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 - 한정원의 8월 시의적절 8
한정원 지음 / 난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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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갈함과 고요함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고독과 외로움

한정원 저, ‘내가 네 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을 읽고

두 번째로 만나는 한정원의 에세이다. 정갈한 문장들이 다시 내 마음속에 차곡차곡 담긴다. 시끄러웠던 내 마음도 마침내 고요다. 

몸도 마음도 분주한 일정이었다. 부산을 오가는 열차 안에서 가쁜 숨을 돌리기 위해, 벌써 반년간 가방 속에 잠자고 있던 이 책을 꺼내 들었다. 

8월 1일을 여는 첫 에세이부터 할 말을 잃었다. 시인의 낯선 문장들은 그림이 되어 눈앞에 펼쳐졌고, 그 그림에선 오래 묵은 향이 났다. 몸은 낯설지만 마음은 익숙하고 편안한, 오래된 숲의 향이었다. 나는 시인과 함께 숲 속에서 죽비 소리와 시시오도시 소리를 들었다. 사찰에서는 종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소리들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던, 평상시에는 들리지 않던, 고요의 소리들도 들을 수 있었다. 잊고 있던 마음의 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전작 ‘시와 산책’은 휑할 만큼 고적하고 아름다운 에세이였다. 모든 문장이 빛났다. 그러나 나는 그 빛나는 문장들에 묻어있는 고독과 외로움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 책 내용이 아닌 저자의 문체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시인 한정원의 삶을 고스란히 반영한 결과이지 않았을까 하고 지금 나는 생각한다. ’내가 네 번째로 사랑한 계절‘은 그 생각에 힘을 더 실었다.

정갈한 문장들이 자아내는 고요한 빛이 좋았다. 모든 걸 멈추고 눈을 감아야 할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고, 큰 숨을 들이마신 뒤에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좋았던 정갈함과 고요함이 지나가고 내 마음엔 휑한 느낌이 남았다. 고독과 외로움이 고스란히 그 자리를 차지했다.

마지막 느낌이 쓸쓸함이라는 것. 시인 한정원의 에세이가 갖는 위험한 중독성이다. 그러면서 ’시와 산책’까지 다시 책장에서 꺼내드는 나를 나는 설명할 수 없다. 그저 지금은, 그냥 그렇게, 나를 내버려 두어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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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눌프 헤르만 헤세 선집 6
헤르만 헤세 지음, 권혁준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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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착과 떠남의 경계

헤르만 헤세 저, '크눌프'를 다시 읽고

7년 전 크눌프는 산소, 천사, 혹은 닮고 싶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이번엔 달랐다. 내가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재회한 크눌프는 한없이 애처로워 보였다. '자유'를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겉으로 드러난 그의 삶보다, 드러나지 않은, 혹은 드러낼 수 없었던 그의 삶의 여집합이, 그 여백이 훨씬 크게 와닿았기 때문이다. 그가 애써 채워 온 삶이 아닌 그가 끝내 채우지 못했던 삶에서 나는 깊고 깊은 외로움을 읽을 수 있었다. 크눌프에게 동경이 아닌 강한 연민을 느꼈다. 

인간은 정착과 떠남의 무한반복을 살아간다. 정착은 안정을 선사하지만 그 안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주 올무로 바뀌곤 한다. 떠남은 불안을 야기하지만 그 불안은 종종 삶을 환기시켜 다시 자유를 동경하게 만들곤 한다. 정착이 오래되면 늪이 되고, 떠남이 지속되면 방랑이 되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둘 사이를 오가며 살아가게 되는데, 이 작품 속 주인공 크눌프는 후자의 삶을 지속했다. 소설이라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잠시 내려놓기로 한다. 허구라도 방랑자의 삶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려고 애쓰는 모습은 이 작품을 읽는 독자의 최소한의 예의이기도 할 것이다. 

말하자면 7년 전에 나는 크눌프를 가끔 만나곤 하는 그의 숱한 친구 중 하나였다. 크눌프의 삶 자체를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기보다 그의 삶이, 아니 나를 방문한 크눌프 덕분에 얻을 수 있는 유익이 더 중요했다. 크눌프를 만나면 사람들은 모두 그를 반겼는데, 그를 환대하는 일을 즐거움과 영광으로 여길 정도였다. 주객이 전도되는 듯한 묘한 상황이 벌어지곤 했던 것이다. 크눌프의 인품을 알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프직묳ㄱ나도 그랬던 것 같다. 방랑자 크눌프 덕분에 정체되어 있던 내 삶을 돌아볼 수 있었고, 잊고 있던 자유와 내적 성장에 다시 눈을 돌려 갈망할 수 있었다. 꺼져가던 가슴 깊숙한 곳의 그 무엇이 다시 깨어나 숨쉬기 시작한 기분을 느꼈다. 방랑자 크눌프가 왜 그렇게 사는지 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삶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나는 그를 좋아했다. 그는 내 삶의 활력소이자 영감의 공급처였던 것이다. 

이번에 크눌프를 다시 만난 나는 오십을 코앞에 두고 있는 나이가 되었다. 인생을 조금 더 살아봐서 그런 걸까? 나는 크눌프를 반기던 친구의 관점이 아닌 크눌프에게 나 자신을 더 투영하게 되었다. 그의 방랑벽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크눌프가 자유로워 보이지 않았다. 외롭고 쓸쓸한 모습으로 홀로 노쇠해 가는 한 남자로 보였다. 그의 마지막이 담긴 장면을 수차례 읽었다. 머릿속에 장면이 그려졌고, 그의 마지막이 마치 나의 마지막인 것처럼 몰입해서 읽었다. 아, 그는 그 마지막 순간에 과연 행복과 만족을 얻었을까?

