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와 함께 춤을 - 시기, 질투, 분노는 어떻게 삶의 거름이 되는가
크리스타 K. 토마슨 지음, 한재호 옮김 / 흐름출판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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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brace: 내면의 야생을 사랑하기


크리스타 K. 토마슨 저, '악마와 함께 춤을'을 읽고


분노, 시기, 질투, 앙심, 경멸. 듣기만 해도 몸서리치는 사람도 있을 테다. 흔히 우리가 부정적인 혹은 나쁜 감정이라고 하는, 그래서 없애야만 하고, 없앨 수 없으면 피해야 하고, 피할 수 없으면 인내심을 발휘하여 적절히(?) 억눌러야 한다고 느끼는 것들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감정들이 정말 나쁜 것일까? 정말 우리와 우리 삶을 위협하거나 파괴하는 것일까? 혹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책은 그 누명을 벗기고 본래의 의미를 회복시키며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삶, 균형 잡힌 삶, 깊고 풍성한 삶을 위해 이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건강한 정원에는 지렁이가 산다. 지렁이는 비 온 다음날 눈에 잘 띄며, 작은 뱀을 떠올리게 할 만큼 길고 미끌거리는 징그러운 생물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있다. 그러나 지렁이는 흙 속의 유기물을 먹고 배출하는 과정에서 토양을 비옥하게 하며 질감도 좋게 만든다. 지렁이가 배설한 흙을 분변토라고 하는데, 이 분변토는 인류가 얻을 수 있는 가장 깨끗하고 안전한 비료라고 여겨진다. 생태계 최하위에 놓인 지렁이가 최고 포식자인 인간의 눈에 하찮게 보일진 모르겠지만, 지렁이는 묵묵히 땅을 일구며 지구의 토양을 풍성히 해준 동물이다. 그러므로 지렁이가 많이 사는 땅은 오염되지 않은 건강한 땅이며, 지렁이는 지구 생태계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생명체인 것이다.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는 주범이자 현재진행형인 여섯 번째 대멸종을 주도하고 있는 유일한 존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한다면, 적어도 우리 인간은 지렁이를 홀대해선 안 된다. 고마워해야 한다. 


철학과 고전학을 전공한 교수인 저자는 나쁜 감정을 정원의 지렁이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원은 인간과 인간의 삶을 의미한다. 건강한 인간과 건강한 삶은 건강한 정원이며, 건강한 정원은 지렁이 덕을 톡톡히 본 것이므로, 지렁이인 나쁜 감정은 건강한 인간과 건강한 삶에 필수라는 것이다. 저자는 부정적인 감정과 정면으로 마주하려면 너그러운 솔직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감정을 짓밟거나 부풀리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정원의 지렁이를 제거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 지렁이가 계속 머물며 정원을 더 풍요롭게 해 주길 원하는 마음을 갖길 바라면서 말이다. 


상식처럼 널리 알려진 관념에 정면으로 대응하며 조곤조곤 할 말을 다 하는 이 책이 독자의 이목을 끌고 강한 설득력까지 갖는 이유는 저자의 전공인 철학과 고전학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 지혜의 열매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나쁜 감정을 대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우리 대부분을 향해 객관적이고 공정한 분석을 가한다. 저자에 따르면 사람 중엔 두 가지의 부류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감정을 통제하려는 사람들(감정 통제형 성인)이고, 다른 하나는 감정을 길들이려는 사람들(감정 수양형 성인)이다. 이 두 부류를 감정 성인이라고 부르는데, 저자는 조지 오웰이 그랬던 것처럼 성인의 삶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웰은 좋은 인간이 되는 게 성인이 되는 것보다 낫다고 했고, 성인의 삶에는 결함이 있으며, 성인이 되려면 평범한 인간의 삶에 관심을 끊거나 대폭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즉 감정 성인이 되려고 애쓰는 건 인간성을 덜어 내려는 행위인 것이다. 


