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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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져가는 불꽃 앞에서


필립 로스 저, ‘에브리맨’을 읽고.

“현실은 소설 같기도 하고 개연성이 없어도 되지만, 소설은 그러면 안 된다. 소설은 현실적이어야 한다.”

언젠가 누군가가 내게 해 준 말이다. 어렸던 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나름대로 인생의 높은 점과 낮은 점을 모두 지나보고, 한 여자의 남편으로 15년 이상 살아도 보고, 한 아이의 아빠로서 10년 이상 아이의 성장과정을 옆에서 모두 지켜보기도 하며, 절망의 늪에 오래 빠져 있는 대신 소망의 가느다란 끈을 잡으려고 여전히 애쓰며 빠듯한 삶을 살아가는, 이제 나이 마흔 중반에 접어든 나는 그 말이 지니는 의미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활활 타오르던 불꽃도 꺼져가는 즈음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숙명을 깨닫게 되는 법이다. 허구임이 분명하지만, 때론 너무 현실 같은 소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한 인간의 인생에 대하여, 아니 모든 사람(에브리맨)의 인생에 대하여 조용히 곱씹어볼 수 있었다.

이렇게 현실적인, 지극히 현실적인 소설을 만날 때마다 나는 내 인생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 심지어 은밀하게 숨겨진 것들까지도 모두 발려져 공개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때 느껴지는 수치심과 두려움이란 마치 고백성사를 해야 할 것만 같은 당혹스러운 심정까지도 들게 만들고, 실제 현실에선 미처 느끼지 못했던 인생의 무게를 더욱 실감하게 만든다. 침묵 이외에는 모든 게 경박스러워 보일 정도의 그 무게. 가끔 아이의 어린 시절 사진을 훑어보며 애잔한 감정에 빠지곤 할 때 문득 느껴지는 시간의 무게 또한 함께 찾아와 나를 짓누른다. 시간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지만, 방향이 세로여서 이전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켜켜이 쌓여가는 것이다. 그 인생과 시간이라는 깊은 우물로부터 물을 길어 마실 때면 언제나 나는 모든 개별적인 사람(에브리맨)에 대해 경건한 마음을 갖게 된다.

비록 물리적으로는 하룻밤이라는 아주 짧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녀온 기분이다. 그래서 아주 긴 여행을 하고 온 것만 같은 기분은 물론 여독을 풀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까지 들 정도다 (한 인생을 하룻밤에 여행했으니 오죽하랴). 오후부터 시작해서 새벽이 되어서야 마지막 장에 다다를 수 있었고, 나는 너무 피로한 나머지 곤하게 잠이 들어버렸다. 그러나 주인공과는 달리 나는 다시 아침의 햇살을 받으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는 영원한 잠들었지만, 나는 그저 매일 본능적으로 그것을 연습하는 것에 그치고는, 오히려 그 연습 때문에 재충전되어 오늘이라는 현재로 다시 돌아와 이렇게 글을 남긴다. 조금은 지혜로워진 것 같은 느낌으로 말이다.

이 책은 한 인생의 서사를 조각조각 보여주며 독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포함한 보편적인 인생을 관조할 수 있는 조용한 자리로 내몬다. 그래서 이 책은 조금이라도 나이가 든 이후에 읽으면 좀 더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책이기도 하다. 또한 이 책은 새벽이나 아침에 읽기보다는 밤에 읽어야 하는 책이다. 치열했던 삶의 해가 저물어 가는 풍경을 놀랍도록 잘 절제된 목소리로 조곤조곤 들려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잠에 들기 전의 이야기를 하루 정도 잠들기 전에 들어 보는 것도 해볼 만한 경험이지 않을까 한다. 어차피 모든 사람의 인생은 한 번 불이 붙었다면 점점 꺼져가는 불씨와 같아서, 두텁기만 하던 초의 높이가 갈수록 낮아져 가고, 등잔 아래를 가득 채우던 기름도 점점 사라져 가는, 한낱 유한한 육체에 갇힌 신세이니까 말이다. 하루쯤 궁극의 끝에 선 사람처럼,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톺아보는 시간은 아마도 살면서 좀처럼 쉽게 가질 수 없는 소중한 성찰의 시간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책의 삼분의 일 쯤을 읽다가 섬광처럼 어떤 느낌이 내 기억의 저장고를 강타했다. 어딘가 흩어져있을 그 조각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나는 계속해서 그 조각을 찾으려는 시도와 함께 책을 읽어나갔다. 그 느낌. 그 애틋하면서도 쓰라린 느낌. 묵직하게 가슴 한복판을 치고 지나가, 휑한 심정으로 나를 덩그러니 외딴곳에 떨어뜨리는 그 느낌. 동시에, 지극히 평범해서, 인생을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는 그 느낌. 그렇다. 바로 작년 여름, 제임스 설터의 ‘가벼운 나날’을 한 달가량 힘들게 읽어내며 매일 같이 느끼던 바로 그 느낌이었다.

