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남편 열린책들 세계문학 11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정명자 외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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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무한루프의 질문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영원한 남편‘을 읽고


석영중 교수는 도스토옙스키를 읽는다는 건 통속에서 심오를 발견해 내는 것이라 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 역시 통속이라는 입구와 '인간의 깊은 본성'이라는 출구로 이뤄진 길이 바로 도스토옙스키라는 이름으로 난 길이라 생각한다. 벽돌 같은 분량과 길고 복잡하고 낯설기까지 한 러시아 이름들, 그리고 종종 등장하여 독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장광설을 제하고 보면, 실제로 그의 작품이 주로 다루고 있는 주제는 지극히 통속적이다 (그래서 결코 진입장벽이 높다고 할 수 없다). 이에 반하여 정작 그의 작품을 진지하게 읽은 독자들은 한결같이 책을 덮고 나서 깊은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는데, 대부분은 그의 통찰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시대와 문화를 달리하여 도스토옙스키가 지금도 우리에게 읽히는 이유다).  


도스토옙스키 작품들에서 통속적인 주제라 함은 돈, 치정, 살인, 이렇게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제목부터 이해가 잘 가지 않는 이 작품에서는 살인을 제외한 (살인미수에 그치는 사건은 등장한다) 돈과 치정, 그중에서도 치정, 또 그중에서도 불륜이 이야기를 이끄는 입구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을 다 읽고 난 다음에는 아마도 나처럼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회귀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 '영원한 남편' 역시 도스토옙스키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중편소설은 도스토옙스키의 둘째 아내 안나와 함께 한 약 4년 간의 유럽 여행 중에 쓰였다고 한다. 5대 장편에 속하는 '백치'와 '악령' 사이에 발표된 작품이다. 선금을 받고 돈에 쫓기다가 약 3개월 만에 완성되었다고 하는데, '노름꾼'이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볼 땐 그나마 심사숙고해서 쓴 작품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5대 장편의 무게와 비교할 땐 한없이 가볍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고, 도스토옙스키의 전작을 읽으려는 의도가 없다면 굳이 읽을 필요가 없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이 작품의 주요 인물은 두 중년 남성이다. 주인공인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벨차니노프, 그리고 그와 대립각을 세우며 소위 ‘영원한 남편’ 역으로 나오는 빠벨 빠블로비치 뜨루소스끼.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사고, 그리고 그 가운데 묘사되는 심리 공방이 이 작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 나는 이 역시 도스토옙스키적인 설정이라 생각한다. 벨차니노프는 과거 T 시에 1년 간 머물 때 뜨루소스끼의 아내와 불륜 관계에 있었다. 얼마 전 아내가 죽고 뜨루소스끼는 벨차니노프가 거주하고 있는 뻬쩨르부르그로 넘어왔다. 혼자가 아니라 그의 어린 딸 리자와 함께 말이다. 우연찮게 벨차니노프는 그런 뜨루소스끼와 마주치게 되고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다가 결국에는 그와 대면하게 되고 과거의 일을 떠올리게 된다. 아마도 그 당시 정부였던 벨차니노프는 합법적인 남편 뜨루소스끼를 대면하기가 거북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게다가 뜨루소스끼의 딸이 자기 딸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작품 마지막에 가서 확인도 하게 되는데, 그때 이미 리자는 병에 걸려 죽고 난 다음이었다. 


중요한 것은, 뜨루소스끼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벨차니노프에게 복수하기 위해 뻬쩨르부르그로 왔다는 사실이다. 비록 뜨루소스끼는 벨차니노프에게 접근하여 마치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미지근하고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분열된 양상을 보이며 대했지만 말이다. 벨차니노프 입장에선 뜨루소스끼가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여전히 모르는 것 같기도 해서 뜨루소스끼의 의중을 정확히 몰라 그를 대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반면 뜨루소스끼 입장에선 벨차니노프 스스로 자기 아내와의 불륜 사실과 리자의 정체를 말해주길 기다리기도 하고 분노에 차서 죽이고도 싶었을 것이다. 작품 가운데 실제로 뜨루소스끼는 벨차니노프를 죽이려는 시도도 한다. 하지만 손에 상처를 내는 것 말고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벨차니노프는 덩치가 컸고 힘도 훨씬 세서 뜨루소스끼는 간단하게 제압당했기 때문이다.


나는 벨차니노프의 신체적 강함을 차치하고서라도 뜨루소스끼가 벨차니노프를 다치게 할 수는 있어도 결코 죽일 수는 없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먼저는 제목 때문이다. 두 번째는 그의 이름 때문이다. 제목이 '영원한 남편' 아닌가. 그는 아내의 죽음 이후 벨차니노프에게 찾아가 자기가 청혼을 한 여자가 거주하고 있는 별장으로 같이 가자고 제안한다. 그는 죽은 아내를 금세 뒤로하고 다시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남편이 되는 것이 이 자의 인생의 목표 같은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들 만큼 나에게 뜨루소스끼는 공감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인물이다).

