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드 (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정상’과 ‘평범’의 비린내 나는 실체.

손원평 저, ‘아몬드’를 읽고.

나는 한때 정점을 찍고 잊히고 마는 베스트셀러보다는 정점을 찍지 못하더라도 꾸준히 읽히는 스테디셀러를 선호한다. 한번 가볍게 읽고 마는 대중소설보다는 조금 공을 들여야만 읽어낼 수 있고 읽고 나면 소장하고 싶어지는 고전소설을 좋아한다. 그 시대의 흐름과 사람들의 관심도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대를 관통하여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는 그 힘을 나는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알라딘 웹사이트에 들어가 책을 훑어보는 나로선 손원평의 ‘아몬드’를 놓쳤을 리가 없다. 우선 표지부터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주인공인듯한 한 소년의 얼굴. 표지 전체를 차지하는 증명사진 식의 큰 그림. 제목 ‘아몬드’, 그리고 한 소년의 얼굴. 호기심이 발동했다. 나의 짧은 상상력으로는 도무지 두 가지가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일부러 작품 소개를 들춰보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 책은 읽어볼 만하겠다는 왠지 모를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해석을 통과한 관점으로 이 책을 읽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일 년이 훨씬 넘도록 늘 보관함에만 간직하고 있었다. 며칠 전, 마침 새책과 다름없는 중고책으로 구매가 가능해서 다른 책들과 함께 구매를 했다. 두 시간 만에 다 읽었다. 정유정의 필체가 생각날 만큼 유난히 책장이 빨리 넘어가는 작품이었다. 작가 손원평의 탁월한 필력과 그녀가 사용한 단문의 연타는 흡입력과 속도감을 제대로 구현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속도와는 상관없이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를 다룬다. 한국 사회, 특히 청소년과 연결된 사회문제의 단면을 소설이라는 허구적 장치를 통해 정확히 짚어낸다. 허구에서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현실을 보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익명성에서 안전함을 찾아내고 그 안에 숨어들어 비겁한 자신을 옹호하는 군중들의 심리, 겉과 속이 너무나도 다른 인간의 파렴치한 모순, 그 이율배반성이 ‘정상’ 혹은 ‘평범’이라는 탈을 쓴 참혹하고도 슬픈 아이러니, 시한폭탄 같은 그 아이러니가 만들어내는 사건 사고, 그 현장에서 고스란히 피해자가 된 한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국 사회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충분히 공감하고도 남을 만한 이야기로 잘 그려진 작품이다. 

이 작품은 앞서 언급한 한 소년, 이름이 ‘윤재’인 청소년의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였다. 작가는 윤재를 ‘감정 표현 불능증’이라고 알려진 ‘알렉시티미아 (Alexithymia)’라는 선천적 질환자로 설정했다. 아마도 그 이유는 한국 사회를 가능한 한 거짓 없이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기술하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가 들어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 질환에 걸린 윤재는 앞서 언급한 ‘정상적’이고 ‘평범한’ 인간들의 모순 혹은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일 수도 가질 수도 없는 결함 (?)을 가진다. 일반적으로 한 시스템을 객관적으로 기술하기에 있어서 그 시스템 바깥에 존재하는 인물의 시선을 차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작가는 이 작품 속에서 다른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같은 시스템 안에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선천적으로 다른 시선을 가진, 그래서 마치 외부 인물의 시선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윤재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즉, 윤재에게 이 질환을 허용한 작가의 의도는 윤재에게 연민을 갖게 하거나 이런 질환자들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에 숨은 폭력성을 누설하고 수정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 시선이 의도하지 않게 가지는 고유한 객관성 (?) 혹은 솔직 담백함 (?)을 렌즈로 삼아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이 역설적인 관점은 소설만이 가지는 장점을 아주 잘 활용한 결과이고, 작가의 탁월한 인물 설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 작품이 가지는 핵심이 아닌가 한다.

(참고: 이 질환은 공식 의학용어로써 편도체의 작은 크기와 상관관계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편도체가 작다고 해서 모두 이 질환에 걸리는 것도 아닐뿐더러, 이 질환의 원인이 편도체의 작은 크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리고 사이코패스와는 다른 질환이다.)

이 작품은 제10회 창비 청소년 문학상 수상작이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은 오히려 성인이 더 많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청소년과 직접적인 관계를 해야만 하는 부모님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다. 비린내 나는 어른들의 냄새와 인간의 본성, 그리고 청소년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작용할 것이다. 

