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 톨스토이와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인생
석영중 지음 / 예담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희석된 감동, 농축된 이해: 톨스토이 삶의 맥락에서 재해석한 안나 카레니나와 그의 인생관과 도덕관.

석영중 저,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를 읽고.

작가의 필력이란 이런 걸 말하는구나, 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글. 이런 쉽지 않은 내용으로 이렇게 재미있게 글로 풀어낼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중간중간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여러 번 웃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부분에선 사뭇 진지해진 나머지 작가가 바라보는 톨스토이에 대한 연민이 생기기도 했으며, 대문호라는 간판의 어두운 그늘도 볼 수 있었다. 톨스토이라는 러시아 고전문학 작가와 그가 쓴 작품 여러 편을 다루면서 석영중은 톨스토이의 사상과 삶에 대해 고찰한다. 제목에서 ‘도덕에 미치다’라는 표현은 이 책을 절반 정도 읽게 될 즈음이면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 의미를, 그리고 거기에 아주 약간 냉소적인 뉘앙스가 담겨있다는 점까지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도덕에 미치다’라는 말은 너무나 도덕적이라서 본받고 배워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도가 지나치다고 표현할 수도 있고, 모순이나 반어법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단지 이 문장만 읽고는 무슨 말인가 싶기도 하겠지만, 석영중이 풀어나가는 글을 가만히 읽어나가게 된다면 아마 나처럼 그녀의 시선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톨스토이나 이 책이 주로 다루는 작품 ‘안나 카레니나’의 위대함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나간 석영중의 유쾌한 필력을 감상하는 용도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이 책의 목차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만 봐도 흥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부 ‘나쁜 삶’은 1장 ‘나쁜 사랑’, 2장 ‘나쁜 결혼과 아주 나쁜 결혼’, 3장 ‘좋은 결혼’으로, 2부 ‘좋은 삶’은 1장 ‘채소만 먹자’, 2장 ‘시골에서 살자’, 3장 ‘예술을 박멸하자’, 4장 ‘메멘토 모리’로 구성되어 있다. 톨스토이의 작품 ‘안나 카레니나’를 읽어본 독자라면 그렇지 않은 독자보다 훨씬 더 깊이 몰입하여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을 것이며, 읽는 속도 또한 증가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몇 달 전에 읽었던 그 작품을 상기하면서 작가의 해석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톨스토이 작품을 세 편밖에 읽지 못한 나로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톨스토이의 삶’이라는 전체 맥락으로부터 나온 해석 앞에선 가만히 멈춰 서서 귀를 기울이며 이전보다 더 깊고 풍성하게 작품 그 자체는 물론 톨스토이가 어떤 사람인지까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안나 카레니나’는 방대한 작품이지만 다루는 내용이 어려운 건 아니다. 사랑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고,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결혼 이야기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줄거리를 간단하게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유부녀 안나가 어느 날 우연히 만나게 된 브론스키라는 미혼 남자와 외도를 감행하게 되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정도가 될지도 모른다. 조금 경박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요컨대 줄거리 자체는 삼류 소설의 그것과 거의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물론 작품은 줄거리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같은 줄거리라도 그것을 전개해나가는 작가의 시선과 사상이 등장인물 안에서 어떻게 발현되게 설치해놨는지, 어떠한 서사 가운데 어떤 묘사를 혼합하여 크고 작은 그림을 그려나가는지, 어떻게 시대와 문화와 역사를 담아내어 작품이 평범하면서도 비범하게 보이도록 만들어나가는지에 바로 작가의 내공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내공은 비슷한 내공을 가진 사람에게만 제대로 관찰되고 마침내 저자의 메시지가 가능한 온전하게 전달되는 해석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독자가 제2의 저자라는 말이 있다고 하지만, 원 저자의 메시지를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은 채 독자 맘대로 해석해버리는 행위는 자유가 아닌 방종이라 해야 옳다. 이런 면에서 우린 석영중과 같은 러시아 문학 전문가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석영중은 ‘안나 카레니나’를 사랑 이야기나 결혼 이야기가 아닌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소설로 읽는다. 줄거리나 작품 그 자체보다는 저자라는 그 글의 근원을 먼저 조명한 뒤 다시 작품을 읽는 것이다. 나무 하나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극찬하는 것도 안 하는 것보다 언제나 좋지만, 전체 숲의 맥락을 인지한 뒤 나무를 살펴볼 때의 상이함을 인정하지 않을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이 책은 석영중이 ‘안나 카레니나’라는 작품을 대표로 하여 톨스토이의 인생관 혹은 도덕관을 살펴보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톨스토이의 인생은 그의 중년의 위기 (소위 ‘회심’) 이전과 이후로 나눠질 수 있다고 한다. 그 위기 이후에 쓴 대부분의 글은 무언가를 비난하고 촉구하는 글이었다. 석영중에 따르면, 톨스토이는 불륜, 사교계, 도시의 삶, 육식, 탐식, 흡연, 음주, 그리고 거의 모든 예술까지도 당당하게 비난했다고 한다. 당시 러시아 시대 정황을 살펴보면 그의 삶의 전환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전환기 이후에 자신의 모든 작품마저도 다 부인하고, 마치 설교자나 ‘톨스토이교’ 교주가 된 것처럼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한 자신만의 해법을 알리는데 열을 올리다가 덜컥 생을 마감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뭔가 석연치 않은 감정과 생각이 든다. 아무리 맞는 말이라도 그것이 이론만으로 들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 그의 화려한 삶의 이면이 슬퍼 보인다. 이에 대해서 석영중은 딱 잘라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이 책을 압축하는 문장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확실히 톨스토이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일리가 있다는 것이 진리는 아니다. 톨스토이의 비극은 여기에 있다. 그는 일리 있는 것을 진리라 믿고 싶어 했다. 부분적인 진실을 진리 그 자체라고 단정했다. 그는 진리를 사랑했고 자신이 진리를 발견했다고 믿었다. 세상을 하직하기 이전에 그가 인류에게 남긴 말 역시 ‘진리’라는 단어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톨스토이에 대한 연민이 생겼다. 그의 삶 전체를 훑어보지 않고 ‘고백록’을 읽었을 때 느꼈던 감동이 어느 정도 희석됨을 느낀다. 어떤 사실을 모르는 상태로 작품을 읽고 감동받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를 가질 수 있을 테지만, 아무래도 전체를 조명한 뒤 다시 돌아와 이전에 받았던 감동을 재해석하는 것은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많이 배웠다. 참 고마운 책이다.

