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주는 조심스럽게 치마를 들어올린 후 자리에 앉았다. 
그렇지 않아도 창백한 얼굴에 피로한 기색이 감지되었다.

“괜찮을까요?궁주님?”

빙궁의 사무를 보는 집사 조항아가 물었다.

“무엇이 걱정되느냐?”

“…빙이 아가씨가…”

“강호를 두루 밟은 설한이가 있지 아니하냐.”

궁주는 하나하나 씹듯이 말을 했다. 그것은 자신이 하는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는 듯한 태도였다.

“네가 설한이를 자주 궁밖으로 보낸 것을 알고 있노라.”

그녀의 말에 조항아가 고개를 수그렸다.

“왜 그리 했느냐?”

“……”

“차기 궁주는 아니지만, 한이는 중요한 아이다. 인가를 받을 때까지는 어쨌든 위험한 상황에 빠져서는 아니 되는데…”

“그러면 지금도…”

항아의 항의에 궁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네가 하는 일에 내가 잘못되었다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전에 자주 나갔기에 이번 일도 할 수 있는 것이겠지. 네가 잘 한 일이었다.”

“그럼…빙이 아가씨는…”

“그 아이는…”

궁주는 조용히 말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개입이 안되면 안될수록 좋은 게지.”

“…그렇다는 말씀은?”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려무나…”

궁주는 눈을 감았다. 이제 궁주가 된 지 겨우 3개월…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주는 나날이 병색이 짙어져가고 있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무공이 그리 강하지 않은 조항아라도 마음을 먹고 그녀를 암살하려 든다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궁주의 무공은 고강했으나, 내공이 갈수록 줄어들었다고 있었다.

“그럼…다 알고 계셨군요.”

항아의 말에 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옥반지가 없어진것만으로도 다 알고 있었단다. 무얼 하느냐?”

궁주의 물음에 조항아가 단검을 꺼내들었다. 궁주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항아가 그대로 검을 궁주의 가슴팍쪽으로 밀어내듯 찔렀다.
피가 쏟아져나왔고, 빙궁주의 몸이 허물어지듯 빙궁좌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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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비는 아직도 냉궁에 있습니까?”

태후의 말에 황제는 처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참담하달까…
냉궁에서 머리를 늘어뜨린 채 한없이 울기만 하는 여자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그는 몰랐다.

“아직도 아이 이름을 부릅니다.”

황후는 따로 있지만 그가 마음에 두고 연모하는 이는 연비였다. 하지만 연비는 궁으로 들어오기 전 약혼자와 정을 통해 아이를 가지고 억지로 궁에 들어왔다.
그녀는 황후의 엄한 명을 받고 냉궁에 유폐되었다. 
이것만큼은 왕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인의 일은 여인에게 맡겨두라는 말에 맡겼지만 어느 순간 아이는 사라져버렸고, 연비는 정신을 잃고 있다가 최근 회복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애 이름이 무엇인지 폐하는 아십니까?”

딴 남자의 아이다. 자신의 씨가 아니니 상관없다 싶었던 황제도 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참 귀여워했었다.
꼬물꼬물 움직이는 손 발이 어찌나 귀엽던지.

“한이.”

“이제 나이가 한 열여덟 정도 되었겠지요?”

“네…”

황제는 삶의 의지인 아들을 잃고 정신조차 잃은 연비가 가엾었다. 억지로 데려온 것이 문제였을까?
하지만 그대로 놔두었다면 황제의 정신이 나가버렸을 것이다. 그에게는 그를 붙잡아 줄 여자가 필요했다.
그때의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빙궁에서 아이가 나올 때가 되면 연락 준다 하였는데…얼마 전 빙궁주가 보낸 까마귀 발톱에 이런 것이 있더군요.”

태후가 침울한 황제를 달래면서 얇고 긴 비단 천을 건넸다.

“새로운 빙궁주를 인사보내오니 부디 인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연비도 좋아할 것입니다.”

“……”

황제가 한숨을 푹 쉬었다.

“빙궁…이라고 하면 연비는 더 싫어할 겝니다. 연비의 오라비와 약혼자가 빙궁의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서 떠났다가 전사했지 않습니까…”

“아니, 아이가 나올 때가 되니 연락온 게 아니겠습니까?”

“어머님은 모를 말씀 하십니다.”

황제가 말했다.

“천하에 황제가 못 가는 곳이 없어, 이때껏 연비를 위해서 강호 대지를 두루 밟았는데…빙궁따위에서 아이를 길렀을리가요…보통 아기라면 거기서 다 죽어나온답니다…설녀는 아이를 키우지 않습니다.”

“하지만…”

태후가 말을 더 이으려는 순간, 태후궁에 요란한 소리가 들리다니 이내 황후가 들어와 두 사람에게 예를 올렸다.