이 책 ‘에브리맨’으로 내게 다가온 필립 로스의 문체는 ‘가벼운 나날’로 만났던 제임스 설터의 문체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었다. 말하자면, 조금 더 남성적이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에브리맨’의 주인공이 한 남자에 맞춰져 있는 반면, ‘가벼운 나날’에서의 주인공은 한 부부, 그중에서도 아내 네드라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 서로 다른 문체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설터와 필립 로스의 목소리는 마치 한 사람의 서로 다른 목소리인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모두 비슷한 톤을 가지고 있었다. 흥분하여 격양되지도, 절망하여 허무해지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를 가감 없이, 때론 건조하게 느껴지기도 할 정도로 절제된 목소리로 일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의 우물은 갈수록 깊어지지만, 인생의 우물은 언젠간 바닥이 난다. 깊어지다가 바닥에 이르는 기나긴 여정이 우리네 인생이지 않을까. 나는 언제쯤 성숙하고 눈이 깊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언제쯤 그 끝을 예감한 지혜로운 사람으로 현재의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그 끝에 섰을 때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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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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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권태, 공허, 그리고 뜻밖의 위로


앤드루 포터 저, ‘사라진 것들’을 읽고


제임스 설터와 켄트 하루프를 섞어 놓은 느낌이랄까. 처음 읽는 앤드류 포터의 글은 덤덤한 일상을 기술하면서도 놓치기 쉬운 순간들을 세밀하게 포착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깊은 한숨을 쉬게 하고 먹먹한 가슴이 되게 만든다. 인생의 절반을 이미 살아낸, 마흔이 넘은 중년 남성이 매 단편의 주인공인데, 주인공과 비슷한 연배라면 아마도 나처럼 책 속의 문장들만이 아닌 행간까지도 자연스레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거기서 나는 설터의 '가벼운 나날'에서 맛보았던 반짝이는 권태와 공허를 느꼈고, 켄트 하루프의 '축복'에서 들을 수 있었던 일상의 소중함을 더욱 감사하며 소망하게 되었다. 


미국 생활을 11년간 해보아서 그런지 이 작품은 굉장히 미국적인 것 같았다. 남녀 관계가 다 그렇고 그렇지 않냐고, 사십 대 중년 남성이 겪는 권태감과 무력감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는 만큼 보이는 법. 남편과 아내의 일상적인 대화나, 일터에 다녀온 이후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들은 한국에서는 좀처럼 공감할 수 없고 미국에서는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정서가 흐른다. 간단히 말하자면, 적어도 저녁이 있는 삶, 혹은 적어도 먹고살 만한 환경에 처한 사람만이 고민하고 갈등할 수 있는 여유(?)가 전제가 되어야 이 작품이 내뿜는 은은하면서도 자칫 중독될 수 있는, 고요한 허무감에 제대로 당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 한때 그렇게나 열정적이었던 자신의 모습도 빛바랜 사진 한 장으로 추억된다는 것. 불쑥 찾아온 삶의 권태, 그 권태와 함께 조용히 스며드는 공허감.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한숨 짓기도 하고,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에 때때로 휩싸이기도 하며, 다 소용없다는 무기력함으로 오지도 않은 미래마저도 회색빛으로 물들여 버리는 건 아마도 욕망하고, 사유하고, 기억하는 인간만이 가진 공통된 속성일 것이다. 


