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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 - 고산자의 꿈
임나경 지음 / 황금소나무 / 2016년 9월
평점 :
추석 연휴 때 남자끼리 영화를 본 안쓰러운 기억이 든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이어온 옛날 친구와 극장가를 찾아가니 보고 싶은 작품이 매진이 되었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으로 다른 영화를 찾아보니 차승원 배우가 출현한 <고산자, 대동여지도>를 보았다. 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은 한국이란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자연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사실과 영화촬영 당시 많은 고생을 했을 것이란 점이다. 영화촬영 시 무대 세트 외에 현장 로케이션에서 촬영하려면 우선 바다 위에서는 배를 타야 한다. 만일 진짜 나무로 만든 배를 타고 촬영했다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해양 특성상 서해가 아닌 남해 측의 대한해협 그리고 독도가 있는 동해는 수심이 깊고, 수심이 깊기에 파도의 높이가 매우 높다.
그런 곳에서 촬영했다면 많은 배우와 스텝 분들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나 영화는 영상미도 중요하나, 영상서사에 드러나는 스토리텔링, 즉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이 다소 지겨운 감이 없지 않았다. 김정호 선생이 고생하여 전국을 돌고, 권력자에 의해 고난을 당하고, 당시 안동김씨 세도정치에 많은 백성이 신음하고,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의해 천주교 박해가 극에 달했다. 시대적 흐름에 대해 잘 반영한 것은 알겠지만, 김정호란 인물이 영화에서 권력자들의 입김에 움직이는 모습이 너무 심했고, 영화초반 차승원이 보여준 다소 개그적인 요소에 치중한 느낌이었다.
영화초반부터 재미를 주려다 후반에 갈수록 진지한 고통이 다가올수록 영화내용이 약간 관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주지 못한 것 같았다. 김정호를 다룬 영화가 있다면 소설도 있을 것이다. 영화와 소설을 다르게 바라보면서 영화에서 김정호의 가족은 어린 딸 하나이고, 소설에서 가족은 망나니 아들 하나와 늙을 때까지 옆에서 보필해주던 딸이 있었다. 영화의 딸은 천주교 박해 때 고문으로 죽었지만, 소설은 그저 늙어가는 모습만 보여준다. 어느 모습이 김정호에 더 가까운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김정호의 기록은 여전히 미상이고, 그의 행적 역시 뚜렷하지 못하다. 단지 그의 기록만은 기록물로 우리나라 문화재에 큰 빛을 안겨주었다.
영화에서 김정호는 외적인 모습에 치중한 것 같았지만, 이에 반해 소설 <고산자의 꿈, 대동여지도>는 외적인 모습보다 그의 내적 심경, 주변사람들을 통해 보여준다. 소년 김정호는 어느 날 빛을 본다. 지도에 새겨진 많은 지리적 정보, 양반출신이 아닌 김정호가 한자를 안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다. 한자를 안다는 것, 그것은 책을 읽고 책을 쓸 수 있으며, 책으로 통해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당시 민란이 발생하고 정국은 어지러워도 그래도 민란을 막을 수 있는 이유는 지식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글을 알아야 병법을 알고, 전략과 책략을 짤 수 있다. 또한 지리적 정보를 담은 지도를 안다는 것은 전술에서 매우 중요하다. 글을 안다면 또한 조선의 정치통치술인 유교를 알 수 있다. 조선의 유학은 공자와 맹자보단 오히려 주자의 성리학에 가까웠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어느 한 사람의 말만 보고 잘못된 생각을 고칠 의지가 없는 당대 현실을 비판했다. 글자 하나를 다르게 해석하면 사문난적으로 몰려 귀양을 가거나 죽임을 당하던 조선이었다. 문자를 안다는 것, 문자를 해석하는 것은 권력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소년 김정호는 한자를 보통 사대부양반보다 더 잘 알지만, 그의 신분이 한계였다. 조선의 후기는 그야말로 위기였고, 세도정치가 판을 치는 조선은 민중의 비명과 신음으로 넘치는 세상이다. 소년 김정호의 아버지는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한양으로 이사 온다. 그의 아버지는 얼음을 지고가면 목적지에 도착하면 돈 대신 매를 받는다. 얼음을 이미 다 녹아 소용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정확히 길만 제대로 보고 간다면, 아무런 고생이 없는데 말이다.
