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성당 이야기
밀로시 우르반 지음, 정보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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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적 예술가는 자기 자신과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로부터 눈길을 돌려 과거를 바라본다."


이것은 이 책 뒤표지에 나와 있는데요, 출처는 니체라고 합니다. 니체가 이런 말을 한 줄은 미처 몰랐지만, ⒜"자신", 그리고 "자신이 살아가는 과거"로부터 눈길을 돌려서, ⒝ 과거를 바라보는 게, ⒞ 꼭 낭만주의적 예술가라야 가능한 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고, 낭만주의적 예술가가 언제나 그렇게 할 것 같지도 않고요. 니체의 위대한 사상적 편린은 둘째 치고라도, 한 개인으로서 그가 얼마나 불행한 삶을 살았는지를 돌이켜 보면, 들어서 마음이 엄청 설레는 말도 아닙니다. 현세적 성공을 향해 눈에 불을 켜고 달려 가는 우리들이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밀로시 우르반의 이 작품은 보통 "고딕 미스테리"의 범주에 넣습니다. 사실 제가 읽기로는, 몇몇 소름끼치는 장면 묘사라든가, 등장 인물이 약간 상궤에서 벗어난 인물이라든가, 작가가 그렇게나 의식하는 것처럼 배경을 체코 고(古)건물로 삼고 있다거나 하는 점 외에, 딱히 저 카테고리에 넣어야 하는지는 의문이었습니다. 물론 소속을 무엇으로 잡든 간에, 단단하고 치밀하고 에피소드가 풍성하며 재미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고딕 미스테리"의 핵심은 여튼 낭만주의입니다. 회고적 분위기 속에 현실의 제약을 무시한다는 게 낭만주의의 핵심이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은 퍼스트네임을 "크베토슬라프"라고 씁니다. 이름이 저렇게 무신경(왜 그런지는 책에서 찾아 보세요)하기 지어진 이유는, 그의 부모가 이 사람의 양육에 큰 정성을 기울이지 않았던 사람들이어서입니다. 이 사람은 어려서부터 현실이 괴로웠던 부적응자였고, 커서도 루저로서 일생을 연명해 갑니다. 스스로 말하기를 "영웅적으로 멋지게 죽는 순간을 잡기 위해(진짜 죽을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경찰직을 택하지만, 광신도들이나 진짜 영웅처럼 "무엇을 위해" 죽을지에 대해선 전혀 개념이 업습니다. 어쩌면, "잘못 태어난" 인생에 대한 회의, 리셋 본능으로 내세를 지향하는 지도 모르지만, 그의 관심사는 온통 과거 역사를 향해 있을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의 분위기도 그렇고, 주인공의 컬러도 그렇고, 우리가 낭만주의 하면 퍼뜩 떠오르는 바이런 경 식의 비비드한 낭만과는 아주 먼 거리가 있습니다. 하긴 에드가 앨런 포의 작품 세계도 어둡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그곳에는 그 모든 비관적 묘사를 위상기하학적으로 비틀면 완전한 이상향이 나온다는 짖궂은 낙관주의가 있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죠.


애초에 경찰직을 특별한 소명 의식으로 시작하질 않았으니, 그 업무인들 제대로 행할 리 없습니다. 펜델마노바라는 이름의(물론 펜델만이라는 남자의 배우자겠죠) 어느 부인에게 "무슨 경찰이 사격 연습 같은 건 하지 않고 역사 공부에만 몰두한담?"하며 핀잔을 듣기도 합니다. 얼빠진 주인공은 그저 맞다고 웃어 줄 뿐입니다. 근데 우연인지 필연인지(결말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이런 크베토슬라프, 혹은 K가 직무 중인 그날 하필, 이 부인은 경위가 대단히 미심쩍은 살인 사건의 희생자가 되고 맙니다. 작품의 사건은 일단이 변사를 시발로 전개되고, 넉 달 뒤 벌어진 더 엽기적인 살인 사건과 맞물려 더 파장이 커지는 식입니다.


살인이든 뭐든 이렇게 매사에 미적지근한 낙오자 유형이, 가장 활기 있고 명철하며 신체적으로도 강인해야 할 탐정 노릇을 제대로 할 리가 없죠, 그에게는 따라서 "의외의 의뢰인"의 출현이 필요합니다. 다소 신원이 의심스럽기는 하나, 엄청난 재산과 거대한 신체적 골격을 가진 "백작" 그뮈드, 그리고 진실로 그로테스크한 그의 시종(광대?) 난쟁이 프록슬린이, 생의 의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몽상가 크베토슬라프의 동기유발자입니다. 어려서부터 크베토슬라프, K의 장점을 분명히 봐 준 사람은  단 둘 뿐이었는데, 고등학교 역사선생(딸보다 어린 학생과 결혼하여 퇴직한), 그리고 이 정체불명의 백작 뿐입니다.


K의 장점이 무엇인가. 저 위의 니체의 말을 다시 보십시오, 과거를 바라보긴 바라보되, 마치 영화를 보듯, 혹은 다차원의 존재 패턴을 갖고 있어 타임리핑이나 하듯 지나간 과거의 생생한 영상을 볼 수 있다는 게 그만의 장점입니다. 이게 어떤 초자연적인 능력 같은 건 아니구요, 그만의 병적 환각이나 망상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이런 능력, 과거 역사에 대해 "문서의 출전 제시" 같은 기계적 수월성으로 대답하는 게 아니라, 그 공간과 시대를 사는 참여자의 느낌으로 두 세계를 이어 주는 능력이, "괴백작과 그의 미친 광대"에게 매우 요긴한 수완이라는 사실입니다. 끔짝한 살인 사건도 해결해야 하고, 동시에 분명 무언가를 노리고 있는 저 백작의 계획도 만족되어야 합니다. 과연 무엇을 꿍꿍이에 품고 있으며, 잔혹한 범죄의 진상은 무엇일까요?


