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시대 십대는 소통한다 - 네트워크화 된 세상에서 그들은 어떻게 소통하는가
다나 보이드 지음, 지하늘 옮김 / 처음북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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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social"이라는 단어는 구미에서 확고한 고유 용도가 있던 말입니다. 근대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사교(社交)"라는 번역어에 대응하는 게 이 단어이니 그 오래고 깊은 연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최근에 들어 인터넷 혁명과 맞물려, SNS라는 신개념 가상 환경의 탄생과 함께, 사람들의 생활 패턴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중년층과 노인들도 남는 시간을 이용해 자신들을 담거나 스스로 찍은 사진을 웹에 올리고, 카페(커뮤니티)를 만들어서 그들만의 소통을 즐기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어떤 분들은 학생이나 젊은이 이상으로 큰 열성을 가지고 이에 임하는데, 때로는 정도가 지나쳐 주위의 비웃음을 사기도 합니다. 그런데,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중노년층의 몰입도나 참여도가 우리처럼 높지는 않은가 봅니다. 그래서, 대개 성인들은 학부모의 입장에 서서, 아이들(10대 중심)의 지나친 SNS 탐닉, 참여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보는 게 보통인 듯합니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입장을 기본적으로 깔고 시작합니다. 성인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이 SNS에서 거리를 두고 있으며, 자신들보다 SNS에 훨씬 밀착하여 시간을 보내고 "존재를 투자"하는 10대를 이해 못 합니다. 이런 자녀를 둔 어른이라면, 아이들에게 "얘야, 이제 그 정도면 충분하니, 그만 두렴." 같은 피상적인 조언을 보내기 일쑤입니다. 어른과 아이들의 갈등은 이제 SNS를 두고서 제 2전선이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저자 다나 보이드는 MS나 미국 유수의 대학에서 선임 연구원으로 커리어를 쌓은 사람이고, 요새 아이들이 도대체 왜 SNS를 둘러싸고 기성 세대가 접근하기 힘든 성을 쌓고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는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가며 설명해 줍니다.

저자는 "SNS로 소통하는 10대"라는 주제를 두고 모두 8가지 카테고리를 통해 논의를 펼쳐 나갑니다. 각 장은 "기성세대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10대" 이야기를 하며, 자연스럽게 SNS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독자가 이해할 수 있게 전개됩니다. 한마디로, SNS와 10대를 동시에 배울 수 있는 셈이죠. 되풀이되는 말이지만 SNS는 10대의 전유물이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SNS를 가장 효율적으로, 남김 없이, 그리고 "전위적으로" 사용하는 계층은 10대입니다. 하나를 알면 다른 하나를 덩달아 알 수 있는 구조적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 정체성: 사실 이 점은 SNS의 주인공인 10대가 가장 자신없어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한 성숙한 개인으로서 10대는, (당연히) 다른 세대에 비해 가장 정체성 파악과 형성이 취약한 세대이기 때문이죠. 만약 SNS를 정체성 형성의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10대는 그 기능적 수월성(秀越性)에 비해 내용적 성숙성이 비대칭적으로 떨어지는 유저들입니다. 이 챕터는 성인이 읽기에 가장 편안하고 재미있으며, 동시에 책임감을 더해 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성인은 아이들과 대립하고 싸우는 입장이 아니라, 이 미숙하고 어린 인격을 보호해야 할 기본적인 책무가 있다는 점을 다시 상기시켜 줍니다. 10대는 인격적 미숙함 때문에 미로에 빠져 있지만, 기성 세대는 네트웍 환경의 생소함 때문에 갈 길을 못 찾는다는 저자의 진단이 볼 만합니다.

2. 3. 사생활, 중독: 개인적으로 저는 SNS를 멀리하는 가장 큰 이유가 이 프라이버시 이슈의 취약함입니다. 나를 적당히 가리고 보호할 줄 아는 점에서, 아이와 어른이 차이나는 것이라고 교육 과정에서 배운 세대로서, 사진이건 인적 관계이건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SNS에 아이들이 그렇게나 많은 데이터, 동시에 자신의 자아 일부와 열정을 "업로드"한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사실, 어른이라고 해도 급격한 산업화 과정 속에서 개인적 자아를 합당하게 발전시키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분별없는 아이들마냥 컴퓨터 앞에 "홀릭" 되어 붙어 사는 모습을 보면 한심해서 혀를 차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야 누군가에게 인정 받고 관심 받고 싶어서 그런다고 하지만, 어른이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왜 자기 정보를 불특정 다수 앞에 올리고 평가를 안 받느냐며 채근하는 일까지 있으니 기가 막힐 일이죠.  정신 연령이 10대에 머물러 있는 소치입니다.

저자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들은 대체 사생활 개념이 없는거냐? 뭐하러 소중한 자아를 그처럼 노출시키고 사니?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전 이게 바로 제대로 된 어른의 태도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자는, 일부 철없는 기성세대가 아닌, 앞으로 변화하는 세상의 룰을 익히고 때로는 만들어나갈 10대의 입장에서는, 이 모든 것이 "새로이 등장한 사회화의 한 패턴"이라고 정리합니다. 마치 농경사회에서, 대도시로 진출하려는 자녀를 두고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라며 만류하는 부모와도 유사하다는 거죠. 저자는 자신의 세대가 합의를 이미 이룬 듯 보이는 "사생활"의 개념 역시 지극히 유동적이고 가변적임을 지적합니다.