#창비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255?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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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르 클레지오 저, ‘우연’을 읽고.

모게, 나시마, 아자르. 이름만으로도 이국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 작품. 지금까지 꽤 많은 소설을 읽었지만, 이처럼 이국적인 느낌으로 내게 다가온 소설은 없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적어도 단지 프랑스 작가의 소설이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대신, 르 클레지오 특유의 색채라고 보는 게 더 적당할 것이다. 그가 만약 프랑스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이 작품을 썼더라도 분명 똑같은 느낌을 충분히 표현해내지 않았을까 싶다. 게다가 내가 읽은 책은 한국어 번역본 아닌가. 재창작이라고도 불리는 ‘번역’이라는 높은 관문을 통과하면서도 낯선 이국의 느낌을 뒤틀어짐 없이 그대로 전달하는 작품이라니! 나는 르 클레지오가 더 궁금해졌다. 언제 내 손에 들릴진 여전히 미지수이지만, ‘황금 물고기’와 ‘사막’이 책장에서 대기 중이다. 이 두 작품은 또 어떤 맛을 낼지 은근히 기대가 된다. 

영화감독으로서 세상 성공의 정점을 찍고 난 이후 점점 쇠락해가는 중년 남성, 쥐앙 모게. 무책임하게 아내와 딸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어디론가 떠나길 갈망하던 소녀, 나시마. 그리고 이 둘을 이어준 ‘아자르 호’. 제목 ‘우연’은 프랑스어 ‘hasard’이고, ‘아자르 호’의 ‘아자르’는 행운이라는 의미를 지닌 스페인어 ‘azar’에서 따온 것인데, 이 두 단어는 같은 어원, 같은 발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즉, ‘아자르’는 우연이기도 행운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과연 모게와 나시마의 만남도 우연이기도 행운이기도 했을까?

굳이 철학적으로 접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작가의 의도에서 그런 뉘앙스를 느낄 수는 있지만, 이 작품은 그런 논의 없이도 충분히 매력을 지니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낯설고도 매력적인 환상 소설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 이 작품을 단적으로 표현한 게 아닌가 한다. 

모게의 극적인 인생의 내리막길에 어느 날 갑자기 끼어든 나시마. 그녀가 소년으로 변장한 채 아자르 호에 몰래 숨어 모게와 같이 항해를 할 수 있었던 건 그녀에게 있어선 목숨 건 모험이었을 것이다. 아직 살아보지 않은 나날이 훨씬 많은 나이인데도 나시마는 그만큼 벌써 인생의 코너에 몰린 것처럼 절박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절박함이 우연을 만든 것일까. 아버지가 타고 간 커다란 배, 그가 떠나버린 바다, 그 원시적인 자연, 그리고 홀로 남겨진 채 망가져가는 엄마. 다행히 모게는 나시마를 받아주었다. 그렇게 해서 짧지만 굵은 그들의 항해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 누구도 계획했던 게 아니기에, 이 두 사람 사이의 만남은 우연이라고 하는 게 옳다.

그러나 과연 그 만남이 행운이었을지에 대해선 작품을 다 읽은 나로서도 확답을 내리긴 힘들다. 모게는 과거에 자신이 연루되었던 어떤 한 소녀의 죽음이 관련된 사건으로부터 도망 다니는 신세였다. 나시마와의 항해 도중 큰 폭풍우를 만난 이후, 모게는 나시마를 더 이상 데리고 있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집으로 돌려보내기로 한다. 그렇게 모게와 헤어진 나시마는 어쩌다가 집을 떠나 방황하게 되었는지, 어쩌다가 모게와 만나게 되었는지 취조당한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난파된 배에서 모게에 의해 구조되었다는 거짓말을 끝내 지키지 못한다. 나시마는 유괴당한 어린 소녀가 되었고, 모게는 유괴범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를 빌미로 모게는 과거의 그 사건으로부터도 더 이상 도망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빚더미에 앉게 되었고 아자르 호까지 빼앗기게 된다. 바닥으로 내려앉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허약해진 심신을 이기지 못해 병원에서 죽어간다. 그러는 사이에 성인이 된 나시마는 공부를 하는 대학생이 되었고, 병원에 입원하기 전 모게가 아자르 호에 몰래 설치해둔 부탄가스통을 이용해 동료와 함께 아자르 호를 몰래 띄우고 폭파시켜버린다. 모게와의 우연한 만남의 장소가 되어주었던, 나시마에게는 처음으로 가슴 벅찬 자유와 해방을 느끼게 해주었던 아자르 호는 그렇게 영원히 사라졌다. 모게와 아자르 호는 생명을 같이 했던 것이다. 