또한 벨차니노프와 뻬쩨르부르그에서 헤어지고 2년 후 우연찮게 다시 만났을 땐 실제로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한 남편이 되어 있었다. 재미있는 부분은 그렇게 결혼한 뜨루소스끼와 그의 아내 곁에는 또 다른 남자가 함께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의 아내는 그 다른 남자와 불륜 관계에 있었을 것이고, 합법적인 남편인 뜨루소스끼는 과거에 하던 대로 또다시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아내를 가만히 놓아두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예전에도 그랬듯 지금도 여전히 남편이라는 위치만을 법적으로 고수하고 있는 신세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벨차니노프는 그 사실을 금세 간파했고, '영원한 남편'이라는 표현을 다시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뜨루소스끼라는 단어의 뜻은 '겁쟁이'라고 한다. 도스토옙스키가 그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준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주체적으로 해낼 수 없지만 영원히 남편 자리를 꿰차고 있는 듯 없는 듯 그림자차럼 비굴하게 살아가는 남자. 이런 자가 그와 많은 부분에서 반대의 캐릭터를 가진 벨차니노프를 쉽게 죽일 수는 없었을 것이란 게 내 지론이다.  


서로가 서로의 심중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고 마치 떠 보려는 듯한 자세로 서로에게 가면을 쓰고 대하는 장면들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심리가 얼마나 가소롭고 경박한지 느낄 수 있게 된다. 무엇 하나 명확하지 않아 진실을 말해도 그것이 진실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인간관계가 어떤 것인지도 느낄 수 있다. 벨차니노프의 우월감과 자기 만족감, 동시에 뜨루소스끼에게 느끼는 비밀스러운 죄책감과 리자의 죽음으로 인해 느끼는 좌절감. 그리고 뜨루소스끼의 열등감과 자기 비하, 동시에 벨차니노프를 향해 느끼는 분노와 복수심, 그리고 모순처럼 보이지만 벨차니노프에게 느끼는 사랑과 동경심. 이 두 사람의 심리 공방과 독백을 읽으며 나는 나를 보았고 인간을 볼 수 있었다. 모순되고 이율배반적인 내 안의 나. 나도 이해할 수 없는 나의 본능과 나의 심리. 작품을 다 읽고 이렇게 감상문을 쓰며 이 소설의 작품성이 높지 않다고 평가하면서도 나는 나도 모르게 또다시 도스토옙스키의 마법에 걸려 이렇게 질문하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 도스토옙스키 처음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10.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17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rtmodel.tistory.com/1194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

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

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96

18.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429

19. 악몽 같은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435

20. 악어: https://rtmodel.tistory.com/1436

21. 인간 만세!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488

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

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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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정직한 도둑: https://rtmodel.tistory.com/1703

27.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https://rtmodel.tistory.com/1704

28. 꼬마 영웅: https://rtmodel.tistory.com/1706

29. 약한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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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영원한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823


*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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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름꾼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재필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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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론을 믿는 노예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노름꾼‘을 다시 읽고


귀국하며 새로 장만한 책으로 이 작품을 재독 했다. 3년 전 썼던 초독 감상문을 읽고 그때와 같은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나는 이 문장이 노름꾼의 속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거라 여기는 듯하다. 


"이쯤 해서 자리를 떴어야 했는데 나는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운명에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또 그녀를 혼내 주고 약 올려 주고 싶은 욕구 같은 것이 생겨난 것이다."


이상한 느낌. 운명. 그리고 누군가에게 보복하고 싶은 욕구. 이 세 가지는 주인공을 계속해서 도박장에 붙잡아 두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 작품이 도스토옙스키의 자전적 일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문장은 도스토옙스키가 파악한 '노름꾼이 노름을 지속하는, 혹은 지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듯하다. 노름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내가 3년의 공백을 두고 같은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는 사실은 노름 경험과 무관하게 인간이라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망이 노름을 계속하게 만드는 원인일 수 있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때 노름은 단지 도박장에 갇힌 행위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깃든 여러 중독 행위로 확장될 수 있다. 우리는 도박장에 가지 않을 뿐 노름꾼과 비슷한 마음과 행동으로 일상을 살아갈 때가 있지 않은가. 여러 중독에 노출되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을 돌아보자). 뭐랄까. 운명이랄까, 계시랄까 하는 어떤 초월적인 힘을 느끼고, 또 그것을 확신하게 되는 과정이 노름꾼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 아닌가 싶다. 말하자면 노름의 시작은 물론 그것의 무한반복은 적어도 운명적인 힘이 작용하는 것 같다는 말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결국 잃고야 말 그 많은 돈을 보란 듯이 탕진할 수가 있겠는가. 이성을 넘어서는 그 무엇에 사로잡히지 않고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생각이고, 나는 그 힘을 운명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한편, 그 운명이라는 힘도 조금 더 뜯어봐야 할 필요를 느낀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것에 대해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가지기 때문이다. 하나는 확신, 다른 하나는 두려움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상반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래서 하나를 택하면 하나를 버려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의외로 인간은 어떤 것도 버리지 못한 채 늘 두 가지를 모두 손에 들고 있다. 나는 이런 모순적인 인간의 마음과 행동이 흥미롭다고 보는데, 이런 이율배반적인 상황과 판단을 가능하게 만드는 중추적인 힘도 바로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이 해석은 노름꾼의 콘텍스트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운명 말고도 주인공의 노름에 대한 신념이라고 볼 수 있는 독특한 해석에도 내 시선이 머물렀다. 성실하고 근면하게 세대를 거듭하며 돈을 모아 마침내 자본주의 체계의 피라미드 상층부에 자리하게 되는 메커니즘을 주인공은 비웃는다. 갑의 위치에 선 자본가들의 이면에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문제점을 찾아내면서 말이다. 다음과 같다. 