우울할 수 있지만 아련한 기억이 만들어내는 잔잔한 우수에 잠겨보고 싶은 독자라면 이 책을 권한다. 의외로 위로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참고로 이 소설집은 짧은 단편이 15편 수록되어 있는데, 순서는 상관이 없고 모든 단편을 다 읽지 않아도 되니 아무 데나 펼치거나 끌리는 제목의 글만 읽어도 무방하다. 마흔이 넘었다면, 조용히 혼자 있는 밤에 이 책을 삼십 분이라도 읽어보면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알 것이다.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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뻬쩨르부르그 연대기 외 열린책들 세계문학 128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항재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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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골랴드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쁘로하르친 씨‘를 읽고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담백하게 세묜 이바노비치 쁘로하르친이라는 한 남자의 삶의 잠시 보여주며 그의 숨겨진 정체를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춘 단편소설이다. 단순할뿐더러 작품 구성이나 묘사와 서사 모두에서 내가 알고 사랑하는 도스토옙스키다운 면모를 찾아보기 힘들어 읽는 내내 어리둥절했다. 나름 반전이라고 주인공의 정체가 거지가 아닌 알부자였다는 결말 역시 내겐 놀랍기는커녕 진부하게 느껴졌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도스토옙스키 작품들과 비교할 때 눈에 띄게 미성숙한 글, 혹은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라는 나의 인상은 그리 과장되진 않을 것이다.


작품 속 주인공인 쁘로하르친은 아무나 상대하기 힘들 만큼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이자 구두쇠이기도 하다.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의 일상적인 거짓과 가식들을 유머로 받아쳐낼 마음의 여유가 그에겐 없었다. 그는 허름한 집 여주인의 방구석에 자리를 잡고 수십 년을 살았는데, 도무지 그가 하루 종일 뭐 하고 지내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인생의 지혜를 깨우쳐 입이 무거운 것도 아니었다. 한 번 입을 열면 상스러운 말투와 제한된 단어를 사용하여 비난과 욕지거리를 해대곤 했다. 식사도 남들보다 절반 이하로만 했으며 의식주 모든 것에서 찌질할 만큼 돈을 쓰지 않았다. 사람들은 당연히 그가 돈이 없어서 그런 줄 알았다.


그가 죽고 나자 그의 침대 요 안에서 수천 루블의 돈이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라 갑작스러운 큰돈 앞에서 놀라기도 했겠지만, 아마도 그것보다는 왜 쁘로하르친은 죽기 전까지 그렇게나 궁상맞게 살았는가 하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도대체 종 잡을 수 없던, 신비하면서도 혐오스럽고, 다가가기 쉬울 것 같았지만 어느 술주정뱅이 말고는 친한 사람이 아무도 없던, 게다가 순수하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무식했던,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할 것 같지 않던, 묘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작품은 그의 죽음과 더불어 남게 된 수천 루블의 돈으로 끝이 나는데, 도스토옙스키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 작품을 썼는지조차 이런저런 해석을 해 보려 했지만 적어도 내가 가진 배경지식으로는 딱히 집히는 게 없었다.


