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의미
폴라 구더 지음, 이여진 옮김 / 도서출판 학영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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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적인 기다림: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


폴라 구더 저, ‘기다림의 의미’를 읽고

하나님 나라는 시간적인 의미에서 이중성을 지닌다. 이미 왔으나 아직 오지 않은, 소위 ‘이미 (already)’와 ‘아직 (yet)’ 사이에 존재하는 나라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긴장과 갈등이 공존한다. 이미 얻은 변화와 평안만이 아닌, 아직 얻지 못한 변화와 평안도 존재한다. 바울이 권면했듯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 시기도 바로 이 시간표에 해당한다. 그 시간표는 곧 현재, 오늘, ‘지금, 여기’이다. 구원을 이미 다 얻은 것처럼, 그래서 마치 더 이상 아무것도 할 게 없는 것처럼 수동적으로 넋 놓고 앉아 막연한 천국을 기다리는 자세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역동적으로 성령의 인도를 구하며 하나님 나라를 받치는 거대한 두 축인 여호와의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려고 애쓰면서 오늘을 그날처럼 살아내는 자세야말로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낸다는 것의 참된 의미일 것이다. 

이 경계에 놓인 시간표는 곧 기다림의 시간이기도 하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선진들과 마찬가지로 기다림의 시간표에 놓여 있다. 이미 왔으나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 이 기이한 나라에 속한 백성의 주된 임무는 어쩌면 ‘역동적인 기다림’이라고 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왔기 때문에 정착하여 영원히 거류민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든 떠날 준비를 갖춘 채 나그네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늘 깨어 있어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개인과 사회, 나와 타자와 세상을 함께 돌보는 삶, 곧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이 기다림의 시간은 단순한 대기 시간이 아니다. 그 자체로써 의미를 지닌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제목 ‘기다림의 의미’와 원제 ‘The Meaning is in the Waiting’이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영국 신학자인 저자 폴라 구더는 이 책에서 그 기다림의 의미를 유연하고 대중적이며 친숙한 필체로 쉽게 풀어준다. 이 책은 어려운 신학 책이 아니다. 묵상집이다. 특별히 대림절 기간에 맞추어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기다림의 역동적인 의미에 대한 저자의 개인적인 묵상이 담겨 있다.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4주에 걸쳐 진행되는 대림절에 맞춰진 것이다. 첫째 주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기다림, 둘째 주는 선지자들의 기다림, 셋째 주는 세례 요한의 기다림, 그리고 마지막 넷째 주는 마리아의 기다림. 이 네 가지 서로 다른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선 서로 같은) 기다림의 의미를 저자는 성서학 전공자답게 해당 성경 본문을 인용하고 해석하면서 친절하게 풀어준다. 각 장의 주요 인물은 모두 과거의 사람들이지만, 저자는 그 기다림의 동일한 의미를 오늘날로 불러와 우리에게 적용시켜주는 일을 잊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맥락에서 기다림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여기 미국에는 11월 말 Thanksgiving 주가 지나면 곧바로 크리스마스트리가 판매되기 시작하고, 길거리에 심긴 나무들은 알록달록한 전구들로 이뤄진 옷을 입으며, 라디오를 틀면 캐럴이 들리기 시작한다. “It’s the most wonderful time of the year.”이라거나 성탄을 기뻐하자는 가사의 노래들이 여기저기서 다른 목소리와 다른 버전으로 울려 퍼진다. 마치 오늘이 벌써 크리스마스라도 되는 것처럼, 마치 12월 25일 하루만이 아니라 매일을 크리스마스로 기념할 것처럼 들뜬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여념이 없다. 그러나 이런 광경을 보면서 나는 과연 미국인들이 누구보다 진지하게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 건지, 기독교 국가로 시작된 미국이라지만, 과연 그 정신이 이런 분위기 속에 아직 살아있는 건지 의문이 든다. 크리스마스라는 날은 더 이상 예수의 탄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저 상품화된 휴일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분위기가 충만한 가운데 나는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나는 기다림은 머리가 아닌 몸의 일이라는, 이 단순하고도 명쾌한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단순히 성탄절의 중요성을 관념적으로 깨닫는다고 해서 대림절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는 없다는 사실도 되새기게 된다. 기다리는 하루하루가 모두 성탄절인 것처럼 호들갑 떠는 행위가 결코 기다리는 사람의 진정성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징하게 인지하게 된다. 진정한 기다림은 요란함과 화려함 속에 있지 않다. 오히려 고요함과 담백함 속에 있다. 미래를 현재로 앞당겨 그날의 기쁨을 미리 맛보려는 동기와 행위는 결코 그날을 기다리는 사람의 바른 마음이 아니다. 그 사람의 마음 중심에는 현재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미래를 진정성 있게 기다린다는 것은 현재를 버리고 미래로 대체하는 게 아니라, 현재가 가지는 의미를 과거의 맥락으로부터 견지하는 동시에 현재만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사랑하며, ‘지금, 여기’에서 해야만 하는 일을 오늘도 성실하고 묵묵하게 해내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내는 행위만이 현재에 살아있는 자가 될 수 있다. 특별한 하루가 아닌 평범한 일상에 임하는 희미한 구원의 빛을 알아채고 감사하며 늘 깨어 있는 삶. 바로 역동적인 기다림의 삶,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일 것이다.