"1백 년 아니 2백 년이나 이어져 내려오는 기질, 노력과 인내, 지혜와 청렴함, 강인함과 검소함, 그리고 지붕 위의 황새란 말입니다! 이제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그런 관점에서 온 세상을 판단하기 시작하고 죄 많은 사람들, 그러니까 자신들을 조금이라도 닮지 않은 사람들을 당장에 처형하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차라리 러시아 식으로 추하게 놀아나는 것이 나을 성싶고, 그게 아니면 룰렛으로 돈벌이를 하고 싶습니다. 다섯 세대 후의 호프 가가 되고 싶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제 자신을 위해서라도 제게 돈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 자신이 자본을 위해서 필요하다거나 아니면 자본에 종속되는 어떤 존재라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제가 무척이나 허풍을 떨었다는 점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저의 신념이 그러니까요."


말도 안 되는 논리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이 궤변 같은 주인공의 논리에서 나는 잠시 감탄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느니 노름으로 자유인의 신분을 고수하겠다는, 일견 고결한(?) 뜻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이 약한 자들 위에 군림하고 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여 자기들의 부와 권력을 더욱 부풀리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치명적인 오류는 아마도 주인공이 지적한 것처럼 그들이 자연스레 획득하게 되는 '갑질권'에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갑질을 하는 자들도 처음에는 그럴 의도가 없었을 것이다. 다만 자본주의 피라미드 체제에 성실하게 되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흐름에 몸을 맡기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을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 갑이 되어버리기 쉬운 것이다. 이는 갑의 위치에 있어도 을과 다름없이 스스로 노예가 되어버린 꼴에 지나지 않는다는 논리로도 해석할 수 있겠다. 반면, 룰렛으로 돈벌이를 하는, 한낱 노름꾼에 지나지 않는 우리의 주인공은 그런 노예가 되는 것에 저항하는 듯하다. 진지하게 저 단락을 읽고 있노라면, 아주 잠깐이지만 숙연함마저 느껴진다. 그러나 자본주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노름을 선택하는 자유인이라니… 과연 그걸 자유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그럴 순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노예를 비웃는 주인공 역시 노름이라는 주인을 섬기는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라는 생각이 오히려 더 강해지기만 한다. '운명의 힘' 같은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논리에 몸을 천박하게 내맡기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성실히 자본주의에 부역하는 사람이나 노름에 정신이 팔려 자신의 이성마저도 노름에 종속시키는 사람이나 결국엔 모두 스스로 노예가 되어버리는 꼴이 아닐까.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인간은 어떤 면에서든 노예가 되는 길을 피할 수 없는 것이지 않을까. 


재미있게도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주인공을 보면 그는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게 아닌 것 같다. 역시 우리의 주인공은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전형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작품 속 노름꾼은 우리의 모습이자 나의 모습으로 확장된다.


"어쩌면 내게는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는지도 몰라요." 


주인공은 운명 같은 힘을 믿는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한 발자국 떨어져 보고 있다. 그는 노름을 해야만 하는 확신에 차 있다가도 어느 순간 그것이 틀린 선택이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주관과 객관 사이를 오가며 우리의 노름꾼은 서서히 분열되어 가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말까지 하면서 말이다. 


"내 마음이 즐거웠다고 할 수는 없다. 나의 삶이 두 쪽으로 쪼개져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어쨌든 어제부터 나는 모든 것을 운에 맡겨 버리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어쩌면 돈을 주체하지 못해 눈앞이 아찔했던 것인지도 모르고, 또 내게 정말로 필요했던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분열된 자아가 걷는 괴리의 외다리는 과연 한 번 발을 디디면 뗄 수 없는 것일까. 사람은 자기 객관화를 할 줄 안다고 해서 스스로 갇힌 우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무엇이 더 필요한 것일까. 마침내 우리의 주인공은 미스터 에이슬리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듣게 된다.


"당신은 돈을 따는 것 말고는 그 어떠한 목표들도 단념했고, 심지어는 자신의 추억까지도 단념하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가졌던 훌륭한 인상들을 모두 잊어버렸어요. 이제 당신의 꿈과 절실한 희망이란 고작 홀수와 짝수, 검은색과 빨간색 그리고 열두 숫자들 같은 것들에 지나지 않게 되어 버렸어요."


허를 찌르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노름으로 돈을 따는 행위를 구원의 길로 여기기 시작한 자의 말로는 이런 것일까. 이렇게 경박할 수 있는 걸까. 목표도 추억도 단념하고 자신의 고유한 장점마저도 잊어버린 채 자신의 모든 인생이 마치 수와 색에 달려 있기라도 한 것처럼 믿게 되는 과정은 경박과 천박의 하모니일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를 노름꾼으로부터 해방시켜 준 그의 두 번째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옙스카야와 함께 작업한 첫 작품이다. 그녀는 아내가 되기 전 속기사로 고용되었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일대기를 살펴볼 때 안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과연 도스토옙스키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여러 가지가 가능하겠지만, 안나가 바로 곁에 없었다면 도스토옙스키는 노름꾼으로서 인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구체적인 이유야 정확히 알 수 없겠지만, 어쨌거나 도스토옙스키의 도박벽은 안나를 만남으로써 해결되었고 '죄와 벌'을 시작으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까지 그의 말년을 화려하게 수놓을 5대 장편을 쓸 수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5대 장편을 읽으며 감사해야 할 사람은 도스토옙스키가 아니라 안나일지도 모르겠다. 