작품 해설을 보니 이 단편소설은 도스토옙스키가 ‘분신’을 쓰고 면박을 당한 직후에 썼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 스스로는 걸작이라고 믿었던 '분신'이 현실에서는 처참한 실패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래서일까? 다급해진 도스토옙스키의 그 당시 심정이 이 작품에 그대로 담긴 것일까? 쁘로하르친을 창조해 냄으로써 골랴드낀의 실패를 극복하고자 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어떤 시도를 했단 말인가? 이 작품은 그러한 선상에 있는 연습작 정도의 의미만을 지니는 것일까? 나는 알 수 없었다. 골랴드낀의 변주인 것 같은 느낌도 들긴 했지만 무언가 이가 빠진 듯한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쁘로하르친은 골랴드낀처럼 정신분열증 환자는 아닌 듯했다. 하지만 인물의 매력도에 있어서 나는 차라리 골랴드낀에게 더 끌린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스토옙스키가 자주 사용한 인물의 배경 (이를테면, 가난한 하급관리, 미혼, 고립된 성격의 소유자 등등)이 유지되어 여전히 도스토옙스키 작품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어쩌면 이 짧은 소설이 어떤 큰 장편의 일부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기에는 터무니없이 분량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장편이라면 여러 정황 속에 주인공을 배치함으로써 좀 더 입체적으로 인물 상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 단편 역시 도스토옙스키 전작 읽기를 시도하지 않는 한 굳이 읽을 필요가 없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도스토옙스키의 초기 단편을 읽으며 ‘도스토옙스키도 이렇게 작품을 엉성하게 쓸 때도 있었구나’하는 생각도 하게 되어 뜻밖의 위로를 받게 된다. 좋아하는 한 작가의 전작을 읽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작품으로부터 유작인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쓰이기까지 약 30년의 시간이 더 필요한데, 나는 그 시간이 얼마나 도스토옙스키를 변화시켰는지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실망마저도 하나의 작은 즐거움이 된다.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 도스토옙스키 처음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10.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17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rtmodel.tistory.com/1194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

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

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96

18.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429

19. 악몽 같은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435

20. 악어: https://rtmodel.tistory.com/1436

21. 인간 만세!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488

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

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

24. 백야: https://rtmodel.tistory.com/1659

25. 뽈준꼬프: https://rtmodel.tistory.com/1702

26. 정직한 도둑: https://rtmodel.tistory.com/1703

27.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https://rtmodel.tistory.com/1704

28. 꼬마 영웅: https://rtmodel.tistory.com/1706

29. 약한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707

30.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711

31. 농부 마레이: https://rtmodel.tistory.com/1717

32. 보보끄: https://rtmodel.tistory.com/1719

33. 백 살의 노파: https://rtmodel.tistory.com/1721

34. 우스운 사람의 꿈: https://rtmodel.tistory.com/1722

35. 온순한 여자: https://rtmodel.tistory.com/1723

36.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 https://rtmodel.tistory.com/1724

37. 영원한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823

38. 아홉 통의 편지로 된 소설: https://rtmodel.tistory.com/1825

39. 쁘로하르친 씨: https://rtmodel.tistory.com/1827


*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3.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39

4.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44

5.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761

6.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776

7.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1807

8.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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뻬쩨르부르그 연대기 외 열린책들 세계문학 128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항재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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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음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아홉 통의 편지로 된 소설‘을 읽고


'가난한 사람들'과 '분신' 사이에 쓰인 이 작품은 별다른 설명 없이 뾰뜨르 이바니치와 이반 뻬뜨로비치 사이에 오고 간 아홉 통의 편지로 구성된 아주 짧은 소설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친했던 두 사람이 불과 며칠 만에 절교에 이르고 마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천연덕스럽게 펼쳐 보인다. 두 사람이 만나 직접 대화를 했더라면 아마도 일이 그렇게 불거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편지는 직접 대화보다 언어를 걸러서 정갈하게 담을 수 있다는 장점을 갖는 반면, 편지를 읽거나 쓸 때만큼은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도 가진다. 아무리 답장이라도 모든 문장에 대해 응답할 수도 없을뿐더러 읽는 이와 쓰는 이의 관점의 차이 때문에 작은 오해가 큰 오해로 쉽게 커질 수 있는 가능성을 언제나 내포한다. 요즈음 시대에 이메일이나 채팅으로도 이러한 오해의 순간들을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데, 펜으로 직접 종이 편지를 쓰고 배달하여 빠르면 그다음 날에나 읽어보고 답장을 쓸 수 있었던 19세기엔 그 오해가 얼마나 심각했겠는가. 이 작품에선 뾰뜨르가 다섯 번, 이반이 네 번 편지를 쓰게 된다. 서로가 번갈아 쓴 답장을 가만히 읽고 있노라면 두 사람 사이의 진정한 소통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서로의 입장만을 변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서로에 대해 내세우는 칼날이 갈수록 점점 더 날카로워지는 과정도 볼 수 있다. 읽어 보면 알겠지만, 나 같은 경우 두 번 읽어도 가관이었다. 피식 헛웃음이 나올 만큼 말이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로 성공한 이후 '분신'의 골랴드낀을 준비하고 있던 도스토옙스키의 모습도 잠시 엿볼 수 있었다. 


