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들치의 인생 2막
버들치 지음 / 진서원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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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직장에서 거의 수십 년을 봉직한 후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건 말처럼 쉽지 않고 매우 어렵거나 심지어 고통스럽기까지 한 결단이고 과정입니다. 저자 버들치님은 증권맨으로서 평생의 경력을 보내다시피한 분인데, 퇴직한 후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비범한 성취를 이뤄냈습니다. 나이 오십이 넘으신 분들은 사실 새로운 지식을 배우기도 힘들고, 하물며 기술을 체득하기란 더욱더 힘듭니다. 우리도 스스로를 향하여 오십이라는 나이에 내가 과연 무엇이 되었을까를 떠올려 본다거나, 혹은 여태 해 보지도 않았던 새 분야에 도전한다는 게 얼마나 힘들지를 생각해 보면, 아마 몸서리가 쳐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 버들치님은 그런 분입니다. 

책을 받아들고 기대보다 더 두꺼웠던 볼륨에 약간 놀랐습니다. 그는 밥값을 어떻게 하느냐에 대해, 오십 넘은 남성들이 보통 잘못된 생각을 하기가 쉽다고 말말합니다. 밥값이란 꼭 일정 직업을 가지고 일정 액수를 벌어와야 하는 게 아니라, 그 나이와 처지에 맞는 일정 역할을 해 내면 충분하다고 지적합니다. 그를 사랑하고 이해해 주는 가족이라면, 그의 새로운 처지에 맞는 새 역할에 기꺼이 박수를 보내고 응원해 줄 테니말입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된 어느 상황을 놓고 공연히 미련을 가져 버릇하면, 그 엄청난 심적 스트레스로 인해 본인의 건강만 축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렇게 해서 건강이 훼손된다면, 그 무거운 부담은 가족들이 고스란히 나눠 져야만 합니다. 

돈벌이라는 게 결코 쉬운 길이 아니라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물론 누가 딱히 강조하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는 단돈 만원이라도 결코 쉽게 벌리지 않음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저자께서 주장하는 바는, 이렇게 벌기 어려운 돈이라는 대상을 놓고, 그저 부정적인 생각만 불려 나간다면, 돈이 벌리기는커녕 있던 돈도 수중에서 빠져나가기 십상이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돈은 경외의 대상도, 폄훼의 주제도 아닙니다. 돈은 그것을 수중에 넣기 위해 치밀한 전략을 사전에 짜야 하는 고지와도 같습니다. 어떤 창업을 해야 위험을 최소화하면서 성공의 가능성을 극대화할지는 당사자의 긍정적이고 합리적인 마인드셋에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강남의 아파트값은 왜 이렇게 비쌀까? 저자 역시 강남 입성에 당대 성공을 이룬 분이지만 이해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강북 아파트에 비해 품질이 뛰어나다? 그런 면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물론 입지 조건이 탁월하고 사회적 평판이 높기에 그런 가격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죠. 그렇다면 강남 개발 초기에 아파트를 취득하여 큰 부를 손에 쥔 초기 세대들은 그만큼 선견지명이 탁월해서였을까요?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해 단호하게 부정합니다. 운이 상당히 작용했겠고, 한 자리에서 우직하게 노력했었기에 이런 놀라운 성과가 가능했겠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일이 안 풀린다고 부모를 원망하는 모습을 보이지 말고, 나의 우직함과 성실함으로 하늘을 감복게 하여 천운이 당신을 따르게 하자는 게 저자의 주장 같습니다. 