인간은 태어나면 자신이 태어난 지리적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는 인간이 공간의 구조에 의해 지배받는다고 생각한다. 공간은 한편으로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분리가 이루어진 최초의 영역이라 본다. <고산자의 꿈, 대동여지도>의 작가 임나경 소설 중에 <곡마>에서 북촌과 남촌이란 단어가 나온다. 북촌은 부유한 양반이 사는 곳이고, 남촌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곡마>의 남자주인공 종사관은 가난한 무관이라면, 세도가들은 북촌의 권력자들이다.
지금 서울에 북촌 한옥마을이 있다고 한다. 공간적인 영역에서 과거에 그들은 어떤 사람들의 피를 이어가고 있을까? 과거의 죄를 후손이 책임지는 것은 부당하나, 그 죄에 의해 혜택을 받는다면 그것은 죄가 된다. 공간이란 영역은 인간에게 벗어날 수 없는 주박을 걸어준 것이다. 주박은 과학적으로도 얽혀있지만, 오히려 비과학적인 논리에 얽매여 있다. 김정호가 지도에 목숨 거는 이유, 그것은 지도를 보고 살아야 할 인간들이 너무 고생한다는 점이다. 보부상들이나 상인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이다. 추운 겨울 산에서 길을 잃으면 추위와 배고픔에 죽거나, 맹수와 산적에 의해 습격 받는다.
만일 제대로 된 길, 순라군이나 혹은 포졸들이 돌아다니는 길이 표시된 지도가 있다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김정호가 원한 지도란 바로 저런 것이다. 언제라도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지도, 그것은 그 누구의 것이 아니라 만 백성의 손에 있어야 하는 점이다. 인간이 자신에게 재능이 있어도 본인의 이익이 아닌 타인의 이익을 위해 살아간다면 많은 희생과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김정호의 인생은 자세히 모른다. 영화나 소설은 실제 인물은 허구의 이야기로 또 다른 영역으로 풀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소설에 많은 공감이 가는 이유는 소설에서 김정호의 슬픔은 김정호만의 것이 아니었다. 옆에 신분을 초월한 오랜 친구도 있었고, 그를 알아주는 학자들도 있었다. 사랑하는 여자, 존경스러운 청백리 상관, 오랫동안 정리해온 지도와 판본 등이 무참히 잘려나갈 때 김정호는 담담하게 받아낸 게 아니다. 밤하늘의 아름다운 별빛을 바라보며 눈물을 머문다. 김정호란 인물이 한국인 선조에서 위대한 인물이나, 소설에서 만난 김정호는 위대한 인간보단 미련하나 인간적이고 같이 있으면 좋을 것 같은 옆집 아저씨 같았다.
옆집에서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과자 하나 주면서 친구하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말할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아프게도 그렇게 마음만 착해빠진 사람은 항상 손해보고 고통을 받는다. 역사에서 그때의 패자는 먼 미래에서 승자라고 한다. 김정호란 이름이 지금 우리 현대인에게 계속 되새기는 점에서 그는 역시 역사의 승자이다. 승자의 이름이 짙을수록 우리는 그에게 가해진 시대의 슬픔을 알아야 한다. 소설에서 청일전쟁이 등장한다. 정말 청일전쟁에서 대동여지도가 사용되었는지 아닌지는 모르나, 적어도 일본의 지리학자는 지도의 진면목을 알았다. 단지 그게 조선의 민중이 아니라 조선의 민중을 탄압했다는 게 슬플 뿐이다.
