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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억 명 - 전 세계 100억 인류가 만들어낼 위협과 가능성
대니 돌링 지음, 안세민 옮김 / 알키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처 음 책을 받아들고는 기분이 뿌듯했습니다. 원래 두툼한 책만 보면 눈이 휘둥그레지게 좋아하는 저이지만, 이 책은 그 달고 있는 <100억명>이라는 제목에 참 잘 어울리게, 한 페이지도 소홀히할 수 없는 빼곡한 자료와 증거, 그리고 갖가지 학문적 도구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저자 대니 돌링 교수는 "꽉 들어차 있다"는 표현을 주로 부정적 뉘앙스로 책에서 여러 차례 언급하지만(실제로,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지배층들은, 위정자로서 골칫거리로 여겼던 도시 빈민들에 대해 부정적 태도 가득한 어조로 그 표현을 사용했지요), 독자인 제가 보기에는 "책 한 권이 이처럼이나 많은 지식과 정보를 전달해 줄 수도 있구나."하는 기쁨으로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었습니다.
천체 의 운동 방향과 위치를 예측하다가 수학, 물리학 등 갖가지 방면의 근대 학문이 태동한 것처럼, 생산적이고 유용한 주제는 때로 의도치 않게 여러 학문의 방법론을 발달시키기도 합니다. 근자에 모든 학문의 호수처럼 작동하고 있는 경영학도, 인근 경제학뿐 아니라 수학, 심리학, 행정학, 사회학 등 다양한 영역의 기법과 원리를 끌어다 쓰고 있죠. "인구학" 역시, 이 과제를 제대로 해명하여 많은 소비자, 대중, 정책 결정자들에게 만족스러운 답을 주려면, 역사학, 통계학, 사회학, 도덕철학, 고고학, 경제학 등 그야말로 전방위적인 학적(學的) 도구를 동원해야 합니다. 이런 다방면의 수단을 자유자재로 쓰려면, 연구 수행자 본인이 만능에 가까운 지성인이라야 하고, 기능의 발휘에만 치우치지 않게 적절한 양식과 균형감각으로 올바른 결론을 이끌어 낼 또다른 정신적 성숙함을 갖춰야 하죠. 저자 대니 돌링은 바로 이런 자격과 자질을 갖춘 사람입니다.
이 책은 인류학책 입니다. 기독교의 구약에도 나오는 것처럼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바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 원초적으로 부여된 미션입니다. 칭기즈칸이 그 무고한 생명을 무차별 살상하면서 기도한 바는 바로 "제 씨의 퍼뜨림"이었습니다. 20세기의 악귀 히틀러가 소위 "레벤스라움"을 확보하기 위해 저지른 대학살극 역시, 그 목표는 제 종족 유전자의 안정적 확산에 있었습니다. 인간은 불리한 육체적 조건만을 갖춘 채 이 땅에 던져졌고, 그를 극복하기 위해 갖가지 분투를 전개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문명이고, 역사이며, 전쟁이고, 또한 평화입니다. 저자 돌링은 시야를 9천 년 전으로 돌려, 그 시절 우리 조상들은 대체 무슨 생각과 의도로 나무에서 내려와 땅을 일구고 돌을 다듬으며 불을 피웠는지 조명합니다. 우리는 그간 아찔할 정도로 발달된 인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들의 삶에 대해 추측할 뿐, 사실 그들이 누구였는지에 대해 아는 바 아직도 거의 없습니다. 책은 주로 우리 당대의 전후 90년사를 다루니, 9천년이란 시간은 도무지 비교가 안 될 만큼 비대칭적으로 우월합니다. 그러나 돌링은 "역사는 그 기준을 시간만으로 삼아 나눌 게 아니다. 인구의 증가세를 통해 가를 수도 있다."는 전제 하에, 이 방대한 책을 집필했습니다. "지구상에 살았던 대부분의 인구는, 문자가 생기고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 이후에 산 사람들이다." 이게 무슨 어처구니 없는 말일까요? 분명 우리는 크로마뇽인이 2만 년 전에 등장했고, 역사 시대의 시작은 기껏해야 3천 년 전으로 알고 있는데도 말이죠. 시대 구분을 그러나 양이 아닌 질에 의해 가중치를 둔다면, 분명 선사(先史)의 그 긴 기간은 인류의 수효가 극히 적었던 시절입니다. 이 지구에 태어난 대부분의 인구는, 분명 우리와 가까운 시대에 태어나 생을 마친 이들이고, 이런 관점에서라면 우리는 인간이라는 종에 대해 제법 아는 바가 많습니다.
