진행되면서 그 증상이 점점 심해지고, 작품의 끝에선 주위 사람들에 의해 강제로 정신병원으로 수송되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것을 보아 우리의 주인공 골랴드낀은 정신병자였음을 비로소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와 모든 면에서 너무도 똑같은 인물, 즉 그의 ‘분신’이 등장하는 시점은 그의 정신병 증세가 기하급수적으로 심각해지는 계기로 이용된다. 끝내 골랴드낀은 환상까지 보게 되었던 것이다. 

작품 중간에서는 골랴드낀이 정신병자라고 추측만 할 수 있을뿐 확신은 가질 수가 없는데, 작품의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야 주인공이 정신병자라는 사실에 대해 확실히 알 수가 있다. 아마도 이 소설을 쓰면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점을 일부러 치밀하게 계획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벨린스끼를 비롯한 비평가들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공개하기 전 도스토예프스키는 마음을 졸이며 사람들을 소위 ‘예상치 못한 반전’으로 놀라게 해줄 수 있다는 생각에 혹시 들떠있지는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노라면 마음 한편에선 조금 안쓰러운 기분마저 든다. 물론 결국 나중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대작가로 자리매김을 했지만 말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미성숙한 (물론 이 ‘미성숙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내가 이미 그의 5대 장편소설을 포함하여 다른 작품 몇 편도 읽었기 때문이다. 즉, 그의 후기 작품들과 비교할 때만 사용할 수 있는 표현임을 밝혀둔다) 이 작품은 혹평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이 작품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그의 후기 작품들의 밑거름이 되었던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분열된 의식과 이율배반성은 그의 대표작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얼마나 탁월하게 묘사되어 있던가! 

누군가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어나가는 방법으로 작품들이 쓰인 시간 순을 따르기도 하지만, 나 같은 경우는 거의 반대로 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이 방법이 시간 순을 따르는 방법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진화과정을 더욱 선명하게 알아챌 수 있는 데 도움이 되지 않나 싶다. 다음에 읽을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도 벌써 책장에서 나를 기다린다. 질리지가 않는 도스토예프스키.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나의 선생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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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의 귀향 - 기독교, 이성, 낭만주의에 대한 알레고리적 옹호서
C. S. 루이스 지음, 홍종락 옮김 / 홍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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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후퇴가 전진이 되다.

 

C. S. 루이스 저, ‘순례자의 귀향’을 읽고.

 

이 책의 원제는 Pilgrim’s Regress. 저 유명한, 존 번연의 Pilgrim’s Progress (천로역정)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천로역정이 17세기 작품이라면, ‘순례자의 귀향’은 20세기 천로역정인 셈이다. 그것도 루이스의 향기가 짙게 배인 천로역정이다. 재미있게도 두 작품의 플롯은 흡사하지만 (당연하다. 루이스가 천로역정 플롯을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제목에 사용된 두 단어는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다. Progress가 ‘전진’을 뜻하는 반면, Regress는 ‘후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약 천국으로 가는 길이 직선 코스라고 가정한다면 (물론 천국은 어떤 특정한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천로역정은 상징으로 읽어야 한다. 알다시피 소설이다),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천은 여러 차례 곁길로 들어서서 뜻하지 않았던 위기를 만나게 된다. 가장 짧은 거리인 직선 코스가 존재함에도 인간의 나약함 때문에 불필요한 우회로를 거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항상 외부에서 주어진 누군가의 도움으로 그 위기를 벗어나 크리스천은 다시 제 길로 들어서며, 마침내 천국 문에 이른다.

 

이 작품의 주인공 존은 한술 더 뜬다. 서쪽의 섬 (갈망의 대상이자 천로역정의 천국과 같은 상징적 의미)을 향하여 길을 나선 존은 여러 환란을 겪다가 마침내 다다른 협곡 너머에서 어렴풋하게 보인 그 섬이 출발지 퓨리타니아에서 보았던 지주 (하나님을 상징한다)의 성이라 불렸던 동쪽 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설 속 세상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아니다. 여전히 둥글지만 훨씬 작은 세상이다. 존이 그 산을 마주하게 된 것은 그가 둥근 세상을 한 바퀴 돌았기 때문이었다. 종착지라고 생각했던 그 점이 출발지의 뒷면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존은 뒷면으로 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여태껏 왔던 길을 되돌아 가야만 했다. 말하자면, 후퇴다. Regress는 존의 모든 여정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단어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Regress는 Progress가 된 셈이다. 이 점이 루이스의 천로역정 (바로 이 책, 순례자의 귀향)이 존 번연의 천로역정과 아주 중요한 차이를 내는 부분일 것이다.

