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녀전설로 인하여 한 군도에서는 극북의 지방으로 가는 사람은 금기로 다스렸다.
그것은 단 한번, 아비의 약을 구하기 위해서 극북으로 넘어갔던 아이가 돌아오지 않고 약만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 아이가 설녀에게 잡아먹혔다고 생각했다.
그 아비가 그 딸을 찾아 경계선을 넘어간 이후로 더욱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전설이 남았다. 설녀가 된 딸이 아비를 잡아먹고 그 땅에서 계속 살아간다고…

“한빙.”

남해수도는 찔 것처럼 더웠다. 여인은  머리에 괴고 있던 목침을 내려놓고 오라비를 바라보았다.
오라비는 신이 났는지 시장에서 파는 여러가지 과일들을 잔뜩 들고 왔다.
극북 지방에서 살던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오라버니. 또 사조께 하시는 말씀을 안 듣고 나갔군요.”

“…그야, 한 군데에만 앉아 있으면 이처럼 더운 곳에서는 엉덩이에 종기 난다고. 빙이 너도 밖에 나가면…”

“오라버니는…”

그녀는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입을 다물었다.
궁에서 알면 궁주가 절대 가만히 있진 않으리라.

“하여간 넓은 세상에 나오면 돌아다니는 게 옳은 것이지. 아, 누이 한 개 먹어봐.”

“궁에서 먹는 것이 더 맛있어요.”

한빙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채를 부쳤다.

하얀 피부, 탈색이 되어 노란 끼가 도는 머리카락과 눈썹.
눈동자조차 탈색이 된 듯 연한 갈색의 눈동자.
손끝조차 하얀 빛을 내뿜는 듯한 그녀는 그렇다. 설녀였다.
그가 권하고, 그녀가 원하더라도 나갈 수는 없었다. 
설녀는 300년도 전에 극북에 갇혀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다만, 군도의 황제가 바뀔 때마다 인사를 드리러 나올 수 있는 것 뿐이었다.

“왜 그렇게 규칙에 집착하는 거야?”

오라비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오라버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공인을 받고 그저 돌아가기만 하면 될 뿐인 일이에요. 괜히 바깥에 나갔다가 일을 키울 필요는 없잖아요?”

“누이는 쓸데 없는데 마음을 쓰는군.”

설한은 그렇게 말하고 나머지 과일을 다 먹어버렸다. 남해의 진기한 과일들을 그냥 두고보기에는 그의 식욕이 만만찮았다.

“아, 두고 먹을 걸 그랬다.”

다 먹어치우고나서야 설한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너한테 부탁해서 장을 쏘았더라면 신선한 상태로 계속 먹을 수 있었을텐데…”

“…오라버니, 난 얼음보관소가 아니에요…”

설녀는 그렇게 말하곤 뚫린 창문으로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하늘 아래 어딘가에 찾아야 할 무엇인가가 있다.
궁주는 그녀를 만날 때마다 그렇게 말을 하곤 했다.

[한빙, 이제 세상으로 나가면 네가 찾아야 할 것이 꼭 있느니라…나는 알 수 없지만 너는 곧 알게 될 게야. 꼭 찾아서 돌아와야만 한다…너만이 그것을 찾을 수 있단다.]

사조가 무슨 뜻으로 한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빙은 그 말을 마음 속에 두고 새겼다.
다만…밖으로 나가서 찾고 싶진 않았다. 너무 더우면 찾기도 어려우니, 전서구 몇마리와 설호를 우선 풀어놓는 것으로 시작하기로 했다.
빙궁의 차기 계승자는 아름답고 지혜로웠지만 귀찮음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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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미래, 무엇이 바뀌고 무엇이 오는가 - "5년 뒤 당신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선대인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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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부분보다는 뒷부분에 중심이 가 있는 책이다. 앞부분은 현 사태에 대한 설명이고, 뒷부분은 진짜 일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뒷부분이 굉장히 흥미있었다...다만 읽고 나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가는 개인들의 문제로, 막상 읽고 나니 나도 막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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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길은 뇌전증이 거의 회복되자마자 아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연극 복귀 이야기를 했다. 당연히 왕립 연극단에서 복귀는 희망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응답을 받자마자 시길은 안한다고 단 한마디만 했다.
멍하니 초점 잃은 눈으로 희망도 없고, 절망도 없고 그저 덤덤한 무기물같은 인생처럼 보이는 시길…
경인은 그 덤덤함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어차피 결혼할 사람이니 미리 익숙해지는 것도 괜찮았다.
하지만 장모 입장에선 곧 장가와야 할 사위가 축 늘어져 있는 건 용납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어느 정도 예측을 했기에 시길이 입원하자마자 경인에게 [그들]에게 전화하려고 닦달질을 했다.
경인이 다희에게 전화하는 것을 미루는데도 말이다.

