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산업 - 상 - 소설 대부업 기업소설 시리즈 1
다카스기 료 지음, 김효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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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저력 있는 거장은, 번잡한 묘사 없이 필요한 말만 하면서도 천 가지 재미를 전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1980년대 초반에 발표되었으며, 소설의 배경도 그 무렵이고, 저 역시 10여년 전에 이 소설을 원서로 잠시 읽다가 만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학생 시절이라 몰랐지만, 지금 다시 읽어 보니 직장 생활의 갖가지 단면이 너무도 실감나게 묘사되어, 이런 재미를 왜 과거에는 잘 몰랐을까 싶더군요. 일본에서 특히 장르로 발전된 이런 기업 소설은, 역시 직장 생활을 해 봐야 실감 공감하게 마련인가 봅니다.

표지만 보면 무시무시한 대부 업체에서 아주 그냥 서민의 고혈을 짜내기 위해 갖은 무자비한 방법을 다 쓰는 고발소설 아닌가 착각하기 쉽습니다. "욕망'이라고 하니 무슨 에로틱한 묘사나 잔뜩 나오지 않을지 엉큼한 기대를 가진 저 같은 독자도 있을 거구요. 그런데 최소한 1권까지는 그런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제법 잘나가는 (설정상 전일본 동종업계 1위인) 어느 대부업체의 경영 실태와 흑막을, 흥미 만점으로 파헤친 스토리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주인공은 50대를 넘긴, 일본 유수의 제도("帝都"라고 쓰더군요. 간사이를 자꾸 의식하는 대목이 나오는 걸로 봐서, 그곳과 대치되는 도쿄를 말하는 의미로 보입니다) 은행에서 전무이사직까지 올랐다가, 부행장직까지 미처 승진하지 못하고 카드부문 자회사로 좌천됩니다. 당시 일본 은행에서 카드사업은, 그리 대접 받는 분야가 아니었던 것이, 도대체 크레딧 카드라는 매체부터가 일본에서는 낯선 결제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카드 남발로 인한 가계 부채 문제, 신용 불량자 양산은 아직 먼 미래일 뿐이구요. 제 생각에 이 소설이 발표될 무렵이라면, 일본에서도 이 크레딧 카드를 두고 "그게 뭐지?"라며 낯설어할 시절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물론 이 시절 일본의 극도의 호황을 맞이하고 있었으니, 아직 플라자 합의도 없었을, 초 저(低) 엔화가치 호시절의 이익을 마음껏 누릴 시절입니다.

사실상 좌천이지만 이대로 물러설 주인공 오미야씨가 아닙니다. 그는 대단히 공격적인 사업 전략을 전개하여, 별 존재도 없던 카드부문을 업계 1위로 올려 놓습니다. 그런데 오미야 씨가 몰랐던 사정이 있었으니, 이미 그는 제도 은행 내부의 "정치'에서 패배한 처지라, 마치 와신상담이나 하듯 앙앙불락하는 그의 태도를 경영 수뇌부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실적만 부풀리려 치솟는 대손율에는 눈을 감았다는 등 온갖 비판이 난무하자, 그는 아예 더 못한 한직으로 좌천되기 직전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객관적 관찰자의 눈에는 뻔히 보이는 운명을, 정작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주인공의 눈만 보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안타깝죠. 이미 그는 동료와 선배 눈 밖에 났습니다. 그저 한직에서 급여만 챙기다가, 모양 좋게 은퇴하면 그게 절대우위 전략입니다, 성과도 실적도 다 필요 없다는 게 이미 결정난 분위기인데, 그만 현실을 인정 않고 역습을 꾀하다가, 모든 걸 잃고 맙니다. 여기서 우리는 직장 내에서 벌어지는 갖자기 꼼수, 전략, 판을 다 짜 놓고 원망은 남한테 돌리는 방법, 교묘하게 상대를 매장시키는 책략, 겉만 번지르르한 말솜씨 등 직장 다니며 겪을 수 있는 천태만상을 다 구경하게 됩니다.

주인공은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제가 본 대로라면, 그는 실추된 명예와 자존을 찾기 위한 동기로, 제도은행에 대한 멋진 복수를 꿈꾸며, 남들 다 말리는 대부업체에 바지사장으로 입사합니다. 헌데, 여기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상장을 앞두고 있다고는 하나, 1인 오너가 지배하는 기업에 어떤 원칙이 있을 리 없습니다. 이 와중에서도 그는, 초기 창투 시절 뒷배를 봐준 인연을 들어 주식 양도를 집요하게 요구하는 거물의 요구를 교묘하게(진짜 교묘하더군요) 무마한 공으로, 오너에 대해 더욱 큰 발언권을 갖게 됩니다. 이 와중에, 직급에 무관하게 사실상 사내 2인자였던 오너의 측근은, 이 주인공을 다각도로 견제하고 무력화하려는 술수를 부리는데, 딱 궁금한 대목에서 상편이 끝나더군요.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직장에서 벌어지는 소리 없는 전쟁, 그에 대한 사실적이고 치밀한 묘사가 좋았습니다. 하권이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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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앤더 웨딩
신디 츄팩 지음, 서윤정 옮김 / 처음북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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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시트콤이다." 같은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보통은 그  발랄하고 긍정적인 모습이, 주위에 웃음을 줄 때 쓰는 말입니다만, 이 말에는 마냥 칭찬하 의미만 담긴 게 아니라, 걱정과 황당함의 뉘앙스도 어느 정도 풍긴다고 해야겠습니다. 더 나아가, 그저 일상을 사는 분이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면, 그 이웃을 좀 부담스럽게 하는 분일 수도 있습니다.

