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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에 대하여 - 용서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강남순 지음 / 동녘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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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 저, “용서에 대하여”를 읽고.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존 바턴의 “온 세상을 위한 구약 윤리” 다음으로 읽어서 그런지 존 바턴이 강조했던 '자연법’이라는 개념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개념이 이 책 “용서에 대하여”에서도 나에겐 읽혀졌다.

진정한 용서는 단지 신의 명령에 순종함도 아니고 조건적이지도 않다. 책 전체에 흐르는 자크 데리다의 용서에 대한 사유가 말해주듯, “진정으로 가능한 용서는 불가능한 용서”라는 말이 내겐 첨엔 아이러니하게만 들렸지만 책을 읽어내려가며 내 가슴에 깊이 박혔다.여러가지 상황과 조건을 고려하여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행하는 사랑의 행위 정도로 난 용서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여기엔 나도 인지하지 못했던 위계질서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 당한 그 특정한 사건을 통하여 갑자기 위상이 뒤바뀌어 (심지어 난 그것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마치 판사가 재판 결과를 선언하듯, 마치 갑자기 가해자보다 우위에 서서 가해자를 판단하고 가해자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 것처럼 이해하고 있었던 나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무조건적인 용서와 조건적인 용서, 즉 용서의 윤리와 용서의 정치 사이의 긴장을 늦추지 않고 지속하여 이상적이고 불가능해 보이는 무조건적 용서를 추구하는 것. 이것은 인간의 존재에 대한 성찰이 없인 불가능하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불완전한 피조물인 인간. 그래서 실수를 할 수 밖에 없고 그 결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용서와 마주할 수 밖에 없는 프레임 속에 갇힌, 그렇다, 우리는 인간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피해자와 가해자의 신분을 왔다갔다하며 얽히고 섥혀서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도 지녔다.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 즉 존 바턴이 얘기한 인간의 존엄성이 용서를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준다는 점을 난 이 책을 통해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용서는 앞서 얘기했듯이 누군가의 명령이나 해야만 하는 의무라고만 해석해서도 안된다. 그건 인간이라는 존재와 그 공동체들 사이에 무언으로 존재하며 동시에 모두가 선행 학습 없이 인지하고 있는, 마치 C.S. 루이스가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절대선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이나 ‘도덕률’과도 같은, 또 마치 존 바턴이 강조했던 ‘자연법’과도 같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감대가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비단 용서라는 개념은 기독교와 같은 종교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며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개념이라고 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진정한 용서는 진정한 선물과도 같은 것”이라는 본문 속의 문장도 맘에 와닿았다. 이어서 “값싼 용서”라는 가슴 아픈 용서에 대한 오용에 대해서도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내겐 한편으론 기독교인으로서 내가 받은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점을 상기할 때, 그리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아무렇게다 살아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소위 칭의와 성화의 개념을 따로 떼어놓는 식의 믿음과 구원에 대한 오용에서 등장한 개념이자 디트리히 본회퍼가 사용한 “값싼 은혜”라는 개념과 함께 “값싼 용서”를 사유할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은혜라는 것이 수혜자의 공로가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할 때, 진정한 은혜는 진정한 선물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진정한 용서는 진정한 은혜”라는 말도 가능하지 않을까.

복음의 핵심은 용서에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내가 받은 구원이 하나님의 진정한 선물이자 진정한 은혜라는 사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진정한 용서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깊이 묵상할 수 있어서 아주 나에겐 유익한 책이었다. 좋은 책을 써주신 강남순 교수님께 감사를 뒤늦게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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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 연대기 - Knowing God’s Creation
김민석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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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 연대기, Rust Kim 저, 새물결플러스 출판.

일주일 만에 배송이 되어 (여긴 미국이다), 기대감으로 책을 순식간에 다 읽어 버렸다. 너무나 맛있는 음료를 다 마셨는데도 계속해서 빨대를 빨고 있는 기분이랄까. 책이 좀 더 길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찐하게 남는다.