사실 이 작품엔 추가적으로 두 통의 편지가 더 등장한다. 도스토옙스키는 발신인을 밝히지 않는데, 거기엔 어떤 의도가 있는 듯싶다. 두 통의 편지는 각자의 아내가 예브게니 니꼴라이치라는 한 남자와 저지른 불륜 혹은 그에 상응하는 행각을 담고 있다. 두 아내가 직접 예브게니에게 과거에 썼던 편지다. 유추해 보건대 뾰뜨르와 이반이 서로의 아내가 저지른 수치스러운 행각의 증거를 몰래 가지고 있다가 서로 절교를 선언하는 동시에 그 증거를 유출한 게 아닌가 싶다. 만약 이 유추가 사실이라면 이 작품은 정말 웃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서로의 약점을 쥐고 있다가 마지막에 그것을 빈 봉투에 담아 서로에게 가만히 보낸 행위 자체가 갖는 코미디 같으면서도 슬프기도 한 의미 때문이다. 


참고로 예브게니는 이반이 뾰뜨르에게 소개해준 청년이다. 그 소개 덕분에 예브게니가 뾰뜨르의 집에 눈치도 없이 너무 오래 거주하는 바람에 뾰뜨르가 이반에게 예브게니를 자기 집에서 나가게 말해달라고 부탁하는 편지가 두 사람 사이의 분쟁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추가적인 두 통의 편지의 발신인이 누구인지에 상관없이 뾰뜨르는 자기 집에 오래 거주하던 예브게니가 자기 아내와 불륜에 빠졌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이반은 자기 아내가 결혼하기 전 예브게니와 사랑에 빠졌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뾰뜨르와 이반은 애초에 진정 친한 관계였을까? 서로의 흠집이나 잡고 언제나 골탕 먹이려고 작정한 관계에 지나지 않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이 두 사람 사이에 편지로 오고 간 다툼은 무의미했던 것 같다. 먼저는 두 사람 모두 아무것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아내의 행각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또한 중간에 낀 예브게니만이 진정한 승자(?)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서로가 잘났다고 적절한 예의를 갖추며 떠들어대던 두 사람은 과연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그런데 그 어리석음이 비단 이 두 사람의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모두 적용되는, 숨기고 싶은 속성은 아닐까. 불필요한 다툼에 휘말려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는 어리석은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 아닐까. 그리고 이 어리석음은 분열의 전 단계가 아닐까.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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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스토옙스키 처음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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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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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10.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17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rtmodel.tistory.com/1194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

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

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96

18.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429

19. 악몽 같은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435

20. 악어: https://rtmodel.tistory.com/1436

21. 인간 만세!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488

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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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정직한 도둑: https://rtmodel.tistory.com/1703

27.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https://rtmodel.tistory.com/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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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영원한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823

38. 아홉 통의 편지로 된 소설: https://rtmodel.tistory.com/1825


*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3.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39

4.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44

5.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761

6.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776

7.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1807

8.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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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이야기 (리커버 일반판, 무선) 시녀 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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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적 허구가 담고 있는 진실


마거릿 애트우드 저, ‘시녀 이야기’를 읽고

페미니즘과 디스토피아가 절묘하게 만난 수작, ‘시녀 이야기’. 나는 이 작품을 통해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를 처음으로 만난다. 거장의 필체는 역시 다르다는 생각을 또 하게 된다.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간결한 문장은 기본인 데다 풍성한 상상력, 깊은 통찰에서 우러나와 이성과 감성을 모두 깨우는 묵직한 음성, 그리고 티 나지 않고 날카로운 뼈를 감춘 채 정확히 급소를 찌르는 절제미까지. 압도적인 서사보다는 인물의 내면과 그리 특별하지 않는 상황을 묘사하는 데에서 고수의 탁월함이 돋보인다. 단 한 권만 읽었을 뿐인데, 저자 이름이 가려진 숱한 글 속에서 나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글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실로 놀라운 작품이다. 