저자는 감정 통제형 성인을 지향한 인물로 스토아 학파와 간디를 꼽는다. 감정 통제형 성인에게 감정은 비합리적이다. 그들에게 감정, 특히 부정적인 감정은 착시 현상이나 잘못된 믿음과 같다. 그들에 따르면 우리가 그런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삶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잘못됐기 대문이다. 이런 잘못을 바로잡으면 감정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고 본다. 간디에게 부정적인 감정은 망상과 같았다. 그러므로 이들은 우리 주변의 살아 숨 쉬는 인간 세계에 대한 집착을 줄이는 편이 낫다고 말한다. 인간계에 덜 신경을 써야 부정적인 감정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에 반해 감정 수양형 성인은 감정 통제형 성인보다는 감정을 덜 의심하는데, 이 성인들이 보기에 나쁜 감정은 뿌리 뽑거나 억누를 것이 아니라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수양하거나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들은 감정이 우리를 무너뜨리는 비이성적인 힘이라는 사고를 거부한다. 그들은 적절히 개입하면 감정을 개선할 수 있다고 본다. 잘 단련만 하면 감정을 없애지 않으면서 주체성을 빼앗기지 않고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 중 대표적으로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고 저자는 지적하면서 의문을 제시한다. 과연 감정을 길들일 수 있을까,라고. 그리고 설령 길들일 수 있다고 해도 꼭 그래야만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도 덧붙인다.  


이성으로 감정을 길들일 수 있는가? 느껴야 한다고 결정한 어떤 특정한 감정만을 우리가 느낄 수 있는가? 감정은 이성을 거치지 않은 채 곧바로 우리를 장악하는 힘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원하지 않는 다른 감정이 우리를 삼킬 때도 많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가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 감정이 잘못될 수도 있지 않은가? 여러 가지 질문이 떠오르는 부분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감정이 우리의 말을 듣도록 훈련시키기보다는 우리가 감정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나쁜 감정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그 이유는 그것은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감정은 마음의 벽장에서 치워야 할 잡동사니가 아니라고. 지렁이가 정원의 일부인 것처럼 감정은 내 삶의 일부라고. 지렁이다움을 모두 벗어던져야만 녀석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건 지렁이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그러면서 당당하게 제안한다. 나쁜 감정을 느낄 때마다 그냥 내버려 두고 느끼라고. 그러면 된다고. 


다음으로 저자는 악마를 위한 공간을 만들라는 자극적인 표현을 사용하며 나쁜 감정도 자신의 삶에 대한 애착의 일부인 동시에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애착의 일부라고 말한다. 나쁜 감정이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는 걸 방해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소중히 여겨서 나쁜 감정을 느끼는 것이라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자아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내놓는다. 자아를 사랑한다는 건 항상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그런 존재를 사랑하는 법을 알긴 어려우므로 우리가 직면한 진정한 도전은 그런 존재를 솔직하게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변명하지도 옹호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저자는 몽테뉴와 니체를 들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몽테뉴 작품의 큰 주제 중 하나는 인간 본성의 불완전함이라고 한다. 니체 역시 우리 영혼이 심각하게 병든 원인을 성자라고 하는데, 이 성자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경멸하고 거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사랑과 수용으로 포용해야 하는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감정은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또한 우리가 해롭고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는 나쁜 감정이 우리에게 말 걸어오는 것이 싫기 때문이며, 우리가 감정 때문에 나쁜 짓을 하는 이유는 자신이 나쁜 감정을 느끼도록 내버려 두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쁜 감정 자체가 악한 게 아니라 그 감정을 탓하며 나쁜 짓을 하기로 판단하고 행한 생각과 의지가 악하다는 말이다.


2부에서 저자는 분노, 시기와 질투, 앙심과 쌤통, 경멸 같은 나쁜 감정들을 구체적으로 파고들어 하나씩 기존의 관념들을 반박해 나간다. 먼저 분노를 언급하는데 내가 가장 공감하면서 읽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저자에 따르면 분노를 해결하는 방법은 내 분노를 교정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다.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된 데 누군가의 책임이 있다고 가정하지 말고, 그저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를 스스로 솔직히 살펴야 된다고 한다. 또한 분노는 종류를 갖지 않는다. 단지 분노와 그 분노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표는 올바른 종류의 분노만 느끼려고 노력하는 것이어선 안 된다. 대신 모든 분노를 솔직하게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오로지 정의로운 분노만 느끼려고 하면 지저분하고 복잡한 인간적인 부분이 줄어든다. 