조선시대 후기 정조시대는 그야말로 르네상스였다. 정약용 선생이 관직에 오를 때 우리에게 찬란한 문화가 이어질 듯하다, 정조대왕 서거 이후 신해사옥과 황사영백서는 피로 얼룩진 비극을 만들었다. 유학은 본래 만민 즉 백성을 위한 학문이다. 공자가 유학을 만든 이유는 유학자란 백성이 자신의 생활에 아무런 걱정 없이 지내기 위해 존재하라는 의미이다. 유학자는 항상 열린 사고로 토론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윗사람은 오히려 아랫사람에게 모범이 되어 포용해야 한다. 공자의 유학 중 논어를 다룬 도서를 보니 그러하다.
하다못해 성리학의 시초인 주자가 만든 소학에서도 군자가 되기 위해서는 작은 것부터 실천해야 했다. 그런 점에서 소설의 실수는 성리학과 공자의 유학을 조금 잘못 배치한 것이 아닐까 하다. 민족의 스승인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는 성리학의 병폐를 항상 지적하고, 공자의 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실학이 왜 필요한가에서 백성에게 잘 살아가는 방법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공자는 사실 논어에서 농민에게 농사짓는 방법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했지만, 정약용의 사상은 농민에게 농사를 잘 짓는 방법이나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는 정보를 연구했다.
양반출신의 정약용, 양민 출신인 김정호, 신분은 분명 차이는 있지만, 그들이 보고자 하는 미래와 그들이 손을 내밀어주고 싶은 사람은 같았다. 그들의 의지가 높은 이유는 그들이 원대한 꿈을 꾸는 게 아니라, 그 꿈에서 헤엄치는 이들이 조선의 백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후기 양반이 아닌 자가 공명첩으로 양반이 되던 시대가 왔다. 신분이 양반이고, 행실도 양반이던 자들은 세도가들에게 미움을 받아 자리에서 쫓겨나고, 한적한 지붕 아래 책만 읽어야 했다. 김정호란 인물이 조선시대 사람이라 하여 반드시 그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소설작가 역시 현대인이고, 그분이 바라보는 조선시대라 해도 현재 살아가는 인간인 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집안문중 어르신들 중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나오기 150년 전 “동국여지지도”를 제작한 분이 계신다. 당파싸움에 밀려 한적한 시골에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있었으나, 그분이 바라본 것은 중앙정부의 권력이 아니라 주변에 널린 것들에 대한 탐구였다. 하지만 주변을 바라보고 공부하고 연구해도 그것이 제대로 백성의 삶으로 녹아들기 위해선 행정적인 요소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분의 형제와 친구들은 당쟁에 휘말려 죽임을 당하고, 그 비참한 모습을 본 후 병으로 죽었다. 그분과 그분의 친구에 의해 한국 실학자 성호 이익에게 유지가 넘어갔으나, 성호 이익 선생 역시 백발의 선비로 인생을 마감한다. 이런 분들이 빛을 밝히게 된 건 한국인 역사에서 다행일지 모르나, 그 사실을 알면 알수록 아쉬운 마음만 가득하다. 권력 앞에 남을 희생시키는 세상, 돈 앞에서 양심을 파는 사회, 김정호 선생은 조선의 산과 강은 나라의 것이 아닌 백성들의 것이라 했다.
비록 군왕이 존재하던 시대라도 군왕은 군주로서 백성을 위해 정치를 펼치는 게 목적이어야 하는 도학을 추구해야 했다. 군주제가 존재한 조선이면 민주제가 존재하는 대한민국은 오죽할까?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정부의 것이 아니라 국민의 것이다. 시련과 실패의 통한에도 길을 찾아간 김정호 선생이나, 형제들의 목이 참수되고 귀양살이에서 빛을 보여준 정약용 선생 역시 만백성을 위해 살아갔다. 그들의 위대한 업적이라 하나, 그들이 살아온 인생의 맛은 너무나도 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