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팀 - 어떻게 탁월한 팀이 되는가
코이 뚜 지음, 이진구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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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90년대부터 한국 직장에도 연공 서열, 직제에 얽매이지 않는 일종의 "계급 파괴" 바람이 불었습니다. "OO부 XX과"라는 소속 대신, "∆∆ 팀"과 같은 성과 위주의 유닛이 일상화되었죠. 심지어는 공식 직제가 큰 의미 없기 때문에, 처음부터 팀제나 다름 없는 구조였던 중소기업이나 영업팀 같은 곳에서도 (그 실질이야 어찌되었던 이름만이라도) 이를 따라했습니다. 이런 트렌드에서 완전히 무풍지대일 것 같은 공무원 사회, 공기업에서도 현재는 "태스크 포스"제를 흔히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팀 개념"은 자유로운 개인을 기본 단위로 하는 서구 사회에서 그 효용이 극대화할 수 있는 제도지만, 한국이나 일본 같은 유교, 농경사회적 전통을 보유한 곳에서 오히려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면도 있습니다.

본디 서양은 "슈퍼맨"을 지향하면 했지, 집단에 개인을 매몰하는 문화는 기피하는 편입니다. 그런데도 막상 팀을 짜서 일하면, 동양인들(공, 사 불문)보다 더 높은 효율을 내곤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성향이 "팀 활동"에 맞아서가 아니라, "팀"을 잘 짜고 잘 굴러가게 하는 방법을 깨우쳤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런 "팀" 중에서도,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임무(여기에는, 개인 단위로는 아예 성취가 불가능한 것도 포함됩니다), 도무지 달성이 불가능한 높은 실적을 올리는 "드림팀, 슈퍼팀"이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드림팀이 슈퍼팀이 될 가능성이 높지만, 모든 드림팀이 다 슈퍼팀이 되는 건 아닙니다. 슈퍼팀은커녕, 평범한 팀보다도 못한 성과를 내고 온갖 비난을 다 받는 드림팀도 많았습니다. 이렇다면, 구성원의 능력이 탁월하다고 해서 그들로 이뤄진 "팀"까지 잘하란 보장은 없다고도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불가능한 일, 최소한 남들이 전혀 바라보지도 못했던 일을 해 내는 팀은 어떤 비결을 가지고 있을까? 이 책은 그에 대한 일반적인 답을 내기보다, 최근에 존재했던 슈퍼팀의 성공 사례 7가지를 제시함으로써, 독자가 자신의 상황에 응용할 수 있는 답안의 pool을 제공합니다. 각 챕터는 "슈퍼팀" 하나씩을, 경영 분야뿐 아니라 군사, 대중문화, 스포츠 경기 등 다양한 영역에서 선택하여 그 구체적인 성과의 경위를 자세히 풀어주고 있으며, 챕터 말미에는 이로부터 추출할 수 있는 교훈을 명제 형식으로 정리합니다.

첫째 장에는 픽사의 사례가 나옵니다. 제 생각에는, 첫째 장에서 굳이 이들을 다룬 데에는 저자의 분명한 동기가 존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픽사의 예에서 우리가 반드시 살펴야 할 것은, "대체 왜 팀이 필요한가"하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공동의 목적이 없다, 팀을 꾸려서까지 이뤄야 하는 열정의 대상이 없다면, 처음부터 팀제를 검토해야 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죠. 또한, 활동 영역이 아무래도 예술 분야다 보니, 영화를 위해 일을 하느냐(-돈을 버느냐), 그 반대로 돈을 벌기 위해 애니메이션을 만드느냐 같은 기초 인식에서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이 "팀 픽사"의 예에서 금전적 보상은, 빼어난 개인의 동기 유발을 위한 하나의 장치에 불과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뒤 챕터들에서도 나오는 포인트이지만, 너무 단결이 잘 되고 대외적으로 순조롭기만 한 팀도 지속성 이슈에서는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적절한 긴장감은 팀의 건강성 면에서 오히려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테니스에 데이비스 컵이 있다면, 골프에서 국가(미국 대 유럽의 형식입니다만) 대항전으로는 라이더 컵이 있습니다. 그런데 테니스에는 복식이라는 형식도 있지만, 골프에서는 압도적으로 개인 단위의 시합이 주류 포맷입니다. 게다가, 골프는 그 어느 스포츠보다 개인 멘탈 조절의 비중이 승부에 큰 영향을 미치며, 이로 인해 직업 골퍼들은 극도로 예민한 감정적 성향을 보입니다. 이런 골퍼들로 한 팀을 꾸린다면, 팀웍이니 매니지먼트니 하는 게 타 종목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렵게 꼬입니다. 그런 면에서 콜린 몽고메리가 중심이 되어  2010년 라이더 컵 대회를 위해 결성했고, 결승전에서 미국 팀을 맞아 극적인 승리를 거둔 사례는, 경영학적 측면에서도 여러 시사점을 줍니다. 우리가 지금 피파 월드컵을 보면서도 알 수 있지만, 개인기가 능숙하다고 반드시 팀에 적시적소의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며, 단 한 번의 슛으로 팀의 운명을 좌우하는 승부차기를 잘 해내는 것도 아닙니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선수들로 이뤄진 팀일수록, 그에는 강력한 리더십이 요구됩니다. 콜린 몽고메리는 그 자신이 필드 멘털의 달인이었고, 이런 체험과 소신, 강렬한 스타일로, 상대에 비해 그닥 강하다고 할 수 없는 전력으로 승리했습니다. 특히 그가 타이거 우즈에 대해 코멘트한 걸 눈여겨 볼 필요가 있더군요.