 

하 지만 그 당사자가 진짜 인기 시트콤을 집필하는 방송 작가라면 어떨까요? "훌륭한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작품 세계와 사람이 혼연일체가 되어야 하나 보다." 같은, 다소 진지한 각성이 들 수도 있습니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작가 샌디 츄팩이 바로 그런 장본인, 그의 작품을 본 시청자가 잠시 독자가 되었을 때, "이게 바로 그 시트콤의 실사 버전이군."하면서 입가에 흐뭇한 웃음을 짓게 하는 그런 빼어난 재능의 소유자입니다.  

 

<섹스 앤 더 시티>를 본 시청자의 반응은 사실 좀 갈리는 편이었습니다. 슬슬 폐경기를 맞이하는,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끝나간다는 초조함에 애써 더 일상의 즐거움을 찾으려 들고, 때로는 오버액션으로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는 중년 여성들, 그리고 좋았던 시절의 마지막 불꽃처럼 연출하는 그 숱한 "된장질". 이런 걸 보고 대리만조을 하시는 층도 있고, 그 활짝 벌려 웃는 웃음의 부작용으로 깊게도 패이는 (주연 배우들의) 주름살을 보며 불편함에 살짝 고개를 돌리는 저 같은 느낌도 적지는 않았을 겁니다. 근데 대체 그런 감성, 위트, 표현의 묘미가 대체 어디서 나왔는가, 신디 츄팩은 이미 여러 권의 책을 통해 그 모든 캐릭터들을 낳은 어머니, 아니 차라리 캐릭터들 자신으로서, 작가 한 명이 실물로 존재함을 알린 적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기에, 신디 츄팩이 어떤 스펙이며 사생활이나 개인적 배경이 어떻다 하는 것도, 이미 연예인 못지 않게 호사가들 사이에 잘 알려진 가십거리가 되어 있는데요. 이 책은 이제 재혼 8년차에 접어드는 그녀의 "오피셜 스토리"의 시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지금의 배우자 이안 왈락을 만나고, 결혼에 골인하며, 그 후 몇 차례의 고비(라고 그녀는 말하지만, 사실 심각한 건 없습니다)를 어떻게 넘겼으며, 근황은 어떠한지를 자세히, 좀 너무 자세히 털어 놓고 있습니다.

 

책은 그들의 첫 만남, 그리고 대단히 열정적이고 달콤했던 연애 기간(신디 츄팩이 나이가 있다 보니 이 기간이 짧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정식 결혼 생활, 이 지극히 주관적으로 황홀한 체험담을 맛깔스럽게 이어갑니다. 우선 처음부터, 신디 츄팩은 자신이 유태인이고, 이번 새 배우자도 유태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겪었던 대단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펼칩니다. 전 남편과 우아하게 헤어졌지만(그리고 좋은 친구로서 여전히 -자주는 아니라도-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리고 법적 절차를 깔끔하게 마무리 지었지만, 둘 다 유태인 율법에 따른 절차를 밟지는 않았습니다. 유태 율법에 따르자면, 이혼하는 남자는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고 "내쫓아야(!)" 한다는데, 사실은 츄팩의 집에서 나간 건 남편입니다. 그러나 "내쫓음"의 의미는 얼마든지 융툥성 있게 해석할 수 있으므로, 중요한 건 이혼장입니다. 이 이혼장은 히브리어로 "게트"라고 하는데, גט라고 씁니다. 이걸 영어로 표현하면, get a get 이 됩니다. 신디 츄팩은 상황의 꼬임도 꼬임이거니와, 이 우스운 언어 유희를 본의 아니게 지어낸 그 기막한 아이러니를 독자가 공유해 주기 바라고 있네요.

 

그 전 남편과 헤어지게 된 동기도 참...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힙니다. 남편이 뒤늦게 자기 성 정체성을 깨달아, 다른 남자와 살게 된 것입니다. 신디 츄팩은 이 책에서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털어 놓고 있지만, 여성으로서 그녀가 당시에 느낀 감정은 굴욕감 비슷한 게 있지 않았을지 짐작됩니다. 아무튼 그녀는 자신의 성적 욕구, 그리고 정신적 교감을 나눌 상대를 찾아야 했고, 몇 남자와 교제하다 바로 이 이안 왈락을 만나게 되었죠.  