아래 발췌한 부분에서 나는 최근 우리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몇몇 개인을 떠올렸다. 


| 자신을 성찰하며 수반되는 고통과 수고를 회피하기 위해 자신을 기만할 권리는 없다. 우리는 판타지 세계를 구축해서 나쁜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권리가 없으며,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 그 판타지 세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요구할 수도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이 분노로 괴물을 만들어 내는 방식이다. 우리는 실패, 방황 또는 외로움을 맞닥뜨리기보다는 차라리 적을 만들기를 원한다. 적이 있으면 자기 의심으로부터 숨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자신이 분노하는 이유를 생각하고 그것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대신, 분노를 성급하게 정당화하고 악당을 탓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이런 모습들이 반지성적인 행태의 이면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 책은 분노 외에 시기와 질투, 앙심과 쌤통, 경멸을 파헤치며 저자의 예리한 통찰을 다루다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다다른다. "지렁이를 사랑하라." 이 문장의 방점은 '사랑하라'이다. 단순히 용납하는 차원을 넘어 적극적으로 사랑하라는 말이다. 니체의 '아모르 파티' 역시 네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뜻에 그치지 않고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같은 논리다. 우리 인간을 이루는 당당한 구성 요소인 나쁜 감정을 우린 제거하려 하지도 말고 피하지도 무시하지도 말고 사랑해야 한다. 이 감정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내면에 가지고 있는 요소이며, 이것들은 우리를 더욱 인간답게 만들어준다. 그러므로 저자는 우리가 감정 성인이 되려는 열망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추구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반쪽짜리 인간을 온전한 인간으로 여기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저자는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사실 우리가 나쁜 감정을 나쁘다고 여기는 이유는 나쁜 감정이 의미하지 않는 뭔가를 의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예컨대 앙심이나 질투를 느끼는 건 내가 악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부정적인 감정이 문제를 일으키는 이유는 그 감정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나쁜 감정은 다루기 어려울 순 있어도 괴물이 아니라고, 그저 야생적인 것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어쩌면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삶의 의미가 부분적일지라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나쁜 감정들을 악마화시켜왔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가지고 있고 누구나 이성의 힘과 상관없이 느끼는 것이지만 그것들을 어떻게든 처리해야만 바르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감정이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는 영역에서 발생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나쁜 감정들이 우리 삶을 파괴하는 게 아니라 그 감정들과 연관되어 작동하는 우리의 이성과 신념과 잘못된 판단과 행동이 우리 삶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된다. 생각의 전환이다. 덕분에 조금 더 객관적으로 인간과 인간의 삶을 바라보게 된다. 악마화시켰던 대상을 제거하니 보다 내밀한 내 모습을 직시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소망한다. 이런 감정들을 느끼는 내 모습도 넉넉히 끌어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내면의 야생을 사랑할 수 있기를. 그래서 나뿐 아니라 타자를 더욱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되기를.


#흐름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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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결혼, 어때? - 두 사람이 만들어 가는 사랑과 연합의 여정
전신근.제행신 지음 / 죠이북스(죠이선교회)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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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하나님이 흔적이 드러나는 삶


전신근, 제행신 공저, '이런 결혼, 어때?'를 읽고


기다리던 택배 상자를 뜯자마자 책이 아닌 책과 함께 동봉된 저자의 손편지에 손이 먼저 갔다. 정성이 느껴졌다. 아무리 작더라도 작가의 진심은 독자에게 적지 않은 감동을 주는 법이다. 얼마 만에 받아보는 손편지인가 하며 나는 가능한 천천히 읽었고, 아쉬워서 또 한 번 읽었다. 이 편지를 쓰기 위해 저자가 독자 한 분 한 분을 마음속에 떠올리며 보냈을 시간들이 그려졌다. 감사가 일었다. 갓 출간된 이 책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2023년 10월 초 상봉몰에서 저자를 딱 한 번 뵌 적이 있다. 내 세 번째 저서 출간 기념으로 열린 조촐한 북토크에 일부러 발걸음을 해주신 날이었다. 남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내어 주는 행위를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나는 그저 감사한 마음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은혜받은 자라는 자각을 하게 된다. 예기치 못한 구원의 빛 한 줄기가 어느새 어두운 관성에 젖어버린 나의 일상 속으로 침투하는 순간이다. 나는 이런 순간들을 사랑한다. 누군가의 은혜는 누군가를 살리는 것이다. 수혜자는 섬김으로 나아가야 하리라.


2021년에 출간된 제행신 작가의 첫 저서 '지하실에서 온 편지'를 이미 읽었던 터라 나는 저자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그 안을 수놓은 기적 같은 사건들, 기구한 사연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책을 읽고 저자와 저자 가족의 삶을 '하나님의 흔적이 드러나는 삶'이라고 쓰기도 했다.


