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둥꽃
장 퇼레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림원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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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설보다 더 극적이고 더 믿어지지 않는 게 바로 현실이라고도 합니다.

 

장 퇼레의 이 신작은 나폴레옹의 제 1제정부터, (묘하게도) 그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이 기만적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던 제 2 제정의 시기까지, 수 많은 사람(고용주, 고객, 이웃, 친구, 성직자, 심지어 제 부모를 포함)들 을 죽인 연쇄살인만 엘렌 제가르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입니다. 아마 기록으로 남아 있는 중에는 최악, 최대의 사건으로 평가될 만합니다. 이런 실제 역사를 두고, 남아 있는 기록을 철저히 연구하여, 요즘 그로테스크한 작풍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장 퇼레가 소설로 옮겼습니다.

 

사건의 스피디한 전개나 기상천외한 반전보다는 독특한 분위기의 형성에 장기를 가진 그 답게, 어찌 보면 실화가 아닌 우화나 판타지가 아닌가 싶게, 당장이라도 해협의 짠바람 냄새가 코 끝에 확 와 닿을 것 같은 분위기 묘사가 일품입니다. 살인마가 누구인지는 우리가 다 알고 있으며, 그녀가 실제 어느 경로를 통해 움직이며 누구를 죽였는지는 우리가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읽어가며 특별한 서스펜스가 자아내지지는 않습니다. 물론, 엘렌 제가르도(스스로를 켈트 죽음의 정령 "앙쿠"라고 생각하는)의 섬찟한 대사, 독살의 사냥감으로 점 찍은 이를 두고 조롱 섞인 예고를 하는 장면(그러니, 연쇄 살인마일 뿐 아니라 예고 살인마이기도 합니다)에선 독자의 머리칼이 쭈뼛 서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대체 이 참극의 진상이 무엇이며, 어떻게 결말이 날 것인가?"를 두고 조마조마해진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어려서부터 요정으로 착각될 만큼 눈부신 미모를 지닌 엘렌은, 그 미모와 함께 받은 저주의 탓인지 가는 곳마다 사람을 죽이고 다닙니다. 그런데 이 살인 행각이, 그닥 넓지도 않은 브르타뉴 반도 안에서만(시대 상황 탓에 교통 발달이 이뤄지지 않은 게 다행입니다) 이십 년 가까이 이어졌는데도, 왜 범인이 잡히지 않았을까요? 더군다나 살인의 현장마다 그녀가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우선, 불우한 처지에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처연한 감정을 자아내는 엘렌 그녀의 미모를 들 수 있습니다. 인 간이란 어쩔 수 없이 감각의 속임수에 굴복하는 동물인지, 예쁘게 생긴 여인이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라 쉬이 여겨 버립니다. 범죄자로 지목하기는커녕, 모두가 죽은 현장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았다며, 오히려 성녀로 떠받들기까지 합니다. 그 런가 하면, 그런 극성을 부린 지 얼마 채 되지도 않은 똑같은 군중이, 이번에는 그 "성녀"를 마녀로 간주하며 린치를 가하려고도 합니다. 물증, 심증을 새삼 찾아서가 아니라, 미모에 시샘이 났기 때문입니다. 조기에 발견되어 처단 되었어야 할 범인이, 이 토록 오랜 동안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다닐 수 있었던 건, 어찌 보면 이런 대중의 무지몽매함과 광기 때문입니다. 지각 있는 이들은, "미개한 지역민들이 애꿎은 처녀에게 마녀 사냥을 하려 든다."며 일부 옹호하는 여론까지 형성하려 듭니다.