저자는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기 위해 세 가지의 덕목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자립, 자존, 자족의 세 가지입니다. 누구나 풍족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성공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의 목표를 정하여, 사랑하는 가족을 염두에 두고 좌고우면 없이 일로매진한다면 빛나는 미래가 아마 우리 앞에 놓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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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의 도크 다이어리 15 - 별로 우아하지 않은 파리 여행기 도크 다이어리 15
레이첼 르네 러셀 지음, 함희영 옮김 / 미래주니어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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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다 꼬여서 휴일에 니키네는 파리(p40)로 휴가를 떠납니다. 이 15권에서 큰 분량은 없지만 코믹한 소동 때문에 인상은 강하게 남고요. 엄마는 언제나처럼 무심하고 그렇습니다. 호숫가에서 멀지도 않은 지점에서 그리 큰 소동을 겪는데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ㅎㅎ 뒤 p101 이하에서는 니키의 남친 브랜든까지 불러 음식을 해 먹이는데 그리 성공적이지도 않으면서 전부 자기가 다 했다고 생색은 오지게 냅니다. 과연 엄마가 해 주는 미트로프가 맛있었을까요? 브랜든은 워낙 착해서 맛있게 먹었을 것 같습니다.


맥스웰이라는 성씨는 이 15권에서는 p58에 처음 나옵니다. 휴일에 맥스웰 가족이 겪은 봉변은 사실 7월 4일 하루에 몇 시간 잠깐 겪은 사건이지만 이 일기책에서는 3일에 걸쳐 서술됩니다. 물론 거기 파리의 호수가 아주 큰 곳도 아니고 3일 간 표류할 수도 없으며 그 정도 긴 사건이었으면 인명 피해(....)가 컸겠지요? p65엔 손뼉을 치다 언니를 떨어뜨리는 브리아나의 철없음이 코믹합니다. 발로 바퀴 같은 노를 저어 운전하는 배는 독립 초기 미국에서 패들러 휠이라고 해서 영화 같은 데서 종종 보는 풍경 중 하나죠. 얼마나 낡았으면 바퀴에 걸린 걸 빼는 도중 바닥이 뽀개질 정도니...


p72에 다시 트레버 체이스씨를 만나는 대목에서 세상 참 좁다고 느꼈습니다. 이런 장르에서 이 정도 기막힌 우연의 일치야 일도 아니라서 예상이 좀 되긴 했지만 너무했다 싶었습니다. 


이 15권은 가상의 보이그룹 "배드 보이즈"의 라이브 행사에서 무려 니키의 친구들이 (아직 밴드 이름도 결정 안 된 판에) 오프닝 공연을 벌이는 게 주된 내용입니다. 배드 보이즈는 전세계가 알아주는 아이돌인데 그 선망하던 연예인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는 게 어디인데 아예 공연까지 한 무대에서 한다는 게... 이런 판타지는 사실 이 또래 여학생들이 마음 속에 언제나 품곤 하죠. 현실 가능성과는 무관하게 말입니다.


근데 꿈이 결국 이뤄지는지는 모르지만 방해꾼은 도중에 어지간히 등장하게 마련입니다. 체이스 씨가 소개하는(p147) 빅토리아 스틸은 니키들이 익히 아는 순악질 여성, "드래곤 레이디"입니다. 전직 올림픽 피겨 스케이터 금메달리스트라는 게 실제 인물 토냐 하딩을 잠시 떠올리게도 하네요. 이 빅토리아 스틸이, 니키에게는 천하의 앙숙인 매킨지 양과 다시 콜라보(?)를 이루니 원수는 과연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나 봅니다.


p153에는 "천박, 무례, 이기적이고 버르장머리없"다며 온갖 악평이 쏟아집니다.  그나마 매킨지는 아빠가 부자이고 친구라도 많지만, 가망 없는 루저(p122)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여튼 p177에서 맥킨지는 다시 등장하며, 니키는 생각지도 못하게 스틸 아줌마와 한패가 됩니다. 저 앞 p137에서는 "가뜩이나 No라고 말한 (체이스 씨)..." 이라고 하는데 이때만 해도 니키는 자기가 매킨지한테 선심이나 쓸 수 있는 처지라고 착각했던 거죠. 그런데 스틸 아줌마는 체이스 씨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이 매킨지와 손을 잡았으니... 