#학영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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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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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성과 불가능성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추억, 그 기억의 파편들

(추억에 닿지 못하고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인간의 한계와 숙명에 대하여)

 

파트릭 모디아노 저,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를 읽고

 

지극히 사무적이고 지극히 무미건조한, 아무런 감정도 아무런 사람 냄새도 맡을 수 없는 차갑기만 한 장부. 누군가에겐 그토록 소중한 의미를 주는 반면, 또 누군가에겐 아무런 의미도 주지 않는, 단 한두 장만으로 만들어진 공식 서류. 여백이 대부분인 그 안은 성의 없는 글씨체로 타이핑된 문자들이 채우고 있다. 결코 많지 않은 글자와 숫자들. 그러나 한 사람의 인생, 혹은 한 가족의 인생이 그 제한된 수의 글자와 숫자들 안에 압축되어 있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수십 년에 이르는 세월이 농축되어 있다. 그래서 그 어느 서류보다도 깊은 무게를 지니는 장부. 지금은 사라지고 가족관계 증명서 등으로 대체된, 바로 ‘호적부’다.

 

두 번째로 만나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이 작품은 ‘호적부’라는 원제목을 가진다.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라는 번역본 제목은 파트릭 모디아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한 사람 (번역가 김화영 이리라. 그는 처음으로 파트릭 모디아노를 한국에 소개한 장본인이다)의 원제목에 대한 해석이다. 하나의 해석은 해석한 자의 관점을 반영하기에 해석 전의 어떤 대상이 가지는 본래의 의미를 축소시키는 법. 다 읽고 나니 ‘호적부’라는 원제목을 그대로 사용했으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것이 가진 단순하고도 형용할 수 없는 묵직한 의미를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제목 때문에 끌려서 읽게 되는 작품이 아니라, 끝까지 읽고 나서야 비로소 제목을 이해하게 되는 작품이 가지는 매력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절대 놓칠 수 없는 소중한 즐거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라는 제목은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해준다고 생각된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서 느꼈던 파트릭 모디아노만의 고유한 스타일은 그보다 1년 먼저 출간되었던 이 작품 속에도 그대로, 아니 어쩌면 더 진하게 녹아있다. 읽는 도중 끊임없이 궁금해지는 작품. 다 읽고 나서도 무언가 놓친 게 있는 것 같아 그것을 찾기 위해 다시 책장을 뒤적이게 되는 작품. 하지만 그 시도가 매번 실패하고 마는 작품. 총 열다섯 장으로 이뤄진 이 작품은 장편소설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시간 순을 따르지도 않고, 그 역순을 따르지도 않으며, 액자 속 이야기로 구성되지도 않고, 연작 소설도 아니며, 심지어 ‘나’라는 주인공이 매 장마다 같은지 다른지조차 묘연한 작품이다. 그러나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라는 글귀를 등불로 삼아 이 작품을 비춰보면 비로소 기이하게만 느껴지는, 어쩌면 누군가에겐 어렵다거나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여겨지는, 마치 오래된 기억의 불완전한 파편과도 같은 각 장 사이의 연결점이 보인다. 바로 추억이다. 그 추억을 이루는 기억의 파편들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여느 장편을 대하듯 읽어나간다면 이 작품만이 가진 본연의 맛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중도하차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나 파트릭 모디아노의 매력을 제대로 느껴본, 혹은 느껴보고 싶은 독자라면 그 정수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서의 주인공 직업은 탐정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 속 여러 (?) 