 

뻬어난 미모로 캐릭터를 꾸리기는 했지만, 장 퇼레는 자신의 이 작품에서 마냥 엘렌을 옹호하려 들지 않습니다. 오 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녀, 하층민, 힘 없는 생물에게 아주 잔인하게 구는 악동 도련님(왠지 홈즈 단편 <너도밤나무 집의 비밀>에서 슬리퍼로 바퀴벌레를 죽이는 루캐슬의 어린 아들을 떠올리게 되더군요. 그렇다고 엘렌이 바이올렛 양과 비슷하다는 건 아니구요)을 독살하면서 "네가 꼴보기 싫은 모습이 아니었다고 해도, 착한 아이였다고 해도, 넌 어차피 죽었을 거야."라고 내뱉는 그녀에게, 우리는 일말의 동정도 가질 수 없습니다. 살의와 악의로만 무장한 괴물이지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습니다. 엘렌이 저 대사를 애써 뱉어내게 하지 않았어도, 우리 독자는 엘렌 머리 속에 그런 생각이 꽉 차 있음을 이미 짐작합니다. 혹시 엘렌에 대해 재고의 여지(악인만을 찾아 죽이는 나름 정의의 집행자)가 없을까 애써 선해하려는 독자에게, 퇼레는 쐐기를 박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 없고요, 얜 그냥 괴물입니다. 딴 생각일랑 괜히 하지 마세요."


환속하여 놀랍게도 매춘 업소를 항구에 꾸린 어느 전직 신부를 찾아가, 엘렌은 자기를 써 달라고 합니다. 딱히 엘렌이 색정에 불탄다거나 한 성향도 아닙니다. 사람을 죽일 기회가 확보된다는 동기 뿐입니다. 이 수병들은 마침 한창 제국주의적 팽창욕에 달떠 있던 프랑스의 침략 도구로 쓰이는 병력입니다. 알제리 어느 구역으로 쳐들어가, 신나게 양민을 죽이고 왔다는 무용담(!)을 자랑스럽게 늘어 놓은 군인들을, 엘렌은 15세 어린 병사까지 남김 없이 독살합니다. 생계가 어려워 입대했을 뿐인 소년병은 "어머니 저는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이렇게 죽나 봐요."란 말을 마지막으로 남깁니다. 어느덧 40을 넘겨 그런 아들을 봐도 자연스러운 나이의 엘렌은, 그러나 아무 감정이 없습니다. 뜰에 쌓인 낙엽을 치워도 아마 그 이상의 회한은 남을 것입니다.

 

소설 마지막에는 드디어, 비소라는 독극물의 존재를 명 확히 인지한 당국의 노력으로 엘렌이 검거됩니다. 엘렌 같은 무학 빈곤의 떠돌이가 그런 정제된 독극물을 갖고 있으리라곤 짐작이 어려웠고, 비소는 여러 추리물에서 흔히 나오듯(특히 크리스티 여사의 작품들, 그리고 [다소 의외지만]올더스 헉슬리의 어느 단편에도, 이 흔적을 남기지 않는 독극물은 단골 출현 손님입니다), 일개 연대 병력을 몰살시킬 가공할 만한 물질이기(아주 상투적 표현이죠, 이 소설에서는 그러나 문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때문에, 엘렌은 비로소 끈질긴 추격자들의 노력, 그리고 살찌고 시들어 버린 미모 때문에 드디어 꼬리가 밣힌 것입니다.

 

변호사는 책임 무능력을 이유로, 현란한 말솜씨를 더해 엘렌을 감쌉니다. 하지만 정신 이상 항변은 예나 지금이나 먹히지 잘 먹히지 않습니다(이 시대라면 아직 책임무능력 이론이 정립되기 전이므로, 약간 아나크로니즘이긴 합니다). 엘렌은 기이하게도, 판결 확정 후 사형 집행 며칠 전에야, "나는 내 부모가 주입시킨(그리고 아마 브르타뉴의 미신적 환경이 가르쳐 준)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공포를 잊기 위해, 내 자신이 공포가 되었다."고 털어 놓습니다. 주위에선 "왜 그 얘기를 법정에서 하지 않았어요?'라고 하지만, 특별히 정상 참작이 될 사유는 못 됩니다. 정말로 처형 직전 밤, 그녀는 잠자리에 오줌을 쌉니다. 그녀는 악령 앙쿠에 사로잡혀 삼십 년을 보냈고, 이제 쓸모를 다해 마수에서 풀려 나는 순간, 비로소 어린 10대 소녀의 마음이 아주 잠깐 돌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 직전까지 그녀는, 이미 스스로 선택한 결과라는 듯 "앙쿠의 정체성"을 계속 유지하려 합니다. "기요틴에 잘려 나간 내 머리를 볼 수 있게 거울 하나를 비치해 주세요."