책을 덮고 잠시 먹먹한 기분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왜 나는 크눌프에게서 동질감을 느꼈을까? 한 때 부러워하기도 했던 그가 왜 이번엔 안아주고 싶은 인물로 보였을까? 

서 있는 곳이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도 다르다고 했다. 아마도 이 이유인 듯싶다. 내가 7년간 서 있는 장소가 달라진 것이다. 7년 전 나는 인생의 가장 낮은 점을 막 통과하고 있었다. 인생은 겹겹의 우물이지만, 그 시기에 나는 내 인생 가장 커다란 우물을 탈출하고 있었다. 가치관과 세계관이 달라졌고, 모든 게 달라 보였다. 타자의 힘으로 간신히 구원을 받고 낮아질 대로 낮아진 마음이 되어 구원받은 은혜와 감사에 충만했던 시기였다. 나는 누군가를 구원하는 자의 위치가 아닌 구원을 받는 자리에 나 자신을 놓아두었기에 자연스레 크눌프를 구원받는 자가 아닌 구원을 베푸는 자로 인식했던 것 같다. 초독 감상문에 내가 크눌프의 이미지를 산소, 천사,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묘사했던 것도 다 이런 이유였다. 

그때의 관점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때보다 조금은 더 성장하고 성숙해진 나는 그때 나의 관점에서 약간의 과장과 약간의 편향성을 느낀다. 높은 마음보다 낮은 마음이 좋지만, 너무 낮은 마음은 객관성 상실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내가 그랬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크눌프는 물론 나 자신조차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했던 것 같다. 왜 그땐 크눌프가 그렇게 커 보였던 걸까? 똑같은 나인데도 불구하고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를 이렇게 신기해한다. 

다시 만난 크눌프는 내 머릿속에서 꽤나 왜소하게 그려졌다. 그랬더니 헤세가 묘사한 그의 외모가 객관적으로 읽혔다. 깔끔하고 신사적인 모습으로 보였던 그가 결벽증을 보일 만큼 불필요한 자기 관리를 하는 자로 느껴졌다. 남들에게 친절하고 유쾌한 기분을 선사하는 그였지만, 스스로는 언제나 결국 혼자 남겨진 채 지독한 쓸쓸함을 맛보아야 했던, 조금 과장하자면 광대와도 같은, 자로 느껴졌다. 나는 그 모습으로부터 모순을 느꼈고 자유가 아닌 타성에 젖은 가식도 느꼈다. 말하자면 작품 속 현재의 크눌프는 과거의 방랑자 크눌프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자유로운 영혼이 아니었던 것이다. 

젊은 때의 방랑은 이십 대의 방황과 비슷한 의미를 가지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중년이 되어서도 그 방랑을 지속하고 있다면 그 방랑은 더 이상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그 나이에 걸맞은 삶을 살아낸다는 것은 일종의 구속을 택하는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젊을 때 쫓던 자유와는 다른, 구속 가운데 느낄 수 있는 자유를 택하고 누려야 나이가 바로 중년이지 않나 싶다. 인생의 후반전이 전반전의 연장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인지라 나는 크눌프의 삶이 초지일관 방랑자로 남게 되어 아쉬운 마음이 컸나 보다. 그래서일까? 그가 십 대 시절 한 소녀에게서 받았던 상처가 애절하면서도 씁쓸하게 다가왔다.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꼭 그래야 했던 걸까, 하는 질책이 내 안에서 자꾸만 고개를 쳐들었다. 

다시 짚지만, 이 작품 속 현재는 죽기 직전의 크눌프이다. 젊은 방랑자,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크눌프가 아니라는 말이다. 왜일까? 왜 헤세는 중년의 방랑자 크눌프를 주인공으로 삼았을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혹시, 내가 이번에 느낀 대로, 단순한 자유가 아닌 시기에 맞는 자유를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후반전을 전반전의 연장전으로 만들고 있는 한 사람의 안타까운 현재를 그려 보이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리고 그 삶이 크눌프의 경우엔 '떠남'으로 보였을 뿐, 어쩌면 '정착'만을 고집하며 크눌프와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도 동일한 메시지를 적용할 수 있진 않을까? 작품 속에서 진정으로 행복과 만족에 이른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오십이 다 된 내 눈에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크눌프과 그의 친구들은 양극단에 치우친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 상황은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정착과 떠남, 그 어느 하나에 매몰되지 않는 삶을 소망한다. 언제든 떠날 수 있을 정도의 가벼운 삶을 동경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정착의 시기에는 거기에서만 누릴 수 있는 인생의 맛을 여유 있게 즐길 수 있길 바란다. 언제 다시 떠나야 할지, 언제 다시 정착해야 할지에 대한 답은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바라게 된다. 아니, 불가능하기 때문에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불가능 속에 지혜라는 열매가 숨어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열매에 목이 마르다. 

* 헤세 다시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1898
2.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1912
3.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1924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1946
5. 크눌프: https://rtmodel.tistory.com/1951
6. 데미안:
7. 황야의 늑대: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9. 싯다르타:
10. 유리알 유희: 

* 헤세 처음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449
2. 싯다르타: https://rtmodel.tistory.com/453
3.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463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468
5. 황야의 늑대: https://rtmodel.tistory.com/488
6. 크눌프: https://rtmodel.tistory.com/499
7.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529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https://rtmodel.tistory.com/579
9. 데미안: https://rtmodel.tistory.com/469
10. 유리알 유희: https://rtmodel.tistory.com/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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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29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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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다시 읽고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 대작을 다시 읽게 되어 영광이라는 말을 꼭 남기고 싶다. 읽고 싶은 마음만으로는 결코 읽을 수 있는 작품이 아니거니와 물리적인 시간이 허락된다고 해서 읽어낼 수 있는 작품도 아니기 때문이다. 함께 읽고 나누는 독서모임 가족들이 없었다면 삼독은 불가능했으리라.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뒤 한동안 가만히 눈을 감고 고요 속에서 내게 홍수처럼 밀려든 감동과 긴 여운이 내 안에 가능한 오래 머물기를 나는 기도했다.  