전쟁은 개인의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전쟁이 꼭 필요하다는 게 아니라, 이미 터진 전쟁이라면 그냥 손 놓고 패배하는 게 최상의 선택이 결코 아니라는 점에서, 전쟁의 "승리"는 필요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개인이라도, 한 명(혹은 소수)의 힘으로 수행할 수 없는 게 전쟁이요, 평화시에는 이 전쟁의 축소판이 될 수 있는 게 범죄자 소탕, 폭력 진압, 인질범으로부터 인질 구조 같은 작전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세번째로 다룬 게, 1980년 주영(駐英) 이란 대사관에서 이란 내 쿠제스탄 분리주의(이란은 다민족 국가이므로 이런 위험이 상존합니다)자들의 인질극이었습니다. 여기서 영국 툭수부대 SAS는, 놀라운 능률과 과감한 작전, 치밀한 계획으로 인명 손실 0에 가까운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SAS는 영국군 뿐 아니라 전세계 군사조직 중 최고의 명예를 상기시키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시사하는 교훈은 강렬했는데요. 최고의 팀은 결코 개인의 개성을 죽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난척하고 누구와도 비길 수 없는 탁월한 재능을 과시하고, 더 날카롭게 갈고 다듬을 것으로 조장됩니다. 그러면 과연 팀이 유지가 될까? 이 스쿼드는, 워낙 빼어난 개인들이 모였기 때문에, 스킬이나 체력만으로는 분명한 우열이 안 갈라집니다(구태여 가를 필요가 있다면 말이죠). 따라서, 조직원으로서 추앙받을 수 있는 기준은, 같은 동작을 수행해도 그 동작이 가능하면 팀을 위한 것으로 선택할 수 있느냐입니다. 잘하는 건 누구나 다 잘합니다. 더 잘하는 팀원은, 같은 노력을 들여도 팀의 다른 구성원이 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선택한다는 점을, 우리는 이 사례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팀 때문에 개인을 죽이는 우를, 이 슈퍼팀은 결코 저지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많은 "엉터리 팀"은, 무능한 팀원을 피곤하게 만드는 우수 팀원을 기를 쓰고 끌어내리려고만 들기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우수한 팀은 결코 개인을 죽이지 않습니다.

그룹 롤링 스톤스는 비틀즈와 대조되는 컬러로도 유명하지만, (그 음악적 성취의 레벨은 별론으로 하고) 비틀즈와는 달리 지금까지도 멤버가 거의 다 살아 있으며, 개인 단위로 활동하기보다(이 정도 나이면 팀은 고사하고 개인 단위 활동도 어렵습니다. 물론 롤링스톤스의 이 빼어난 멤버들은 개인 활동도 합니다) 여전히 팀을 이루다시피 한다는 점에서 놀랍습니다. 더군다나, 뮤지션들이야말로 세상과 융화를 못 이루는 가장 극단적인 개인주의자들임을 고려하면 경이로운 일이죠. 우리가 잘 알지만 믹 재거니 키스 리처즈니 하는 사람들이 인간성은 또 좀 괴팍한 사람들입니까. 그런데도 무려 반 세기를 잘 "굴러 온" 비결이 과연 무엇인가? 실제로 이 책에 나온 바로도, 믹과 키스는 불과 얼음이라 할 만큼 상극이었더군요. 여기서도 알 수 있는 게,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제 스타일대로 하게 내버려 두는 게 하나의 요령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은근히 강조한 건, 로니(론) 우드의 조정자 역할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개성이 내 개성과 실제로 충돌만 안 한다면, 그냥 보기 싫다는 이유로 태클을 걸지는 않는다는 게, 이 무지막지한 개성이 모인 팀이 그리 오래도록 굴러간 비결이라는 거죠. 이 챕터는 "공연은 열심히 하는데 돈을 못 버는" 초기의 실패에서 시행 착오를 거쳐, "인기와 공연 성공을 고스란히 수입으로 연결시키는" "사업 단위로서의 롤링스톤스"가 커 나가는 모습도 알려 줍니다(이 책의 주제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흥미로운 대목).