 

유럽 전역에 가장 먼저 고유의 문화와 습속을 형성하며 정착한 켈트인이지만, 로마인, 게르만인, 앵글로 색슨인에 의해 거의 전 지역에서 정복되고, 정복자의 풍속과 사고, 종교를 강요 받고, 서글픈 한을 뼈 속 깊이 간직한 게 켈트인입니다. 브르타뉴 반도는 프랑스에 의해 완전히 중앙집권화 되기 전, 영국 왕실의 영지, 재산으로 남았던 곳입니다. 소설에서 잘 드러나듯, 켈트인들은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이중으로 침탈되고, 멸시와 경계를 받던 가난한 민중이었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밀려 사멸해 가는 개성 강한 영 혼의 몸부림에 대해, 그러나 퇼레는 그저 연민과 동정만을 보내지 않습니다. 그들은 미개하고, 광기에 사로잡혀 있으며, 때로는 허황된 자존감으로 자기 기만에 빠져 있습니다(엘렌은 아버지 장을 향해 "아빠는 남의 도움으로 먹고 살면서 어떻게 그 빌어먹을 왕당파에 동조할 수 있죠?"라고 비웃습니다. 사실 장은 스스로 귀족의 후예라 믿고 있기도 합니다. 브르타뉴 반도는 본디 이민족 도래 귀족이 토착민을 지배하던 곳이니, 자신은 최하층민이면서 정반대의 환상에 사로잡힌 셈이죠). 그들은 그들대로 멸종의 운명을 맞이할 이유가 있지만,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그 오기도 우리에게는 인상적입니다(특히 선돌로 빚은 성수대에 칼을 갈며 행운을 기원한다든가, 성수에 구토를 하며 죽어가는 장면 등은 그로테스크 상징의 극치를 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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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 - 류시화의 하이쿠 읽기
류시화 지음 / 연금술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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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선생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을 읽으면, 삼라 만상을 규격화한 틀에 짜 맞추어 욱여넣되 그 미니멀리즘의 미학 추구에서 최상의 쾌감과 안도감을 느끼는 일본인 본연의 습성에 대해 논급한 부분이 나오죠. 서양인들은 특히 19세기 이후 자발적으로 개항하여 세계를 향해 마음의, 그리고 시스템의 문을 열어 젖힌 일본을 "발견'하면서, 이 미니멀리즘의 집약적 성취인 "하이쿠"라는 시문학 장르에도 관심을 주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는 오늘날에 보듯, 하이쿠 문학의 세계적 인지도 달성입니다. 아직 시문학 분야에서의 성취만으로 노벨 문학상을 탄 일본인은 나오지 않았고, 노벨 문학상의 성격상 하미쿠 전문 시인이 이 상을 받기도 힘들겠지만, 여 튼 하이쿠는 이제 일본인만의 문학이 아닙니다. 세계인이 그 존재에 대해 알고, 직접 창작하기도 하며, 문학을 넘어 타 예술 장르에서도 그 영향을 스스로 입는 일이 흔합니다. 이 책에서도 류 시인이 언급하지만, 레마르크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그 엔딩 씬을, 바로 하이쿠 시인 부손(蕪村, 무촌)의


나비 한 마리

절의 종에 내려앉아

잠들어 있다


를 염두에 두고 구성한 것입니다.



