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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ㅣ 헤르만 헤세 선집 1
헤르만 헤세 지음, 홍성광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1월
평점 :
데미안의 세계, 내 안의 데미안
헤르만 헤세 저, '데미안'을 다시 읽고
한때 낙원이었던 세계가 실낙원이 되어 버리는 경험을 수차례 반복하면서 우리는 변화된다. 누군가에겐 성장이고, 또 누군가에겐 타락이 되고 마는 이 변화를 통해 우린 인생의 여러 변곡점들을 통과한다. 예기치 못한 사건의 발생, 통제 불가능한 상황의 전개, 의지와 상관없이 만나게 되는 소수의 사람들. 우연인지 필연인지, 구원인지 저주인지 확신할 수 없는 일들의 연쇄 속에서 우리가 겪는 이 변화들의 총합은 곧 우리 인생의 방향과 색을 정하고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을 정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과정을 견인하는 힘이 누구에게 있는지, 주체가 누구인지에 따라 우리 자신과 인생의 의미가 확연히 달라질 수 있다.
우린 같은 일을 겪어도 다른 인생을 살아낼 수 있고, 다른 일을 겪어도 같은 인생을 살게 될 수 있다. 삶에 순응하며 편하고 수동적으로 살 것인지,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저항하며 능동적으로 삶을 살아낼 것인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생을 살 수 있다. 인생의 미분계수는 지금, 여기 나의 생각과 행동에 있다는 이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의 거울 앞에서 오늘도 나는 나를 비추어 본다. 그리고 나의 현재 삶이 어떠한지 자세히 눈을 감고 관찰해 본다. 나는 진정한 나인가, 남이 기대하는 모습을 흉내 내는 가짜 나인가. 나는 내 삶의 주체인가 객체인가 점검해 본다. 지금은 실낙원이 되어 버린 내 과거의 낙원들을 떠올려보고, 지나온 여러 변곡점들로 돌아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잠시 상념에도 잠겨본다. 참 다행이란 생각, 감사하다는 생각, 그리고 조금은 더 성장한 것 같은 기분으로 나는 눈을 뜨고 현재로 돌아온다.
'데미안'을 세 번째 정독하면서 독자이기보다는 작가 혹은 저자의 입장에서 읽게 되었다. 열 살이었던 싱클레어가 크로머를 만나며 낙원 밖 세계를 처음으로 알게 되는 장면, 그 낯설고 두려운 순간들을 통과하며 싱클레어 내면으로부터 발현되는 보편적인 인간 본성의 단면들, 그리고 데미안을 통해 홀연히 주어진 구원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전개 자체보다는 그것의 구조, 저자의 의도, 사건의 상징성, 그리고 그 상징 이면에 놓인 사상 혹은 철학까지 고찰할 수 있었다. 시작부터 결말까지 겉으로 드러난 모든 걸 다 아는 이야기를 다시 정독하며 조금은 더 깊이 작품을 읽어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번에도 나는 두 세계를 생각했다. 부모님이 주축이 된 세계, 그리고 크로머로 상징되는 또 다른 세계. 이름만 다르게 불릴 뿐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두 세계. 이 두 세계는 밝음과 어두움으로, 선과 악으로, 옳고 그름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분법적인 대조이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두 세계를 접했고 이동하며 성장과 타락을 모두 경험했으며 그 경험으로 인한 깊은 성찰을 통해 나름대로의 통찰도 이끌어내곤 했다. 그러나 이번엔 두 세계가 아닌 또 하나의 다른 세계가 새롭게 보였다. 바로 데미안이 속한 세계였다.
데미안이라는 낯선 존재가 속한 세계는 부모님으로 이뤄진 밝은 세계도, 크로머로 상징되는 어두운 세계도 아니었다. 그 세계는 제3의 외부세계였다. 두 세계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것을 초월하는 세계였다. 그러므로 낙원에서만 살던 싱클레어에겐 크로머만 유혹자가 아니었다. 데미안도 유혹자였다. 그러나 크로머와 데미안은 서로 다른 두 세계에 속한 사람이었고, 싱클레어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구원은 언제나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법이고, 언제나 주체가 낙원을 떠나는 실천을 전제한다. 불행하게도 이 구원이 주어지지 않으면 주체의 성장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에겐 오직 타락만이 기다린다. 크로머의 충실한 노예가 되면서 제2의 크로머로 살게 되든지, 아니면 크로머의 세계와 부모님의 세계에 한 발씩 담근 채 적당한 타협을 이루며 살게 되든지.
