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왕의 복음 - 당신의 삶에 예수의 통치가 임하게 하라!
스캇 맥나이트 지음, 박세혁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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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왕의 복음: 개인구원을 위한 천국티켓을 넘어서.


스캇 맥나이트 저, ‘예수 왕의 복음’ (새물결플러스 출판)을 읽고.


사영리식 전도의 목적은 영혼 구원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다. 그 결단을 위해 전도자는 피전도자를 설득해야 한다 (선포가 아닌 설득이라는 점에 유의하라). 설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 

이에 따른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그래서?” 하는 무관심한 반응과 “정말?” 하는 관심의 반응이다. 물론 전도자는 후자의 반응을 기대한다. 일단 전도자는 피전도자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기로 작정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상황이다. 시나리오대로 피전도자의 반응이 나와준다면, 잃어버린 영혼을 하나 더 구원하는 셈이며, 교회로 돌아가 ‘영접시킨 영혼’ 수에다 한 칸 더 추가할 수도 있고, 어쩌면 ‘전도대왕’이라는 타이틀의 상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전도대왕’의 경험이 있다). 그런데 현장에서 피전도자의 반응이 후자인 경우는 거의 없다 (만약 후자인 경우라면 무슨 말을 하든지, 혹은 안해도, 영접을 할 것이다). 보통 전자이거나, 얼굴엔 가느다란 웃음으로 위장한 채 대화가 빨리 끝나기를 고대하면서 가만히 듣고 있는, 소위 ‘아량 깃든 무반응’이 대부분이다. 어쨌거나, 전도자는 준비해온 게 있다. 이를 위해 떨리는 가슴으로 얼마나 부단히도 연습을 했던가. 피전도자의 반응이 어떻든지 상관없이 전도자는 끝까지 진행해야만 한다. 목적은 영접이다. 


두 번째, “그런데 당신은 죄인이다.” 

죄라는 정의가 기독교 신앙 안에서도 해석이 명확하지 않으며, 영적인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 밖의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개념이기 때문에, 이 두 번째 메시지를 듣는 사람은 어리둥절할 수 있다. 만약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것 같다면, 그건 대부분 기독교에서 주로 말하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과 같은 영적인 죄로써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인 도덕적 성찰로 비롯된 반응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내가 왜 죄인이냐?”라며 기분 나빠하는 경우다. 생각해보라.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와서 좋은 소식을 전해주겠다고 해서 어디 한 번 말해보라고 허락했는데, 뜬금없이 자기더러 죄인이라고 선포하니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더욱이 그 죄를 인간의 힘 (선행이나 봉사 희생 등등으로도)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하니, 이건 완전히 자신이 구제불능이라는 말밖에 안 된다. 그러면 결코 좋은 소식은 좋은 소식이 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전도자는 이런 경우를 당하면 감정이 울컥해지면서 계획했던 진도를 나가기가 어려워진다. 죄의 개념을 이해시키고자 이런저런, 자기 스스로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설명을 피상적으로 해보지만, 화가 난 피전도자는 눈을 멀뚱멀뚱 뜨고서 무슨 귀신 신나락 까먹는 소리하냐는 식으로 전도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앉아있다. 아, 이 난처한 상황. 이건 교회에서 배운 사영리식 전도 매뉴얼에 나와있지도 않다. 그러나 크게 걱정할 건 없다. 다행히 (?) 이런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첫 번째 메시지에서 반응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무반응’이다 (단, 아량은 점점 사라져간다). 그래서 전도자들 대부분은 계획했던대로 세 번째 메시지로 별 무리없이 진행할 수 있다.


세 번째 메시지는 “예수님만이 죄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이미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다.”이다. 죄가 무엇이지 선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예수라는, 신이자 사람인 존재가 (우와..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아스가르드의 토르 같은 건가? 그러면 신화란 말인가?) 나타나서 자신의 죄문제를 이미 해결했다고 선포하니, 생각해보라.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겠는가. 도대체 그 죄가 뭐길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게 도대체 뭐길래, 모든 인간을 밑도 끝도 없이 구제불능으로 만들어 버리는가. 그리고 그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으로 예수를 제시하니, 피전도자는 정말 황당하지 않겠는가. 도대체 예수라는 존재가 누구이길래, 부탁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죄문제를 해결했다고 하는 건가. 이건 도대체 고마워해야만 하는 상황인가. 이렇게 머리가 온통 복잡해진 상태에서 별다른 반응을 하지 못할 무렵, 전도자는 슬그머니 네 번째 마지막 메시지로 넘어간다. 상투적인 사영리식 전도의 경우, 보통 이렇게 세 번째 메시지까지 이르면, 전도자의 경우는 지치고 긴가민가하면서도 일단 끝가지 가보자는 마음가짐이 되고 (전도자는 피전도자가 큰 반대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흑암이 결박되었다거나 성령이 역사하고 있다고 믿게 된다), 피전도자는 어여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상황이 된다 (이런 상황을 가리켜 ‘동상이몽’이라고 한다). 


“예수님을 영접하세요.” 네 번째 메시지다. 이 말을 들으면, 아마도 ‘내 이럴 줄 알았다. 결국 교회 나오라는 말이었군’하고 생각하는 피전도자들이 많을 것이다. 예수 믿고 교회 나오라는 말을 하려고 앞의 세 가지 메시지를 성경구절까지 외우면서 장황하게 설파했던 거라고 여길 것이다. 그리고 쉴 틈을 주지 않고 전도자는 예수님을 영접하려면 기도를 따라해야 하는데, 따라하겠냐고 물어본다. 피전도자는 난감하다. 화를 낼 수도 없다. 무턱대고 영접기도라는 것을 따라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아니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만약 안 한다고 하면 다음에 또 찾아오거나 귀찮게 할테니 그냥 따라해줄까 고민한다. 어떤 피전도자의 경우는 가만히 생각해보다가 영접기도를 따라한다. 아니 따라해준다. 한 번 더 아량을 품고 다음과 같이 생각을 해본 것이다. ‘만약 죄라는 것이 진짜로 있다고 치고 (비록 믿기지는 않지만), 그 죄를 전도자의 설명대로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치며 (왜 해결 못하는지 이유는 모르면서), 예수라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존재가 어쨌거나 자신의 죄문제를 해결했다고 치면 (‘음… 땡큐일 수도 있겠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 공짜 천국티켓을 딸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도 든다), 그 영접기도인가 뭣인가만 따라하면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든지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고, 절대 그 구원은 잃어버리지 않을 거라고 강력하게 말하는데 (보이는가? 모든 게 가정이다. 복음 선포에 믿음이 생긴 게 아니라 전도자의 열심에 설득을 당해준 것이다), 밑져야 본전 아닐까?’ 그래서 영접기도를 따라해주겠다는 결단 (?)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웃픈 상황이 현장에서 항상 벌어지는 건 아니다. 그러나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사실은 직간접적으로 실제로 있었던 상황 중 추스린 것이다). 눈치 빠른 독자는 벌써 알아챘겠지만, 그렇다. 나는 사영리식 전도의 부정적인 영향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런 이야기에 공감을 한다면 (위의 장황한 글을 단숨에 읽어내려온 독자들 모두 포함), 아마도 당신도 비슷한 상황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해봤거나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해봤다는 뜻일 것이다. 


스캇 맥나이트의 ‘예수 왕의 복음’이란 책을 읽고나서, 나의 이런 불경스런 (?) 생각이 전적으로 틀린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책의 메시지는 그것이 가지는 무게에 비해 아주 단순하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종교개혁 즈음부터 시작해서 ‘구원의 문화’를 ‘복음의 문화’로 착각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본래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밝히는데 초점을 둔다. 그 복음은 바울과 사도들의 복음이자, 신약성경이 전해주는 복음이며, 또한 예수님이 선포한 복음이다. 그것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 이야기의 완성이자 약속의 성취로서의 예수님 이야기다. 우리들이 흔히 복음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구원의 문화’는 ‘복음의 문화’ 안에 속한 것일 뿐, 결코 ‘구원의 문화’는 ‘복음의 문화’와 똑같지 않다. 저자는 복음의 예수님을 요약해서, ‘왕이신 예수님’, 혹은 ‘예수님이 주님이시다’, ‘예수님은 메시아이며 주님이시다’라고 말하겠다고 한다. 왕으로서, 메시아로서, 주님으로서 예수님은 ‘우리의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 혹은 해방자이시라는 것이다. 