행운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이리저리 뒤튼 뒤 나는 이 둘의 만남을 행운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우기고 싶진 않다. 우연이긴 했으나 행운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우연한 만남이 가져온 결과는 두 사람에게 있어 아픔과 슬픔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가슴 깊이 잊히지 않을 만남, 그 만남을 과연 나시마는 아픔과 슬픔 없이 기억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 만남은 불행에 가깝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는 같은 어원, 같은 발음을 가진 ‘아자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이 책의 제목이 ‘행운’이 아닌 ‘우연’으로 정해진 이유이기도 할 것이라고 조용히 생각해본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254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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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 톨스토이와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인생
석영중 지음 / 예담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희석된 감동, 농축된 이해: 톨스토이 삶의 맥락에서 재해석한 안나 카레니나와 그의 인생관과 도덕관.

석영중 저,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를 읽고.

작가의 필력이란 이런 걸 말하는구나, 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글. 이런 쉽지 않은 내용으로 이렇게 재미있게 글로 풀어낼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중간중간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여러 번 웃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부분에선 사뭇 진지해진 나머지 작가가 바라보는 톨스토이에 대한 연민이 생기기도 했으며, 대문호라는 간판의 어두운 그늘도 볼 수 있었다. 톨스토이라는 러시아 고전문학 작가와 그가 쓴 작품 여러 편을 다루면서 석영중은 톨스토이의 사상과 삶에 대해 고찰한다. 제목에서 ‘도덕에 미치다’라는 표현은 이 책을 절반 정도 읽게 될 즈음이면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 의미를, 그리고 거기에 아주 약간 냉소적인 뉘앙스가 담겨있다는 점까지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도덕에 미치다’라는 말은 너무나 도덕적이라서 본받고 배워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도가 지나치다고 표현할 수도 있고, 모순이나 반어법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단지 이 문장만 읽고는 무슨 말인가 싶기도 하겠지만, 석영중이 풀어나가는 글을 가만히 읽어나가게 된다면 아마 나처럼 그녀의 시선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톨스토이나 이 책이 주로 다루는 작품 ‘안나 카레니나’의 위대함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나간 석영중의 유쾌한 필력을 감상하는 용도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이 책의 목차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만 봐도 흥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부 ‘나쁜 삶’은 1장 ‘나쁜 사랑’, 2장 ‘나쁜 결혼과 아주 나쁜 결혼’, 3장 ‘좋은 결혼’으로, 2부 ‘좋은 삶’은 1장 ‘채소만 먹자’, 2장 ‘시골에서 살자’, 3장 ‘예술을 박멸하자’, 4장 ‘메멘토 모리’로 구성되어 있다. 톨스토이의 작품 ‘안나 카레니나’를 읽어본 독자라면 그렇지 않은 독자보다 훨씬 더 깊이 몰입하여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을 것이며, 읽는 속도 또한 증가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몇 달 전에 읽었던 그 작품을 상기하면서 작가의 해석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톨스토이 작품을 세 편밖에 읽지 못한 나로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톨스토이의 삶’이라는 전체 맥락으로부터 나온 해석 앞에선 가만히 멈춰 서서 귀를 기울이며 이전보다 더 깊고 풍성하게 작품 그 자체는 물론 톨스토이가 어떤 사람인지까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안나 카레니나’는 방대한 작품이지만 다루는 내용이 어려운 건 아니다. 사랑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고,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결혼 이야기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줄거리를 간단하게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유부녀 안나가 어느 날 우연히 만나게 된 브론스키라는 미혼 남자와 외도를 감행하게 되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정도가 될지도 모른다. 조금 경박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요컨대 줄거리 자체는 삼류 소설의 그것과 거의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물론 작품은 줄거리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같은 줄거리라도 그것을 전개해나가는 작가의 시선과 사상이 등장인물 안에서 어떻게 발현되게 설치해놨는지, 어떠한 서사 가운데 어떤 묘사를 혼합하여 크고 작은 그림을 그려나가는지, 어떻게 시대와 문화와 역사를 담아내어 작품이 평범하면서도 비범하게 보이도록 만들어나가는지에 바로 작가의 내공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내공은 비슷한 내공을 가진 사람에게만 제대로 관찰되고 마침내 저자의 메시지가 가능한 온전하게 전달되는 해석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독자가 제2의 저자라는 말이 있다고 하지만, 원 저자의 메시지를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은 채 독자 맘대로 해석해버리는 행위는 자유가 아닌 방종이라 해야 옳다. 