이 15권은 배드 보이즈를 향한 열렬 팬심이 묻어나는 일종의 헌정 일기입니다. 그래서 곳곳에 배드 보이즈를 소재로 한 심리 테스트가 나오는데, p116 립글로즈, p106 파티 드레스, p96 데이트, p94 favorite, p163 생파 아이템 등이 소재로 나옵니다. 저자가 아마 이 나이 또래 딸을 두고 있기에 가상으로 이렇게 절절한 팬심이 묻어나는 아티클을 양념으로 쓸 수 있었겠습니다.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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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의 힘 - 조직심리학이 밝혀낸 현명한 선택과 협력을 이끄는 핵심 도구
박귀현 지음 / 심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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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많은 조직들은, "과거의 방식" 더이상 현재와 미래에 통하지 않으리라는 터프한 예상과 관점에 이제는 자발적으로 동조하는 듯합니다. "무슨 소리야, 이 잘되던 걸 왜 갖다버려?" 같은 반발은 적어도 의식적으로는 튀어나오지 않습니다. 방향성과 비전에 대해선 합의가 이뤄졌는데, 현장에서 문제의 절박함에 걸맞는 실천이 이행되는지는 또 별개 문제입니다. 개인의 의식 구조에 비유하자면, "머리로는 충분히 납득했으나 몸에 습관이 배이지 않았고, 가슴으로는 여전히 거부감이 남은" 상태에 가깝습니다. 머리와 손발이 각각 따로 노는 셈이니, 결국 각성도 건성에 머묾이나 마찬가지라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어떤 분은 어학 학습을 두고선 "국영수가 아니라 체육이 되어야 한다"고도 말하던데, 사실 아무리 유용한 방침, 이론이라 해도 학습 단계에 머물면 안 됩니다. 말 그대로 몸에 밴 "체육" 단계에 이르러야 구체적인 성과가 나옵니다.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입니다. 

혁신을 구체적 방안까지 마련해 놓은 조직도 왜 현장에서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법과 진단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이 고안한 "도미노론"에 의해 설명합니다. 미국의 경영서, 자계서 저자들이 취하는 태도가 흔히 그렇습니다만, 마인드셋을 바꿔 놓을 패러다임에 대한 설파는 최근 자제하는 모습입니다. "당장 당신의 일상에서 무엇이라도 바꿔 놓을 '방법론'"을 제시하려 애쓰는 게 시장의 대세이며, 이것이야말로 독서 시장에 임하는 유능한 기업가(저자 포함)의 혁신 그 실천이겠기 때문입니다. 혁신을 말하는 저서가 자신은 구태의연한 장르적 양식에 기댄다면 그만큼 큰 아이러니가 또 없겠지요. 혁신은 구색이 아닌 "명실상부"라야 설득력이 있고, 실제적 효용을 담보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타성을 일거에 제거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적용시킬 수 있는가? 저자는 조직 안의 비효율 요소를 일신할, "첫번째 도미노"를 찾아 "바른 방향"으로 넘어뜨리는 게 중요하다고 합니다. 첫째 도미노를 찾는 것도 쉽지 않고, 찾은 도미노가 넘어져야 할 바른 방향을 알아내는 것은 그 다음으로 중요하고 어렵습니다. 어느 조직, 현장에나 이런 첫번째 도미노 같은 요소, 장애물이 존재하고, 눈밝은 경영진이 반드시 이를 찾아 과감한 혁신의 첫발을 떼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저자는 "참된 의미의 혁신"과 꼭 구별되어야 할 것이 "기존 코스에 새 메뉴 하나의 추가"라고 지적합니다. 이미 완성도 높게 꾸려진 코스에 사실 새 메뉴를 단 하나라도 전체와 조화를 이루게, 혹은 미식가의 입맛을 새로 자극하게끔 추가하기도 결코 쉬운 과업이 아닙니다. 헌데 기존 코스가 변화를 거부하며 테이블을 잔뜩 장악하고 있는 한, 까짓 새 메뉴 하나가 작은 자리를 차지해봤자 참석자의 눈길도 끌기 쉽지 않습니다. 기존의 판을 송두리째 바꾸지 않고는, 어렵사리 이룬 새 메뉴의 인트로덕션도 대양에 빠뜨려진 잉크 한 방울처럼 무의미해지기 일쑤이며, 이런 전체적 구조에의 타성적 흡수야말로 모든 혁신 노력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거대한, 그리고 일반적인 함정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엄밀히 말해 혁신이 전무한 조직은 없으며, 다만 혁신의 반가운 새싹이 무심한 분위기에 매몰되고 마는 게 진짜 문제라는 겁니다. 