**톨스토이 읽기.
1. 고백록: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487697067941727
2. 이반 일리치의 죽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562696140441819
3. 안나 카레니나: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851864358191651
4.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석영중 저):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362158683828880

#예담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250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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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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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대중성, 그리고 깊이와 무게.


히가시노 게이고 저, ‘용의자 X의 헌신’ 및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 중 두 편 (‘용의자 X의 헌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연달아 읽고 문학작품이 가지는 ‘대중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내 생각은 ‘깊이’와 ‘무게’라는 단어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어떻게 대중적인 작품을 쓸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선, ‘인간의 본성과 심리를 얼마나 깊이 파헤치고 드러낼 것인가?’에 대한 답을 먼저 준비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렀던 것이다. 물론 이 물음은 작가가 얼마나 깊이 인간의 본성과 심리를 관찰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린 문제일 것이다. 깊은 관찰이 가능했다면, ‘불편한 진실을 건드릴 것인가? 건드리기로 했다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나는 이러한 물음들로 한동안 시간을 보내면서 인간의 공감능력의 한계와 이기성에 대해, 그리고 공감 이면에도 숨어 기생하는 인간의 은폐술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예측가능성 혹은 성찰과 통찰에 대한 문제이고, 결국 깊이와 무게의 문제다. 


두 작품밖에 읽지 못했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작가가 쓴 서로 다른 스타일의 두 작품, 그중에서도 장편소설을 읽어보면 어느 정도 판단이 선다. 그 작가의 작품을 더 읽을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는, 현실적으로 적절한 시기이기도 하다. 작가의 사상과 문체 등을 감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어야만 그 작가를 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작품은 다양할 수 있으나 작가는 한 사람이기 때문에 어느 작품에서든 변하지 않고 공통된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어쨌거나 이 글은 두 작품만 읽은 아마추어 작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임을 밝혀둔다. 게이고 작품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언젠가 써질지도 모를 나의 작품상에 대한 나 자신과의 토론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두 작품의 공통점, 나아가 그의 작품 세계를 한 마디로 압축하라고 한다면, 나는 별 망설임 없이 ‘대중성’이라는 단어를 선택할 것이다. 이 단어가 가진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렇게 평가하는 게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조금 부정적인 뉘앙스를 입혀 달리 표현하면, ‘얕고 가볍다’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재미와 별개로 내게 읽힌 게이고의 작품은 얕았고 가벼웠다. 글자 하나하나를 읽지 않고 대충 건너뛰어도 100%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게 술술 읽혔다. 시간 때우기 용으로 재미있는 영화 하나 해치운 것처럼 별 잔상이 남지 않았다. 가벼움 뒤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허무함도 느껴졌다. ‘대중적’이라는 말을 구태여 깎아내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그 말이 가진 경박함을 나는 게이고의 작품에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이거였나, 이 정도였단 말인가, 하는 아쉬운 생각이 마지막 책장을 덮고 밀려온 첫 감상이었다. 