조소 섞인 이 글의 앞부분에서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단지 사영리식 전도방법이 잘못되었다거나 그것을 피상적으로 수정하자는 게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즉 사영리식 전도방법의 배경이 되고 근간이 되어온 기독교의 잘못된 문화를 꼬집고 싶었던 것이다. 스캇 맥나이트가 간파한대로, 복음은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받는지에 관한 체계가 아니다. 사영리식 전도에서 말하는 복음이란 천국티켓용으로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값싼 구원, 오로지 죽은 이후의 사후세계가 지옥이 아닌 천국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안전한 보험과도 같은 복음은 결코 예수가 선포했고 사도들과 초대교회가 믿고 전했던 복음이 아닐 것이다. 복음이 좋은 소식인 이유는 결코 영혼 구원을 충족시키는 수단이기 때문이 아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한 개인 영혼 구원을 넘어서는 더 큰 이야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구약성경에서 줄곧 이야기된 이스라엘의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가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맥락이 없이 전해지는 사영리식 영혼 구원 방법은 허탈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런 영혼 구원에 초점을 둔 전도는 이 시대의 기독교가 말과 행동이 다른 이중적인 거짓종교라는 탈을 쓰게 된 이유 중 분명히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우린 복음이 무엇인지 똑바로 알아야 한다. 일부를 가지고 전체인 것처럼 믿으면 꼬인 실타래는 더 꼬이기만 할 것이다.


스캇 맥나이트는 구원의 문화가 복음의 문화로 둔갑한 현실을 진단/폭로하면서, 참 복음이 무엇인지 (앞서 언급했듯, 참 복음은 이스라엘 이야기의 완성이자 해결로서의 예수님 이야기이다) 신약성경, 특히 고린도전서 15장을 중심으로 밝힌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복음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묻는 사람도 왕왕 있었다면서, 그 사람이 가졌던 근본적인 문제점은, 복음을 개인적, 실존적, 사적인 죄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만 이해할 뿐, 이야기 문제, 즉 메시아 해결책을 찾아 헤매던 이스라엘 이야기의 결말로는 이해하지 못했다고 진단한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직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세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구원 계획이 어떤 맥락에 놓여 있는지를 알게 하는 복음을 더 많이 선포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바울은 이신칭의를 말했지만, 바울이 이해한 복음은 단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았다. 바울의 복음은 구약성경의 이스라엘 이야기를 맥락으로 하는 사도적 복음이었다. 단지 성금요일 이야기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계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삶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저자는 그 다음, 이런 웃지 못할, 구원이 복음을 압도하게 된 현실의 메카니즘을 밝힌다. 과거의 어느 지점에선가 이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지점을 종교개혁 시기라고 지적하고 있으며, 특정한 두 개의 문서를 통해 확산되었다고 판단한다. 루터파의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와 칼빈주의/개혁파 진영의 제네바 신앙고백이 바로 그것이다. 조항의 목차를 구원과 이신칭의에 관한 항목으로 바꾸면서 ‘복음의 문화’가 ‘구원의 문화’,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칭의의 문화’로 변형되었다고 말한다. 종교개혁에서 복음 이야기나 신조를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모든 것의 순서를 재배치함으로써 복음 이야기가 구원 이야기라는 새로운 틀로 재구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의 복음주의, 특히 영국과 미국의 복음주의에서는 (장로교가 압도적인 한국의 기독교는 미국 복음주의 중 극우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 종교개혁의 구원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현재의 상태에 이르렀다고 저자는 판단하고 있다. 또한 ‘복음이 구원으로 축소되고 구원이 개인적 죄사함으로 축소된 것을 죄 관리의 복음’이라고 부르면서 강력하게 비판했던 달라스 윌라드의 말을 인용하면서, 복음 이야기가 복음의 창백한 그림자가 되고 말았다고 한탄한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에 초점을 맞췄지만, 바울은 적어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는 칭의에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과거에는 ‘바울은 하나님나라를 선포했는가?’ 혹은 ‘예수님은 칭의를 선포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저자는 간파한다. 복음은 하나님나라나 칭의라는 단어만으로 정의할 수 없으며, 그 두 용어보다 더 큰 개념이라고 말한다. 복음이란 이스라엘 이야기가 예수님 이야기 안에서 마무리되었다는 선언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자신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선포하셨는가?” 혹은 “예수님은 자신에 관해 선포하셨는가?” 만약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예수님도 복음을 선포한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복음과 바울의 복음을 다르다고 말하는 기독교인들도 많이 있기 때문에 저자는 이를 염두에 둔 것이라 본다. 그는, 복음은 하나이며, 그것은 예수님이 선포하셨던 것이고, 복음서가 말하고 있는 것이며, 동시에 바울과 베드로가 사도행전이나 서신서에서 설교했던 것이라고 말한다.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달라진 것은 앞서 지적했듯, 종교개혁 시기 이후 기독교의 변천과정에서 구원이 복음을 압도한 점진적인 사건인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 가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도행전의 복음전도는 메시아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이 구원과 관련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선언하기 때문에 듣는 이들에게 예수님을 메시아이자 주님으로 고백하라고 촉구하는 반면, 우리의 복음전도에서는 죄인들에게 그들의 죄를 인정하고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라고 설득한다.’ 다시 이 글의 서두로 돌아가 저자의 주장과 맞춰보면, 오늘날 대부분의 복음전도는 누군가로 하여금 결단하게 만드는 데 몰두하는 반면,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제자를 만드는 데 몰두했다는 점을 간파해낼 수 있다. 결단에 초점을 맞추는 복음전도는 복음의 의도를 온전히 구현하지 못한다. 그러나 제자 삼기를 목표로 하는 복음전도는 서두르지 않고 예수님과 사도들의 온전한 복음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한다. 결단은 제자의 삶을 살게 하는 핵심 요소가 아닌 것이다. 사실 태극기 부대를 앞세운 극우 세력의 기독교인들이 결단이라면 누구보다도 선두에 서있는 분들 아니겠는가. 중요한 건 한 번의 결단이 아니라 어떻게 세상 속에서 세상과는 다른 정체성을 깨닫고 세상에서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느냐,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아내느냐 하는 것이다. 즉 종말론적 신앙관을 가지고 ‘지금, 여기’에서 새하늘과 새땅을 살아내는 것이다. 이는 저자가 말하는 제자의 삶과도 같을 것이다.


나 역시 저자처럼 복음의 문화가 복원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복음이 값싼 천국 가는 티켓 정도로 추락한 현실이 슬프다. 여기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복음의 문화를 만들기 위해 복음을 끌어안고자 한다면, 우리는 성경 이야기를 하나님의 백성에 관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그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복음의 문화는 교회의 문화이며, 그것은 곧 앞서 내놓은 제안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복음의 문화로 변화되는 교회의 문화다.’ 그렇다. 예수님의 전체의 삶을 이스라엘 이야기와 연결하고 그것의 완성 내지는 성취라고 보는 큰 이야기 (big story)를 이해할 때에야 비로소 복음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고, 그 이야기가 곧 구원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며, 우리들 역시 그 이야기의 연장선에 있음을 감사하게 될 것이다. 구원의 문화가 아닌 복음의 문화가 회복된 교회를 꿈꾼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16?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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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고백록 현대지성 클래식 2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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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믿음의 조화로 온전한 신앙을.


레프 톨스토이 저, '고백록'을 읽고.