 

책에서는 그저 철없는 남녀가 만나 정신없이 사귀고, 서투르고 잘 안 맞는 면도 있지만 잘 맞춰 나가는 과정을, 마치 20대의 그것처럼 재미있게 써 나가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츄팩의 입담이 워낙 좋아서, 우리는 그녀의 말솜씨를 감상하느라 잠시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기까지 합니다(그녀의 책은 원래 이런 스타일을 즐기는 맛에 읽습니다. 처음엔 적응 안 되더라도 나중에는 빠져듭니다). 이안 왈락에 대해서 "초혼의 미남 변호사"라고만 나와 있고, 미남이다 뭐다 하는 것도 콩깍지가 씐 사람에게는 다 그리 보이는 거라서 마냥 믿을 건 아니고, 이야기 전개가 경쾌하고 가볍다 보니 그냥저냥 넘기는 분도 있을 겁니다. 늦은 나이에 만났지만, 서로에게 대책없이 반해서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남녀, 그것만으로도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고 그렇게 읽으시는 독자도 많겠죠.  

 

하지만 진실은 좀 무겁습니다. 이안 왈락은 그녀의 눈에만 그리 보이는 게 아니라, 실제로도 아주 잘생긴 남성인데다, 중견 로펌에서 창업 멤버 변호사인 초고소득자입니다. 책에는 츄팩의 말로 "당신이 언제 그런거 저런거 하게 돈이나 벌어다 줘 봤어?"라고 하는 대목이 있는데, 츄팩 자신도 특급 작가일 뿐 아니라 이안이 상위 3% 안에 드는 특급 법조인(국제법 등 큼직큼직한 이슈만 맡습니다)임을 감안하면, 사실 독자는 위화감이 좀 느껴지죠. 이런 걸 모르고 책 읽는 분은 차라리 속이 편한 거구요. 츄팩 역시, 남자가 유태인 전문직종 아니면 상대를 안 하는 약간 속물적인 여성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애정을 듬뿍 쏟을 가족을 꾸리려는 욕망은 여느 보통 사람 못지 않아서, 당장 아이가 안 생기자 고심 끝에 애완견을 하나 들여 놓습니다. 귀여운 녀석이긴 하지만, 아이를 대신할 수는 없죠. 사실 이들은 신혼 기간 중에 한 번 임신에 성공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검사를 해 보니 정상으로 태어나거나 자랄 수 없는 아이라서 부득이하게 중절이라는 결정을 내립니다. 츄팩이 나이가 많다 보니 난자 활동이 왕성하지 못해 두번째 임신이 어렵습니다. 난자 기증자를 통해 난자를 제공받고 임신에 일단 성공하지만, 전문가들도 전혀 예상 못하게 하혈 끝에 조산, 사산을 합니다. 이때의 끔찍한 경험은 자신의 시점으로 말하지 않고, 남편 이안의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독자에게 들려줍니다. 발랄한 어투를 이어가는 게 무리라서였겠죠.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이 난자 기증을 둘러싸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도중에 많이 삽입됩니다. 기증자는 젊은 웨이트리스였는데, 소개서를 보니 로스쿨 지원자로서 현재 임시직으로 일하고 있답니다. 하지만 자필 작성문에 맞춤법이 왜 그리 많이 틀려 있는지,.. 츄팩은 뺑뺑 돌여 말하고 있지만, 사실 결론은 그들 부부가 이를 거짓으로 판단했다는 뜻일 겁니다. 다만, 아이의 지성은 부부가 키워 줄 수 있어도, 외적인 매력은 어떻게 해 줄 방법이 없으니, 외모로 그냥 고른 게 그 웨이트리스의 난자였습니다.

 

이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자(그 전에, 직접 임신을 해 보려고 전문가에게 들인 돈만도 셀 수가 없습니다), 결국 이들 부부는 아이를 입양하게 되고, 이번 에피소드는 여기서 끝이 납니다. 한 번의 이혼이라는 아픔을 겪은 그녀지만, 이 남자와는 평생을 해로하기로 결심이 굳은 것 같고, 그 증거가 바로 이 입양아겠죠. 

 

책 에는 감동적인 명문장도 여럿 실려 있습니다. 그 중 제가 주목한 건 책 초반에 나오는, 츄팩이 이안과의 결혼식에서 낭독했다는 애정 고백, "나쁜 남자론"입니다. "나쁜 남자는 다음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여자가 딴 생각을 못 하게 만들고, 마침내 여자를 자기것으로 꽁꽁 묶어 둔다." 참 어디서나 잘 통할 남자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모범생 중에 모범생 스타일인 이안이 그런 나쁜 남자에 해당이 되는지는 좀 의문이지만요.  

