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 왜 신앙의 언어는 그 힘을 잃었는가? 비아 제안들 시리즈
마커스 J. 보그 지음, 김태현 옮김 / 비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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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지경의 신앙

마커스 J. 보그 저,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를 읽고
(책의 부제: 왜 신앙의 언어는 그 힘을 잃었는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한 건 이스라엘만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을 제사장 민족 삼아 열방에 복을 전하는 게 하나님 선교의 목적이었다. 이스라엘은 열방에 본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러지 못했다. 참 이스라엘로, 그리고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 이야기의 완성이자 모든 약속의 성취로 오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다. 예수는 왕이시며 주님이시다. 구원자이자 해방자이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복음은 점점 오해되고 있다. 구원의 문화가 복음의 문화로 둔갑한 현실을 보라. 예수의 복음은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개인 영혼 구원 정도로 축소되었다. 구약의 이스라엘 이야기는 물론 예수가 공생애 기간에 가장 강조하셨던 하나님 나라 사상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예수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 사건에만 치중하게 되었다. 믿음은 사영리 같은 교리에 정신적으로 동의하는 것 정도로 축소, 변질되었다. 그 결과 구원은 개인적 죄 사함 정도로 좁혀졌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상관없이 바코드가 찍힌 천국행 티켓이 구원의 전부로 전락해버렸다. 천국은 죽어서나 갈 수 있는 막연한 곳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믿음과 신앙이 기독교의 전부라고 믿은 채 다른 것들은 모두 이단시하고 악마화하여, 열방을 위해 본이 되어야 하고 열방을 향해 뻗어나가야 할 그리스도인들은 갈수록 게토화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게나 이단들 가리기에 열을 올리고, 형님 교단, 정통 교단을 자처하며 소위 순수한 믿음과 신앙을 지키는 데 열을 올린 한국 기독교는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이것이 과연 가지를 쳐내며 남은 순수 정통 기독교인들의 모습이란 말인가. 아닐 것이다. 아마 이젠 스스로도 그렇다고 말하기엔 부끄러울 것이다. 결국 어렵게 수호한 고요한 우물은 고인 물일 뿐이었다. 고인 물은 썩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 결과가 현재 우리가 두 눈으로 목도하고 있는 안타까운 한국 기독교의 현실이다. 

성공회 소속 신약학자인 저자 마커스 J. 보그의 저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는 이러한 맥락에서 써진 책이다. 물론 미국 상황에 한정된 이야기이지만, 미국 기독교 우파의 영향을 진하게 받은 한국 기독교의 현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 책은 무언가 잘못되지 않았거나,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않았다면 써지지 않았을 책이다. 즉 이 책에 담긴 저자의 목소리에는 잘못된 무언가를 바로 잡고자 하는 소망이 진득하게 묻어있다. 그는 그리스도교 언어를 왜곡하고 잘못 이해하게 된 데에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다고 지적한다. 첫째는 그리스도교인, 비그리스도교인을 막론하고 그리스도교 언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경향. 둘째는 이른바 ‘천국과 지옥’이라고 부르는 틀로 그리스도교 언어를 해석하는 것. 요컨대 ‘문자 주의’와 ‘천국과 지옥 해석 틀’에서 그리스도교 언어가 오해된 원인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원인을 중심으로 해서 저자는 그리스도교 언어에 담긴 풍성한 의미와 지혜를 되살리고자 노력한다. 이 책은 일종의 ‘그리스도교 언어 입문서’로써 오해되고 왜곡된 언어들의 원래 의미를 되찾아주며 우리의 바른 이해를 돕는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다. 구원, 성서, 하나님, 예수, 부활, 믿음, 신앙, 자비, 의로움, 죄, 용서, 회개, 거듭남, 승천, 재림, 천국, 삼위일체, 주기도문 등. 난이도는 전혀 높지 않다.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언어를 사용하여 술술 읽히도록 쓴 저자의 배려가 돋보인다. 읽어 나가다 보면 부분적으로 혹은 전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던 개념들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깊고 풍성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단초가 되어줄 것이다.