이성과 믿음의 조화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성을 향한 한낱 바람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이성에 천착한 사람은 이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러나 엄연한 질서를 가지고 버젓이 존재하는 세상의 또 다른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언젠간 대면하게 된다. 반대로, 이성을 배제한 믿음만으로 무장한 사람 역시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믿음인 줄 알았던 것의 실체가 자신의 미련한 고집이었음을 언젠간 발견하게 되고, 그 고집으로는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며, 사람들로부터는 오히려 무분별하다거나 ‘나누는 자’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어 맹목적인 사회악으로 자리매김하는 날을 맞이하게 된다. 누군가는 이성으로 시작하여 믿음으로 인생을 마치고, 또 누군가는 믿음으로 시작하여 이성으로 생을 마감한다. 믿는 자들의 눈으로 보면, 전자는 ‘회심’, 후자는 ‘변심’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의 시선으로 볼 때, 전자는 그저 정신 줄을 놓았다거나 나약해졌다는 말을 듣기 십상이고, 후자의 경우는 뒤늦게 철이 들었다는 말을 듣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이분법적인 구분 자체에 불만을 느낀다. 꼭 나눠야만 하는가. 어느 한 쪽을 택하면 나머지 하나는 폐기해야만 하는 것인가. 둘 다 가질 순 없는 것인가.


나는 그리스인이 아닌 일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지녀야 할 (또한, 지니게끔 되어있는, 마치 바른 가지가 바른 열매를 맺듯) 성숙한 인격과 성품을 ‘이성과 믿음의 조화’에서 찾는다. 치우치지 않는 신앙 역시 이러한 바탕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삶과 신앙의 조화에도 직접적으로 연결되며, 실질적인 일상을 살아가며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꼭 필요한 요소이리라 믿는다.


회심이란 단순히 이성을 버리고 믿음을 선택한 행위를 말하는 것일까. 이성을 져버린 믿음이 과연 참 믿음일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회심은 이성과 믿음에서 조화를 이루어 그 어느 것도 버리지 않고 둘 다 취한 상태이지 않을까. 이성의 한계를 인지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이성적인 판단이며, 맹목적인 믿음의 한계를 인지하는 것 역시 이성적인 판단만이 아닌 믿음의 판단을 포함한다. 둘은 상호 보완해가면서 온전한 신앙을 이루어내는 것이지, 결코 그 어느 하나를 버리거나 배제해야만 하는 대상이 아니다. 서로를 적으로 보는 시선이 그대로 살아있는 한 결코 건강한 신앙은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대문호 톨스토이의 고백록을 읽어보면, 부와 명예와 지성의 끝에 서있는 한 인간이 신앙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는지, 그리고 그 신앙이 어떻게 그 사람에게 작동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집안 내력으로 정교회 문화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벌써 그는 신앙과 삶의 간극을 목도하고 껍데기 뿐인 신앙의 모습에 환멸을 느꼈으며 결국 신앙을 멀리하게 된다. 인생의 의미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의 존재 의미와 정체성에 대해서, 사적인 호기심을 넘어 인간 전체로까지 범주를 확대하여 철학적이고 과학적이며 신학적인 고민을 하면서 거의 일평생을 보낸다. 톨스토이는 태생부터 귀족 출신이었기에 자신의 얼굴에 땀을 흘리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 살면서도 많은 돈을 남길 수 있을 만큼 부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젊은 나이에 작가로서, 그리고 지성인으로서 세상으로부터 명예와 존경을 얻었다. 그러나 그가 어릴 적부터 가져왔던, 내면의 목소리에 그는 끝내 답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 그가 착안한 것은 신앙인의 도덕적인 불완전함이었다. 기독교의 가르침이 일상적인 삶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꼴을 목도한 후, 톨스토이는 그 문제의 답이 도덕적인 완전함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도덕적 완전함을 추구했지만, 그것은 이내 모든 것에서 완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뀌었고, 그것은 다시 자기자신이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고자 하는 욕망으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은 또 다시 다른 사람들보다 더 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 즉 다른 사람들보다 더 유명하고 더 중요하며 더 부유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바뀌었다. 


청년 시절부터 톨스토이는 성공한 작가가 되어 일찌감치 부와 명예를 안고 지성인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의 여파로 선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지만,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으며, 오히려 그가 피라미드 위에 올라가고, 그 자리를 모든 비열한 욕망으로 지켜내는 모습에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인정을 했다. 그러나 그는 이 회고록에서, 자신의 청년 시절을 떠올리기만 하면 너무나 끔찍해서 소름이 끼치고 역겨워진다고 고백한다. 사회적인 출세의 길을 걸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였으며, 세상의 성공이 아닌 도덕적인 완전함과 선함을 위한 인생관을 내심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기득권이 주는 근사한 매력과 유익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끊임없는 괴리를 느끼며 두 영역으로 분리된 삶을 그는 거의 평생 동안 살아갔다.


이러한 이중적인 삶이 과연 톨스토이만의 전유물일까. 앞서 이성과 믿음의 조화를 꿈꾸며 작은 실천으로 일상을 살아내려는 나의 고민과 몸부림도 같은 맥락에 놓여있진 않을까. 또한 이 글에 공감을 하며 종말론적 신앙관을 가지고 오늘을 그날처럼 살아내려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된 기도제목이 아닐까. 이러한 괴리를 인지하지도 괴로워하지도 않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과연 그 사람이 가진 신앙의 눈은 떠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감긴 채, 알고 보면 지극히 사적인 안위만을 추구하며 정의와 공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작디작은 자기만의 왕국의 평화만을 고수하려는 peacekeeper의 눈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톨스토이가 청장년 때 내린 결론은 인생의 무의미함이었다. 그것은 그의 이성을 매개로 한 모든 학문적인 연구에서 도출된 믿음직한 결과였다. 형이상학적인 추상 학문도, '어떻게'에 대한 명확한 답을 주는 자연 과학도 모두 인생을 왜 살아야 하는지, 어차피 죽음으로 모든 것이 파괴될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의미 있는 삶을 살아낼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은 얻을 수 없었다. 학문의 도움만이 아닌 종교의 도움으로도, 그리고 그 시대에 알려져 있던 현인들의 인생관에서도 그는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의 삶은 정지했고, 삶은 무의미하기만 했다. 그러한 굴레에서 빠져 나오는 유일한 탈출구는 자살밖에 없었다.


자살만이 해답이라는 것을 확신하면서도, 그러나 그는 자살을 감행할 결심을 할 수 없었다. 혹시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신앙으로 돌아온다. 지식인들과 현자들이 이성에 기초해서 제시한 지식은 삶의 의미를 부정했지만, 무수히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인류 전체는 삶의 의미가 이성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지식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성에 기초하지 않는 지식, 그가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던 그것은 바로 '신앙'이었다. 하나님과 도덕적 완전함, 그리고 삶에 의미를 부여했던 '신앙'으로, 평생의 시간을 들여가며 결국 그는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었다. 그러나 이전과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었다. 똑같은 자리였지만, 이번엔 그가 바뀌었다. 전에는 신앙의 모든 것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던 반면, 다시 돌아온 시점에선 그것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거의 평생을 들여 이렇게 저렇게 인생의 답을 찾는 구도자로서 '방황'을 했던 기간이 준 선물일지도 몰랐다. 다음은 톨스토이가 자살 충동에서 드디어 벗어나게 된 깨달음을 고백한 부분이다. 


| 내 안에서 어떤 음성이 소리쳤습니다. "하나님은 존재한다! 하나님 없이는,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사는 것은 하나이고 동일한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이다. 하나님을 찾는 삶을 찾아라. 하나님 없는 삶이란 있을 수 없다!" 이 음성을 듣는 순간, 내 안에 있는 모든 것과 내 주변의 모든 것이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력하게 환해졌고, 그 이후로 그 빛은 나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 


20세기 세계적인 기독교 변증가 C. S. 루이스도 그의 저서, '예기치 못한 기쁨'에서 자신의 진정한 회심을 이성과 논리로 변증하지 못했다. 톨스토이 역시 이 책 '고백록'에서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두 인물이 신앙을 멀리하게 된 이유는 달랐고, 다시 신앙을 회복하게 된 길도 달랐다. 하지만 공통점은 모두 철저하고 치열한 이성의 과정을 거쳤다는 것, 그러나 결국에는 그 이성을 버리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그 덕분에 절박함을 가지고 원래 그들 자신이 서있었던 신앙의 자리에 대한 본질적인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를 내가 앞서 언급한 질문과 고민의 관점에서 해석해보자면, 두 사람 모두 마침내 이성과 믿음의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이성이 전혀 필요 없다거나, 이성이 믿음을 얻기 위한 발판으로만 쓰이고 최후에는 버려지는 것도 아닌 것이다. 이성과 믿음은 결코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다. 서로 합하여 선을 이루어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성품을 발현케 하는 것이다.