“어서 오오. 황후.”

황제와 태후의 인사에 황후는 참으로 단정하고도 절제된 태도로 황제에게 옥반지 하나를 바치었다.

“그것은 무엇이오?”

황제와 황후는 서로를 바라보았다.그러다가 한참만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리높여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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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지용은 그대로 풀썩 쓰러…지지는 않았다. 노구진의 팔이 간지용의 버클 사이로 살짝 칼을 찔러넣었기 때문이었다. 간지용은 약간 몸을 움직이긴 했지만 다희에게 채찍질한 후의 만족감으로 감각이 무뎌져 있었다.
그래서 노구진이 스쳐지나가는 순간, 간지용은 여전히 다희를 생각하고 있었다.

“개새끼.”

냉랭한 얼굴로 구진은 중얼거렸다.

“경고했는데도 내 여자를 건드려?”

죽지는 않겠지.
구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예 생각같아서는 죽여버릴 싶지만…마침 미사를 마치고 오는 중이라 죽일 수는 없지. 운 좋은 줄 알아라.]

가정부는 간지용의 채찍질하는 순간, 구진에게 급히 전화를 했다. 마침 노구진은 바로 받기는 받았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진 배우일지라도 한 두명 가지고는 해결이 될 리 없었다.
그래서 어제 그는 다른 배우들을 캐스팅하기 위해서 오디션 장에 있었다. 워낙 거리가 멀었기에  그가 밤새 오디션으 진행한 후 늘 하던 버릇대로 성당에서 미사를 지내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던 것이었다.마침 바로 뛰쳐나온 그 순간 길거리에서 간지용과 마주친 것이었다.
경황없을 와중에 구진은 살의를 느꼈다. 처음부터 칼을 휘두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간지용의 눈에 배인 사악한 만족감을 본 순간 마치 다희가 죽은 듯한 절망을 느꼈다.

“주인 어른!”

구진이 들어오자마자 가정부가 외쳤다.

“마님이…마님이…”

의외로 침착한 구진에 반해 가정부의 얼굴은 창백했다.
덤덤하게 구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 일 없었던 겁니다.”

“네?”

“배우 나다희에겐 아무 일도 없었던 겁니다. 누가 물으면 그렇게 대답하세요.”

“..네..네에.”

“그럼 묻겠습니다. 다희 많이 다쳤습니까?”

“….아…”

“잘 치료해주세요. 그리고 내가 시킨 대로 말하는 거 잊지 말고.”

 노구진은 그렇게 말한 후 칼을 가정부에게 맡겼다.

“잘 닦아주세요.”

“괘…괜찮으세요? 혹시 어디서 칼에 찔리신 건…”

구진은 고개를 저었다.

“사람 피가 아니라 개새끼가 덤벼서 그 개 피가 묻은 겁니다.”

가정부는 부들부들 떨면서 냅킨으로 단도의 피를 닦아냈다. 악어가죽으로 싼 손잡이에 불쾌한 간지용의 체취가 훅 끼쳐왔다. 구진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면서 화장실에서 손을 씻었다.

그리고 간지용은 집에 도착한 후에야 자신의 복부에 작지만 깊게 찔린 상처를 발견했다.
그는 평소에 옷을 꽉 끼게 입기 때문에 웬만한 통증은 느끼지 못하는 스타일이었다.
아까 전부터 미미한 통증이 있긴 했지만 옷차림에 유난을 떠는 귀부인처럼 별 거 아니라고 넘어갔던 탓이었다.

“의사 불러.”

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출혈이 꽤 심하다는 걸 깨닫고 심부름꾼을 불렀다. 주치의는 휴가중이었으므로 바로 치료를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출혈량이 꽤 되는데도 병원으로 간다면? 상대가 노리는 대로 과다출혈로 죽을지도 모른다…

“……”

고개를 끄덕하고 그의 서기가 재빠르게 사라졌다.

“하아…”

아까 전에 서기가 가져온 압박 붕대로 얼추 묶은 후 간지용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는 것을 느꼈다.
피에 묻은 채찍은 더 이상 그에게 만족을 주지 않았다.
그저 그가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을 했는지 알려줄 뿐이었다.
나다희가 상처받았다…그녀의 소울 메이트인 민시길…그리고 나다희의 연인 노구진…
이 셋을 완전히 적으로 돌려버린 것이다. 앞으로도 그들 가까이 갈 길을 스스로 차단했다.
여장군의 사위와 각별한 관계인 그들을 적으로 돌렸으니 앞으로 여장군과 이야기하는 것도 껄끄러워질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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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한동안 격조했습니다. 욱!하고 알라딘을 나가고...좀 쉬다가 돌아왔는데. 그동안 다른 일을 하느라 이 연재물은 손을 안 댔네요...별로 아는 게 없어서 적지 않았던 것도 있고...
저도 나름대로 바빠서...