'지하실에서 온 편지'는 에세이집으로써 목포에 위치한 오래된 집 지하실에서 길어 올린 웅숭깊은 내면의 고백과 신앙, 사유와 경험들이 제행신 작가 개인의 목소리로 진하게 담긴 책이다. 반면, '이런 결혼, 어때?'는 부제 '두 사람이 만들어 가는 사랑과 연합의 여정'에서 짐작할 수 있듯, 남편 전신근 목사의 목소리도 함께 실려 있다. 이 책이 전신근, 제행신 공저인 이유다. 물론 제행신 작가의 목소리가 더 크고 또렷이 울려 퍼지긴 하지만. 


그리스도인 부부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의 주를 이룬다. 부부 공저라는 사실이 장점으로 부각되는 지점이다. 부부란 일방이 아닌 쌍방이고, 수직적이 아닌 수평적이며, 서로를 바라보는 것보다는 같은 곳을 바라보며 서로 섬기는, 둘이지만 한 몸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지하실에서 온 편지'에서 아내의 목소리를 통해 소개된 남편 전신근의 직접적인 목소리는 자칫 편향될 수도 있는 부부 이야기에 객관성을 부여하며 중심을 잡아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책을 읽는 내내 부부가 한 목소리로 내는 화음을 듣는 기분이었고, 책 속에 소개되는 그리스도인 부부 생활에 대한 여러 팁들에 더욱 신뢰가 갔다.


한 부부의 이야기 정도로 축소시킬 수도 있겠지만, 진정성 있는 글은 독자의 어딘가에 파고들어 똬리를 틀기 마련이다. 나는 저자 부부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부부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끄러웠다. 우리 부부도 결혼 20주년이 지나고 있건만 여전히 티격태격 말다툼이 끊이지 않고 서로를 상처 주는 일을 어리석게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 녀석에게도 우리의 못난 모습들이 말 못 할 상처를 주었을 거라 생각하면 나는 깊은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낀다. 이 책의 3부 '부부가 겪는 감정의 파노라마'를 읽으며 내 마음이 무겁고도 혼란스러웠던 이유다. 


다행히 4부 '지금도 사랑하며 배우는 중입니다'를 읽으며 위로를 받았다. 사랑과 배움, 이 두 단어는 언제나 희망을 선사한다. 못난 내가 과거의 모습을 솔직히 인정하고 회개하며 성숙한 사랑으로 화답할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몇 주 전부터 홀로 미국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아내가 떠올랐다. 사랑하고, 고맙고, 미안하다. 그리고 다시 같이 살게 되면, 책에서 언급된 대로 '괜찮다'는 말을 더 많이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위로가 되고 안심이 되는 사람이고 싶다. 괜찮은 남편이고 싶다. 


이 책의 뒷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책 속의 책'은 저자 가족이 겪은 어마어마한 모험들을 소개한다. 사실 내가 가장 몰입해서 읽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제행신 작가의 목소리로 상세하게 들려지는 열 가지 모험 이야기는 내가 간략하게 알고 있던 저자 가족의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여러 공간과 시간을 거치며 파노라마처럼 하나의 거대한 서사로 통합되는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이번에도 동일했다. 저자 가족의 인생은 실로 하나님의 흔적이 드러나는 삶이었다. 책을 덮고 잠시 기도했다. 앞으로도 더욱 그 흔적을, 향기를, 그림자를 드러내는 저자와 저자 가족이 되기를. 나도, 우리 부부도, 나아가 모든 그리스도인 부부도 그렇게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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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 수록,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지 에크리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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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와 작품을 듣다


한강 저, ‘빛과 실’을 읽고


손바닥 만한 크기에 백육십 페이지 남짓 되는, 여백도 많아 왠지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읽으며 그 공간을 채워 넣어야 할 것 같은 이 책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과 소감, 미발표된 여러 편의 시, 산문, 일기들을 담고 있다. 한강 작가의 주요 작품만 읽어본 독자로서 함부로 일반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한강 작가의 글을 읽을 때마다 느껴지는 진지한 적적함과 읊조리는 듯한 농밀한 텍스트들은 소설이 아닌 산문에서도 여전했다. 


한강 작가 특유의 문체를 맛보는 것만 해도 즐거운 독서였다. 그러나 내가 주의 깊게 읽었던 부분은 수상 강연문이었다. 작가가 직접 말해주는 여러 작품들 (‘채식주의자’부터 ‘작별하지 않는다’까지)의 해제랄까, 탄생 배경이랄까, 작품 이면에 깃든 질문들이랄까 하는 내밀한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장편소설이었던 ‘채식주의자‘부터 그녀는 몇 개의 고통스러운 질문들 안에서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 한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가? 그걸 위해 더 이상 인간이라는 종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여전히 이 소설은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질문의 상태에 놓여 있다. 