대담하게도 간단한 조작으로 경찰서장의 전화를 도청하는가 하면, 제 고용주의 표현 중 시제를 정정(현재르 과거로)해 주기도 하는 섬세한 언어 감각(이 정정은 그저 말장난이 아니라, 살인 사건의 용의자를 누구로 보고 있는지, 혹은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암시입니다)을 지닌 난쟁이는, 거대한 체격과 위압적인 용모를 한 제 주인인 백작과 여러 모로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이런 괴기스러움은, 현대인들로부터 대숙청을 당하는 아픔을 겪었던 고딕 양식의 그 오랜 건축물들의 묘사와 함께, 소설의 분위기에 형식적 "고딕스러움"을 더합니다. 분위기만 그럴 뿐 아니라. 실제로 이 3인은 고딕 예찬론자입니다. "바로크 같은 썩은 야만 풍습이, 순수하고 장엄하며 자기 주장이 뚜렷했던(그러나 제 주제를 넘지도 않았던) 고딕을 말살하려 들다니!" 하며 붅개하는 모습은 정말 흥미롭습니다. K는 사회적 낙오자라서 현재를 부정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지만, 이 당당한 체구의 "지배자" 그뮈드는 대체 무엇 때문에 환각적 과거를 낙오자와 장애인과 공유하려 드는 것일까?


소설의 맥락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체코 현대사를 좀 알아야 합니다. 체코는 종교 개혁의 불길이 본격 번지기도 전에, 후스라는 선구자를 맞이해서 가톨릭의 억압 기제를 "창문 밖으로" 내던져 버리려 했던 대단한 자유주의의 선구였습니다(이 소설에서 재밌는 부분은, 작가가 주인공의 입을 빌려 후스를 어리석은 광신도로 폄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30년 전쟁의 경과 속에서도(한참 뒤 벌어진 30년 전쟁도 그 시발은 보헤미아였죠) 정작 체코만은 종교의 자유를 찾지 못하고, 국민의 절대 다수는 무려 1차 대전 종전까지 합스부르크적 카톨릭의 믿음을 강요당했습니다. 그 자취가 바로 이 작품의 소재인 Sedmikostel, 일곱 성당입니다. 주인공 K와 출세주의자 경사 유젝, 죽은 펜델마노바, 그리고 그뮈드 등은 각각 다른 의미에서 정치적 격변과 파란 많은 역사의 희생자들인데, 사회의 지배층이 하루 아침에 모든 특권을 박탈당하고 몰락하는 일을 반 세기만에 두 번 겪은 것도 체코 외에는 드뭅니다. 그리고 체코는 신성 로마 제국의 일관된 영지이자 핵심 봉토였지만, 그 거주자들(평민)은 언제나 식민지 노예의 대접을 받고 살아야 했는데, 체코 출신 귀족이라는(나중에 덴마크 귀족 가문과도 연을 맺었다는) 그뮈드 가의 내력이 이 복잡한 역사를 상징하는 장치입니다.


유럽 배낭 여행을 가 보신 분은 알겠지만 마기스트랄레는 EU 국가들을 서에서 동으로 관통하며 브라티슬라바에서 끝나는 하이웨이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체코 프라하를 지나지는 않습니다. 이 소설에서 나오는 마기스트랄레는 그와는 무관한, 소설 속에 자주 나오듯 무자비하고 신중치 못한 체코 도시 현대화 작업의 일환으로 세워진 프라하 시내의 대로입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그리고 아직도 상당수가 남아 관광객을 유혹하는 오랜 보헤미아의 건물들은, 유럽에서 가장 오랜 문명의 유산이되, 다만 그를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지켜 줄 능력이 (언제나) 미비했던 거주자들의 능력과 의지 부족으로, 억울한 소멸의 위험에 최우선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비운의 주인공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귀가 열려 있는 영혼에게 필사적으로 말을 거는데, 그 응답자 중 하나가 바로 K였습니다. "박물관이 살아 있다"가 아니라, 이 보헤미안들에게는 "성당들이야말로 살아 있(었)다"가 되는 셈입니다. 인간보다 더 진실한 의식과 "순수함"을 지닌 이 과거의 유적이야말로, 원초적 순결이 훼손되지 않은 채 그 먼 옛적으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휴머니티의 정수 바로 그것이었다는 "피맺힌" 증언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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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음으로부터 배운 것
데이비드 R. 도우 지음, 이아람 옮김 / 처음북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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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신이 그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거의 매일같이 관찰하고, 돌봐 주기까지 해야 한다면, 그건 참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양병원에 근무하는 분들, 장의사들, (사형을 실제 집행하는 나라, 지역의) 교도관들 등.... 특별히 그쪽으로 적성이 맞다면 모를까, 단지 돈 때문에 하는 일이라면, 육체적 직무 강도에 감정노동의 문제까지 겹쳐, 요즘 유행하는 말로 "암걸릴" 만큼 스트레스가 클 것 같습니다.

 

대단히 뛰어난 두뇌를 지니고 있고, 자신의 직무에 통달해 있으며, 대학에서 교수직까지 맡고 있는 분이, "돈되는" 분야를 다 마다고, 하필 사형수 구제에 관련한 소송만 전담하듯이 맡고 있다면, 우리 상식으로는 참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변호사라고 해도 그 능력, 열의, IQ 등은 천차만별입니다. 일 못 하는 변호사가 얼마나 사람 미치게 하는지는, 겪어 본 의뢰인만 압니다. 일 잘하는 변호사는 "돈되는 사건"만 수임하는 게 보통이고, 일 못 하는 변호사들만 그 자리(교통사고, 자질구레한 사기 등등)에 뒤처져서 물정 모르는 서민들의 푼돈을 뜯어낼 생각만 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이런 판에, 승소 확률도 적지, 수임료로 지불할 돈도 별로 없기까지 하지, 사형 선고를 받았으니 애초에 소속 커뮤니티로부터의 평판도 나쁘지, 대체 이런 "낙인 찍힌 인생들"을 뭐하러, 자신의 정력과 귀한 시간까지 써 가며 돕는 것일까요? 그렇게나 커리어 좋고 능력도 우수한 분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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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David R Dow (출처: 휴스턴大 로센터 홈페이지 )

 

 


이 책은 텍사스 주에서 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들을 위해, 마지막 남은 일말의 가능성을 찾아 가며 법률적 절차를 통해 구명 활동을 펼치는, 대학교수 겸 변호사인 데이비드 도우 씨의 책입니다. 이 책에서 그가 주로 다루고 있는 이야기는, 강도 사건(한국인이 경영하는 주유소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으로 피소되어 유죄가 확정된 Eddie Waterman이란 죄수를 변호하는 과정에서 그가 겪은 사연들입니다.