이를테면, 추리소설의 묘미는 예측 불가능성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를 찌르는 추리력, 누구나 간과하고 지나칠 사소한 일상에서 중요한 단서를 찾아내어 독자 앞에서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증명하는 장면. 종종 전율을 느끼기도 하고, 그 사건이 가지는 의미가 오랜 잔상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추리소설은 독자의 예측을 넘어서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적어도 작품 속 탐정은 독자보다는 앞발 앞서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바로 예측 불가능성이 되겠다. 한편, 누가 범인인지도 알고 왜 그런 범행을 저질렀는지 아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드라마적인 요소를 부각하는 작품도 많이 존재한다. 이 장르를 굳이 추리소설로 분류할 필요까진 없겠지만, 범죄와 탐정 등 추리소설의 주요 장치들이 등장하여 전체 이야기를 끌고 나가기 때문에, 넓은 의미로 추리소설 분류 안에 넣는 데엔 무리가 없어 보인다.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은 위에 언급한 추리소설의 두 가지 형태를 두루 갖추고 있다. 탐정 역할을 맡은, 천재적인 추리력의 물리학과 조교수.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두뇌의 소유자이자 결국 살인자로 밝혀지는 고등학교 수학 교사. 이 둘 간의 알쏭달쏭한 간접적이고 시적이기까지 한 대화 가운데 숨은 허를 찌르는 논리와 추리. 긴장과 스릴. 이 요소들은 전형적인 추리소설이 가지는 예측 불가능성의 묘미를 잘 대변해준다. 반면, 범인이 살인사건에 가담한 이유, 그의 서글픈 개인사, 살인사건이라는 끔찍한 범죄 앞에서 시종일관 보여준 무심한 듯 유심한 따뜻한 인간미, 그 진정성. 이 요소들은 논리, 추리와 별개로 드라마적인 장치로 독자들을 감동시킨다. 나는 이 두 가지의 묘한 배합이 아마도 작가 게이고가 작품 속에서 노린 신의 한 수 같은 장치였으리라고 생각한다. ‘드라마 같은 추리소설’, 내게 읽힌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추리소설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게이고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우선, 이 작품은 추리소설이 아니다. 드라마적인 요소가 전면에 나섰다. 논리와 추리의 공백은 동화를 연상시키는 판타지, 그리고 연작소설인 것 같은 느낌을 선사하는 총 다섯 장의 단편 같은 작품이 모두 나미야 잡화점,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고민 상담 편지 왕래, 어린이 보호시설인 환광원으로 연결된다는 공통점으로 충분히 채워진다. 이루고 싶은 꿈과 살아내야만 하는 현실 사이에서의 갈등, 가족 관계가 여의치 않은 어렵고 가난한 서민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 속에 진하게 배어있는 따뜻한 인간미 등이 작가가 암묵적으로 내세우고 싶었던 부분이 아닌가 싶다. 이 모든 게 내게도 충분히 읽혔다. 


장점이라면 장점일 수 있고, 단점이라면 단점일 수도 있는 사실 한 가지는, 두 작품 모두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적절한 코미디적인 요소도 군데군데 들어가 있고, 말투나 생각의 흐름이 현대적이라서, 게다가 유럽이나 미국 같은 서양이 아닌 동양, 즉 한국의 옆동네 일본이라는 문화적 요소 때문에 한국 독자들로부터 어렵지 않게 공감을 끌어내는 데에는 아주 탁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이렇게 ‘완벽하게 (?)’ 공감과 몰입이 될 정도로 재미있게 써진 이 작품들이 못내 아쉽다. 그 가벼움 때문에. 그 얕음 때문에.