진지한 고민의 과정에 진입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응원한다. 피터 엔즈의 통찰에 의해서도 '확신의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의심의 숲을 지나야만 한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지식과 믿음, 그리고 그분을 향한 신뢰와 순종이 이루어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꼭 거쳐야만 하는 과정일 뿐이다. 다만, 사람들의 이러저러한 말에 솔깃해져서 본질을 놓치지 않도록 늘 깨어있도록 성령께 간구하자.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민하면서 절박한 심정으로 이성과 믿음의 조화를 이루며, 그 열매로 삶과 신앙의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구하고 순종하자. 바로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일상, 하나님나라!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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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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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소중한 일상의 무게.


제임스 설터 저, '가벼운 나날 (Light years)'을 읽고.


하루 24시간 전체가 ‘해피아워’에 속한 것 같은 삶. 눈을 떠도 감아도 언제나 햇살은 오후 서너 시 무렵의 기울기로 비스듬히 들어와 그들의 가벼운 삶을 비추었다. 느지막한 태양은 그들의 시간을 유난히 느리게 만들었고, 가시적인 재앙과 사건 사고는 그들을 모두 빗겨가는 것 같았다. 입을 옷은 넘쳐났고, 먹을 것도 풍족했으며, 그들이 사는 집은 거의 매일 손님들을 맞이할 정도로 부족함이 없었다. 아이들은 예쁘고 예의 바르게 자랐으며, 그들은 부모로서의 자리 또한 훌륭하게 지켜내고 있었다.


그러나, 신비로울 정도로 우월했던 그들의 삶이 가져다 준 안정감은 점점 나른함이 되었고, 식상해진 나른함은 기어이 권태를 불러왔으며, 권태는 인생의 중력을 거슬러 모든 나날들을 깃털처럼 가볍게 만들어버렸다. 그들의 삶은 점차 무게를 잃고 공중에 흩뿌려졌다. 모든 게 완벽해 보이는 그림 같은 그들의 삶 속에 무언가가 빠져 있었던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어쩌다가 ‘가벼운 나날’이란 유리 감옥에 갇혀버린 것이었을까.


평론가 신형철은 이 책을 읽고 다음과 같이 썼다. “숨 쉴 틈 없이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설이 아니라 수시로 깊은 숨을 내쉬느라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 소설이다. 삶을 너무 깊이 알고 있는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 느끼게 되는 피학적 쾌감 때문에 나는 그만 진이 다 빠져버렸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난 책의 삼분의 일 정도 읽었을 때 벌써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 공감하기 싫거나 두려운 부분을 공감할 수밖에 없을 때 조용히 찾아오는 불가항력적인 탈진을 느끼면서. 나의 깊은 한숨은 이미 책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예전에 읽었던 긴 장편소설, 이를테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나 ‘백치’, 혹은 헤세의 ‘유리알유희’보다 분량이 적은 이 책을 읽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들숨이 된 허무함을 절망이라는 날숨으로 화답해야 했다. 지난한 과정이었다. 매일 책갈피로 표시된 부분을 펼 때마다 긴 심호흡을 해야 했다. 그러고도 미처 몇 십 페이지도 못 읽고 다시 닫아야만 했다. 준비운동이 부족했던 탓일까. 아니다, 그건 영원히 부족할 것이다. 삶을 다 아는 한이 있더라도. 착잡했다.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 그림 같은 감옥이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일상을 잃어본 사람은 일상의 의미를 안다. 인생을 저울에 올리면 대부분은 일상의 무게일 것이다. 그리고 인생에서 일상을 빼고 남은 찌꺼기를 잘 포장한 것을 영화라고 부른다. 평범한 일상은 위대하다. 평소엔 느끼지 못하는 그 무게. 삶의 중심을 잡아주는 그 무게. 하지만 그 무게의 표면적인 모습은 너무나도 익숙해져 기억조차 나지 않는 기계적인 나날들의 연속으로 나타나곤 한다. 그 날들이 사라져버리면, 그제서야 뒤늦게 자신의 인생에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커다란 구멍이 생기고 텅 비어버린 삶의 껍데기를 깨닫게 된다. 그런데 그들의 삶은 이러한 일상을 거의 완벽하게 다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잃은 삶보다 더 큰 구멍이 난 듯했다.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


허영심. 아마도 허영심일 것이다. 아내 네드라와 남편 비리의 내밀한 허영심, 그리고 큰 딸 프랑카와 작은 딸 대니에게도 전염된 그 허영심. 오후 서너 시 경의 따스하고 나른한 햇살은 그들의 창자 속에 있는 허영이라는 풍선을, 개구리가 든 냄비의 온도를 조금씩 높이듯, 아주 천천히 부풀게 했다. 그들의 나날들이 가벼워졌던 건 태평성대로 포장된 환경 때문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무게를 잃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소리 없이 조금씩 부푼 허영이라는 풍선을 삼킨 사람들의 결국이 마침내 가시적으로 나타나 ‘가벼운 나날’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뛰어난 외모를 가진데다 지적이기까지 했던, 그러나 책임감을 상실한, 그 위험한 자유를 갈망했던 네드라. 그 갈망은 자기연민조차 사라진 본능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본능적인 자유 추구는 결국 파멸을 가져왔다. 그녀는 어느 날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함께 살기가 불가능해. 네 눈엔 안 보이나 봐. 그를 사랑해. 너무 좋은 아빠야. 하지만 끔찍해. 설명이 안 돼. 가루가 되는 것 같아. 할 수 없는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갈리는 거야. 그냥 가루 먼지가 되는 것 같아." 이미 오랫동안 진행된 생각이 밖으로 튀어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내가 무서워하는 유일한 건 '평범한 삶'이라는 두 단어야."


네드라는 이 책의 중심인물이다. 말하자면, 바이러스의 첫 감염자와도 같았다. 인생에서 일상의 무게를 가볍게 여겼으며, 그것을 등진 채 무책임한 자유를 추구했다. 그것이 바이러스 감염 징후였다. 작가 설터가 묘사한 부분 중 네드라를 가장 잘 대변한 문장은 내게 있어서 다음과 같다. "그녀는 일기를 쓰지 않았다." 이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충분히 행복하고도 남을 삶을 허투루 날려버린 죄인에 대한 묘사다.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는 인생은 허망하고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 그녀의 삶에는 감사가 없었다. 아픔과 슬픔이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그녀를 빗겨갔기 떄문이었을까.


그녀의 딸이 성인이 된 이후 친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비롭네요. 정말 멋진 삶을 살았네요. 너무나 우월한. 그러나 당신의 삶은 무의미해요. 왜냐하면 그 안에 고통이 없어요. 이따금씩 약간의 슬픔마저 없는 삶이란 결국 뭘까요?"


네드라는 사십대에 죽었다. 찾아온 사람은 몇 안 되었다. 사실 나도 네드라의 죽음에 전혀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마음 한편에선 인과응보라며 타인의 삶을 함부로 판단하고자 하는 내밀한 욕구가 꿈틀거림을 느꼈다.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던 그녀는 무엇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죽기 전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음은 작가 설터가 그녀를 묘사한 부분이다. 그녀가 세속적인 만족을 추구하며 그것이 자유라고 믿어온 삶을 살다가 죽음에 이르기 얼마 전의 상태를 묘사한 부분이다. 아마도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이 부분에 담겨 있지 않을까 한다. "하루하루, 고열같이 솟구치는 감정이나 만족감뿐 아니라 허망함과 공포까지 재료 삼아 그녀는 자신의 삶을 만들어갔다. 나는 고독의 공포를 넘어섰다고, 그건 초월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흥분이 되었다. 나는 그 위에 있고 가라앉지 않을 거야. 이 굴복이, 이 승리가 그녀를 더욱 강하게 했다. 마치 하위 단계들을 다 지나 삶이 마침내 가치 있는 형태를 갖추게 된 것 같았다. 바보 같은 희망과 기대, 꾸민 것 같은 부자연스러움이 사라졌다.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할 때도 있었다. 이 행복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스스로 찾아나서 얻어낸 성취였다. 그보다 못한 것은, 그것이 비록 대체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모두 포기하고 얻은 것이었다. 그녀의 삶은 그녀 자신의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가져갈 수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재앙을 당하여 아파하고 죽어간 숱한 사람들의 절망과 네드라를 위시한 이 가족의 허망함을 저울에 달면 무게는 어느 쪽에 더 나가게 될까. 물론 바보 같은 질문이다. 고통은 비교할 수 없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라도 이 책을 읽고 나면 아마도 나처럼 이런 어리석은 비교를 시도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가벼운 나날과 무거운 나날이 가지는 무게에 대한 철학적인 비교를 말이다.