주인공 역시 어떤 면에서는 모두 탐정들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어쩌면 정체가 묘연한 작품 속 주인공들은 바로 우리 자신을 대변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린 모두 본능적으로 불완전한 파편들만이 남은 과거의 기억을 되찾고 싶어 하며, 그것에서 향수를 느끼고, 때론 안정감을, 때론 과거의 망령에 다시금 사로잡히는 생생한 불안과 공포를 평생 살아가면서 경험하기 때문이다. 탐정이라서가 아니라 인간이라서 그런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기억을 더듬고 추억에 잠기기도 하며, 비록 불완전하고 결코 완성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숙명처럼 누가 시키거나 부탁하지 않아도 스스로 계속해서 기억의 파편들을 수집해나가기 때문이다. 즉, 파트릭 모디아노만의 고유한 스타일은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을 번역한 김화영의 해설처럼 파트릭 모디아노의 작품 스타일이 주는 매력은 아무래도 ‘유예’인 듯하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자연스럽게 궁금해지는 것들을 의도적으로 계속해서 보여주지 않는 방법, 즉 ‘끊임없이 유예되는 기대’가 바로 파트릭 모디아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 키워드가 아닌가 싶다. 이 때문에 작품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이 때문에 인간이 처한 숙명과 한계, 즉 불완전한 기억의 파편들을 수집하지만 결코 완성하지 못할 추억을 찾는, 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을 과장이나 왜곡 없이 가만히 응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캉은 기표는 기의에 닿지 못하고 끊임없이 미끄러진다고 했다. 어떤 의미가 기호로 표현될 수 있어도 결코 그 기호만으로는 궁극적인 의미의 전부를 드러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기억의 파편들을 찾아 나서는 이유도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숙명에 처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기원을 알 수 없고 실체를 알 수 없는 추억을 완성하고 싶어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숙명. 즉, 추억은 실체가 없을지도 모르는 것이고, 적어도 우리가 주워 담는 파편들로는 결코 완성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또 조각들을 찾아 나선다. 궁극의 추억에 닿으려고 애쓴다. 인간의 한계이자 숙명이다. 불완전성과 불가능성. 이는 추억이 아름다운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파트릭 모디아노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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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20세기 저녁과 작은 전환점들 쏜살 문고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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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담아낸 목소리


가즈오 이시구로 저, ‘나의 20세기 저녁과 작은 전환점들’을 읽고
(2017년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집)

멜로디와 가사가 아무리 좋아도 적당한 목소리를 만나지 못하면 그 곡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같은 곡도 부르는 목소리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법이다. 편곡과 개사 역시 곡을 다른 느낌으로 들리게 할 수는 있지만 목소리만큼의 직접적이고 직관적이며 심금을 울리는 강력한 힘은 갖지 못한다. 우린 귀로는 멜로디와 가사를, 마음과 영혼으로는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어떤 노래를  들을 때 마음에 감동을 느끼는 것도 목소리의 힘이 크다. 누가 부르느냐, 즉 곡 자체보다는 가수, 다시 말해 목소리가 곡의 전달에 있어서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가사가 아닌 목소리에 집중한다. 텍스트로 된 가사가 아닌 다양하고 다채로운 목소리의 고유한 음색 (질)과 성량 (양)을 글로 담아낸다. 이것이 비밀이었다. 이것이 바로 가즈오 이시구로의 비법이었다. 정확한 문장을 고집하는 신형철의 글쓰기론으로는 도무지 가즈오 이시구로의 글쓰기를 설명할 수 없었던 이유다. 