"추가된 혁신"은 차라리 "없는 혁신"과 결과에 있어 다를 바 없으니, 타성을 이루는 거대한 판을 통째 엎는 "결단"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 책에 나오지는 않지만, 예컨대 삼성이 오늘날의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서기까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벤트는 바로 이건희 회장의 "불량품 화형식"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다시 들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도, "기존의 관습과 패러다임은 격변하는 현실 앞에 아무 쓸모 없음"을, 모든 조직원이 지켜보는 앞에 거대한 선포식을 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는데, 이게 바로 20여년전 이건희 회장이 내린 결단과 다를 바 전혀 없습니다. 조직원들의 주의를 확실히 끌고, 절박한 경각심을 고취한 후, 조직 전체가 무슨 방향으로 나갈지 분명히 정하는 게 CEO 결단의 핵심 의의라는 것입니다. 

가장 어려운 건 첫걸음을 확실히 떼는 "결정"이며, 이 결정에서 혁신의 방향성이 정해집니다. 이 방향이라는 게 "모든 타성을 일소할, 도미노가 넘어질 바른 방향"임은 이미 앞에서 지적되었습니다. 이처럼 올바른 방향이 정해지고서도, 도미노 게임을 해 본 분들은 알겠지만 마디마디에 어떤 결절이 발생하지 않아야 연쇄 전도가 효과적으로 이뤄지죠. 관리자는 첫 도미노가 제대로 넘어진 후에도, 바른 방향성이 지속되도록 "통제"가 효과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면서, 이의 적절한 사례를 여러 기업들의 현장 관리 케이스 스터디를 통해 독자에게 알기 쉽게 편집하여 들려줍니다. 이를 두고 "깜빡이(블링커)"와 "룸미러"의 기능에 간명하게 비유하는 데서 저자의 재치가 드러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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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번째 세계의 태임이 텔레포터
남유하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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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나서 묵직한 생각의 무게가 머리를 누르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162번째의 세계... 

표지에도 나와 있듯이, 이 소설은 미래를 배경으로 해서 숨가쁘게 전개되는 SF 소설입니다. SF 장르라고 해도, 해외에서는 이미 나올 것이 다 나온 까닭에, 여간 기발하게 사건이 펼치지고 주제가 제시되지 않으면 팬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죠. 그런데 이 작품은, 우리 한국 작가의 솜씨인데도(인데도?) 대단히 참신한 내용과 한국 독자들에게 잘 어필하는 감각으로 쓰여진 게 놀라웠습니다. 

우선 미래가 배경이지만, 그렇게 먼 미래는 아닌 듯합니다. 각종 테크놀로지가 잘 발달한 점은 다른 SF의 그것과 흡사하지만, 제가 느끼기로는 "현재 동시대인의 입장에서 좀 나와 줬으면" 하는 기술 문명 중에서, "현재의 기술 발전 수준으로 미루어 가장 출현할 가능성이 높은 것만" 골라 가면서 등장한다는 게 가장 주목할 만합니다. 이를테면, 파워 수트(영화 "아이언맨"에 나오는 것과 거의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전자 결제 시스템(지금과는 비교 안 될 만큼 발전한 모습 - 이 소설이 상정하는 미래 역시,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의 갈등이 첨예하게 벌어지고, 그 와중에서도 자본주의는 그 효율을 극단까지 추구하는 속성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성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시선 스캐너(예를 들어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의 하체에 시선만 줘도 근처 방법 시스템 단말에서 경고가 나오고, 상황을 봐서 바로 공권력이 출동하는 방식입니다), 장기 손상 환자를 위한 이식 수술 기술(역시 돈 없으면 혜택을 못 받는다는 점에서 디스토피아적 요소입니다), 그리고 수소 연료 배터리 등입니다. 