요즘 잠잠한 동네가 있습니다(더 시끄러워진 우크라이나, 이라크 같은 데도 있지만). 바로 북아일랜드입니다. 요즘 "신페인당"이니 IRA니 하는 말은 아예 뉴스에 안 나옵니다. 이유는 바로 지난 세기말, 벨파스트 협정(=굿 프라이데이 협정)이 잘 체결되어, 더 이상 싸우지 않고 평화로운 공존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 백년(최소한으로 잡아서요) 불구대천지 원수들이 이런 극적인 화해에 다다를 수 있었을까요? 토니 블레어 행정부가 구사한 전략은 1) 상대를 악마적인 모습으로 만드는 일을 중단 2) 그 자리에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이미지를 대신 채움 3) 같은 자리에 나란히 앉되, 억지 화해가 아닌, 대립하는 현실의 긴박함도 상기하게 함 등의 모범적 수순이었습니다. 원칙은 알아도 실천이 어려운데, 토니 블레어 팀은 분리주의와 연방주의 세력 대표자들을 한 데 모아, 이들을 "평화'라는 공통 목표를 추구하는 "팀"으로 새로 만들었습니다. 팀은 이처럼, 종래의 피아 구분을 극복하는 인식상의 도약을 이루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도 배울 수 있는 바는, 억지로 개성을 누르는 선택은 필패로 이끌어진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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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초 안에 떠오르는 글로벌 브랜드의 성공 비밀 - 끊임없는 성장을 위한 전략적 브랜드 관리 와튼스쿨 비즈니스 시리즈
바바라 E. 칸 지음, 채수환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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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분량이지만, 내용은 하나도 버릴 수 없는 알찬 지침으로 가득했습니다. 물론 상당수는 실제 기업의 경영 사례입니다만, 사례 중에서도 타 상황에 교훈으로 적용할 수 있는, 꽉 찬 사례가 따로 있기 마련입니다. 그 사례로부터 추출하는 명제 역시, 익히 들어왔던 것이지만 맥락 속에서 또다른 의미를 지닌 것들이 많아서, 밑줄 쳐 가면서 읽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브랜드"란, 소모품과 동반자 사이를 가르는 기준입니다. 쥐틀, 철못 따위를 사면서 브랜드를 따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난 세기만 해도,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제품에는 소모품이 브랜드품보다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허나 지금은 대중의 소득 수준이 향상되고 이에 따른 욕구 수준도 높아졌으며, 시장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 까닭에, 기업은 "판매"의 본질에 대해 근본적으로 재고(再考)하게 되었습니다. 그냥 만들고 나서 팔리기를 기대하는 게 아니라, 시장이 무엇을 소비하고 기대하는지 미리 예상하고, 타 기업에 앞서 시장을 선점하고, 선점에 앞서 아예 시장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케팅의 본질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브랜드 하면 바로 이것이 떠오를 만큼, 컨셉과 개성, 스토리를 모두 갖춘 브랜드를 개발하는 게, 기업의 최우선 목표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성공하는 브랜드, 로컬을 넘어 글로벌 스케이프에서 선전하는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수 사례를 통한 개발상의 중요 포인트를 잘 짚어 주고 있습니다. 흔히, "내가 브랜드를 만들 것도 아닌데 뭐하러 그런 고민을?"이라고 하는데, 직장인이라면 회사(나아가 CEO)와 고민, 그에 따르는 전략 개발에 동조 동감할 줄 알아야 제 할 일을 다하는 거죠.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이 시대 기업의 화두 "브랜드"에 대한 연구가 필요합니다.