이런 면에서 우린 석영중과 같은 러시아 문학 전문가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석영중은 ‘안나 카레니나’를 사랑 이야기나 결혼 이야기가 아닌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소설로 읽는다. 줄거리나 작품 그 자체보다는 저자라는 그 글의 근원을 먼저 조명한 뒤 다시 작품을 읽는 것이다. 나무 하나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극찬하는 것도 안 하는 것보다 언제나 좋지만, 전체 숲의 맥락을 인지한 뒤 나무를 살펴볼 때의 상이함을 인정하지 않을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이 책은 석영중이 ‘안나 카레니나’라는 작품을 대표로 하여 톨스토이의 인생관 혹은 도덕관을 살펴보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톨스토이의 인생은 그의 중년의 위기 (소위 ‘회심’) 이전과 이후로 나눠질 수 있다고 한다. 그 위기 이후에 쓴 대부분의 글은 무언가를 비난하고 촉구하는 글이었다. 석영중에 따르면, 톨스토이는 불륜, 사교계, 도시의 삶, 육식, 탐식, 흡연, 음주, 그리고 거의 모든 예술까지도 당당하게 비난했다고 한다. 당시 러시아 시대 정황을 살펴보면 그의 삶의 전환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전환기 이후에 자신의 모든 작품마저도 다 부인하고, 마치 설교자나 ‘톨스토이교’ 교주가 된 것처럼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한 자신만의 해법을 알리는데 열을 올리다가 덜컥 생을 마감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뭔가 석연치 않은 감정과 생각이 든다. 아무리 맞는 말이라도 그것이 이론만으로 들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 그의 화려한 삶의 이면이 슬퍼 보인다. 이에 대해서 석영중은 딱 잘라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이 책을 압축하는 문장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확실히 톨스토이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일리가 있다는 것이 진리는 아니다. 톨스토이의 비극은 여기에 있다. 그는 일리 있는 것을 진리라 믿고 싶어 했다. 부분적인 진실을 진리 그 자체라고 단정했다. 그는 진리를 사랑했고 자신이 진리를 발견했다고 믿었다. 세상을 하직하기 이전에 그가 인류에게 남긴 말 역시 ‘진리’라는 단어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톨스토이에 대한 연민이 생겼다. 그의 삶 전체를 훑어보지 않고 ‘고백록’을 읽었을 때 느꼈던 감동이 어느 정도 희석됨을 느낀다. 어떤 사실을 모르는 상태로 작품을 읽고 감동받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를 가질 수 있을 테지만, 아무래도 전체를 조명한 뒤 다시 돌아와 이전에 받았던 감동을 재해석하는 것은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많이 배웠다. 참 고마운 책이다.

**톨스토이 읽기.
1. 고백록: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487697067941727
2. 이반 일리치의 죽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562696140441819
3. 안나 카레니나: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851864358191651
4.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석영중 저):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362158683828880

#예담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250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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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대중성, 그리고 깊이와 무게.


히가시노 게이고 저, ‘용의자 X의 헌신’ 및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 중 두 편 (‘용의자 X의 헌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연달아 읽고 문학작품이 가지는 ‘대중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내 생각은 ‘깊이’와 ‘무게’라는 단어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어떻게 대중적인 작품을 쓸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선, ‘인간의 본성과 심리를 얼마나 깊이 파헤치고 드러낼 것인가?’에 대한 답을 먼저 준비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렀던 것이다. 물론 이 물음은 작가가 얼마나 깊이 인간의 본성과 심리를 관찰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린 문제일 것이다. 깊은 관찰이 가능했다면, ‘불편한 진실을 건드릴 것인가? 건드리기로 했다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나는 이러한 물음들로 한동안 시간을 보내면서 인간의 공감능력의 한계와 이기성에 대해, 그리고 공감 이면에도 숨어 기생하는 인간의 은폐술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예측가능성 혹은 성찰과 통찰에 대한 문제이고, 결국 깊이와 무게의 문제다. 