3. 4. 5. 위험, 왕따. 불평등: 이 역시 고리타분한 어른들이, "SNS 잘못쓰면 이렇게 돼!" 하며 아이들 겁줄 때 단골로 등장하는 이슈입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 SNS의 본질과는 무관한 사회 문제이며, 저자는 이를 자세한 논의를 통해 날카롭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3장 위험에서는 소위 아동, 청소년을 상대로 한 성범죄의 위험에 대해 자세히 말합니다. 특히 저자는, 미국 학부형들 사이에 10대 성매매, 혹은 그루밍(성매매 유도)의 온상처럼 여겨지는 마이스페이스를 소재로 여러 사례를 들어 줍니다(저는 이 외에 크레이그리스트도 그런 선입견 가득한 매체의 대표로 알고 있었습니다. 크레이그리스트는 지금은 이미 한물갔다고 여겨지는 메신저이므로, 주로 SNS를 논의대상으로 하는 이 책에서 언급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자의 결론은, "어쨌든 아이들은 SNS를 통해, 사회의 위험과 필요악, 부수적으로 치러야 하는 대가 따위를 교묘히 구별하며 정글의 법칙을 익혀 나간다"고 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막는 게 능가 아니라는 거고, 우리 식으로 말하면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겠냐는 말과 통합니다.

SNS 왕따는 요즘 우리도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통한 신종 왕따 수법 때문에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집단따돌림 문제는 사실 일본이나 우리 뿐 아니라 미국, 유럽에서 더 심합니다. 우리는 그나마 신체적 조건, 성격 따위가 주 소재일 뿐이지만, 서양은 이들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부모 등 출신 계급 문제 모순까지 더해진, 솔직히 답이 없는 형편이죠. 저자는 이 문제를 다루며 "SNS로 드러나는 건 기존 모순의 심화나 변형일 뿐, SNS가 전적으로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는 것은 아님"을 지적합니다. 이제 기업 채용이나 대학 입학시 지원자의 SNS적 배경을 심사하는 일도 흔히 봅니다(국내에서도 물론). 외국처럼 다인종 사회가 기본 여건인 곳에서는, 바로 이때 사회적 차별의 문제가 불편하게도 전면에 부상하는 것입니다. 한국도 가까운 장래에 일상처럼 겪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 이슈는 흥미롭기도 합니다.

자, 순서가 좀 바뀌긴 했지만, 저자는 복잡한 현상을 정리하는 도구로 이미 서문에서 4가지 프레임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①지속성②가시성③퍼짐성④검색성, 이 네 가지는 SNS의 핵심적 특징이고, 앞으로 SNS가 바꿔나갈 사회의 미래적 속성이며, 동시에 미래의 주역이 될 현 10대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본문에서 여러 번 인용하며, 설사 선의에서 비롯했다고 해도 무작정 권위를 내세워 규제 일변으로 가는 게 절대 옳은 방법이 아님을 지적합니다. 이 책의 원제는 <It's Complicated>입니다. 옮기면 "그거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거든요?" 정도겠습니다. 복잡한 문제를 단순히 보고 올바르지 못한 처방을 들이대면, 문제는 더욱 악화될 뿐 해결의 기미가 안 보입니다. 마치, 지난 세기말 인간 복제를 두고 그 비윤리성 이슈가 제기되었을 때, "어찌 되었든 과학 기술의 발전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며 과학자들이 반박했던 일과 유사합니다.

SNS는 좋든 싫든 인류의 미래 그 한 중추이며, 일부 문제가 대두된다고 폐지하거나 단속할 대상이 아닙니다. 저는 특히 투명성과도 통할 수 있는 ②가시성 항목을 보고, 오히려 SNS를 통해 기존에 곪아 있던 사회 문제가 백일하에 드러나 그 치유 교정의 가능성마저 새로이 열리지 않을지가 기대되기도 했습니다. 거듭되지만, SNS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올바른 용도로 활용하지 못하는 인간과 사회가 문제이며, 오히려 아이들은 기성 세대가 미처 알지 못하던 건전한 용도를 개척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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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지막 순간 - 삶의 끝, 당신이 내게 말한 것
브렌던 라일리 지음, 이선혜 옮김 / 시공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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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임종을 앞둔 환자 여러 사람을 치료하고 그들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본 어느 의사의 경험담인 줄 알았습니다. 보통 이런 책에는 감동적이고 뭉클한 사연이 담겨 있어서, 읽는 이들은 한바탕 눈물을 쏟을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하죠. 그런데 이 책은... 물론 그런 사연도 안 나오는 건 아니지만, 한 분의 베테랑 의사가 아무 권위 의식, 거품 없이, 100퍼센트 자신을 다 드러내며 의사로서의 고충을 털어 놓고, 이를 살짝 사회 문제로까지 시선을 연장하여, 사회 전체적인 일정 합의를 유도하는 동기도 은근 풍기는 그런 구성이었습니다. 영어 원제도 그래서 그저 <One Doctor>입니다.