 

에디 워터맨은 강도단의 일원이었지만, 살인에 대해서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아닌 공범의 행위로 인해 살인행위의 유죄가 인정되어,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신세입니다. 한국의 법제로도 이런 취급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법치국가는 엄연히 "자기 책임의 원칙"을 유지해야 하니까요. 나 아닌 다른 공범자의  행위책임을 연대하는 건 소위 "Felony Murder Act"가, 텍사스 주에서 효력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이 법은 "공범자 법"이라고도 불립니다(책에는 "당사자 법"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원어는 the law of parties 입니다. 여기서 party는, "당사자"가 아니라  공범자 집단이라는 뜻입니다. 오역이므로 시정되어야 하겠습니다). 한국식으로는, 소위 "공모공동정범" 개념과 비슷합니다. 물론 이런 학설은 한국 뿐 아니라 어느 나라의 실정법과 실무에서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미국 텍사스 주의 법현실과 의식이 얼마나 열악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저자 도우 교수는, 사형수 워터맨을 살리기 위해 갖가지 수단을 다 쓰고, 우수한 보좌진과 함께 머리를 짜 냅니다. 하지만 1심 재판의 변호사가 일처리를 부실하게 하는 바람에, 사실상 써 볼 방책이 별로 없습니다(대법원은 사실심이 아닌 법률심만 진행하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 열의와 능력을, "돈되는" 기업 사건이나 부호의 변호에 쏟았다면, 그는 벌써 돈방석에 앉아 카리브해에 호화 별장 몇 채를 간수하고 있었을 겁니다. 헌데도 그는 마치 돌을 굴리며 경사를 오르는 시쉬포스처럼, "헛된 수고"를 거듭할 뿐입니다. 이유는 하나뿐이죠. 올바르지 못한 일을 멍청한 이들이 권좌에서 반복하는 모습을 참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법과 원칙은 별개의 존재다. 그러나 잘못된 신조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이 법관 자리에 있다면, 그 둘은 일체가 되어 버린다." 도우 교수는 인종적 편견, 명예욕, 비뚤어진 세계관 때문에 유색 인종에게는 성의 있는 재판을 진행하지 않고 기계처럼 유죄 선고를 내리는 판사, 그런 판사 위에 사실상 군림하는 악덕 검사와 맞서 싸우는 게 거의 하루 일과입니다. 텍사스에서는 기일을 초과하여 증거 자료를 제출하면, 그 변호사의 자격을 박탈할 수 있는 규정이 있다고 합니다. 도우 교수는 부실한 자료를 기한에 맞게 제출하느냐, 아니면 충실한 자료를 기한 넘겨 제출하느냐를 두고 갈등에 빠집니다. 전자를 선택하면 워터맨은 그냥 죽어야 합니다. 후자를 선택해도 워터맨이 살 수 있을 가능성은 그저 미미하게 상승할 뿐이지만, 자신이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할 가능성은 매우 높아집니다. "모험을 할 가치가 있는 일이지?" 그는 망설임 없이 의뢰인인 사형수의 이익을 위한 결단을 내립니다.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공명심에서 괜한 과시적 업무 수행을 한다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럴까요? 일단 이 책에 나오는 그의 사연, 고백, 진술을 보고 나면 그런 생각은 싹 사라질 것입니다. 교도소에는 아주 지능이 높은 죄수도 있습니다. 건축, 공학 등 평범한 두뇌가 이해할 수 없는 분야의 서적, 문헌을 한 주에 천 페이지씩 읽는 괴물도 있습니다. 이 자가 어느 날 도우 교수에게 읽어 보라며 자료를 줍니다. 도우 교수가 자신의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알고리즘입니다. "일만 처리하려면 이렇게 자주 교도소에 들르실 필요가 없을 텐대요?" "그런 식이라면 애초에 이런 일을 맡을 필요도 없었겠죠?" 그는 소송을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이기면 좋겠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사형수와 같은 눈높이를 맞추고, 이해하고 공감하며, 이 비인간적인 제도가 궁극적으로 폐지를 맞게 하기 위해 교도소를 찾습니다.

사람은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그 아내의 부친, 그러니까 장인 어른 되시는 분도 보통이 아닙니다. 사위와 세계관은 사뭇 다르고, 유태인인 사위와 서로 껄끄로울 만하게, 독일 혈통을 지닌 분입니다. 그러나 실로 교양 있고 깊이 있는 지성인이기에, 자신과 다른 세계에 속한 젊은이를 딸의 배필로 인정했고, 만능 스포츠맨으로서 사위에게 이것저것 가르쳐 가며 더 친해졌습니다. 사위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자네는 환경 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건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죠." 장인은 어느 순간 암 선고를 받았는데, 자기 확신이 지나친 분이라 너무 늦게 종양을 발견한 탓에 시한부 인생이 됩니다. 그는 사위를 다시 부릅니다. "이 사람아, 환경 운동이 취향 문제라고? 그럴 수도 있겠지. 허나 자네 같은 리버럴이 그런 생각을 할 리 없지 않나? 내가 그 대답을 들었을 때 속으로 얼마나 화났는지 알기나 하나?" "......." "헌데, 내가 자네를 알지. 그건 거짓말이 아니라, 나를 향해 논쟁의 떡밥을 던진 거였어." 참으로 만만치 않은 사위와 장인입니다. 서로가 얼마나 다른 영혼인 줄 잘 알면서도, 거의 필사적으로 서로를 이해하려고 전쟁을 벌입니다.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전쟁이 아니라, 누가 더 높은 인격과 고매한 정신으로 상대를 잘 이해하는지를 두고 전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나는 품위 있게 죽을 권리가 있어. 나의 아내, 내 딸(즉 도우 교수의 부인), 이들도 물론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니, 발언권이 있지. 그러나 나의 생명 처분에 있어서 나와 같은 투표권을 가진다는 건 좀 아니라고 봐. 항암치료고 뭐고 다 그만 두고, 내가 예측 가능한 날짜에 죽게 내버려 두면 안 되겠나? 자네 부인(자신의 딸)을 좀 잘 설득해 보게." "장인 어른, 그 말씀도 맞습니다. 제가 그런데 이야기 하나 해 드리면 안 될까요? 아이가 없던 부부가 있었는데, 어느 날 드디어 임신 진단을 받았답니다. 그런데 뱃속엔 태아 다섯이 함께 자라고 있었다네요? 안전한 출산을 담보할 수 없어 둘을 유산시켰답니다. 셋은 지금 잘 자라나 있습니다." "그 얘길 나한테 지금 왜 하는 건가?" "이 아이 엄마는, 느닷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닫고, 새 배우자와 함께 살기 위해, 아이 셋과 남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 지금 어떤 심리 상태에 빠져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물론 커밍아웃이건 새로운 결합이건 그 엄마의 자유입니다. 장인 어른은 그러나 그 여성을 비난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사람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을 위한 최소한의 책임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는지요?" 장인은 사위의 이 말에 한 마디도 반박을 못합니다. 아내는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남편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당신 덕분에 내 아버지가 일단 삶을 선택한 거죠."