우선 저자는 "우수한 브랜드는 소비자들로 하여금 자발적인 관심을 이끌어낸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이에는 더 이상 강조가 식상할 만큼 유명한 사례로서 애플이 있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좀 신기한 건, 1990년대 말만 해도 애플은 "고립적 브랜드. 타 제품과 호환이 안 되는 소수 마니아(이게 중요하죠)만을 위한 제품"으로 학계와 언론계에서 찍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보시다시피 성공을 위한 모범으로 아예 공인되고, "소수 마니마 운운"은, 시대를 앞서간 하위 세그멘테이션 전략이 지구를 제패한 대성공 모범"으로 180도 바뀌어 있습니다. 경영의 세계에서는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비자발적 관심 유발은 아무 소용이 없는가?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이기도 하지만, 캘빈 클라인의 유명한 광고("CK와 나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가 잘 말해 주듯, 효과적으로 소비자의 머리에 각인된 이미지는 언젠가 제 역할을 해 줄 때가 있습니다. 중요한 건 선명한 이미지입니다. 추상적이어도 괜찮고("코크는 언제나 당신과 함께" 같은 건 아무 효용도 주지 않습니다만, 대단히 성공한 카피입니다), 기능적이어도 좋습니다. 중요한 건 일관성입니다.

일관성이 얼마나 중요하냐면, 이 책 2장에 나오는 에스티 로더의 브랜드 "오리진스"이 사례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에스티 로더는 처음에 "오리진스"를 백화점 매장에서 다른 고급 브랜드와 경쟁하는 강력한 하위 브랜드로 포지셔닝할 생각이었습니다. 이 전략은 좀 엉뚱하게도 "friendly fire"를 맞게 되는데, 시청자(따라서 소비자)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오프라 윈프리가 자기 쇼에서 "나는 욕실에서 '오리진스'를 쓴다"고 발언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지도 않은 "지원"은 업계에서 큰 행운으로 여겨지지만, 에스티 로더 측은 오히려 당혹해했습니다. 그들이 지향한 브랜드 이미지는 고급품 레벨에다 다양한 기능성의 스펙트럼을 지닌 제품군이었지만, 오프라의 저 발언은 "아로마 제품" 정도로 이 브랜드의 컨셉을 훼손(나아가 오염)시킬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죠. 이처럼 브랜드 전략이란, 일관성과 선명한 이미지의 각인이 그 핵심입니다. 일시적 판매 증가에 일희일비할 게 결코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미지가 선명하다는 건, 다른 말로 하면 차별화 전략입니다. 과거 산업화 시대에 비슷비슷한 표준적 제품의 제조가 성공의 비결이었다면, 현대의 시장이 지난 시절과 확고한 선을 긋는 부분이 비로 이 대목입니다. 그런데, 무작정 차별을 한다고 능사가 아닙니다. 무엇을 위한 차별이냐, 또 어떻게 수행하는 차별화인가가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저자는, 먼저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라고 하는군요.
"당신이 잘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그리고 그 다음 질문은
"그게 시장(하위 세그먼트)에서 중요한가?"
"당신이 비교하는 대상(경쟁 상대)은 누구인가?"
라고 합니다. 참 정곡을 찌르는 사항이 아닐 수 없습니다. 포지셔닝에 대한 백 가지 정의, 천 가지 사례 열거보다 이 질문이 가르쳐 주는 바가 더 많습니다.

그런 고민을 통해 창출된 브랜드의 가치는 과연 얼마나 되는가? 여기에 대해서 여러 논의와 주장이 있지만, 이 책에서는 정평 있는 "인터브랜드 방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케팅 분야는 전통적으로, "추상적이고 구름 잡는 논의"라며 일부 기술만능론자에게 비판 받아 왔지만(현재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동안 이론적 발전이 워낙 현저했기 때문이죠), 예컨대 회계학에서도 영업권 같은 것을 무형자산으로 인식합니다. 인터브랜드 시스템은 "브랜드가 창출하는 이익"과 "브랜드의 강도"를 곱해서 종합 가치를 측정합니다. "이익"을 산출할 때에는, 과연 창출된 소득의 몇 퍼센트 정도가 브랜드의 기여인지를 염두에 둡니다. 향수는 95%, 호텔은 30% 정도가 해당 산업의 평균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강도"의 측정에 있어서는, 이익(현재, 잠재)과 위험을 동시에 낮추는 게 그 핵심 지표이자 지향점입니다. 보통 수익과 위험은 트레이드 오프 관계인데, 브랜드 젼략은 이런 "상식에 반하는" 결과를 안겨 준다는 점에서 기업의 관심사가 됩니다.