저자는 내과전문의이고, 이름 높다는 뉴욕 프래즈비태리언 병원의 부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분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이런 직위에 있는 분이면, 솔직히 의사로서의 양심이나 본분을 염두에 두기보다, 사업주체로서의 경영진 눈치를 보기가 쉽죠. 그 정도 직위에 못 오른 채 자리보전만 하고 있는 사람도, 되지 못한 권위의식에 젖어 환자와 손아래 직원에게 함부로 구는 사람을 종종 봅니다. 그러나 저자는, 어디까지나 의사의 본분은 아픈 사람을 낫게 하는 데에 그 일차적 비중이 있으며, 지위와 나이를 불문하고 의사란 현장에서 환자를 돕는 데 최우선의 성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요 위의 "주장합니다."라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이 책에는, 좀 기이하게도 딱부러지게 저자 자신의 주장을 하는 대목이 없기 때문입니다. 책은 주로 저자가 직접 겪은 경험담과, 그 경험 중에 자신이 가졌던 느낌, 떠오른 생각, 그 중에서도 반성의 토로가 대부분입니다. 영화처럼 눈 앞에 그려지는 생생한 묘사를 읽으며 "원 별 소동이 다 있군." ," 햐, 이렇게 진상 환자나 비정상 멘털 케이스가 맨날 찾아온다면 의사 이거 정말 할 짓이 아니겠군." 같은 가벼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읽을 때는 말입니다. 그런데, 두 번 세 번 읽어 보니(이야기가 생생해서 넘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거듭 읽게 됩니다), 그게 아니었습니다. "맙소사, 그래서 결국 뭐라는 거지? 이 의사선생님(저자), 이 분 완전 부처님이시구먼!" 같은 놀라움이었네요.

미국은 세계 최고의 의료 수준을 자랑하는 선진국입니다. 미국 의사를 못 믿으면, 세상 어느 나라 의사도 못 믿을 겁니다. 그런데, 사람 몸이란 게 지극히 복잡하고, 증상이라는 게 이를 유발하는 원인이 한둘이 아닌데다, 아직은 의학 발달이라는 게 만족할 만한 레벨로 나아가질 못한 탓에, 여간 능숙한 의사라도 오진이 그렇게 많답니다. 서투른 의사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최고 수준의 민완 의사라도 그렇다는군요. 여기에 시스템상의 문제, 개인 레벨에서의 경솔함과 불순한 동기까지 곁들여지면 문제는 더욱 꼬이고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문제가 악화될 대로 악화된 후 이 저자를 찾아 온 환자들은, 오히려 "내가 존경하는 모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 안 하셨는데, 왜 당신신이 내 남편을 이꼴로 만들어 놓은 거죠?"라며 저자 같은 정직한 의사를 곤경에 몰아 넣습니다. 저자는 이런 상황에서, 진정 부처님 같은 인내를 발휘하여, 상황을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합니다. 읽다 보면 보는 사람 입에서 다 욕이 나오는데, 저자는 그저 초인적인 참을성으로 이 모든 난장판을 수습합니다.

현장에서 유능한 의사되기도 지극히 힘든 판에, 인격적 완성까지 기대하는 건 물론 무리입니다. 아니, 명의보다 더 드문 게 오히려 인격자입니다. 진정 명의라고 하면 그에 합당한 보수는 금전으로 책정할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의료 체계라는 게 평범한 의사들의 노고에조차 제대로 된 수가를 지불하는 구조가 아니죠. 이런 마당에 의사들한테만 무리하고 이상적인, 교과서적인 서비스를 강요하는 건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처사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 의사들 개인 차원에서도 개선해 나갈 여지가 있습니다. 엉터리 의사들이 상황을 망치지만 않는다면, 바로 이 브랜든 라일리 같은 분이 헛된 수고에 자신의 고귀한 정력을 낭비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의료 현실의 지적 뿐 아니라, 진료를 통해 만나게 된 다양한 인생들로부터 얻은 잔잔한 깨달음도 많이 나와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역과 계층, 인종을 떠나 인간 보편에 통하는 어떤 진리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저자는 또한, 의료인들에게 자신이 인간 일반 우위에 군림하는 우월자가 아니고, 모든 문제를 의료 문제로 환원하여 보는 고압적인 습관을 고치고, 약물과 생리학적 치료를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주제넘게 나서지 말 것을 권합니다. 의료인은 어디까지나 보건 섹터의 한 부분을 관할하는 기술자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고는 있으나, 그 어조가 단정투가 아닌 권유의 목소리이며, 자신이 겪은 어려움도 마치 당연한 직무 수행이라는 듯 겸손한 톤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자칫 독자는 그 요지를 놓칠 수도 있습니다. 의료 문제는, 우리가 질병이나 사고의 잠재적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는 한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에 이 책은 누구나 한 번 읽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또, 이 책은 "의술은 인술"이라는 오랜 원칙을 나중에 가서 잊기 쉬울, 의예과 학생이나 이제 입학을 앞두고 있을 어린 졸업생이, 아직은 순수할 그 영혼에 좀 새겼으면 하는 좋은 가르침으로 가득합니다. 좋은 의사가 많은 사회가, 분명 살기 좋은 사회이기도 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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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 “힘내!”라고 하기 전에 먼저 안아 주신 분
위르겐 에어바허 지음, 신동환 엮음 / 가톨릭출판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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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새로 뽑히신 교황은, 그 털털하고 격의 없는 태도로 벌써부터 세계적인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아시시의 성인 프란치스코는 그 생애 동안 동시대인으로부터 많은 질시와 모함에 시달리기도 했으나, 이미 성인 자리에 오른 지 오래된 분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교황 중에는 그 이름을 즉위명으로 취한 분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사실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비록 사람으로서 가장 영예로운 평가를 받는 데에 가톨릭 교회 차원의 동의가 이뤄졌다고 해도, 뭔가 이너서클 쪽에서는 비주류적 시선으로 그를 봐 왔다는 증거가 되는 사실입니다.