노름꾼은 운명론을 믿는 노예다. 스스로가 노예라는 사실을 종종 깨닫기도 한다. 하지만 그 객관적인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노름꾼으로 전락하고 마는 자가 바로 진정한 노름꾼인 것이다. 과연 노름꾼들은 이 커다란 거미와 같은 손아귀에서 탈출할 수 없는 것일까. 나는 유일한 탈출구를 안나에게서 찾는다. 안나의 의미를 조금 확장시키면 '공동체'라고 할 수 있고, '사랑'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혼자의 힘만으로 노름꾼의 삶을 청산하기는 역부족이다. 운명론을 믿는 노예의 자력갱생은 불가능하다고 판단된다. 이는 작품 속 주인공이 뽈리냐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받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고, 작품 마지막에 그가 그녀를 찾아가는 부분에서 나지막한 희망을 찾을 수 있게 해 준다. 


구원은 언제나 외부에서 오는 법이다. 반드시 곁에서 누군가가 몸과 마음을 함께 하면서 도와야 비로소 도박벽이라는 정신병이 치유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안나와 도스토옙스키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 누군가의 힘이야말로 진정한 '운명'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스스로 선택하고 갇히는, 어쩌면 스스로 만든, 운명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늘에서 주어진 운명 말이다. 그것은 곧 사랑이자 은혜이지 않을까 한다. 노름꾼이 노름꾼으로부터 구원을 얻는 방법은 결국 사랑의 힘인 것이다. 이는 노름과 같은 중독에 빠진 영혼들을 향한 우리들의 자세를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있지도 않을 막연한 운명을 먼 곳에서 찾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찾아가 갱생의 통로가 되어주는 것 말이다.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3.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39

4.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44

5.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761

6.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776

7.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1807

8.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819

 

* 도스토옙스키 처음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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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10.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17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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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

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

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96

18.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429

19. 악몽 같은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435

20. 악어: https://rtmodel.tistory.com/1436

21. 인간 만세!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488

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

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

24. 백야: https://rtmodel.tistory.com/1659

25. 뽈준꼬프: https://rtmodel.tistory.com/1702

26. 정직한 도둑: https://rtmodel.tistory.com/1703

27.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https://rtmodel.tistory.com/1704

28. 꼬마 영웅: https://rtmodel.tistory.com/1706

29. 약한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707

30.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711

31. 농부 마레이: https://rtmodel.tistory.com/1717

32. 보보끄: https://rtmodel.tistory.com/1719

33. 백 살의 노파: https://rtmodel.tistory.com/1721

34. 우스운 사람의 꿈: https://rtmodel.tistory.com/1722

35. 온순한 여자: https://rtmodel.tistory.com/1723

36.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 https://rtmodel.tistory.com/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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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말 페이지터너스
보리스 사빈코프 지음, 정보라 옮김 / 빛소굴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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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창백한 마음


보리스 빅토르비치 사빈코프 저, ‘창백한 말’을 읽고

첫 페이지만을 읽고 심상치 않다고 느껴지는 작품을 만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책을 어느 정도 읽어본 시람에게는 특히 더 그럴 것이다. 나는 이를 감히 축복이라 부른다. 운명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오래토록 옆에 두고 자주 펼쳐보며 참조해야 할 작품이라고 믿게 된다. 독자로서가 아니라 작가로서 말이다. 너무 많이 봐서 닳게 될 경우를 대비해, 혹시라도 절판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서라도 미리 여러 권을 소장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추천사를 쓴 정지돈 작가가 인생 소설이라 하고 필사했을 정도로 이 작품을 아끼는 이유를 알 듯하다. 

처음 만난 사빈코프의 글은 혁명과 테러의 중심에 선 주인공의 일기 형식을 따르기 때문인지 무거웠다. 그의 글은 고독하고 외롭기도 했다. 이는 주인공이 이끄는 테러의 성격을 대변한다는 생각이다. 리더 위치에 서 있는 주인공 조지를 포함하여 총 다섯 명의 동료들만이 거사를 준비하고 실행에 옮긴다. 목숨을 걸고 말이다. 그래서일까. 이 작품은 고독하고 외로울 뿐만 아니라 비장하기까지 하다. 소설이 끝날 즈음에는 다섯 중 셋은 목숨을 잃는다. 글이 고독하고 외롭게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는 주인공의 성격 탓일 것이다. 이 작품은 한 사람의 일기이기 때문에 객관적 서술보다는 주관적 서술과 내면의 독백이 주를 이루는데, 모든 페이지에 나타나는 화자의 내면은 한없이 쓸쓸하기만 하다. 슬플 때 눈물을 흘리지 않고, 고통스러울 때 소리 하나 지르지 않을 정도로 화자는 일반적인 감정 수준을 이미 초월한 듯한 인상마저 풍긴다. 살인을 왜 해야 하는지부터 시작하는 여러 복잡한 내면의 갈등마저도 그는 이미 초탈한 듯했다. 이미 그에게 테러는 어쨌거나 실행되어야만 하는 그 무엇이었다. 자기 자신은 물론 자기를 따르는 동료 넷의 목숨을 모두 잃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호함도 작품의 마지막에 가서 사랑하는 여자의 남편을 죽인 후 달라진다.

