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조지 오웰 지음, 이기한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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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1984>를 다시 읽으면서 예전에 읽은 아서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이 다시 생각났다. <1984>의 해설을 적은 비평가의 글에서도 쾨슬러의 소설을 언급했지만, 사실 나는 <1984>의 마지막 모습에서 <한낮의 어둠>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소비에트가 일국사회주의가 거의 완결될 됨 1936~1938년 대대적인 숙청기간이 지속된다. 모스크바재판의 4차례는 수많은 희생자들을 남기고, 당시 스탈린에 의해 죽은 자가 수백만이란 말도 있고, 수천만이란 말도 있다. 러시아인구의 엄청난 비율이 당시 스탈린이 자행한 공포정치에 의해 지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죽은 자 중에서 특히 많았던 것이 반() 사회주의자 내지 반() 볼셰비키주의자라는 점이다. 반대되는 세력이 자국에 있어서 스탈린과 그의 수하들은 부지런히 자신들의 적을 찾으러 다녔다. 문제는 그 많은 적들이 과거에 볼셰비키혁명에서 활동하던 자라는 점이다. 스탈린은 볼셰비키혁명 이전부터 레닌과 같이 활동했지만, 사실 그가 혁명 당시 관여한 것은 트로츠키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혁명 이후 각종 상급기관의 위원회로서 참여했지만, 레닌이 죽고 나서부터는 서기장으로서 권위를 보여준다.

 

이때부터 스탈린은 자기에게 가시 같은 존재 혹은 가시처럼 될 수 있는 존재, 더 심하게는 자신에게 충성했으나 뭔가 자신하고 동질의식을 느낄만한 자는 모조리 죽이기 시작한다. 아서 쾨슬러의 소설인 <한낮의 어둠>은 회의적이고 암울한 사실적인 작품이다. 루바쇼프라는 볼셰비키혁명가는 볼셰비키 내에서 상당히 공적이 높았지만, 감옥에 수감되어 고문과 심문을 당하고, 차가운 복도를 걸어가는 도중 간수의 손에 죽게 된다. 그때 처형방법이 앞을 걸어가는 죄수의 목덜미에 권총을 사격하는 것이다.

 

<1984>를 예전에 읽을 때, <한낮의 어둠>을 읽기 전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 책을 읽은 후에 <1984>를 보면서 스미스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스미스의 죽음은 영락없이 <한낮의 어둠>에서 나오는 루바쇼프의 죽음과 같게 나온다. 단지 차이는 루바쇼프는 변해버린 혁명적 가치를 보면서 회의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자신의 의지를 버리지 않은 반면, 스미스는 혁명적인 사고를 모두 버리고, 오로지 빅브라더에 대한 환희를 가지고 마감한다. <1984>에서 스미스를 감시, 고문, 회유하는 오브라이언의 대사가 끔찍한 이유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마음에서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이다.

 

오브라이언의 말과 스미스의 최후에서 스미스는 먼저 총살 전에 어리석은 군중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그러나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죽은 자들의 기록을 보면 다르다. 당시 죄인들은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짓는 것보다 가난과 부조리한 모순에 의해 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교수형의 행어 앞에 갈 때, 도부수가 있는 처형대로 갈 때 그들은 자기의 불운한 인생을 이야기하고, 군중들은 거기에 호감을 보내고, 때로는 죄수를 구해내어 도주까지 시킨다. 죄에 대한 심판이 결국 그 죄에 대한 재판이 국가적인 권력만이 아니라 세상의 여론이 뒤따른다. 만약 국가의 심판이 틀리고, 세상의 여론과 하다못해 후대의 역사적 평가가 다시 재기되어 죽은 자의 명예가 되살아난다면 그들의 죽음은 단순히 죄인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순교자로서 죽게 된다.

 

그들의 죽음은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지만, 결국 그 죽음은 잘 못된 것이었고, 그들은 자신의 신념과 행동이 틀리지 않은 것을 인정된다. 하지만 <1984>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 애정부라는 고문과 처벌을 담당하는 기구는 스미스의 그런 정신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죄인에게 자신의 죄를 끝까지 인정하여 그 사회와 국가, 심지어 군중들 사이에서 죄를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모든 것은 반항과 저항한 자가 잘못한 것으로 돌아가고, 그것을 저지른 자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여 그 사회와 국가가 오히려 정당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런 주장 후에 죽음은 국가도 개인도 사회도 군중도 비참하지 않게 다가온다.

 

오히려 비참하지 않게 되는 것이 더 비참한 현실이 되나, 그들은 비참하다는 개념조차 잊을 것이다. 분명 전에 어떤 일이 있었지만, 돌아보니 그 일은 없었고, 다시 새롭게 조작되어 역사는 실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조작에 의해 탄생된다. 언어는 구어인 영어에서 신어로 전이되면서 인간이 말할 수 있는 단어는 한정적으로 줄게 되고, 인간의 사고능력을 축소된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군주, 그 중에서 참주는 대다수의 인민들의 빈곤과 비참함으로부터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1984> 역시 그 맥락을 유지한다.

 

권력자들이 권력을 유지하는 것은 오로지 권력을 위해서이며,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은 하층민들의 가난과 무지로부터 시작된다. 가난하면 오로지 동물적 욕망에 의해 인간은 작동하고, 무지하면 현재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문제성을 인지하지 못한다. 영국사회주의가 움직이는 오세아니아 대륙에서 당내 직원들끼리 외설적인 행동을 못하게 하나, 그 나라의 85%를 차지하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아주 값이 싸고 저급한 포르노를 풀어놓는다. 그들에게 동물적인 본능만 충족하게 하여 무지가 권력의 힘으로 가는 것을 보여준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이 되는 것은 언제나 적이 필요한 것은 누군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그 권력을 계속 권력으로 이양되려면 외부의 적들을 만드는 것보다 내부의 적들을 만들어야 한다. 게다가 과학 역시 미개한 수준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과학적 사고는 인간의 지성을 확대하므로 인간의 예속은 곧 권력의 자유로 이전된다. 이런 폭력성과 억압이 모든 이유는 그 폭력과 억압이 목적이며, 이로 인해 권력을 여전히 권력만을 추구한다. 텔레스크린으로 통해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그 감시체계는 텔레스크린만이 아니라 인간의 눈으로 이전된다. 땀 냄새가 진동되는 파슨스의 모습은 그 사회의 디스토피아적인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스미스는 의도적으로 타도! 브라더를 실천하려 했다면, 파슨스는 잠자는 도중 잠꼬대로 타도! 브라더를 말한다.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 말은 결국 파슨스의 아이에게 전해지고, 그는 애정부에 끌려와서 스미스와 재회한다. 자식이 부모를 감시하고 고발하는 사회, 빅브라더의 세계는 가족 관계조차 통제하고, 더 나아가 남녀 간의 사랑도 통제한다. 적어도 스미스는 그것을 인지하고 있다. 스미스의 아내는 키도 크고 제법 몸매가 있는 여성으로 나온다. 하지만 스미스는 그녀와의 결혼생활을 적응하지 못한다. 부부 간의 성관계에서 아무런 애정도 느끼지 못한 채 아내는 치마를 올린 채 침대에 누워 마치 인형처럼 천장을 바라본다.