이번에 새로 뽑힌 교황은, 파격적이게도 그런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선택했습니다. 이 의도는 분명합니다, 첫째 절대 청빈의 삶을 산 그 성인의 궤적을 따라 자신도 성직 최고위직을 수행하겠다는 것이요, 둘째 결코 기득권층의 입장에서 판단하고 결정하지 않겠다는 사실상의 공표(公表)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같은 소설에 보면, 그 당시까지조차 프란치스코 성인, 그리고 그를 따르는 소형제회는 거의 주류로부터 이단으로 몰리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분이 예수회(제수이트) 소속이라, 그 창시자 프란시스코 하비에르의 이름을 딴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교황 본인이 나서 오해를 바로잡았습니다.


이 교황의 세속 이름은 호르헤 베르골료입니다. 배르골료라는 성씨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는 이탈리아계 이민으로서 소위 "아르젠틴 드림"을 찾아 머나먼 대서양을 건너 이민 온 노동자의 핏줄입니다. 책에 자세히 나온 바처럼, 어려서의 형편도 넉넉하다고 할 수는 없는 환경이었습니다(아주 가난하지도 않았지만). 그러냐 소년 호르헤는 참으로 맑고 긍정적인 성품이었고, 운동과 공부를 동시에 즐기는 아이였으며, 부수적으로 집안을 돕기 위해 일용직 종사를 마다하지 않는 아주 의젓한 성푼이기도 했습니다. 아이의 이런 성격이 형성된 배경에는 그의 부친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듯도 합니다.


이 런 타입이 흔히 그렇지만, 신학생 시절부터 호르헤 베르골료는 다방면에 박식했습니다, 언제나 겸손하고, 명예를 챙기기보다는 직접 일선에 나서 무슨 일이라도 팔을 걷어 붙이고 손수 실천하는 타입이었기에, 때로는 주위에서 피곤해하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주위 모두를 감복시키는 열혈 성직자였습니다. 수도사들과는 달리, 성직자는 교구민을 리드하는 지도자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그는 강압적이지 않으면서도, 확실하게 리더 노릇을 하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그 는 아르헨티나가 역사상 가장 어려울 당시에 고위 성직을 지낸 인물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마치 한국의 김수환 추기경처럼 칭송과 존경을 받아 마땅한 자격이 있지만, 반대로 "더 선명한 투쟁을 하지 못했다"하여 오히려 군사 독재 정권과 유착했다는 의혹이, 심지어 지금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습니다. 대단히 부당한 평가입니다. 멀쩡한 사람이 백주 대낮에 고문대에 올려져 시신도 못 찾을 만큼 훼손되는 일이 다반사였던 무서운 시대에, 설사 소극적인 저항을 하는 일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텐데요. 그 정도 고위직에 있는 분으로서 체제를 대놓고 비판한다는 것부터가 예사 마음가짐으로 가능하 일이 아닙니다. 상황이 다 끝나고 난 다음이야 누가 이불 안이나 모니터 앞에서 투쟁을 못 하겠습니까. 비판은 쉽지만 실천은 지극히 어려운 법입니다.


호 르헤 베르골료 추기경은, 이미 2006년 교황 선출 당시, 당선인인 라칭거 추기경(이후 베네딕토 16세)과 보수-진보를 각각 대표하는 위치에 섰다고 합니다. 원래 콘클라베는 그 속사정을 대외적으로 공표하지 못하게 되어 있지만, 이 책은 한 잡지의 보도를 인용하여 그 상세한 내막을 전하고 있습니다. 즉, 베르골료 추기경은 이미 8년 전부터, 교회의 새로운 조류를 대변하는 유력한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었다는 거죠.


추 기경은 노동자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출신 배경을 잊지 않고, 이미 주교 시절부터 전철을 애용한다든가 자신이 직접 소액 결제를 한다든가 등의 파격 행보로 유명했습니다. 이분의 "초심"은, 교황이라는 지존의 자리에 오른 지금도 변하지 않아, 소탈하고 편안한 처신과 매너로 가는 곳마다 화제입니다. 오는 8월 한국에도 몸소 시성식을 거행하러 오는 그의 앞날에, 신의 가호가 언제나 함께했으면 합니다. 비바 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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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억 명 - 전 세계 100억 인류가 만들어낼 위협과 가능성
대니 돌링 지음, 안세민 옮김 / 알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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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 음 책을 받아들고는 기분이 뿌듯했습니다. 원래 두툼한 책만 보면 눈이 휘둥그레지게 좋아하는 저이지만, 이 책은 그 달고 있는 <100억명>이라는 제목에 참 잘 어울리게, 한 페이지도 소홀히할 수 없는 빼곡한 자료와 증거, 그리고 갖가지 학문적 도구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저자 대니 돌링 교수는 "꽉 들어차 있다"는 표현을 주로 부정적 뉘앙스로 책에서 여러 차례 언급하지만(실제로,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지배층들은, 위정자로서 골칫거리로 여겼던 도시 빈민들에 대해 부정적 태도 가득한 어조로 그 표현을 사용했지요), 독자인 제가 보기에는 "책 한 권이 이처럼이나 많은 지식과 정보를 전달해 줄 수도 있구나."하는 기쁨으로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었습니다.