저자는 그리스도교 언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안다고 생각하는 이들조차 그리스도교 신앙을 잘못 이해하고 곡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문자 주의’와 ‘천국과 지옥 해석 틀’은 바로 그렇게 유창하게 그리스도교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로부터 비롯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성서가 모든 걸 결정할 수 있는 것처럼 “성서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라고 묻는 대신 “저 언어가 ‘그때 거기’에서 그들에게 의미했던 바를 생각하면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자 주의’를 넘어서자고 강력하게 요청한다. 문자 그대로 믿는 근본주의적인 성경 해석은 반지성적이고 콘텍스트를 철저히 무시한 것이며 개인주의적인 욕망이 반영된 결과이다. 성경은 미지의 독자가 대상이 아니었다. 현재 우리에게 써진 게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대상 독자였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써진 책이지만, 하나님이 불러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쓴 것도 아니며, 기본적으로 그들을 위해 그들이 쓴 책인 것이다. 즉 시공간의 한계를 가진 인간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그러므로 21세기에 사는 우리들은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이 써진 콘텍스트를 이해하면서 텍스트를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적용할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우리가 처한 콘텍스트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 

‘천국과 지옥’ 플롯에 천착한 성경 해석은 여러 가지 많은 오해를 불러왔다. 그중 구원이라는 개념은 특히나 많이 왜곡되었다. 저자는 구원은 죽음 저편이 아닌 이편의 삶에서 맞이하는 변환을 뜻한다고 알려준다. 즉 구원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서 일어나는 변환과 그리고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삶에서 일어나는 변환을 모두 아우른다는 말이다. 놀랄지도 모르겠지만, 성서에서 구원은 내세와 거의 관련이 없다. 구약성서가 다루는 거의 모든 세기를 통틀어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내세를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구원에 대한 이해는 ‘천국과 지옥’ 플롯으로는 백 분의 일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저자가 우스갯소리로 지적하듯이, 만약 기독교가 “언젠가 천국에 가려면 지금 그리스도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종교라면, 기독교는 고작 조건과 보상의 종교가 되어버릴 뿐이고, 전도와 선교는 협박이 되어버릴 뿐이다.

대신 저자는 구원은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귀양살이에서의 귀환’, ‘위험에서 구출됨’을 뜻한다고 정리해준다. 즉 구원은 새로운 삶,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핵심 주제인 하느님과 언약 맺은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구원은 해방과 변환을 이야기한다. 또한 넓은 차원에서, 성서에서 말하는 구원은 개인적일 뿐 아니라 정치적이다. 성서에 나타난 구원의 정치적인 의미는 두 부분, 정의와 평화에 초점을 맞춘다. 성서에서 가장 중시하는 정의는 경제 정의다. 가난한 자과 헐벗고 굶주린 자가 구약과 신약에서 끊이지 않고 언급되고 하나님 백성들이 도와야 할 대상으로 등장하는 이유다. 레위기 19장의 거룩에 대한 내용뿐만 아니라 희년의 의미까지도 경제 정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것들 말고도 위에서 언급한 리스트에 나온 단어들의 개념 바로잡기가 책의 끝까지 지속된다. 근본주의나 보수주의 기독교라는 우물에서 평생 자라오면서 아무 문제가 없었던 그리스도인들이나 그 우물이 전 우주라고 철저히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조금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도 부분적으로 등장한다. 특히 예수와 예수의 죽음, 부활에 대한 꼭지를 읽을 때면 아마도 거부 반응이 심할 분들도 왕왕 있으리라 예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자신의 해석에 대한 근거를 논리적으로 달고 있으며, 그것을 유일한 해석이라고 강조하지도 않기 때문에 지경을 넓힌다는 차원에서라도 이 책은 꼭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국 기독교 안에서만 신앙생활을 해온 분들에겐 필독을 권한다. 기독교라는 큰 우산에서 한국 기독교가 속한 교파나 교단이 얼마나 지엽적인지 알게 되는 기회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비아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21?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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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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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한 심리, 덤덤하고 섬세하고 우아한 필체