네드라를 형상화한 것만 같은 이 책의 표지를 매일 보며 이 책을 거의 한 달에 걸쳐 읽어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난 밀레의 만종을 떠올렸다. 곧바로 인터넷에서 그 그림을 찾았다. 한동안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깊은 위로를 얻었다. 오늘도 하루를 살아냈다는 안도감과 또 하루가 주어졌다는 감사함이 있는 삶. 그런 일상을 옆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내며 행복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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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 (양장본) IVP 모던 클래식스 9
짐 월리스 지음, 정모세 옮김 / IVP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나는 회심을 경험했는가, 경험하고 있는가.


짐 월리스 저, '회심'을 읽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리고 슬프게도, 이제 나는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 회심을 경험한 건 아니라는 말에 동의한다. 물론 과거를 뉘우친 적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전에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한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예수를 믿는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인간이기 때문이지, 예수를 믿기 때문이 아니다. 더구나 그건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심도 아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느 날 우연히 듣게 되었거나 작정해서 읽게 되었던 예수의 복음에 비추어 자신의 허물과 죄악을 깨닫고 반성한 적도 있을 것이다. 깨끗한 거울에 비추면 얼굴에 묻은 얼룩이 보이듯,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복음에 자신을 비추어 보면, 자신이 그 동안 내밀하게 숨겨왔거나 의도적으로 무시 또는 회피해왔던 어두운 얼룩, 즉 자기중심적인 자기애나 위선 등의 직간접적인 죄악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과의 조우에서 아주 드물게 벌어지는 현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러한 삶으로부터 돌아서겠노라 다짐한 뒤, 행동이 수반된 결단을 하게 되는 경우다. 흔히 우리는 이 순간을 회심이나 회개라는 단어로 무분별하게 표현하곤 하지만, 짐 월리스는 이 단계를 '회심'이 아닌 '회개'라고 구별한다. 회개는 과거를 정직하게 대면하고 그것에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회심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완전히 돌아서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회심은 회개로부터 시작하는 것일 뿐, 동일한 개념이 아니다. 어디인가로부터 (from) 어디인가로 (to) 돌아서는 커다란 흐름을 회심이라고 정의할 때, 회개는 '어디인가로부터' 돌아서는 (turning from) 첫 과정일 뿐이다. '어디인가로' 돌아서는 (turning to) 과정을 그는 '신앙'이라고 정의한다. 즉, 회심은 회개와 신앙으로 이루어지는, 방향성을 가진 긴 여정인 것이다. 이 책의 제목부터가 '회심'이라는 것과, 저자가 밝히는 이 책의 과제가 "우리의 역사적 상황에서 회심이 의미하는 바를 발견하고, 회심의 성경적 의미를 찾아내어 우리가 마주치는 역사에 적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잡아내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정의하는 '회심'의 의미를 잘 숙지해둘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회심이다"라는 그의 절박한 외침을 한낱 잘못을 깨닫고 그렇게 살지 말아야겠다는 기특한 반성 정도로 해석하는 것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 미래를 향한 비전과 구체적 방향성이 결여된 반성은 그저 의미 있는 인생의 한 점으로만 남을 것이다. 그런 수준은 감동적인 영화 한 편 본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책을 통해 진정한 회심을 말하고 있는 짐 월리스는, 그 긴 여정의 시작이며 이벤트성이 강한 '회개'보단, 예수의 복음과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구체적인 방향을 가진 '신앙'에 중점을 둔다. 이렇게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그가 말하는 회심이 달라스 윌라드가 그의 저서 '하나님의 모략'에서 말했던 '제자도'와 일맥상통함을 간파할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전통적으로 구원 받는 순간이라고 알려져 있는, 소위 '칭의'의 순간이 아니라, (굳이 칭의와 구별하자면) '성화'의 여정에 있는 것이다. 물론 칭의와 성화를 나눈 것 자체가 신학적 장난질이라고 보는 나로선 그 구분에 더 이상 깊은 의미를 두지는 않지만 말이다. 달라스 윌라드가 우리에게 예수의 진정한 제자가 될 것을 요구했다면, 짐 월리스는 이 책을 통해 진정한 회심을 촉구한다. 둘은 서로 강조하는 면이 다르고 현실을 관찰하고 적용하는 부분이 다르다. 그러나 둘은 모두 예수와 하나님나라로 모인다. 그렇다. 제자도나 회심이나 결국은 깨닫고 반성하는 과거의 이벤트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이기 쉬운 경험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의 공적인 삶으로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백성으로서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것에 방점이 있는 것이다.


달라스 윌라드가 그의 저서에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과 제자도를 오해했다고 한탄하는 것처럼, 짐 월리스는 이 책에서 복음주의자나 자유주의자 할 것 없이 모두 시대를 향한 회심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허둥대고 있다고 말한다. 회심을 강조해왔던 미국 교회의 강점이 실제로는 회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터무니 없이 낮은 이해도로 말미암아 가장 커다란 약점이 되었다며 그는 냉철하게 관찰 결과를 정리한다.


그는 복음주의권에서 자라난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어릴 적 역사적 실체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진공 속 '구원'을 받았으며, 그때의 회심은 개인적이고 추상적이었다고 고백한다. 이어서 그는 교회 안에서의 그러한 개인적인 습관과 관행에 초점을 맞춘 회심이 아닌, 오히려 디트로이트에서 벌어진 인종주의의 잔혹한 실체와 대면하면서부터 좀 더 깊은 회심이 시작되었다고 회고한다. 사적인 복음, 그리고 사회성과 역사성이 결여된 진공 속 복음은 회개를 일으킬 수 있는 하나의 요소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그 이후에 반드시 찾아올 삶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진정한 회심으로 이어지긴 어렵거나,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복음의 공공성이야말로 우리에게 복음을 주신 하나님의 원래 의도가 보다 잘 녹아있는 부분이며, 복음이나 하나님나라, 그리고 교회라는 개념 자체도 원래부터 개인이 아닌 공동체에 주어졌음을 상기할 때, 짐 월리스가 고백한 '깊은 회심의 시작'은 어쩌면 그가 경험한 '첫 회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우리들은 과연 진정한 회심을 경험했는지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


짐 월리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문제에 관심이 지대하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존재 자체가 세상 속에 있다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을 직접 살아내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다. 알다시피 그는 워싱턴 D. C. 에 터전을 잡고 있는 소너저스 공동체를 시작한 사람이다. 급진적인 복음의 실천가로서 그의 통찰은 예언자적인 목소리가 되어 이 시대에 부의 축적과 평화를 위한 폭력의 이면에 놓인 미국과 부유한 나라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찔림을 주며, 쓰지만 꼭 필요한 목소리로 자리매김했다.


이 책에서 제공되는 성경 해설과 시대의 분별은 모두 그가 소너저스 공동체로부터 나온 역사적 실체를 배경으로 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목소리에는 특별히 강한 어휘나 표현이 없지만,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이 움직이고 깊은 울림을 주는 힘이 있다. 도저히 빨리 읽을 수가 없는 책이었다. 나는 거의 한 달 동안 이 책을 천천히 읽으며 많은 묵상을 하면서 읽어낼 수밖에 없었다.