네 번째 장편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는 이 질문들에서 더 나아갔다고 한다. 죽음과 폭력으로부터 온 힘을 다해 기어 나오는 주인공의 모습을 쓰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고 한다. 마침내 우리는 살아남아야 하지 않는가? 생명으로 진실을 증거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다섯 번째 장편소설 ‘희랍어 시간’은 그 질문에서 다시 더 나아간다. 우리가 정말로 이 세계에서 살아나가야 한다면, 어떤 지점에서 그것이 가능한가? 한강 작가는 이 소설을 쓰며 다음과 같이 묻고 싶었다고 한다. 인간의 가장 연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우리는 마침내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덧없고 폭력적인 세계 가운데에서? 


여섯 번째 장편소설은 알다시피 ‘소년이 온다’였다. 한강 작가는 ‘희랍어 시간’을 출간한 직후까지 광주에 대해 쓰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고 한다. 광주 학살을 시작으로 여러 학살들에 대한 책들을 읽으며 그녀는 이십 대 중반에 일기장을 바꿀 때마다 맨 앞 페이지에 적었던 문장들을 떠올렸다고 한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학살에 관한 자료들을 읽을수록 그녀는 이 질문들에 답하는 게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했는데 그건 그녀가 인간성의 가장 어두운 부분들을 지속적으로 접하며,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상실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랬다. 그러던 어느 날, 1980년 광주에서 도청 옆 YWCA에 남아 있다 살해되었던 한 젊은 야학 교사의 일기를 읽고 위에 적은 두 개의 질문을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소설의 방향도 벼락처럼 알게 되었다고 한다. 노벨문학상 수상 덕분에 회자되었던 유명한 질문이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후 한강 작가는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음을,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음을 느끼는 순간들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리고 짙은 어두움 가운데에만 있던 그녀는 생명의 빛을 보기 시작한다. 인간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게 폭력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도 있는 존엄한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동호는 그러므로 소설의 제목 ‘소년이 온다’에서처럼 과거에 죽은 혼으로 현재를 향해 걸어와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게 걸어와 과거가 현재가 되고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리는 일은 시공을 초월하여 계속해서 현재진행형일 수 있는 것이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실제로 한강 작가가 꾼 꿈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라고 한다. 7년에 걸쳐 쓰인 이 작품 속 진짜 주인공은 인선의 어머니 정심이다. 한강 작가가 묘사한 정심에 대한 문장들에 나는 줄을 그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뒤, 사랑하는 사람의 뼈 한 조각이라도 찾아내 장례를 치르고자 싸워온 사람. 애도를 종결하지 않은 사람. 고통을 품고 망각에 맞서는 사람. 작별하지 않는 사람. 평생에 걸쳐 고통과 사랑이 같은 밀도와 온도로 끓고 있던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며 나는 묻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가 우리의 한계인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는 끝내 인간으로 남는 것인가? (25페이지에서 발췌)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2021년 가을까지 한강 작가는 다음의 두 질문이 자신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왔다고 한다. 두 질문 사이의 긴장과 내적 투쟁이 그녀의 글쓰기를 밀고 온 동력이었다고 오랫동안 믿어왔다고 한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그러다가 최근에 그 생각을 의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던 것이다. 나는 ‘작별하지 않는다’ 중 ‘작가의 말’ 속에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라는 문장을 기억한다. 나 역시 정심의 삶을 사랑으로 읽어야 한다고 쓴 적이 있다. 수십 년간 그녀가 칠순이 넘어 치매에 걸리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작별하지 않고 고군분투했던 삶을 사랑으로 읽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강 작가의 짧은 해제를 읽고 마음이 묵직하면서도 감동이 되었다. 그 감동은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증폭되었다. 


‘끝끝내 우리를 연결하는 언어를 다루는 문학에는 필연적으로 체온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필연적으로, 문학을 읽고 쓰는 일은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들의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폭력의 반대편인 이 자리에 함께 서 있는 여러분과 함께, 문학을 위한 이 상의 의미를 나누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34-35페이지에서 발췌)


고통과 사랑, 이 두 단어가 남는다. 인간은 인간스러울 수도 있지만 인간다울 수도 있다. 나는 고통스러운 세계가 가진 아름다운 면을 놓지 않고 싶다. 포기하고 않고 작별하지 않고 싶다. 희망을 버리지 않고 싶다. 이것은 한강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자 한강을 읽은 자의 마음가짐일 것이다. 