가즈오 이시구로 저, ‘나를 보내지 마’를 읽고


‘인간의 특별함’에 대한 통찰을 얻고자 두 번째로 펴 든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 읽기 전부터 개요는 알고 있었기에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이 작품을 읽는 사람들이 흔히 겪을 ‘놀라움’이 내겐 없었다. 인상 깊었던 부분은 따로 있었다. ‘장기 기증을 위해 만들어진 복제 인간들의 삶’이라는 기발한 공상과학적인 구도보다 나에겐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작가의 필체가 더 크고 묵직하게 다가왔다. 이제는 소설을 읽을 때 독자가 아닌 작가의 입장에서 읽게 된다. 하나둘씩, 아주 조금씩 저마다 다른 작가의 고유함과 탁월함을 조용히 관찰하고, 가능하다면 그것들을 흡수하려고 노력한다. ‘남아 있는 나날’, ‘클라라와 태양’으로 이미 두 번이나 만난 가즈오 이시구로로부터 나는 작가의 내공이랄까 하는, 자세히 읽지 않으면 좀처럼 발견하기 어려운 그 무언가를 겉보기엔 무덤덤한 필체로 쓰인 것 같은 이 작품 ‘나를 보내지 마’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작가는 단 한 편의 작품만 읽어 봐도 감이 오는가 하면, 또 어떤 작가는 두세 편 읽어 봐야 제대로 감을 잡을 수가 있는데, 가즈오 이시구로는 철저히 후자에 속하는 작가였다. 사람도 처음 만날 때 다 파악되는 사람보다는 두세 번 만나면서 조금씩 진국이 드러나는 사람이 더 매력적인 법이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다가 책 뒤에 있는 옮긴이의 말에서 나는 답을 발견한 것 같았다. 옮긴이 김남주가 쓴 문장이었다. 아래에 옮겨본다. 


“의도적으로 나직하게 읊조리며 감정의 골목골목을 찬찬히 답파하는 그의 문장은 ‘그랬다’와 ‘그랬을 수도 있다’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독자에게 환기해 주는, 요컨대 뉘앙스에 주목하는 섬세한 어떤 것이다. 그러니까 작가는 사건이나 정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 정황에 관계하는 심리의 결을 고운 붓질로 드러내고자 한다. 그리하여 화자의 성격뿐 아니라 저자의 성격, 그리고 작품의 성격까지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성과를 거둔다. 오늘의 세계 문학을 이끌어 가는 우아함과 미묘함에 대해 알게 됐다는 독자의 고백을 저자에게 안겨 준, 우리가 왜 책을 읽는가 하는 물음에 값하는 작품이다.”


우아함과 미묘함. 심리의 결을 드러내는 고운 붓질. 나는 이것보다 내가 느낀 바를 더 잘 표현할 자신이 없다. 말문이 막혀 웅얼대는 사람에게 적절한 단어가 주어져 굳이 말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이 작품은 언뜻 성장 소설로 읽힐 수 있다. 별다른 설명이나 뚜렷한 단서 없이 평범한 학교 생활이 책의 앞 절반 정도를 이루고 있으며, 동일한 등장인물들이 성인이 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간중간에 아주 간접적인 단서들이 숨어 있는데, 아무것도 모른 채 무턱대고 성장 소설로 읽다가 그 단서를 만나게 되면 아마도 독자들은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재해석을 가해야만 하는 입장에 놓일지도 모르겠다. 설마 하는 호기심과 두려움이 반반씩 섞인 감정을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뜬금없이 눈앞에 닥친, 작지만 묵직한 단서 앞에 서게 될 때의 비장함을 떠올리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스토리텔링이 극적인 효과를 거두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이 구도를 위한 방법으로 이보다 더 효율적인 게 있었을까 싶다. 내가 보기에 가즈오 이시구로는 탁월하다.


그렇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모두 복제 인간이다. 그들이 태어난 이유는 단 하나. 장기 기증이다.  (‘기증’이라 써놓고 ‘탈취’ 혹은 ‘강탈’이라고 읽는다). 장기를 가장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복제 인간 안이었던 것이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될 즈음이면 궁금한 게 하나둘 생겨난다. 이들 복제 인간의 존엄성은 무엇일까, 이들에겐 영혼이 존재할까, 이들의 존재 가치는 무엇일까, 등등의 일련의 물음들이 답 없이 나열되기 시작한다. 물론 모든 게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이기 때문에 현실성이라는 측면에선 터무니없이 거리가 멀지만, 철학적으로나 인문학적으로, 그리고 과학 윤리학적으로 충분히 깊게 생각해볼 만한 거리가 된다. 


이런 묵직한 주제에 더하여 나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필체에 반하게 되었는데, 조곤조곤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섬세한 기법과 특별한 것 없이 아주 일상적인 소재들로 사람의 미묘한 심리를 탁월하게 풀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감탄을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본성과 심리 하면 도스토예프스키를 제일 먼저 손꼽는 나로서 가즈오 이시구로의 색다른 표현 방법을 목도하곤 사실 조금 놀라워서 어안이 벙벙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가즈오 이시구로의 차이는 아마도 앞서 언급한 ‘미묘함’이라 생각한다. 그 미묘함이 가진 섬세함을 표현하기에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덤덤한 필체가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뜻하지 않았던 곳에서 만난 행운이랄까. 아직 읽지 않은 그의 작품들이 선물로 여겨진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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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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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이 아닌 악과 함께 살아가는 한 사람