인간이 공감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가진 어두운 면은 어떤 것일까? 과연 깊고 무거운 이야기들, 가만히 멈춰 서서 진중하게 생각해보면 충분히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외면하고 마는 이야기들, 감히 수면 위로 끄집어내기 싫은 불편한 진실들, 끄집어냈다가는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을뿐더러 숨기고 싶은 은밀한 본심이 탄로 날까 두려운 이야기들. 이런 것들은 원만한 인간관계에서는 다뤄지기 힘든 이야기들이다. 아무리 친밀한 관계라 하더라도 좀처럼 입 밖에 꺼내지 못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문학작품이라는 장치에서마저도 이런 것들을 다루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심연에 놓인 진실을 마주하고, 어떻게 우리 안에 상주하는 악하고 이기적인 본성을 인지, 성찰, 객관화하여 보다 나은 인간관계와 삶을 위해 몸부림칠 수 있을까? 


이런 이유로 나는 문학작품에 기대하는 게 남다른 편이다.  ‘책임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그 무엇을 나는 문학작품으로부터 바란다. 이는 내가 언젠가 쓸지도 모르는 문학작품의 방향성도 가리킨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만, ‘아무나’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들. 허투루 던져버리기 힘든 이야기들. 오랜 잔상으로 남아 보편적인 인간의 내면에 은밀하게 감춰진 그 무언가를 묵직하게 건드려서 스스로 질문하고 고뇌하고 답하게 만들 수 있는 이야기들. 문학작품만이 해낼 수 있는 고유한 특징을 나는 작품 속에서 최대한 살려내고 싶다. 이러한 면에서 게이고의 작품은 아쉽기만 하다. 가슴 따뜻해지고 진정성이 느껴지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도배하고 있지만, 책을 다 읽고 허무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아무래도 작품이 가지는 얕음과 가벼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얕음과 가벼움은 ‘공감’이라는 참 아름다운 단어 밑에 바짝 붙어 기생하여 인간 본성의 깊이와 무거움을 은폐하고 100%가 아닌 50% 정도의 표면적인 진실만을 독자들이 대하게 하어 결국 본질을 놓쳐버리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적당한 진실은 진실을 은폐하는 법이다. 여기에서 조금 과장하자면, 본질이 빠진 그 자리를 대신하여 따스한 감동과 같은 피상적인 감상으로 예쁘장하게 덧칠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느낀 독자는 아마 나뿐만이 아닐 것이란 생각이다. 비슷하게 느꼈다 할지라도 이렇게 글로 적나라하게 써내는 사람은 아주 드물겠지만 말이다. 


게이고의 작품은 시간 때우기용이 아니라면 더 읽어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주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대중성이라는 단어와 깊이와 무게에 대한 사유를 게이고 덕분에 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242?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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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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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성, 그리고 깊이와 무게.


히가시노 게이고 저, ‘용의자 X의 헌신’ 및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 중 두 편 (‘용의자 X의 헌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연달아 읽고 문학작품이 가지는 ‘대중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내 생각은 ‘깊이’와 ‘무게’라는 단어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어떻게 대중적인 작품을 쓸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선, ‘인간의 본성과 심리를 얼마나 깊이 파헤치고 드러낼 것인가?’에 대한 답을 먼저 준비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렀던 것이다. 물론 이 물음은 작가가 얼마나 깊이 인간의 본성과 심리를 관찰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린 문제일 것이다. 깊은 관찰이 가능했다면, ‘불편한 진실을 건드릴 것인가? 건드리기로 했다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나는 이러한 물음들로 한동안 시간을 보내면서 인간의 공감능력의 한계와 이기성에 대해, 그리고 공감 이면에도 숨어 기생하는 인간의 은폐술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예측가능성 혹은 성찰과 통찰에 대한 문제이고, 결국 깊이와 무게의 문제다. 