 

생명을 존중하고 그 신조에 충실한 도우 교수는, 결국 일 때문으로 만난 사람이건 자기 아내의 아버지이건, 단 한 번만 사는 인생에서 선물로 받은 생명을, 자의건 타의건 결코 포기하지 않게 그의 모든 노력을 바칩니다. 위대한 지성인이고, 자신의 지식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행동으로 옮길 줄 아는 분입니다. 강도 워터맨과 그의 장인은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 간의 대화, 법정에서 벌어지는 공방은 마치 소설이나 영화의 그것처럼 심오하고 철학적입니다. 그러나 전달하려는 진실은 간단하고 명쾌합니다. "그 누구라도, 자신 혹은 타인의 생명을 앗을 권리가 있는가?" 대답은 책을 읽은 독자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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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신국부론, 중국에 있다
전병서 지음 / 참돌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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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의 시대를 운위하는 요즘입니다. 현재 중국의 GDP는 비록 상징적이라고는 하나 이미 미국의 수치를 추월하였고, 이번 시[習] 주석의 방한 시 국내 언론조차 앞다투어 "미국과 중국 중 어느 한 편을 선택해야 할 순간이 온다."며 다소 절박해 보이는 헤드라인을 달았습니다.

중국의 장래에 대해서는 그간 여러 진단들이 나왔습니다. 세기가 갓 바뀌었던 무렵만 해도 "머지않은 장래에 중국이 미국을 추월하고 패권국이 될 것이다.", "이제 10년 만 지나면, 중국어 못 하는 학생들은 기업에 취직도 못 하는 상황이 올 것이다." 같은  말을 흔히 들을 수 있었죠. 이때만 해도 짝퉁, 유독 음식, 저질 공산품 양산 기지 같은 부정적 이미지가 널리 퍼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동북 공정"조차 아직 시작이 안 되었을 때입니다.

2008년, 세계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대형사고가 터졌습니다. 유일 초강대국으로 언제까지나 그 위세를 떨칠 것 같았던 미국에서, 사상 초유의 금융 부실 스캔들이 터져 거대 공황을 몰고 오기 직전까지 사태가 악화되었던 거죠. 이라크 전 마무리가 최악의 무능을 노정하며 대혼란으로 치닫던 터에, 생각지도 않았던 금융 사고까지 발생하여, 철옹성 같았던 미국의 시스템이 얼마나 취약했었는지 전세계에 그대로 폭로되고 말았습니다. 위신도 땅에 떨어졌지만, 바야흐로 중국이 이 틈을 파고 들어, 형세의 역전을 노릴 것이라고 다들 예상했습니다만, 역량 부족으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호기를 못 살리고 성장의 동력이 점점 꺼져 가는 모습마저 드러내자, "곧 부동산부터 해서 거품이 꺼질 것이다.", "도농 간, 동서 간의 빈부 격차 심화, 잠복해 왔던 민족 문제의 폭발, 지도층의 부정 부패 같은 시한 폭탄이 언젠가는 터질 것이다." 같은, 비관론이 급속하게 확산되기도 했죠.

이 책의 저자는 한국에서 손꼽히는 중국 전문가인 전병서 선생입니다. 책은 근 5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인데, 군더더기라곤 하나도 없는 알짜 분석과 진단으로만 가득한 내용이라, 읽어나감에 따라 머리가 꽉 차는 느낌이면서도, 전 분량이 언제 다 소화되었는지 시간 경과를 의심케 할 만한 독서였습니다. 책의 결론은 "우리의 장래는 결국 중국에 달려 있다. 중국의 장래가 승천하는 용이라면, 우리는 그의 등에 올라타기만 하면 된다. 만약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이무기로 떨어지는 신세라면, 우리는 당장 시련을 겪겠으나 장기적으로 더 튼튼한 지위로 올라설 여지가 생긴다." 다시 말해서 중국의 현황과 실체를 정확히만 파악하면, 우리의 장래는 탄탄대로라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저자는, 제가 앞에서 적은 그간의 상황을 독자가 다 이해한다는 전제 하에, 동서고금 경제사의 다양한 실례를 거론하며 논자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그는 일단, "지리상의 발견(일단 이 용어를 그대로 쓰자면)" 이래 패권국의 지위를 지닌 여러 나라의 운명과 주기를 분석합니다. 패권국이 있었고 그에 도전하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패권국이 갓 도약할 기간과 최융성기가 있고, 전쟁을 거쳐 서서히 쇠퇴하는 시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일정 주기가 지나고 정해진 패턴을 겪으면, 패권국의 위치는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옮겨 갑니다. 이런 구조는 무력의 우열에 의해서도 결정되지만, 근본적으로는 금융패권을 얼마나 견고하게 장악하고 있는지에 의해 판가름난다고 하는군요. 패권국이 그 패권을 강력히 유지할 시기는, 금리 수준이 자연스럽게 0 주위를 맴돕니다. 이것이 이제 상승점으로 치고 올라갈 무렵, 패권국은 드디어 그 왕관을 타국에 물려 줘야만 할 때가 온다는 주장입니다.

