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0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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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강'의 깊은 뜻을 헤아리다


엔도 슈샤쿠 저, ‘깊은 강‘을 다시 읽고


(0) 들어가며


재독의 유익 중 하나는 줄거리 파악에 힘을 들일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세부사항은 기억이 안 나도 대략적인 흐름과 메시지를 이미 파악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십분 활용하여 ‘깊은 강‘을 4년 만에 다시 읽었다. 덕분에 작품 속 주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다. 더불어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와 잇닿아 있는 오쓰의 신앙, 즉 작가 엔도의 신앙관을 이해하고 변증 하려는 무언의 강박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초독 때와 달리 이번엔 좀 더 순수하게 문학적으로 이 작품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주요 등장인물은 다섯이다. 모두 저마다의 과거가 있다. 서로 다른 사연들을 가지고 그들은 지구상 유일한 장소, 인도 바라나시에 모이게 된다. 그리고 제각기 나름의 답을 얻게 된다. 설령 그것이 원했던 답은 아닐지라도 그들은 일종의 매듭 같은 걸 지을 수 있었다. 단순히 먼 이방 땅을 밟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이 상징하는 어떤 성스럽고 초월적인 의미 때문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각 인물들의 서사와 그들이 얻은 답, 그리고 그 답을 선사한 바라나시와 갠지스 강의 의미에 대해 조금 끄적거려 볼까 한다. 


(1) 이소베의 경우


첫 꼭지로 이소베를 위치시킨 건 엔도의 탁월한 선택으로 보인다. 이소베는 일본 남성의 전형적인 인물로 보이기 때문이다. '깊은 강'이 출간되기 전 엔도의 마지막 작품을 기다렸던 독자는 적지 않았을 테고, 그들 중 많은 일본 남성들은 이소베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읽을 수 있었을 거라는 짐작을 해 본다. 말하자면 엔도는 일본 남성 원형의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책을 시작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보편성으로 이목을 집중시키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이 보편성이 필요했던 또 다른 이유는 이소베의 아내가 병동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 남긴 말에 대한 이소베의 반응과 그 이후의 여정에 공감을 얻기 위한 엔도의 수 읽기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만약 이소베가 쉽게 공감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면, 아무리 유언이라도 환생할 테니 꼭 자기를 찾아달라는 아내의 말 한마디 때문에 모든 걸 제쳐두고 확실치도 않은 편지 한 통에 의지하여 인도까지 가게 되는 한 남자의 무게를 독자들은 쉽게 놓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요컨대 이소베가 일본 남성의 원형적인 인물이었기에 그의 기이한 행동까지도 독자들이 기대감을 가지면서 끝까지 읽게 되지 않았나 싶다. 또한, 시대와 장소가 다른 독자인 나조차도 이소베의 심정을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고, 심지어 바라나시의 허름한 골목에서 환생한 아내를 만나기를 내심 기대했던 걸 보면, 이소베가 상징하는 보편성은 비단 일본 남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겠다.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후 아내와 일상의 소중함을 뒤늦게 깨닫고 후회하고 자책하며 과거 자신의 어리석음을 만회하고 싶어 하는 한 노년 남자의 애절한 몸부림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왜 엔도는 이소베에게 환생한 아내와의 만남을 허락하지 않았을까?" 나는 이것이 이소베의 경우를 읽으며 물어야 하는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은 엔도가 그리고자 했던 바라나시와 갠지스 강의 의미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곳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며 모든 인간, 즉 한 나라의 수상부터 카스트 제도의 최하층 '수드라'에도 속하지 않는 카스트 밖의 존재들(아웃카스트)인 불가촉천민(몸에 닿기만 해도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존재들)까지 모두 묵묵히 품는 장소로 그려진다. 또한 그곳은 죽은 자가 살아난다거나 환생한 사람을 만난다거나 하는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나는 장소로 묘사되지 않는다. 다만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동시에 그 자체가 지극히 기적적인 상징으로 그려질 뿐이다. 이소베는 초자연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는, 죽은 아내가 환생했을지도 모를 한 소녀를 끝내 만나지 못한다. 그러나 미쓰코와의 대화로부터 짐작할 수 있듯, 이소베는 아내가 이미 자기 안에 환생해 있다는 결론에 묵묵히 다다르는 것처럼 보인다. 아내와 함께했던 기억들이 망각의 강에 떠내려가지 않고 계속 머물러 있다는 건 곧 아내의 환생을 의미할 수 있는 것이다.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이 곧 환생일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이 이소베에게 준 답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이것은 갠지스 강이 존재하지도 않을 어떤 관념적인 이상이나 신비로운 환상의 장소에 머무르지 않고 오감이 살아 움직이는 지극히 역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공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강력한 은유이지 않나 싶다. 엔도가 바라보고 그리고 싶어 했던 '깊은 강'의 깊은 뜻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할 것이다.