두 작품밖에 읽지 못했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작가가 쓴 서로 다른 스타일의 두 작품, 그중에서도 장편소설을 읽어보면 어느 정도 판단이 선다. 그 작가의 작품을 더 읽을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는, 현실적으로 적절한 시기이기도 하다. 작가의 사상과 문체 등을 감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어야만 그 작가를 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작품은 다양할 수 있으나 작가는 한 사람이기 때문에 어느 작품에서든 변하지 않고 공통된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어쨌거나 이 글은 두 작품만 읽은 아마추어 작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임을 밝혀둔다. 게이고 작품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언젠가 써질지도 모를 나의 작품상에 대한 나 자신과의 토론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두 작품의 공통점, 나아가 그의 작품 세계를 한 마디로 압축하라고 한다면, 나는 별 망설임 없이 ‘대중성’이라는 단어를 선택할 것이다. 이 단어가 가진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렇게 평가하는 게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조금 부정적인 뉘앙스를 입혀 달리 표현하면, ‘얕고 가볍다’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재미와 별개로 내게 읽힌 게이고의 작품은 얕았고 가벼웠다. 글자 하나하나를 읽지 않고 대충 건너뛰어도 100%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게 술술 읽혔다. 시간 때우기 용으로 재미있는 영화 하나 해치운 것처럼 별 잔상이 남지 않았다. 가벼움 뒤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허무함도 느껴졌다. ‘대중적’이라는 말을 구태여 깎아내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그 말이 가진 경박함을 나는 게이고의 작품에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이거였나, 이 정도였단 말인가, 하는 아쉬운 생각이 마지막 책장을 덮고 밀려온 첫 감상이었다. 


이를테면, 추리소설의 묘미는 예측 불가능성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를 찌르는 추리력, 누구나 간과하고 지나칠 사소한 일상에서 중요한 단서를 찾아내어 독자 앞에서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증명하는 장면. 종종 전율을 느끼기도 하고, 그 사건이 가지는 의미가 오랜 잔상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추리소설은 독자의 예측을 넘어서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적어도 작품 속 탐정은 독자보다는 앞발 앞서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바로 예측 불가능성이 되겠다. 한편, 누가 범인인지도 알고 왜 그런 범행을 저질렀는지 아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드라마적인 요소를 부각하는 작품도 많이 존재한다. 이 장르를 굳이 추리소설로 분류할 필요까진 없겠지만, 범죄와 탐정 등 추리소설의 주요 장치들이 등장하여 전체 이야기를 끌고 나가기 때문에, 넓은 의미로 추리소설 분류 안에 넣는 데엔 무리가 없어 보인다.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은 위에 언급한 추리소설의 두 가지 형태를 두루 갖추고 있다. 탐정 역할을 맡은, 천재적인 추리력의 물리학과 조교수.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두뇌의 소유자이자 결국 살인자로 밝혀지는 고등학교 수학 교사. 이 둘 간의 알쏭달쏭한 간접적이고 시적이기까지 한 대화 가운데 숨은 허를 찌르는 논리와 추리. 긴장과 스릴. 이 요소들은 전형적인 추리소설이 가지는 예측 불가능성의 묘미를 잘 대변해준다. 반면, 범인이 살인사건에 가담한 이유, 그의 서글픈 개인사, 살인사건이라는 끔찍한 범죄 앞에서 시종일관 보여준 무심한 듯 유심한 따뜻한 인간미, 그 진정성. 이 요소들은 논리, 추리와 별개로 드라마적인 장치로 독자들을 감동시킨다. 나는 이 두 가지의 묘한 배합이 아마도 작가 게이고가 작품 속에서 노린 신의 한 수 같은 장치였으리라고 생각한다. ‘드라마 같은 추리소설’, 내게 읽힌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추리소설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게이고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우선, 이 작품은 추리소설이 아니다. 드라마적인 요소가 전면에 나섰다. 논리와 추리의 공백은 동화를 연상시키는 판타지, 그리고 연작소설인 것 같은 느낌을 선사하는 총 다섯 장의 단편 같은 작품이 모두 나미야 잡화점,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고민 상담 편지 왕래, 어린이 보호시설인 환광원으로 연결된다는 공통점으로 충분히 채워진다. 이루고 싶은 꿈과 살아내야만 하는 현실 사이에서의 갈등, 가족 관계가 여의치 않은 어렵고 가난한 서민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 속에 진하게 배어있는 따뜻한 인간미 등이 작가가 암묵적으로 내세우고 싶었던 부분이 아닌가 싶다. 이 모든 게 내게도 충분히 읽혔다. 


장점이라면 장점일 수 있고, 단점이라면 단점일 수도 있는 사실 한 가지는, 두 작품 모두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적절한 코미디적인 요소도 군데군데 들어가 있고, 말투나 생각의 흐름이 현대적이라서, 게다가 유럽이나 미국 같은 서양이 아닌 동양, 즉 한국의 옆동네 일본이라는 문화적 요소 때문에 한국 독자들로부터 어렵지 않게 공감을 끌어내는 데에는 아주 탁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이렇게 ‘완벽하게 (?)’ 공감과 몰입이 될 정도로 재미있게 써진 이 작품들이 못내 아쉽다. 그 가벼움 때문에. 그 얕음 때문에.