김영하 저,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고

정유정의 ‘종의 기원’을 읽은 직후 우연찮게 손에 든 책이 하필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이라니! 살인자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쓴 일기 형식이라는 점에서 두 작품은 접점을 가진다. 그러나 그 접점 말곤 전혀 다른 느낌이다. ‘종의 기원’에서는 사이코패스로 태어난 한유진이라는 젊은 남성 내면에서 악의 발현과 진화를 현재 진행형으로 현장감 있게 관찰할 수 있다면, ‘살인자의 기억법’에서는 25년 전까지 숱하게 사람을 죽인 연쇄살인범이었던 70세 노인이 알츠하이머에 걸려 망각의 강으로 빠져드는 과정과 망상의 난잡함 속에서 허우적대는 모습,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지키고 싶었던 사람을 죽이게 되는 과정을 목도할 수 있다. ‘종의 기원’이 사람 자체보다 그 사람 안에서 일하는 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살인자의 기억법’은 악보다는 그 악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사이코패스보다는 알츠하이머라는 설정이, 또한 젊은 남성보다는 노인이라는 설정이 사람 자체에 집중하게 만드는 요인이 아닌가 한다. 정유정과 김영하는 제각기 작품의 성격과 목적에 부합하는 살인자의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절묘하게 삼고 있는 것이다. 

두 작품 연이어 살인자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소설이라는 장치가 선사하는 유일한 장점을 다시 깨닫게 된다. 소설이 아니면 어떻게 살인자의 마음을, 끔찍하지만, 따라가며 공감까지 할 수 있겠는가 싶기 때문이다. 아무리 신학과 철학에서 악의 문제를 종교적이고 관념적으로 연구한다 하더라도 소설이 주는 생생한 현장감은 결코 흉내 내지 못할 것이다. 악은 관념으로 머물 때가 아닌 형체를 입고 발현할 때 비로소 악이라 정의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발현의 통로는 사물이나 자연이 아닌 항상 인간이라는 점에서 소설은 악의 문제를 다루는 데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도구임에 틀림없다. 내가 조직신학의 인간론과 신정론을 공부할 때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을 때 인간의 본성과 악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현대 한국 소설가들의 작품을 자투리 시간이 날 때마다 읽어나가고 있다. 대표적인 작가들의 작품 서너 편 정도씩 읽고 나면 한국 현대 소설의 흐름이 어느 정도 보일 것 같다. 정유정의 문장과 또 다른 느낌을 주는 김영하의 문장들을 읽어나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한국 현대 소설을 읽고 나면 무언가 휑하다는 느낌에 젖는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고전 문학에서 충만하게 채워지던 그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어쨌거나 언젠가는 쓰게 될 내 소설의 스타일과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는 것 같아 나름 만족스럽긴 하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15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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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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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진화

 
정유정 저, ‘종의 기원’을 읽고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이 따로 존재할까? 사람을 그렇게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일까? 선한 사람은 선한 행동을, 악한 사람은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일까? 행동은 생각과 마음에서 기인하므로 선한 행동은 선한 생각과 선한 마음에서, 악한 행동은 악한 생각과 악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사람이 그렇게 단순한 존재일까? 아닐 것이다. 생각과 마음과 행동을 언제나 같은 방향으로 보는 건 인간의 본성을 전혀 모르거나 인간관계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사람의 유아적 발상에 불과하다. 이율배반성, 모순, 예측불허성과 같은 단어들이 존재하는 이유, 인간관계가 가장 어렵다고 말하는 이유, 심리학과 정신분석학과 범죄학이 대두되고 발전한 이유, 심지어 도스토예프스키가 시대를 초월하여 지속해서 읽히는 이유 역시 인간의 본성은 함부로 정의할 수 없으며 복합적이고 심층적인 그 무엇이기 때문일 것이다. 선과 악의 대립이 창작의 영역에서 빠질 수 없는 주제가 되는 이유도 여전히 인간의 본성은 신비의 영역에 놓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솔직히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른다. 자신이 좋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고 싫기도 하는, 인간은 요컨대 결코 어떤 하나의 딱지를 붙여서 정의할 수 없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휘몰아치는 필체를 구사하는 베스트셀러 작가 정유정은 이번에도 인간의 악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역시나 섬뜩하다. ‘7년의 밤’에서 오영제로, ‘28’에서 박동해로 분한 악이 ‘종의 기원’에서는 한유진으로 분한다. 한유진의 악은 오영제와 박동해의 그것보다 더 강하게 그려진다. 게다가 한유진은 박동해와 오영제보다도 어리다. 오영제는 가정을 가진 중년 남성이었고, 박동해는 군대를 다녀온 청년이었다. 한유진은 태생부터 사이코패스로 등장한다. 악의 발현도 훨씬 이르다. 한유진은 일찍이 9살 때 첫 살인을 저지른다. 대상은 친형이었다. 소설 속 현재는 한유진이 26세로 그려지는데, 분량의 대부분은 한유진이 전혀 모르는 여자 한 명과, 엄마, 이모를 며칠 사이에 간단히, 깔끔하게 다 죽여버리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에 할애되어 있다.

