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길은 영지로 돌아가자마자 부친이 남겨놓은 빚과 재산 정리를 시작했다.
물론 그는 뇌전증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복잡한 문제는 약혼녀의 집안에서 처리해주고 있었다.
장모의 재산보다는 그의 재산이 압도적이었으므로 장모는 이미 결혼이 치러진 것처럼 경인을 데리고 와서 정리 중이었다.

“경인아. 이거 봐라. 이 벨벳천…너무 멋있지 않니?”

“……”

섬세한 여성인만큼 방방마다 방치되어 있는 고운 천에 정신을 빼앗긴 장모와 약혼녀는 내버려두고 시길은 서재의 아버지의 장서를 읽고 있었다. 오래 전 아버지가 아들이 연기를 할 거라고 미리 생각이라도 했던 것처럼 모아놓은 셰익스피어, 빅토르 위고…
그는 그제서야 자신이 얼마나 연기를 사랑했는지…왜 벗어나려고 했었는지도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물론 결론은 간단했다.
그는 결혼하고 다른 사람처럼 평범하게 살기 위해서 연기를 그만 둔 것이다.

“경인아. 이것 좀 보렴. 여기에 태피스트리가 있구나. 참 아름…”

장모가 언제 서재에 들어왔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장모는 아름다운 태피스트리 시리즈가 방마다 있다는 걸 알고 마지막 태피스트리를 찾으러 들어온 것이었다.

“아, 장모님.”

장모라고 부르라고 해서 부르긴 했지만 그는 불편했다.

“이젠 장모라는 말이 쉽게 나오네. 그 말 나오는 데 새천년이 되어서야 나올 줄 알았더니만.”

경인이 그렇게 말하고는 그에게 다가왔다.

“뭐해요?”

“아…”

아름다운 그녀를 볼때마다 숨이 막혔다. 연기자일땐 아무 생각없이 대할 수 있었는데…

“셰익스피어네? 그것도 초판본.”

경인이 빙긋 웃었다. 벚꽃같이 그녀의 얼굴에 살짝 아주 살짝 홍조가 돌았다.
꽃술처럼 하늘 거리는 그녀의 속눈썹을 보면서 시길은 뇌에 둔탁한 시계가 멈추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거 나 주면 안돼요?”

“새신부가 케케묵은 책이나 보려고? 새신랑에게도 안  어울리니까 그 책 이리주게.”

장모가 투덜거리면서 그의 손에서 그 책을 빼앗아들었다.

“새 책으로 바꿔. 셰익스피어 번역이 바뀌어도 몇십년 전에 바뀌었을 판에…”

옆의 쓰레기통으로 장모가 그 책을 집어던졌다.
쓰레기통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어서 사실 장식용이나 마찬가지였다.
시길은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고운 쓰레기통에 고급 초판본…’

장모는 뭐라고 투덜거리면서 서재를 종횡했다. 그녀의 손에 몰리에르의 번역 초판본, 발자크의 소설 고급장정 번역본 등이 이내 들렸고,  곧 그 고급쓰레기통으로 던져졌다.
시길의 머릿속에 들어있던 그 연극대사들도 쓰레기통에 던져졌다.
그는 이내 옆으로 쓰러졌고, 장모와 경인은 이내 사람들을 불러 그를 서재에서 끌어냈다.
시길은 아름다운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같이 무겁게 사람들에게 들려졌다.
사람들은 살도 별로 안쪘으면서 왜 이렇게 무겁냐고 투덜거렸다.

#배우의옆얼굴 #창작 #불펌금지 #연극광 #연극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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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돈 크레머의 바이올린은 내게 신경을 긁는 음색이다. 너무 투명하다 못해 끝까지 달려나간달까.
그런 기돈 크레머가 탱고를 연주했다고?
문학수 선임기자님의 책을 읽고 호기심이 생겨서 구해서 들어보았다.
열정적인 탱고와 열정적이다못해 신경을 긁어내는 기돈 크레머의 음색...
견딜 수 없어서 끄고...
언제나 듣기 편하고 탱고 스럽다는 느낌을 주는 요요마로 바꿔탔다.
아...리베르 탱고는 항상 편안해서 좋단 말이야...이러면서. 물론 요요마의 모든 탱고는 편안하게 들린다....;;;;;;;;;
사실 피아졸라의 르 그랑 탱고는 로스트로포비치에게 헌정되었다던데 이렇게 잘 어울려도 될까? 싶지만.
사실 극단으로 가는 기돈 크레머쪽이 정답에 가깝지 않나 싶지만 어쩌나...내 취향은 그게 아닌 것을...