(2) 기구치의 경우


젊었을 적 미얀마에 파병되어 태평양 전쟁을 치렀던 기구치. 한 전우의 헌신 덕에 간신히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그는 전쟁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에게 전쟁은 총칼의 위협이 아닌 치열한 생존의 위협으로 기억된다. 미얀마의 기후와 풍토병, 그리고 먹을 것이 부재한 상황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전우의 인육까지 먹어야 했던 기억은 잊히지 않고 아직도 그를 괴롭힌다. 기구치에게 인육을 건네며 죽어가는 그를 살렸던 쓰카다는 일상에 끝내 적응하지 못한 채 알코올 중독에 빠져 지내다가 어느 날 자신이 일부를 먹었던 전우의 가족을 마주하게 된다. 그렇잖아도 전쟁 후 트라우마에 빠져 지내던 쓰카다를 붕괴시킨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결국 그는 병원에서 피를 토하며 죽게 된다. 


기구치는 생명의 은인인 쓰카다에게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자주 병원을 찾았다. 그곳에서 프랑스 출신의 가톨릭 청년 가스통을 만나게 되고 그가 바보스러울 정도로 헌신적으로 쓰카다를 포함한 여러 환자들을 돌보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는다. 쓰카다는 죽기 전 가스통에게만은 말을 터놓았다. 자신이 전쟁 중 인육을 먹었다는 고백을 하자 가스통은 기겁하지도 정죄하지도 않은 채 안데스 산맥에서 발생했던 비행기 추락 사고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미 살아날 가망이 없던 한 사람이 자진해서 자신의 살을 먹으라고, 그래야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하며 희생했던 이야기였다. 덕분에 살아남아 구조된 이들이나 자신의 몸을 희생해 다른 사람들을 살렸던 자의 가족이나 모두 서로를 이해하며 인육을 먹었다는 사건의 의미를 승화시킬 수 있었다. 쓰카다는 가스통의 이야기를 듣고 죄책감에서 해방받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가스통이 상징하는 건 지극히 낮고 추한 곳에 위치한 죄인에게까지 찾아오신 예수와 꼭 닮아 있다. 도스토옙스키 식으로 표현한다면 가스통은 유로지비일 수도 있겠다. 그 누구도 위로하지 못했고 술조차 몸을 상하게 할 뿐 도움이 되지 못했던 쓰카다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킨 건 가스통이었다. 가스통에게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마치 고해성사하듯이, 솔직히 고백한 이후에 쓰카다는 구원을 얻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구치는 이 모든 과정을 옆에서 목도했다. 그리고 인도 여행 중 가스통이 쓰카다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 있는 꿈을 꾼다. 기구치는 갠지스 강에서 비로소 가스통이 쓰카다에게 했던 행동의 의미를 다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모든 이들을 품어 안는 갠지스 강은 가장 더러운 죄인마저 품는 자비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와 겹친다. 


(3) 누마다의 경우


죽을 수도 있었을 폐 질환으로부터 간신히 살아남아 두 번째 인생을 살게 된 동화 작가 누마다. 그는 투병 중일 때 아내가 사준 구관조에게 유일하게 모든 솔직한 말을 털어놓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가 실패할 확률이 큰 수술에서도 살아남았을 때 그 구관조가 갑자기 죽었다. 누마다는 구관조가 자신을 대신해서 죽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어떻게든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누마다가 인도를 찾은 것도 야생에서만 구할 수 있는 구관조를 한 마리 사서 자연으로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누마다의 이야기는 갠지스 강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누마다가 해방을 맛본 곳은 갠지스 강이 아닌 인도의 정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미를 놓고 생각해 보면, 삶과 죽음의 양극을 모두 품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 목욕을 하는 모든 사람들을 받아주고 정결하게 해 주는 갠지스 강의 상징적인 의미와 맞닿아 있다. 비록 자기를 대신해서 죽었던 구관조와 같지는 아니지만 누마다는 자신이 구입한 새를 방생함으로써 은혜로 입었던 삶을 돌려준다. 말하자면 은혜를 흘려보낸 것이다. 'Pay it back'이 아닌 'Pay it forward'를 실천한 행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의미와 중첩된다. 죽음에서 삶으로, 그 삶에서 또 다른 삶으로 전달되는 은혜의 선순환. 갠지스 강이 갖는 또 다른 상징적인 의미일 것이다.  


(4) 미쓰코와 오쓰의 경우


나름 스스로를 깨어 있다고 자처하며 대학시절을 보냈던 미쓰코. 동시에 그녀는 스스로를 깨어 있다고 여기며 미쓰코와 함께 무리를 짓던 이들을 절대 동지로 보지 않았고 오히려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미쓰코는 그 어느 영역에서도 만족할 수 없었고, 분열되어 있었으며, 그래서인지 늘 경계에서 부유하는 인생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미쓰코의 내면은 공허했고 그녀의 눈은 냉소로 가득 차 있었다. 공부만 하는 학생들, 지극히 평범하게 보이는 학생들을 고리타분한 바보라 여기던 그녀는 어느 날 무리들의 소개로 오쓰를 유혹하기에 이른다. 


오쓰는 스스로도 원만한 인간관계를 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집안의 내력을 따른 가톨릭 신자였고, 내세울 것 없는 외모의 소유자였으며, 착한 심성을 가졌으나 나약한 사람이었다. 미쓰코의 육체적 유혹에 넘어갔고, 얼마 후 미쓰코로부터 버림받은 후 그는 신부가 되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간다 (오쓰와 미쓰코가 다니던 대학은 오쓰가 가게 된 프랑스의 수도원 관할이었다).