두 작품밖에 읽지 못했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작가가 쓴 서로 다른 스타일의 두 작품, 그중에서도 장편소설을 읽어보면 어느 정도 판단이 선다. 그 작가의 작품을 더 읽을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는, 현실적으로 적절한 시기이기도 하다. 작가의 사상과 문체 등을 감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어야만 그 작가를 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작품은 다양할 수 있으나 작가는 한 사람이기 때문에 어느 작품에서든 변하지 않고 공통된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어쨌거나 이 글은 두 작품만 읽은 아마추어 작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임을 밝혀둔다. 게이고 작품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언젠가 써질지도 모를 나의 작품상에 대한 나 자신과의 토론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두 작품의 공통점, 나아가 그의 작품 세계를 한 마디로 압축하라고 한다면, 나는 별 망설임 없이 ‘대중성’이라는 단어를 선택할 것이다. 이 단어가 가진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렇게 평가하는 게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조금 부정적인 뉘앙스를 입혀 달리 표현하면, ‘얕고 가볍다’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재미와 별개로 내게 읽힌 게이고의 작품은 얕았고 가벼웠다. 글자 하나하나를 읽지 않고 대충 건너뛰어도 100%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게 술술 읽혔다. 시간 때우기 용으로 재미있는 영화 하나 해치운 것처럼 별 잔상이 남지 않았다. 가벼움 뒤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허무함도 느껴졌다. ‘대중적’이라는 말을 구태여 깎아내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그 말이 가진 경박함을 나는 게이고의 작품에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이거였나, 이 정도였단 말인가, 하는 아쉬운 생각이 마지막 책장을 덮고 밀려온 첫 감상이었다. 


이를테면, 추리소설의 묘미는 예측 불가능성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를 찌르는 추리력, 누구나 간과하고 지나칠 사소한 일상에서 중요한 단서를 찾아내어 독자 앞에서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증명하는 장면. 종종 전율을 느끼기도 하고, 그 사건이 가지는 의미가 오랜 잔상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추리소설은 독자의 예측을 넘어서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적어도 작품 속 탐정은 독자보다는 앞발 앞서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바로 예측 불가능성이 되겠다. 한편, 누가 범인인지도 알고 왜 그런 범행을 저질렀는지 아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드라마적인 요소를 부각하는 작품도 많이 존재한다. 이 장르를 굳이 추리소설로 분류할 필요까진 없겠지만, 범죄와 탐정 등 추리소설의 주요 장치들이 등장하여 전체 이야기를 끌고 나가기 때문에, 넓은 의미로 추리소설 분류 안에 넣는 데엔 무리가 없어 보인다.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은 위에 언급한 추리소설의 두 가지 형태를 두루 갖추고 있다. 탐정 역할을 맡은, 천재적인 추리력의 물리학과 조교수.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두뇌의 소유자이자 결국 살인자로 밝혀지는 고등학교 수학 교사. 이 둘 간의 알쏭달쏭한 간접적이고 시적이기까지 한 대화 가운데 숨은 허를 찌르는 논리와 추리. 긴장과 스릴. 이 요소들은 전형적인 추리소설이 가지는 예측 불가능성의 묘미를 잘 대변해준다. 반면, 범인이 살인사건에 가담한 이유, 그의 서글픈 개인사, 살인사건이라는 끔찍한 범죄 앞에서 시종일관 보여준 무심한 듯 유심한 따뜻한 인간미, 그 진정성. 이 요소들은 논리, 추리와 별개로 드라마적인 장치로 독자들을 감동시킨다. 나는 이 두 가지의 묘한 배합이 아마도 작가 게이고가 작품 속에서 노린 신의 한 수 같은 장치였으리라고 생각한다. ‘드라마 같은 추리소설’, 내게 읽힌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추리소설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게이고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우선, 이 작품은 추리소설이 아니다. 드라마적인 요소가 전면에 나섰다. 논리와 추리의 공백은 동화를 연상시키는 판타지, 그리고 연작소설인 것 같은 느낌을 선사하는 총 다섯 장의 단편 같은 작품이 모두 나미야 잡화점,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고민 상담 편지 왕래, 어린이 보호시설인 환광원으로 연결된다는 공통점으로 충분히 채워진다. 이루고 싶은 꿈과 살아내야만 하는 현실 사이에서의 갈등, 가족 관계가 여의치 않은 어렵고 가난한 서민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 속에 진하게 배어있는 따뜻한 인간미 등이 작가가 암묵적으로 내세우고 싶었던 부분이 아닌가 싶다. 이 모든 게 내게도 충분히 읽혔다. 