 

아내는 오세아니아의 정부에서 제시한 정치적 이념에 대해 충실하게 따랐으며, 그것은 스미스에게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처럼 느끼지 못하게 만든 과거의 아픔이다. 7년 전에 스미스에게 정부의 감시가 체계적으로 붙은 이유는 아내의 이혼이 원인이다. 스미스 부부의 행동에서 빅브라더의 세계는 그를 고은 시선으로 볼 수 없을 터이다. 하지만 스미스의 감정조차 하나의 과도기에 불과했다. 인간의 성적본능 악제하기 위해 과학자들이 인체에 전기 자극을 주어 성적 욕망을 통제한다는 점이다.

 

권력자들은 피지배계층이 사고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무의식적인 근원조차 거부한다. 그 사회는 애초부터 틀린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따라서 틀린 현상이 있어도 이게 과연 틀린 것인지 아니면 옳은 것인지를 구분조차 할 수 없다. 인간은 생물학적인 존재에서 오로지 사회라는 큰 구조에서 하나의 도구로서 존재한다. 생각할 것도 없고 생각할 필요도 없으며, 생각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이미 며칠 전에 있었던 일상과 뉴스조차 무엇이 있는지 모른 채 끊임없이 조작된 역사와 현실에 살아간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과거는 날조되고, 현실은 왜곡되었으며, 미래는 조작되어간다.

 

게다가 구어의 등장으로 언어의 수가 줄어들기 시작한. 언어의 상실은 개념의 상실이고, 개념의 상실은 사고의 상실이다. 모든 것이 정지된 세계라면 인간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평등만이 존재한다. 모두가 권력 앞에서 복종하고 따르는 완벽한 평등이 말이다. 과도기 시대에 태어난 이들은 그나마 다행일지 모른다. 그 시대에 있었던 문제를 적어도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고문과 심문에 의해 기억이 조작되고, 의지가 상실될 수 있겠지만,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가 했다는 사실을 존재한다. 단지 사실이 타인에게 역사적 사실로 이어질 수 없는 게 비극이다. 아서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에서 루바쇼프를 심문하는 클레트킨은 이성적인 요소가 거의 없다.

 

루바쇼프는 매우 이성적이고 지성이 넘치는 지식인이다. 지식인의 몰락이 필요한 이유는 그 사회에 지식인이 가진 재산인 지식 그 자체가 그 사회의 질서를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루바쇼프는 혁명가로 활동하던 지식인이었기에 스탈린의 눈에는 상당한 가시거리다. 지식인들은 그 사회를 비판할 수 있는 지적능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왜 빅브라더와 오세아니아국가는 골드스타인와 형제단을 빌미로 하여 스미스를 자극했을까? 실제 과거에 있었을 골드스타인, 있지도 않을 형제단의 가치는 자신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내부의 적을 색출하게 만드는 미끼인 셈이다.

 

그런 미끼가 있기에 여전히 빅브라더는 강력한 힘이 있더라도 자신과 자신의 나라에 대항하는 적이 있다는 것을 군중에게 알려준다. 증오 2, 증오주간에서 골드스타인은 솔직히 아무 힘 없는 노인으로 나오나, 오세아니아 정부에 일하는 당원들에게 그보다 더한 무서움은 없는 것처럼 나온다. 골드스타인이 만들었다는 그 책, 원래 토대는 트로츠키의 <배반당한 혁명><1984>를 읽기 전에 다시 정독했다. 스탈린과 소비에트정부의 무능함을 철저하게 밝히는 이 책에서 빅브라더가 가장 적대하는 것은 자신들이 누구인지 생각하고 밝히려는 자들이다.

 

물론 빅브라더의 완벽한 통치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지만, 많은 독재자와 독재자의 마인드를 가진 자들이라면 골드스타인과 스미스를 가장 예의주시할 것이다. 오웰은 프롤에게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지만, 그 힘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을 모른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래서 무지는 힘이 되는 것이다. 오늘 날 우리 사회 역시 무지가 힘을 넘어 정의로 다가온다. <1984> 같은 세계는 되기는 어렵지만, 그런 세계로 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 주변에 도청과 감청, 조작과 은폐 같은 일들이 넘치므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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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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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인류의 역사와 문화가 시작하면서 그 가치를 더해간다. 과거 김용석 교수의 <서사철학>이란 서적을 읽은 적이 있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자라나고 죽을 때까지 절대로 놓지 않은 것들이 이야기다. 즉 스토리텔링이란 것으로 누군가 자신에게 혹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인간에게 즐거움이다. 이야기란 즐거움에서 어느 이야기이든지 와전되거나 혹은 왜곡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나거나 또는 그 일을 만든 사람조차도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할 수 없다. 인간의 뇌란 그 기억력이 한계가 있고, 어느 특이한 영역이 없다면 기억하기 어렵다.


 

그래서인가? 원래 고대 그리스 비극시를 예전에 한 번 읽어본 적이 있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전집을 읽으면서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극시는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대본으로 당시 그리스 사람들이 공연장에 모여 서로 관람했다. 문제는 코러스부터 시작하여 등장인물들의 대화가 인상적이다. 기본적으로 “크로노스의 아드님이시고, 모든 신과 인간의 아버지이신 제우스이시어!” 아마 이 대사가 가장 많이 나올 것이다. 제우스란 존재는 보통 사람이라면 어릴 때부터 듣는다. 내가 제우스를 처음 접해본 계기는 어린이 인형극에서 헤라클레스의 모험을 보여준 것이다.


 

헤라에게 지독한 질투를 받는 그가 헤라의 영광이란 말에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는 인간이면서도 신과 같은 위용과 용모를 가지고 있다. 반신반인(半神半人), 신인지 인간인지 모호한 것인가? 아니라면 둘 다에 속하는 것인가? 그리스의 비극이나 이야기는 결국 인간이 등장해도 그 인간이 인간처럼 보이지 않고, 마치 신이나 신의 손 안에서 놀고 있는 것이다. 흔히 동양에서 부처님 손에서 논다는 말이 있다. 어디에 있든지 인간은 신이란 운명의 굴레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 처음부터 내려진 것이다.