다른 남자와는 달리 오쓰는 미쓰코의 마음에 어떤 묘한 인상을 남겼다. 시간이 흐르고, 잘 나가는 집안의 남자와 결혼을 한 이후 신혼여행을 프랑스로 가서도 미쓰코는 홀로 그곳에서 신부가 되기 위한 여정을 밟고 있는 오쓰를 만나러 간다. 오쓰는 여전했다. 여전히 숙맥이었으며, 기독교 신앙에서도 여전히 어떤 경계에 머물고 있었다. 그 경계는 신앙의 유무를 가르는 경계가 아니었다.  지극히 서양 전통적이라 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주류'의 신앙관, 그리고 그것에 대립되는 범신론(이라 쓰고 범재신론이라 읽는다)적인 자신의 신앙관 사이에 난 경계였다. 오쓰는 둘을 통일시킬 수 없었고, 그래서 고뇌하고 있었다.  


허무와 냉소로 가득했던 미쓰코에게 오쓰는 자신의 삶이 껍데기만 남은 인생일지도 모른다는 자각을 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미쓰코의 삶이 껍데기의 삶이었다면, 오쓰의 삶은 정반대의 알맹이만 남은 삶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쓰코와 오쓰는 마치 외면과 내면이 분리된 인간의 모습을 그려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둘은 서로가 전혀 다른 캐릭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서로에게 부재한 모습이라는 사실도 본능적으로 알지 않았을까 싶다. 


프랑스에서 신부가 되지 못한 채 오쓰는 인도의 바라나시로 떠밀려 왔고, 그곳에서도 가톨릭 성당이 아닌 힌두교 소속의 공동체와 생활하며 불가촉천민들이 갠지스 강에서 죽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일은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이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이었으며, 돈이 되는 일도 아니었고, 심지어 오쓰가 꿈꾸던 일도 아니었다. 오쓰는 자신을 받아주는 유일한 공동체에서 머물렀을 뿐이고, 그 시간 그 공간(지금, 여기)에서 예수가 했음직한 행동들을 실천으로 옮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었다. 


가장 낮고 천한 자리까지 내려와 그들의 짐을 지고 함께 먹고 마시며 고통을 공유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숭고한 삶을 살고 있는 오쓰의 모습으로부터 미쓰코는 과연 무엇을 느꼈을까? 다 가진 것 같았으나 공허와 냉소만이 남아 있는 미쓰코, 다 잃은 것 같으나 어떤 충만함 속에 살고 있는 듯한 오쓰. 소설이라는 극단적 설정이 가미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미쓰코는 그 어느 곳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내밀한 충만함을 오쓰의 삶으로부터 처음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오쓰의 삶은 말하자면 사랑의 실천이었다. 한 사람에 대한 연민, 희생, 헌신. 그것은 자발적이고 실천적인 사랑이었다. 그리고 오쓰의 삶은 스스로 자신은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한 미쓰코의 삶의 정확한 여집합이었다. 미쓰코는 자신에게 부재했던 유일한 알맹이, 즉 '실천적인 사랑'을 인도의 바라나시와 갠지스 강에 와서야 마침내 깨닫게 된 것이다. 


(5) 마무리하며


엔도가 이 작품 속에서 그려낸 바라나시와 갠지스 강은;

(1) 이소베의 경우를 통해, 이상과 환상의 공간이 아닌 오감이 살아 있는 지극히 역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장소였다. 

(2) 기구치의 경우를 통해, 모든 사람을 품어 안으며 가장 더럽고 추한 죄인마저 끌어안는 자비의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었다. 

(3) 누마다의 경우를 통해, 대속의 은혜를 흘려보내며 생명의 선순환이 일어나는 거룩한 장소였다. 

(4) 미쓰코와 오쓰의 경우를 통해, 가장 낮고 천한 자리까지 내려와 그들을 섬기는 실천적인 사랑을 행하는 장소였다. 


그리고 이 작품을 두 번 읽은 나는 바라나시와 갠지스 강이 인도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바로 내가 거하는 모든 현장으로 스며들고 확산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엔도의 '깊은 강'에 대한 깊은 뜻을 이제야 조금 헤아릴 수 있을 듯하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 엔도 슈사쿠 읽기

1. 침묵: https://rtmodel.tistory.com/383

2. 침묵의 소리: https://rtmodel.tistory.com/390

3. 깊은 강: https://rtmodel.tistory.com/1378

4. 나를 사랑하는 법: https://rtmodel.tistory.com/1656

5. 바다와 독약: https://rtmodel.tistory.com/1681

6. 사해 부근에서: https://rtmodel.tistory.com/1770

7. 내가 버린 여자: https://rtmodel.tistory.com/2064


* 엔도 슈사쿠 다시 읽기

1. 깊은 : https://rtmodel.tistory.com/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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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 한국어 오늘의 젊은 작가 56
문지혁 지음 / 민음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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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방 실전 행복론

문지혁 저, '실전 한국어'를 읽고

'중급 한국어'에 이어 읽으려고 했던 '나이트 트레인'보다 조금 더 늦게 출간된 '실전 한국어'에 손이 먼저 간 이유가 뭘까 궁금해하며 첫 페이지를 열었다. 나도 모르게 빠져서 계속 읽게 되었다. 문지혁 작가의 문체와 '초급 한국어'부터 이어온 한국어 시리즈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매력 때문일 것이다. 