사이코패스라는 설정은 독자가 한유진을 그나마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데, 한유진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통찰할 수 있는 렌즈로 작용한다. 특히, 간질인 줄 알고 평생 약을 먹고 살아왔는데, 실제로 그 약은 간질이 아니라 그의 안에 내재하는 사이코패스의 발현을 억누르기 위해 사용된 것이었다는 설정은 한유진의 분노를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한다. 어릴 적 세계적인 수영 선수로 활약할 수 있었던 그의 삶을 망가뜨린 장본인은 약이었고, 그 약의 정체를 속여 성인이 될 때까지 그를 조절했던 모든 기획은 정신과 의사였던 이모와 엄마의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가장 포식자에 해당하는 부류에 속한 한유진을 사회에 무해한 존재로 평범하게 키우기 위한 이모와 엄마의 마음도 충분히 공감이 갔지만, 사이코패스라는 사실을 차치하고 평생 먹은 약의 정체와 자신의 실제 상태를 모른 채 살아온 한 인간의 비애를 생각하면 그것 역시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을까, 사이코패스와 악을 과연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사이코패스 역시 한 인간이라서 인권과 인격이 있기 때문에 동물처럼 애완동물처럼 취급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소설 속 플롯은 사이코패스로 태어난 사람을 어떻게 가정과 사회에서 대우하고 보살펴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경고장으로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7년의 밤’이나 ‘28’에서와는 달리 ‘종의 기원’은 한유진의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였다. 3인칭으로 존재하던 악의 실체가 1인칭, 그것도 1인칭 관찰자도 아니고 급기야 1인칭 주인공 자리로 등극한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살인자의 독백이나 일기로 읽을 수도 있다. 이는 정유정이 인간의 탈을 쓴 악의 실체를 소설 속에서 구현하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하고 애를 썼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소설 속 주인공은 어쨌거나 작가의 일종의 분신이기 마련이기에 이 작품을 쓰면서 얼마나 정유정이 악의 모습을 치열하게 연구하고 노력했을지 생각하면 감탄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악은 진화한다. 적어도 정유정의 작품 세계에서는 분명한 것 같고, 그녀가 작품 후기에서 밝히듯 그녀 역시 이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까 싶다. 한유진이라는 가상의 캐릭터를 통해 악의 화신을 불러내어 우리 모두 안에 조금씩은 존재할 악함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끔찍하지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믿고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유정의 작품에 매혹되고 단숨에 읽어내고야 마는 우리들은 어느 정도 우리 안에 내재하는 오영제와 박동해와 한유진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유정은 한유진의 내면세계를 두 가지 방법으로 기술한다. 하나는 일기와도 같은 실시간 독백이다. 사이코패스라고 해도 한 인간임을 강조하고 싶은 저자의 의도도 잘 녹아 있다. 한유진 역시 갈등하고 고민하고 걱정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과거 회상이다. 약과 발작, 그리고 의도적 망상 때문에 불완전한 과거 기억을 완전한 기억으로 짜 맞춰가는 과정에서 독자들은 긴장과 스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추적해가는 과정, 그에 따라 한유진의 마음과 생각이 변모해가는 과정에서는 애처로움까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공감은 한유진이 순간 저질러버리는 범행으로 인해 삽시간에 사라져 버리지만 말이다. 한유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고 마는 그 본능은 현실세계에서 살인자의 주도면밀함으로 나타난다. 독자의 입장에선 기겁할 수밖에 없는 장면들이 여럿 등장하기 때문에 3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두세 시간이면 아마도 다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풀어가는 사람이 사이코패스 살인자라는 설정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임팩트가 있는 작품인데, 작가가 정유정이라는 점까지 감안하면 ‘종의 기원’은 정유정 팬이라면 놓칠 수 없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인간의 악함에 대한 사유 또한 해볼 수 있는 기회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은행나무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14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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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시아의 여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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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많은 펠리시아를 생각하며.