 

그런 숙명적 굴레에서 단순히 나는 <일리아스>를 읽고 스토리를 이해하고 나열하는 게 목적이 아닌 것 같다. 인간에게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인간이 말을 하기 전에 생각하는 게 아니라 말하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누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 것은 높은 설산(雪山) 자락에 어느 작은 돌이 눈을 굴리고 내려와 그게 결국 눈사태로 변하는 이치와 같다. <일리아스>란 바로 그런 눈사태가 일어나는 인간의 이야기다. 일단 누군가의 소개를 보자. 신에서 아테네의 경우 두 눈에서 빛이 나고, 아킬레우스는 준족이고, 투구가 빛나는 헥토르 등등, 그들의 모습이 하나의 캐릭터가 되어 상징성이 되었다.


 

거기에 말을 잘 길들이는 트로이아족, 훌륭한 정강이받이를 댄 아카이오이족을 본다면 특히 그렇다. 왜 신화를 이야기로만 보지 말고 다른 관점으로 보는 것이 옳은 것인가? 사실 <일리아스>라는 작품은 헥토르의 동생 파리스가 메넬라오스의 아내인 헬레네를 데리고 오면서 비극은 시작했다.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왜 종족이나 국민들의 모습을 저렇게 표현했냐는 뜻이다. 그것은 트로이아족은 말을 잘 길들이는 것으로 보면 그들은 육군전이 능한 종족이고, 훌륭한 정강이받이를 댄 아카이오이족은 보병에 능한 종족일 것이란 판단이다.


 

특히 아카이오이족 동맹전사들은 배를 타고 10년 가까이 트로이아족과 전투를 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들은 배를 타고 온 점에서 해상 전에서 백병전을 펼치는 종족일 것이란 점이다. 신화는 그 나라 혹은 그 민족의 이야기다. 물론 신이 진짜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 없다. 종교가 없고, 단지 이신론(理神論)적인 요소를 인정하고, 그 이신론이라고 해도 다신족적인 요소를 보기에 그 당시 사람들이나 지금 사람들과 무척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적어도 <일리아스>에서 말하는 요지는 실제 그 당시 전쟁이 있었는가에 대해 의문이다.


 

실제 그 전쟁이 있었다면 왜 그들은 인간의 전쟁에 신의 모습을 드러나게 했을까? 플라톤 서적 중에 하나인 <국가>라는 책을 아주 예전에 읽은 적이 있었다. 물론 갓 인문학에 발을 들인 시점이라 자세히 이해되지 않았고, 지금은 기억이 한참 남아있지 않지만,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국가>에서 논하고 있다. 인간과 신의 역사에서 황금, 은, 동 그리고 철의 시대가 있다고 말이다.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과거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있다. 그 당시 그리스가 헬라스로 불리던 곳은 철기문화다. 그런데 <일리아스>는 철기문화 이전의 청동기문화다.


 

청동기문화의 특징은 이제 인간의 역사는 정착이 시작된 점이다. 금속의 발전은 과거 석기시대와 다르게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고, 농사를 획기적으로 발달시킬 수 있다. 왜 제우스가 강력한 신인가? <일리아스>에서 모든 전쟁의 운명을 제우스가 가지고 있다. 제우스의 심기가 곧바로 영웅의 죽음과 삶, 죽음 이후 비참한 모욕까지도 말이다. 거기에 참여하는 신은 제우스만이 아니라 헤라, 아테네, 테티스, 포세이돈 등 매우 많은 신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준족의 아킬레우스가 자신의 죽마고우인 파트로클로스 죽음에서 전투를 시작한 지점이다.


 

친구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과 증오 그리고 복수심으로 불탄 아킬레우스가 트로이아의 모든 남자의 씨를 말릴 작정으로 전장으로 뛰어든다. 그의 놀라운 용맹은 신들조차 분노하고 기뻐하고, 아킬레우스가 무참하게 죽인 트로이아의 남자들은 그 인근에 있던 강에 내던진다. 강에 빠진 남자들은 피와 기름을 내뿜으며 하데스의 궁으로 인도된다. 그들의 시체에 냄새가 시큼한 피가 새어나오자 주변에 물고기가 그 흐름을 따라 모인다. 시체를 뜯어먹는 물로기의 모습에서 하신(河神)은 분노한다.


 

아킬레우스를 제압하려던 하신은 헤라의 아들, 불의 대장장이인 헤파이스토스의 힘에 의해 제압된다. 그는 하늘의 신인 제우스에게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고 한다. 강의 신이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일리아스>의 시기는 플라톤이 말하고 있는 동의 시기도 하나, 사실 농업문화가 꽃피우던 시기다. 제우스가 모든 신들 중에 가장 무섭고 위대한 이유는 그가 천둥번개를 던지기 때문이다. 천둥번개를 동반하는 기상현상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적란운에 의한 집중강우, 소용돌이이나 태풍에 의한 기상재앙, 바다에서 폭우를 동반하는 무서운 기상현상이다.


 

번개가 내려치는 것은 비와 바람이 불고 대지를 모조리 초토화시킬 수 있는 힘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옛날에 과학이란 지식은 없다. 과학이라고 믿은 것조차 사실 비과학적인 망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 자체가 하나의 과학이고 정당한 사실이다. 시기적으로 일치하지 않은 만큼 그들의 눈에는 기상이변이 신의 두려움으로 느꼈을 것이다. 번개가 치는 이유는 기상현상이 아닌 신의 분노라고 말한다면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믿었다. <일리아스> 해설 편에서 트로이아전쟁의 기원전 1200~1500년이라 한다.


 

그리고 호메로스를 지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살던 기원전 4~5세기에서 <일리아스>는 하나의 텍스트로 끌고 온다. 1000년이란 시간에서 <일리아스>는 그리스사람들의 삶에 큰 기반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과학적 기술은 아직까지 번개현상에 대해 밝히지 못했고, 제우스는 영원히 위대한 아버지로 남아있다. 바로 이 아버지란 존재에서 우리는 인류학에 대한 기반 요소를 생각해야 하는 점이다. <일리아스>를 보면 재미있는 사실은 등장인물의 이름 그대로를 적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아들, 누구의 손자, 누구의 후손이다. 제일 많이 나오는 것은 아버지 제우스다. 심지어 제우스가 양육하고 제우스가 사랑하고 제우스가 이끌어낸 영웅들에서 <일리아스>는 아버지란 이름이 심하게 강조한다.


 

아가멤논조차 인간의 왕이기도 하나, 그는 아트레우스의 아들로 나온다. 아버지의 이름을 등장시킨 것은 결국 모든 인간, 특히 영웅에게는 아버지의 이름으로가 필수적인 요소다. 아버지의 이름이란 점에서 당시 사회는 남성중심의 권력이고, 남성들은 자신의 권력을 아버지로부터 승계 받는다. 단지 차이나는 부분은 그리스신화 그 자체에서의 모순이다. 가이아는 아들이면서도 남편인 우라노스에게서 크로노스를 낳지만, 그 크로노스와 합세하여 우라노스를 내친다. 크로노스는 낫으로 아버지의 남근을 잘라버리고, 후에 크로노스는 자신의 누이이며 아내인 레아에 의해 제우스로부터 도망친다.