총독을 암살하는 계획은 여러 번의 실패 끝에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조지는 기쁘지 않다. 그의 삶은 한치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또 다른 타겟을 위해 암살을 계획하고 대의로 포장한 채 살인을 정당화시키는 삶에 매몰되지도 않는다. 그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살인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실행했던 것일까. 목표 달성 후에 느껴지는 한없는 공허함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까. 

총독 암살은 대의로 포장할 수 있다. 테러라는 말조차 반대편에서는 혁명의 씨앗으로 불릴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얻고자, 즉 사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한 살인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총독 암살이 성공리에 끝나고 작품 속 화자 조지는 연모하는 옐레나의 남편을 총으로 쏴 죽이고 만다. 이유는 간단했다. 옐레나를 독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살인 후 조지는 괴리감에 괴로워한다. 총독 암살을 하고 나서도 이렇게 괴로워하진 않았다. 그는 사랑을 얻기 위해 살인을 했지만, 그 사람만을 죽인 게 아니라 사랑도 죽였던 것이다. 

책의 말미에 가서 그는 고백한다. 더 이상의 테러를 원하지 않는다고. 사랑도 필요 없고 나는 혼자라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그리고 마지막 일기에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별이 빛나기 시작하고 가을밤이 오면 나는 마지막으로 말할 것이다. 나의 권총은 나와 함께 있다.”

대의를 성사시키기 위해, 그리고 사적인 욕망을 해결하기 위해 똑같이 살인을 행한 조지. 그에게 사람을 죽이는 일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 나아가, 사람이 살고 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 작품 마지막 문장으로 미루어 보아 조지는 아마도 가을밤에 홀연히 권총으로 자살을 실행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의든 소의든 살인을 행하고 난 뒤 그는 결국 모든 걸 잃었던 것이다. 자신의 생명마저 스스로 끊어야 할 만큼. 비록 살인자이지만 나는 조지에게 연민을 느낀다.

한 편의 소설이 남기는 흔적이 아련하게 느껴진다. 가을밤마다 혹시 그가 방아쇠를 당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행여나 내게 깃들지 않길 나는 바라게 된다. 하늘도 창백하고 내 마음도 창백해지는 듯한 기분이다. 

#빛소굴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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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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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쓰메 소세키 저, ‘마음’을 읽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고, 품은 자를 확신으로 이끌었다가도 이내 무지의 바다에 빠뜨려 당황스럽게 하며, 알아챈 자 역시 동일한 미궁에 빠뜨리고 마는 것. 모순되고 이율배반적이며 정체를 알 수 없어 그 존재 자체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것. 그러나 인간이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으며, 나쓰메 소세키의 대표작 제목이기도 한 바로 그것. 마음. 


읽는 내내 복잡한 마음이었다. 작품이 복잡해서가 아니다. 작품을 읽는 내 마음만 복잡했을 뿐이다. 마치 확신과 무지 사이에서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듯한 심정이었다. 나는 또다시 내 안에서 깊은 모순을 느꼈고, 죄책감을 느꼈으며, 속죄하는 심정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내가 낯설게 느껴지기조차 했다. 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계속 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고뇌했고 아파했다. 그런데 하필 이런 시기에 손에 쥐게 된 책이 ‘마음’이라니. 어쨌거나 나는 이 작품을 기점으로 뒤늦게 또 하나의 거장의 작품 세계로 입문하게 된 것이다.


정의하기가 까다롭지만 (불가능할지도), ‘마음’은 ‘심리’ 혹은 ‘인간의 본성’과도 중첩되며 인간의 특징을 설명하는 본질 중 하나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생각과 마음’의 이분법을 들며 생각은 머리에서 마음은 가슴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과연 그럴까. 생각이 머리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어렵지 않게 동의가 되지만, 마음이 가슴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동의가 되지 않는다. 생각과 마음이 과연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면에서도 나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그렇다면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어쩌면 이 질문은 관념적이라거나 추상적이라서, 마치 영혼이 어디에 있냐고 묻는 것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대신, 부정신학적인 방법을 차용할 수 있다면, 이렇게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은 적어도 가슴에서만 비롯되지는 않는다고. 