이 책은 400년에 걸친 일본 하이쿠 문학의 최고 정수만을 뽑 아(선집이기는 하나 양이 방대합니다), 우리말로 해석하고, 이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류시화 시인이 달아 놓은 내용입니다. 해설은 장르 전반에 대한 게 아니라 개별 작품론이지만, 개별 작품론이 워낙 충실하고 시인의 정열과 애정이 담겨 있다 보니, 각론을 공부하며 자연스럽게 총론이 습득되는 매력과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이쿠의 문학적 개성과 매력, 역사, 전통에 대해 전혀 모르는 독자라도, 아름다운 각각의 명편 명구 절창을 감상하며, 자연스럽게 하이쿠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사실 시란 느끼고 몸에 배게 하는 것이지, 공부해서 이해하는 대상이 아니니까 말이죠. 



알 다시피 하이쿠는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입니다, 길이가 그냥 짧은 것도 아니고 17음으로 정해진 틀에서 가장 짧다는 건, 이 시가 자유시 아닌 정형시라는 걸 이미 전제로 합니다. 사실, "가장 짧은 시"가 정해져 있다는 건 그 자체로 모순입니다. 어느 시인이 짧은 한 마디 감탄사를 내뱉으면, 그게 바로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는 단가(短歌)이지 뭐겠습니까? 그러므로 하이쿠는, 창작 과정에서의 기술적 난이도 외에도, 이미 정형시라는 전근대성을 핸디캡으로 안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런 여러 한계(그것도 전근대적인)를 안고 있는 하이쿠 장르지만, 세계인들이 오히려 20세기 들어서, 그리고 그 이후에까지도 계속 관심과 애정을 보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그것은 컨텐츠가 안고 있는 모던함 덕분입니다. 하이쿠는 예를 들어,


무덤도 움직여라

나의 울음소리는 

가을 바람


-바쇼(이 책 p59)


처럼 처연한 감상을 상당히 노출하는 것도 있고,


벼룩 네게도

분명 밤은 길겠지

외로울 거야


-잇사(p21)


처럼 해학과 자조를 동시에 드러낸 작품도 있지만, 이런 것은 예외이며, 대부분은 극도로 감정을 절제한 스타일입니다. 최근 왜 저기 그 ... "생각하면(이해하면) 무서운 이야기" 따위가, 일본 것들이 소개되어 들어 와 우리 네티즌 사이에서 인기를 끌기도 했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필요 최소한의 진숢만 하되, 남은 의미의 여운과 해석은 독자(청중)에게 맡김으로써 더 큰 공감과 소통 효과를 낳는, 이러한 절제, 자제의 미학이야말로, 현대에 들어서도 이 장르가 큰 인기를 누리는 비결이 아닐까 합니다.



이 책은 네 명의 대가, 즉 바쇼, 부손, 잇사, 시키의 작품들이 주로 돌아가면서 소개되고, 그 사이사이에 다른 작가들의 대표작이 소개되는 형식입니다.  이 4인의, 장르에 대한 역사적 공헌이 지대하니 그게 자연스럽고, 한 권이 책이 지녀야 할 스토리, 레퍼토리의 통일성을 고려할 때, 시대를 넘어 서로 긴밀한 영향을 받았거나 바로 시적 적통(適通)을 이어받은 당사자들의 작품이 소개되는 편이, 초심자인 독자가 이해하고 접근하기에 편리합니다.



류시화 시인은 장르에 대해 정확한 구조적 해설을 베풀고 있을 뿐 아니라 개별 시에 대한 감상도 아주 몰입적으로 이뤄 주고 있습니다(물론 자신의 평가 뿐 아니라, 평단에서 이뤄진 정평 있는 코멘트를 소개도 하고 있지만요). 예를 들면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


-바쇼


같은 것은, 시간적으로 과거와 현재, 청각적으로 정적과 그의 깨뜨림 등 대비되는 심상을 교묘히 압축해 놓았다고 해설합니다. 저는 그저 흔하면서도 유쾌한 찰나의 포착이라고 전에 이해하고 있었는데, 이 해설을 듣고 나서 완전히 달리 보이는 느낌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생