“어, 오늘은 머리가 바뀌었네요.”

언제 아팠냐는 듯이 욕실에서 머리를 말리고 나온 시길의 말에 경인이 빙긋 웃어보였다.

“며칠 전에는 길었었는데…”

“당신은 참…”

경인이 얼굴을 살짝 아래로 내려뜨리자 공들여한 컷머리가 더욱 청초해보였다.

“그러고보니 내가 신세를 많이 졌네요. 우리 영지에서 구경도 한번 못 시켜주고…하긴 영지 주인인 나도 잘 안 나가니까.”

“…꼭 복귀해야 하나요?”

경인의 말에 시길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건 마음은 정했으되 결론은 내리지 않았을 때 그가 흔히 하는 태도였다.

“왜요…연극배우들이 삶이 싫으신가요?”

“…꼭 해야 할 필욘 없잖아요. 맘대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 수 있는 돈이 있는데!”

그녀의 말에 순간적으로 시길의 얼굴이 부분별로 굳어졌다.

“돈 그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나요? 당신은?”

“하지만!”

“내겐 연기라는 것은…”

시길이 조용히 읊조렸다. 마치 여기가 병원이 아니고, 여기가 도시가 아니고, 낙엽송이 가득한 울긋불긋한 산에 있는 것처럼, 마치 산책하는 것처럼, 그것도 개나 고양이를 동반한 다소 부산스런 산책이 아니라…
혼자서…그러니까 혼자서 오롯이 보온병에 차나 커피를 담아와 마시는 것과 같은…

“태어나면서부터, 걷기 시작할 때부터, 거울을 볼 떄부터…였어요. 그건 [나]에요. 그리고 그건 혼자서 할 수 없는 거에요. 거울이 필요해요.”

“거울 갖다줄게요. 열, 백, 천, 만 전부 다!”

“왜 그렇게 싫어하죠?”

시길은 나른한 표정으로 경인을 내려다보았다. 키 큰 아가씨보다 조금 더 큰 그는 조심스럽게 예비 신부의 이마를 쓸어내렸다.

“당신을 그 여자한테 빼앗기고 싶지…않아요…”

“…하지만 난…”

그녀를 그에게 뺴앗기고 난 후에 어리석게 구하는 걸까.

아니면 일부러 그 사람들 사이를 훼방을 놓는 것일까…
하지만 한가지만큼은 분명했던 것.

[그대가 없으면 내게 거울을 비춰줄 사람이 없으니까. 당신은 나의 거울…]

“약속할게요.”

시길이 그녀에게 말했다.

“난 그녀를 예전에 사랑했던 것처럼 사랑하지 않아요. 난 당신을 사랑하니까 당신을 떠나지 않을 거에요. 그러니까…극단에 올라가 있는 동안만큼은 그저 잊고, 극단 밖의 나만 잊지 말고 사랑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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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조심스레 여인의 머리카락과 두상을 더듬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뭐…야. 몇…시?”

그녀는 귀찮다는 듯이 몸을 뒤척였다. 그는 약간 그 반응이 신경쓰이긴 했지만 계속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그녀는 그의 갈라테이아였다.

“변태같이 머리 그만 만지고 나 좀 놔줘.”

이내 또렷한 목소리가 달리고 그녀가 그의 손을 한쪽으로 치웠다.

“너무 벌써 일어났…”

그의 말에 그녀가 천천히 대꾸했다.

“월드스타 만들어준다며? 그래서 일찍 일어났는데…”

“…그래도.”

그녀의 말에 그가 빙긋 웃었다.

“우리끼리 즐기는 시간도 있어야지.”

“흐음. 그거 사심낀 발언이야.”

그녀가 그래도 사랑스럽게 그를 인정하려는 순간,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어?경인씨? 아…잘 지내고…아, 뭐라고?”

그 다음 순간 핸드폰을 내동댕이치고 다희가 침대에 털썩하고 주저앉았다.

“왜 그래?”

“시길…시길이가…”

여기까지 와서도 시길이 타령인가? 그는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여기까지 와서 왜 그 놈 이야기를 하는 거야. 이젠 같은 단원도 아니잖아.”

그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이번에는 그의 핸드폰에 경인의 번호가 떴다.