패권의 교체는 꼭 전쟁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건 아닙니다. 지배층의 무능과 방만은 주로 금융 섹터에서 그 곪은 상처가 터지기 십상인데, 이런 금융 사고는 최근세에 들어 아홉 차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중 압도적 다수는, 서양 쪽에서 내실과 근검으로 경제생활을 유지하지 않고, 남의 빚을 내어 사치와 타락의 풍조에 빠져들면서 벌인 사고라고 하는군요. 지난 2008년 서브프라임 위기도 바로 그 예입니다. 한국을 비롯하여 아시아 국가들이 미국, 유럽만큼 타격을 입지 않은 이유는, 이 위기의 진앙에서 멀찌감치 벗어나 있었던 중국에 긴밀히 의존하고 있었던 덕이 크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저자가 유럽, 미국을 향해 쏟아내는 비판은 신랄합니다. 무슨 놈의 자본주의가, "자본(capital)"은 하나도 없고, 남의 빚을 내어 오히려 공갈을 쳐 가며 사치를 누리는 "부채주의(creditism)"으로 타락할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3세기 전 영국의 엄청난 국력과 잠재력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애써 무시한 채 제 나라가 그저 최고라고만 여겼던 건륭제의 우(愚)를, 이제 이 서양국가들이 중국에 대해 똑같은 모습으로 범하고 있다는 겁니다. "중국은 내부 모순 때문에 망한다. 분열된다, 거품이 꺼진다. 벌써 성장 축세가 둔회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비판을 하는 자신들은, 훨씬 더 심각한 체제 모순에 빠져 있다는 거죠.

미국은 기축 통화국의 위치를 남용하여, 남의 나라 재화를 "프린터 인쇄 비용"만으로 강제 취득하고 있는 셈이라며 비판합니다. 달러의 가치를 담보하는 건 닉슨이 금의 태환을 중지한 이래 현재 아무것도 없으며, 오로지 석유 거래에 있어 강제적 결제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는 그 사실 뿐입니다. 저자는 이런 관점에서, 통화 발행권 남용으로 실물의 뒷받침 없이 제조업 중심 국가로부터 금융, 서비스 중심 국가로 부의 강제 이전을 꾀하는 미국의 전략을 비판합니다. 남의 빚에 의지한 채 낭비를 일삼는 나라가 오래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반면 중국은 재정 건전도가 세계 최고 수준이며, 미국의 국채를 가장 많이 보유한 채권국입니다.

재미있는 주장도 있습니다. 미국의 이런 패권국 지위에 도전하기 위해, 정면으로 싸움을 건 나라들- 일본, 독일- 은 반드시 패망했다는 겁니다. 중국은 그래서, 미국과 군사적으로 충돌하기보다, 가벼운 잽은 맞아 가면서 실리를 추구하는 전략이라고 하네요. 현재 중국은 이미 제조업 분야에서는 미국을 능가했지만, 아직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분야가 금융 산업이라고 합니다. 금융의 체질이 허약하기 짝이 없기에, 이 분야의 개방은 극구 미루면서 체질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실태가 이러하다면, 중국은 예전 덩샤오핑이 내세웠던 도광양회 단계를 아직 탈피하지 못했다는 인상도 줍니다. 차이나 3.0을 논하는 시점인데도 말입니다. 이 대목은 어제 한중 정상회담에서, 원-위안화 직거래소(청산결제은행)을 서울에만 두기로 합의한 사실과 연관하여 다시 주목됩니다.

미국이 중동 원유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야심차게 기획한 것이 셰일가스 입니다. 이를 통해 미국은, 더 이상 석유가 아닌 대체 자원을 통해, 중동 정세에 좌우되지 않고 독자적인 에너지원을 확보하여 패권국의 위치를 굳힌다는 전략임은 우리가 다 아는 바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에 대해 다른 해석을 내놓습니다. 셰일가스층의 최대 매장량은 오히려 중국이 확보하고 있으며, 현재 달러의 기축 통화 위치가 석유 거래 결제 수단이라는 그 하나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제 셰일 가스로 이 위상마저 흔들린다면 달러는 급속도로 추락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오히려 명을 재촉할 수 있다는 논리죠. 다만 이것이 현실화되려면, 저자 스스로도 지적하듯 "물 없이 가스를 추출할 수 있는 신기술이 개발되어야"만 합니다. 중국에서 부족한 게 바로 물 자원이기 때문이죠.

중국의 지도층은 과연 건전한 내부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가? 여기에 대해 저자는 낙관적인 분석을 내놓습니다. 한 대를 건너 뛰며, 다음 지도자를 현직이 지명하는 식으로 각 계파의 이해를 배려하는, 대단히 유익한 지혜가 발휘되고 있다는 분석입니다. 후진타오는 덩샤오핑이 지명했으며, 지금의 시 주석은 장쩌민이 지목한 후계자라는 거죠. 시 주석은 처음에 대단히 취약한 권력 기반에서 주석직을 시작했지만 현재 아무 문제 없이 대국을 리드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중국식 집단 지도 체제가 대단히 안정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독자 스스로 기준을 세워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건 버리며 읽어야 할 줄 압니다. 최고 수준의 중국 전문가인 저자는, 애널리스트라기보다 자기 계발 톱스타 강사처럼, 현란하고 명쾌하며 재미있는 어조로 책에서 시종 일관 독자를 매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처럼 아프리카, 중남미에서 중국 측의 전략이 매번 잘 먹히는 건 아니고, 특히 아시아 국가들이 친미 대열에서 이탈하여 중국에 기운다는 사실은, 현재 필리핀 등의 태도를 보아도 사실과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유념해야 할 건, 미국이라는 나라가 대단히 부실한 기반 위에 서 있다는 겁니다. 설사 중국이 어리석고 무능해도, 미국이 지금처럼 패착을 거듭한다면, 패권이 정말 중국에게 넘어가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중요한 건 냉철한 현실 감각이고, 그것이 우리 같은 작은 나라가 생존을 도모하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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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공모자들 - 일본 아베 정권과 언론의 협작
마고사키 우케루 지음, 한승동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언론이 침묵하면 돌들이 입을 열어 소리칠 것이다." 이 말의 출전은 본디 기독교의 경전이라고 합니다만, 우리 나라에서는 故 리영희 선생의 인용으로 유명해졌습니다. 리영희 선생은 합동통신, 조선일보에서 기자로서 젊은 시절 커리어를 다진 분이었으며, 그가 한양대학교에서 언론정보학 강좌를 담당하며 교편을 잡은 것도 이런 배경이 있어서입니다. 선생은 거의 전 생애를 바쳐 "제 할 말을 하고, 진실을 전달하는 언론"이 사회의 공기요 소금 같은 존재라는 진리를, 글과 행동을 통해 한국인에게 확신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노력의 결실인지, 한국의 언론은 과거 군사정권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자유를 찾은 편입니다. 논란의 여지는 있습니다만...