#에크리

#김영웅의책과일상   


* 한강 읽기

1. 채식주의자: https://rtmodel.tistory.com/362

2. 소년이 온다: https://rtmodel.tistory.com/791

3. 작별하지 않는다: https://rtmodel.tistory.com/1360

4. 희랍어 시간: https://rtmodel.tistory.com/1409

5. 흰: https://rtmodel.tistory.com/1886

6. 빛과 : https://rtmodel.tistory.com/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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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가 필요한 시간 - 진리, 과학, 신앙, 그리고 신뢰에 관하여
프랜시스 S. 콜린스 지음, 이은진 옮김 / 포이에마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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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에 이르는 길에 대한 평신도 과학자의 통찰


프랜시스 콜린스 저, '지혜가 필요한 시간'을 읽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던 창조과학은 생물학자이자 그리스도인인 내게도 뱀처럼 다가와 그 매력을 발산했다. 나는 잠시 그 매력에 심취했고,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성경지식과 그 당시 아직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던 과학지식 사이에 생겼던 모호한 괴리로부터 해방받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정직하게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조금만 더 과학지식을 객관적으로 습득하자 창조과학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창조과학은 과학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을 뿐 결코 과학이 아니었다. 고급스러운 표현을 사용하자면 유사과학일 뿐이었다. 어떤 신념 혹은 신앙에 경도되지 않고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과학자가 가질 수 있는 창조과학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입장은 그것을 거짓으로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창조과학은 누구라도 검증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았다. 다만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마치 그것을 과학적으로도 증명할 수 있는 것처럼 시늉하는, 철저히 비과학적인 사이비 종교 같은 것이었다. 합리적인 척하나 비합리적이었고, 지성적인 척하나 철저히 반지성적이었으며, 과학과 신앙을 조화시키는 척하나 그 어느 신념이나 종교보다 둘 사이를 갈라놓는 뱀 같은 존재가 내겐 바로 창조과학이었다. 창조과학의 정체를 알고 난 지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지금도 지구 6천년설을 주장하고, 마치 진화가 창조의 반대 개념인 것처럼 호도하며, 성경을 수호하는 역할을 자처하나 오히려 성경의 신뢰도를 격하시키고 있는 주범이 창조과학인 것이다. 


짧은 기간 동안 답이라 여기기도 했던 창조과학은 내겐 깊은 늪이었다. 다행히 나는 한국 과신대와 미국의 바이오로고스 덕택으로 별 어려움 없이 그 늪으로부터 과거의 신앙과 가치체계를 온전하게 유지하며 안전하고 건강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랬던 내가, 생물학자이자 그리스도인인 내가, 7년 전 프랜시스 콜린스의 '신의 언어'를 읽고 느꼈던 감동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 국립보건원 원장으로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프랜시스 콜린스가 다시 책을 냈다. '신의 언어'에서 충분히 과학과 신앙에 대한 명료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 것 같은데, 과연 그는 또 무슨 할 말이 있었을까? 프랜시스 콜린스는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를 총괄지휘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 책은 바로 그 경험이 발화점이 되어 쓰인 책이다. 그는 우리 인간이 너무 많은 부분에서 지혜의 근원을 잊어버리고 있진 않은지 두렵다고 고백한다. 오랜 시간 공적인 자리에서 활동하며 정치를 비롯한 여러 분열이 우리의 사고방식을 얼마나 심각하게 왜곡시키는지 직접 목격했다고 실토한다. 정치와 여러 분열은 진리를 분별하는 능력, 과학에 대한 이해, 교회가 드러내는 신앙의 근본에 대한 기반까지 흔들어놓았다고 진찰한다. 그러한 왜곡으로부터 벗어나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들을 되찾기 위해 하나의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유례없던 코로나19 팬데믹을 총괄지휘하며 그가 보고 듣고 경험한 수많은 것들이 그를 통과하며 맺은 결실이 바로 이 책인 것이다. 