 

이 책의 원제는, 책 표지에 나와 있는 것처럼 "The Longest Date"입니다. 보통 영어로 "가장 긴"이라고 하면, 지루하거나 고통스러워서 가지 않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의미가 당연히 아니고, 결혼 생활도 마치 연인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진행하는 그들의 마음가짐을 뜻한다고 봐야겠죠. 저는 이미 결혼 2,3년차에 들어선 후에도, "아직은 우리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야"라고 말하는 츄팩에게 좀 놀랐습니다. 이는 진도가 더디다는 게 아니라.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 주고, 상대에 대해 아직은 모르는 게 많다는 겸손함과 아낌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20년을 살아도 어제 만난 듯 설렐 줄 아는 그런 부부가 부러운 요즘에, 재미있고도 유익한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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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시크릿 - 힉스입자에서 빅뱅 우주론까지
아오노 유리 지음, 김경원 옮김 / 북뱅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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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이 처음 특수 상대성 원리를 세상에 발표했을 때, 미국의 어느 백화점에서는 매물로 나온 이 과학자의 원고를 사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합니다. 오늘날과는 달리, 첨단 물리학 이론의 발전에 일반 대중들조차 관심이 컸다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는 사건이었다 하겠습니다.


현대 물리학의 발전은 이제, 같은 과학자들도 조금만 주의를 소홀히하면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불확정성의 원리 발견과 코펜하겐 해석의 승리 이후로는, 물리학에서 주장하는 이론을 일반인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지경까지 도달한 상태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태양계를 둘러싼 우주의 구조와 기원이 어떤 모습인지 궁금한 건 모든 인간이 다 마찬가지인데, 이에 대한 여러 가설, 설명이 과학자들 사이에서만의 언어, 소통으로 그친다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카데미즘과 대중의 인식 사이에서 언제나 가교 역할을 해 주는 게 저널리즘입니다. 저널리즘은 또한 순수학문과는 달리 독자적인 영역과 존재 의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학자들도 마냥 우습게 볼 수 없는 중요한 지적 중요성을 보유하고 있습니다(이 책 중에는, 저자의 설명, 혹은 비유에 대해, 어느 일본인 저명 학자가 "엉터리!"라고 했다는 재미있는 일화도 있습니다. 물론 친분에서 비롯한 애정어린 농담으로 봐야겠죠). 거의 평생 동안 과학계 인사의 동정, 첨단 이론의 발전상만 취재해 온 아오노 유리 기자의 이 책은, 그래서 우리 독자들에게는 더욱 특별한 기대를 가지게 합니다. 기자는 학문과 그 주변 사정에 밝으며, 동시에 일반인의 감각도 존중하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커뮤니케이터의 소임은 그래서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 주제가 과학이라면 더욱 더 어려운 일입니다.


이 책의 장점은, 이처럼 독자의 눈높이에서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학자와 대중 사이의 인식 차이가 너무도 크기 때문에, 혹은 학자의 언어인 수학과 일반인의 언어가 너무도 다른 세계에서 놀고 있기 때문에, 이 이론이 뭘 말하는지 적정한 비유로 풀어 주는 과제는 참 어렵고도 중요합니다. 아오노 유리 씨는 대화체 어투, 쉬운 어휘를 써서, 어려운 내용도 최대한 대중이 알기 쉽게 도와 주고 있습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도대체 왜 학자들은 이런 어려운 말을 쓰는 걸까? -그 예는 위크보손, 글루온 같은 것입니다. 저자는 "약력 전달자", "강력 전달자" 같은 말로 바꿔 쓰면 얼마나 좋겠냐고 정직한 심정을 토로하는데, 우리 독자는 이런 솔직한 말에 공감하면서 책에의 몰입도를 높일 수 있죠. "아, 이분은 딴 세상에서 노는 분이 아니구나!"


첫 째 장은 가장 최근에 이뤄진 놀라운 업적, 집단 지성의 산물인 "힉스 입자의 발견"을 그 토픽으로 삼습니다. 힉스 입자와 LHC 때문에 문외한들도 대거 현대 물리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최첨단의 성과에 대해 관심을 풀어 줘야 대중서가 제 할 일을 다하는 거겠구요. 그런데, 지금까지 한국 언론의 보도 중 가장 큰 문제점은, "힉스 입자는 우주의 탄생 기원을 설명하는 입자"라는 아주 피상적인 설명에서 단 한 치도 못 나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그 말도 결국 정확한 이야기가 못 됩니다(왜 그런지는 이 책을 읽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은, 힉스 입자를 설명하기에 앞서, 소립자의 종류와 속성을 하나하나 풀어 주고 있습니다. 현대 물리학은 대체로 물리계를 구성하는 기본 힘을 4개로 들어 이야기합니다.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 그런데, "힘"은 물질 사이에서 작용을 실제로 하기에 그게 힘입니다. 작용을 한다는 건, 그 힘을 중간에서 누가 전달해 준다는 의미입니다. 무엇이 그 힘을 전달하는지 설명을 못 하면, 그 힘의 정체가 뭔지도 모른다는 고백과 틀리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전자기력과 강력, 약력은 그 구조에 대해,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전달자의 정체에 대해 (완전히는 아니라도) 밝혀져 있었습니다.