싱클레어에게 크로머는 태어나 처음으로 겪는 어둡고 강력한 힘의 요체다. 싱클레어의 힘만으로는 이겨낼 수 없고 타자의 도움 없인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블랙홀과 같다. 우리가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어둡고 강력한 존재들을 크로머라고 해석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크로머의 손아귀에 계속 잡혀 있든지, 아니면 부모님의 세계 안에 존재하는 힘에 의지하여 크로머를 제압하고 다시 부모님의 세계로 피신한 뒤 그 자그마한 세계의 평화에 만족하며 평생을 보내든지, 이 두 방법 밖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듯이 싱클레어에게는 제3의 세계로 통하는 데미안이라는 이름의 문이 열렸다. 싱클레어에겐 구원의 빛이었다. 나는 이를 축복이라 부른다. 내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주어진 전적인 은혜라 부른다.
'데미안'을 진지하게 읽은 독자라면 '모든 인간의 진정한 사명은 자기 자신에 이르는 것뿐'이라는 명제에 수긍하며 각자가 가진 고유한 개성을 발견하고 발현하여 에고가 아닌 셀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내기로 다짐하게 된다. 나 역시 그런 과정을 거치며 깨달음과 인식의 전환을 경험할 수 있었다. 나 자신의 내밀한 부분을 깊게 성찰할 수 있었고 보편적인 인간의 심리와 본성에 이르는 통찰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 한 가지가 전제되어야 했다. 두 세계가 아닌 제3의 세계와의 만남 말이다. 아무리 자기 자신이 되려고 애쓴다 할지라도 이 전제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두 세계 사이에 끼인 상태로 괴리와 좌절에 함몰될 수 있다. 그 자체가 지옥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헤세는 왜 싱클레어에게 자기 의를 내려놓고 용기를 내어 부모님께 크로머의 개입 사건과 상황을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크로머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터주지 않았을까? 자녀가 부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어찌 보면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을 왜 허락하지 않았을까? 왜 제3의 외부세계에 속한 데미안이라는 존재를 등장시켜 구원으로 시작되는 성장의 서사를 이루어냈을까? 이 길만이 유일한 성장의 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래야만 정과 반으로만 이뤄진 두 세계가 아닌 정반합으로 구성되는 변증법적인 발전이 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데미안이라는 문을 통과한 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자기 자신에 이르는 구도자의 길을 걸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저마다 다른 고유한 개성을 찾아 진정한 자기 자신에 이르는 길을 걷는 모든 구도자의 시작은 아이러니하게도 '나 자신의 의지'가 아닌 '외부로부터의 구원'이라는 소중한 메시지를 붙잡게 된다. 이렇게 될 때 내가 내 삶의 주체가 되려는 모든 애씀은 전적인 타자로부터 주어진 낯선 은혜로부터 시작된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주체'라는 단어가 주는 자칫 부정적일 수도 있을 뉘앙스도 '타자'와 '은혜'라는 두 단어로 상쇄시킬 수 있다. 우리가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자기애에 빠지는 나르시시즘도, 타자를 짓밟고 살아남으려는 승자독식과 약육강식의 미개한 동물적 원리도 초월하는 것이다. 그것은 저마다 고유한 개성을 갖도록 한 창조자의 계획을 성취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한편, 크로머 이후 겪는 여러 유혹과 난관들을 통해 싱클레어는 홀로 카인의 표지를 가진 자, 즉 깨어 있어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발견하고 발현하려고 애쓰는 소수의 사람으로서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게 된다. 물리적으로 데미안은 싱클레어 곁에 없던 적이 더 많았지만, 데미안처럼 싱클레어와 가까이 있었던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한 번 나타난 데미안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궁극적으로 싱클레어와 일체가 되기까지 싱클레어의 삶에 똬리를 틀고 그를 안내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진정한 구원의 순간은 일회성이 아닌 영원성을 가지고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주체로 거듭나도록 계속해서 돕는 것이다.