그러나, 작품성과 별개로 나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불편했다. 한두 차례 그만둘까 생각도 했었다. 저자 특유의 절제된 문장으로 표현되는 여성들의 비참함 때문에 그랬고, 비록 허구이지만 가부장제와 근본주의 기독교, 그리고 전체주의 사회의 뿌리 깊은 폭력과 거짓 영성 때문에도 그랬다. 남성이자 기독교인이라면 과연 이 작품을 읽고 나처럼 불편해하지 않을 독자가 있을까 싶다.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된 이 작품은 ‘길리어드’라는, 쿠데타로 세워진 가상의 전체주의 국가에서 ‘시녀’로 살아가다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한 여성의 기록으로 읽히게 되어 있다 (시녀는 씨받이로 생각하면 된다). 작가의 탁월한 설계다. 작품 끝에 놓인 ‘‘시녀 이야기’의 역사적 주해’에 의하면 작품의 현재는 21세기 말이다. 본문에 해당하는 한 여성의 기록은 한낱 허구에 불과한 이야기 정도가 아니라 실제 역사학자들이 연구하는 과거 문헌인 셈이다. 물론 이 ‘역사적 주해’ 역시 소설의 일부이기에 모든 게 허구이지만, 저자는 일부러 이런 액자식 구성을 십분 활용하여 본문에 허구적 역사성을 부여하는 등 작품의 비중을 한층 높이는 효과를 톡톡히 해내고 있다. ‘시녀 이야기’ 본문만 읽고 작품을 다 읽었다고 생각한 독자들은 아마도 책 뒤에 부록처럼 붙은 ‘역사적 주해’를 접하고는 ‘의외인데?’라는 생각과 함께 이 작품은 그저 ‘1984’와 같은 디스토피아 소설 정도에 머물지 않고, ‘안네의 일기’처럼 한 역사적 인물의 실제 수기인 것 같다는 인상까지 받게 될 것이다. 허구인 줄 알면서도 이렇게 단 몇 페이지에 불과한 부록 같은 내용이 500 페이지의 긴 본문이 가진 뉘앙스와 가치를 배가시키는 상황을 경험하면서 마거릿 애트우드라는 거장의 재간이랄까 솜씨를 충분히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21세기 중반 무렵, 시대는 잦은 전쟁과 극에 다른 환경파괴 등으로 종말에 이른다. 이런 혼돈으로 생겨난 균열을 이용하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체주의 국가가 바로 ‘길리어드’이다. 길리어드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묘사된다. 하나는 가부장제, 다른 하나는 근본주의 기독교. 조금 더 작품 속 상황을 잘 표현하려면 두 단어 앞에 ‘극단적인’이라는 형용사를 붙여야 한다. 페미니즘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두 단어만으로도 길리어드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길리어드는 여성에게서 거의 모든 권리를 빼앗았다. 여성은 소나 말, 혹은 노예, 혹은 쓰다 가차 없이 버릴 소모품처럼 남성들이 세운 체제에 억눌리고 착취당하는 비인격적인 존재로 살아가거나, 사람에게만 고유하게 존재하는 이성과 감성을 거세한 채 한낱 아이나 낳는 기계 따위로 취급된다. 저항하거나 거역하면 곧바로 처벌이나 처형이 가해지기 때문에 죽지 않으려면 체제에 순응해야만 한다. 사람답게 사는 것과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가는 것의,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차이를 철학, 신학적으로 깊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이다. 물론 그 이전에 이런 고민을 해야만 하는 체제를 만든 구조적인 악의 존재와 그 타개를 위해 더욱 치열하게 고민해야겠지만 말이다. 