이 책은 기존 마케팅 교과서에서 많이 강조한 개념들이 충실히 잘 정리되고 소개되었다는 점에서 정통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편입니다. "브랜드 확장", " 마케팅 믹스  4P" 등등... 그런 중에서도 최신의 사례를 소개하고, 이를 실감나는 서술과 유기적인 설명을 통해 독자의 머리에 오래 남게 하는 게 두드러진 장점입니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호텔 종합 체인인 메리엇 그룹의 사례에서 처음 들어보거나 배우는 게 많았습니다. 서울 강터에도 있는 JW 브랜드가 그런 전략적 지향점을 지니는 줄은 처음 알았고요. 시계로 유명한 불가리 브랜드가 벌써 이 기업에 넘어간 사실도 처음 접했습니다. 여러 모로 유익했지만. 다만 다소 혼란스러운 부분도 발견되는데요, 이를테면 P&G의 사례에서, 지나치게 많은 컨셉의 창출로 인해 오히려 총 점유율이 줄어든 결과를 지적합니다만, 과연 어디까지가 시장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며 어디부터가 그 초과인지에 대한 분명한 기준 설명은 없습니다(그저 결과론이죠). 또한, 21세기 폭스 사의 사명 변경은 오히려 브랜드 고수 전략의 예로 들어져야 맞습니다. 이름이 바뀐 건 루퍼트 머독이 새로 만든 모회사이며(따라서, "바뀌었다"고도 할 수 없죠), 영화 제작사는 아직 "20세기 폭스" 그대로입니다. 고민고민 끝에 원 명칭을 유지한 경우인데, 사실 모회사의 작명이 더 비판 받는 사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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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 할아버지
곽영미 지음, 남성훈 그림 / 다섯수레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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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의 문제는 어느 나라 어느 공동체에서나 심각한 이슈입니다. 사람을 그 인격과 능력에 따른 기준으로만 평가해야지, 종교, 피부색, 외모, 국적 따위로 편가름을 한다면, 그 국가나 집단은 발전을 이룰 수가 없고, 차별을 하는 사람이나 차별을 받는 사람이나 모두를 패자로 만드는 결과를 빚습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나 어린이들에게 "차별이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음"를 가르칩니다. 설사 이 가르침이, 학교를 졸업한 후는 물론, 심지어 학교 현장에서도 잘 실천되지 않는다고 해도, 무엇이 올바른 일인지를 어려서부터 그 성원들에게 가르치는 공동체는, 그 먼 장래를 내다볼 때 밝은 비전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한국은 어떨까요? 우리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만큼 오랜 기간 동안 단일 민족 단일 국가를 이루고 살아 왔습니다. 비교적 영토에 늦게 편입되거나, 그 경계와 소속이 불명확했던 이유로 차별을 받은 지역도 있고, 정변의 발생이나 기도 때문에 차별을 (부당하게) 받은 받은 곳도 있습니다. 허나, 그 어느 지역도 고려, 조선, 한국이라는 소속감이나 정체성 자체를 부정한 적은 없고(중요한 문제입니다. 안 그런 나라도 있으니까요), 부정당한 적도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동족 상잔과 분단은 현재진행형으로 아직도 전 구성원에게 깊은 상처를 안기고 있죠.

한때 탈북자라는 이름으로 불린 이들이 있습니다. 과거 체제 경쟁이 심할 때에는 북에서 넘어 온 이들을 가리켜,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귀순자, 귀순 용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체제 경쟁이 남측의 완승으로 끝난 후에는, 기본적인 생존 조건이 붕괴되어 버린 북에서 넘어오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배려와 주목을 하지 못한 채 그저 난민에 준하는 신분으로 다루게만 되었죠. 이들을 총칭하는 게 "탈북자"라는 이름입니다. "탈북자"와 "귀순자" 사이에는 엄청난 의미의 갭이 존재하며, 그들을 바라보거나 대우하는 온기도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 동화의 주인공은 "나", 민호, 건이 등 삼총사입니다. 그리고 이들 앞에 낯설고 적대적인 분위기로 등장한, 왠지 싸움 잘 할 것 같은 정체불명의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자기 집에서 옥수수를 키우는데, 다른 작물도 아니고 보기 드문 옥수수를 키운다는 것부터가 왠지 마음에 안 듭니다. 어느 날 "나"는, 이 할아버지가 북한 사투리를 쓰고, 수상한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걸 엿듭습니다. "나"는 그러잖아도 수상해 보였던 이 할아버지가 간첩이라고 확신한 후, 간첩 체포에 대한 포상금이 5억이라는 사실에 완전히 마음이 팔려, 명탐정 코난과 꼬마 탐정단이라도 된 양 삼총사와 열심히 작전(?)에 몰두합니다.