충분히 실력은 갖추고 있지만 어떤 환경이 잘 맞지 않아 제대로 가르치는 자리에도 서지 못하고 등단도 하지 못한 채 여전히 경계(문지방)에서 읽고 쓰고 가르치는 일에 진심으로 살아가는 작품 속 문지혁 작가 (현실 속 문지혁 작가는 다름)의 이야기는 뭐랄까 어딘가 측은지심을 유발하면서도 맥락이 다르지만 내 삶과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한 작가의 작품을 연이어 읽게 되는 데에는 어떤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어쩌면 나는 여러 평행우주 속에서 이 작품 속 문지혁 작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은 결코 실패한 지식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여전히 준비 중인, 어쩌면 그 준비가 일생일지도 모르는 한 사람의 인생 드라마다,라고 나는 읽는다. 그리고 깊은 정서적 공감을 느끼며 초급, 중급, 실전에 이르는 이 트릴로지를 읽어낸 것도 아마 나 역시 그 인생의 여러 주인공 중 하나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미적대고 정체된 듯한 기분, 오랜 견딤의 순간들, 원하는 것들은 오지 않고 원치 않는 것들만 연이어 발생하는 일상들, 그러나 그 가운데 보석 같이 찬란하게 빛나는 행복이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게 아닐까. 그리고 이 메시지를 위해 꼭 필요했던 부분이 나는 가족 이야기라고 해석했다. 

'초급 한국어'에서 화자는 싱글이었다. '중급 한국어'에서는 한 여자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빠였다. 이번 '실전 한국어'에서는 두 아이의 아빠로 등장한다. 이 시리즈를 단순한 오토 픽션이라고 치부하는 독자들은 이러한 화자의 가족 이야기가 흔해 빠진 것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정상'적인, 혹은 '평범한', 혹은 '평균'적인 인간, 즉 보편성을 띠어 그 어떤 독자라도 자신만의 편향된 안경만 벗어놓는다면 작품 속 화자의 생각과 감정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소재이자, 한국어 시리즈에서 절대 빠지면 안 되는 중심소재로 보였다. 한국어 시리즈가 말하고자 하는 건 한국어 수업이 아니다. 어쩌면 행복론이다. 이 시리즈가 향하는 건 행복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일상 속 소소한 행복,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소확행. 메시지는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것에 다가가는 방법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소시민적이다. 그래서 이 책이 내게는 실전 한국어라기보다는 실전 행복론이다. 경계(문지방)에서 우리가 무심코 흘려보내는 소중한 것들을 포착하는 작품이다.

놀라운 건 초급, 중급에서도 드문드문 나타났지만 자조적인 뉘앙스가 상대적으로 강해서 수면 위로 잘 드러나지 않았는데, 이번 실전에서 제대로 효과를 발휘된 요소가 있다는 점이다. 바로 유머다.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 열 번 가까이 빵 터져서 혼자 낄낄 대며 웃었다. 사람은 자상한 것 같으나 결코 어린 자녀들에게는 그 모습을 항상 유지할 수 없는 사십 대 아빠의 전형적인 모습도 공감 백배였지만, 딸과 나누는 대화에서, 딸의 행동에 반응하는 아빠의 모습에서 나는 뭉클한 감동을 느끼기도 하면서, 동시에 웃겨서 배꼽 빠지는 줄 알았다. 이건 다소 내가 문지혁 작가의 글쓰기 스타일에 익숙해졌고 그것을 좋아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하지만, 이 작품을 천천히 맨눈으로 읽는 사십 대 아빠 독자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무튼 실전에서 유머는 대성공이다. 나는 역시 실전 스타일인가 보다. ㅋㅋㅋ 초급, 중급, 실전, 그중에 제일은 실전이라.

더 많은 얘기를 하고 싶으나 스포가 될까 봐 자제하기로 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꼭 문지혁 작가의 한국어 시리즈를 섭렵하면 좋겠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조건이 있다. 반드시 차례대로 읽을 것. 초급, 중급, 실전 순으로.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 문지혁 읽기
1. 소설 쓰고 앉아 있네: https://rtmodel.tistory.com/2031
2. 고잉 홈: https://rtmodel.tistory.com/2046
3. 당신이 준 것: https://rtmodel.tistory.com/2112
4. 초급 한국어: https://rtmodel.tistory.com/2134
5. 중급 한국어: https://rtmodel.tistory.com/2139
6. 실전 한국어: https://rtmodel.tistory.com/2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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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강
미야모토 테루 지음, 허호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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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하지만 따뜻한 서정성, 그리고 환상 이미지의 효과적 활용


미야모토 테루 저, '반딧불 강'을 읽고


'그냥 믿어주는 일'에서 저자가 썼듯이,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지 2년째 되던 1977년, 세상에 먼저 선보여 다자이 오사무 상까지 받은 작품은 '흙탕물 강'이었다. 하지만 먼저 쓰기 시작했던 작품은 '반딧불 강'이었다. 1년 늦게 출간된 '반딧불 강'은 아쿠타가와 상을 받았다. 두 작품은 미야모토 테루의 데뷔작인 동시에 이르게 찾아온 사회적 성공이었다.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그의 이름을 또렷이 기억하게 만든 '환상의 빛' 역시 1979년 출간이었다. 일반적으로 후기작으로 갈수록 원숙한 작품을 쓰는 작가들이 많은 데 비해 미야모토 테루는 작가로서의 모든 것이 초기작에 집중된 듯하다. 작가로서 타고난 재능이 작품을 거듭할수록 점점 퇴색된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말이다. 독특한 경우라 할 수 있겠다. 