나는 1981년에 출판된 초판이 아닌, 그로부터 24년 후인 2005년에 출판된 개정판으로 읽었다. 알다시피 저자의 통찰은 책상 위가 아닌 역사적이고 사회적 실체인 삶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것이다. 그리고 초판과 개정판 사이의 기간에는 9.11 테러가 있었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있었다. 전쟁과 평화라는 쟁점을 다룬 부분에 있어서 그는 개정판을 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그 사이에 트럼프 대통령 당선이 있었다면, 아마 개정판을 내는 데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되어주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미국 기독교 우파의 움직임과 행태 이면에 놓인 타락은 회심을 더욱 필요로 하는 상황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을 막론하고 회심에 대한 신학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회심만이 유일한 소망이며 예수의 제자도를 살아내기를 촉구한다.


이 책은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위에서 언급했던 회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풀어주는 1장 '부르심'을 지나면, 2장 '배반'을 맞이한다. 저자는 여기서 말뿐인 기독교, 공공성이 사라지고 자기중심적인 자기애를 옹호하며 복음을 사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린 현대 그리스도인의 실상을 파헤친다. 구약 성경을 이루는 커다란 두 축인 정의와 공의가 사라져버린 일상, 예수가 증발해버리고 자본주의와 맥을 같이하는 기독교의 변질을 고한다. 그는 복음 전도에서 죄와 구원의 사회적 의미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참된 복음 전도는 개인사에 대한 회개뿐 아니라 우리의 집단적 역사에 대한 회개를 점화할 것이기 때문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회심하는 것은 개인적 이기심과 문화적 무지를 모두 극복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두 가지 중요한 질문, 즉 가난과 폭력에 대해 그 실체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 주제에 대한 성경의 내용을 이끌어와서, 그러한 문제들과 관련하여 회심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탐구한다. 우리는 여기서 짐 월리스가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이 두 가지에 압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의 화두가 혐오, 배제, 차별이라는 죄악에서 돌아서서 여호와의 정의와 공의를 회복하는 것에 있다고 할 때, 가난과 폭력은 핵심적인 양날개를 이루는 직접적인 현장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우리 시대에 성경적 회심이 회복될 것인지, 그렇다면 어떻게 회복될 것인지를 결정할 중요한 요인들이라고 그는 확신한다.


3장 '불의'에서는 가난과 빈곤, 그리고 가난과 빈곤을 착취하여 반대급부로 축적된 부요함의 물리적 실체와 그 이면에 깔린 영적 실체를 진단 및 보고한다. 성경은 가난을 개인의 무능력이나 잘못의 결과가 아닌, 부요하나 완악한 자들의 억압으로 이루어진, 소위 '합법적인' 제도와 구조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본다. 성경은 자주 반복하여, 가난한 자들이 겪는 착취와 고통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를 맘몬에 대한 예배로 대체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가난에 대한 무게중심은 가난한 자가 아닌 부요한 자에게 있는 것이다. 짐 월리스는 미국의 관대함과 자유주의적 국외 원조에 관한 모든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세계 자원의 흐름은 가난한 나라에서 부유한 나라로 지극히 일방적으로 향하고 있음을 고발하고 있으며, 역사를 통틀어, 부유한 자들은 자신의 번영이 다른 사람의 빈곤에 기초한다는 점을 이해하기 어려워한다고 보고한다. 그리고 올바른 질문은 "우리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줘야 하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언제쯤 가난한 자들로부터 빼앗기를 멈출 것인가?"라고 말하며, 가난한 자들이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그들의 문제라고 역설한다.


모든 사람이 우리의 생활 기준으로 살 만큼 충분한 자원이 있다거나, 우리는 열심히 일한 데다 신의 은총을 받아서 부유하다거나, 가난은 가난한 자들의 실패 때문이라는 생각은 모두 가난한 자로부터 강탈하는 것을 정당화하려는 체제가 고안해 낸 무자비한 신화일 뿐이라고 그는 비판에 날을 세운다. 청지기의 책임을 부여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역할을 감당하는 대신에 착취자가 되어왔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우리 시대의 회심은 가난한 자들을 해방하고 눈먼 자들을 다시 보게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가난한 자들에게는 정의가 필요하고 부유한 자들에게는 시력 회복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또한 그는 가난한 자들과 우리를 동일시하길 요구하며, 그들을 위한답시고 의도적으로 가난한 체한다거나, 그들에게 말하거나 가르치거나 심지어 일방적으로 도우려는 자세보다는 우리 스스로를 그들의 말을 듣고 변화될 자리에 놓아두라고 제안한다. 가난한 자들의 존재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있으라는 것이다. 이 방법만이 가난한 자들에게 부유한 자들이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라면서 그는 소저너스 공동체가 경험한 바를 증거한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회심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그리고 가난한 자들과의 교제를 위해 우리 재물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이다.


전쟁과 폭력, 그리고 전쟁과 폭력으로 이룩한 평화 속에서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들의 실상에 대한 짐 월리스의 성찰은 제 4장 '위험'에서 잘 드러나있다. 전쟁과 평화라는 문제를 그는 단지 정치적인 문제만이 아닌 신학적인 문제라고 말한다. 전쟁과 평화는 완악한 마음에 기인하는 것이며, 성경적으로 말해서 완악한 마음은 고의적으로 악을 행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을 상실한 상태에 가깝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 마음의 완악함에 대해 성경이 처방하는 해독제는 바로 회심이라고 역설한다. 결국 마음을 부드럽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것뿐이라는 말이다. 선악을 자신의 유익에 따라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마음껏 판단하는 행위는 소위 '원죄'라고 불리는 사건의 열매다. 그 열매를 따먹은 우리 인간들은 완악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었고, 폭력을 쉽게 휘두를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해석을 전제할 때, 회심이 해독제라는 그의 말은 곧 회개를 시작으로 하여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 이루어진 과정 중에 맺힐 열매라는 의미일 것이다. 예수의 산상수훈의 가르침에서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평화를 만드는 자들로 부르심을 입었다. 그러므로 회심한 자들은 사적인 평안을 유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공동체의 평화를 만드는 자들로 알려져야 할 것이다. 짐 월리스는 이웃에 대한 긍휼의 갱신을 포함한 회심이야말로 평화로 가는 단 하나의 영속적인 길이라고 설파한다. 가난한 세상에서 회심이 가난한 자들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듯, 폭력과 보복적 폭력의 세대에서 회심은 수많은 희생자의 인간적 실제성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며, 각각의 경우 회심한 사람은 바로 인간 고통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자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 회심한다는 것은 희생자들에 대한 긍휼을 갖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곧 우리 마음에 자기자신만이 아닌 타인의 인간적 고난을 짊어지는 것이다.