옥수수 할아버지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자신의 친할아버지도 계십니다. "나"는 전직 경찰이었던 할아버지에게 이 문제를 상의합니다. 할아버지는 코웃음을 치며 "아무나 함부로 신고하면 감옥 가는 수도 있단다!"며 주의를 줍니다. 하지만 "나"는, 원하는 장난감은 마음대로 다 살 수 있는 포상금 5억에 정신이 팔려, 예전(나중에 밝혀집니다)에 공고되었던 "간첩 의심자 사항"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는 등, 수상한 옥수수 할아버지를 간첩으로 찍고 신고할 마음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윽고 3총사는 옥수수 할아버지를 감시하던 중 드디어 일을 내고 마는데요...

이 동화는 실화에 바탕을 두었다고 합니다. 어느 탈북자 노인이, 북에 두고 온 손자가 너무 보고 싶어, 동네 유치원에 들어왔다가 건조물 무단 침입 혐의로 입건된 사실에서 창작 동기를 얻었습니다. 한국의 노인들이라면 길에 지나가는 귀여운 아이들을 보고도 머리를 쓰다듬는 단순한 표현마저 삼가거나 자제하고, 자기 용무에 주의를 쏟는 게 보통일 것입니다. 남북 간의 이질화가 여러 모로 위험 수위까지 육박한 현실인데, 이런 정서적 반응이나 표현까지도 어쩌면 이미 선을 넘어 버려서,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 표출이 범죄로 오인되는 당혹스러운 사건도 이처럼 생깁니다. 저자는 책 말미에서, "탈북자는 물론 새터민마저도 차별용어다. 우리 같은 남한 원거주자는 그럼 헌터민이라고 해야 맞을까?'라고 합니다. 어찌 보면, 차별을 하는 주체마저도 그 차별행위로 인해 자신을 특정 틀에 가두는 모순을 초래한다는, 아주 날카로운 지적으로도 들립니다. 남성훈 선생의 따스하고 섬세한 그림이 돋보이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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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 행복과 불행은 어디서, 어떻게 교차하는가
문지현 지음 / 작은씨앗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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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400페이지에 달하는, 대단히 두꺼운 책입니다. 요즘 이른바 힐링을 해 준다는 책도 많이 나와 있고, 현대인 사이에서 나날이 증가하는 정신병에 대한 증상 소개, 처방 제시를 하는 책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책들 중에는, 저자가 마치 우월자의 입장에서 그런 환자들을 내려다 보는 시선으로 쓰여진 책도 있고, 힐링을 한다면서 현실에서 잘 통하지 않는 덕담, 공론만 잔뜩 늘어놓는 책도 있었습니다.

이 책의 특징은, 첫째 사례가 많고 그에 따른 진단과 처방 제시도 따라서 많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저자의 어투가 대단히 친절하고 공감 지향적입니다. 마지막으로, 논의가 성의있게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어떤 책은 사례를 많이 제시해 놓고도 결말을 무책임하게 지어버리기도 합니다(빈약하게 얼버무리거나). 이 책은, 사례를 자세히 적어 놓고, 챕터를 일단 거기에서 끊습니다. 이러면 독자는 그 환자에 대해,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 이런 극단적인 행동을 하고, 결함 가득한 성격을 지니게 되었을까? 그 해법은 무엇일까? 잠시라도 이런 간격을 가지면, 그 다음 챕터에 이어지는 저자의 진단이 보다 머리에 잘 들어오고, 이미 (대략이나마) 형성된 자신의 생각 틀을 통해 저자의 사고를 보다 적극적으로(혹은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장에서는 "죄책감"을 다룹니다. 요즘 흔히 거론되는 "사이코패스" 타입이 집중 소개됩니다. 안와전두엽의 손상은, 뇌에서 금기와 통제를 관장하는 부분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결과를 낳는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른바 "가성 사이코패스" 환자로서, "진성 사이코패스" 유형과 거의 같은 행동 유형을 보입니다. 보통 어렸을 때 사랑을 받지 못해 전두엽 부분이 잘 발달하지 못한 자가 이런 불행한 운명을 맞는 일이 잦다고 합니다. 몇 년 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고종석 사건 역시, 성장 과정에서는 물론 성인이 된 후에도 범인을 지속적으로 따돌리고 학대에 가까운 차별을 가한 그 주변의 행태가 지적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어떤 사회적 보완 장치가 마련되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기야 집단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일에는 전혀 죄책감을 안 느끼는 이들도 있으니, 인격의 반사회성을 굳이 전두엽 손상이라는 외적 팩터에만 돌릴 것도 없습니다. 언제나 "가성"보다는 "진성"이 더 위험한 법이니까요.