다만 어려운 건, 중력의 문제였습니다. 사실, 중력은 강력, 약력은 말할 것도 없고, 전자기력보다도 더 먼저 뉴턴 시대에 알려진 힘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아는 건, 중력의 크기를 구하는 공식인

에 서 여태 별로 벗어나질 못했습니다. 중력은 무엇에 위해 전달되는가? 그 속도는 얼마인가? 빛과 같은 속도로 전파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왜 그렇게 약한 크기만 가지고 있나? 이에 대해 우리 인류는 뉴턴 이래 별로 나아진 대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반 면 다른 힘들은, 소립자의 발견과 더불어 어느 정도는 해명이 이뤄졌죠. 유독 중력만 베일에 싸여 있다는 건, 어쩌면 여태 애써서 알아 온(혹은, 그렇다고 착각해 온) 다른 소립자 이론들마저 다 틀린 게 아니냐는 의심을 가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물리학자들은 지금까지의 방법론을 고수할 게 아니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CERN이 그토록 엄청난 비용을 들여 이번 기획을 시작한 건, 그런 절박한 이유가 잇었던 거죠. 특수한 환경에서 애써 시도해 본 결과(중력 초기 형성은 특수한 환경의 산물이었으므로), 백 퍼센트 확신은 어렵지만

중력 전달자 역할을 한다고 가정하면 잘 들어 맞을 것 같은 입자가 어렵사리 검출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저자는 "그럼 힉스 입자 하나만 남기고 그간 모조리 발견되어 온 소립자에는 어떤 게 있는지, 그것들의 성격은 무엇이고 서로 관계는 어떤지, 이것들을 처음 발견한 과학자들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자세히 풀어 줍니다. 다른 건 다 나왔는데, 하나 빠진 조각인 힉스 입자만 여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마치 직소 퍼즐을 풀듯 자발적인 호기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소립자의 발견 과정이 역사 책을 읽듯 시간순으로 설명되어 있어서, 여태 과학책을 암기 과목 공부하듯 외워 온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쉽게 풀어 주는 일은 다른 이도 할 수 있고, 심지어 더 큰 권위를 가진 과학자가 시도한 작업도 있습니다. 이 책만의 장점이 있다면, 저자 자신이 직접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취재한 그 유명한 과학자들의 개성, 매력에 대해서도 비교적 자세한 서술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겔만은, 소립자에 대해 처음으로 "쿼크"라는 이름을 붙인 분이죠. 저자는 실제로 이 겔만을 만나서, 친분도 쌓고 많은 가르침도 들었다고 합니다. 특히 흥미로웠던 건, 저자를 처음 만날 때 "Green field!"라고 저자를 부르는 겔만 박사의 모습입니다. 아오노를 한자로 쓰면 靑(아오)野(노)인데, 이걸 영어로 옮기면 그린 필드 아니겠습니까? 겔만 박사는 일본인인 저자도 몰랐던 하이쿠를 줄줄 읊어서 빼어난 소양을 과시했는데, 사실 그런 천재는 잘난척하려고 하는 행동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나오는 제스처일 뿐이겠죠. 순만 쉬어도 교양과 지식이 나오는 경지!


이 책에서 아쉬운 건, 역자가 "양자(量子, quantum)"과 "양자(陽子, proton)을 전혀 구별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후자는 우리 물리학 용어에서는 "양성자"로 고쳐쓰고 있고, 이미 교과서에서 확고히 굳은 말인데도, 역자는 일본 용어를 그대로, 한자 병기도 없이 대로 쓰고 있어 혼란을 더합니다. 책 어느 부분에는 심지어 "양자(兩者)"까지 나오는데, 이는 우리 말로 "둘, 두 가지"로 쓰면 그만인 걸 굳이 이렇게 쓸 이유가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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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그파이트 - 애플과 구글, 전쟁의 내막과 혁명의 청사진
프레드 보겔스타인 지음, 김고명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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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애플과 삼성의 소송 대전이 연일 지상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습니다. 급기야는,  두 달여 전 이건희 삼성 그룹 회장이 쓰려져서, 6월 26일 현재 아직도 의식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 비상사태가 이어질 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프레드 보겔스타인이라는 이 저널리스트는, 우리 대중이 보지 못하는 거대한 전쟁의 이면을 냉철하게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합니다(최소한 본인은 그렇게 주장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삼성이건 애플이건 저렇게 법정에서 지지부진한 싸움을 이어나가다간, 둘 다 천문학적 소송 비용의 부담 때문에, 설사 어느 한쪽이 소송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말 그대로 상처 뿐인 영광만 안을 뿐, 기업의 건전한 재무 운용에는 치명타를 입을 것 같습니다. 바로 이때 나타난 보겔스타인은 "거 보라"는 듯, 세상 만사에는 이면의 작동 원리가 있으며, 필요 이상으로 거창하게 번지는 싸움에는 뭔가 이유가 있다는 주장을 합니다. 그는 마치 소설 한 편(여기서 소설은, 굳이 장르를 말하자면 "팩션"이 되겠죠?) 을 써 내려가듯,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이해력 달리는 독자를 채근해 가며, 마치 눈 뜬 장님처럼 진실에 어두웠던 우리를 준열하게 다그칩니다. "보이는 게 전부 다가 아니었어!"