인간의 본성을 다룬 여러 천재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지금까지 적지 않게 읽어왔지만, 단 한 번도 지겹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이는 작가마다 다른 각도, 시선, 문체로 다양한 상황, 사건들을 다루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아마도 인간의 마음이 가지는 신비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묘연함이 가지는 매력이랄까. 안다고 여겼으나 알지 못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마력 같은 힘이랄까. 글의 영원한 소재와 주제가 될 마음. 작가 정보를 간략하게 훑어보니 나쓰메 소세키는 인간의 마음 (혹은 심리 혹은 본성)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대표작이라 불리는 이 책에서도 그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만 아무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등장인물들의 내면 묘사에 주력한다. 서사보다는 묘사에 치중한 작품들이 그렇듯, 이 책 역시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도 계속 생각이 나고 마음에 남았다. 아마도 한동안은 그러리라 생각된다. 그 때문일까. 나쓰메 소세키의 다른 작품들도 들여다보고 싶어 오늘 나는 여러 작품들을 찾아 보관함에 넣었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작품은 두 남자에게 집중되어 있다. 1, 2부의 화자인 ‘나’는 어느 날 우연히, 아니 어쩌면 운명적으로, 3부의 화자인 ‘나’를 만나게 된다. 첫 문장을 “나는 그분을 언제나 선생님이라고 불렀다.”로 시작하는 것만 봐도 이 작품은 1, 2부의 화자가 3부의 화자를 만나고 일어난 일들에 대한 기록 형태를 띠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게다가 3부는 분량이 전체의 절반 정도 되는 데다 편지 형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의 저자 나쓰메 소세키 시선의 무게중심은 선생님이라 불린 남자의 마음 위에 머문다는 점도 알 수 있다. 조금 과장하자면 1, 2부의 화자는 3부의 화자를 전면으로 드러나게 하기 위한 다리 역할을 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읽은 일본 작가들의 작품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재는 공교롭게도 죽음이었다. 그것도 타살이 아닌 자살. 이 작품에서도 죽음 (자살)의 냄새는 진하게 배어있다. 선생님이라 불렸던 3부의 화자도, 또 그를 자살하게 만든 동기를 제공했던 과거의 친구 K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한편 1, 2부의 화자가 적어도 이 작품 속에서는 그럴 기미를 보이지 않아 나는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행이라 여겼다. 일본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이번엔 또 누가 자살을 할까,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게 된다. 


나쓰메 소세키는 선생님의 마음을 정신분석학적으로 분석한다거나 파헤치지 않는다.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가능한 그대로 묘사하려 애썼던 것 같다. 시대가 지나도 인간의 마음은 마치 그대로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듯 이 작품을 읽는 독자는 자연스레 시공간이 엄연히 다른 곳에 위치했던, 그것도 가상의 인물에게 공감할 수밖에 없게 된다. 바로 이것이 나쓰메 소세키의 장수 비결일 것이다. 어쩌면 스토리텔링 혹은 내러티브의 무게중심은 거대하거나 기발한 서사에 있지 않고 그 서사 가운데 서 있는 인간의 내면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소설을 통해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있는 것이다. 문학의 힘이다.


선생님의 마음을 한 단어로 집약시킬 수는 없겠지만, 부채감, 죄책감, 수치 등으로 해석한다면 모든 독자들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싶다. 그가 이 작품의 3부를 이루는 생애 마지막 장문의 편지를 쓰고 자살을 감행했던 이유 역시 이런 단어들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책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선생님은 막역했던 친구 K의 자살을 본인이 저지른 타살로 여기진 않았을까. K가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하숙집 주인의 딸을 K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한 발 앞서 결혼을 서둘렀던 선생님. 축복된 결혼식에서도 K의 죽음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은 아내를 바라볼 때마다 K가 떠오르지 않았을까. 아내에게 죽기 전까지 진실을 말하지도 못한 채 세상과 동떨어진 섬이 되어 평생을 살아갔던 선생님. 3부를 이루는 마지막 편지 안엔 모든 진실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1, 2부의 화자는 이 세상에서 선생님의 진실을 알게 된 유일한 남자가 된 것이었다.


마지막 편지는 선생님의 독백이기에, 그리고 인생 전체가 담긴 막중한 무게 때문이라도, 독자는 이 부분을 읽을 때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K의 자살은 그에게 트라우마가 되었음이 틀림없다. 내가 발췌한 다음의 문장들만 읽어도 선생님의 마음을 살짝이라도 훑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를 독점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차 있던 나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네. 내 자존심으로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네.”


“나는 책략으로는 이겼지만 인간으로서는 패배했다는 생각에 괴로웠네.”


“내가 무엇보다 큰 충격을 받은 문구는, 편지 끝에 남은 먹물로 갈겨쓴 듯, 더 빨리 죽었어야 했는데 왜 지금까지 살아왔는지 모르겠다는 마지막 한 줄이었네.”


“나는 작은아버지에게 기만당했을 때 타인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고, 그만큼 나 자신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네.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은 완벽한 사람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지. 그런 믿음이 K의 일로 보기 좋게 무너지고 나 자신도 작은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을 때 내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네. 타인에게 등을 돌렸던 나는 곧 스스로를 혐오하게 되었고, 나 자신을 가둔 채 점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으로 변하고 말았네.”


“그럴 때마다 나는 웃기만 했지. 그러나 속으로는 내가 가장 믿고 사랑하는 사람마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 무척 슬펐네. 아니지, 이해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만들 용기가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고 해야 옳을 것이네. 그래서 나는 더욱 슬펐지. 나는 외로웠네. 나는 이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는 생각에 잠기곤 했네.”


“현실과 이상의 충돌, 그런 표현만으로는 뭔가 부족하지만, K는 나처럼 외롭고 공허한 마음을 이겨내지 못해 자살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네. 나 또한 K가 걸어간 길을 똑같이 걸어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스쳤거든. 나뭇잎을 소리 없이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어느 날 갑자기.”