.... 최소한, 작금 일본의 형편보다는 나은 상황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책을 읽고서, 그 점을 더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의 언론은 사실 권력의 탄압 때문에 할 말을 못하던 우리의 과거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보다는, 언론과 권력(주로 관료 세력과 보수 정치인) 사이의 자발적인 유착으로, 진실을 가공하거나 은폐하는 경향입니다. 권-언 유착이란 말은 과거 우리 나라에도 있었지만, 주로 사주(社主)와 권력자 사이의 음험한 야합이었을 뿐, 일선의 기자들은 맹렬한 저항정신으로 이를 막았죠. 일본의 상황은 이와는 크게 다릅니다.

이러한 일본의 암울한 현실을 고발하고, 대중의 각성을 촉구하며, 자신의 조국 앞날을 진정어린 애국심으로 염려하는 저자는, 동경대 법학부 출신(졸업은 못하셨다고 하네요)으로, 외교관의 길에 일찍 투신하여, 駐 이란 대사까지 지낸 마고사키[孫岐]우케루[享]씨입니다. 이 책은 그를 정치외교 전문가, 비판적 진보 지성 등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한국과 달리 화려한 공적 커리어를 지닌 인사를 준 귀족으로 취급하는 일본에서는 그 관록이 일반에 주는 무게감이 다릅니다. 일본은 원래 진보적 지식인이 많이 배출되는 나라입니다. 한국의 한겨레신문 등에 정기적으로 기고하는 이들도 많고, 이미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맑스레닌주의에 투신한 이, 식민지 한국의 처지에 깊은 공감을 갖고 해방 투쟁을 도운 이들도 많습니다. 그저 진보 인사라면 새삼스러울 게 없지만, 커리어나 학벌 상 주류 중 주류에 속하는 이런 분이 몸소 행하는 비판이라면, 일본에서는 그 무게가 다릅니다.

어제 이한(離韓)한 시진핑 국가 주석도 그런 입장을 표명했지만, 최근 들어 일본의 우경화는 주변국의 우려를 크게 부를 만큼 심각하고 치밀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죠. 저자 마고사키 씨는, 이런 아베 행정부의 노선이 사실은 미 네오콘의 사주, 최소한 부추김을 받아 일어나고 있는, 종속변수적 현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한국에서 보는 프레임과는 사뭇 다른 태도입니다. 일본은 최근 중국의 위협적 확장에 위기 의식을 느끼고, "더 이상 비무장 노선을 고수하다간(언제 그런 적이 있지도 않았습니다만) 국가 안보를 장담할 수 없어'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보통국가화"를 추진하며, 미국 역시 더 이상 말릴 힘이 없어 이를 방관한다는 정도로 인식합니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은, 2008년부터 집권하고 있는 오바마 행정부(민주당 정권)의 노선과 자민당이 알력을 빚는 듯한 겉모습은 사태의 핵심이 아니며, 중국을 견제하고 궁극적으로 강대국 레벨에서 탈락시키려는 네오콘의 원모(遠謨)에 아베가 꼭두각시로 놀아나고 있다는 취지입니다. 그는 이런 전제를 깔고 책의 1장에서부터, 미국이 주도하는 TPP에 필요 이상으로 참여 강박 증세를 보이는 아베 정권의 태도를 비판합니다.

오키나와는 과거 류큐라는 독자적 실체를 지닌 지역 왕국이었습니다. 사실 덕천 막부도 강력한 봉건적 권위로 열도를 다스렸을 뿐, 본토 역시 중앙집권적 체제로 통일된 상태는 아니었죠. 그러던 것이 메이지 유신 이후 강력한 근대 국가 외형을 갖추려는 양번(兩藩) 실세들의 기도에 따라, 강제로 일본에 편입되었을 뿐입니다. 저자는 근래 들어 미군 기지 문제와 함께 현지에서 강력히 대두되고 있는 자치운동을 분석하면서, 강압적으로 형성된 억지 대세가 어떻게 현지인들의 이해와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지 다각도로 분석합니다. 저자의 주장은 실로 파격적입니다. 요약하면, "오키나와도 주권을 회복해야 하며, 미군이 수도 한복판에 주둔하는 기형적 국가인 일본 역시 참된 의미에서 주권을 회복해야 한다."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3부에서 그는 본격적으로 아베 정권의 본질을 파헤치며, 그 허상을 맹공하고 있습니다. 3개의 화살인 금융, 재정, 성장 정책 모두가, 치밀한 전략이나 비전을 뒷받침하지 않는 공염불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아베 정권이 이처럼 빈약한 정신적 기반밖에 못 갖춘 이유는, 미국 안에도 매파와 비둘기파로 대표되는 다양한 목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처롭게도 "재팬 핸들러"로 불리는 네오콘만 해바라기하는 그 편향되고 근시안적인 자세에 이유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 장에서 그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 같은 어리석은 정치 쇼로, 한국과 중국을 자극하고 미국 비둘기파를 불편하게 만드는 행위를 즉각 중단할 것을 요구합니다.

4부에서 그는 외교관답게, 대체 이 미묘하고 인화성 강한 센카쿠(다오위다오) 열도 문제가  1970년대 중일 수교 당시에는 어떻게 그냥 넘어갈 수 있었는지를 짚고 있습니다. 해답은 "일단 현안에 대한 일도양단식 판단을 삼가고, 현상 유지와 평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는 자세입니다. 이러한 이니셔티브는 이미 대만과 일본 사이에서 그 의미심장한 첫걸음이 내디뎌졌는데, 중국과의 사이에서 유사한 해법을 찾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중요시하는 가치는 첫째도 평화, 둘째도 평화입니다.