그 는 이 싸움을, 다소 당혹스럽게도 "도그파이트"라고 명명합니다. 룰이고 원칙이고 자제고 체면이고 없는, 둘 중 하나가 죽어나갈 때까지 처참하게 벌어지는 밑바닥싸움을 가리키는 말이죠. 확실히, 애플과 삼성은 "정말 두 기업 사이에 타협점이란 없는 걸까?" 같은 의문을 대중 사이에서 불러일으킬 만큼, 도를 넘은 싸움을 법정 안팎에서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인데, 보겔스타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간 충격적인 진실을 말합니다. "그 싸움은 섀도우 복싱이다. 진짜 싸움은 삼성 뒤에 숨은 구글이 그 한 당사자이며, 애플은 거대한 싸움의 서막을, 일종의 phony war를 통해 비로소 연 것이다. 애플은 구글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이 투쟁을 개시했고, 삼성이 쓰러지면 비로소 진짜 상대가 나올 것이다. 구글은 어쨌든 피할 수 없는 싸움, 아니 어쩌면 자신들이 먼저 도발한 싸움이기에, 막후에서 체력을 세이브하고 있다. 싸움은 이제 겨우 시작된 것이며, 어쩌면 본게임은 아직 시작도 않은 셈이다."




우 리는 우리의 눈이 직접 보고, 최초의 인지 수행에 의해 머리에 각인된 걸 끝까지 더 믿고 싶어합니다. 기업의 총수가 쓰러져서 의식불명이 되기까지 했는데, 그럼 그분은 남의 싸움에 말려들어 자신의 건강과 운명을 희생했단 말인가? 이게 사실이라면, 글로벌 기업을 이제 하나 가졌나 보다 하며 내심 으쓱했던 중진국의 국민으로서 다소 처량해지는 느낌도 듭니다. 실제로, 사실상 후계체제로 접어든 삼성에서는 애플 측과 화해의 움직임을 물밑에서 벌이고 있다죠. 만약 싸움이 결국 대리전의 본질을 지니고 있다면, 맹장이 일선 퇴진한 후에는 전쟁 지속의 동인이 사라질 것이니, 이 관측은 이미 한 방증례를 마련하고 있다고도 보겠습니다.

제 가 책을 다 읽은 오늘, 퇴근길 스마트폰으로 접한 뉴스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구글, 안드로이드를 축으로 세상을 통일하려는 거대한 야망" 뭔가 보겔스타인의 진단, 시나리오가 척척 맞아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에 따르면, 본디 애플은 (비록 자신이 까마득한 선배이긴 하지만) 신생 소프트웨어 업체 구글과 업무적으로, 그리고 인맥상으로 대단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잡스 생전에 구글과 애플은 충돌은커녕, 공개석상에서나 사석에서나 CEO들끼리 유대에 가까운 협력을 주고받았습니다. 비교우위상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각각 맡아 자기 영역에서 차곡차곡 실리를 다지고 있던 두 기업은,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서로가 양립하기에 "이 지구가 너무 좁았다"는 인식 공유에 완전 합의를 이루고, 단지 그 개전이 시간 문제일 뿐인 총성 없는 전쟁 상태에 돌입합니다.