고전문학 중에서도 천 페이지를 육박하거나 가뿐히 넘기는 작품들을 읽어낼 때마다 느끼게 되는 공통된 정서는, 놀랍게도, 경건함이다. 이는 내가 현대문학보다 고전문학을 더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한데, 역사의 무게 때문인지 작가정신의 깊이 때문인지, 이러한 작품을 완독 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 마음은 무릎을 꿇고 고개도 숙이고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한동안은 예배하는 마음이 된다. 수십 시간 나와 시공간을 향유한 위대한 작품 앞에서 미천한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랄까. 삼독을 마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나를 이렇게 세 번 연속 경건한 자로 만들었다.

눈을 뜨고 나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모래처럼 사라져 버린 감동의 무더기들을 내버려 둔 채 내 손에 묻어있는, 아니 물로 씻어도 피부에서 잘 떨어지지 않고 착 달라붙어있는 몇 가지 감상을 초독 때와 다른 점 두 가지로 정리해서 이 글에서 나눠보려 한다. 

1.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

먼저 내 눈이 가장 많이 머문 인물이 바뀌었다. 초독과 재독 땐 이반과 알료샤에게 주목했다면, 이번엔 드미트리에게 마음이 더 많이 갔다. 무신론자의 대변인이자 이성과 지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반이 지은 서사시 ‘대심문관’도, 이 작품의 제사로 쓰인 요한복음 12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를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공상적 사랑과 실천적 사랑의 대비를 극명하게 보여주며, 조시마 장로와 알료샤로 상징되는 선함과 아름다움을 대변하기도 하는 ‘양파 한 뿌리’라는 우화도 모두 초독 때와는 달리 내게 미친 영향이 그리 크진 않았다. 아마도 이미 수차례 많은 시간을 들여 사유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초독 감상문과 복음과상황 2024년 8월호 커버스토리 참조). 

또한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고상함과 비열함, 정의와 불의 등의 이분법적인 관점도 이번엔 진부하게 느껴졌다. 대신 인간의 양극성, 즉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 아름답기도 하지만 추하기도 한, 고상할 때도 있지만 비열할 때도 많은, 정의롭고 싶어 하고 또 그렇게 행동하지만 불의에 설 때가 의외로 많은, 나약하고 유한한 인간의 이율배반성에 내 시선이 더 오래 머물렀다. 물론 이반도 알료샤도 인간이고 카라마조프이기 때문에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본성에서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드미트리만큼 그 전형을 보여준 인물은 이 작품 속에서 없다는 생각이 컸다. 나는 가장 카라마조프적인, 그래서 가장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인물이 바로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라고 생각한다. 

세 권으로 구성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도스토옙스키가 기획한 전체 이야기의 1부에 해당된다. 아쉽게도 2부가 쓰이기 전에 도스토옙스키는 생을 마감했다. 도스토옙스키가 직접 밝히듯이 전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 즉 알료샤인데,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2부를 제외하고 인류에게 남겨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요 인물은 드미트리이다. 아마도 도스토옙스키는 알료샤를 2부에서 더 활약하도록 계획했던 것 같고, 드미트리는 알료샤의 활약 이전의 배경을 이끄는 주요 인물로 설정되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현재 우리가 읽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주인공은 알료샤가 아닌 드미트리라고 봐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 번째 읽으면서 이제야 드미트리에게 마음이 많이 갔는데, 그 이유는 나도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설명할 수도 없다. 아마도 내 모습을 가장 많이 발견할 수 있어서이지 않을까 하고 추측할 뿐이다. 

드미트리에게 주목한 덕분에 처음으로 떠오른 질문이 생겼다. “알료샤를 메인으로 등장시키기 이전 배경으로 드미트리를 등장시켰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바뀔 수 있다. “현재 버전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무엇을 말하기 위함인가?” 답을 구하기 위해 작품 서두에 쓰인 ‘작가로부터’를 다시 읽어봤지만 여전히 모호했다. 도스토옙스키는 그가 알료샤를 전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를 직접 말하지 않고 독자들에게 맡겨버린 듯하다. 그래서 거칠지만 짐작할 수밖에 없는데, 나는 이 질문의 답으로써 ‘인간의 이율배반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 바로 드미트리인 것이다. 