5부에서는 이 책의 결론으로, 대중과 국민에 대해 진실을 알리고 건강한 해법을 찾기 보다, 밀실에서 결정난 가공되고 왜곡된 오피셜 스토리만 전파하려 드는 언론의 행태를 집중 비판합니다. 여기에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미국산 요격 미사일의 진짜 성능,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부상(浮上)한 스타 정치인의 자질 등에 대해, 대중 스스로가 "과연 진실일까?"를 끊임 없이 자문해 봐야 한다는 충고를 합니다. 그는 다소 감상적인 태도로, 이란 대사로 재직할 당시 현지에서 접했던 어느 동화를 인용하며, "모두가 예스라고 말할 때 홀로 노를 외치는 이의 고독함"을 간접적으로 토로합니다. 진실이야말로 총칼이나 기만, 강압, 금력 등 그 모든 의롭지 못한 수단을 궁극에 가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안임을, 이 노전사는 책에서 절절히 외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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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대입 자기소개서 바이블 - 대입 수시전형 합격의 열쇠
김한슬 외 24인 / 지식채널 / 201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문 제 풀이 입시 위주의 신입생 선발 방식이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는 건 누구나 동의합니다. 대학은, 자기 학교에 들어오려는 학생의 인물 됨됨이를 보고 입학 자격을 주어야 하며, 문제를 잘 푸는 기계를 우대하는 기관이 되어서는 곤란하죠. 그래서 현재 각 대학에서는, 수능 점수가 주된 선발 기준이 되는 정시 전형 말고도, 자기소개서의 완성도와 진정성으로 적합성을 평가하는 수시 전형 방식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자기소개서는 말 그대로 자신을 소개하는 자료입니다. 이 대학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성취해 왔으며(꼭 "스펙'을 말하는 건 아니죠. 현재 상당수의 대학은, 토익 점수 등 스펙을 기재한 자소서에 대해 0점 처리의 원칙을 유지합나다), 이 대학에서 앞으로 어떤 계획 아래 학업을 이뤄 나갈 것인지를, 분명하면서도 진솔한 방법으로 진술해야 합니다.

이 책은, 자소서 위주 전형에서 고득점을 받고 합격한 학생들이 몸소 적은, 모범적인 답안례를 소개하거나, 이렇게 쓰면 높은 평가를 받기 곤란한 답안의 실제 예를 들면서 개선해야 할 점을 상세히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자소서를 잘 적기 위한 원칙은 여러 가지가 제시되어 왔지만, 그 대부분은 추상적이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건지가 모호하거나, 서로 상충되기까지 합니다. 학생들은 아직까지 초, 중등 과정에서 자기 표현이나 자기 생각을 효율적으로 적는 훈련을 덜 받아 왔기에, 자소서를 적으라고 하면 그저 막막해하거나, 좋지 못한 미사여구의 남발만 보이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잘 쓴 자소서인지, 또 바람직하지 못한 서술 방식은 무엇인지, 어떻게 고쳐 나가야 하는지를, 구체적인 예문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본문은 410페이지, 부록이 80페이지에 달하는 아주 방대한 분량입니다.

양이 이렇게 많다 보니, 웬만한 학생이면 "아, 나는 이 선배와 처지나 적성, 환경이 비슷하구나, 이런 식으로 적으면 되겠다."라든가, "나는 자소서라고 하면 이런 식으로 적어 나가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렇게 하면 곤란한 거였구나."면서 고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작문은 이론이 아닌 구체적 실전에 의의가 있으며,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표현하는 자소서라면 두 말 할 것도 없습니다. 물론, 이 책에 실린 모범적인 자소서를 두고, 그저 암기의 대상으로 삼는다든가, 여러 예에서 좋은 요소만 따 와 짜깁기를 하는 방식은 절대 금물입니다. 작성자는 자기 혼자 생각으로 그런 유혹에 빠질 수 있지만, 사정관은 수없이 많은 자소서를 보면서 어떤 것이 정직한 작성이며 어떤 것이 "점수 따기만을 위한 컴필레이션 픽션"인지 한눈에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글쓰기의 원칙은 준수하되(모범적인 형식 구비), 거기에 담아야 할 내용은 철저히 자기 자신의 정직한 이야기라야 합니다.

참신함과 논리적 비약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기
읽 으면서 "이런 자소서도 있구나."할 만큼 신선한 내용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소서는 초현실주의 신춘문예가 아니기 때문에, 그 내용 전개와 구조는 건전한 상식과 논리에 맞아야 합니다. p44를 보면 "목감기 때문에 말의 소중함을 배웠다."는 예가 나오고, 이에 대해 적절한 비판이 가해지고 있습니다. 제 생각을 첨부하자면, 너무 내용이 늘어지거나 글자 수 제한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근거와 짜임새를 첨부하면 식상함을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무리한 시도는 아닙니다. 다만 이대로의 모습은 곤란하며, 상당한 글재주가 아니고서는 이 소재로 멋진 진술까지 발전시키기에는 조금 힘에 부칠 것 같습니다.

전문 경영인이라야 의료 법인을 잘 운영할 수 있다는 주장 역시, 이대로 방치하면 특정 직업군을 비하한다는 인상을 주기 쉽죠. 구체적으로, 의료인이 경영을 맡았을 시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 근거를 들어야 합니다. 근거라고 든 사실이 지나치게 길어져서는 그것도 곤란합니다. 다만, 사회의 현 제도가 분명 모순을 내포하고 있으며, 어린 학생 개인의 입장에서 이의 개선을 위해 어떤 포부를 갖는지 서술하는 건 바람직합니다. 이 경우에도, 개인 범위를 벗어나는 지나친 욕심, 과장된 비전 나열은 지양해야 하겠습니다.

입학 사정관을 기다리게 하지 말라(p70)

왜 글이 두괄식이어야 하는지 알려 주는 좋은 예죠. 사정관은 많은 지원자를 대면(혹은 서면을 통한 접촉)하고 평가, 사정해야 합니다. 과도한 자의식으로 문장을 질질 끄는 것은 자소서 스타일에 어긋납니다. 개성의 표출은 대학에 입학한 후, 그런 스타일이 잘 들어 맞는 다른 상황에서 뽐내야 합니다.