욕망, 배신, 불신, 죄책감, 부채감, 고독, 그리고 자살. 이렇게 흘러가는 플롯에서 과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존재할까. 그럴 수 없기에 이런 문학 작품은 시대와 문화를 달리하면서도 끊임없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읽히는 게 아닐까. 본질은 마음이다. 진정성 어린 마음. 모든 서사를 뛰어넘어 독자의 마음에 가 닿는 그 무엇. 밝음보단 어두움이 지배하는 작품이지만, 모든 인간의 마음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 가식적인 밝음을 만들어내어 보이는 것보단 어두움을 직시하게 만드는 방식이 주는 이 의외의 효과. 아, 인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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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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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선을 넘어선 자, 영점을 재조정하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죄와 벌‘을 다시 읽고

5년 만에 ‘죄와 벌‘을 다시 읽으니 내 시선은 줄거리보다 등장인물에 더 오래 머문다. 게다가 지난 10개월간 독서모임과 함께 ‘가난한 사람들’부터 출간순으로 한 달에 한 작품씩 읽어오며 도스토옙스키의 발전과정을 함께 해서 그런지, 등장인물이 더욱 친근하면서도 입체적으로 느껴졌다. 이 글에서 나는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를 중점적으로 분석하면서 나 자신은 물론 인간을 보길 원한다. 작품을 읽지 않은 분들은 이 글이 아니라 나의 초독 감상문을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글은 작품을 읽고 줄거리를 충분히 파악하고 작품에 흐르는 철학과 사상을 느껴본 분들을 위한 것이다.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등장인물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라스꼴리니꼬프의 속성이기도 한데, 경우에 따라 다른 주변 인물들과 비교와 대조를 할 것이다.

선을 넘어선 자

소냐의 집을 찾아간 날 라스꼴리니꼬프는 소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 역시 똑같은 일을 했잖아? 당신 역시 선을 넘어선 거야. 넘어설 수 있었던 거지. 당신은 자기 몸에 손을 댔고, 스스로를 죽여 버렸어. 자기 생명을 말이야. 우리는 같은 길을 가야 해. 그러니 함께 갑시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소냐로부터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다. 그 동질성은 곧 ‘선을 넘어섰다는 것’. 작품의 맥락을 볼 때 이는 ‘살인’을 뜻한다. 그러나 살인도 살인 나름이다. 라스꼴리니꼬프의 살인이 타자를 물리적으로 죽인 것이라면, 소냐의 살인은 자신을 정신적으로 죽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돌이킬 수 없는 큰 범죄를 저지른 뒤 살아 있는 양심 때문에 정신적으로 쫓기는 살인자의 성급함일까? 그의 논리에선 비약이 감행된 객관성 상실이 확연해 보인다. 

라스꼴리니꼬프의 분석처럼 소냐에게는 치욕적이고 저급하고 세속적인 모습과 그와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고결하고 성스러운 모습이 공존한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매춘부의 길을 선택한 소냐. 어쩌면 그녀의 존재 자체가 모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자기 죽임’을 살인이라 할 수 있을까? 그녀에게서 모든 인간을 위해 죽음을 택하고 죽임을 당해야만 했던 예수의 모습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타자를 위한 자발적인 희생을 감히 살인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제사로 쓰인 요한복음 12장 24절 말씀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밀알 하나의 죽음은 모두를 위한 거룩한 희생이다. 소냐는 한 알의 밀알로서 가족을 먹여 살렸고, 나중엔 그녀를 잠시 오해하고 비난했던 라스꼴리니꼬프마저도 살려내는 역할을 감당한다. 소냐의 ‘자기 죽임’은 실로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

반면, 라스꼴리니꼬프의 노파 살인은 자기 자신은 물론 주위의 모든 사람을 죽이는 열매를 맺는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이를 죽였을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해석이자 살인자의 자기 합리화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라스꼴리니꼬프의 분석은 반만 옳았다. 둘 다 ‘선을 넘어선 자’였지만, 소냐는 타자를 위해, 라스꼴리니꼬프는 자기 자신을 위해 선을 넘어섰던 것이다. 소냐는 사람을 살리는 선의 열매를, 라스꼴리니꼬프는 사람을 죽이는 악의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 각자 다른 선을 넘어섰던 것이다.

참고로, 끝내 자살을 택한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자기 죽임’은 소냐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 차이 역시 자기를 위한 것인지 타자를 위한 것인지에 있을 것이다. 자기를 위한 살인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자살은 라스꼴리니꼬프의 타살과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겠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자, 곧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자

그렇다면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든 것일까? 라스꼴리니꼬프는 다음과 같이 자기가 소냐와 다름을 인정하게 된다.

“아아, 우리는 서로 다른 부류의 인간이야! 나는 마음이 악해. 그러니 짝이 아냐! 나는 왜 여기 온 걸까!”

놀랍게도 라스꼴리니꼬프는 소냐가 모순된 양면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자기처럼 폭주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에서 소냐와의 근원적인 차이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이 한 문장이다.

“하느님이 안 계시면 내가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겠어요?”

소냐는 라스꼴리니꼬프가 이 같은 전당포 노파를 죽인 후 계획에도 없던 추가적인 살인의 희생자, 리자베따와 같은 유로지비였다. 유로지비는 존재 자체가 어쩌면 모순이라 할 수 있다. 세속적인 관점에서는 바보 혹은 백치이지만 성자처럼 고결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 유로지비이기 때문이다. 