보겔스타인은 탁상의 이론가나 소설가(?)가 아닙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발로 현자을 뛰며 진실과 가십을 대중에게 전하는 저널리스트였습니다. 그가 끄집어내고 신나게 전개하는 가설은, 자기가 직접 인터뷰한 인물, 목도한 사건, 지근거리에서 감을 잡았던 숨겨진 특종 등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기자다 보니 사람을 많이 만나고, 온갖 이야기를 그들로부터 듣다 보니 매스미디어에는 감춰지거나 아예 교묘하게 조작된 비하인드 스토리가 그의 취재수첩에는 넘쳐납니다. 구글 담당자가 처음 안드로이드 안(案)을 꺼내들고 나왔을 때, 업계 관계자들은 "당신 약하셨소?" 같은, 경멸과 당혹이 섞인 반응을 보일 뿐이었습니다. 애플은 한편 MS가 지상에 공룡처럼 군림할 때에도 갖지 못했던 야심을, 아이팟 아이폰의 잇단 성공을 계기로 현실화할 비전을 준비합니다. 보겔스타인이 날카롭게 짚어낸 진실 중 하나는, 진정한 혁신은 동시대 대중의 라이프 패턴을 바꿔 놓은 아이팟이나 아이폰의 개발이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문화 생활의 플랫폼 하나를 새로 마련한, 신개념 개인 디바이스인 아이패드였다는 것이며, 이는 사실 애플 측에서도 어느 정도 일이 진행되고 나서야 깨달았을 뿐 철저히 장기 전략의 산물은 아니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구글의 안드로이드 프로젝트는, 단지 성사 가능성이 불투명했을 뿐 처음부터 "지구 정복 로드맵"의 일환으로 태어난 것이고요. 이 두 거인이, 서로가 손에 쥔 도구가 "절대 반지"임을 비로소 실감했을 때,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개싸움이라고 이름은 붙었지만, 내실은 세계를 눈 앞에 두고 지구 곳곳에서 전선을 펼치는 "세계 대전"입니다. 혹은, 중세 유럽 그들의 대륙 지배권을 두고 게르만의 두 명문가 호엔슈타우펜과 벨프 가문이 맞붙었던 대회전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중요한 건 이 개싸움에, 지구 반대편의 이름 없는 소시민까지 나름의 판돈을 걸고 작은 이해관계나마 연동시키고 있다는 사실이죠. 개싸움이란 사실 물주들이 개미를 끼고 벌이는 도박이고, 에이전트로 나선 개들이야 한없이 불쌍한 신세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건곤일척의 "개싸움"에서 싸우는 두 선수들, 아니 개들은, 겉보기로야 무척 여유로운 모습으로 대전을 벌이는 양상, 정확히는 싸우는지 안 싸우는지조차 누가 가르쳐 줘야 알, 고차원의 대리전을 치르고 있습니다. 어쩌면 소비 양상과 선호까지 이들 "빅 도그"들의 싸움 국면에 맞춰 조종당하는 우리 소시민들이야말로, 이 "개싸움"에서 진정 피를 (대신) 튀기는 "불쌍한 잔챙이 투견"이 아닐지 생각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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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봉력 - 신입 사원 입사 후 3년, 평생 몸값이 결정된다
사토 후미오 지음, 문정현 옮김 / 북로그컴퍼니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인간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조직 속에서 자기 가치를 증명하고 자아를 실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애써 입사한 직장에서 "월급루팡" 같은 소리나 들으며 자신과 타인의 속을 썩일 게 아니라, 정정당당하게 업무에 임하고 동료, 상사, 그리고 조직과 융화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요즘 번듯한 직장에선 너무도 업무 농도가 과중하여, 40대 중반에 별을 달아야지 하는 포부조차 갖기 빠듯합니다. 매일같이 주어지는 프로젝트, 기안 작성이나 효과적으로 잘 마무리지어, 윗선으로부터 깨지는 일이나 없었으면 하는 게 평범한 많은 직장인들의 바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평범한 수준에서 모범적으로 잘 해내는 일조차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조직 생활은 알고 보면 일종의 곡예이자 예술입니다. 기능적 업무만 잘한다고 전부가 아니며, 그렇다고 소위 "정치질"에만 치중하면 모두로부터 낙인이 찍힙니다. 다르게 생각하면, 결국 이런 모든 시련과 담금질을 잘 치러내야 한 인간으로서도 올바른 인격이 완성되고, 덤으로 돈까지 따라온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게임, 상황을 즐길 줄 알아야 그게 일등 직장인입니다.

이 책은, 여러 모로 우리 사회와 참 닮은 점이 많은 일본 기업 풍토에서, 그야말로 "직장의 신"이라 할 저자 사토 후미오 씨가 저술한 "직장 백과 사전"이라 불릴 만한 핸드북입니다. 모두 78가지의 요령과 지침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군 생활도 그렇고 학교 생활도 그렇고, 뭘 좀 알고 이제부터 잘 하겠다 싶으면 벌써 끝나가는 게 조직 생활입니다. 그러나 회사는, 그 사람이 대과만 없으면 늦은 나이까지 머물러 있을 수 있고, 잘만 하면 남들이 우러러보고 대외적으로도 인정 받는 관리직에까지 오를 수 있습니다. 어느 전환점을 맞아 "처음에는 몰랐지만 어느 정도 잔뼈가 굵으면 아 그거구나"하고 깨달음이 올 만한, 귀중한 정석 같은 가르침이 잘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저도 직장 생활의 일정 고비에 서서,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새기고 싶었던 내용을 보며 많은 공감을 하게 되었네요.

쑬모 없는 업무란 없다. 일본에서는 특히 이런 원칙이 잘 통할 것 같습니다. 이 책에도 나오듯 높은 분이 직접 쓰레기통을 비운다든가... 하지만 우리네 실정에선, 오히려 잔무, 잡무를 붙들고 오래 늘어지면 지적을 받는 수도 있죠. 제 생각에 부서나 팀의 막내로서 커피, 복사 같은 잔일을 많이 배당받는 직원이, "내 재능이 이런 일로..." 같은 불만을 가질 때, 한번 새겨보면 좋은 원칙이 아닐까 합니다. 특히 여직원들에게 좋은 시사가 될 수 있습니다.