출간이 늦어졌을 뿐 '반딧불 강'이 저자가 소설가로서 쓰기 시작한 첫 작품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 소설의 완성도는 정말이지 탁월했다. 약 백 페이지 정도 되는 중편소설이지만 초반부터 툭툭치고 가는 거리낌 없는 문장들로부터 나는 대가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선을 넘지 않는 건조한 단문들의 조합과 그것들이 그려내는 서정적인 이미지, 그리고 그 가운데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서사까지 도저히 집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빠져들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두 시간 채 되지 않아 완독 할 수 있었다. 뭐라고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으나, 분명 미야모토 테루가 가진 힘은 내겐 충분히 매력적이다. 


'반딧불 강'에는 '흙탕물 강'과 비슷한 분위기가 흐른다. 하지만 나는 '반딧불 강'을 더 우위에 두고 싶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미야모토 테루의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건조하지만 따뜻한 서정성'이 더 돋보인다는 것. 둘째, 미야모토 테루 작품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을 '환상 이미지'가 영리하게 활용되었다는 것. 이 글은 이 두 가지를 풀는 식으로 정리해 볼까 한다.


먼저 '건조하지만 따뜻한 서정성'이라고 쓴 표현은 사실 내가 개인적으로 애정하는 소설의 지향점 같은 것이다. 드러내놓고 따뜻한 이미지는 부담스럽고, 처음부터 끝까지 건조하기만 한 이미지는 매력이 없다고 보는 나는 이 둘의 적절한 조합이 서정성을 도드라지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생각한다. 또한 소설은 사람이 아니라 텍스트이기에, 건조함은 단문으로, 따뜻함은 등장인물의 간접적인 감정 표현으로 넌지시 보여주는 방식이 나는 조금 더 서정적인 소설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미야모토 테루는 이러한 기술을 탁월한 구사하는 소설가인 것이다. 


'흙탕물 강'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지만, 뭐랄까, '반딧불 강'에서 나는 조금 더 진한 우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우수는 두 소설이 다루는 서로 다른 내용에 있기보다는 저자가 그 내용을 풀어나가는 형식에서 비롯된다고 느꼈다. 특히 자연에 대한 묘사가 더 풍성했는데, 그 묘사들과 조화롭게 흘러가는 인물들의 서사와 감정의 전개가 예사롭지 않았다. 작품 속 세 개의 소제목 중 두 개도 모두 계절을 상징하는 이미지였다. 하나는 '눈', 다른 하나는 '벚꽃'. 마치 소설 속 이야기가 하나의 그림으로 각 소제목을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해도 결코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림은 '흙탕물 강'에서도 느꼈던 것처럼 두꺼운 유화가 아닌 여백이 풍성한 수채화였다. 후 불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아려한 기억처럼 그렇게 이 작품은 내게 다가왔다. 


두 번째 이유는 '환상 이미지'의 활용인데, '흙탕물 강'에서도 이 이미지는 '귀신잉어'라고 표현되는 거대한 잉어로 나타났다. 이것은 두 주인공 남자아이, 노부오와 기이치가 처음 만났던 날 둘을 엮어주는 다리가 되어주었고, 작품이 끝나는 장면에서도 나타나 둘의 원하지 않던 이별을 기념하는 기표가 되어주는 듯했다. 하지만 귀신잉어의 이미지는 작품에서 하나의 신기한 관찰 정도의 의미만 가질 뿐 그 이상의 무게를 가지진 않았다.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않았고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도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반면, '반딧불 강'에서 활용된 환상 이미지인 '반딧불'은 이 작품 속에서 어떤 기적 혹은 신적 이미지까지 연상시키는 신비로 그려지는데, 등장인물들의 내적 고민, 갈등, 슬픔들을 해소시켜 주는 역할을 감당한다. 어찌 보면 범신론을 믿는 지극히 일본적인 문화가 깃들어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치부하기에 반딧불의 이미지 활용법은 아주 영리했다. 이 작품 속에서는 일종의 해방과 탈출구의 이미지 혹은 위로와 치유의 이미지로 부각되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그것의 정점을 찍는 효과를 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매력적인 문체의 소유자 미야모토 테루의 작품을 다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책장엔 '환상의 빛'에 이은 서간체 소설 '금수'가 놓여 있다. 시간을 두고 아끼는 마음으로 천천히 읽어봐야겠다. 바로 읽고 싶지만 이것까지 읽으면 금세 바닥이 날 테니까.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 미야모토 테루 읽기

1. 환상의 빛: https://rtmodel.tistory.com/1169

2. 생의 실루엣: https://rtmodel.tistory.com/1241

3. 그냥 믿어주는 일: https://rtmodel.tistory.com/2176

4. 흙탕물 강: https://rtmodel.tistory.com/2185

5. 반딧불 : https://rtmodel.tistory.com/2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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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강
미야모토 테루 지음, 허호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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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수채화


미야모토 테루 저, '흙탕물 강'을 읽고


문체에 이끌려 계속 읽게 되는 작가의 작품을 읽다 보면 독서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순수한 유희를 맛볼 수 있다. 어떤 작가의 사상이나 주제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내가 원하는 특정 부분을 강화시키는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그것은 내 의지의 관철, 혹은 기대의 충족에 머물고 만다. 반복되면 자칫 확증 편향의 일환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내용(사상이나 주제)이 아닌 형식(문체)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적어도 이런 독서의 부작용은 피할 수 있으며, 그 덕분에 새로운 작품을 읽으면서도 여전히 처음 읽는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처럼 순수한 기대를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 때문에 따라오는 예상치 못한 즐거움도 만끽할 수 있다. 