 

신들의 세상에서 제우스가 신의 왕이 되면서 신들의 전쟁은 종결된다. 더 이상 아버지는 아들에 의해 거세당하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때부터 모든 신과 인간의 아버지가 제우스가 된다. 일리아스는 그야말로 신과 신의 전쟁에서 인간과 인간의 전쟁으로 전환되는 신화다. 단지 신은 직접적으로 신과 싸우는 게 아니라 인간을 매개로 하여 싸운다. 직접적인 타격을 주지 않고, 사랑하는 인간에게 행운을 내리고, 미워하는 인간에게 저주를 내린다. 신이 신과 같은 행위를 하는 게 아니라 소심한 소인배로 등장한다.


 

인간에게 위대한 신이 왜 그렇게 인간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있는가? <일리아스>는 신과 인간이 동시에 등장하나, 인간은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비이성적이고 순간적으로 동물과 같은 모습이 나온다. 인간의 왕인 아가멤논이 준족의 아킬레우스로부터 전리품 소녀를 빼앗은 시점부터 신들의 장난이 나온다. 당시 인간의 왕이라면 용감한 전사고, 현명한 지도자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한심하고 어리석은 모습이 나온다. 그런 모습을 나오는 이유는 인간이 의도한 게 아니라 신의 장난이라 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는 행동에 알 수 없는 이유,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에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 신들이 저지른 업적이란 뜻이다.


 

<일리아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무능력한 모습을 보여준다. 신 앞에서 운명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든 발광해도 그 운명의 사슬에서 멈추고 만다. 그리고 인간이 그런 운명 앞에서 죽음을 맞이해도 신과 같은 은총에 길이 명성을 남긴다고 한다. 죽음을 무서워하는 인간이 영생의 영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죽음을 생물학적인 사망보단 하데스의 곁으로 갔다고 하고, 하데스의 신전에 가면 예전에 만난 사람도 만날 수 있다 한다. 인간의 필멸하나, 그 필멸 뒤에 하나의 새로운 영생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신화의 매력적인 요소는 바로 인간의 필멸과 영원성에 대한 갈등이다. 신이란 죽지 않고 영원한 불사신이나, 인간은 죽는다. 그런 신이 인간에게 부조리한 장난이 거는 것은 인간은 태어나면서 그 부조리에 의해 생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전쟁을 보면 그들의 모습을 잘 알 수 있다. 펠로폰네소스전쟁사에서 많은 그리스 전사들은 전투 중에 죽는다. 그들의 죽음은 비참하지만, 그보다 더 비참한 것은 그들의 무구를 빼앗기는 것이다. 전쟁영웅의 무구를 빼앗아 가는 것만큼 치욕적인 일은 없다.


 

아킬레우스가 친구에게 자신의 무구를 맡겼는데, 친구는 저승에 가고, 그 무구들은 헥토르가 챙긴 시점에서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이성을 빼앗을 정도다. 오로지 어머니 여신 테티스의 음성만이 그의 마음을 안정케 하고 복종하도록 만들었다. 친구의 죽음 앞에 복수하지 않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고, 죽음이 앞을 내려 보고 있어도 혼자 도망치는 것은 전사에게 치욕적인 일이다. 날카로운 무기에 의해 베고 찍혀 죽는 것은 잔인하고 비참한 결말이다. 그러나 전사는 그 죽음 앞에서 당당해지는 이유는 자신의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게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는 이유는 자신의 행동에 의해 아버지에게 누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이미 크로노스의 아들인 제우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내친 불효자다.


 

그런 불효자를 아버지로 여기는 인간에게 신의 존재는 분명 바뀐 것이다. 신은 인간을 돌고 있지만, 그런 신의 존재는 인간에게 자연현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봄이 오면 싹이 트고, 여름 오면 성장을 하며, 가을이 오면 열매를 맺고, 겨울이 오면 죽음이 도래하여 다시 봄이 온다. 하데스의 신전에 갇힌 데메테르의 딸인 페르세포네를 보면 안다. 그녀가 오는 시점은 농경사회에서 농사를 짓는 시기고, 그가 하데스의 궁에 갇히는 것은 농사를 할 수 없는 시기다. 인간이 보는 자연의 신이 숨 쉬는 세계인 것이다. 그래서 제우스가 모든 아버지로 되는 이유는 농경사회와 고대국가의 설립이다.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모든 왕들이 보여주는 대인이다. 대인이란 각 마을이나 소국가의 추장이나 왕이 자신의 재산을 모아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선물과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다. 그들이 주는 선물은 많은 동맹군을 만들고, 많은 이들에게 충성과 사랑을 보장받는다. 아가멤논이 주둔한 병사들은 각각 동물들을 잡고, 고기와 술로서 마음을 달랜다. 이때 모두가 만족할 때까지 음식을 돌아가고, 그것은 모두 공평하게 만족하는 수준까지 제공했다는 점이다. 계급이 왕인 자가 최고의 전사고, 최고의 통치자이나, 모든 전사와 동등한 입장을 가진 점이다.


 

완벽한 계급체계에 그 계급에 대우가 매우 다른 현대 군인에서 오로지 군복만이 평등하게 입고 다닌다. 하지만 저 때는 모두가 공평한 음식과 술을 내어주고, 보상도 충분히 아래 전사까지 이어진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왕과 원로에 의해 나라가 운영되고, 전쟁 시에 왕 자신이 참전하기에 가능하다. 대인제도로서 전리품은 모든 부하에게 나누어주고, 그들은 왕을 위해 목숨이 위험한 전장에서 투혼을 발휘한다. 그런데 그 왕들은 모든 신과 인간의 아버지인 제우스의 후예인 점이다. 왕은 신의 후예, 신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라는 점에서 그의 위대함과 통치력은 보장받는 셈이다. 농경사회가 처음 정착된 고대국가에서 왕 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가는 점은 동양도 마찬가지다.


 

삼국지에서 조조나 유비가 병력을 이끌고, 적의 장수를 향하여 돌진한다. 물론 왕의 신분이 되면서부터는 부하에게 맡기나 왕이 되더라도 전장의 지휘관이란 위치는 변하지 않는다. <일리아스>는 바로 그런 영웅들, 왕 혹은 왕과 같이 높은 지배계급이 보여주는 전쟁에서 비참하게 쓰러져도 그 모습을 위대하게 담아내는 것이다. 사실 전쟁에서 사람이 죽고, 사람 얼굴이 터져 뇌수가 나오고, 치아가 사방으로 튀는 모습은 보기가 흉하다. 그 흉한 현실적 비극을 훌륭하고 아름답고 가슴 뛰는 영웅서사시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마 이야기하기의 묘미일까?