천체 의 운동 방향과 위치를 예측하다가 수학, 물리학 등 갖가지 방면의 근대 학문이 태동한 것처럼, 생산적이고 유용한 주제는 때로 의도치 않게 여러 학문의 방법론을 발달시키기도 합니다. 근자에 모든 학문의 호수처럼 작동하고 있는 경영학도, 인근 경제학뿐 아니라 수학, 심리학, 행정학, 사회학 등 다양한 영역의 기법과 원리를 끌어다 쓰고 있죠. "인구학" 역시, 이 과제를 제대로 해명하여 많은 소비자, 대중, 정책 결정자들에게 만족스러운 답을 주려면, 역사학, 통계학, 사회학, 도덕철학, 고고학, 경제학 등 그야말로 전방위적인 학적(學的) 도구를 동원해야 합니다. 이런 다방면의 수단을 자유자재로 쓰려면, 연구 수행자 본인이 만능에 가까운 지성인이라야 하고, 기능의 발휘에만 치우치지 않게 적절한 양식과 균형감각으로 올바른 결론을 이끌어 낼 또다른 정신적 성숙함을 갖춰야 하죠. 저자 대니 돌링은 바로 이런 자격과 자질을 갖춘 사람입니다.

이 책은 인류학책 입니다. 기독교의 구약에도 나오는 것처럼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바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 원초적으로 부여된 미션입니다. 칭기즈칸이 그 무고한 생명을 무차별 살상하면서 기도한 바는 바로 "제 씨의 퍼뜨림"이었습니다. 20세기의 악귀 히틀러가 소위 "레벤스라움"을 확보하기 위해 저지른 대학살극 역시, 그 목표는 제 종족 유전자의 안정적 확산에 있었습니다. 인간은 불리한 육체적 조건만을 갖춘 채 이 땅에 던져졌고, 그를 극복하기 위해 갖가지 분투를 전개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문명이고, 역사이며, 전쟁이고, 또한 평화입니다. 저자 돌링은 시야를 9천 년 전으로 돌려, 그 시절 우리 조상들은 대체 무슨 생각과 의도로 나무에서 내려와 땅을 일구고 돌을 다듬으며 불을 피웠는지 조명합니다. 우리는 그간 아찔할 정도로 발달된 인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들의 삶에 대해 추측할 뿐, 사실 그들이 누구였는지에 대해 아는 바 아직도 거의 없습니다. 책은 주로 우리 당대의 전후 90년사를 다루니, 9천년이란 시간은 도무지 비교가 안 될 만큼 비대칭적으로 우월합니다. 그러나 돌링은 "역사는 그 기준을 시간만으로 삼아 나눌 게 아니다. 인구의 증가세를 통해 가를 수도 있다."는 전제 하에, 이 방대한 책을 집필했습니다. "지구상에 살았던 대부분의 인구는, 문자가 생기고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 이후에 산 사람들이다." 이게 무슨 어처구니 없는 말일까요? 분명 우리는 크로마뇽인이 2만 년 전에 등장했고, 역사 시대의 시작은 기껏해야 3천 년 전으로 알고 있는데도 말이죠. 시대 구분을 그러나 양이 아닌 질에 의해 가중치를 둔다면, 분명 선사(先史)의 그 긴 기간은 인류의 수효가 극히 적었던 시절입니다. 이 지구에 태어난 대부분의 인구는, 분명 우리와 가까운 시대에 태어나 생을 마친 이들이고, 이런 관점에서라면 우리는 인간이라는 종에 대해 제법 아는 바가 많습니다.