'흙탕물 강'은 한 편의 수채화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 남긴 여운과 많이 닮았다고 느낀다. 특정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나지만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 특수성을 가지지만 보편성을 결코 잃지 않은 이야기. 그래서 독자들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이지만 나를 대입시켜 읽게 되는 이야기.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이야기. 유화처럼 강렬하고 두꺼워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가 아닌, 수채화처럼 맑고 순수하여 물에 지워질까 조바심이 나는 이야기, 그래서 더욱더 아련하고 아끼고 싶어지는 이야기 말이다. 


이 작품은 비가 오면 금방 흙탕물이 되고 마는 강 주위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일본, 전쟁이 끝난 지 십 년이 지난 현재, 여전히 작품 속 아버지 세대는 전쟁의 후유증이 몸의 상흔으로 남아 있다. 이들은 생존자들이다. 전쟁 때 죽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남아 자녀도 낳고 생계도 겨우 유지하며 살아가는 서민들이다. 저자의 눈은 특별히 이들의 자녀에게로 향한다. 전쟁을 겪지 않은 아이들은 부모님을 비롯한 어른들을 보며 전쟁이 무엇인지 그것이 남긴 상처가 무엇인지 알아간다. 배우는 노래조차 전쟁 중 어른들이 부르던 노래일 정도로. 


작품에서는 주인공이 선명하게 부각되지는 않지만, 우동 집 아들 노부오와 최근에 강 건너편으로 이사 온 같은 학년의 남자아이 기이치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짧은 기간, 같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이 줄거리를 이룬다. 노부오는 몸이 약한 탓에 늘 집 안에서 창문으로 강을 내려다보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기이치의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어머니는 몸을 파는 일을 한다. 기이치에게는 긴꼬라는 이름의 두세 살 위의 누나도 있다. 둘은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 집도 땅 위에 지은 집이 아닌 물 위를 떠다니는 조그마한 배다. 전쟁의 상처는 서민들 일상의 바닥까지 침투하여 여전히 삶의 근간을 쥐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달리 설명하진 않지만, 기이치와 긴꼬, 그리고 매춘부로 살아가는 그들의 어머니는 전쟁 후 살아남은 서민들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노부오의 눈에 어느 날 기이치가 눈에 들어온다. 여덟 살 정도 나이의 사내아이들이 그렇듯 둘은 금세 친해진다. 긴꼬도 알게 되고 그들의 어머니가 무슨 일을 하는지 배우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노부오의 부모도 주위의 이웃들로부터 주워들은 모양인지 알고 있는 눈치다. 모두 쉬쉬 하는 분위기,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면 기이치와 긴꼬는 수치와 분노를 느끼는 듯한 장면들을 저자 미야모토 테루는 결코 직설적이지 않게 보여준다. 독자가 개입하여 충분히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게 그려주는 것이다. 


이야기는 기이치의 집인 조그만 배가 다른 곳으로 이사 가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불법 체류 같은 이유였다. 얼마 전 노부오는 기이치의 어머니가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어렴풋이 보게 되고 감정과 사상의 혼란을 겪으면서 기이치와 긴꼬와의 관계도 소원해진 상태였다. 마침내 그들이 떠나는 날, 천천히 강을 따라 움직이는 기이치의 배집을 따라서 뛰어가며 노부오는 기이치를 부르고 기이치를 만나던 날 처음 함께 보았던 귀신잉어가 배를 따라가고 있다는 걸 알려주려 한다. 그러나 배집은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한 채 점점 더 멀리 사라져 갈 뿐이었다. 그리고 작품은 이렇게 마무리를 짓는다.


독자로서 읽어도 아름다운 소설이었지만, 작가로서 읽었을 때 더욱 내겐 배울 게 많은 작품이었다. 서정성과 묘사하는 기법들, 인물들 관계 설정과 그 사이에 흐르는 갈등 및 아픔을 과장하지도 무시하지도 않은 채 다루는 방식들을 하나씩 배울 수 있었다. 언젠가 완성할 '동수'에서도 꼭 활용해야 할 방법들일 것이다.