그는 2017년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노래의 중간쯤 가수가 우리에게 자신의 가슴이 찢어진다고 토로하는 순간이 나옵니다. 그 감정 자체와,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몹시 애쓰지만 결국 굴복하고 마는 저항 사이의 긴장 때문에 그 순간은 거의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감동적입니다. ……|

이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 이 자리에서 제가 다른 많은 경우에도 가수들의 음색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랫말보다는 가수가 노래하는 방식에서 말입니다. 모두 알듯이 노래 속에서 사람의 목소리는 헤아릴 길 없이 복잡하게 뒤섞인 감정을 표현합니다. 여러 해에 걸쳐 구체적인 면에서 내 글쓰기는 여러 가수들, 특히 밥 딜런, ……, 의 영향을 받아 왔습니다. 그들의 목소리에서 뭔가를 포착하면서 나는 나 자신에게 중얼거렸습니다. “아, 그래, 이거야. 이게 내가 그 장면에서 포착하고자 했던 거야. 이것과 아주 비슷한 그 무엇이라고.” 내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가수의 목소리 속에는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겨누어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

목소리는 곧 사람이다. 이성으로 좀처럼 포장할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자 깊은 영혼이 묻어 나오는 그 무엇이다. 그 시간 그 공간 특이적인 성질을 가지는 동시에 그 사람만의 고유한 특색도 담아낸다. 우리가 어떤 글을 읽고 말할 수 없이 묵직한 전율이나 울림을 느끼는 건 이성보다는 정서를 통해서다. 사람이란 존재 자체가 이성적이기보다는 정서에 호소하고 또 그것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가. 그러므로 가사가 아닌 목소리를 텍스트로 담아낸 글이야말로 좀처럼 쉽게 설명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참고로 원제는 ‘My twentieth Century Evening and Other Small Breakthrough’인데, 한글 제목에서 Evening을 ‘저녁’으로 번역한 건 뭔가 어색하다. 20세기가 지는 시점, 그러니까 21세기를 맞이하기 직전의 시기를 의미하는 문학적인 수사로 읽는 게 자연스럽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글에 어울리게 ‘황혼’이나 ‘저물 무렵’ 정도로 번역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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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고아였을 때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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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이한 문장들로 이뤄진 결코 평이하지 않은 글

가즈오 이시구로 저, ‘우리가 고아였을 때’를 읽고

매료되었던 작가의 또 다른 면목을 확인할 수 있었던 작품. 이 작품으로 가즈오 이시구로를 처음 만났다면 과연 나는 그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조금은 낯선 인상을 받기도 했던 작품. 동시에,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 다섯 편, ‘남아 있는 나날’, ‘클라라와 태양’, '나를 보내지 마’,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창백한 언덕 풍경’을 읽고 충분히 그에 대한 검증이 끝난 후에 접하게 되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된 작품. 그러나 이전에 내가 읽은 다섯 편의 작품이 A+였다면, 이번 작품은 A- 정도로 여겨질 뿐, 여전히 A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나를 매혹시킨 가즈오 이시구로의 글쓰기는 여전히 이 작품 안에도 살아있고 나는 그것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었다. 독자의 눈이 아닌 작가의 눈으로 작품을 읽어내는 맛은 내겐 또 다른 즐거움이다.