제가 감탄한 건, 설정의 현실성이었습니다. SF가 판타지와 구별되는 지점은, 얼마나 현재, 독자와 작가가 공유하는 현재와 밀접한 연계, 맥락을 지니고 있느냐입니다. 아무리 고도로 발달한 기술 문명, 그에 대한 세부적인 묘사가 펼쳐지더라도, 이제는 그런 풍성한 상상만으로는 독자의 관심을 끌기 어렵습니다. "현재와 밀접하게 연결된 미래의 기술"만을 소재로 해서도 충분히 이야기 하나가 나올 만큼, 미래를 향한 전망의 시각도 다양해지고 도구(tool)도 넘쳐납니다. 과거에는 미래 기술 문명에 대해 이야기 좀 풀어 내는 것만으로도 희소한 재능으로 평가받았지만, 지금은 현재에 얼마나 적실한, 근접한 내러티브를 설계하느냐가 작가의 센스라고 하겠습니다. 작가 남유하씨는 우리의 세계가 바로 수십 년 후 고스란히 맞이할 수 있는 미래를 세심하게 고안하여 우리 앞에 제시하고 있습니다. 제가 위에서 든 네 가지 놀라운 신기술이 그 예이고, 이 소설의 주제가 된 시간 여행을 둘러싼 그 모든 시스템이야 두말하면 잔소리겠습니다.  

격조 있는 SF는 현실과 사회상에 대한 풍자도 빼놓지 않습니다. H G 웰즈는 "타임 머신"에서, 계급투쟁과 빈부 갈등으로 인해 황폐화한 미래상을 충격적으로 형상화합니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곳은 역시 한국인데요. 한국에 한정되지 않고 세계 전반으로 확정된 것 같지만, 이 미래는 완전히 여성 중심으로 고착된 체제입니다. 저항은 주로 사이버 공간에서 일어나는데, 사이버공간이라고는 해도 이미 인간 생활에서 중추적 비중을 차지한지 오래라, 현실에서 도로나 공공장소를 점유하고 벌어지는 시위, 혼란 못지 않게 사회에 부담을 주는 결과입니다. 해킹이나 시스템 에러 발생시 우리가 겪는 각종의 불편을 생각하면, 그리 먼 미래라고도 느껴지지 않는 설정입니다. 

일부 남성 위주의 세계관을 가진 분들이 반여성적 언명을 공공연히 표시하고, 여성부 등에 대한 거부감을 표시하는 모습은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 주변에서 목도하는 일입니다. 또, 짝을 찾지 못한 남성 중 일부가 동성애적 경향으로 흐른다든가 하는 현상(당사자들은 물론 이런 생각에 크게 반대하지만)도 마찬가지죠. 세대 갈등, 성별 대립, 계급 모순은 현재와 하나 다를 것 없고, 바로 이 점이 이 소설의 가장 탁월한 점입니다. "난자"를 둘러싼 이 소설의 주된 내러티브도 결국 모계 중심 사회의 모순에서 비롯했다는 암시에 이르러서는 고개가 숙여질 정도입니다. 그건 바꾸어 말하면 현재의 남성 우월주의가 얼마나 큰 모순을 지녔는지 우리에게 깨우치려는 의도가 아니겠나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유머 코드는 철저히 현대 한국인의 그것에 맞추었지만, "장식체 말투" 등은 그닥 장식적으로 들리지 않았고,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경박한 반응과 표현이 나온다든가, 캐릭터들의 행태 변화가 큰 설득력이 없다든가 하는 점들이 아쉬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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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듯 가볍게 - 인생에서 여유를 찾는 당신에게 건네는 말
정우성 지음 / 북플레저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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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오늘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날이 되길 바라며 우리는 직장에서 가정에서 열심히 땀 흘려 뛰고 가족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작은 행복에 만족할 줄도 알고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내어 살갑게 대하기도 해야 하는데, 사는 게 워낙 힘들기도 하고 경쟁에서 뒤떨어지면 안 된다는 공연한 강박 때문에, 정작 소중한 것을 놓치는 게 아닌지 불안감이 엄습하기도 합니다.  