한국어 제목보단 원제가 이 책의 정체성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어 제목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 즉 지금 혹은 오늘이 바로 지혜가 필요한 시간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 듯하다. 그것 역시 중요한 메시지이지만 이 책을 깔끔하게 요약하는 건 아무래도 원제인 것 같다. The Road to Wisdom on Truth, Science, Faith, and Trust. 이 책은 지혜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는 안내서이며, 저자는 그 지혜의 원천이 진리, 과학, 신앙, 신뢰라고 말한다. 과연 무슨 말일까?


막중한 책임을 어깨에 짊어졌던 공직자 프랜시스 콜린스는 진실과 거짓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한다. 거짓은 무지, 잘못된 정보, 허위 정보, 망상, 허튼 말들 (개소리), 선전을 통해 나타나므로 지혜를 찾는 과정은 거짓에 빠지지 않는 길 위에 있다고 말한다. 반지성적인 왜곡과 편향된 주장들, 의심을 훌쩍 넘어선 음모론 같은 것들로부터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의사이자 과학자인 프랜시스 콜린스는 지혜를 찾는 과정에서 과학이 자연의 진리를 밝혀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과학이 항상 옳은 결론에 도달하진 않지만, 스스로 교정하는 특성을 통해 객관적 진리에 이르게 하며, 이는 인간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토대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과학만능주의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리스도인이기도 한 프랜시스 콜린스는 신앙 역시 지혜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신앙은 진리, 과학, 신뢰와 손잡고 함께 작동해야 한다면서 말이다. 그는 기독교의 현재 위치에 대해서도 부인하지 않는다.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잃어버린 기독교가 지금과 같은 대접을 받게 된 이유는 첫째, 위선, 둘째, 과학에 대한 적대적인 입장이라는 통계자료를 언급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본인이 진화적 창조론을 받아들인다고 말하고, 신앙과 과학 사이의 괴리가 생각만큼 크지 않다는 에클런드의 연구를 언급하는 등 기독교가 회복될 가능성에 희망을 건다. 미국 복음주의자 중 하나인 그의 입장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아 나는 이 부분을 읽을 때 공감이 많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신뢰를 이야기한다. 진리, 과학, 신앙, 이 세 가지 요소를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고 행동에 반영한다고 해도 지금처럼 혼란스럽고 분열된 사회를 곧바로 치유할 수 없는 이유를 신뢰의 부재에서 찾는다. 어떤 메시지가 과연 신뢰할 만한 것인지 분별해 내는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겪은 신뢰의 경험과 불신의 경험을 공유하며 우리 사회에서 현재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고 강화하는 게 모두가 함께 할 때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는다. 물론 신뢰에 이르는 뾰족한 정답이 존재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프랜시스 콜린스의 영적인 지도자였던, 지금은 하나님의 품에 안긴 팀 켈러 목사님이 이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되기까지 가장 많은 기여를 하셨다고 한다. 세상적으로도 성공한 의사이자 과학자이자 공직자였던 프랜시스 콜린스가 말하는 지혜로 가는 길에 대한 통찰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도 보이지만 나는 뻔하고 진부한 것들 가운데 진리가 거한다는 사실을 믿는다. 목회자나 신학자가 아닌 전문직 평신도가 말하는 신앙과 과학, 진리와 신뢰를 통해 지혜에 이르는 길은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포이에마

#김영웅의책과일상 


*프랜시스 콜린스 읽기

1. 신의 언어: https://rtmodel.tistory.com/662

2. 지혜가 필요한 시간: https://rtmodel.tistory.com/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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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읽기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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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읽기는 곧 작가의 삶


이승우 저, ‘고요한 읽기’를 읽고


‘생의 이면‘으로 처음 만난 이승우는 내게 이질감을 안겨주었던 작가다. 그의 낯선 문체, 이를테면 번복되고 되뇌고 산만하기도 하고 단정치 않고 늘어지는 느낌을 주는 그의 글쓰기가 거슬렸다. 안정효와 신형철이 말하는, 동시에 나도 지향하는, ‘정확한 글쓰기’와 대조되어 내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고요한 읽기’는 산문집이다. 소설에서 이질감을 주었던 이승우의 문체가 산문에선 의외의 매력을 띄고 내 앞에 나타났다. 잘 잡히지 않던 문장들이 그의 문체 덕에 더 잘 이해가 되었고, 단문들의 반복은 강화와 심화 효과뿐만 아니라 친절함과 다채로움까지 리드미컬하게 자아냈다. 이승우의 진면목을 나는 이제야 보게 된 것인가. 


