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절대질문 - 멈춰 선 자녀의 성장동력을 재가동시키는 에너지
정진 지음 / 라온북 / 2023년 11월
평점 :
과거에는 농경 사회가 가정의 기본적 패턴을 결정하는 구조라서, 아버지뿐 아니라 할아버지, 증조부, 그리고 백숙부까지 한 지붕에서 사는 일이 많았다고 하죠. 이런 환경에서는, 원칙적으로 아이는 아버지의 모범과 본을 받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환경이었겠죠. 물론 가부장적인 낡은 봉건 이데올로기, 성차별적 행태 강요 등은 폐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정을 벗어 나 2차 집단에 속해서도, 리더십을 보이고 주변을 챙기며 어른스러운 행동으로 조직을 이끄는 사람들은, 대체로 아버지, 할아버지에게 교육을 잘 받고 자란 이들이 많더군요. 아버지의 결핍을 느끼고 자란 이나, 아버지와 원만한 관계를 이루지 못하고 자란사람은, 회사나 학교에서 융화되지 못하고 꼭 물과 기름처럼 따로 노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런 사람들도, 엄마의 사랑만큼은 넉넉히 받고 자란 경우도 많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사랑이 부족하면, 그 사람은 "큰 그릇"이 되기에는 뭔가 결여된 기량이 되기 쉽다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사랑을 주고 가까이 곁에 있어 주는 아버지가 될까? 요즘 세계적으로 단연 화두가 되는 게 바로 friendy입니다.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 주는 아빠! 사실 요즘 아이들은, 엄하고 어려운 아버지를, 지난 세대에서조차 구경할 일이 없기 때문에, "프렌디 스타일"을 과연 고마워할지 의문입니다만, 여튼 대세는 그것이라고 하네요. 우리 나라에서는, "프렌디'라고만 하면 "프렌드"와 바로 식별이 안 되어서, "프랜대디"라고 말을 좀 더 붙여 부르는 모습도 자주 봅니다. 사실, "프렌디 스타일"은 이미 한국 사회(특히 도시라면)에서는, 이미 자리잡은 지 오래입니다. 어느 아빠가 요즘 아이를 엄하게 가르치고 매를 들겠습니까. 어떤 때 보면 엄마보다 더 싸고도는 게 한국의 아빠들입니다. 프렌디 지향으로 아빠 할 일을 다한다면, 한국의 아빠들은 걱정 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이게 그냥 애늙은이 같은 소리가 아니라, 자기 인생은 자기 스스로 세부적인 데까지 설계해 간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아빠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해서 효용-비용을 따져 보니, 스마트폰 그거 별 쓸모 없다는 이성적 결론에 스 스로 도달한 거죠. 이런 아이가, "지금 학업에 몰두하면 나의 장래에 매우 유리하겠군." 같은 결론이라고 스스로 내리지 말라는 법 있겠습니까? 내가 필요해서 내가 하겠다는 데, 그걸 누가 말리겠으며, 타인의 보조와 부추김을 받아 하는 공부보다 얼마나 큰 탄력을 받겠습니까? 세상에 자기 주도만큼 생산 효율을 내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엄격하기만 한 게 "아버지 되기"가 아닙니다, 그는 베갯머리에서 아이와 함께 책을 읽어 주는 자상한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이 처럼, 어느 경우에 자상하고 어느 경우에 얼음처럼 냉정하며, 어느 경우에 불같이 단호해야 하는지 준별하는 게, 자기 주도로 제 인생을 이끌어나가는 아이를 키우는 첫걸음입니다. 특히 저는. 자기 전에 책을 같이 읽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너무도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독서가 무엇입니까. 아이에게, 생선을 먹여 주는 게 아니라 생선을 잡는 방법을 가르치는 첫걸음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가장 중요한 정신 성장의 발판을, 아빠가 직접 놓아 주는 아이, 그 아이는 사회에 나와서도, 타인에게 의지가 되고 가이드가 되는 리더 노릇을 하게 됩니다. 참 좋은 선배다, 상사다 싶은 분은, 가정을 방문해 보면 그런 느낌이 확연히 들더군요. 좋은 아버지가 되는 길은, 결국 사회에 이바지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사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뭐랄까 상궤를 다소 벗어나는 그 예화에 대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TV 보는 시간을 줄이고 운동에 전념하게 한다는가 하는 모습은, 그렇게 드물지는 않습니다. <부모 vs 학부모>에도, 그저 축구 하는 시간을 확 늘려 준 (대신 TV는 못 보게 한) 어느 가정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아이는 보란 듯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했죠. 운동이 학생에게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는, 우리의 상식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건 어느 정도 공감대가 이뤄졌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로서 파격적인 행보는 그에 그치지 않더군요. 요즘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안 사주는 부모는 거의 없는데, 구 소장은 사용요금을 (이제 중학생인) 아이게 스스로 낼 것을 제안했다고 합니다. 아이는 별 망설임 없이, "지불하는 돈에 비해 효용이 크지 않고, 꾀하려는 효과는 다른 방법을 통해서 거둘 수 있다."고 대답했다는군요.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