성인이 되어 만화책을 사 본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제 점심 시간에 카페테리아 구석진 곳에 앉아 혼자 밥을 먹으면서 키득키득대며 읽었는데 (옆 사람이 힐끗힐끗 쳐다보는데, 뭐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것따위 신경 쓸 겨를이 내겐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재미있게 책 한 권을 읽어본게 언제였던가 싶다. 김민석 작가의 실력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이 책은 만화만이 가진 장점을 최대한 잘 살리고 있다. 말 풍선 안에 적힌 문장들을 모두 합한다고 해도 위에 언급한 두 책이 가진 텍스트의 반의 반의 반도 안되겠지만, 이 책이 전달하는 임팩트는 그에 못지 않다. 만화는 글뿐 아니라 그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표정과 행동에서, 그리고 인물들이 활동하는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우리들은 글로는 충분히 표현할 수 없는 무언의 감정을, 마치 브레인을 통과하지 않는 것처럼, 빠르게 게다가 아주 효과적으로 느낄 수 있다 (실제 만화를 보며 우린 우리 자신을 그 만화 속 시공간에 배치시키지 않는가!). 그것은 오디오와 비디오의 차이로 설명할 수도 없고, 글과 그림의 차이로도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만화만이 할 수 있는 유닉한 파트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만화 작가의 입장에선 말 풍선 안에 담을 글을 최대한 요약할 줄 알아야 하고, 이를 위해선 정확하고 좋은 문장을 선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능력은 모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이름도 빛도 없이 묻힌 작가의 부단한 연구와 성실한 노력이 선행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난 김민석 작가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적으론 무크따와 아론의 송아지를 먼저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간이 지나면서 진화론과 창조론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개념들과 역사적 사건들을 대다수 잊어버리게 되었는데 (두 책이 설명을 못한 게 아니라, 나의 롱텀 메모리 능력이 바닥이라고 그런 거임), 창조론 연대기를 보며 아주 선명하게 개념이 다시 기억이 나고 정리가 되었다. 물론 무크따와 아론의 송아지에서도 책 중간중간에 도표와 그림을 삽입시켰지만, 창조론 연대기에서 보여준 만화 속 정리는 정말 내겐 통쾌하고도 명쾌했다. 역시 만화만이 가진 매력이 분명 존재하는 거다 (새물결플러스에서 지속적으로 만화를 매개로 하여 신학, 과학, 인문학 등을 지속해서 출판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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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의 송아지 - 젊은 지구론에 대한 합리적 비판
임택규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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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의 송아지, Taeck Kyu Yim 저, 새물결플러스 출판.

먼저, 무크따를 먼저 읽고 아론의 송아지를 읽게 된 순서는 아주 바람직했던 것 같다. 출판된 시기가 그렇지 않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 두 권 모두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의 독서 방향에 있어선 하나의 힌트가 될 수도 있겠다. 개인 교습으로 입문을 했다면, 이제 재미나고도 적절한 비유와 예시를 동반한 강연을 들을 차례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론의 송아지”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형상 속에 가두어 버리는, 우매하고도 이기적인 인간의 속성을 반영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시내산에서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자 불안해져서 그들이 지니고 있던 금 조각을 모두 모아 아론을 중심으로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이라 명하고 의지하게 되는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저자는 그 기록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젊은 지구론으로 대변되는 창조과학을 이스라엘 백성에 대치시키고, 송아지 형상을 성경의 문자에 대치시킨다. 하나님을 근본적으로는 믿지만, 그 믿음이 너무나 근본주의적이어서 문자 그대로를 믿게 된 무속적인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과 기독교를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만들어낸 창조과학이 실제로는 하나님을 성경에 씌여진 문자 속에 가두어 버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책에서 저자는 아주 적실하게 꼬집어 낸다.

이 책의 부제인 “젊은 지구론에 대한 합리적 비판”에서도 쉽게 읽어낼 수 있듯이, 이 책의 메인 타겟은 젊은 지구론으로 대변되는 창조과학이다. 그 그룹에 속한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이며 하나님과 기독교를 스스로 보호한다고 할 만큼 영성이 지나치게 높은, 자칭 기독교인이라 하는 사람들의 무속적인 면을 하나씩 파헤친다. 그러나 아무런 배경 지식이 없는 사람이 읽어도 쉽고 재미있게 술술 읽을 수 있을만큼 저자의 글쓰기는 탁월하다. 요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라면, 세상 돌아가는 흐름을 대충이라도 읽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신을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이 책을 읽을 땐 아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제목부터가 성경에 나오는 단어이기 때문에 지레짐작하며 책을 멀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묵직한 주제를 저자가 가진 쉬운 번역 (어려운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기술로 인하여 대중적으로 재미나게 접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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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 과학과 신앙에 얽힌 해묵은 편견 걷어 내기
우종학 지음 / IVP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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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신론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일명 “무크따”), Jong-Hak Woo 저, IVP 출판.

본격적인 이야기는 어느 신문사 과학부를 담당하고 있는 박 기자라는 나한교 (나도 한때 교회 다녀봤어)가 우연찮게 그의 과거 주일학교 선생이자 현재 대학 교수인 한 별 박사의 저서 소개 기사를 작성하는 일을 맡게 되고 인터뷰까지 직접 하게 됨으로써 시작이 된다. 오랜만에 만난 사이, 세월이 벌려 놓은 서먹한 둘 사이의 간격은 비단 과거 선생과 제자 간격이나 현재 교수와 기자 간격만은 아니었다. 세월은 그 둘을 신앙인과 비신앙인,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으로도 갈라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갈라놓은 원인의 무게중심은 수동적 의미의 세월이란 요소뿐 아니라 능동적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과학과 신앙에 얽힌 해묵은 편견'에도 있다고 봐야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이 책의 요지와 잘 부합하지 않을까 생각해서다. 저자가 왜 하필이면 한 교수를 박 기자의 과거 주일학교 선생으로 설정했겠는가. 무엇보다 이 책의 부제는 '과학과 신앙에 얽힌 해묵은 편견 걷어 내기'다. 이는 저자 우종학 교수님이 책 전체에 걸쳐서 일관되게 던지고 있는 메시지와도 같다).