장점이라면 장점일 수 있고, 단점이라면 단점일 수도 있는 사실 한 가지는, 두 작품 모두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적절한 코미디적인 요소도 군데군데 들어가 있고, 말투나 생각의 흐름이 현대적이라서, 게다가 유럽이나 미국 같은 서양이 아닌 동양, 즉 한국의 옆동네 일본이라는 문화적 요소 때문에 한국 독자들로부터 어렵지 않게 공감을 끌어내는 데에는 아주 탁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이렇게 ‘완벽하게 (?)’ 공감과 몰입이 될 정도로 재미있게 써진 이 작품들이 못내 아쉽다. 그 가벼움 때문에. 그 얕음 때문에.


인간이 공감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가진 어두운 면은 어떤 것일까? 과연 깊고 무거운 이야기들, 가만히 멈춰 서서 진중하게 생각해보면 충분히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외면하고 마는 이야기들, 감히 수면 위로 끄집어내기 싫은 불편한 진실들, 끄집어냈다가는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을뿐더러 숨기고 싶은 은밀한 본심이 탄로 날까 두려운 이야기들. 이런 것들은 원만한 인간관계에서는 다뤄지기 힘든 이야기들이다. 아무리 친밀한 관계라 하더라도 좀처럼 입 밖에 꺼내지 못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문학작품이라는 장치에서마저도 이런 것들을 다루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심연에 놓인 진실을 마주하고, 어떻게 우리 안에 상주하는 악하고 이기적인 본성을 인지, 성찰, 객관화하여 보다 나은 인간관계와 삶을 위해 몸부림칠 수 있을까? 


이런 이유로 나는 문학작품에 기대하는 게 남다른 편이다.  ‘책임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그 무엇을 나는 문학작품으로부터 바란다. 이는 내가 언젠가 쓸지도 모르는 문학작품의 방향성도 가리킨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만, ‘아무나’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들. 허투루 던져버리기 힘든 이야기들. 오랜 잔상으로 남아 보편적인 인간의 내면에 은밀하게 감춰진 그 무언가를 묵직하게 건드려서 스스로 질문하고 고뇌하고 답하게 만들 수 있는 이야기들. 문학작품만이 해낼 수 있는 고유한 특징을 나는 작품 속에서 최대한 살려내고 싶다. 이러한 면에서 게이고의 작품은 아쉽기만 하다. 가슴 따뜻해지고 진정성이 느껴지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도배하고 있지만, 책을 다 읽고 허무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아무래도 작품이 가지는 얕음과 가벼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얕음과 가벼움은 ‘공감’이라는 참 아름다운 단어 밑에 바짝 붙어 기생하여 인간 본성의 깊이와 무거움을 은폐하고 100%가 아닌 50% 정도의 표면적인 진실만을 독자들이 대하게 하어 결국 본질을 놓쳐버리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적당한 진실은 진실을 은폐하는 법이다. 여기에서 조금 과장하자면, 본질이 빠진 그 자리를 대신하여 따스한 감동과 같은 피상적인 감상으로 예쁘장하게 덧칠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느낀 독자는 아마 나뿐만이 아닐 것이란 생각이다. 비슷하게 느꼈다 할지라도 이렇게 글로 적나라하게 써내는 사람은 아주 드물겠지만 말이다. 


게이고의 작품은 시간 때우기용이 아니라면 더 읽어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주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대중성이라는 단어와 깊이와 무게에 대한 사유를 게이고 덕분에 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242?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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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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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성, 그리고 깊이와 무게.