이 책은 읽기가 읽기와 쓰기를 낳고, 그 읽기와 쓰기는 다시 읽기와 쓰기를 낳게 되는 필연적인 연쇄가 무한히 반복되는 여정을 성실히 먼저 걸어간 작가 이승우의 주옥같은 생각들과 말들을 담고 있다. 그의 치열한 읽기, 루틴이 된 삶으로써의 성실한 읽기, 그리고 그의 치열한 쓰기, 루틴이 된 삶으로써의 성실한 쓰기에서 길어낸 웅숭깊은 통찰을 오롯이 맛볼 수 있어서 나는 이 책을 엘에이에서 한국 가는 열세 시간의 비행 중 한 문장 한 문장 가능한 천천히 씹으면서 읽었다. 그의 번복되는 듯한 고유의 문체는 같은 문장 혹은 단어도 더욱 다채롭고 풍성하게 드러내어 혹시라도 있을 법한 오독을 미연에 방지하는 효과를 내기에 충분했고, 그래서 저자의 의도를 오해 없이 파악할 수 있었다. 나로선 지경이 확장되는 독특한 경험이었다. 


그렇다면 ‘고요한 읽기‘란 무엇일까? 강윤정 편집자가 선물한 이 낯설고도 정확한 제목 속의 ’고요‘는 단순한 적막 혹은 침묵이 아니다. 조용한 곳에서 독서하는 것이 고요한 읽기를 뜻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고요’는 집중 혹은 몰두를 뜻한다. 그러므로 ‘고요한 읽기‘는 ‘집중하는 혹은 몰두하는 읽기’이다. 집중하고 몰두하여 내면 깊숙한 곳에 파편처럼 흩어져있던 생각들을 한데 모아 정리하여 쓰기와 또 다른 읽기로 나아가는 출발점이자 도착점인 것이다. 여기에 나는 작가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행위라는 점에서 ’도상’이라는 단어를 덧붙이고 싶다. 그러면 ’고요한 읽기‘는 독서라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쓰기는 물론 읽기와 쓰기 사이에 난 미세한 모든 시간과 공간까지도 침투하여 장악하게 된다. ‘고요한 읽기’가 마침내 작가의 삶으로 치환되는 것이다.


한 꼭지만 읽어도 이승우 작가의 내공이랄까 하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는데, 이 한 권의 책은 그가 오랫동안 길어 올린 깊은 우물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까지 들어 나는 경외감을 느꼈다. 그가 본문으로 가지고 오는 여러 책들의 낯선 문장들이 그의 독특한 문체와 어우러져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되었고,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어떤 부분은 서평으로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떤 부분은 문학에세이로 보이기도 하며, 또 다른 부분은 쉽게 잘 다듬어진 설교 혹은 철학/인문학 강의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책은 그야말로 다채로운 읽기와 쓰기에 관한 찐 에세이인 것이다. 진지한 독자라면, 혹은 작가라면 이 책을 꼭 한 번 손에 들고 읽길 추천한다. 


고요한 읽기는 읽기와 쓰기라는 연쇄의 무한반복을 불러오지만 궁극적으로 읽어내는 대상은 ‘나’라고 이승우는 쓴다. 가장 먼 존재자가 내 뒤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허를 찌르는 논리로 책을 읽는다는 건 곧 나를 읽는 거라고 말한다. 나는 이것을 나를 읽어내지 못하면 제대로 읽기라는 행위를, 다시 말해 고요한 읽기를 수행하지 못한 거라고 읽었다. 여기서 이승우는 덧붙인다. 나만 읽어서는 나를 제대로 읽을 수 없으며, 타자와 세상을 읽은 후에야 나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다고. 전적으로 동의했다. 책을 읽는 이유, 읽어야만 하는 이유를 상기할 수 있었고, 나를 초월하기 위해 나를 알아야 하고, 나를 알기 위해 타자와 세상을 알아야 한다는 논리에 전적으로 수긍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책을 읽고 나를 읽어냈던가?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다. 다행히도 그랬던 것 같다. 나 역시 읽기와 쓰기를 일상으로 여기는 사람 중 하나로서 독자이자 작가인 나의 위상을 성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나의 일상에 ‘고요한 읽기’라는 별명을 붙일 수 있게 되어 감사한 마음이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 이승우 읽기

1. 생의 이면: https://rtmodel.tistory.com/1588

2. 사랑이 한 일: https://rtmodel.tistory.com/1628

3. 고요한 읽기: https://rtmodel.tistory.com/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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