제목에서부터 눈치를 챌 수 있었겠지만, 나는 드미트리야말로 가장 카라마조프적인 인물이자 가장 인간적인 인물이자 인간을 가장 잘 대변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을 읽을 때면 보통 독자는 소설 속 어떤 인물에 자신을 투영하기 마련인데, 개인적으로 나는 나 자신을 드미트리와 가장 가깝다고 여기기도 했고, 일반적으로 보아도 우리 중 가장 평범한 인간 유형과 가장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카라마조프적이라 함은 곧 인간적이라는 말이며, 이는 인간의 도스토옙스키적인 해석, 즉 이율배반적인 본성을 지닌 존재자가 바로 카라마조프요 인간이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본문은 여러 번 소개되는데, 대표적으로 작품 후반부를 이루는 법정 공방 중 변호사 페쮸꼬비치의 변론에서 찾을 수 있다. 다음과 같다. 

| 그 (드미트리를 말한다)는 자기 입으로 카라마조프에게서는 두 개의 심연을 동시에 볼 수 있다고 목청을 높이지 않았습니까? 정말 카라마조프는 양면성과 두 개의 심연을 갖춘 천성의 소유자인 것입니다. 강렬한 방탕의 욕망을 느끼고 있을지라도, 만일 다른 면에서 어떤 자극을 받게 되면 그는 곧 멈출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 다른 면이란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화약처럼 폭발해 버리는 사랑인 것입니다. | (열린책들판 1271 페이지 중반에서 발췌)

변호사 페쮸꼬비치에게 비친, 양면성과 두 개의 심연을 갖춘 천성의 소유자 드미트리는 방탕의 욕망을 쫓아가다가도 화약처럼 폭발해 버리는 사랑으로 인해 스스로 멈출 수 있는 인물이었다. 변호사는 드미트리에게서 인간의 이율배반성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독자인 우리는 드미트리의 이러한 속성이 사실임을 화자의 스토리텔링으로 인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검사 이뽈리뜨 끼릴로비치의 논고가 상상력이 지나친 편견임을 판단할 수 있었고, 변호사 페쮸꼬비치의 변론을 들을 땐 그의 예리한 통찰력에 혀를 내두를 수 있었다. 검사나 변호사나 모두 살인사건 용의자로 기소된 드미트리의 죄를 결정짓는 물적 증거 없이 정황과 심리에 근거한 추론만으로 법정에 섰고, 두 사람 모두 백 퍼센트 진실을 말하지는 못했지만, 검사와는 달리 변호사의 추론은 드미트리라는 인물의 본성을 진실에 가깝게 통찰해 낸 것이었는데, 두 사람의 차이 역시 나는 이율배반성을 부인하고 안 하고의 차이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검사는 이미 드미트리를 살인자로 규정한 상태에서 그 가설에 맞는 일관적인 근거를 추론으로 껴 맞췄던 반면, 변호사는 인간의 이율배반성을 기본 전제로 깔고 드미트리의 행동을 추론했던 것이다. 내 눈엔 검사보다 변호사가 인간의 본성을 더 깊고 정확하게 파악한 것처럼 보였다. 

비록 법정 공방에서 공식적인 승리는 배심원들의 여파로 검사에게 돌아갔지만, 진실에 얼마나 더 가까웠는지에 대한 측면에서는 변호사가 승리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드미트리는 유죄 판결을 받아 시베리아로 가게 될 운명에 처하게 되었지만, 만약 법정에서 변호사의 변론을 듣지 못했다면 아마도 드미트리는 미쳐버리거나 어떤 수를 써서라도 자살을 감행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인간의 이율배반적인 본성을 파악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것이다. 

미처 쓰이지 않은 2부가 아쉽다. 드미트리의 억울한 희생을 딛고 펼쳐질 알료샤의 활약 이야기가 몹시 궁금하다. 과연 도스토옙스키는 어떤 방식으로 알료샤를 그리려고 했을까? 친형의 누명 사건 때문에 인간의 이율배반성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본 알료샤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성장하여 이야기를 펼쳐나가도록 기획되었을까? 1부를 세 번씩이나 읽어도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다. 삼독 덕분에 내 눈이 드미트리에 더 머물게 되어 인간의 본성을 다시 한번 깊게 곱씹을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여전히 이 질문은 유효하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2. 표도르 빠블로비치 카라마조프

삼독의 여유일까. 가장 혐오스러웠던 카라마조프의 원조, 호색한이며 천박하고 돈 밖에 모르며 자식도 잊을 만큼 이기적인 인간인 표도르 빠블로비치 카라마조프가 묘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어릿광대인 그는 자신이 광대라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으며, 그것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어떤 취급을 받는지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번 어릿광대짓을 서슴지 않는데, 모두가 알다시피 작품의 초반부터 조시마 장로를 모신 자리에서조차 그는 어릿광대로서의 모습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얼굴을 붉힐 만큼 절절하게 선보인다. 중요한 점은, 그가 수치를 당할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자발적으로 나서서 행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매력을 느낀 것도 바로 이 부분인데, 그가 그렇게 하는 이유를 말할 때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다음과 같다.

| 사실 제가 사람들 앞에 서게 되면 저는 누구보다도 비열하며 모두가 저를 어릿광대 취급한다는 생각이 들이죠. 그래서 '내가 정말로 어릿광대짓을 해주지. 너희들이 뭐라고 해도 두려워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너희들 모두는 나보다 더 비열하기 때문이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수치심 때문에 어릿광대가, 위대하신 장로님, 바로 그런 수치심 때문에 어릿광대가 된 겁니다. | (열린책들판 81 페이지 상단에서 발췌)

사람들은 보통 남들이 자기를 어릿광대 취급한다는 생각이 들면 광대짓을 멈추고 수치스러워하면서 얼굴을 붉히거나 그 자리를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표도르는 달랐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한 술 더 떴다.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수치스러움을 극복하고 일부러 광대짓을 더 했던 것이다. 수치심 때문에 어릿광대가 되었다는 그의 말은 과연 도스토옙스키라는 작가의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이 얼마나 깊고 정확한지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듯하다. 모순적인 상황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반응하는, 표도르 같은 소수의 사람들의 모습에서 나는 인간 본성의 이율배반성을 다시 확인한다. 갈 데까지 간 다음 끝내 돌이키는 일반적인 법칙이 적용되지 않고 오히려 한 발자국 더 나아가는, 어쩌면 한계를 뛰어넘는다고 할 수 있는 인간의 모순된 (어쩌면 악한) 본성을 다시 확인한다. 혹자는 표도르는 자타가 공인하는 광대이기 때문에 광대짓을 하는 것이므로 여기에 모순은 없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표도르의 경계를 초월하는 이러한 뻔뻔함을 목도하면서 인간을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적당한 광대짓은 인간관계에서 필요하지 않나 싶은 생각도 하게 된다. 다만 표도르처럼 자기밖에 모르는 심성을 가진다면 안 되겠지만 말이다. 