 

인간은 과거를 지향하면 자신을 스스로 궁지로 몰게 되고, 미래를 보게 되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부여한다. 미래는 지금의 현실을 다시 보게 해주는 거울이 된다. 신화이야기인 <일리아스>가 실존인물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적어도 당시 살았던 사람들은 신이란 영원한 불사신을 신봉함으로서 자신을 신 앞에 내놓았을 것이다. 신 앞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어떤 부끄러운 행동과 비열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다른 이는 모르나 신의 눈을 속일 수 없다는 게 고대 인간의 사고방식이다. <일리아스>를 읽는 것은 단순히 영웅서사라는 비극시가 아니다. 지금의 인간에게 매력을 끌어내는 이유는 당시 인간만큼 더 인간적인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얼마나 진실적인가? 제우스의 저울은 우리에게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그래서 우리는 <일리아스>를 읽고 제우스의 저울에 저울질 당하는 영웅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리아스>를 읽으면 보통 소설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노래에 가깝다. 인간이 노래하는 이유는 인간에게 신과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은 노래와 춤이다.


 

무당인 샤먼들이 미친 듯이 뛰고 노래하며 환호하는 이유는 그들은 신과 대화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어가 서로 달라도 노래로서 음악으로서 서로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다. 음률을 가진 가락에서 인간은 미묘한 감정이 생긴다. 그 감정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과 공통된 감정 내지 무의식적인 영역에 이끌어낸다. 신은 우리의 인간이 만들어낸 욕망의 대리자다. 그러나 그 신이 욕망적인 표현이라고 해도 인간의 공감을 보여주는 존재다. 아카이오이족과 트로이아족이 서로 죽일 것처럼 싸워도 어느 시점에서 인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는 그들에겐 제우스란 아버지가 있기 때문이다. <일리아스>는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인간들을 받아주도록 만드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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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참자 재인 가가 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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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가시노 게이고는 일본에서 매우 유명한 소설가다.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유명하기에 딱히 그에 대해 설명할 이유도 없다. 이번에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신참자>는 일본 드라마에서 제작될 작품이다. 작품은 가가 형사 시리즈로 그가 신참자, 즉 경시청에서 나와 니혼바시에 위치한 경찰서로 배치되면서다. 그가 배치되자, 30대인 경력이 있는 경찰관이라도 어느 지역에 가도 처음에 낯선 동네다. 낯설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영역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영역이다.


<신참자>란 제목답게 그가 처음 부임한 동네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동기와 결과를 봐서는 너무 흔한 소재였다. 즉 돈이란 매개로 통한 사업가의 곤란한 처지가 다른 인물을 살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 만큼 이 책을 본 뒤 내 머리에서 특별히 남는 게 없다. <신참자>란 소설은 단순히 히가시노 게이고만이 아니라 다양한 추리나 범죄소설에 등장할만한 소재이고, 하다못해 만화책이나 애니메이션에서 종종 등장하는 소재다. 아마 단순히 추리 한 가지로 비교하면 TV에서 방영된 <명탐정 코난>보다 아래일지 모른다.


그런데도 왜 <신참자>는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사랑을 받는가? 이 작품은 경찰관으로 임관된 가가 형사가 살인범을 쫓기 위해 새로 부임한 동네를 이곳저곳을 다니며, 조사하는 것이다. 바로 거기서부터 이 소설은 재미가 시작된다. 소설이란 서사적 구조에서 외적인 구조에선 가가 형사가 범죄를 쫓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면에 안쪽에 숨은 서사는 다른 방향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약간 보수적인 요소(정치적인 요소보단 정서적인 요소)가 잘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총 9편의 이야기가 하나로 묶인 <신참자>를 읽는 순간, 나는 딱 드라마 각본으로 사용하기 좋다고 여겼다. 가가 형사로 통해 수사로 몰입하는 이야기보단 수사과정에서 드러난 다양한 인간군상을 살펴보고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인간들은 어디에서 존재하는 보통의 사람들이다. 누구나 될 수 있는 사람이다. 전통과자, 케이크가게, 식당, 문구점, 학생 등등 이 모두가 일상적으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부류다. 단지 그 인물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가공의 인물이고, 배경이 한국이 아닌 일본이라도 그 상황적인 부분에서 상당히 공감대가 반영되어 있다.


우리 역시 길가를 걷다보면 많은 인파에서 학생들이 있고, 상가를 지나면 많은 가게가 입주해있다. 단지 그들은 오늘 하루 그들 나름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친구와 가족이 있고, 각자의 삶이 존재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참자>에서 인물들의 묘사들은 바로 그런 보통사람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그저 그렇게 보일지 모르나, 속사정에는 보이지 않은 골치나 고민이 있다. 가가 형사가 수사를 범이면서 많은 증인 혹은 참고인들의 이야기를 듣는 점에서, 가가 형사는 분명 수사로 접근한다.


하지만 막상 이야기는 각자의 삶과 연결된다. 아버지와 딸의 의절관계, 혹은 과거 사랑하던 여자의 딸을 만나던지 혹은 고부간의 갈등, 우리 일상에서 심하게 볼 수 있는 이야기다. <신참자>의 매력은 아마 그런 요소일 듯하다. 그래서 재미가 있는 이유는 상당한 공감대가 녹아있기 때문이다. 문학적으로 그렇게 높지 않은 것 같았다. 사실 최초의 서사인 <오이디푸스왕>은 라이오스가 아들 오이디푸스에게 폭행당해 죽고, 그의 아내 이오카스테는 자신의 아들과 결혼한다. 근친상간의 천벌은 오이디푸스 스스로 원하지 않으나 결국 몸으로 받아낸다. 문학의 맛은 보통 상황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적 요소가 일어날 수 있다면? 라는 의문에서 시작될 경우 그 문학적 재미가 있는 것 같다.