“네. 경인양.이게 어찌된 소란…”

경인은 급박하게 시길의 상태를 전했고, 그 이야기를 들은 순간 구진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정도 상황이라면…

“알겠습니다…저희 둘 다 가보도록 하지요.”

그는 짜증을 내면서 핸드폰을 박력있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금 투덜거렸다.

“손 진짜 많이 가는 놈.”

“어때, 원하는대로 해줄 거야?”

눈치보면서 말하는 자신의 여신에게 구진이 약하게 투덜거렸다.

“난 어떻게 된 게 너희 둘한테 계속 휘둘린다는 느낌이야. 그 놈이 그렇게 연기가 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면 극단을 그만두지 말았어야지…”

“날 계속 상대역으로 생각한다니 정말 로맨틱해~!”

그녀를 째려보고는 구진이 말했다.

“그건 생각만 해. 말로 뱉지마. 질투나니까.”



#배우의옆얼굴 #창작 #불펌금지 #오마쥬 #도스토옙스키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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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길은 영지로 돌아가자마자 부친이 남겨놓은 빚과 재산 정리를 시작했다.
물론 그는 뇌전증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복잡한 문제는 약혼녀의 집안에서 처리해주고 있었다.
장모의 재산보다는 그의 재산이 압도적이었으므로 장모는 이미 결혼이 치러진 것처럼 경인을 데리고 와서 정리 중이었다.

“경인아. 이거 봐라. 이 벨벳천…너무 멋있지 않니?”

“……”

섬세한 여성인만큼 방방마다 방치되어 있는 고운 천에 정신을 빼앗긴 장모와 약혼녀는 내버려두고 시길은 서재의 아버지의 장서를 읽고 있었다. 오래 전 아버지가 아들이 연기를 할 거라고 미리 생각이라도 했던 것처럼 모아놓은 셰익스피어, 빅토르 위고…
그는 그제서야 자신이 얼마나 연기를 사랑했는지…왜 벗어나려고 했었는지도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물론 결론은 간단했다.
그는 결혼하고 다른 사람처럼 평범하게 살기 위해서 연기를 그만 둔 것이다.

“경인아. 이것 좀 보렴. 여기에 태피스트리가 있구나. 참 아름…”

장모가 언제 서재에 들어왔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장모는 아름다운 태피스트리 시리즈가 방마다 있다는 걸 알고 마지막 태피스트리를 찾으러 들어온 것이었다.

“아, 장모님.”

장모라고 부르라고 해서 부르긴 했지만 그는 불편했다.

“이젠 장모라는 말이 쉽게 나오네. 그 말 나오는 데 새천년이 되어서야 나올 줄 알았더니만.”

경인이 그렇게 말하고는 그에게 다가왔다.

“뭐해요?”

“아…”

아름다운 그녀를 볼때마다 숨이 막혔다. 연기자일땐 아무 생각없이 대할 수 있었는데…

“셰익스피어네? 그것도 초판본.”

경인이 빙긋 웃었다. 벚꽃같이 그녀의 얼굴에 살짝 아주 살짝 홍조가 돌았다.
꽃술처럼 하늘 거리는 그녀의 속눈썹을 보면서 시길은 뇌에 둔탁한 시계가 멈추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거 나 주면 안돼요?”

“새신부가 케케묵은 책이나 보려고? 새신랑에게도 안  어울리니까 그 책 이리주게.”

장모가 투덜거리면서 그의 손에서 그 책을 빼앗아들었다.

“새 책으로 바꿔. 셰익스피어 번역이 바뀌어도 몇십년 전에 바뀌었을 판에…”

옆의 쓰레기통으로 장모가 그 책을 집어던졌다.
쓰레기통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어서 사실 장식용이나 마찬가지였다.
시길은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고운 쓰레기통에 고급 초판본…’

장모는 뭐라고 투덜거리면서 서재를 종횡했다. 그녀의 손에 몰리에르의 번역 초판본, 발자크의 소설 고급장정 번역본 등이 이내 들렸고,  곧 그 고급쓰레기통으로 던져졌다.
시길의 머릿속에 들어있던 그 연극대사들도 쓰레기통에 던져졌다.
그는 이내 옆으로 쓰러졌고, 장모와 경인은 이내 사람들을 불러 그를 서재에서 끌어냈다.
시길은 아름다운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같이 무겁게 사람들에게 들려졌다.
사람들은 살도 별로 안쪘으면서 왜 이렇게 무겁냐고 투덜거렸다.

#배우의옆얼굴 #창작 #불펌금지 #연극광 #연극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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