뿐만 아니다. 근본주의 기독교의 극을 실현한 국가답게 길리어드는 다른 종교는 물론 다른 교단이나 교파까지 모두 교화해야 할 대상이나 적으로 간주하고 관리한다. 폭력과 압제로 기독교 정신을 지킨다니, 허구가 지나쳐도 너무 치나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단순히 이런 생각을 내칠 수만도 없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처한 기독교의 현실이 길리어드의 그것과 비교해서 정도만 다를 뿐 본질은 비슷하다는 슬픈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폭력을 가장 잘 길들이는 방법 중 하나가 종교다. 이때 종교는 곧 폭력의 다른 이름이 되고 만다. 궁극적으로 개인이나 어떤 특정한 집단의 사익을 위해 이용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아무리 거룩한 종교라는 옷을 입고 있다 할지라도 폭력이 된다.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개인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안녕과 평안만을 고려할 게 아니라 그 개인과 집단이 속한 더 큰 사회구조를 볼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소외된 자, 억눌린 자, 가난한 자와 같은 사회 약자층에 언제나 눈을 돌려야 한다. 내가 사탄이라도 개인을 일일이 건드리기보다는 비교할 수 없이 커다란 물인 국가나 사회를, 그리고 그 국가나 사회를 잡고 있는 이데올로기나 그들에게 당위성을 부여해주는 어떤 정신 (이를테면 자본주의 정신)을 건드릴 것이고, 여성으로 대표되는 약자층은 언제나 짓밟아도 되는 것처럼 사회 분위기를 조장할 것이다. 그게 모든 자를 타락시키고 망하게 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비록 시녀로 살다가 탈출한 한 여성의 수기로 읽도록 설계되어 있지만, 독자들은 비단 여성의 인권 정도에 머물지 말고 사회 모든 약자층까지 확장하여 이 작품의 의미를 해석하면 좋을 듯하다.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군데군데 드러나는 간접적인 증거와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길리어드는 미국을 지칭한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미국에 대한 비판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작품이 쓰인 해가 1985년이니 당시 미국은 공화당 소속인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재임을 시작했던 시기다. 예상컨대 마거릿 애트우드는 레이건 대통령의 초임 정권 하에서 길리어드를 본 것 같다. 가부장제와 근본주의 기독교가 판을 치며 파국을 맞이할 미국의 미래를 내다본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이 예언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소설이기 때문에 그녀의 예상의 정확도를 따질 필요가 전혀 없는 문제이지만, 미국의 지성인 중 하나였던 마거릿 애트우드의 눈에는 미국이 길리어드로 발전할 조짐이 분명히 있었다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다행히 그런 일이 아직까진 현실에서 벌어지지 않았지만, 트럼프 정권의 끔찍했던 지난 5년을 떠올려볼 때 여전히 미국은 그 가능성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인문학자들이나 철학자들, 혹은 신학자들이 현실을 비판하고 대안을 고찰하는 서적들이 출판계에서는 언제나 끊이지 않는다. 내로라하는 지성인들이 분석하고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안하는 책들은 읽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그러나 그런 책들의 단점은 주로 난해하다는 것이다. 어지간한 인내력이나 집중력을 가지지 않고서는, 혹은 그런 분야를 읽어온 경험이 전무한 사람이라면 책 한 권조차 끝까지 읽어내기 어렵다. 이에 반하여 ‘시녀 이야기’와 같은 소설은 일반인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 어렵지 않게 읽힐 수 있으며 자연스레 모든 사람의 내면에 있는 철학자와 신학자의 자아를 깨우는 역할을 해낸다. 문학이 가진 고유의 힘인 것이다. 가부장제와 근본주의 기독교의 조합이 어떤 일을 해내는지 궁금하다면 나는 이 작품을 망설임 없이 권한다. 

참고로, ‘시녀 이야기’의 후속작인 ‘증언들’이라는 작품이 2019년에 출판되었다고 한다. 34년이란 긴 시간이 두 작품 사이에 끼어 있으니 후속작이 나온 시기 치고는 조금 생뚱맞은 감도 없진 않다. 그러나 2019년이 공화당 소속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 시절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심장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증언들’도 읽어봐야겠다.

#황금가지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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