 

전진하지만 둘러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한 속성이 천로역정에서 상징적으로 잘 그려져 있다면, 전진한다고 믿었으나 결국 그것이 뒤로 가는 것이었고, 그 끝에서 제대로 된 사실을 깨달으며 회심을 경험한 뒤 새로운 눈을 뜨고 왔던 길을 되돌아 가면서 목적지에 다다르는 인간의 모습은 ‘순례자의 귀향’에서 도드라진다고 볼 수 있다. 한 방향성을 그린 천로역정의 Progress보다 완전히 반대되는 두 방향성을 담은 ‘순례자의 귀향’의 Regress가 가지는 의미는 독자들에게 의외로 깊은 메시지를 던져주는 것이다. 이 부분이 표현된 곳을 아래에 발췌해본다. (참고로 처음 존이 서쪽으로 향할 때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한 길동무의 이름은 ‘미덕’이었고, 가이드 없이 혼자 걸어갈 때가 많았지만, 협곡을 건너고 (회심을 한 뒤) 다시 동쪽으로 길을 되돌아갈 때는 ‘슬리키스타인사우가’라는 가이드가 계속 함께 했다. 아마도 그리스도인들이 익숙히 알고 있는 성령의 인도를 상징하는 존재가 아닌가 싶다.)

 

“되돌아가야 해요. 그게 앞으로 가는 길이에요. 유일한 경로는 다시 동쪽으로 가서 개울을 건너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Regress는 Progress가 되었다. 이 작품을 읽을 때 이 점을 유념해서 읽게 된다면, 아마 내가 느꼈던 심오함과 뜻밖의 감동을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 인간사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주지 않을까 한다. 되돌아가는 길이 앞으로 가는 길이라는 말. 그게 올바른 길을 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말.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작품은 루이스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도 여러 사람들과 장소의 이름이 상징적인 개념을 나타내어 (이를테면, 믿음, 우유부단, 고집, 질투, 자선, 굴욕의 계곡, 허영의 시장 등) 알레고리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은 자칫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유독 루이스의 이 작품에서는 그 상징적인 이름들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지기스문트 계몽’이라는 등장인물은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뜻하고, ‘마더 커크’는 교회를 상징하며, ‘차이트가이스트하임’은 시대정신을 의미하고, ‘놋스토’는 ‘쓸모없는 곳’을 뜻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은 천로역정과 비슷한 플롯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알레고리의 수준이 나 같은 일반인들이 읽어서는 무슨 뜻인지 알아채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작품 뒤에 붙은 ‘저자의 말’로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나는 이 작품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난해함은 이 작품이 루이스의 회심 후 단 2주 만에 일필휘지로 써진 책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많은 부분 용서가 되는 듯하다. 이 책의 번역자인 홍종락이 말한 대로, 루이스의 다른 모든 작품들은 어찌 보면 이 작품의 해제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홍종락이 추천한 것처럼, 루이스가 노년에 그의 회심기를 잘 담아놓은 작품 ‘예기치 못한 기쁨’을 함께 읽는다면, 이 작품의 배경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작품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 아니면 절대 채울 수 없는 갈망과 그 갈망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그리고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루이스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하기 때문이다.

 

루이스 읽기

1. 예기치 않은 기쁨: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098756400169131

2. 고통의 문제: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126994814011956

3. 헤아려 본 슬픔: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138735802837857

4.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471812539530180

5. 천국과 지옥의 이혼: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559914580719975

6. 순전한 기독교: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47418798636218

7. 시편 사색: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816749868369777

8. 순례자의 귀향: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747954605249294

#홍성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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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고 싶다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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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방법 이전에 자질.

 

제임스 설터 저, ‘소설을 쓰고 싶다면’을 읽고.