이 책은 그러나 사회학 책 이기도 합니다. 제법 자신이라는 종의 과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우리지만, 앞으로 전개될 미래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 없고, 이 때문에 생각이 갈리는 이들 간에 비생산적인 다툼을 치열하게 벌이기도 합니다. 책에 등장하는 대표적 그룹은 "이성적 낙관주의자(세상은 그 와중에서도 일종의 균형점을 찾아가게 마련)", "이성적 비관주의자(무슨 소리! 백약이 무효이며 다 죽게 생겼거늘)", 그리고 "합리적 개량주의자(어찌 될지 정확히야 모르지만, 가능한 것부터 하나하나 고쳐 나가자)"들입니다. 이들은 맬서스가 처음으로 이 논쟁적인 "인구"라는 이슈를 수면 위로 띄운 이래, 전혀 상대에게 그 최소한의 장점도 인정 않을 만큼 치열하게 대립해 왔습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을 선포한 이래 보-혁 논쟁은 그 열기가 상대적으로 잦아들었지만(저자 돌링 교수는 이 선언에 대해 "매우 경솔했다"며 비판합니다), 인구가 앞으로 어떤 추세로 변화할 것인지, 그에 대한 대비책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다른 무상한 연구결과만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올 뿐입니다. 이 삼각 대립 구도가 그 배후 세력, 혹은 스폰서만 바꿔가며 날이 갈수록 풍성한 논거를 키우며, 어떤 가상의 수렴점에서 점점 멀어져만 가는 것도 희한한 특징입니다. 이른바 선진국 진영 내부에서도, 교토 협약 지지세력과 그 반대파, 지구 온난화와 오존 층 파괴의 실체에 대해 아예 부인하고드는 자본 측의 이해까지 얽혀, 도무지 합의의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 책은 상당한 의미에서 도덕철학도 논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에게 그저 쌀쌀맞은 귀족들의 지배논리만 대변하는 나팔수로만 여겨지는 맬서스 역시, 원래의 의도는 기독교 성직자로서 "불결한 하층민들의 끝없는 성욕"에 대한 개인적 혐오였으니, 그 나름대로는 정결한 도덕의 회복을 지적하고자 헸었을 터입니다. 그러니 인구 문제는 그에게 있어서 곧 도덕의 문제였으며, 가난이 곧 죄에 대한 업보라고 보았던 점에서 3000년 전 아리아 족의 드라비다 족 정벌 동기와 다르지 않습니다(이후 일종의 종교로서 카스트 제도 확립). 종교라고 하면 무조건적인 박애가 연상되어야 하는데, 이처럼 냉혹한 규율 강요와 결부된다는 게 아이러니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이 책이 후반부에서 소개하고 있듯, 1970년대 말의 중국이 "산아제한만이 우리의 살길"이라는 결단으로 대대적 강제를 벌인 사실 역시 참 역설적입니다. 중국은 명실상부한 공산주의 국가였으며, 그 모든 구체제의 잔재를 전복하려 든 것도 인민 해방의 동기를 내세우고 벌인 캠페인인데, 정작 인민의 가정 생활 단속에 있어 지독한 귀족적, 금욕적 자본주의 이데올로그(ideologue)가 들고 나온 "대안"과 차이가 없었으니 말입니다.
이 책은 지금까지 우리가 봐 왔던 연대기 기준, 정치 중심의 스토리를, 처음으로 50억, 60억, 70억 도달 단계로 끊어 이정표를 잡고, 이 사이에 있었던 각종의 대사건과 인구 변화를 추이를 하나하나 맞대응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책입니다. 인간의 존재는 양이 아닌 질에 의해 더 큰 영향을 받고, 그런 의미에서 지난 한 세기는 그 앞의 모든 시기를 능가할 만한 가중치를 지닙니다. 앞에 쌓아왔던 그 모든 업적보다, (놀랍게도)가 장 최근 100년 간에 쌓아올린 업적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실 각종 통계, 즉 자원 소비량, GDP의 성장 등의 지표를 보고서도 알 수 있었지만, 저자는 인구라는 가장 직관적이고 단순한 수치를 통해 이를 "선언"합니다. 근거가 뭐냐고요? 우리는 오늘도 직장에서 열심히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귀가했습니다. 이게 다 무엇이 목적이냐, 바로 먹고 살고자 하는 일입니다. 인류는 무엇때문에 자연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애써 환경과 분투하는가. 바로 후손을 계속 남기기 위한 목적입니다. 그 목적이 달성되었는지 여부는 바로 인구의 수치가 증명하는 바 아니겠습니까?
저 자는 그러나 신중합니다. 100억의 인구는 "그간 열심히 잘해왔네"의 축복입니까, 혹은 "지구에 이만한 하중을 주었으,니 곧 그 대가를 치르리라"는 재앙에의 경고입니까? 어떤 의미에서 저자는 "사람이 우선이다."를 일관되이 주장합니다. 맬서스의 오류는 비관이냐 낙관이냐에서가 아닌, 도덕과 윤리(그 나름으로 생각한)를 인간보다 우선했다는 데서 비롯한지도 모릅니다. 무조건 남을 적대시하고, 책 한 권에서도 만인의 공적 하나를 찾아 일단 저주를 하고 보는, 정치에 매몰된 어리석은 독자 역시 방향만 반대일 뿐 이 오류에서 벗어나질 못했습니다. 왜 "고작' 인구 변화 하나를 분석하기 위해 이렇게나 많은 도구가 동원되어야 할까요? 답은, 인구는 그저 인구가 아닌 생명의 탄생, 지속, 그에의 존중 그 모든 흔적의 총체이기 때문입니다. 덜 낳고 더 낳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태어날 인구를 어떤 시선에서 보고, 그 태어난 인구가 자신과 타인의 삶을 어떤 태도로 맞이하게 되는지에 따라, 이 100억의 인구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될 수도 있고, 진정 전 우주를 통틀어 유일하게 만발한 장미꽃 다발일 수도 있습니다.
이 책은 대니 돌링 교수의 "백억 대에 달하는" 무지막지한 박식, 따뜻한 유머 속에 녹아 있는 군데군데의 자기 고백이 어우러져 더 매력을 더합니다. "인간은 그저 소속 문화가 규정지은 권위에 굴복해야 생존이 가능한 나약한 존재"라며, 그 예로 조지 오웰이 스페인 카탈루냐에서 겪은 "손님 눈을 똑바로 보는 웨이터"에 대한 두려움 토로를 인용합니다. 돌링 교수처럼 빼어난 지성인이, 10대 시절을 시골에서 자란 개인적 체험을 이처럼 기록 문헌에 투영하는 점이 재미있었습니다. 통설에 의하면 조지 오웰의 "두려움"은 그런 동기가 아니었을 텐데 말입니다. 인간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과, 그런 토양에서만 자랄 수 있는 합리적인 대안, 혹은 그 맹아의 발견이야말로 이 책을 읽은 진정한 수확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