그 사이에 피어난

벚꽃이어라


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동일 영혼의 전생 후생을 두 사람으로 보고, 그 간생(間生)의 잠깐만의 매개가 벚꽃이라는 의미인 줄 알았는데, 시인의 배경적 해설을 듣고 보니 지인과의 조우가 그 창작 동기더군요. 두 사람은 동일 공간에서의 별개 존재인데, 다만 벚꽃이 중재하는 공감을 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이쿠란 이름을 처음 붙인 사람도, 장르적 완성을 이룬 이도 시키(子規. 자규)입니다. 이 시키는 물론 명치 유신 이후의 근대인이며, 그의 삶과 다양한 일화에 대해서는 예컨대 시바 료타로의 <언덕 위의 구름> 같은 장편 소설에 잘 나와 있습니다. 책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20대 초반에 폐결핵에 걸렸으면 그 당시 의학 수준으로는 그대로 죽는 것인데요. 용케 30대까지 살아남아 현대인들에게 이런 선물을 많이 남겼죠. 저 "자규"만 해도, 우리 고려 시대의 이조년이 남긴 시조 "일지 춘심을 자규야 알랴만은, 다정도 병인양 하여 잠못 들어 하노라"에 나오는 바로 그 소쩍새를 가리킵니다. 예명이고 필명입니다. 이 자규는 두보 이래 임을 그리는 여인, 돌아오지 않는 벗을 사모하는 시정의 전통적인 상징이죠.


살짝 아쉬움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도 절제미가 약간 떨어지긴 하지만, 3434 3434 3543의 멋들어진. 시조라는  장르 단가가 따로 존재하는데 말이죠. 우리의 근대사가 쇄국 정책 등에 의해 움츠려들고 국세를 펴 나가지 못한 질곡이 있었기에, 마땅히 조명 받을 가치가 있었던 문학적 유산이, 이웃 나라의 그에 비해 너무 묻혀 버렸다는 안타까움 말이죠. 더 안타까운 건, 우리 시조 문학은 우리 국내에서 애독되기에 적합한 예쁜 책도, 이처럼 좋은 모습으로 출간된 예가 드물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책을 다 읽고, 괜히 일본 것이다 뭐다 하며 꺼리는 심리에, 그동안 참 아름다운 예술의 감상을 스스로 차단했다는 아쉬움이 크게 들었습니다. 장르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그 깊은 경지의 완상(玩賞)을 도와 준, 오로지 류시화 시인만이 할 수 있는 해설 역시 큰 축복을 접한 듯했습니다. 무엇보다, 책이 참 예쁩니다. 하이쿠를 담기에 최적의 "그릇"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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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즐거움 주식회사에 다닌다 - 즐거움이 곧 성과다
리차드 셰리단 지음, 강찬구 옮김 / 처음북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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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을 읽고 좀 충격을 받아서, 한동안 직장에서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습니다.


지 금의 환경을 바꾸어야 살아남는다며, 조직에 대거 혁신을 가하고, 비능률 요소에 메스를 들이대는 노력은 주로 관리자 쪽에서 시도하게 마련이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잘 돌아가는 조직은 보통 "이대로도 해피한데?"를 말하며 대폭적인 개선 노력에 미온적입니다. 잘 돌아가지 않는 조직도, 일단 자기 밥그릇 보전에 골몰하는 과정에서, 혁신을 거부하고 타성에 젖을 수 있습니다. 부하들은 대체로 혁신을 달가워하지 않는 게 보통이고, 이런 반발이 있기 때문에 관리자 역시 그 효과가 확실하지도 않을 개조작업에 마냥 대담하게 나설 수도 없습니다.