가난과 폭력에 대한 우리들의 물리적 영적 실체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한 이후, 예수의 복음과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방향성을 인지하고 신앙생활을 해나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요소는 바로 공동체다. 제 5장 '비전'에서 짐 월리스는 기독교 공동체, 즉 교회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인다. 교회가 교회되도록, 다시 말해, 말과 글만 앞세우거나 개인의 평안과 구원만을 추구하는 사적인 공간이 아닌, 그렇다고 정의를 부르짖거나 세상에 저항하는 행위만 강조하는 집회 공간도 아닌, 코이노니아, 곧 단순히 교회가 되어 서로 사랑하고 세상을 위해 자신의 삶을 제공하라는 부르심에 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교회가 교회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신앙공동체의 성경적 정체성과 소명을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정체성과 소명을 깨달았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진 않는다. 생각과 성격이 다양하고 다채로운 인간들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간단한 이유만으로 교회의 역사는 배교한 교회로부터 참된 교회가 되겠다며 갈라져 나와 또 다른 배교한 교회의 유형을 더 많이 만들어내는 악순환의 구조를 이루어왔다. 새로운 교단과 분파를 만들어내는 것은 한계를 가지는 것이다. 짐 월리스는 여기서 교회를 향한 새로운 비전을 말하는 일에 더 힘을 쏟는다고 한다. 교회들에게 성경과 그들의 전통에 있는 갱신의 씨앗에 대해 짚어주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역사 한가운데서 예수를 높이는 데 실패하고 회중 가운데 분쟁만 일으켰던 이유를 사랑의 실패에서 찾는다. 올바른 것을 깨달아도 그것을 상대방을 향한 비난과 정죄의 무기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사랑이 없다. 그는 성경의 예언자들이 신랄한 말을 쏟아냈음에도 그들은 그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행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면서, 교회를 향한 우리의 소망도 교회를 향한 사랑에 근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로 용서와 겸손을 겸비한 예수의 사랑 말이다. 또한 급진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그저 견디며 살아내는 것이 아닌 경축하는 일상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그러기 위해선 바로 서로에 대한 사랑의 활력이 핵심이라고 말한다. 경축의 소망과 기쁨이야말로 우리의 저항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며, 세상과 반대로 사는 삶이 초래하는 냉소주의, 신랄함, 증오로부터 우리를 구해낼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사랑이 전제될 뿐 아니라 경축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으로써 하나님나라를 지속하며 살아내기 위해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짐 월리스는 그것이 바로 '예배'라고 답한다. 급진적인 복음의 실천가인 그가 내놓은 답이 '저항'이 아닌 '예배'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제 6장 '근원'에서 그는 예배와 저항의 관계를 나무 뿌리와 그 가지들의 관계에 비유한다. 회심은 언제나 우리의 뿌리, 곧 우리의 첫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함한다고 하면서, 회심에 대한 모든 시험은 우리가 누구인지와 누구에게 속했는지를 기억하는지 시험하는 것이라고 재해석한다. 예배는 우리를 망각에 빠지게 하는 모든 상황 한가운데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기억하는 것이며, 예배는 다름 아닌 우리의 뿌리를 다시 떠올리는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예배가 전제되지 않으면 우리의 정체성과 사명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교회가 교회될 수 없으며, 그렇게 되면 가난과 폭력에 휘둘리는 세상 속에서 거스르기는 커녕 함께 떠밀려가면서 세상과 우리 자신에게 아무런 변화를 일으킬 수가 없다. 회심도 그저 사적인 회개 정도로 끝나버릴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즉, 회개로 시작한 회심을 신앙으로 지속하며 하나님나라로 살아내기 위해서 예배는 그 모든 삶의 중심에 놓여야 한다는 말이다. 예배하는 중에 우리는 정체성과 사명을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모든 공적 저항 활동이 사랑과 진리의 능력 가운데 뿌리를 두어야 함을 깨달을 수 있다. 또한 예배는 우리의 목표가 비폭력적인 진리이지 권력이 아니라는 점도 기억나게 해주는 장소이며 우리 안에 있는 우상들에 직면하게 해주어 결국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더 많은 것을 주장하게 만들어주는 공간이다. 가장 깊은 의미의 회심은 예배를 통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기쁨, 평화, 사랑 등의 성령의 열매로써 하나님백성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가시적인 신앙공동체, 악과 불의에 저항하는 공동체, 그러나 기쁨과 찬양과 사랑의 경축을 지닌 공동체. 바로 교회의 모습이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 장인 7장 '승리'에서 짐 월리스는 진정한 회심을 한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궁극적 승리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당연히 인간이 정의하는 힘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상징되는 예수의 승리다.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를 개인적 죄에서 자유롭게 할 뿐 아니라, 이 세상의 권력에서 해방되게 한다. 그러한 권력들과의 관계로부터 자유롭게 사는 것, 곧 그들로부터 도덕적으로 독립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십자가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진리는 부활로써 보증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로 가까이 가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고난 받는 종의 정치적 입장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그 정당성을 입증 받은 입장이었다고 하면서, 회개하고 새로운 실재를 믿는 것이 회심의 본질이라고 역설한다.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사랑으로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바보들의 존재. 바로 개별적인 그리스도인과 교회 공동체의 가시적인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짐 월리스는 경계에 선 그리스도인이다. 우익복음의 눈에는 급진적인 좌파로 보일 것이며, 좌익복음의 눈에는 여전히 보수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우파로 보일 것이다. 실제로 소저너스 공동체를 만들고 그들과 함께 살아내는 모습은 좌파라 할지라도 그 누구도 실제로 일상에서 쉽게 해내지 못할 삶이기에 그는 확실한 좌파다. 그러나 여전히 회심의 핵심을 회개와 신앙으로, 신앙의 핵심을 예배로, 예배를 통해 정체성과 사명을 유지할 수 있다고 설파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아직도 보수진영의 그물에서 허우적대며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기에 그는 우파로 보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경계선상의 위치가 어쩌면 오히려 그를 예언자적인 목소리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익의 복음도 좌익의 복음도 아닌 하나님나라 복음. 짐 월리스를 통해 뭔가가 정리되는 기분이다. 말과 글이 언제나 몸을 앞서 나가는 삶을 살고 있는 나에게 이 책은 하나의 도전이 되어줌과 동시에 방향을 제시해 준 듯하다. 돌아서서 살아내는 하나님나라. 다시 가슴이 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49?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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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믿음의 글들 240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강유나 옮김 / 홍성사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웅깃’에서 ‘프시케’로 (각색한 신화에서 복음을 추출하다).


C. S. 루이스 저,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를 읽고.


난해한 이 소설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유명한 그리스로마신화, ‘큐피트와 프시케’ 이야기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루이스가 그 신화를 각색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신화에서 ‘에로스’로 알려진 사랑의 신 큐피트는 미의 여신 비너스 (헬라어로는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다. 어느 날 비너스는 인간들이 자신에게 경배하러 오는 발걸음이 갑자기 줄어든 원인을 알게 된다. 인간세상의 세 공주 중 막내인 프시케의 아름다움 때문에 인간들은 굳이 비너스를 찾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비너스는 금새 질투와 분노에 휩싸였다. 그래서 아들인 큐피트에게 세상에서 가장 추한 존재와 프시케가 사랑에 빠지도록 화살을 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큐피트는 프시케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진다. 그래서 어머니의 명을 어기고 술수를 써서 인간들로 하여금 프시케를 희생제물로 바치게 만든 다음, 구해준 뒤, 밤마다 그녀를 찾아와 사랑을 나눈다. 


프시케는 두 언니가 보고 싶었다. 큐피트는 그녀를 믿고 두 언니와 만나게 해준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생이 살아있을 뿐 아니라 너무도 행복하게 보여서 언니들은 프시케에게 질투까지 느낀다. 남편의 얼굴조차 한 번도 보지 못한 프시케에게 등불을 주면서, 밤에 남편이 잠들었을 때 몰래 불을 밝혀 얼굴을 확인해 보라고 권한다. 절대 자신의 얼굴을 보지 말라고 했던 남편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프시케는 그만 언니들의 요구에 응하고 만다. 그러나 괴물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언니들의 의혹에 동조한 것은 완전히 틀린 판단이었다. 잠들어있는 남편은 괴물이기는커녕 너무나 아름다운 남성이자 신이었던 것이다. 그때 등불에서 기름이 큐피트의 어깨로 떨어졌고, 그는 깨어나자마자 분노와 배신감에 자리를 뜬다. 죄책감에 프시케는 방랑을 시작하며 큐피트를 찾아 나선다. 결국 비너스에게까지 이 사실이 알려지고 프시케는 비너스의 계략에 속수무책으로 넘어가게 된다. 불가능한 일임에도 여러 존재들의 도움으로 비너스가 내준 과제를 거의 완성하게 될 무렵, 마지막 과제에서 그녀는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열어서는 안 될, 페르세포네로부터 받은 '아름다움의 묘약' 상자를 열어보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정신을 잃는다. 그때 큐피트가 나타나 그녀를 구해주고, 곧장 제우스에게 날아가 프시케와 합법적인 결혼을 성사시켜달라고 부탁한다. 그리하여 프시케는 신이 되고, 둘은 happily ever after 살았다는 이야기다. 


프시케의 철자는 Psyche. 영어로 "사이키"라고 읽는 이 단어는 마음, 정신, 영혼을 뜻하는 단어다. 우리가 심리학 (Psychology), 정신의학 (Psychiatry), 또는 정신병자 (Psycho) 등의 용어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접두어로도 쓰인다. 그렇다. 눈치 챘겠지만, 프시케는 '영혼의 신'이다.