이 책은 그러나 사회학 책 이기도 합니다. 제법 자신이라는 종의 과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우리지만, 앞으로 전개될 미래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 없고, 이 때문에 생각이 갈리는 이들 간에 비생산적인 다툼을 치열하게 벌이기도 합니다. 책에 등장하는 대표적 그룹은 "이성적 낙관주의자(세상은 그 와중에서도 일종의 균형점을 찾아가게 마련)", "이성적 비관주의자(무슨 소리! 백약이 무효이며 다 죽게 생겼거늘)", 그리고 "합리적 개량주의자(어찌 될지 정확히야 모르지만, 가능한 것부터 하나하나 고쳐 나가자)"들입니다. 이들은 맬서스가 처음으로 이 논쟁적인 "인구"라는 이슈를 수면 위로 띄운 이래, 전혀 상대에게 그 최소한의 장점도 인정 않을 만큼 치열하게 대립해 왔습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을 선포한 이래 보-혁 논쟁은 그 열기가 상대적으로 잦아들었지만(저자 돌링 교수는 이 선언에 대해 "매우 경솔했다"며 비판합니다), 인구가 앞으로 어떤 추세로 변화할 것인지, 그에 대한 대비책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다른 무상한 연구결과만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올 뿐입니다. 이 삼각 대립 구도가 그 배후 세력, 혹은 스폰서만 바꿔가며 날이 갈수록 풍성한 논거를 키우며, 어떤 가상의 수렴점에서 점점 멀어져만 가는 것도 희한한 특징입니다. 이른바 선진국 진영 내부에서도, 교토 협약 지지세력과 그 반대파, 지구 온난화와 오존 층 파괴의 실체에 대해 아예 부인하고드는 자본 측의 이해까지 얽혀, 도무지 합의의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 책은 상당한 의미에서 도덕철학도 논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에게 그저 쌀쌀맞은 귀족들의 지배논리만 대변하는 나팔수로만 여겨지는 맬서스 역시, 원래의 의도는 기독교 성직자로서 "불결한 하층민들의 끝없는 성욕"에 대한 개인적 혐오였으니, 그 나름대로는 정결한 도덕의 회복을 지적하고자 헸었을 터입니다. 그러니 인구 문제는 그에게 있어서 곧 도덕의 문제였으며, 가난이 곧 죄에 대한 업보라고 보았던 점에서 3000년 전 아리아 족의 드라비다 족 정벌 동기와 다르지 않습니다(이후 일종의 종교로서 카스트 제도 확립). 종교라고 하면 무조건적인 박애가 연상되어야 하는데, 이처럼 냉혹한 규율 강요와 결부된다는 게 아이러니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이 책이 후반부에서 소개하고 있듯, 1970년대 말의 중국이 "산아제한만이 우리의 살길"이라는 결단으로 대대적 강제를 벌인 사실 역시 참 역설적입니다. 중국은 명실상부한 공산주의 국가였으며, 그 모든 구체제의 잔재를 전복하려 든 것도 인민 해방의 동기를 내세우고 벌인 캠페인인데, 정작 인민의 가정 생활 단속에 있어 지독한 귀족적, 금욕적 자본주의 이데올로그(ideologue)가 들고 나온 "대안"과 차이가 없었으니 말입니다.

이 책은 지금까지 우리가 봐 왔던 연대기 기준, 정치 중심의 스토리를, 처음으로 50억, 60억, 70억 도달 단계로 끊어 이정표를 잡고, 이 사이에 있었던 각종의 대사건과 인구 변화를 추이를 하나하나 맞대응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책입니다. 인간의 존재는 양이 아닌 질에 의해 더 큰 영향을 받고, 그런 의미에서 지난 한 세기는 그 앞의 모든 시기를 능가할 만한 가중치를 지닙니다. 앞에 쌓아왔던 그 모든 업적보다, (놀랍게도)가 장 최근 100년 간에 쌓아올린 업적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실 각종 통계, 즉 자원 소비량, GDP의 성장 등의 지표를 보고서도 알 수 있었지만, 저자는 인구라는 가장 직관적이고 단순한 수치를 통해 이를 "선언"합니다. 근거가 뭐냐고요? 우리는 오늘도 직장에서 열심히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귀가했습니다. 이게 다 무엇이 목적이냐, 바로 먹고 살고자 하는 일입니다. 인류는 무엇때문에 자연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애써 환경과 분투하는가. 바로 후손을 계속 남기기 위한 목적입니다. 그 목적이 달성되었는지 여부는 바로 인구의 수치가 증명하는 바 아니겠습니까?

저 자는 그러나 신중합니다. 100억의 인구는 "그간 열심히 잘해왔네"의 축복입니까, 혹은 "지구에 이만한 하중을 주었으,니 곧 그 대가를 치르리라"는 재앙에의 경고입니까? 어떤 의미에서 저자는 "사람이 우선이다."를 일관되이 주장합니다. 맬서스의 오류는 비관이냐 낙관이냐에서가 아닌, 도덕과 윤리(그 나름으로 생각한)를 인간보다 우선했다는 데서 비롯한지도 모릅니다. 무조건 남을 적대시하고, 책 한 권에서도 만인의 공적 하나를 찾아 일단 저주를 하고 보는, 정치에 매몰된 어리석은 독자 역시 방향만 반대일 뿐 이 오류에서 벗어나질 못했습니다. 왜 "고작' 인구 변화 하나를 분석하기 위해 이렇게나 많은 도구가 동원되어야 할까요? 답은, 인구는 그저 인구가 아닌 생명의 탄생, 지속, 그에의 존중 그 모든 흔적의 총체이기 때문입니다. 덜 낳고 더 낳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태어날 인구를 어떤 시선에서 보고, 그 태어난 인구가 자신과 타인의 삶을 어떤 태도로 맞이하게 되는지에 따라, 이 100억의 인구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될 수도 있고, 진정 전 우주를 통틀어 유일하게 만발한 장미꽃 다발일 수도 있습니다.