리처드("리치") 셰리던은 사실, 엉망인 조직에 관리자로 취임하여 A부터 Z까지 모조리 바꿔 놓은 그런 혁신가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몸담았던 회사는, 최상의 성과를 내는 업계 최강의 경쟁력을 갖춘 곳은 아니었어도, 나름 평균치는 해 주는 건실한 업체였죠(저자는 자기 기준에서 아주 불만족스러운 듯 이야기했지만, 객관적으로 보아 그 회사는 큰 문제가 없는 곳입니다. 독자는 눈치 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리치는 좀 달랐습니다. 그는 이미 10대 시절에 자신의 적성을 일찍 깨닫고 프로그래머의 길을 걸은 사람이며, 학생 시절에도 동급생을 넉넉히 앞질러 가는 공부 외에, 사회 활동을 병행하며 벌어들이는 수입을 주체 못 하는, 최고로 잘나가는 이 분야 엘리트였습니다. 졸업 후 여러 회사를 거치며 그 나이 또래 중에서는 가는 데마다 최고 대우를 받았고, 젊은 나이에 임원 취임을 눈 앞에 둔, 실패를 모르고 달려 온 인생이었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주위와 호흡만 잘 맞추고, 40대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현업에서 다소 거리를 둔 채 넉넉하고 안락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급여를 수령하고, 기업 임원이라는 사회적 지위와 위신을 마음껏 누리기만 하면 되는 위치였습니다.


good 과 great는 여기서 차이가 나는가 봅니다. 리치는 그 편한, 현명한 길을 굳이 거부하고, 주위와 많은 마찰을 빚는 선택을 감행했습니다. 그는 평소에, 자기가 몸 담았던 회사 내부에서 벌어지는 각종 비능률 요소, 원활하지 못한 의사소통, 충족되지 않은 성과 따위에 대해 큰 불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런 건 조직이 완전 단일 인격체가 아닌 이상에야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부작용이고 삐걱거림입니다(최소한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죠). 그런데 리치는, 평소부터 이런 게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의 주범이자 커다란 한이라도 되는 양, "일 못하고 성과 못 내는 조직을 근본적으로 뜯어 고치자!"며 일찍이 그 누구도 해 보지 못한 대수술을 조직을 향해 시도합니다.


대체 어떤 변화와 혁신을 조직에 적용하려 했는가? 사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리치 셰리던이 처음 창안한 건 아닙니다. 그는 단지, 평소 자기 조직에 "이대로는 안 된다"며 경 험에서 우러나온 많은 문제점을 막연하게 인식하고 있었을 뿐, 구체적인 대안을 조직화하여 떠올리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섬광처럼 영감을 얻은 출처는, 켄트 벡이라는 어느 이론가의 블로그에서 본 내용이었습니다. 이름하여 "익스트림 프로그래밍"인데 그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작업 공간 개방하기 : 어느 회사건 부서별로 사무실이 나뉘어져 있고(안 그러면 그게 공장이지 사무실일까요?), 그 사무실 내에서도 개인별로 파티션이 구별되는 공간입니다. 직원은 조용히, 자기 업무를 진행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야 그게 회사가 베푸는 최소한의 배려가 됩니다.

켄트 벡은 이걸 다 없애라고 합니다. 회사가 도떼기 시장이 되어도 좋으니, 직원 간에 정직하고 효율적인 소통이 격의 없이 이뤄지는 게 더 우선이라는 취지입니다.


책의 중간 부분에 나오지만, 이 렇게 하면 업무 추진 과정에 문제가 발생했다. 혹은 누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싶으면, 큰 소리로 주의를 전체에 대해 환기합니다. 소통은 그 자리에서 이뤄지고, 전체의 의견 수렴을 거친 후, 다시 진행됩니다. 칸막이가 없으니, 문제의 발생이건 해소건 간에 즉시 전 직원 사이에 정보가 공유됩니다.


2) 종이 카드에 손으로 글씨를 써 가며 프로젝트 관리하기

모 든 조직은 정보와 보고가 이뤄지는 라인과 체계가 있습니다. 없으면 그건 조직이 아닙니다. 이게 우리의 확고한 선입견이고 통념으로 간직하는 상식인데, 이걸 다 없애 버리라는 겁니다. 누가 종이에 써서 상황판에 게시하면, 다들 그걸 보고서는 "아 이게 문제구나.","음 저런 게 들어가야겠네."라며 바로 자신의 프로세스에 반영합니다. 책임 소재도 명확해지고, 전체로서의 프로젝트는 유기적 통합성이 향상됩니다. 상사르 통해 윗선에 보고하고, 이걸 검토한 후 타 부서에 지시를 하달하고.. 벌써 늦습니다. 파편화된 부서는 제할 일만 하면 다른 동료에는 무관심이니, 같은 팀, 같은 회사라고 부르기조차 어색할 수 있는데, 익스트림 프로그래밍에서는 이게 다 해소됩니다.