 

‘가벼운 나날’을 읽게 되었던 건 전적으로 신형철의 추천 때문이다. 약 2년 전부터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조금씩 틈나는 대로 읽어오면서 그가 쓴 꼭지 하나하나, 아니 문장 하나하나에 매료되기 시작했고, 어느새 나는 그의 글을 넘어 신형철이란 사람 자체를 신뢰하게 되었다. 진정성 있는 글은 한 번도 못 만나본 사람끼리의 신뢰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평소 누군가가 추천하는 책에 대해선 상당히 조심하는 편인데도, 그동안 조금씩 견고히 쌓여온 신뢰 덕분에 나는 그가 추천한 책 목록을 지나칠 수 없었다. 그중 하나가 제임스 설터의 ‘가벼운 나날’이었다. 그가 쓴 추천사를 읽고 나서 나는 반드시 이 작품을 읽어야겠다는 일종의 의무감을 느꼈고, 망설임 없이 실행에 옮겼다. 

 

나의 신뢰는 옳았고, 그 선택은 나의 독서 여정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비단 ‘가벼운 나날’이란 한 작품을 알게 된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내겐 제임스 설터라는 작가를 알게 된 사실이 중요했다. 2015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제임스 설터의 ‘뉴욕 타임스’ 부고 기사 제목이 “책은 적게 팔렸으나 찬사는 오래 이어진 작가의 작가 90세에 죽다”였다고 할 정도이니, 미국 현대 소설을 거론하면서 아마도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작가 중 하나가 바로 제임스 설터가 아닐까 한다. 비록 대중성에 있어서는 그리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고 할 수 있지만, ‘작가의 작가’라는 수식어는 아무한테나 부여하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나는 제임스 설터로부터 글쓰기에 대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었다.

 

한 작가에게 매료되어 본 사람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작가의 전 작품을 읽고 싶은 충동. 그것은 자연스레 하나의 계획으로 자리 잡고, 이미 잔뜩 쌓인 나의 독서 리스트에서도 당당히 상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 이후, ‘어젯밤’, ‘올 댓 이즈’, ‘그때 그곳에서’, ‘소설을 쓰고 싶다면’이 내 책장에 차곡차곡 들어왔고, 뭘 먼저 읽을까 하는 행복한 고민 끝에 나는 소설이 아닌 산문 ‘소설을 쓰고 싶다면’을 골랐다.

 

이 산문집을 고른 이유는 당연히 제목에 이끌려서다. 언제 한번 소설을 꼭 써야지 하는 생각을 여러 해 전부터 가지고 있던 터라, 마침 두 손 두 발 다 들게 만들었던, 거부할 수 없이 매력적인 문체의 작가가 쓴 ‘소설 쓰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흥분까지 했었다. 그러나 그건 나의 좁고 다분히 무식한, 동시에 정석 코스가 아니라 교묘한 샛길을 찾아 뭔가를 뚝딱 만들고 싶어 하는 얄량하고 가소로운 나의 욕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금세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소설 쓰는 방법을 알려주는 프로토콜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2014년, 그러니까 그가 사망하기 1년 전에, 89세의 나이로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세 차례에 걸려 강연한 내용을 한데 모은 책이다. 그리고 책의 나머지 절반 정도는 1993년에 ‘파리 리뷰’에서 했던 제임스 설터의 인터뷰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언급했다시피, 이 책은 자기 계발서 따위가 아니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사실 나는 누가 여러분에게 소설 쓰는 법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나는 오히려 실망은커녕 그에 대한 신뢰가 더 생겨버렸다. 숨은 샛길을 찾는 내가 부끄러워졌다.

 

그제야 제목이 이해되었다. 소설이 쓰고 싶다면 가져야 할 자질과 준비자세, 준비운동, 그리고 소설을 쓴다는 건 고된 작업일뿐더러 소설이 작가의 동반자로서 많은 시간을 항상 함께 한다는 사실, 그의 경험 등을 담담하게 이야기해주는 책이었던 것이다. 소설가가 가져야 할 자질로써 그는 두 가지를 크게 언급한다. 면밀하게 관찰할 줄 알기, 그리고 자기만의 고유한 문체를 가지기. 아직 내가 완독한 소설은 ‘가벼운 나날’밖에 없지만, 그 한 권만 봐도 이 두 가지는 충분히 검증이 가능하다. 내가 매료되었던 이유도 그의 일상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고유한 문체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퇴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좋은 글은 묵히고, 다시 꺼내어 들여다보고, 오래 달리기처럼 수없이 고치고 고치는 작업을 해야 탄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즉시 그가 쓴 절제된 문장들이 떠올랐고, 그것들이 오래 묵고 잘 정제된 열매임을 알게 되자마자 머리를 강하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가볍게 보였던 그 문장들이 전혀 가볍지 않았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한 번 더 겸허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자질은 비단 소설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문학이라는 더 큰 범주로 이해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여러 작가의 여러 작품을 읽어나간다는 건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나만의 즐거움이다. 헤세와 도스토예프스키, 카잔차키스와 같은 고전문학 작가들로부터 얻은 영감과 제임스 설터나 필립 로스와 같은 현대문학 작가의 문체가 한데 어우러져 나를 통과하며 부디 무언가 의미 있는 열매가 맺혀지길 바라마지 않는다. 