*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3.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39
4.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44
5.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761
6.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776
7.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1807
8.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819
9.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1849
10.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1882
11.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1921
12.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948
13.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 도스토옙스키 처음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10.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17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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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
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
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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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카멘친트 헤르만 헤세 선집 10
헤르만 헤세 지음, 김화경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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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힘


헤르만 헤세 저, '페터 카멘친트'를 다시 읽고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땐 주인공 페터 카멘친트의 성장에 눈이 갔다. 깊은 산골에서 천연의 자연과 동화되어 투박하나 순수하게 자란 한 청년의 내면에 시가 깃들고, 그 시가 사람과 사랑, 삶과 죽음을 경험하며 조금씩 성숙해져 가는 과정에 주목했었다. 특히 글 쓰는 사람, 즉 작가로 성장해 가는 이야기여서 그랬는지 나는 페터로부터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나도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났다. 나의 외부세계는 물론 내부세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글쓰기모임과 함께 이 작품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자연의 힘에 더 큰 매력을 느꼈다. 반면, 페터의 성장 이야기는 예전보다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나 역시 성장하고 성숙했다고 여겼건만, 실은 그저 허무하게 늙어버린 건 아닌지, 혹은 너무 현실적이 되어버려 헤세 특유의 낭만성에 무뎌져버린 건 아닌지 우려가 될 정도로 말이다. 아마도 재독 때의 나는 초독 때의 나와 달리 오십을 코앞에 두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그동안 읽어온 수백 권이 넘는 책들의 영향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페터의 근간을 이루고, 페터를 옆에서 든든히 지켜주고, 페터를 성장시킨 자연만은 겹겹의 세월을 뚫고 한층 더 매력적이고 한층 더 응축된 존재로 나를 압도했다. 페터는 지나가도 자연은 오래 남은 것이다. 아마도 자연은 또 다른 페터를 잉태하고 있으리라. 


이 글에서는 역동적으로 살아있고, 또 그 어느 생명체보다 다양하고 다채로운 변화를 끊임없이 겪으면서도 언제나 변함없는 존재로 인식되며, 때론 천재지변의 수괴가 되어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기도 하지만, 또 누군가에겐 고향으로 느껴질 만큼 삶의 보금자리이자 안식처로 각인되곤 하는 자연의 신비한 힘에 대해 페터의 삶을 기반으로 해서 조금 풀어볼까 한다. 


헤세를 읽는다는 것은 자아의 발견, 성찰, 성장, 성숙, 그리고 분열과 합일 과정을 찬찬히 간접 경험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는 예술 (미술, 음악, 글쓰기)과 자연을 치열하게 탐구하고 찬양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예술은 헤세의 여러 작품 속에서 다뤄지는 주제를 대변하는 인물의 직업으로 자주 등장하는 반면, 자연은 주로 그런 주인공의 내면에 조용히 영향을 끼쳐 주인공에게 위로와 치유를 선사해 주는 고마운 존재로 등장하는데,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서 헤세의 데뷔작이라고 알려진 ’페터 카멘친트‘에서 이는 더욱 도드라진다. 이 작품의 구조를 단순화시켜 볼 때, 페터의 성장과 성숙을 도모한 궁극적인 존재는 그의 단짝이었던 리하르트도, 그의 가슴을 울리며 사그라들었던 아그네스도, 그가 목숨을 걸고 절벽 위에 핀 알펜로제를 꺾어 바치려고 했던 첫사랑 기르타너도, 잔잔한 보트 위에서 사랑을 고백하려고 맘 속으로 시도했으나 할 수 없었던 알리에티도, 그가 그다음으로 사랑을 느꼈으나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엘리자베트도, 그에게 사랑과 미덕을 가르쳐준 불구자 보피도, 심지어 그에게 지대한 영혼의 스승이었던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도 아니었다. 바로 자연이었다. 이 작품 속에서 말없이 숨어 움직이는 주인공이 자연이라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페터가 태어나고 자란 작은 산골 마을 니미콘을 둘러싸고 있는 웅장한 산과 골짜기, 그리고 호수가 보이는 것만 같다. 젠알프 봉우리를 오르며 페터의 얼굴에 흐르는 구슬땀과 그것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뜨거운 햇살, 각양각색으로 모양을 바꾸며 페터 위를 계속해서 내려다보며 그를 감싸주는 구름, 페터 옆에 피어있는 수많은 이름 모를 꽃들과 나무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관통하는 푄 바람까지, 모두가 산과 목장에서 뛰어놀던 나의 어린 시절과 겹쳐지며 눈앞에 펼쳐진다. 