물론 보통사람의 이야기는 <신참자>로 본다면 좋은 예능소설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 단지 속세적인 요소를 중심으로 이어갔기 때문에 일반사람 역시 쉽게 읽을 수 있다. 장점과 단점은 바로 이 점 때문이라 볼 수 있다. 특히 모든 문제와 해결지점의 방향은 가족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족의 사랑이 이 소설의 중심적인 교훈이다. 가족의 사랑은 너무 당연한 가치다. 가족의 사랑이 없다면 인간에게 그보다 비참한 감옥은 없다. 하지만 가족이 소중해도 가족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 없다. <신참자>의 조금 아쉬운 점은 가족의 희생을 강요는 아니나, 그 희생을 자처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조금 그게 좋은 이야기로 이어진다는 설정이 아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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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5-16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게이고는 확실히 호불호가 갈립니다. 좋은 작품은 꽤 좋은 데 안 좋은 작품은 질이 떨어지고 말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5-16 12:47   좋아요 0 | URL
겉으로는 보기 좋은 그림이나, 생각할 거리를 주지 않은 게 문제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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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은 언제나 참을 수 없는 유혹과 광기 또는 낯이 어려운 상황에 부딪힌다. 나는 과연 여기에 휘말려야 하는지 아니라면 그렇지 않아야 하는가? 혹이라면 그렇지 않아야 하는 것에 대해 “그래야 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인생이란 항상 어느 키치적인 요소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왜 사비나는 그녀의 행동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말을 나오게 할 것인가? 육감적인 몸매, 아름다운 얼굴, 예술적인 손 흔적, 그녀 사비나는 끊임없는 남자들의 안식처이기도 했지만 전혀 아니기도 했다. 그녀는 체코 프라하에 있었기도 했고, 취리히도 있었고, 나중에 미국에 있다가 캄보디아 전쟁터에도 있기도 했다.


 

그녀가 느낀 참을 수 없는 그 어떤 존재의 가벼움이란 자신의 위치와 입장 그리고 살아가는 현재에 대하여 참을 수 없는 지겨움이다. 그녀는 그 누구도 자신을 구속하려는 것을 싫어했다. 왜 그런가? 그녀는 소련이 공산진영 국가에 했던 기계적인 행위를 거부했다. 아무런 의미도 모른 채 5월 1일 메이데이, 미치지도 않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미치게 만드는 것을 싫어했다. 가사도 외우지도 못하고 마음에 와 닿지 않은데도 계속 행진하면서 노래를 하는 게 싫었다. 그뿐만 아니다. 사비나는 어느 세계의 키치를 싫어했다. 미국에서 자신의 예술품을 사랑하던 노부부와 같이 살면서 그들이 죽자, 노부부의 아들에게 맡기는 순간, 사비나는 자신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 여겼다.


 

우리의 인생이란 항상 부유하는 존재다. 왜 그런 가벼움에 대한 허전한 마음을 담고 있는가? 니체의 이야기가 시작하고, 니체의 일화가 후반부에서 나온 것처럼 인간은 뭔가 자신의 현재에 얽매여 있다. 니체가 1889년 길을 걷다가 마부에 의해 마차를 끌고 있는 말에게 다가가 안아주는 모습, 니체는 분명 매독에 걸려 정신착란을 보였다. 그러나 니체의 광기는 세상의 광기가 아니라 자신만의 광기다. 그 광기는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었지만, 인간들은 그 광기를 인정하지 않았다. 니체의 광기처럼 동물조차도 연민을 느끼는 자연적인 요소, 르네 데카르트가 주장한 기계론적 철학관에서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을 희생시켰다.


 

그것은 인간에게 이성과 지성, 그리고 영혼이 있기에 동물이 내지르는 비명은 고통을 말하는 게 아니라 고장이 난 것이라 본다. 하지만 동물도 아프면 고통을 외치고, 감정이 있었다. 니체가 말의 목을 잡고 안아주듯이 사비나의 애인이었던 토마스, 그리고 그 토마스의 옆에 있는 2번째 부인이던 테레사, 그녀는 말의 목을 니체가 안아주듯이 그녀의 개인 카레닌의 목을 안아준다. 카레닌은 시계 같은 존재였다. 왜 시계인가? 동물은 정해진 자신의 패턴에 의해 살아가고 있었고, 항상 일정한 간격이 있었다. 토마스가 강박적으로 베토벤의 악곡에서 “그래야만 한다!”라는 게 아니라 “그러는 게 당연하다!” 하듯이 말이다.


 

카레닌의 존재성이란 바로 당연하게 옆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인식, 더 나아가 우리 인간을 대비할 수 있는 존재다. 카레닌이 이상한 패턴을 보인 것은 암에 걸려 수술하고 나서 마취에 풀려나서부터다. 카레닌은 병에 의해 잠시 반응이 변했지, 그는 변하지 않았다. 언제나 변화는 카레닌의 주인 토마스와 테레사였다. 이 두 사람은 뭔가 자신의 세계에 벗어나길 원했다. 토마스는 자신을 얽매이는 것에서 자유롭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 사비나의 애인으로서 매우 적당했지만, 테레사의 만남은 그걸 벗어버리게 했다. 1번재 부인에게 아들이 있고, 가족이 있으면서도 왜 토마스는 그런 삶을 살았을까?


 

토마스의 삶에서 그가 신문사에 투고한 기사에서 나는 생각한다. 그 기사는 오이디푸스왕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그의 어머니와 결혼하여 4명의 아이를 가진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위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성행위를 한 것이 아니다. 그를 전혀 몰랐고, 원하지도 않았으며, 그 죄에 모든 것을 버렸다. 토마스의 강박적인 삶, 테레사는 토마스의 몸에서 항상 성행위를 하던 여자의 성기냄새가 난다고 한다. 그리고 토마스와 테레사와 성행위를 보면 재미있는 장면이 나온다. 2명의 남녀가 뒤섞인 자리에서 토마스는 특이한 행동을 한다.

 

 

다른 여자보다 다소 크기가 작지만, 테레사의 가슴을 토마스의 입술이 계속 빨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은 남녀의 성행위보단 차라리 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빠는 모습을 연상케 했다. 토마스는 왜 아내와 이혼하고 부모와 절교하며, 다른 여자들과 가벼운 관계의 애인이 되어야만 했을까? 인간이 가진 심리적 상황이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어제까지 그 전까지 같이 거리를 거닐며 데이트하던 그 혹은 그녀가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춘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상대방에게 예고도 없이 말이다. 왜 그렇게 했는가? 인간적으로 그렇게 하면 안 되나,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그래야만 한다!”라는 것이 있다.


 

그게 무의식적인 자신의 이기심 내지 정체성에서 발휘된 행동일 것이다. 그렇다면 토마스는 무엇인가? 그에게 어머니란 존재는 없었다. 아니 생물학적으로 존재해도 심리적으로 없었다. 그녀의 머리에서 왜 다른 여자의 성기냄새가 나는가? 인간은 태어나면서 머리부터 나온다. 태아의 머리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올 때 여자의 성기냄새는 인간 누구에게나 가진 공통적인 조건이다. 하지만 남자는 다시 여자에게 아니 더 정확히 말하여 어머니에게 돌아가려는 회귀본능에 이끌리기도 한다. 토마스의 성행위는 아마 그런 것이랴.