박 기자와 한 교수의 간격은 우리들 사이에서도 존재한다. 편견은 기독교의 이름을 가진 무속신앙을 강화시키고, 강화된 무속신앙은 편견을 기정 사실화시키는 강력한 교주 역할을 한다. 악순환의 고리에 의해 그 교주의 힘은 점점 막강해져서 한국 기독교라는 옷까지 입고 교인들에게 그들이 기정 사실화시킨 편견을 복음과 함께 뿌린다. 이런 의미에서 편견은 가라지와도 같다. 주인의 곡식 사랑하는 마음 덕분에 가라지는 곡식이 자라는 동안 뽑히지는 않겠지만, 추수 때가 이르면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져 불사르게 단으로 묶어질 것이다.

박 기자와 한 교수의 재회는 두 사람의 간격을 메우는 물꼬를 튼다. 첫 인터뷰에 이어진 한 교수 강연에의 참석, 또 그 이후 연이은 두 번의 만남을 통해 박 기자의 창조론에 대한 자세는 서서히 바뀐다. 그 동안 자신이 가져왔던, 과학과 신앙이 서로 대립된다는 생각이 실제로는 잘못된 편견일 수도 있겠다는 진지한 의심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부차적으로 다시금 크리스천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도 그의 마음 속에서 싹트게 된다 (이는 잘못된 편견의 수정이 회심의 열매까지도 맺을 수 있는 힘도 가질 수 있다는, 또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즉, 과학과 신앙에 얽힌 편견을 제거하는 작업이 아프리카 오지에서 언어와 문화를 새롭게 배워가며 복음을 전하는 것만큼이나 전도와 선교의 중요한 축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런 면에서 우린 어쩌면 비기독교인들의 과거 탈기독교 과정의 메커니즘을 좀 더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박 기자는 대다수의 우리를 대변하는 듯하다. 과학과 신앙의 차이를 무신론과 신론의 차이나 비기독교와 기독교의 차이와 동일시하는 한국 기독교의 암묵적이고 비합리적인 교육 체제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밖에 없었던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다 ("창조론 연대기"에서 김쑤가 자기에게 상처를 준 온유와 온유 오빠를 바라보는 시선을 떠올리면 된다. “그들도 피해자야”). 우리 중에 나한교가 아니었던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박 기자와 같은 생각을 해보지 않았던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어쩌면 박 기자는 용감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무속적인 믿음으로 마치 우리들이 기독교의 수호자인양 과학의 합리적인 판단과 가치체계를 깡그리 무시하며, 중립적인 과학의 목소리를 사탄의 속임수와 동일시하며 귀를 틀어막고, 계속 어둠만을 쳐다보면서도 거룩한 척하며 지속하여 교회에 다니고 있진 않는가? 기정 사실화된 잘못된 편견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제대로 된 창조주 하나님을 전하는 복음 전파가 가능하리라 생각하는가? 그 때야말로 당신이 제 2의, 제 3의 교주가 되는 순간 아니겠는가! 이런 부분을 잘 잡아낸 책 제목, "아론의 송아지"에서도 저자, 임택규가 이런 웃지 못할 상황에 대해서 얼마나 답답했으면 프롤로그에서부터 "우매함은 악보다 훨씬 위험하다"라는 디트리히 본회퍼의 문장으로 책을 시작하냔 말이다!

무크따가 생물학적 진화/창조론만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우주의 탄생까지도 함께 다룬다는 점에서 독자들은 이 책의 또 하나의 장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즉, 무크따는 그 둘 모두를 매개로 하여 한 단계 위의 개념에 대한 편견을 깨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무크따는 부제에 해당하는 과학과 신앙의 편견 깨기에 잘 부합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무크따는 자상하고 지혜로운 스승으로부터 일대일 과외를 받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므로 이 책은 어떤 커다란 학회에 가서 정보를 수집하는 경쟁적인 방법보다, 자기가 잘 아는 선생님으로부터 개인적으로 친절하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배우는 것을 선호하는 독자들에게 특히 권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게 되면 과학과 신앙을 더 이상 대립적으로 보지 않게 될 것이며, 저자처럼 과학과 신앙을 모두 겸하여 조화를 이루고, 또 서로를 더욱 발전/보완시켜주는 관계로 볼 수 있게 되리라 확신한다. 더불어, 탈기독교를 경험한 나한교들 중엔 이러한 편견으로부터의 해방이 아주 결정적으로 어필하는 케이스도 많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회심도 내심 기대해 본다. 박 기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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