1977년 다자이 오사무 상을 받았던 이 작품에 이어 같은 책에 실린 1978년 아쿠타가와 상을 받았던 '반딧불 강'도 마저 읽어야겠다. 이런 감성이 좋다.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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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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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스토너


존 윌리엄스 저, '스토너'를 다시 읽고


'스토너'를 처음 읽었을 때를 똑똑히 기억한다. 묵직한 무언가에 한 대 맞은 것처럼 한동안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줄거리가 다 기억나지는 않아도 책이 남긴 잔상은 조용하고도 강렬했다. 그 이후 난 '스토너'를 지금까지 읽은 천 권이 넘는 책들 중 열 권 중에 항상 포함시켜 왔다. 재독에 앞서 무엇이 날 그렇게 만들었는지 스스로 물었다. 이번에도 나는 어떠한 논리적인 답도 할 수 없었다. 인생을 숙고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다소 막연한 말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7년 만에 다시 이 작품을 읽으며 나는 놀랍게도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그때 그 심정으로 곧장 진입할 수 있었다. 아니, 조금은 더 깊은 바닥까지 스토너의 심정을 공감할 수 있었다. 마음이 더 아팠다. 쑤시듯이, 동시에 얼얼하게, 그리고 무감각해질 정도로. 재독을 마친 지금 내 모습은 초독을 마쳤을 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분열과 고독을 머금은 채 결코 저항하지 않고 주어진 삶을 살다 간 한 사람이 이번에도 내 몸과 마음을 모두 앗아가 버렸다. 


재독의 여유는 줄거리에 조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세세한 건 기억이 나지 않아도 큼직한 것들은 이미 아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스토너가 가난한 시골 농부 집안 출신이라는 것, 어쩌다 대학에 들어갔으나 전공을 영문학으로 바꾸게 되었다는 것, 한 여자에게 눈이 멀어 사랑 아닌 사랑에 빠져 덥석 결혼을 해버렸다는 것, 그 결혼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행으로 점철되었다는 것, 그 이유의 무게중심은 스토너가 아닌 아내에게 있었다는 것, 그것의 희생양으로 딸도 불행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 장애를 가진 동료 교수의 비뚤어진 집착과 분노로 인해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교수 생활 대부분을 껄끄러운 인간관계 속에서 지내야 했다는 것, 그리고 한 여자 강사와 사랑에 빠져 (이미 유부남이지만 처음으로 사랑을)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지만 한 편으론 납득이 될 만한 불륜 관계에 한동안 빠져 지내다가 깔끔하게 관계를 정리했다는 것, 마지막으로 암에 걸려 홀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까지, 중요한 이야기들은 7년이 지나도 내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 작품은 초독 때보다도 더 강한 힘으로 중력처럼 나를 무겁게 아래로 아래로 심연까지 끌어내린 것일까.


정확한 답은 여전히 모른다. 아마도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고, 이성과 논리의 영역도 훌쩍 벗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한 사람이 또 다른 한 사람의 마음속으로 훅 하고 들어오는 게 어찌 '합리적'이기만 하겠는가. 나는 그저 스토너가 내면 깊숙한 곳에서 나와 비슷한 구석이 의외로 많다는 것에 놀라워하며 그에게 빙의되어 있었을 뿐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분열된 외로운 삶을 아스라이 살아가는 스토너의 고독이 마치 내 것인 것만 같았다.


스토너를 벼랑 끝으로 몰아간 사건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나씩 짚어보면서 이 글을 풀어가겠다.


첫째, 가정 문제다. 사랑이 아닌 본능적인 이끌림이 낳은 비극이라고 하면 성급한 일반화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스토너의 경우는 여기에 해당된다. 이것만 보면 스토너의 불찰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내가 된 이디스의 정신병적인 내면세계가 두 사람의 결혼을 불행으로 이끈 주범으로 보인다. 저자는 이디스를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쓴다. 이 표현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무난하고 순박한 시골 남자 스토너를 그녀가 어떻게 대했는지를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녀는 남편을 사랑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아니, 이것부터 먼저 물어야 한다. 그녀는 스스로를 사랑한 적이 있었을까? 저자는 이디스에게 어떠한 병명도 붙이지 않지만, 그녀의 말과 행동을 근거로 볼 때 정신분열 혹은 성격장애 정도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것도 중증으로. 그녀는 늘 공중에 부유하는 듯했다. 착륙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듯했다. 그녀의 다른 이름은 불안과 초조였다. 그러나 남편 스토너와 딸 그레이스의 반응은 의외였다. 그녀와 싸우지 않는 것이었다. 대신 조용히 선을 긋고, 같은 집에 살지만 함께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리고 그녀의 말을 다 들어주고 따라주지만 껍데기뿐인 순종 혹은 복종으로 대했다. 그렇게 스토너의 가정은 겉으로 볼 땐 멀쩡했으나 속은 이미 썩을 대로 썩어 붕괴되고 있었다. 이렇게 조용히 파국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정말이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남편과 딸이 너무 불쌍했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이디스에게도 연민이 느껴졌다. 본인이 무엇을 하는지조차 모른 상태에서, 마치 뭔가에 쓰인 것처럼, 모든 행동들을 ‘나름의 합리적인 생각‘으로 (이론적일 뿐이었지만) 실천에 옮긴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디스는 결국 악을 행한 사람이 되었지만 악한 의도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말 못 할 상황들이 과연 스토너 가정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스스로를 돌볼 줄 아는 사람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된다. 