 

야생적인 여자 사비나, 그녀는 그 어느 것에 얽매이지 않은 존재다. 토마스에게 그녀가 하나의 자연적 존재일 수 있지만 사비나 그 자체는 자연적이지 못해 스스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허무함을 느낀다. 사비나의 허무, 토마스의 허무 그것은 서로 다른 것이다. 그런 가벼운 자신의 삶의 감정에서 토마스에게 테레사의 만남이란 정말 가볍다. 6회의 우연, 과장의 좌골신경통 그 모든 게 우연의 일치, 가벼운 삶의 흔적이 무거운 인생으로 이어진다. 테레사라는 여자, 이때까지 모든 여자와 성행위를 하더라도 같이 침대에 누워 수면을 취하지 않은 토마스에게 새로운 만남이다.


 

토마스에 의해 취리히에 가고, 테레사에 의해 다시 체코 프라하로 오고, 그런 직후 어느 시골로 가고, 그들은 자신의 알 수 없는 마음에 의해 사는 곳을 바꾼다. 테레사의 인생은 자신의 어머니가 보여준 비참하고 한심한 모습에서 거기서 바꾸려한다. 사실 테레사에게 토마스란 남자를 따라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사실 토마스가 아니어도 별 상관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단지 그녀 하나만 지겨운 삶, 그녀를 무겁게 누르는 어머니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그녀가 사진기자가 되어 체코에 침공한 소련군의 탱크를 찍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소련탱크의 커다란 포대, 그것은 남성의 성기다. 어떤 남성이 먼저 테레사에게 접근했다면 그녀는 따라갈 것이다. 단지 조건은 그녀는 무지한 어머니가 싫었기에 책 한 권이 남자에게 들려있어야 했다. 단지 우연히 토마스였고, 토마스는 아무 생각 없이 테레사와 만난 것이다. 우연이란 가벼운 삶의 흔적, 그 흔적이 토마스에게 계속 자신의 삶에 존재하는 테레사가 된 것이다. 가벼운 토마스의 우연, 그곳에 무거운 테레사의 만남에서 우리 인생은 어느 것이 가볍고 무거운지 모를 모호한 관계로 빠져든다.


 

그리고 존재적 무거움을 향하여 우리는 억지로 꾸민 키치에 빠진다. 사비나의 매력에 이끌린 프란츠는 자신이 있을 곳을 계속 찾기 위해 여행을 한다. 소멸의 미학에서 인간이 계속 이동하는 이유는 자신의 존재성을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다. 프란츠의 이동성은 자신이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자신의 행동이며, 그곳에서 만난 여자들과의 성행위는 지금 여기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행위다. 사비나와 여행을 떠나는 것에 행복감이 젖은 프란츠카 취리히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은 그녀를 보고 자신의 꿈이 깨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낯선 나라에서 사고를 당한다.


 

사비나라는 여인을 사랑한 프란츠와 사비나를 사랑하기보단 그저 몸으로 즐기려한 토마스에게 자신의 행복은 바로 자신의 품어줄 공간을 찾는 것이다. 왜 체코 프라하라는 도시에서 시골농촌으로 토마스와 테레사는 갔을까? 도시에 온 토마스의 머리에서 더 이상 여자들의 성기냄새가 나지 않았다. 시골이 비록 소련군에 의해 변해있다고 해도 그 시골에서 삶 그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낮에 일하고 저녁에 쉬고, 조용한 일상, 마치 카레닌과 같은 시간을 보낸다. 그 일상은 무거운지 가벼운 것인지 알 수 없다. 단조로운 인생은 가벼울지 모르나, 토마스에겐 더 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다.


 

의사로서 삶을 강요받은 토마스, 혹은 억지로 주변의 흐름에 따르기보단 그 흐름에 거부하려는 자신의 강박적 삶을 선택받지 않은 것은 분명히 말하여 토마스에게 행복이다. “그래야만 한다!”가 “그러든 말든가!”로 변한 것이다. 시골농부가 되어 트럭을 수리하고 농사일을 거두는 것이란 그 누구의 눈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의사를 그만둔 토마스는 도시에서 창문닦이 하면서 많은 여자와 잠자리를 나누었지만, 그것이 삶의 쾌락이 되어도 행복은 되지 못했다. 과거의 외과의사 그리고 지식인이란 신분은 그에게 하나의 특권을 부여하는 만큼 또 다른 모순적인 고뇌를 주기 때문이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토마스에겐 가벼운 일상적 삶에서 행복의 무거움을 느낀 것이다.

 

 

사비나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는 것은 그 모든 것에 얽매이려는 것과 그 자체를 거부하자는 얽매이는 것들이 결국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무거운 강박관념이란 점이다. 우리는 우리가 뭔가 가지기 위하거나 해야 한다는 무거운 신념이 우리를 가볍게 만든다. 전쟁이 일어난 곳에서 국경 없는 의사회가 갈 때 어느 신문기자의 죽음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기자가 지뢰를 밟아 지뢰가 폭발하여 그의 몸이 산산조각 나고, 그의 피가 주변을 뿌릴 때 국경 없는 의사회와 그 옆에 있던 사람들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곳에 온 미국 미녀 여배우 모습처럼 억지로 매스컴에 결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토마스와 사비나의 마지막 모습처럼 살아가는 것도 좋은 인생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 수 없는 세상이다. 언제나 우리에게 가벼움과 무거움이 교차한다. 그 순간 우리는 우리의 마음도 모른 채 충동에 의해 사로잡히고, 다시 그 충동이 육감적인 심리에서 원해도 정신적인 심리에서 거부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사비나가 느낀 것처럼 혹은 다른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자신의 존재에 대해 가벼움을 느낄 것이고, 그것에 대해 참기 힘들 정도의 공허감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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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ED 더 좀비스 시리즈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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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 <Revolution No.3>는 좀비들 시리즈로 유쾌한 재미와 쾌감을 날려준다. 다소 카타르시스가 뒤따르는 이 작품들은 다른 작품들 세계관과 공유하고 있다. <Revolution No.3>가 <Revolution No.0>, <Fly daddy fly>가 연계되고 다시 <speed>와 연결된다. 그런 점에서 <연애소설>은 좀비들 시리즈와 전혀 다른 소재와 느낌을 다루고 있어서 별개의 소설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생각은 다시 수정하였다. 이 작품 역시 좀비들과 이어지고 있었다. <연애소설>에서 주인공은 아니나, 주요인물로 다니무라 교수가 있다. 다니무라 교수와 불륜을 맺은 미모의 여대생 아야코는 사랑의 불의와 허무한 자신에 절망하여 자살한다.