페터에게 자연은 친숙함과 온화함을 겸비한 안식이었다. 그 역시 니미콘을 이루고 평생 니미콘에 갇혀 사는 숙명을 지닌 여러 카멘친트 중 하나로 인생을 마무리할 수도 있었지만, 우연찮게 쓴 편지 한 통 덕분에 공부를 하게 되었고 끝내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 길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생처럼 순탄하지 않았다. 페터만의 방식으로 우정과 사랑을 경험하고, 인간관계에서 상처도 받아보고, 생계 걱정도 해보면서 조금씩 성장을 해나가는 과중 중 삐걱거리는 순간들을 마주할 때마다 그는 늘 마음의 고향인 자연을 찾았다. 그러면 자연은 그의 내면으로 들어가 따뜻한 손길로 상처받은 영혼을 어루만져 주었으며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제공했다. 그때마다 페터는 회복을 경험했고 현실을 버티고 초월할 수 있었으며 조금씩 강인해져 갔다. 자연은 그에게 있어 가장 훌륭한 상담가이자 위로자요 치유자였던 것이다. 


자연은 페터에게 두려움과 경외감도 선사했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페터는 자신이 작디작고 유한한 인간이라는 존재임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겸손할 수 있었다. 자연은 그가 무릎 꿇고 찬양할 수밖에 없는 초월적인 존재로 다가갔던 것 같다. 사실 작품 속에서 ‘자연’이라는 단어를 ‘신’으로 바꿔 읽어도 의미상으로는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는 게 내 지론이다. 실로 자연은 페터에게 두렵고 떨리는 존재, 그래서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신과 같은 이미지가 아니었나 싶다. 자신을 압도하면서 한없는 사랑으로 끌어안아주는 자연을 힘을 페터는 어릴 적부터 느껴왔으며 그 열매로 그는 시인이 되었던, 아니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인 페터 카멘친트는 자연의 두 가지 속성, 즉 친숙함/온화함 그리고 두려움/경외감으로 빚어진 열매였던 것이다. 


우리 주위에서도 아름다운 자연을 즐길 수 있지만, 우리가 흔히 즐기는 자연은 친숙함과 온화함의 속성만을 띠는 것 같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성장하려는 자는 자연의 두 번째 속성, 즉 두려움과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자연 앞에 설 필요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자신을 능히 압도하고 초월하는 존재 앞에 홀로 신을 벗고 맨발로 설 때만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고 믿는다. 한때는 안정적인 세계라 믿었으나 어느새 나를 가두고 있는 우물이 되어버린 나의 작은 지경을 넓히고 넘어서서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는 첩경은 바로 그 순간을 경험할 때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구체적으로 쓰여있지 않지만, 나는 페터 역시 그것을 경험했다고 믿는다. 그것은 곧 내 안에 숨겨진 나를 발견하고 성찰하여 보다 성숙한 나로 설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할 것이다. 시기가 다를 뿐 우리는 누구나 인생에서 언젠가는 그런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나는 여전히 목이 마르다. 나는 다시 압도되길 원하고 무릎 꿇길 원한다. 나를 넘어서고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다. 시인이 되고 싶다.


* 헤세 다시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1898

2.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1912

3.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1924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1946

5. 크눌프:

6. 데미안:

7. 황야의 늑대: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9. 싯다르타:

10. 유리알 유희: 


* 헤세 처음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449

2. 싯다르타: https://rtmodel.tistory.com/453

3.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463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468

5. 황야의 늑대: https://rtmodel.tistory.com/488

6. 크눌프: https://rtmodel.tistory.com/499

7.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529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https://rtmodel.tistory.com/579

9. 데미안: https://rtmodel.tistory.com/469

10. 유리알 유희: https://rtmodel.tistory.com/708

11. 요양객: https://rtmodel.tistory.com/826

12.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430

13. 헤세로 가는 길 (by 정여울): https://rtmodel.tistory.com/1552


#현대문학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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뻬쩨르부르그 연대기 외 열린책들 세계문학 128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항재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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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에게 뻬쩨르부르그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뻬쩨르부르그 연대기‘를 읽고

한국어로 번역된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거의 다 섭렵한 이 시기에 ‘뻬쩨르부르그 연대기’를 읽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뻬쩨르부르그가 도스토옙스키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 작품을 읽고도 풍성하게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성 베드로의 도시'라는 뜻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열린책들에서는 '뻬쩨르부르그'로 표기한다)는 도스토옙스키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공간적 배경이 된다. 도스토옙스키가 살았던 1821-1881년 당시 뻬쩨르부르그는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소련이 들어서며, 1918년 수도가 200년 만에 다시 모스크바로 복귀하면서 뻬쩨르부르그는 제2의 도시로 밀려났다. 1924년 레닌의 사망을 기점으로 이름도 레닌그라드로 바뀌었다고 한다. 뻬쩨르부르그는 역사적으로 우여곡절이 많았던 도시였다. 

도스토옙스키가 보고 듣고 느끼고 숨 쉬며 살았던 뻬쩨르부르그는 그 당시 러시아에서 가장 문명화된 도시였다. 러시아의 가장 서쪽에 위치하며 서구 유럽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았던 곳이기도 했다. 프랑스어를 남발하는 서구주의자들이 슬라브주의자였던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속에 빈번하게 등장했던 이유도 이러한 공간적 배경이 한몫을 했으리라 짐작해 본다. 그뿐만이 아닐 것이다. 소년 시절, 시베리아 유형 시절, 그리고 유럽에서 보낸 수년간을 제외하고 뻬쩨르부르그는 언제나 도스토옙스키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뻬쩨르부르그가 그의 모든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해석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뻬쩨르부르그 연대기'는 도스토옙스키 작품 세계의 바탕, 즉 그의 사상, 그가 창조한 등장인물의 캐릭터, 그리고 작품 저변에 깔린 다소 음울한 분위기의 근원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되는 중요한 작품으로 보인다. 소설이 아닌, 다시 말해 허구적 장치 없이 도스토옙스키의 실제 목소리가 가감 없이 전면에 부각되어 있어 문장은 더 크고 깊게 울린다. 이 짧은 연대기는 네 차례에 걸쳐 날짜가 적힌 산문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의미가 있다고 판단되기에 하나씩 짚어 보려 한다.