이번에 '데미안'을 다시 읽으며 새롭게 보인 두 번째 사실은 싱클레어가 자기 자신에 이르는 여정을 거치는 동안 혼자였다는 것이다. 라틴어 학교에 다닐 땐 부모님과 함께 살았지만, 학교를 옮긴 이후부터는 줄곧 혼자 살게 된다. 그는 혼자 살며 모든 여정을 겪어냈던 것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헤세의 의도 한 가지를 추측해 본다. 자기 자신에 이르는 여정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고 도와줄 수도 없으며 철저히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순간들의 연속이라는 것. 말하자면 방황이다. 자기 자신에 이르는 긴 여정은 방황이라는 과정과 정확히 겹치는 것이다. 그것도 혼자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철저한 방황 말이다.
그 과정 중 싱클레어는 베아트리체도 만나게 되고, 크나우어도 만나게 되며, 피스토리우스도 만나게 된다. 각각 어떤 상징을 나타내는 인물들이다. 이번에 읽으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 중 하나는 피스토리우스의 고백에 들어있었다. 싱클레어와 헤어지기 전에 피스토리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목사가 되는 것은 나의 소명이자 목표이지요. 다만 아브라삭스를 알기도 전에, 너무 일찍 만족해 버리고 여호와에게 나를 맡겨 버린 거지요." 아브라삭스는 신이기도 하고 악마이기도 한 양극성을 모두 가진 가상의 존재다. 아브라삭스를 알기 전에 여호와에게 자신을 맡겨 버렸다는 피스토리우스의 고백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자기 삶에서 주체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사실을 붙잡게 된다. 악이 무엇인지 모른 채 택한 선, 어두움이 무엇인지 모른 채 거하는 밝음은 허상일지 모른다. 실재이나 그것의 본질적인 의미를 모르는 상태가 된다. 방황 없이 더럭 주어진 안정된 삶, 가난 없이 자동적으로 주어진 부, 아픔을 모르고 주어진 탁월한 건강 등으로 해석을 확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작 힘이 없는 허황된 사상에 갇힌 채 살아가는 피스토리우스를 보며 나의 과거와 현재의 방황을 감사하게 된다. 나아가 미래에 겪을 방황까지도 감사하며 받아들일 자세가 준비된다. 한 세계에 머물던 자에게 어느 날 문득 다가온 또 다른 세계. 그 세계는 위협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세계의 개입 때문에 나의 작은 세계는 변화를 겪게 되고 한층 깊고 풍성한 세계로 상승진입하게 된다. 기억해야 할 건 데미안이다. 우리 안에 각인된 구원의 은혜다. 한 곳에 머물며 타자 위에 군림하여 그곳의 왕이 되고자 하는 지극히 동물적이고 인간스러운 욕망을 내려놓고, 내 안의 데미안의 인도를 받고 데미안을 좇으며 나를 알고 나에게 이르는 여정을 당당하게 걷는, 인간다움을 추구하며 언제나 깨어 있는 구도자로서 내 삶을 살고 싶다.
* 헤세 다시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1898
2.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1912
3.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1924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1946
5. 크눌프: https://rtmodel.tistory.com/1951
6. 데미안: https://rtmodel.tistory.com/1991
7. 황야의 늑대: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9. 싯다르타:
10. 유리알 유희:
* 헤세 처음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449
2. 싯다르타: https://rtmodel.tistory.com/453
3.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463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468
5. 황야의 늑대: https://rtmodel.tistory.com/488
6. 크눌프: https://rtmodel.tistory.com/499
7.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529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https://rtmodel.tistory.com/579
9. 데미안: https://rtmodel.tistory.com/469
10. 유리알 유희: https://rtmodel.tistory.com/708
11. 요양객: https://rtmodel.tistory.com/826
12.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430
13. 헤세로 가는 길 (by 정여울): https://rtmodel.tistory.com/1552
14. 헤세 (by 정여울): https://rtmodel.tistory.com/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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