중요한 건, 죄책감이 지나쳐도 망상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사이코패스 등은 범죄로 의율하면 되지만(이게 바람직한 형사정책인지는 논외로 하구요), 죄책감이 지나쳐서 대인 관계에 지장을 받는 건 평범한 이들 사이에서도 비교적 흔하게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책에 나온 희진씨(이름은 물론 다 가명입니다)처럼, 잘못이 없거나 경미한 쪽에서 오히려 더 죄책감을 가지는 일이 흔합니다. 천성이 뻔뻔스럽고 어려서부터 사랑을 못 받거나, 사회가 제 기대대로 자신에게 사랑을 더 많이 베풀어야 한다는 발달장애를 가진 인간은, 남에게 피해를 끼치고도 오히려 남이 자신에게 죄책감을 갖길 기대합니다.

"연주씨"의 사례는, 어찌 보면 간단한 심적 자세의 전환과 마음가짐이, 이런 마음의 장애를 처리하는 데에는 대단한 지혜가 될 수 있다는 걸 말해 줍니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마음을 잘 다루는 사람입니다. 이 챕터 뿐 아니라, 이 책의 모든 장은 결국 "어떻게 하면 마음을 잘 다스려서, 공연한 정력 소모로부터 나를 해방시키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책의 저자가 이처럼 환자들에게 다 가명을 붙여 신상을 보호함(그건 저자로서 당연하죠)과 동시에, 일일이 "~씨"를 붙여가면서 최대한의 공감과 배려, 애정을 표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이 책에는 연주씨, 희진씨 처럼 슬기롭게 "병" 혹은 감정 장애를 극복한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 불행의 나락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이들에 대해서도, 마치 죄인이 응보를 받았다거나 나보다 못한 열등분자를 내려다 보는 (비뚤어진)쾌감을 깔면서 대하지 않고,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분노"를 서술한 두 번째 챕터도 곱새길 내용이 많았습니다. 심리학 개론에서 으레 다루는 내용이지만(프로이트의 창안 개념이니 당연하죠?), 억압(repression)과 억제(suppression)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문지현 박사님은 차분하고 친절한 어조로, 왜 억압하지 않고 억제를 해야 하는지, 마치 보모나 선생님처럼 자상하게 지도해 주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이 두 개념이 늘 헷갈렸는데, 이 책의 이 장을 읽고 나서는 확실하게 머리에 자리잡더군요.

이 챕터에는 유독 불행한 인생이 많이 소개됩니다. 주제가 "분노'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려서 불행하게 자랐든, 정반대로 너무 과잉보호를 받고 자라서 가정이라는 둥지만 벗어나면 무능, 감정 조절 장애로 도통 적응을 못 하는 처지이건 간에, 성인이 되면 알아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른이 되어서도 이런 문제를 타인에게 상담을 받아야 하거나, 남에게 폐를 끼치는 사람을 우리가 실제로 동정어린 눈으로 잘 보지는 않습니다. 유독 이 책은, 이들에 대해 기능적이면서도 동조적인 태도로 접근하기 때문에, 독자도 읽어 나가면서 "저런저런, 어쩜 좋아. 뭔가 해결책이?" 같은 긍정적인 시선을 유지하게 됩니다.