인간이 공감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가진 어두운 면은 어떤 것일까? 과연 깊고 무거운 이야기들, 가만히 멈춰 서서 진중하게 생각해보면 충분히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외면하고 마는 이야기들, 감히 수면 위로 끄집어내기 싫은 불편한 진실들, 끄집어냈다가는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을뿐더러 숨기고 싶은 은밀한 본심이 탄로 날까 두려운 이야기들. 이런 것들은 원만한 인간관계에서는 다뤄지기 힘든 이야기들이다. 아무리 친밀한 관계라 하더라도 좀처럼 입 밖에 꺼내지 못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문학작품이라는 장치에서마저도 이런 것들을 다루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심연에 놓인 진실을 마주하고, 어떻게 우리 안에 상주하는 악하고 이기적인 본성을 인지, 성찰, 객관화하여 보다 나은 인간관계와 삶을 위해 몸부림칠 수 있을까? 


이런 이유로 나는 문학작품에 기대하는 게 남다른 편이다.  ‘책임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그 무엇을 나는 문학작품으로부터 바란다. 이는 내가 언젠가 쓸지도 모르는 문학작품의 방향성도 가리킨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만, ‘아무나’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들. 허투루 던져버리기 힘든 이야기들. 오랜 잔상으로 남아 보편적인 인간의 내면에 은밀하게 감춰진 그 무언가를 묵직하게 건드려서 스스로 질문하고 고뇌하고 답하게 만들 수 있는 이야기들. 문학작품만이 해낼 수 있는 고유한 특징을 나는 작품 속에서 최대한 살려내고 싶다. 이러한 면에서 게이고의 작품은 아쉽기만 하다. 가슴 따뜻해지고 진정성이 느껴지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도배하고 있지만, 책을 다 읽고 허무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아무래도 작품이 가지는 얕음과 가벼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얕음과 가벼움은 ‘공감’이라는 참 아름다운 단어 밑에 바짝 붙어 기생하여 인간 본성의 깊이와 무거움을 은폐하고 100%가 아닌 50% 정도의 표면적인 진실만을 독자들이 대하게 하어 결국 본질을 놓쳐버리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적당한 진실은 진실을 은폐하는 법이다. 여기에서 조금 과장하자면, 본질이 빠진 그 자리를 대신하여 따스한 감동과 같은 피상적인 감상으로 예쁘장하게 덧칠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느낀 독자는 아마 나뿐만이 아닐 것이란 생각이다. 비슷하게 느꼈다 할지라도 이렇게 글로 적나라하게 써내는 사람은 아주 드물겠지만 말이다. 


게이고의 작품은 시간 때우기용이 아니라면 더 읽어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주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대중성이라는 단어와 깊이와 무게에 대한 사유를 게이고 덕분에 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242?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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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축복
오가와 요코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수첩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축복 전 상실의 존재 의미.

오가와 요코 저, ‘우연한 축복’을 읽고.

이 얇은 단편집에 수록된 일곱 편의 에세이 같은 소설은 제목에서처럼 ‘우연한 축복’을 공통점으로 가진다. 축복은 일견 획득의 뉘앙스를 풍긴다. 우연히 찾아온 선물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에서 획득 이전에 언제나 있었던, 그러나 번번이 잊히고 마는 상실의 존재를 조용히 일깨우고 작고 낮은 목소리로 덤덤하게 들려준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삶이란 원래 그런 것처럼, 커다란 상실 뒤에 찾아온 우연 같은 축복을 감사하며 그렇게 살아간다. 책을 덮고 눈을 감았다. 지금까지 나를 찾아온 축복들을, 그 이면에 자리했을 상실들을, 그리고 그로 인해 내 마음을 가득 채웠던 감사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오늘을 감사를 회복한 상태로 맞이하길 바라면서.