4월 27일
도스토옙스키는 뻬쩨르부르그 사람 하면, 잠옷에다가 침실용 모자를 쓰고 꼭 닫힌 방 안에서 두 시간마다 무슨 약인가를 한 스푼씩 떠서 먹는 모습을 머리에 떠올리곤 했다고 쓴다. 어찌 이런 상상과 표현을 할 수 있는지 나는 이 문장을 읽고는 "역시 도스토옙스키답다!"라고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밝고 건강한 이미지가 아닌 뭔가 어둡고 어딘가 아픈 이미지가 떠올랐는데, 내가 수백 시간을 들여 읽어왔던 도스토옙스키 작품들의 이미지와도 묘하게 겹쳐졌다. 도스토옙스키도 직접 뻬쩨르부르그를 '흐리고, 음산하고, 화가 난 듯하고, 사악해진 듯하며, 축축하고, 습기가 많고, 창백하며, '살아 움직이는'과 반대되고, 하품을 하며 지루한 도시'라고 표현한다. 그러면서도 뻬쩨르부르그 사람들은 모두 정열적으로 조국을 사랑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함께 즐기기를 좋아한다고 쓴다. 뻬쩨르부르그나 그 도시 사람들은 뭔가 범상치 않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뜬금없이 '선한 마음'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역겨운 성격을 가진 신사를 묘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도스토옙스키가 작품 속에서 등장시켰던 여러 인물들이 저절로 떠올랐다. 대표적으로 '약한 마음'의 바샤 숨꼬프를 들 수 있다. 그 작품을 읽었을 당시 나는 약한 마음이 어떻게 악한 마음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를 고찰했었다. 그런데 도스토옙스키도 바로 이 연대기에서 그 점을 정확히 꼬집는 것이다. 나로서는 섬뜩할 정도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가 쓴 문장은 다음과 같다. 

"어째선지 지금은 갑자기 가장 선한 사람, 정말 악한 행동과는 아주 거리가 먼 그런 착한 사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장 악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고, 그렇기에 그 누구도 그에게 얘기해 줄 수 없어서 그는 그렇게 오랫동안 아무 일없이 살아가다가…(후략)" 

도스토옙스키가 말하는 선한 마음, 혹은 착한 마음, 혹은 약한 마음은 본래의 순수하고 긍정적인 뉘앙스를 거세하고 해석해야 하는 듯하다. 다음의 문장을 보면 이는 더 확실해진다. 

"그 (앞에 언급한 선한 마음만을 가진 신사를 지칭한다)가 사랑하는 여인은 그의 사랑으로 인해 갈수록 초췌해져 가고, 결국에 가서는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끔찍하고 거북스럽게 느껴지게 된다. 순수했던 그의 사랑하는 마음이 결국 그녀의 존재 자체를 독살시킨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작품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인물들의 심리에서 느껴지던, 뭔가 정신분열적이고 좀처럼 이해하기가 쉽지 않던, 그러나 말로는 정확히 표현할 수 없었던 그 느낌이 도스토옙스키가 가졌던 뻬쩨르부르그에 대한 인상으로부터 기인했다고 생각하니 한층 더 도스토옙스키를 이해한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그 당시 뻬제르부르그를 체험해 보지 못했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5월 11일
작가답게 도스토옙스키는 스토리텔러 혹은 창작가가 자본가보다 더 낫다고 당당히 말한다. 이 문장 역시 뻬쩨르부르그가 어떤 도시인지 감을 잡아야 공감할 수 있는 듯하다. 또한 그가 창조한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온순함이랄까 순진함이랄까 하는, 때론 광대로도 표현되고, 때론 몽상가로도 표현되는, 딱히 어떤 한 단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그 어느 작가의 작품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가히 도스토옙스키적이라고 할 수 있는, 캐릭터의 근원이 바로 여기에서 기인하지 않나 싶다. 다음 문장을 읽어 보자.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알고 있는 것이 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건 말할 여지도 없다. 뻬쩨르부르그 사람은 서둘러서 자신이 알고 있는 희귀한 소식을 얘기하려 할 때면, 입을 열기도 전에 정신적으로 달콤한 열정 같은 그 무엇을 느끼게 된다. 그의 목소리는 약해지면서 만족감에 떨린다. 그의 심장은 마치 장밋빛 버터 속에서 헤엄치는 듯하다. 평소 지병조차 말끔히 치유되거나 혹은 이 순간만큼은 자기의 적들에게조차 관대해진다. 그는 아주 온순해지고 위대해진다. 어째서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런 장엄한 순간 뻬쩨르부르그 사람은 모든 장점과 소중함을 인식하고, 스스로에게 공평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연신 하품을 하며 지루해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뻬쩨르부르그를 떠올려 본다. 그 지루한 일상에 구원의 손길은 아무래도 돈이 아닌 이야기여야 할 것 같은 강한 생각이 드는데, 도스토옙스키는 바로 이런 점에서 이야기꾼을 자처하고 시대적 사명을 띠고 글을 쓰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하게 된다. 조금은 과장된 듯하고 익살스럽기도 한 문장을 다음과 같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뻬쩨르부르그에서 하품은 감기나 치질, 열병과 같은 병으로, 지금까지도 아무런 치료 방법, 예를 들어 뻬쩨르부르그의 그 어떤 유명한 치료 방법으로도 치유되지 않고 있다. 뻬쩨르부르그는 하품을 하면서 일어나고 하품을 하면서 일을 하고, 하품을 하면서 잠자리에 든다. 이 도시에서 가장 많이 하품을 하는 곳은 가면 무도회장과 오페라 극장이다."