이 책은 대니 돌링 교수의 "백억 대에 달하는" 무지막지한 박식, 따뜻한 유머 속에 녹아 있는 군데군데의 자기 고백이 어우러져 더 매력을 더합니다. "인간은 그저 소속 문화가 규정지은 권위에 굴복해야 생존이 가능한 나약한 존재"라며, 그 예로 조지 오웰이 스페인 카탈루냐에서 겪은 "손님 눈을 똑바로 보는 웨이터"에 대한 두려움 토로를 인용합니다. 돌링 교수처럼 빼어난 지성인이, 10대 시절을 시골에서 자란 개인적 체험을 이처럼 기록 문헌에 투영하는 점이 재미있었습니다. 통설에 의하면 조지 오웰의 "두려움"은 그런 동기가 아니었을 텐데 말입니다. 인간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과, 그런 토양에서만 자랄 수 있는 합리적인 대안, 혹은 그 맹아의 발견이야말로 이 책을 읽은 진정한 수확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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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첩 클라우즈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17
애너벨 피처 지음, 한유주 옮김 / 내인생의책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아 름다운 소녀가 있습니다. 이 소녀는 어느 날, 아직도 사형 제도가 엄존하고 그 제도의 고수에 대해 가장 긍정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미국 텍사스 주의 어느 사형수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소녀는 이 사형수에 대해, 그저 우연한 경로로 웹을 통해 접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소녀는, 그 사형수가 capital punishment에 처해지게 된 경위(아내의 부정에 대한 격분 끝에 우발적 살인[고살. 故殺], 이에 부수하여 증인이 될 위험이 있는 이웃에 대한 모살[謀殺])를 알고, 그에 대해 깊은 공감을 갖게 됩니다. 공감이라니 무슨 일일까요? 사형수는 거의 자신의 아빠만큼이나 나이를 먹은 남자고,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사람의 목숨을 둘이나 앗은 흉악범인데요. 그 이유는 곧 자신의 입을 통해 밝혀집니다.

소 녀가 자기 입으로 아름답다고 말하는 대목은 없습니다. 하지만 소녀는, 학교 동급생 중 최고의 킹카인 맥스 모건이 자신에게 한 눈에 반하게 만들었죠. 여자애들이라면 누구나 친해지고 싶고, 가까운 거리에서 말이라도 한번 걸어봤으면 하는 선망의 대상이, 자신 때문에 아무 일도 못할 만큼 빠져들게 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이 소녀가 학교 제일의 퀸카냐면 또 그건 아닙니다. 맥스 모건이 제 입으로 "너 여태 어디 있었니?"라고 말할 정도니까, 아마 특별한 개인 사이의 상성(相性)처럼, 그저 자신이 부족하다 싶은 부분을 강렬하게 보충해 줄 것 같은 그 개성에 맥스가 그저 이끌렸을 수도 있습니다.

이 쯤에서 짐작하시겠지만, 소녀는 영특한 아이입니다. 그렇다고 아주 학업 성적이 뛰어난 것 같지는 않지만, 이것은 소위 "포텐"이 터지지 않아서입니다. 동성 친구 로렌이 헛갈려하는 어려운 어휘를 교정해 주며 웃기도 하고, 저 맥스 모건에게 (그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힘든) 농담을 던지며 상대를 측은하게 바라보기도 합니다. 텍사스의 사형수에게 쓰는 편지에서, 고살과 모살의 차이를 논하는("아저씨, 맨슬로터에 비해 머더가 더 중한 형으로 처리되죠. 하지만 아저씨가 진짜 후회하는 건 사랑하는 아내를 죽인 일이지, 무례한 이웃 아줌마에 대한 게 아니겠죠?") 걸로 봐서 또래에 비해 조숙한 아이임이 틀림 없습니다. 어쩌면 그저, 두 분 다 변호사인 양친의 영향을 받을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지 적인 여성은 보통 지적인 남성에게 끌리죠. 조이라는 익명을 소설(즉 사형수에게 보내는 편지) 안에서 계속 쓰고 있는 소녀는, 그래서인지 킹카 맥스에게 별로 마음이 안 갑니다. 맥스는 완전히 자신에게 홀딱 빠져 있고, 이런 맥스와 공인 커플이 되면 친구들 사이에서 위상이 한참 올라갈 거라는 속물적 기대가 들 만도 한데, 소녀의 내심은 정작 다른 데 있습니다. 그녀는 사실 애런이라는 똑똑한 상급생에게 마음이 팔려 있었는데, 알고 보니 애런은 맥스의 형이었던 겁니다.

소 녀 "조이"는 자기 입으로 아름답다고 말한 적이 없지만, 이 형제가 나란히 그녀에게 반한 걸로 봐서, 분명 평균을 훨씬 뛰어넘는 육제적 매력이 있는 아이입니다. 맥스는 잘생겼지만 아주 단순한 아이입니다. 사랑의 쟁취에 전략도 노림수도 없이 그저 좋아하는 아이를 두고 대뜸 고백부터 합니다. 그러면서도 순박한 데가 있어서, 찬스가 숱하게 있었지만 이를 악용하지는 않습니다(공교롭게도 그때마다 엄마 등 누군가의 방해를 받지만, 결정적인 건 아니었죠). 잘 이해가 안 되지만, 소녀 조이가 자신에게 완전히 마음을 안 주고 있다는 걸 눈치챕니다. 하지만 그저 기다리고, 틈이 날 때마다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전달하고 또 전달합니다.

조 이에게는 두 동생이 있습니다. 갓 취학한 여동생 소프와, 아직 부모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남동생 도트입니다. 소프는 언니와 동생 사이에 끼어 관심을 못 받는다고 불만이 대단하고, 도트는 안타깝게도 뇌막염 때문에 청각 장애가 있습니다. 하지만 피가 어디 안 가는지, 둘 다 지독하게 솔직하고 톡톡 튀는 개성을 도무지 주체하지 못합니다. 엄마 역시 아빠처럼 변호사였으나, 도트가 저렇게 된 이후에는 가사와 육아에만 전념합니다. 이 사연은 소설 후반부에 나오는데, 독자는 처음에 왜 엄마가 시댁 식구(즉 조이, 소프, 도트의 친조부모)들과 사이가 안 좋은지, 맞벌이가 많은 영국에서 왜 이 여성이 집에만 있으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될 수 있습니다.