상실 이후에 찾아온 선물 같은 축복. 잃었다 얻는 과정을 감히 축복이라 할 수 있는 까닭은 선행된 상실 덕분에 그 뒤에 찾아온 작은 축복이 깊은 의미를 가지고 우리의 삶을 이끄는 힘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감성과 이성을 모두 가진 인간에게 잃었다 얻는 과정은 바로 삶, 그 자체다. 그리고 축복은 ‘겨우 제자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마침내 제자리’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제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의 서로 다른 마음. 나는 후자이길 조용히 바라본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244?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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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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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궐하고 사라지는 전염병, 끝까지 살아남는 인간의 본성.

정유정 저, ‘28’을 읽고.

이 작품은 화양이란 도시에서 28일 간 일어난 원인모를 에피데믹이자 인수공통전염병의 발단과 창궐을 주 배경으로 한다. 작품의 주인공 격인 서재형을 비롯한 몇몇 사람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건, 사고를 통해 보편적인 인간의 심리와 본성을 파헤친다. 읽다 보면 언뜻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와 ‘눈뜬 자들의 도시’, 혹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가 떠오르기도 한다.

경험이 전무한 에피데믹이 돌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마련이다. 만약 COVID-19처럼 원인이 바이러스인 경우, 백신 개발에는 병원체 파악, DNA 나 RNA의 염기서열 파악, 백신 디자인, 예비실험, 오류 수정, 여러 차례에 걸친 검증 절차, 백신 대량 생산 등에 시간이 수개월 (길게는 수년) 소요된다. 백신이 개발되기 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주 기본적인 것들, 이를테면 손 자주 씻기, 타인과의 접촉 줄이기, 마스크나 장갑 등 개인보호장비 착용하기 이외엔 없다. 감염률, 격리율, 사망률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손실이다. 적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에 대항할 무기를 손에 쥐기 전에 희생자의 발생은 불가피한 것이다. 이 작품 속 에피데믹은 병원체가 무엇인지조차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많은 희생자와 사상자를 내고 종결에 이른다. 에피데믹의 발단과 종결의 과학적인 설명은 전무하다. 작가 정유정이 이러한 부분을 다루지 않은 건 아마도 전염병 자체가 아닌  전염병으로 인해 뜻하지 않게 야기된 인간 심리와 본성에 독자들이 더욱 집중하길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7년의 밤’에서 보여줬던 치밀한 서사, 그 안에 깃든 지독한 인간의 심리와 섬뜩하리만치 무서운 인간의 본성, 간결한 단문들의 휘몰아치는 연쇄는 그대로 유지된다. 독자들은 몰입하다 보면 빨라지는 호흡 때문에 문장을 미처 다 읽지도 않은 채 책장을 넘기게 될 것이다. 거대한 서사 가운데 팽팽하게 유지되는 긴장과 스릴은 과연 정유정 답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먼저, ‘7년의 밤’과는 달리 이 작품은 마지막 책장을 덮고도 무언가 끝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전염병은 28일 만에 종결되었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주요 이야기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등장인물의 절반 이상이 죽었다. 주인공 격인 서재형도 죽었다. 그러나 이들의 죽음도 소설의 결말의 미진함을 다 설명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무언가 한 끝이 모자란 것 같았다. 책의 중반에 들어서 살짝 긴장이 누그러지기도 하는데, 그건 아마도 정유정의 휘몰아치는 문체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음을 알려주는 듯했다. 또한, 결과 (혹은 미래)를 먼저 보여주고 원인 (혹은 과거)을 나중에 설명하는 식의 글쓰기 방식이 연거푸 반복되다 보니, 애초에 가졌던 호기심엔 약간의 짜증이 섞이기 시작했고, 친절하지 않은 글쓰기가 던져주는 신선함 대신 식상함이 그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었다. 여러 인물들의 개별 서사에 대한 병렬적인 소개로 500페이지에 육박하는 장편을 채우기에는 아쉬운 감이 있었다. 그중 서재형의 개별 서사에 초점을 두긴 했지만, 과거 알래스카에서 경험했던 아이디타로드 (죽음의 개썰매 경주) 서사와 서재형의 현재와의 연결점이 묘연하게 보였고 개연성마저 떨어지는 것 같아 아쉬웠다. 굳이 좋게 해석해보자면, 정유정이 드러내고 싶었던 인간의 심리와 본성은 전염병처럼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아 조용히 잠식하고 있다가 기회를 틈타 언제든 고개를 쳐드는 속성을 가진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종의 기원’이라는 책이 책장에서 대기 중이다. ‘28’보다는 ‘7년의 밤’과 같은 맛을 내길 바라본다. 

#은행나무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243?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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