윌리엄 트레버 저, ‘펠리시아의 여정’을 읽고.

아일랜드 출신 소녀 펠리시아는 어느 날 그녀에게 성큼 다가온 한 남자 조니 라이서트와 사랑에 빠진다. 스스로도 볼품없는 외모를 가졌다고 여기던 그녀였기에 펠리시아의 눈은 자신에게 다가온 남자의 천박함을 꿰뚫어 볼 만큼 밝지 못했다. 조니는 그저 펠리시아를 갖고 논 건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짧은 만남이 한 여름밤의 불장난으로 끝났다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그것은 흔적을 남겼다. 펠리시아의 몸에 누구도 원하지 않는 생명의 씨앗을 남기고 말았다. 

어린 펠리시아에겐 감당하지 못할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앞으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판단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펠리시아는 할머니의 돈을 훔쳐 가족 몰래 영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한 뒤 대범하게도 행동에 옮겨버린다. 목적은 단 하나였다. 조니를 찾기 위해서였다. 아이 아빠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한 사랑이라 믿었던 불장난을 현실에서 연장하고 싶었던 한 순진한 소녀의 몽상에 불과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펠리시아는 조니가 아닌 어떤 다른 남자가 다가왔어도 똑같은 결과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세상사를 전혀 몰랐던 펠리시아는 쳇바퀴 도는 지긋지긋하고 궁핍하고 수렁과도 같았던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특히나, 한 세계를 탈출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을 땐 진실의 옷을 입은 거짓을 잘 분별해내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펠리시아에게 있어 조니는 그저 때마침 열린 하나의 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펠리시아는 그걸 운명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온몸을 던졌지만 말이다. 

이렇게 시작된 펠리시아의 여정은 낯선 영국 땅에서 실패로 끝나고 만다. 시작부터 비극이었는데 끝까지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 펠리시아는 조니를 끝내 찾지 못한다. 대신, 운명의 장난인 걸까. 펠리시아에게 친절을 베풀며 다가온 한 낯선 남자와의 인연이 시작되는데, 그는 불행히도 연쇄 살인범이었다. 너무나도 평범하게 보이는 영국 남자 힐디치. 그는 이미 과거에 여러 여자를 유인해서 들키지 않고 살인한 경험이 있었다. 펠리시아는 그에게 굴러들어 온 다음 타깃이었던 것이다. 물론 결말에 가서 힐디치는 펠리시아를 죽이지는 못한 채 자살을 택하고 말지만 말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뒤끝이 개운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의 99퍼센트가 끝이 날 즈음에야 저자가 말하려던 메시지가 수면 위로 드러나서 맥이 빠진다는 기분도 들었다. 중요한 것에 비중이 제대로 실리지 않았다는 느낌이랄까. 비중의 불균형이랄까. 작품 뒤에 달린 해설에도 그렇게 쓰여 있다. 이 작품은 선함에 관한 이야기라고. 그 선함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노숙자와 같은 약자와 소수자들 사이에서 더 잘 드러날 수 있다고. 그러나 힐디치 역시 아주 평범한 사람 중 하나로 설정해놓은 건 평범한 사람들 중에도 선함뿐만이 아닌 악함도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선함에 관한 이야기만이 아닌 악함에 관한 이야기로도 읽힐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여느 작품에서와는 달리, 어떤 특별한 계층의 이야기가 아닌 아주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선과 악의 이야기가 일상에 녹아든 작품인 것이다. 

처음 읽는 윌리엄 트레버. 필체가 예사롭지 않다.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간접적인 표현을 주로 사용하며 독자로 하여금 충분히 눈치챌 수 있게 만드는 묘한 힘을 아주 잘 구사한다. 우아하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해 보인다. 다분히 비현실적인 이야기 소재로 3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지루함 없이 진행시키는 필력 또한 탁월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작품 마지막에 가서 노숙자의 삶을 받아들이고 그 삶에 임한 평안함에 익숙해지는 펠리시아의 모습에서 나는 결연함과 동시에 안쓰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가 살해당하지 않은 것보다 나는 그녀가 스스로 삶을 마감하지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펠리시아, 지금 내가 사는 곳에서도 존재할 펠리시아를 생각하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묻는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12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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