등장인물의 캐릭터로, 사건 사고의 공간적 배경으로, 그리고 그들의 사상으로 간접적으로 표현된 뻬쩨르부르그의 인상이 조금씩 더 와닿는다.


6월 1일
우리나라에서 초여름에 해당되는 6월의 첫날은 뻬제르부르그에서도 여름으로 막 넘어가는 시기인 듯하다. 이 연대기에서 도스토옙스키는 모스크바와 비교하여 뻬쩨르부르그의 특징을 이야기한다. 그는 뻬쩨르부르그를 다소 어둡게 표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역사적이고 사회전반적인 측면까지 고려하면서 러시아의 중심 도시라고 말하는데, 나는 이 부분에서 도스토옙스키가 뻬쩨르부르그를 사랑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모스크바는 과거의 역사적인 그 무엇이 있는 곳인 반면, 뻬쩨르부르그는 어디를 가도 현재의 이 순간, 그리고 현재의 이상이 보이고 들리고 느껴진다. 어떤 면에서 이곳에는 모든 것이 카오스인데, 모든 것이 뒤섞여 있는지도 모른다. 많은 것이 캐리커쳐의 소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삶이요, 움직임이다. 뻬쩨르부르그는 러시아의 머리요, 심장이다."

"도시의 미래는 아직도 이데아 속에 있다. 이데아란 뾰뜨르 1세의 것으로써 국민 모두가 그의 정책의 힘과 진가를 확인했다. 공업, 무역, 과학, 문학, 교육, 사회, 체제 정비 등 모든 부문에서 뻬쩨르부르그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태생부터가 서구 유럽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인지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인의 민족성까지도 변질되지 않았나 고찰했던 것 같다. 그는 러시아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상당했던 것 같다. 그가 슬라브주의자라는 사실을 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민족성이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유럽의 영향으로 쉽게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이 살아가는 현재를 긍정적으로 사랑하는 민족이야말로 온전하고 건강한 민족이며, 바로 그런 민족이야말로 현재를 진실로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런 민족이야말로 삶을 지속시킬 수 있으며, 생명력과 원칙 또한 그들과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6월 15일
"날씨는 덥고 도시는 텅 비어 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별장에서 감흥에 젖어 자연을 만끽하고 있다."라고 쓴 걸 보면 6월 중순 뻬쩨르부르그는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된 듯하다. 이 연대기에서 도스토옙스키는 독일인과 러시아인을 비교한다. 독일인은 꼼꼼히 분석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인 반면, 러시아인은 순진 무구하고 때론 너무나 우스꽝스러운 형식도 흔쾌히 수용할 수 있는 성격의 사람들이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러시아인을 비난하는 듯한 뉘앙스로 글을 써나가는데, 러시안인 중 애정을 가지고 자기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사람이 극소수일 거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결국 자신의 일을 발견하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쓴다. 

"그렇게 되면 활동을 갈망하고, 실천적인 삶을 갈망하고, 현실을 갈망하는, 그러나 약하고 여성스럽고 부드러운 그런 성격에서는 우리가 공상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움트게 되고, 이런 사람은 결국 사람이 아닌 뭔가 중성적이고 이상한 주체, 즉 '몽상가'가 되어 버린다. 그런데, 여러분은 몽상가가 뭔지 아는가? 그것은 뻬쩨르부르그의 악몽이요, 구체화된 죄악으로서, 모든 끔찍한 비극과 모든 참사, 대단원, 그리고 발단과 결말을 가진 말 없고 비밀스러우며, 음산하고, 야만적인 비극인데, 이것은 절대로 농담이 아니다. 당신은 이따금 초점을 잃은 눈빛에 창백하고 피로가 누적된 표정의 주의가 산만한 사람, 항상 마치 무언가 끔찍하게 고통스럽고 뭔가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일에 빠져 있으며, 이따금은 고통 속에 찌든 데다가 마치 힘든 노동으로 피로에 지쳐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이런 사람이 몽상가의 겉모습이다."

도스토옙스키 작품들에서 관념적인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는 건 그의 작품 두세 편만 읽어도 단번에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끝도 없는 생각의 실타래를 통해 자기만의 세상에 갇히게 되는 인물들의 다른 이름은 몽상가일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연대기에서 몽상가들의 출현 배경 역시 뻬쩨르부르그가 낳은 산물이라고 해석하는 듯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이런 도발적인, 그러나 아니라고는 결코 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 모두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 망정 몽상가는 아닐까?"

도스토옙스키에 따르면 뻬쩨르부르그에서 태양은 아주 드물게 찾아오는 손님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건강을 쉽게 잃게 되고, 병약하고 불가사의하게 침울한 상태가 된다고 한다. 누구라도 그곳에 거주하게 되면 뻬쩨르부르그의 강력한 힘에 순응하여 몽상가가 되는 걸까? 뻬쩨르부르그라는 공간적이고 물리적인 특징이 도스토옙스키가 창조해 낸 많은 인물들의 캐릭터에게 숨을 불어넣은 게 아닌가 싶다. 다시 한번 나는 도스토옙스키가 살았던 당시의 뻬쩨르부르그를 보고 느끼고 싶다는 갈망을 느낀다. 그의 모든 작품을 다 읽는다 하더라도 결코 채워지지 않을 2% 일 것이다. 


* 도스토옙스키 처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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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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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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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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