평이한 문장들. 그러나 그 평이한 문장들이 모여 결코 평이하지 않은 글이 만들어진다. 이것이 가즈오 이시구로의 힘이다. 정확한 단어 선별과 구성으로 집을 짓듯 글을 짓는 신형철의 글쓰기론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문장들. 언젠가부터 나에겐 낯설고 매혹적인 세계로 다가왔고, 덕분에 나는 또 다른 선생으로부터 글쓰기를 배우게 되었다. 고급스럽지도 화려하지도 않을뿐더러 예리하지도 정확하지도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의 문장들을 읽고 나면 나는 어느새 가랑비에 옷이 젖듯 어떤 우수에 온몸이 다 젖고 만다. 그리고 나는 한 사람의 숨겨진 정서를 묵직하게 건드리는 힘은 문장의 정확함이나 예리함이 아닌 문장과 문장 사이에 깃든 작가의 정서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작가와 독자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도 드러난 문장이 아닌 드러나지 않은 문장 사이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독특한 진정성을 맛보고 싶다면 나는 가즈오 이시구로를 권한다. 특히 황혼을 나지막이 노래한 세 작품, ‘창백한 언덕 풍경’,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그리고 ‘남아 있는 나날’을 먼저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러면 내가 지금 이렇게 내뱉는 독백이 무슨 말인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 유명한 셜록 홈스의 배경이 된 영국 런던이 이 작품의 중심 배경 중 하나였기 때문일까. 가즈오 이시구로의 각 작품 속엔 주인공의 직업이 모두 다른데, 이 작품의 경우 조금은 엉뚱하게도 사설탐정이다. 주인공을 탐정으로 설정한 이유는 아무래도 그의 과거를 좇아 나서는 한 사람, 그렇게 하면서 과거에 묶일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의 심리를 그려내고 싶어서이지 않을까 하는 짐작을 해본다. 이 작품 역시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보편적인 정서를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언뜻 불완전하고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나서는 탐정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작품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가 연상되기도 한다. 또한, 제목에서도 쉽게 알 수 있듯, 상하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주인공 크리스토퍼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고아다. 그는 지인의 도움으로 부모 없이 영국으로 건너와 남은 학창 시절을 보내고 대학을 졸업하고 탐정이라는 직업으로 살아가게 된다. 부모의 생사는 작품 끝에 가서야 밝혀지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크리스토퍼는 부모의 생사를 모른 채 중년이 될 때까지 고아로서의 정체성으로 살아가게 된다. 나중에 부모의 생사를 알게 되고 나서도 그가 혼자라는 사실은 전혀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크리스토퍼는 평생을 고아로서 살아낸 인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탐정이면서 고아인 인물. 매듭지어지지 않은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홀로 거대한 음모와 시대 상황 (제2차 세계대전 전후가 이 작품의 시대 배경이다. 그러고 보면 가즈오 이시구로의 여러 작품이 그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을 맞서서 싸워내는 인물. 현실성이나 역사성을 따지기보다 우리는 크리스토퍼의 마음과 눈에 주목해야 한다. 화려하고 도도하게 보이지만 뭇사람들로부터 암묵적으로 외면당하는 세라에 대한 크리스토퍼의 마음과 눈, 그리고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는 고아 소녀 제니퍼를 양녀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녀의 장래까지 아버지의 입장에서 신경 써주는 그의 마음과 눈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나지막이 읊조리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고아의 마음과 눈으로 본 세상과 타자, 그리고 그 가운데 존재하는 다른 고아들이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담기게 될 것이다. 나아가, 어쩌면 우리 모두가 고아 처지에 놓인 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묻게 될지도 모른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가즈오 이시구로 읽기
1. 남아 있는 나날: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575920555786044
2. 클라라와 태양: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415671625144252
3. 나를 보내지 마: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479150188796395
4.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785763058135105
5. 창백한 언덕 풍경: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820726917972052
6. 우리가 고아였을 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861357717242305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68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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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석영중 지음 / 열린책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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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의 선별과 압축을 통해 다시 만나는 도스토예프스키