라스꼴리니꼬프와 달리 소냐는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소냐는 인간의 숙명적이고 존재론적인 한계를 인정하고 그것이 세계관이 된 사람이었던 것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도 나폴레옹과 같은 사람처럼 ‘모든 것이 허용되는’ 사람이라 믿었고 그것을 테스트해보고 싶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산술적인 공리주의 따위에 생을 걸었던 한낱 인간일 뿐이었다. 그는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누고 자신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에 관심이 있었을 뿐 인간 존재를 거뜬히 뛰어넘는 하느님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래서 소냐는 라스꼴리니꼬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당신은 왜 해서는 안 될 질문을 하시는 거예요? 어떻게 그런 일이 내 결정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지요? 누구는 살아야 하고, 누구는 죽어야 한다고 심판할 권리를 누가 내게 주었나요?”

라스꼴리니꼬프와 소냐는 공히 선을 넘어선 자였지만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존재론적인 차이를 인정하는지에 따라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다. 

또한 소냐는 스스로를 죄인으로 알고 있었다. 라스꼴리니꼬프가 스스로가 어떤 위치에 놓인 인간인지 테스트해보려 했던 자세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나는... 더러운 여자예요. 나는 큰, 크나큰 죄인이에요! 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는 인간을 어떻게 분류하는지를 따지는 어리석은 땅의 질문에서 벗어나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유한한 인간, 죄인인 인간의 한계를 겸손하게 인정하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기독교 세계관을 단적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우연에 이끌리는 자

재독 하면서 한 가지 더 눈에 들어온 것은 우연의 힘이었다. 라스꼴리니꼬프의 살인 도구가 될, 미리 점찍어 둔 도끼 대신 우연찮게 손쉽게 구할 수 있었던 도끼를 비롯하여 그의 살인 시도는 수차례 좌절될 수 있었으나 그때마다 기적처럼 예상치 못한 길이 열려 결국 살인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라스꼴리니꼬프를 우연에 이끌리는 자라고 보았다. 살다 보면 우린 모두 이와 비슷한 순간들을 겪는다. 하늘이 돕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는 듯한 상황을 마주할 때면 평소에 운명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운명적인 힘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런데 왜 도스토옙스키는 라스꼴리니꼬프의 살인 과정에서 이러한 운명적인 우연의 힘을 등장시킨 것일까? 사람을 죽이는 끔찍한 범죄는 보이지 않는 악마의 손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암묵적인 메시지는 아니었을까? 그런 일은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결코 저지를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우연은 우연을 경험하는 당사자를 수동적으로 만드는 법이다. 운명의 힘은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보이지 않는 힘에 의지하게 만든다. 소냐와 리자베따 역시 사람의 이성을 초월하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라스꼴리니꼬프가 이끌린 비가시적 존재는 그 정반대에 위치한 존재였을 것이다. 선과 악으로 구분할 수 있는 영적인 차원의 존재 말이다. 여기서도 도스토옙스키의 기독교적 관점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죄와 벌이란?

재미있게도 라스꼴리니꼬프의 이성은 양심과 맞물려 잘 돌아갔던 것 같다. 스스로도 고백하듯 그는 미친 상태가 아니라 정신이 온전한 상태에서 살인을 저질렀다. 살인 후에도 그는 자신의 범죄를 숨기려는 마음과 자백하려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할 뿐 단 한 번도 정신줄을 온전히 놓은 적이 없었다.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고뇌에 휩싸였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실제로 이 작품의 커다란 중추는 살인 전과 후에 보이는 라스꼴리니꼬프 내면 변화의 추적이다.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이 작품이 전 세계적으로 계속해서 읽히는 이유 역시 바로 여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즉 라스꼴리니꼬프 내면의 변화로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 내면의 변화와 보편적인 인간 내면의 변화를 보는 것이다. 

이제 이 작품에서 도스토옙스키가 말하는 죄와 벌이 무엇일지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단지 두 사람을 죽인 행위만을 죄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을 모든 것이 허용되는 존재라고 여기는 것, 다시 말해 유한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 즉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죄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라스꼴리니꼬프의 살인은 죄라기보다는 죄인의 가시적인 범죄 행위로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죄를 저지른 라스꼴리니꼬프가 소냐를 통한 갱생에 이르기 전까지의 삶 전체를 벌로 봐야 할 것이다. 고뇌에 찬 고립되고 단절된 삶 말이다.

이런 해석에 기댈 때 나는 라스꼴리니꼬프에게 인간이라는 이름을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라스꼴리니꼬프는 바로 나 자신이고 우리 모두로 확장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라스꼴리니꼬프처럼 가시적인 살인을 저지르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죄인일 수 있는 것이다.

‘죄와 벌’을 재독 하면서 도스토옙스키의 기독교 사상이 더욱 짙게 느껴졌다. 매춘부를 통해 구원에 이르고 마는 살인자의 이야기. 잘못된 선을 넘어선 자가 영점을 재조정하는 이야기. 거룩한 생명의 빛은 바닥 같은 인생을 사는 두 사람을 통해서도 아름답게 빛나는 것이다. 어쩌면 바닥이라서 더 아름답게 빛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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