나는 아직 그(그녀)에 대한 감정이 남았습니다. 가능하면 그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서 같이 더 추억도 쌓아가고 알콩달콩 감정도 나눠 갔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그녀)의 반응은 냉랭합니다. 혹은 데면데면합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변할 사람 같았으면 벌써 변했습니다.(p22)" 아마 나 역시, 이렇게 돌아서 버린 상대의 상태를 벌써 알고 있었겠습니다. 그런데도 미련을 놓지 않는 건, 나 혼자 아직 감정을 유지 중인 게 억울하기도 하고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어 뻔한 현실에 애써 눈을 감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내가 추해집니다. 손해 보고 물러난다는 생각으로 질척거리면 본인만 더 추해집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헤어짐이 정답입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답은 간단할수록 그게 정답일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오해가 있으면 조속히 풀어야 합니다. 자칫하면 돌이킬 수 없는 관계의 파탄으로 이어지거나, 관계는 관계대로 붕괴하고 나 자신의 마음에도 큰 상처가 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도 "가벼운 오해라면 적극적인 해명으로 풀어야 한다(p50)"고 조언합니다. 그러나 그게 심각한 오해라면, 그래서 말 몇 마디로 간단히 풀기 어렵거나 반대로 불화가 더 크게 번질 가능성까지 있다면 어떨까요? 이럴 때에는 그냥 아무 말도 말고 상대에게 시간을 주라고 합니다. 상대도 (최소한의 말이 통하는 이라면) 내가 왜 침묵을 지키는지 생각을 해 볼 것입니다. 이 구절을 읽으며 저는, 제가 참 각박하게 살았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습니다. 다툼이 생기면 논리로 상대를 제압하려고만 했지, 그의 감정이 아물고 난 뒤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할 여유를 한 번이라도 줘 볼 생각을 했던가? 이런 배려를 벗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게 중학생 때였으니 삶이 참 메마르지 않았던가 하고 말입니다. p137을 보면 똑같은 상황을 다른 관점에서 본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자는 애정 표현을 수시로 해 주라고 합니다(p86). 우리 한국인들은 구미 사람들에 비해 감정의 소통 기술이 서툰 면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고 돈을 많이 벌어도 내 주변에 날 진심으로 이해해 줄 사람이 하나도 안 남았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사랑한다는 진짜 내 감정을 제때 표현 못 해서 떠나간 이들을 두고 결국은 후회의 감정만 가득하다면 내 삶이 너무도 공허합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사소한 것도 내가 아끼고 어루만지면 세상에 다시 없는 보석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원래 내가 다시 보기 힘든, 나에게 꼭 맞는 소중한 사람이었다면 그 회한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대체 뭣 때문에 망설입니까. 더 나은 사람이 나타날 것 같은가요? 

사회 생활 하다 보면 내 생각을 딱부러지게 말하기 어려울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애매하게, 최대한 두루뭉술하게 표현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들 합니다. 그런데 매사가 이런 식이면 결국 누구한테도 신뢰를  못 쌓을 수 있습니다. 듣기는 싫어도 저 사람은 겉과 속이 다르지는 않다, 이런 믿음이 어느 순간 세평의 대세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어 속담에 "정직이 최상의 책략"이라는 말이 있죠. 책략과 정직은 서로 전혀 맞지 않는 관계인데도 말입니다. 최고단수의 속임수, 처세술은 아예 속과 겉이 같은 일관된 솔직함이라는 게, 사실 경험이 많이 쌓이고 쌓여야 이를 수 있는 깨달음 아니겠나 생각합니다. 

사는 것 자체가 고난의 연속입니다. 석가모니는 사고(四苦) 중 하나로(어쩌면, 으뜸가는 괴로움으로) 태어남을 꼽았습니다. 생명의 탄생은 무엇보다 큰 축복인데 그는 태어남이야말로 모든 고난의 시작이라고 갈파한 것입니다. 생이 그 시초점부터 괴로움이라면,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이런저런 괴로움은 딱히 억울할 것도 한맺힐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좋은 날이 더 많지 않았냐고 저자는 말합니다. 불평불만으로 이 아깝고 유한한 생을 무익하게 채우기보다는 희망과 긍정으로 마음을 다듬고 주변에도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게, 소중한 생을 부여받은 인간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한 세상 살다 가는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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