히가시노 게이고 저, ‘용의자 X의 헌신’ 및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 중 두 편 (‘용의자 X의 헌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연달아 읽고 문학작품이 가지는 ‘대중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내 생각은 ‘깊이’와 ‘무게’라는 단어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어떻게 대중적인 작품을 쓸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선, ‘인간의 본성과 심리를 얼마나 깊이 파헤치고 드러낼 것인가?’에 대한 답을 먼저 준비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렀던 것이다. 물론 이 물음은 작가가 얼마나 깊이 인간의 본성과 심리를 관찰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린 문제일 것이다. 깊은 관찰이 가능했다면, ‘불편한 진실을 건드릴 것인가? 건드리기로 했다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나는 이러한 물음들로 한동안 시간을 보내면서 인간의 공감능력의 한계와 이기성에 대해, 그리고 공감 이면에도 숨어 기생하는 인간의 은폐술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예측가능성 혹은 성찰과 통찰에 대한 문제이고, 결국 깊이와 무게의 문제다. 


두 작품밖에 읽지 못했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작가가 쓴 서로 다른 스타일의 두 작품, 그중에서도 장편소설을 읽어보면 어느 정도 판단이 선다. 그 작가의 작품을 더 읽을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는, 현실적으로 적절한 시기이기도 하다. 작가의 사상과 문체 등을 감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어야만 그 작가를 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작품은 다양할 수 있으나 작가는 한 사람이기 때문에 어느 작품에서든 변하지 않고 공통된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어쨌거나 이 글은 두 작품만 읽은 아마추어 작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임을 밝혀둔다. 게이고 작품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언젠가 써질지도 모를 나의 작품상에 대한 나 자신과의 토론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두 작품의 공통점, 나아가 그의 작품 세계를 한 마디로 압축하라고 한다면, 나는 별 망설임 없이 ‘대중성’이라는 단어를 선택할 것이다. 이 단어가 가진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렇게 평가하는 게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조금 부정적인 뉘앙스를 입혀 달리 표현하면, ‘얕고 가볍다’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재미와 별개로 내게 읽힌 게이고의 작품은 얕았고 가벼웠다. 글자 하나하나를 읽지 않고 대충 건너뛰어도 100%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게 술술 읽혔다. 시간 때우기 용으로 재미있는 영화 하나 해치운 것처럼 별 잔상이 남지 않았다. 가벼움 뒤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허무함도 느껴졌다. ‘대중적’이라는 말을 구태여 깎아내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그 말이 가진 경박함을 나는 게이고의 작품에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이거였나, 이 정도였단 말인가, 하는 아쉬운 생각이 마지막 책장을 덮고 밀려온 첫 감상이었다. 


이를테면, 추리소설의 묘미는 예측 불가능성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를 찌르는 추리력, 누구나 간과하고 지나칠 사소한 일상에서 중요한 단서를 찾아내어 독자 앞에서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증명하는 장면. 종종 전율을 느끼기도 하고, 그 사건이 가지는 의미가 오랜 잔상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추리소설은 독자의 예측을 넘어서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적어도 작품 속 탐정은 독자보다는 앞발 앞서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바로 예측 불가능성이 되겠다. 한편, 누가 범인인지도 알고 왜 그런 범행을 저질렀는지 아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드라마적인 요소를 부각하는 작품도 많이 존재한다. 이 장르를 굳이 추리소설로 분류할 필요까진 없겠지만, 범죄와 탐정 등 추리소설의 주요 장치들이 등장하여 전체 이야기를 끌고 나가기 때문에, 넓은 의미로 추리소설 분류 안에 넣는 데엔 무리가 없어 보인다.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은 위에 언급한 추리소설의 두 가지 형태를 두루 갖추고 있다. 탐정 역할을 맡은, 천재적인 추리력의 물리학과 조교수.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두뇌의 소유자이자 결국 살인자로 밝혀지는 고등학교 수학 교사. 이 둘 간의 알쏭달쏭한 간접적이고 시적이기까지 한 대화 가운데 숨은 허를 찌르는 논리와 추리. 긴장과 스릴. 이 요소들은 전형적인 추리소설이 가지는 예측 불가능성의 묘미를 잘 대변해준다. 반면, 범인이 살인사건에 가담한 이유, 그의 서글픈 개인사, 살인사건이라는 끔찍한 범죄 앞에서 시종일관 보여준 무심한 듯 유심한 따뜻한 인간미, 그 진정성. 이 요소들은 논리, 추리와 별개로 드라마적인 장치로 독자들을 감동시킨다. 나는 이 두 가지의 묘한 배합이 아마도 작가 게이고가 작품 속에서 노린 신의 한 수 같은 장치였으리라고 생각한다. ‘드라마 같은 추리소설’, 내게 읽힌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추리소설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게이고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우선, 이 작품은 추리소설이 아니다. 드라마적인 요소가 전면에 나섰다. 논리와 추리의 공백은 동화를 연상시키는 판타지, 그리고 연작소설인 것 같은 느낌을 선사하는 총 다섯 장의 단편 같은 작품이 모두 나미야 잡화점,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고민 상담 편지 왕래, 어린이 보호시설인 환광원으로 연결된다는 공통점으로 충분히 채워진다. 이루고 싶은 꿈과 살아내야만 하는 현실 사이에서의 갈등, 가족 관계가 여의치 않은 어렵고 가난한 서민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 속에 진하게 배어있는 따뜻한 인간미 등이 작가가 암묵적으로 내세우고 싶었던 부분이 아닌가 싶다. 이 모든 게 내게도 충분히 읽혔다. 