둘째, 직장 문제다. 로맥스라는 지체장애인이자 동료 교수가 빌런으로 등장한다. 왜 저자는 이 빌런을 지체장애인으로 설정했는지 그의 정확한 의도는 모르겠지만, 로맥스와 스토너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 명확하게 생겨버린 사건의 주인공 워커 역시 로맥스와 마찬가지로 지체장애인으로 설정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건 절대 우연이 아니다), 저자는 분명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걸로 보인다. 능력 미달이라 워커에게 불합격을 줄 수밖에 없었던 스토너가 마치 장애인을 함부로 대하고 차별한 것처럼 만들어버린 로맥스, 그리고 그 틈을 타 교활한 눈빛으로 다시 학위과정을 이어갈 수 있었던 워커, 내게 이 두 사람은 순수 악으로 느껴졌다. 적어도 이디스는 악의가 없었다고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었던 반면, 로맥스와 워커는 명징한 악의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스토너를 파괴시키기 위한 선명한 의도. 물론 이것은 스토너와 그의 친구 고든에게만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지체장애라는 가시적인 특징으로 인해 상당 부분 가려졌다. 로맥스와 워커는 사적이고 악한 욕망을 위해 약자라는 위상을 십분 활용하여 무기로 사용하는 인간 말종이었던 것이다. 이를 열등감만으로 해석하기에는 아무래도 모자란 감이 있다. 악의라고, 악의였다고 나는 분명히 말하고 싶다. 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약할 수는 있어도 악하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셋째, 이성 문제다. 기본적으로 기혼자의 이성 문제는 사회적 윤리나 개인적 도덕으로 올바르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저자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너에게 불륜을 허락한 것을 보면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적어도 스토너를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아니다. 오히려 스토너의 벼랑 끝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치 탈출구를 마련해 준 것 같은 인상도 받았다. 저자는 불륜의 원인을 스토너 부부 관계의 붕괴로 돌리는 것처럼 보인다. 스토너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었지만, 아내라고 할 사람이 없었고, 그 사람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딸과의 관계도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외톨이였다. 저자는 이런 스토너를 두고 ‘그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라고 쓴다. 마치 저자는 스토너의 불륜이 이미 예정되어 있는 수순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스토너는 불륜에서 처음으로 사랑다운 사랑을 느꼈다. 한 사람과의 진정성이 깃든 영혼의 소통을 하며 깊은 만족감을 얻은 것처럼 보였다. 아내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졌어야 하는 것들이었다. 나는 이 장면을 읽으며 ‘이러면 안 되는데‘ 싶다가도 금지된 사랑 속에서나마 살아 있을 때 사랑을 경험할 수 있게 된 스토너를 지지하는 마음도 들었다. 혼란스러웠지만 스토너에게 깊은 연민을 느낄 수 있었다. 놀랍게도 아내 이디스는 남편의 불륜을 알고도 별일 아니라는 듯 행동한다. 아마도 자신이 도량이 큰 사람인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였거나 자기가 이룬 가정의 평판이 망가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서이거나, 아니면 둘 다일 것 같았다. 나는 이 부분에서 이디스는 스토너를 단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디스는 그 누구와도 사랑하는 관계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인 것 같았다. 정말 불쌍한 관계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이디스와 무관하게 스토너는 현명했던 캐서린 덕분으로 불륜 관계를 정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 폭삭 늙어버린다. 


이 책은 한 평범한 남자가 소리 없이 내리는 눈처럼 붕괴되어 가루가 되는 과정을 천천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 과정 중에서도 그 남자는 나름대로의 소신으로 최선을 다했다.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면서도 성실했고 그 안에서 기쁨도 발견하고 누렸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사건들로 인해 그는 무너져갔다. 어찌 보면 스토너라는 인물에게 뭐라고 한 마디를 해 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독자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답답한 반응으로 일관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가 운명을 거스를 수 있었을까? 저항해서 다른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을까? 


나는 스토너가 지혜로웠다고 믿게 된다. 아내 이디스라는 사람에게 과연 어떤 식으로 대할 수 있었단 말인가? 화를 내며 언쟁을 높였다면 과연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을까? 아닐 것이다. 문제는 더 커지기만 했을 것이다. 이는 로맥스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런 점에서 이디스와 로맥스로부터 나는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소통의 단절 내지는 불가능성. 이디스와 로맥스는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채 섬이 되어 살아가는 부류였다. 타자와의 소통에 불능한 사람으로 성장한 사람이었다. 이디스의 경우는 부모님의 부로, 로맥스의 경우는 자기가 이룬 명예와 권력으로 자기만의 견고한 세계를 철옹성처럼 수호하며 철저하게 방어적으로 (결국 타자에게는 공격적이고 폭력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이었다. 이에 반하여 스토너와 캐서린은 비록 불륜이라는 바람직하지 않은 관계 속에서 만남을 가졌지만,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가장 인간다운 인간, 사람다운 사람으로 그려지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이런 부류는 언제나 세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저자는 넌지시 일깨워주는 것 같다. 이 작품을 읽으며 어떤 불편함이 느껴지고 모순된 현실과 바라야 할 이상 사이의 괴리를 느끼며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야말로 우리네 삶을 그대로 그려낸 한 편의 예술 작품이라 생각한다. 소설만이 할 수 있는 것, 문학의 힘은 이렇게 쓰는 것이다. 


#RHK

#김영웅의책과일상 


* 스토너 초독 감상문: https://rtmodel.tistory.com/812

* 스토너 재독 감상문: https://rtmodel.tistory.com/2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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