 

참고: 제임스 설터 저, '가벼운 나날':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601189163259183

 

#마음산책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65?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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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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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의 뒷모습.


미야모토 테루 저, ‘환상의 빛’을 읽고.

강렬한 잔상에 의지하여 급하게 써 내려가는 글도 나름대로의 매력을 지니지만, 그 거친 글을 묵히고 묵히면서 실 같은 잔상만이 남을 때까지 계속해서 수정을 가하며 만들어지는 글은 한층 더 깊이를 가지는 법이다. 원석이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발견된 뒤 거치는 숱한 정제 과정을 초고에서 퇴고로 진행되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 과정을 거쳐 탄생한 글은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다. 독자의 마음을 보다 깊숙이, 정확하게, 그리고 단번에 찌르기 때문이다. 살면서 그런 글들을 만난다는 건 값지고 멋진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좀처럼 당해내지 못하는 글은 한결같이 놀라운 절제력을 가진 글들이다. 절제의 미학이랄까. 급하게 찾아왔던 예기치 않은 기쁨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한꺼번에 몰아닥친 슬픔도 모두 정제 과정을 거치는 동안 거품이 빠지기 마련이다. 인간이란 기억하는 존재이고 또 무언가에 집착하거나 의지하는 존재이기에, 거품이 빠지는 지난한 과정은 다분히 견디는 시간으로 이뤄진다. 다행히 그 시간의 끝에 어떤 목적지가 있는 경우라면, 견뎌온 모든 시간을 기다림이라는 단어로 함축하여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견딤이 우리를 항상 목적지에 데려다 주지는 않는 법. 오래 참고 견디다가 그 길 위에서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우리 주위에는 엄연히 산재한다. 이는 우리가 언제나 인고의 쓴 시간이 아름답고 단 열매를 맺을 거라고 함부로 말해선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생 전체를 잠식시키는 슬픔은, 그리고 별안간 찾아와 우리가 그동안 힘들게 견뎌온 시간을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슬픔은 바로 그 견딤의 과정을 이루고 있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 흩어진 아주 작은 기억의 조각들, 그 기억과 기묘하게 연결되어 있는 어떤 뜻밖의 순간들을 만날 때 우리를 불청객처럼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신형철이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의 1부 ‘해석되지 않는 뒷모습’이라는 꼭지에서 다룬 작품이다. 100 페이지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중편 소설이지만, 이 작품은 인간의 내면을 깊숙이 침투하여 꽈리를 튼 지독한 슬픔을 이야기한다. 결혼하고 아기가 태어난 지 석 달밖에 되지 않았을 무렵, 작품 속 화자의 남편은 버럭 자살로 생을 마감해 버린다. 그렇다. 이 책은 남겨진 한 여자의 슬픈 독백이다. 

놀랍도록 절제된 화자의 목소리는 이미 죽은 남편에게 쏟아내는 독백 형태로 그려져 있다. 그녀는 이런 독백을 그동안 얼마나 많이 해왔는지 모른다. 다소곳한 말투, 깊은 슬픔의 바다에서 이미 어떤 선을 넘어서버린 한 사람의 이야기. 폭풍 같은 감정은 모두 사라졌지만 여전히 남은 상실과 슬픔의 잔물결이 영원한 삶의 친구가 되어버린 한 사람의 이야기. 힘을 뺄 대로 뺀 작가의 글은 문장 하나하나가 독자에게 의미 있는 생채기를 내는 듯하다. 마치 보슬비가 어느새 옷을 다 적시듯. 나는 평범하고 단조로워 보이는 문장들을 읽어나가다가도 문득 어떤 한 문장에 다다를 때면 무너졌다. 그러면 책을 잠시 덮고 심호흡을 하고 다시 읽어나가곤 했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새로운 남편과 그럭저럭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으면서, 죽어버린 전 남편에게 이렇게 열심히 말을 걸고 있는 자신을 참 불쾌한 여자라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습관 같은 것이 되어버리면 어느새 죽은 당신에게가 아니라.. 중략... 당신은 왜 그날 밤 치일 줄 뻔히 알면서 한신 전차 철로 위를 터벅터벅 걸어갔을까요…”

“저는 와지마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바깥에 시선을 둔 채 죽어버린 당신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만, 그 무렵에는 저 혼자가 되면 무의식적으로 당신에게 말을 거는 버릇이 생겨버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말을 거는 당신은, 선로를 걸어가는 뒷모습의 당신이었습니다.”