배려와 아첨도 잘 구별해야 합니다. 사실 이것은 진심이 어느 정도 매너에 배어 나오느냐의 문제입니다. 저자는 "상사나 유력자들에게만 베푸는 배려는 분명 남이 보기에 아첨"이라고 합니다. 명쾌하죠. 진정 조직에 융화하고 분위기의 핵심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아첨을 하면서도 배려처럼 인상을 남기더라구요. 중요한 건 진심임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민감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과연 인사부와의 커뮤니케이션은 잘 유지할 필요가 있는가? 이는 한국이라면 중소 규모의 기업에서 더 절실합니다. 저자는 잘라 말하길 "필요하다"는 입장이고, "한번 형성된 인맥은 끊어지지 않게 섬세한 관리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모든 인맥에 있어 당연한 것 같지만, 인사부는 특히 개인적으로 일부러 챙기지 않으면 자기 업무 진행상 따로 볼 일이 없고, 무슨 일만 있으면 그때만 얼굴 비추는 사람으로 찍히면 오히려 더 해롭기 때문에, 이 조언은 실감이 나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공사를 잘 구별하여, 회사 기밀을 캐고 다니는 인상을 동료나 타 상급자들에게 주지 않게 조심하라고 합니다. 모든 건 정도와 균형 감각으로 귀결하네요.

행동계획은 세밀하게. 시행 착오의 모든 발단은 "막연함"과 "추상성"입니다. 이 계획이 사내에서 나 개인의 각오나 포부, 비전이건, 할당 업무의 로드맵이건 무관합니다.
중 요한 건 종이를 꺼내 그 세부적인 사항을 일일이 적고 눈으로 확인하는 작업이라는 거죠. 주로 일본에서 자주 하는 이야기입니다. 꼭 종이에다 하지 않아도, 요즘은 이걸 도와 주는 앱이나 소프트웨어가 많이 나와 있습니다. 중요한 건 정신적으로 얼마나 절실히 자각하느냐는 거죠. 일단 확실한 각성이 들면, 방법론은 누가 안 가르쳐 줘도 몸이 벌써 시행하고 있습니다. 알아서 하는 사람이 조직의 보물 소리를 듣습니다.

글로벌 대응력- 저자는 주로 보는 시야를 넓힐 것을 권합니다. 그냥 시키는 일만 할 게 아니라, 해외 출장 같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사소한 것도 놓치지 말고 자기 시야를 넓히는 소스로 삼으라는 겁니다. 여기에 실무 스킬로서 중요한 건 바로 외국어실력입니다. 외국어가 늘고 이를 수단으로 (요즘같이 좋은 세상에) 외국 신문도 보고 뉴스도 체크하면 글로벌 마인드는 자연스럽게 배양됩니다. 다 의지와 노력의 문제입니다.

협상력을 높여라. 이에는 논리력과 설득력 두 가지 요소가 기능합니다. 아무래도 협상이란 자기 이해를 관철하려고 벌이는 거지, 남의 말을 일방적으로 들으려고 하는 게 아니죠. 자기 주장을 실현하려면, 공적 석상에서 정연한 논리로 타인을 압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게 첫째 요건이며, 다만 일방적 연설이 안 되려면 타인의 계산과 속셈이 지금 어느 단계인지 정확히 읽고, 이를 바탕으로 섬세한 설득을 하라는 거죠. 저는 업무 파악의 몰입도가 결국 이 문제도 좌우한다고 생각합니다.

외모를 깔끔히 하라. 일본에게는 남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는 게 우선이라고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 단계를 넘어 외모에서 어디 책잡힐 구석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여성의 경우 특히 "야함"과 "꾸밈"의 경계를 잘 살피는 게 중요한 센스입니다. 외모의 문제는 특히 직장인의 자기 관리 문제와 연결되어, 우리 풍토에서는 아주 중요한 비중으로 자리합니다.

저자는, 성공적인 직장인이 되기 위해 이런 외적인 미덕 뿐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잘 성찰하는 여유를 가져야 그 화룡점정이라고 지적합니다. 어찌 들으면 따스한 조언입니다. 그 일환으로, "자신만의 취미를 가지라."고 저자는 조언하는군요. 취미가 있으면 내면이 안정되고, 이는 사람을 드러나는 매너에도 표현되어 결국 접대역을 능숙하게 하는 한 비결이 되기 때문이겠죠.

이 책의 대단원은 "매사에 감사하라"입니다. 나를 낳아 준 부모님, 나를 키워 준 상사와 회사, 그 모든 환경에 감사할 줄 아는 긍정적인 마인드라야 타인을 흡입하고 승복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이는, 한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을 완성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성공적인 직장인이 되는 길과, 사회적 인간으로서 완성되는 길은 둘이 아님을 이 책은 잘 보여주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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