석영중 저,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을 읽고

마음 담아 읽었던 작품들을 하나씩 꺼내 보며 회상에 잠기는 시간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비밀의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또 하나의 은밀한 즐거움이다. 감동의 깊이와 세기는 배가되어 장기 기억으로 저장될 확률이 높아지게 된다. 감동의 각인,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깊은 만족감은 첫 방문이 아닌 재방문하는 성실한 자만이 취할 수 있는 소중한 열매다. 뿐만 아니다. 처음 읽을 때 느꼈던 감동을 복기하는 경험은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효과를 낸다. 반복, 심화의 효과도 있지만, 재발견의 기쁨도 있다. 처음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는 경험.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전율과 함께 예기치 않게 작품 전체까지 재조명하게 되어 작품을 보다 깊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또한 재방문할 때에만 보이는 것들도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어떤 작품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증거는 어쩌면 재독의 유무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인할 수 없이 안타까운 부분도 존재한다. 밑줄까지 그으며 읽었던 아름다운 문장들도 인간의 망각을 이겨낼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아무리 기억하고 싶어도 작품의 상당 부분은 잊히기 마련이다. 재방문은 우리에게 만족과 전율만이 아닌 당황스러움, 나아가 허망함까지 선사해주는 것이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면 망각은 자연스러운 친구가 되고, 가슴을 가득 채웠던 감동의 순간들은 안개처럼 사라져 급기야 읽기의 효율성과 유용성까지도 따지게 된다. ‘어떡하면 잘 기억할 수 있을까?’에서부터 ‘또 잊어버릴 텐데 읽어서 뭐하나?’ 싶은 생각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로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방문 (책의 경우는 재독, 영화의 경우는 재시청)은 결코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라고 나는 믿는다. 좋은 작품은 소장하고 싶어 지고, 또 읽고 싶어 지며, 다른 번역본이 존재한다면 그것까지도 읽고 싶어 진다. 가끔 뭘 읽을지 망설일 때나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면 이런 재방문은 언제나 마음 놓고 찾게 되는 안식처가 되어준다.  

좋아하는 작가와 그 작가의 작품들을 연구하고 해석한 2차 자료들은 재방문과 더불어 더욱 풍성한 작품의 이해를 돕는다. 특히 자신의 느낌이나 해석과 결이 같은 사람이 쓴 2차 자료는 한 번도 만난 적 없으나 만나면 마치 오래 알고 지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처럼 친숙한 반가움을 선사한다. 게다가 그 2차 자료를 쓴 사람이 학계로부터나 대중으로부터 대가로 공인된 사람이라면 그 책은 도무지 읽지 않을 방도가 없다. 이는 내가 석영중 교수가 쓴 도스토예프스키에 관련된 2차 자료들을 꾸준히 읽어나가는, 읽어나갈 수밖에 없는 일차적인 이유가 된다. 

2021년 올해는 도스토예프스키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다. 세계 각지에선 1821년 생인 도스토예프스키의 탄생을 저마다 다른 형태로 기념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출간했던 ‘열린책들’에서는 200주년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대표적인 5대 장편소설을 한 세트로 구성하여 발간했으며, 석영중 교수에 의해 두 권의 2차 자료가 출간되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작품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이다. – 다른 한 권은 ‘도스토옙스키 깊이 읽기’인데 현재 책장에서 대기 중이다. 기대된다. Stay tune! –

이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작품을 섭렵하고 연구한 석영중 교수가 선별한 200 장면과 그 장면들에 대한 석영중 교수의 다섯 문장 안팎의 짧은 해석과 통찰로 구성되어 있다. 중간중간에 삽화도 들어가 있고 여백이 많은 편이라 부담 없이 읽어나갈 수 있다. 200장면 선별 과정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워낙 방대하고 심오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에서 반 페이지나 한 페이지 정도밖에 안 되는 장면들을 골라낸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인다. 그러나 석영중 교수는 그것을 해냈다. 물론 주관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선택이기 때문에 200장면이 누구에게나 명장면으로 동의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석영중 교수가 선별한 200장면을 하나씩 읽어나가다 보면 그 장면이 녹아든 작품이 자연스레 떠오르고 예전에 읽었던 감동과 전율을 다시 느낄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을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이 책은 도움이 된다. 대형마트 시식코너에서처럼 먹거리 상품을 한 입씩 조금 맛보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어떤 한 단어나 한 문장, 혹은 한 장면으로 마음이 동하여 그 작품 전체를 읽게 되는데, 이 책은 그런 목적으로 쓰이기에 부족함이 없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선별된 200장면보다는 그 아래에 달린 석영중 교수의 글이 나에겐 더 압권이었다. 대가의 안목과 오랜 연구로 압축된 진한 농도의 통찰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62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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