슬품과 우울, 두려움, 불안, 트라우마,.... 이 모든 것에 공통된 처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피하지 말고 마주 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를 향해 어차피 자기 리듬으로 직진해 오고 있습니다. 이를 회피하여 눈을 감아 버리면, 그 문제는 우리가 대비하지 않은 사이에 우리에데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대비를 해도 그 문제는 여전히 우리에게 큰 상처를 줄 수 있지만, 무방비상태에서 당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같은 문제가 우리에게 같은 방식으로 상처릃 주는 일을 막기 위해서는, 먼저 그 문제를 똑바로 직시하는 게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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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악산
김태진 지음 / 푸른향기 / 2014년 6월
평점 :
품절


좀 창피한 고백이지만 저는 모악산이 어디에 위치한 곳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 이 아름답고 유장한 장편의 작가 김태진 선생은, "황산벌을 자식처럼 아우르고 그 터에 사는 모든 생령을 돌보는, 큰 어머니 같은 산"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전주를 중심으로 한 전북 일대의 진산과도 같은 중요한 자연 지물인 셈이죠(아주 속되게 표현하자면요).

유난히 산지가 많지만, 그 자락에 사는 생명체들을 윽박지르거나 기 죽이거나 접근을 거부하는 산은 별로 많지를 않습니다. 다 나지막하고 고만고만하며, 들어가서 꼴이라도 베자면 그 넉넉한 품으로 안아 줄 것만 같은 산들이 대부분입니다. 산지남 수지북의 풍수 지리 공식에 딱 들어 맞는, 농사를 돕고 추위와 더위로부터 사람을 지켜 주는. 때로는 흉악한 오랑캐로부터 그 땅의 주인을 보호해 주는, 우리네 심성과 살림살이를 오롯이 만들고 챙겨 주었던 그런 산. 따라서 이 소설의 "모악산"은 보편적인 한국인의 산 일반 개념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액자 소설 <갑오년>을 맨 처음, 그리고 중간에 두르고 있는 구성입니다만, 이씨의 운수가 다하고 새로운 세상의 개벽이 움트던 구한말의 정세와,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을 맞이하나 뜻하지 않은 동족 상잔으로 머나먼 외국(가까운 외국도 있었죠)에서 엄청난 수의 군대와 전쟁 무기가 이 아름다운 국토를 침노한 시대, 이 둘을 왔다갔다 하는 교차식 구성이라고 해도 됩니다. 더 오랜 과거와 가까운 과거가, 서로 그 닮음꼴을 과거(미래)라는 거울에 비춰 보면서, 모악산이라는 자연, 아니 어머니 대지가 바라보는 가운데 숙명처럼 유사한 질곡을 되풀이하는 게 기본 골격입니다.

액자소설 <갑오년>은 짧은 분량이지만, 엄청 박력 있는 전설의 화소를 찰지게 풀어내면서 서두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처음 책을 받아 들었을 때, "아 이렇게 두꺼운 책이었어?"하며 다소 부담이 느껴졌지만, 인트로격인 액자가 워낙 강하게 독자를 빨아들이는 통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다 읽어 버렸습니다. "누가 남의 땅에 함부로 묘를 쓴단 말입니까 당장..." "아닐세, 명당은 원래 임자가 따로 있다지 않은가?" 의지할 데 없는 가난한 소작인은 마치 귀신에 홀린 듯 아비의 시신을 잃게 되는데, 이 시신은 그 미스테리한 "명당'에 마치 자석처럼 빨려 들어가며, 태곳적부터 정해졌을 제  운명과 자손들의 팔자를 결정하게 되는 것일지... 그 신비스러운 전기(傳奇)적 묘사가 너무도 생생해서, 좀처럼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소년 주인공 "금아"는, 작가님의 생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자전적 캐릭터인가 봅니다. 그닥 생활력 강한 가장은 아니지만, 광구 덕대로 주변의 인망을 얻고, 무엇보다 가족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아버지, 한센병(나병)에 걸린 동냥아치에게도 넉넉한 대접, 무엇보다 대등한 인간으로서의 예의를 잃지 않고 자식에게까지 가르치는 어머니, 이 모든 것이 예전 양반님네들의 올바른 가풍과 범절을 근대에까지 유지한, 전라도 교양 있는 지도층의 훈훈한 인심과 도덕이었던 셈이죠. 외세의 침탈과 전란을 겨
으며, 반상의 차별이 사라진 동시에 이런 미풍도 흔적 없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진보와 보수의 정치적 대립, 부와 빈의 격차 심화, 한반도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미국과 중국이 서로 양보 없는 대립을 또다시 이 좁은 반도에서 노정하고 있는 가운데, 모악산은 그 오랜 사연을 다 지켜 본 눈으로 우릴 어떻게 응시할지, 그 말 없는 입으로 으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주고 있을지, 이 길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으며 다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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