Ps.왜 오마쥬를 태그로 붙였냐고 물어보신다면...
     기돈 크레머의 음반 제목(영어)를 읽어보시면 아실 듯. ㅋㅋㅋㅋ
     지금 르 그랑 탱고를 로스트로포비치 버전으로 듣고 있는데, 확실히 화사한 요요마하고는 다르지만 기돈 크레머처럼 애간장이 들끓는 상태가 아닌 평온한 슬픔...버전인가?;;;;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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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길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다희에게 문자를 남겼다. 아마 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뭔가 남았다.둘 사이에. 뭔가가.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을 무언가가.

“……”

다희는 무심코 주머니속의 휴대폰을 찾았다. 구진이 물었다.

“휴대폰은 왜?”

“아, 맞아. 집에 두고 왔었지…깜박했네. 하긴 갔고 왔어도 충전해야 했을테니까…”

구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 벌써부터 스타병 걸려서 큰일났다.”

“응? 난 원래 스타 아니었어?”

장난스럽게 팔짱을 끼는 다희에게 구진이 이마에 손을 댔다.

“일반 스타 말고, 월드스타!”

“…어머, 진심인가봐?”

“그럼 너는 집에서 그냥 가정주부하려고 했어? 타고난 재능을 무시하다니 이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인데?”

순간적으로 다희의 얼굴이 샛노래졌다. 이해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그동안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물 흐르듯 흘러간 시길에 비하면 화려한 꽃을 피우기 위해서 다희가 어릴 적부터 받아온 훈련은 지독한 것이었다.

“그래, 월드 스타 가자고! 좋아.”

다시 다희는 그의 팔짱을 끼었다. 그때 뭔가 도도록! 하는 소리가 났다.
비퍼였다.
연출가인 구진과 톱스타인 그녀에게 비퍼를 보낼 사람은 단 세 사람.
시길, 단장, 감독.

그리고 그 문자는…전혀 알 지 못했던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그나마 일찍 도착했군.”

여왕님이 돌아가시기 3일전에야  대공연장에 도착한 그들에게 왕자가 말했다.

“그대 둘이 혼인한다는 말은 이제 들었네만.”

“…저희 꼭 결혼합니다. 그러니 그 말씀은 없는 걸로 해주시지요.”

다희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왕자에게 구진이 간곡하게 말했다.

“아니, 꼭 결혼 사기죄를 말하는 건 아니니깐, 너무 걱정하지 말게. 결혼은 하면 될 거 아닌가. 나하고.”

순간적으로 다들 쇼크를 받았다. 모여든 단원들 앞에서 구진의 결혼이야기도 믿기 힘들었지만 왕이 될 남자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후궁으로 받아들이겠어. 그러니 다희. 내 마음을…”

다희의 허리에 손을 감은 왕자가 포기할 의도가 전혀 없다는 걸 깨달은 구진은 아예 허리띠를 풀고 대리석 바닥에 엎드렸다.

“없는 걸로 해주십시오. 다희는, 다희는 꼭 제 손으로 세계최고의 배우로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뭐든지?”

실소가 왕자의 입에 걸렸다.

“뭘하던지 내가 그대보다 그녀에게 더 잘 해줄 수 있는데…”

“아닙니다. 배우를 보는 눈, 세상을 보는 눈 이 두가지를 왕자님은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껏 첩으로 들어간다면 그 재능은 사장되어버립니다. 그녀의 재능을 위해서 왕자님이 그녀를 포기해주십시오.”

“내가 그녀를 맘에 둔 것이 그 재능때문이 아니다…자네 지금 날 모욕한 건가?”

왕자가 다소 흥분했다. 그리고 구진이 이어서 말했다.

“제가 여기서 1000일을 굶고, 1000일을 무릎 끓어도 안된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다희를 돌려받는다면…”

시길이 그때 다시 다희에게 문자를 넣었다.아무도 그가 그녀에게 문자를 보낸다는 사실을 몰랐다.
다희는 왕자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돌아가고, 그의 손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그 문자를 읽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스스로 말했다.

“왕자님의 마음은 감사하지만, 전 왕궁에 있지 못할 겁니다. 구진과 함께 가겠어요.”
“다희…”

“왕자님이 저희 연극을 보고 마음이 안정이 되셨었다는 말만 들어도 좋네요. 앞으로도 좋은 작품 많이 하겠습니다. 그리고 황상이 되시면 꼭 돌아오겠습니다. 훈장 타러 꼭 돌아올테니…기다려주셔요.”

“다희…”

결국 왕자는 다희를 포기했다. 마지막 연극에 다희는 주연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연출인 구진도 그냥 파악만 할 뿐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시길은 모든 것이 정리되자 극에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고 영지로 돌아갔다.
마지막 인사도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다 제각기 길로 가는 듯 했다.
그리고 천만원과 다이아몬드를 집어던지고 나갔던 그들의 이야기는 부풀려져 왕자에게 대든 딴따라들이라는 내용으로 와전되어 그들의 최후를 더욱 비극적으로 만들고 말았다.