장점이라면 장점일 수 있고, 단점이라면 단점일 수도 있는 사실 한 가지는, 두 작품 모두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적절한 코미디적인 요소도 군데군데 들어가 있고, 말투나 생각의 흐름이 현대적이라서, 게다가 유럽이나 미국 같은 서양이 아닌 동양, 즉 한국의 옆동네 일본이라는 문화적 요소 때문에 한국 독자들로부터 어렵지 않게 공감을 끌어내는 데에는 아주 탁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이렇게 ‘완벽하게 (?)’ 공감과 몰입이 될 정도로 재미있게 써진 이 작품들이 못내 아쉽다. 그 가벼움 때문에. 그 얕음 때문에.


인간이 공감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가진 어두운 면은 어떤 것일까? 과연 깊고 무거운 이야기들, 가만히 멈춰 서서 진중하게 생각해보면 충분히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외면하고 마는 이야기들, 감히 수면 위로 끄집어내기 싫은 불편한 진실들, 끄집어냈다가는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을뿐더러 숨기고 싶은 은밀한 본심이 탄로 날까 두려운 이야기들. 이런 것들은 원만한 인간관계에서는 다뤄지기 힘든 이야기들이다. 아무리 친밀한 관계라 하더라도 좀처럼 입 밖에 꺼내지 못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문학작품이라는 장치에서마저도 이런 것들을 다루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심연에 놓인 진실을 마주하고, 어떻게 우리 안에 상주하는 악하고 이기적인 본성을 인지, 성찰, 객관화하여 보다 나은 인간관계와 삶을 위해 몸부림칠 수 있을까? 


이런 이유로 나는 문학작품에 기대하는 게 남다른 편이다.  ‘책임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그 무엇을 나는 문학작품으로부터 바란다. 이는 내가 언젠가 쓸지도 모르는 문학작품의 방향성도 가리킨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만, ‘아무나’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들. 허투루 던져버리기 힘든 이야기들. 오랜 잔상으로 남아 보편적인 인간의 내면에 은밀하게 감춰진 그 무언가를 묵직하게 건드려서 스스로 질문하고 고뇌하고 답하게 만들 수 있는 이야기들. 문학작품만이 해낼 수 있는 고유한 특징을 나는 작품 속에서 최대한 살려내고 싶다. 이러한 면에서 게이고의 작품은 아쉽기만 하다. 가슴 따뜻해지고 진정성이 느껴지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도배하고 있지만, 책을 다 읽고 허무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아무래도 작품이 가지는 얕음과 가벼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얕음과 가벼움은 ‘공감’이라는 참 아름다운 단어 밑에 바짝 붙어 기생하여 인간 본성의 깊이와 무거움을 은폐하고 100%가 아닌 50% 정도의 표면적인 진실만을 독자들이 대하게 하어 결국 본질을 놓쳐버리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적당한 진실은 진실을 은폐하는 법이다. 여기에서 조금 과장하자면, 본질이 빠진 그 자리를 대신하여 따스한 감동과 같은 피상적인 감상으로 예쁘장하게 덧칠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느낀 독자는 아마 나뿐만이 아닐 것이란 생각이다. 비슷하게 느꼈다 할지라도 이렇게 글로 적나라하게 써내는 사람은 아주 드물겠지만 말이다. 


게이고의 작품은 시간 때우기용이 아니라면 더 읽어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주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대중성이라는 단어와 깊이와 무게에 대한 사유를 게이고 덕분에 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242?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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