오늘은 제가 찾은 정신건강 팟캐스트(팟캐스트에서 [뇌부자들]로 검색하세요.)를 추천하고자 합니다.
현역 정신과 의사 선생님들이 진행하시는 팟캐스트로 정신에 관련해서 광범위하게 지침을 알려주시고-실제 상담사례를 예로 들어주시기 하고, 그때그때 상담해주시기도 합니다.
기존에 알려진 잘못된 상식을 깨주시기도 하고, 몸이 아픈 것이 정신건강과 연결된다는 것을 알려주시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정신에 대한 것을 거의 다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워낙 사례가 다양해서 길게 다뤄도 30분 이내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유튜브에서도 이런 비슷한 종류의 게시물이 있는데 유튜브는 개인적으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주로 음식으로 조절하려고 이야기하기 때문인데, 몇몇 종류의 질병은 아직 원인과 치료방법이 확실히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슨 음식을 먹으면 낫는다. 라는 유튜브의 책임감 없는 의사나, 유사의료진료를 하는 사람들의 방송은 되도록 피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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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지용은 그 하수인을 때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때 생각난 건 예전의 애인이었던 다희였다.
그는 다희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노구진과 그녀가 깊은 관계가 되기 전에는 다희에게는 자신이 전부였다. 그는 모든 세상이었고, 모든 아버지였으며, 모든 애인이기도 했다.그녀가 입을 열 수 없을 정도로.
아직 그녀가 시가에 남아있을까?
그건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확신했다.
지용이 사준 그 집에는 그녀의 모든 것이 있었다. 아마 그녀는 추억때문에라도 그 집을 팔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심어놓은 극단적인 예술가 기질은 그녀에게 파괴기질도 같이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미워하면서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주인마님 계신가?”

그 좋은 예로 그가 그녀를 위해서 고용했던 유모가 그대로 있지 않은가?

“저..어르신.”

유모가 천천히 말을 끌었다.

“오늘은 그냥 가셔야 될 것 같습니다…”

“왜?”

간지용은 한쪽 손에 쥐고 있는 채찍을 흔들어보였다. 하수인을 주먹으로 두들겨 준 후 마시장에서 파는 신상 채찍이 손에 맞아 들고 온 것이었다.

“마님은…이제…”

“아, 뒷말은 듣지 않겠네. 지네가 할 일은 주인마님에게 내가 왔다고 전해주기만 하는 거니까."

“하지만…”

한때의 상전과 무의미한 입씨름을 하는 순간, 그의 채찍의 희생물이 나타났다.
마치 번제에 비쳐질 무구한 양같이 그녀가 머리를 헝클어뜨리면서 나타난 것이었다.
그녀는 간지용의 서 있는 층계 아랫부분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구진이 늘 그랬던 것처럼...말을 걸었다.

“구진?… 내가 자는데 시끄럽게 굴지 말라고 …아?”

흐트러진 흑발에 약간 치켜올라간 눈초리. 다소 푸른 빛을 띠는 검정 눈동자.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멈췄다가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파르르하고 떨었다. 떨린 것이 눈동자이지 눈썹인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모든 것이 컵에 담긴 물처럼 철렁~하고 흔들리고 말았다.

"날 그 이름으로 부르다니."

순간적으로 지용의 기분이 크게 더러워졌다. 지용은 손에 쥔 채찍을 꽈악 소리가 날 정도로 거머쥐었다.

“가보게.”

유모는 다희의 눈이 흔들릴 때마다 벌어지는 일은 알고 있었다. 너무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저 다희가 크게 다치지 않게만 해달라고 빌면서 주방으로 도망칠 뿐이었다.
노구진이 돌아오면 뭐라고 할까? 하지만 그도 알 것이다. 지용은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상대가 아니니까.
그리고 그녀의 바람대로 지용은 약 1시간 뒤에 돌아갔다. 

“마님…”

층계참에서 실신한 다희를 발견한 유모는 소리죽여 울었다.
지용이 죽거나 완전히 포기하게 될 때까지 이 일은 반복될 것이다. 노구진이 항상 곁에 있으면 피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일을 해야 했다. 그리고 일이 있는 이상 지용과 아예 마주치지 말란 법도 없었다. 

 “아…”

지용은 피의 온기가 가시지 않은 채찍을 쥐면서 만족했다. 저 여자란, 마치 말처럼 다루어야 하는 것이니까.
그때 노구진이 그의 곁을 지나갔다. 워낙 급한 걸음이라 지용을 못 알아본 듯 했다.
그러나 노구진의 칼은 그를 비켜지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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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의옆얼굴 #도스토예프스키모사 #오마쥬 #백치오마쥬 #창작 #불펌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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