루이스는 이 신화를 차용하여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왜 하필 신화를 이용하여 기독교 세계관을 반영하는 작품을 만들려고 했을까? 이 책을 읽고 해석하려고 시도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의도는 정확히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부분적인 답이라도 얻기 위해서는, 적어도 루이스가 신화에서 각색한 부분이 어디인지 아는 것이 힌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말'에서 직접 밝히듯, 루이스는 제물로 바쳐진 프시케가 큐피트에 의해 구해진 이후, 그리고 프시케가 두 언니들의 의혹에 넘어가기 이전, 잠시 동안 인간 프시케와 신 큐피트가 사랑을 나누었던 아름다운 궁전을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게 바꾸어놓았다 (신화에서는 보였다). 그리고 신화에서의 두 언니는 프시케 만큼은 아니지만, 아름다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의 화자, 그러니까 맏언니인 오루알 공주는 자타가 공인하는 추녀다. 신화에서는 두 언니가 큐피트에 의해 죽음을 면하지 못하지만, 이 책에서 두 언니는 죽지 않는다. 한 가지 더,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있지만, 이 책에서의 중심은, 오루알 공주의 일인칭 시점으로 이 책이 구성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듯, 인간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루이스의 상상력의 무게중심은 오루알 공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인간관계에 있다고 봐야 한다. 이 책은 신화를 각색했지만, 인간이 주인공이 되어버린 이야기인 셈이다.


불행하게도 이렇게 각색한 부분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이 책은 여전히 난해하기만 하다. 우선 제목부터 착 와 닿지 않는다.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라는 제목에서 과연 누가 이 책의 의도를 알아챌 수 있을까. 혹시나 해서 영어 원문을 찾아봤다. 'Till we have faces'. 똑같았다. 허무했다. 그러나 포기하긴 일렀다. 나는 '얼굴'이라는 단어가 신화와 이 책에서 어느 부분에 등장하는지를 살펴보았다. 먼저 신화에서는, 큐피트가 프시케에게 자기 얼굴을 보지 말라고 부탁하는 장면, 그래서 프시케는 호기심에도 불구하고 무슨 뜻이 있겠거니 하며 두 언니들의 의혹을 접하기 전까지는 남편의 얼굴을 감히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부분이다. 이 내용은 이 책에서도 똑같다. 프시케는 오루알 공주를 만나고 등불을 건네 받은 뒤에서야 한 밤중에 불을 밝혀 큐피트의 얼굴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에선 '얼굴'에 관계된 중요한 한 가지를 루이스가 추가시켜 놓았는데, 그것은 오루알 공주가 프시케를 두 차례나 만나고 난 후 궁전으로 돌아와서는 항상 베일을 쓰고 다니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 이전까지는 자신이 추녀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맨 얼굴로 다녔었는데, 그 날 이후 이 책을 회고록 형태로 쓰기까지 오루알 공주는 항상 베일을 쓰고 다니게 된다. 즉,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자기 얼굴을 숨기는 행위는 곧 자신의 신분이나 정체를 숨기는 행위다. 다시 말해, '얼굴'의 의미를 '정체성'이라고 해석한다면, 기독교 세계관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제서야 드디어 해석의 실마리를 한 가닥 잡았다는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기독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묻고 답해가는 과정, 동시에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가 누구신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을 해나가는 과정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서 중추적인 부분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해석은 '정체성'이라는 키워드로 접근해야, 이 책의 이면에 숨겨진 루이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책의 말미에 가서 오루알 공주는 꿈과 이상을 보게 되는데, 여러 상징적인 사건들의 급전개가 펼쳐진다. 이 책을 난해하게 만든 주요인으로 작용하는 부분이다. 이상 중 하나가 '얼굴'에 관계된 것인데, 화자인 오루알 공주가 신들에 대한 고소장을 열두 번은 족히 반복해서 읽으면서 스스로 대답을 얻고 난 후, 그 깨달음을 고백으로 적어놓은 부분이다. 이 책에서 루이스의 의도를 가장 잘 드러내는 문장이라고 보여진다. 다음과 같다. "나는 신들이 우리에게 드러내놓고 말해주지도 않고 우리 스스로 대답을 찾지도 못하게 하는 이유를 잘 알게 되었다. 이렇게 자기 중심에 무슨 말이 있는지 찾아내지도 못한 상태에서 이게 내 말의 의미입네 떠드는 소리를 신들이 뭐 하러 귀 기울여 듣겠는가? 우리가 아직 얼굴을 찾지 못했는데 어떻게 신과 얼굴을 맞댈 수 있겠는가?" 


이 깨달음을 얻기 직전까지 오루알 공주는 자신이 회색 산의 신인 '웅깃'이라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오던 차였다. 자신의 정체성을, 얼굴이 없으며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존재인 웅깃으로 인식하려던 차였다. 자신이 유일하게 신뢰하고 사랑했던 프시케와 바르디아, 그리고 여우 선생까지 잃은 이후, 그 동안 스스로는 사심 없는 '사랑'이라고 여겨왔던 믿음 혹은 신념이나 감정이, 실제로는 자신을 위해 상대방을 소유하려는 욕심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던 시기였다. 자신이 웅깃이라는 것은 자신의 영혼이 웅깃처럼 추하다는 의미였다. 탐욕스럽고 피에 굶주렸다는 뜻이었다. 그렇다. 자신이 웅깃이라는 오루알 공주의 그 깨달음은, 소유하려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진리를 비로소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신들을 고소하다가 자신도 몰랐던 숨겨진 정체가 탄로나고 고소당한 순간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타락한 영혼을 맨 얼굴로 대면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불완전한 것이었다. 여우 선생의 유령과 함께 여신이 된 프시케를 만나게 되고, 오루알 공주는 프시케에게 자신의 이기적인 사랑을 토로하며 용서를 구한다. 그런데 프시케는 저승의 여왕에게서 받아온 아름다움의 상자를 그녀에게 내민다. "웅깃을 아름답게 해 줄 아름다움을 가지러 먼 길을 다녀온 걸 알잖아요"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오루알 공주는 수면 위에 비친 두 명의 프시케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 그 중 하나는 놀랍게도 자신이었다. 이어서 신 중의 신이 나타나 오루알 공주에게 말한다. "너 또한 프시케가 되리라." 이 말을 듣고 오루알 공주는 꿈인지 이상인지 모를 상태에서 깨어난다. 그녀는 풀밭에 쓰러진 채 사람들에 의해 발견된다.


책의 마지막 문단에서 오루알 공주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나는 첫 번째 책을 신들에게는 대답할 말이 없다는 말로 끝냈다. 주여, 이제는 당신이 왜 대답지 않으셨는지 압니다. 당신 자신이 답이십니다. 모든 질문은 당신의 얼굴 앞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다른 무슨 대답을 들은들 만족하겠습니까? 다 말, 말뿐입니다. 다른 말들과 싸우기 위해 끌어내는 말. 오랫동안 저는 당신을 미워했고, 오랫동안 당신을 두려워했습니다. 이제는...."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 책의 화자, 오루알 공주는 자신의 이기적이고 소유하려는 사랑을 깨닫게 되고 자신의 정체가 웅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신은 그녀가 웅깃이 아니라 또 하나의 프시케임을 알려준다. 프시케를 통해 아름다움의 상자를 받아 아름다워지는 신비의 과정을 통해서 말이다. 신화와는 달리 이 책에서의 상자는 프시케에 의해 몰래 열리지 않았으며, 그대로 오루알 공주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그 상자 덕분에 오루알 공주 역시 아름다워진다. 웅깃이 아닌 프시케로의 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다. 오로지 프시케를 통한 신의 도움 덕분에. 마치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처럼.


웅깃에서 프시케로의 transformation. 나는 ‘얼굴을 찾는다’는 의미를 자신의 ‘죄된 속성을 진실되게 깨닫는다’는 뜻으로 해석해본다. 칼빈의 전적 타락 교리와도 어울리는 이 해석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이 타락하여 구제불능이라는 영적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해석도 가능하게 만든다. 즉,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라는 제목의 숨은 뜻은 ‘인간이 자신의 타락함을 진정으로 발견하기까지’라고 풀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진정한 회개 없는 구원은 값싼 은혜와도 같아서 화재 보험 같은 정도의 의미로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달라스 윌라드가 말했던 ‘바코드 신앙’과도 일맥상통한다. 루이스는 신화를 각색한 이 난해한 소설을 통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진정한 회개를 매개하여 강조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우리의 정체성은 일차적으로는 웅깃처럼 더럽고 추악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룩한 하나님백성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22?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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