일관성을 유지하라
일 관성이란 같은 단락 안에서 같은 주제, 화제만을 다루는 기본 원칙을 말합니다. 학생 주관적으로는 토픽 A와 B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나, 사정관이나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연결점을 찾기 어렵다면, 그런 서술은 일관성을 잃고 자기 주장을 전달하는 데에 실패하기 쉽죠.

은유적 표현을 피하라

잘된 은유는 글에 참신성과 생기를 더하지만, 자소서처럼 상대적으로 짧은 분량에다 비약적인 표현을 남발하고, 이에 근거를 덧붙이며 낭비하다가는 사정관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자신이 지원하려는 학과에 대해 평소 깊은 관심을 가져 왔음을 증명하기 위해, 전공 분야의 전문 용어를 사용하는 건 전형에 따라 꼭 필요한 성의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구체적인 서술"이라는 미덕과도 관련됩니다.

진솔하고 구체적인 서술
p202 를 보면 서울대 인문학부에 지원하여 합격한 남미희 씨의 좋은 예가 나옵니다. 보통 명문대에 지원하고 입학하는 학생들은 강남 출신이 많다는 선입견에, 아주 보기 좋게 반박하는 답안으로 볼 수도 있을 만큼, 참신하고 흥미로운 답안이었습니다. 이 사연은 모범 답안을 베끼거나 대필이 절대 아니겠구나 하는 인상을 주려면, 결국 자기 이야기를 정직하게 적는 방법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다시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또한, 글에는 명확한 스토리가 있어야 합니다. 교육 환경이 그리 유리하지 않은 가리봉동에서 나고 자란 상황이, 현재의 자신을 형성하는 데에 구체적으로 무슨 영향을 미쳤는지, 이 답안은 설득력과 매력을 겸비한 채 잘 전달해 주고 있었네요.

p258에 보면, 기업체 채용시 그렇게나 기피된다는 마마보이 캐릭터의 어느 학생이, 역시 자신의 약점을 그대로 노출하면서, 설득력 있는 학업 비전을 젛묘하게 잘 표현한 사례가 나옵니다. 잘된 글은, 역시 자신에 대해 평소부터 분명하고 건강한 정체감을 형성한 학생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확인하게 됩니다. 약점이라고 해도 감추지 않고, 자신의 개성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치밀한 사고가 필요합니다. 이는 자소서 뿐 아니라, 모든 글쓰기에 공통된 원칙이겠습니다.

유복한 환경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라난 학생이, 있는 그대로 자신의 지난 이력을 적은 답안도 있었습니다. 이런 답안도, 마무리는 "나와 다른 처지에 있는 이들을 이해하며.." 같은, 건설적이고 열린 자세의 표현으로 짓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구김살 없이 자라나 인성에 왜곡이 없는 지원자를 선호하는 대학들이, 이처럼 어른스러움까지 드러내는 자소서를 아주 마음에 들어할 것임은 충분히 예상 가능합니다.

어떤 답안(경제학과 지원)은 "매몰 비용"에 대해 학생으로서 깊은 사고를 해 보았음을 토로한 것도 있었습니다. "고기 뷔페 식당에 가서, 배가 터지게 먹는 것은 결국 비이성적인 선택이니..." 그런데 이 경우처럼, 지불과 효용이 밀접하게 시간적으로 닿아 있는 것을 "매몰 비용"으로 포섭하는 건 오류죠. 계획과 실행이 근접할 때에는, 갑자기 신체적 조건이 악화되거나 한 게 아니라면, 처음의 계획대로 밀고 나가는 게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각 대학의 특성을 파악하자
현 재 자소서 전형이라고 명칭을 달고 있는 대학은 없습니다. "21세기 인재 전형", "프론티어 전형", "다빈치 전형".. 이렇게 이름이 다양하다는 건, 그 전형에서 중시하는 포인트가 다르다는 말도 됩니다. 어느 대학에 지원하려면, 그 대학이 학생의 어떤 면을 보는지부터 알아야 하죠. 이를 위해서는 먼저 그 대학의 전형 취지를 꼼꼼히 읽고, 자소서의 개요를 구상해야 합니다.
이 책에는 대학이 잘 묻는 질문의 특성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서울대학교의 경우, "평소에 감명 깊게 읽은 책"에 대해 적어 보라든가, 대단히 특이하게도 "지원 동기 중심으로 대학이 학생을 뽑아야 하는 이유"를 적으라는 문항도 있었습니다.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할 줄 아는지를 묻는 것도 되며, 아울러 왜 스펙에 치중하면 안 되는지, 대학의 선발 동기를 학생에게 처음부터 알리려는 의도도 됩니다. 이런 게 잘 맞지 않으면 그 대학에 자소서 전형으로 입학하는 것은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부록에는 각 대학의 구체적인 자소서 양식이 나와 있어서, 지원자의 작성 실전에 감각을 더 잘 살려 주는 포맷을 접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첨삭자의 느낌이 생략된, 원문 그대로의 모범 답안이 본문과 중복 없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저 희 때에는 그저 수능 점수로 학생을 뽑았으며, 수시 전형이라고 해도 그 대부분은 역시 내신이나 수능 점수가 선발의 기준이 되었어요. 기업체 취직 말고는 자소서라는 걸 써 볼 일이 없었지만, 이제 세상이 바뀌어 미국이나 유럽처럼 그 학생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자소서를 통해 대학에 가기도 하는 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 물론 수능 최저 조건도 만족시켜야 하고(이게 없는 전형도 있죠), 내신도 잘 관리해야 하지만, 자소서의 비중이 이렇게 높아진 건 새로운 추세입니다. 성인이 되어서 새삼 "나는 누구인가?"를 점검하고 싶을 때, 이 책을 펼쳐 읽어도 좋겠다 싶었습니다. 또한 바람직한 글쓰기란 과연 무엇일까. 세상에는 이렇게나 다양한 환경과 가정 형편에서 자라나서, 결국 같은 대학에 입학하기도 하는구나 같은 생각을 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다시 점검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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