<연애소설> "영원의 환"에서 아야코를 사랑하던 아야코 남자후배는 자신이 죽기 전에 친구로 위장한 살인청부업자에게 다니무라 교수 암살을 의뢰한다. <speed>에선 아야코의 제자 가나코는 아야코의 죽음에 대해 진실을 밝히려 한다. 단지 중간 매개에 <Revolution No.3>가 보이지 않았을 뿐, 좀비들의 무리와 결코 멀어지지 않았다. <연애소설> "영원의 환"에서 단순히 남자후배는 사랑하는 아야코 선배를 위한 복수를 원했다면, <speed>는 그 복수가 일어나기 반년 전의 이야기다. 작품에서 아야코를 좋아하는 남자이야기도 있었고, 아야코와 다니무라의 불륜관계도 있었다.


한 미모의 여대생이 선택한 죽음, 석연치 않은 자살 장소는 여러 가지로 의문을 만들게 했다. 가나코는 처음 아야코의 죽음이 타살이라 여겼다. 물론 아야코는 자살이었으나, 타살과 마찬가지이었다. 자살은 사회적 자살이란 말이 있다. 그녀의 죽음은 자신의 의지를 위한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의지를 포기한 죽음이었다. 아마 남자후배가 죽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용기를 내었다면 아야코는 자살을 조금 고민했을 것이다. 그녀의 죽음 남자후배에겐 인생의 절망을 가나코에겐 친구를 잃게 만들었다.


가나코는 아야코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그 죽음이 숨은 진실에 대한 의문, 그리고 이상한 에세이대학교의 분위기, 이 모든 것이 별개의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여대생의 죽음, 에세이대학교의 축제는 뭔가 이어지는 고리가 있었다. 그 고리의 시작은 가나코가 가진 어느 증거고, 그 증거를 노리는 세력이 등장한다. 그러면서 우연히 좀비들이 그 현장을 목격하고 여기서부터 가나코와 좀비들은 운명의 공동체가 된다. 이미 <Fly daay fly>에선 순신은 40대 아저씨를 인생의 패배자에서 승리자로 바꾸는데 성공한 적이 있었다.


이젠 40대 아저씨가 아니라 10대 여고생이었다. 그것도 자신들이 3년 동안 계속 침입하려한 세이와여고의 우등생이었다. 좀비들의 활약과 주인공의 노력은 물론 모든 문제를 해결하나,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사고를 치는 문제아로 등장한다. 가나코 역시 그런 역할 중에 하나다. 공부에 충실한 여고생이 우연히 불량학교 문제아들과 친구가 되어 함께 하는 시간은 달콤한 꿈만 같은 시간인지 아니면 악몽보다 더 심한 운명의 장난인지 모른다. 단지 가나코를 만난 좀비들은 이태까지 삶에 지친 약자들과 연대했다면, 이번에 얼마든지 위로 갈 수 있는 존재와 만났다.


늘 악운만 따르는 야마시타가 가나코에게 자신은 산하(山下)라는 의미의 성을 가졌다고 말한다. 산 아래에 사는 야마시타는 산 위로 올라갈 수 없는 영원한 발바닥 인생이다. 좀비들은 그런 야마시타가 멸망하지 않을 세상을 만드는 게 꿈이라 한다. 볼품없지만, 언제나 맑은 눈으로 친구를 걱정해주는 착한 친구들, 바보 같은 그 꿈을 언제나 비웃고 조롱하는 사회에 대해 좀비들은 대항한다. 단지 이번 대상은 조금 다르다. 권력의 중심은 언제나 대학교와 연결되어 있고, 그것은 돈과 인맥으로 연결된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그 이벤트를 놓치지 않으려한 엘리트들의 사고방식은 작가 가네시로 가즈키의 시대정신이 돋보인다.


이 사건들의 원흉에게 잡힌 가네코는 그와 대화하면서 엘리트인 원흉이 되고 싶은 것은 묻는다. 그는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 정치인들을 움직이고, 헌법을 개정하여 군대를 밖으로 보낸다. 전형적인 일본극우의 사고방식이다. 뇌물수수 뿐만 아니라 미성년 매춘행위로 낙인찍힌 전 장관과 결탁한 점에서 지식인의 사회인 대학은 이미 권력을 위한 도구로 변질된 것이다. 과거 1960년대 일본은 학생운동이 활발했고, 그들은 동아리로 자금을 충당했으나, 이제는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엔 자본의 공급처로 활용된다.


일본사회는 그렇게 섞어가고 있었다. 여기서 가나코는 그런 현실에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좀비와 혁명을 일으킨 것인가? 보통 <Revolution No.3> 좀비들 이야기에선 다소 마초적인 감성을 가진 남학생 중심이야기라면 이번 <speed>는 조금 다르다. 연약한 여고생이 직접 몸을 날려 싸우고, 운전을 배워 마지막 스포트라이트를 장식한다. 가나코의 가족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그 집안은 가족이 3명이 아니라 4명이어야 했다. 가나코의 어머니는 꼰대적인 가부장인 남편에 대해 실망해서 낙태를 선택한다. 남편이 바람피우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가나코의 어머니가 느낀 소외감, 게다가 아야코와 다니무라의 불륜에서 아야코의 죽음, 원흉이 모든 운동부들을 조직할 수 있던 것은 강간사건을 어떻게 잘 덮어준 것이다. 일본사회가 가진 문제인 성적인 억압이 이 작품에 녹아 있었다. 그 상황에서 가나코는 투쟁을 하였고, 특히 어릴 때 배운 발레를 다시 해보려는 것이다. <Revolution No.3>에서 어느 나그네가 춤을 추자 왕이 질투하여 그의 다리와 팔, 나중에 목까지 베어버렸다. 그는 죽어가면서 눈으로 리듬을 맞추어 마음의 춤을 추었다.


춤을 추지 못한 나그네, 하지만 그 나그네를 본 다른 누군가가 춤을 추어주었다. 아마 가나코는 억압받는 이상한 세계에 새로운 발화점이 될 인간이란 점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에 힘이 필요하나, 정말 필요한 것은 그 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의지다. 신호등이 적색과 녹색이 있는데, 만약 그 신호등이 조작된 적색이라면 우린 그 선을 넘어야 하는지 마는지 고민하게 된다. 바로 그 자리에서 달릴 수 있는 자만이 세상을 바꾼다. 그리고 자동차에 차키를 꽂아 넣으면 우린 엑셀 페달을 힘껏 밟아 막혀있는 문을 향해 돌진한다.


안에서 열리지 않고, 밖에서 밀어내는 형식이라면, 그 간극의 틈을 찾아 마주쳐 나가는 게 좀비들의 인생이다. 물론 세상은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하고, 탐욕에 물든 인간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 계속 희생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들을 거부하기보단 그 이익에 붙으려 한다. 우리에겐 정말 그런 사회를 비웃으며 돌파할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바로 <speed>가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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