조이도 가정에 문제가 있었고, 아빠가 로펌에서 정리해고를 당하는 바람에 이제 더 큰 문제가 생기려 하는 참이지만, 맥스 네(즉 애런 네)는 더 심각합니다. 맥스의 엄마(곧 애런의 엄마이기도 한) 샌드라는 착하고 열린 마음을 지닌 분이지만, 남편을 잃은 후에는 거의 알콜 의존증이라고 해도 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맥스의 아빠는 새 애인과 눈이 맞아 집을 떠난 상태이며, 다만 수입이 넉넉하여 자신의 전처 소생 두 아이에게 거액을 지원할 능력이 됩니다. 애런은 영리한 아이답게 현실을 인정하고 공부에만 몰두하지만, 착하고 단순한 맥스는 자기 분노를 참을 수 없습니다. 이런 두 가정의 소생이, 둘로서만 만나도 보는 이가 위태위태한 마음인데, 지독한 비극인 게 셋으로서 만났다는 사실이죠.

자 이제 다시 처음에 꺼낸 화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조이는 이런 이야기를, 사람을 죽이고 사형 선고를 받은 어느 중년 남자에게, 지극히 다정다감한 어조로 편지를 통해 털어놓고 있습니다. 대체 이유가 뭘까요? 부모에게도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그것도 사람의 목숨을 앗은 범죄자에게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다니요. 이 점은 아마 소설을 끝까지 다 읽고 나서도 이해 못할 독자가 많을 줄 압니다. 모티브는 다름 아닌 죄책감입니다. 대외적으로는 이미 정리된 일이고, 무덤까지 갖고 갈 가능성이 큰 비밀, 그러나 "그 일"로 인해 상처입고 훼손된 양심은 여전히 두 눈 크게 뜨고 행위자를 응시합니다. 어린 나이의 조이는,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보속을 갈구합니다. 하지만 사제를 찾아갈 마음의 용기는 나지 않습니다. 죄책감이 크긴 하지만, 그런 무서운 죄를 저지른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 사람이라야 그에게 죄를 털어 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텍사스의 사형수를 고른 이유는 이것이 답니다. 실제로 사형수는 소설 속에서 한 번도 제 목소리로 등장하지 않는, 그저 풍경보다도 낮은 비중이고, 과연 실존인물이기나 한지도 의문스럽습니다. 중요한 건 소녀 조이가 이 사람에게 철저히 자신을 투영하고 있다는 점이죠.

왜 소녀가 이 자에게 자신을 투영할까요? 그것은... 바로 이 소설의 핵심 이벤트이기도 하지만... 소녀가 "누구"를 죽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과연 "살인"이 무엇인지, 인과관계의 연쇄를 어느 범위까지 잡아야 하는지, 그 책임 귀속은 어느 원칙에서 이뤄져야 하는지는 아주 어려운 문제로서 현생 인류의 지혜로는 그 해결이 아직도 불가능합니다. 아무튼 소녀의 여린 양심은, 고해의 대상을 찾아야 할 만큼 사정이 절박합니다. 1996년 작 영화 <슬리퍼스>에는, 고해실에 몰래 숨어 든 동네 문제아 소년들이, 자신들을 사제로 착각한 어느 아주머니로부터 뜻하지 않게 그 사연을 듣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고해(?)를 다 마치고 이 아주머니는 한 마디를 남기죠. "들어줘서 고마웠다. 얘들아." 사정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아주머니는 자신의 일을 그냥 진행했던 겁니다. 상대의 나이, 신분, 성숙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한 영혼과 다른 영혼이 교감, 소통한다는 그 사실이 중요하다는 걸 이분이 아셨던 까닭일 겝니다.

애 런은 소설 마지막에 자기 목소리로, 1인칭 시점으로 등장하더군요. "사랑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르는 법이야." 이 대사는 왠지, 매컬로 여사의 <가시나무새>가 떠오릅니다. 그 작품엔 이런 말도 나오죠. "증오는 그냥 받아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사랑은 대체 어떻게 다뤄야 할지 갈피가 안 잡힌다. 증오는 때가 되면 잦아들고 멈춘다. 그러나 사랑은 도무지 그칠 줄은 모른다. " 이 소설은, 한창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세상 번뇌와 추악함을 몰라야 할 소년소녀들이 겪는, 가장 비극적인 꼬임과 얽힘의 사연입니다. 독자는 "아니 대체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라며 미스테리를 푸는자세로 계속 일어나가지만, 사실 딱히 쇼킹한 반전은 없습니다(그런 건 있어서도 안 되죠). 푸른 하늘은 석양을 맞이하여 케첩처럼 붉은 빛을 띱니다. 하늘에 뜬 케첩은 구름을 물들이고, 끈적한 질감으로 시야에 위화감을 더합니다. 그 위화감은 곧 내 영혼에 침투하여, 옷에 묻어 잘 지지 않는 케첩 자국처럼 상처를 돋웁니다. 우리는 글러나 이 상처를 딛고, 달래고, 새 살을 키워 제 삶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Life Goes on. 그게 바로 앞서 간 망자의 희구이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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