Ps. 밑에 태그 달린 류보프..라는 말은 니진스키를 두고 디아길레프와 갈등을 빚었던 러시아 류보프 황자 이야기입니다...디아길레프도 써놨는데, 언제 날라갔는지....
뭐, 모티브를 따왔으니 나다희- 니진스키 위치에 놓이겠네요....




#배우의옆얼굴 #창작 #불펌금지 #도스토옙스키모사 #백치오마쥬 #백치 #팜므파탈 #류보프,디아길레프오마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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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습니다. 연재물 중 어둠의 대륙횡단열차를 비공개로 돌립니다...
제가 인기있는 연재자도 아닌데 이렇게 쓰자니 면구합니다만.
언제까지 연재물만 올릴 수도 있는 게 아니라서, 제 일생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출판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실력으로만 하자면 아직은 시기상조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일평생 습작만 할 수도 없어서...
도전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선은 비공개로 돌렸고, 시간 나는대로 수정하여서 출판해보려고 합니다.
확정된 건 아직 없고.
정한 바에 의하면 종이책 출판은 무리라 생각되어 전자책 출판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확정되는대로  올리고 싶으나, 개인적인 이야기가 성가시다 생각되시면 댓글 달아주십시오.
그동안 모자란 게시물 봐주시고 추천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혹 보고 관심있는 전자책 출판사 있으시면 연락바랍니다...(그럴 일은 잘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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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이 이토록 예민하게 구는데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여왕의 후계자인 왕자때문이었다.
그는 여왕의 친자가 아닌 사촌동생의 아들이었다.
여왕의 사촌동생은 다른 나라의 왕비로 가 있었지만 워낙 소국이라 조만간 사라질 국가였다.
그래서 여왕과 사촌동생의 이해가 일치, 왕자가 고려왕국의 후계자가 된 것이었다.
왕자는 어학에 그리 능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 평민, 귀족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그가 웃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연극이 열릴 때 뿐이었다. 여왕도 그것을 알았기에 왕자의 유일한 낙을 뺏지 않고, 왕립연극단을 통해 그의 웃음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왕자는 또한 사교술이 서툴러서 연극단원들에게 뭔가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덕분에 연극단원들은 그들의 가장 큰 후원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그걸 다 아는 단장으로서는 속이 타지 않을 수 없었다.
더더군다나 여왕은 지금 병중이었다.

[연극단원들에게까지 알릴 필요는 없어.]

여왕은 침상에서 단장에게 말했다.

[다만 왕자의 즉위식이 안정된 상황에서 열리기를 바라지.축하연은 특히나 화려하고 아름답게.]

여왕은 오늘 내일 하고 있었다. 실무자놈들은 얼을 빼놓고 있는 상황이니 그 몫을 다 짊어지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왕자에게 뭐라고 해명을 할 것인가? 그가 그토록 공을 들이는 극단원들이 지금 해체 위기라고?

“어서 오게.”

왕자는 신발을 신고 있다 말고 그를 맞았다.

“폐하께 갔다 왔나?”

“네…”

“상태는 자네도 익히 알고 있겠지. 저 상태대로라면 1주일을 못 넘기네. 즉위식 준비도 거의 다 끝냈고…남은 건 의전행사뿐인데…”

거기서 왕자는 말을 흐렸다.

“의전행사 중에 연극도 들어있었지?”

“아…네.”

저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 중에 민씨 가문출신의 배우가 있다고 들었는데. 빼야겠다.”

그의 단도직입적인 발언에 단장이 입을 쩍 벌렸다.

“즉위식때는 충성 서약도 받으니, 이젠 작위를 물려받았으니 충성 서약을 해야 되지 않겠나…더더군다나 여장군의 여식과 결혼을 한다니.”

“…..”

“그리고,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왕자가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에 서늘한 표정을 지었다.

“극단 내의 연애사건.”

“네.”

“내가 금지하자고 하지 않았던가? 어떻게 배우 둘이 도망을 치나? 그것도 즉위식이 언제 치러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건 단순한 심술이었다. 아무리 연극을 좋아하는 왕자라고 해도, 배우들 중 일부가 나간다고 해서 연극이 안되리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단순 그 자체였다. 더더군다나 구진은 배우가 아니라 연출이었다.

“……”

“다희를 꼭 데려오게. 구진인가 나발인가 하는 놈은 필요없어. 꼭 즉위식에 맞추어서 데려와. 내 즉위식끝나고 둘이 은밀히 할 말이 있으니.”

“…왕자님, 제가 드릴 말씀…”

“다 필요 없네. 자넨 그 여자만 데려오면 되는 거야. 내가 그날 밤 특별히 그 여자에게 성은을 내릴 테니까.”
 
왕자의 연극에 대한 관심이라는 것은 결국 이것밖에 안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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