“결혼하고 첫아이를 낳은 지 세 달이 되었을 때 저는 이유도 알 수 없는 자살이라는 형태로 당신을 잃었습니다. 저는 그 후 허물처럼 살아왔습니다. 당신은 왜 자살을 했을까, 그 이유는 대체 뭐였을까…”

“그것은 아무리 힘껏 껴안아도 돌아다봐 주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뭘 물어도 무슨 말을 해도 절대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아아, 당신은 그냥 죽고 싶었을 뿐이었구나, 이유 같은 것은 전혀 없어, 당신은 그저 죽고 싶었을 뿐이야…”

신형철이 정확하게 짚은 대로, 작가가 이 작품에서 은연중 힘을 주고 있는 키워드 중 하나는 ‘뒷모습’이다. 그녀에게 계속해서 떠오르는 모습도 철로 위를 걸어가고 있는 남편의 뒷모습이다. 해석되지 않는 뒷모습. 그녀는 죽은 남편의 뒷모습을, 보지도 못했던 그 뒷모습을 떠올리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녀는 그 뒷모습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그녀는 죽은 남편과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 가난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채 그들은 결혼까지 했고 아이도 낳았다. 남편이 자살했던 그날 아침까지만 해도 아무런 이상한 점이 없었다. 심지어 남편은 그날 밤 일을 마치고 집 근처까지 와서 카페에 들러 커피까지 마셨다는 사실도 나중에 알게 된다. 그런데 다시 철로가 있는 곳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왜, 도대체 왜 남편은 자살을 감행했던 것일까. 

혹시 그녀는 답이 없는 이 질문의 연쇄 속에서 남편이 아닌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건 아니었을까, 하고 나는 조금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올해 여름 일주일 차이로 있는 나와 아내의 생일을 지나면서 혼자 이런 말을 떠올리며 블로그에 끄적거린 적이 있다. 

‘서로의 앞모습에서 세월의 흔적을 읽고, 서로의 뒷모습에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읽어낸다.’ 

부부는 보통 언제나 함께 있어, 서로가 나이 들어간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할 경우가 많지만, 어느 날 문득 배우자의 얼굴에서 그게 보일 때가 있다. 그러면 마음이 잠시 무너지면서 한없이 안쓰러움이 느껴진다. 사랑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에 반하여, 등을 돌리고 있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면 나는 종종 나의 부족함을 느낀다. ‘아, 이것밖에 해줄 수 없었던가. 더 잘해줄 수 없었던가’ 하며 나는 나의 미련함과 옹졸함과 가소로움 때문에 이내 부끄러워진다. 치장되지 않은 나의 민낯은 아내의 뒷모습에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짐하곤 했다. ‘좀 더 사랑하며 살아야지! 소중함을 알아채며 살아야지.’ 나는 아내의 뒷모습에서 아내를 본 게 아니라 나를 보았던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고 부족한 내 모습을… 하물며 자살로 멋대로 죽어버린 남편의 뒷모습이 살아남은 그녀에게는 얼마나 많은 말을 걸어왔을까, 하는 생각까지 이어지면 나는 할 말을 잃고 만다. 문득 두려워지기도 한다. 부부 중 누군가는 먼저 죽는 법인데, 나의 뒷모습이나 아내의 뒷모습이 언제나 남을 한 사람에게 슬픈 형상으로 남게 될까 봐. 그 뒷모습 때문에 이 작품 속의 주인공처럼 슬픔에 잠겨 살까 봐. 그러나 나는 이런 생각들에 지금은 저항하고 싶다. 아직은 사랑하는 사람이 뒷모습을 보이며 바라보았을지도 모를 환상의 빛을 떠올리고 싶진 않다. 대신 나에게 남은 인생을 좀 더 사랑하며 살기로 다시 다짐한다. 아내가 안고 싶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169?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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