3) 프로젝트는 기간별로 나눠 관리하기


4) 둘씩 짝을 이뤄 업무 진행하기 : 사실 충격적인 건 이 부분입니다. 요즘은 초등학교에서도 개인별 책상배정이 이뤄지며, 둘씩 고정된 자리에 짝을 지어 앉는 건 어색합니다. 개개인의 개성이 중시되어야 자신의 적성에 잘 맞는 아이디어가 도출되고, 사고의 조직적 계발이 이뤄진다는 전제에서 비롯한 건데, 이 확고한 상식을 뒤집어 버리자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더군다나 그의 회사 "멘로"는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입니다. 프로그래머, 개발자들은 남과 떠들썩하게 어울리며 일을 하기보다, 자기만의 공간에서 조용히 사고를 정리하는 게 보통입니다. 실제로 이 구상을 리치가 (부사장의 위치에서) 직원(잘 알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제안하자, "미친 소리", "리치, 그건 내 코드입니다. 모르시겠어요?" 같은 반발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보게, 우리는 공개된 주식회사고, 직원이 개발한 프로그램은 회사의 소유, 즉 주주의 소유라고 생각하는데?" "젠장, 이건 내 코드란 말입니다!"


아무튼 화사를 완전히 말아먹을 각오를 하고 이 시스템은 도입이 되었습니다(리치 셰리던은 둘째치고, 경영진도 참 어지간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게 무슨 브라질이나 동남아도 아니고, 미국 실리콘 밸리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이라니). 그 결과는 어땠을까요?


1) 미국 내에서 성공 사례로 꼽혀, 회사는 자기 일을 할 뿐 아니라, 타 업체에서 견학 온 이들을 위해 일정 시스템을 마련해야 할 지경에 이릅니다.


2) 외국에서도 대학생 인턴을 받아 견습을 시킵니다.


3) 사실 켄트 벡의 초안이 아무리 구체적이었다고 해도, 모든 회사에 만능으로 적용 가능한 완성된 솔루션은 없습니다. 책 후반부에 나오지만, 저자 리치 셰리던 부사장은 그 구체적인 살붙이기 작업을 일일이 현장에서 상황에 맞게 수행해야만 했습니다. 그에게는 이것이 특별한 난제가 아니었는데, 생각지도 않던 "남의 생각"을 "내 조직"에 이식하는 작업이 아니라, 평소 그가 언제나 불만을 느껴 왔던 점을, 마침 좋은원군을 만나 초안 작성의 수고를 던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비록 타인, 외부인에게서 영감을 받았지만, 일을 실천에 옮길 때는 완전히 자기 호흡과 리듬으로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4) 직원들은 심지어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월급을 받지 말아야겠어요. 내가 즐거워서 하는 일인데 급여까지 받는다는 게 꺼려지네요."

입이 딱 벌어지는 반응입니다. 이제 회사 일은, CEO에서 말단 직원까지 동질화된 책임감으로 모두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이 책 제목 " 즐거움 주식회사"는 바로 여기서 연유합니다. 회사 일이 내 일이고, 업무의 성취가 나의 기쁨인데, 납기일이 늦어지고 품질이 떨어지고, 사고가 나면 책임 회피를 하기 급급하고... 이런 일은 이제 멘로에서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책 의 내용이 사실 모든 면에서 완벽히 검증된 진리는 아닙니다. 저자는 아무래도 자신의 소신을 걸고 이 조직 개편을 추진했고, 그래서 빚어진 부작용들은 책 내용에서 다소 그늘진 자리로 감춰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회사에서도, 성과를 못 내고 타 직원의 템포를 못 쫓아가는 직원은 밀려나는 게 당연합니다. 다만 재미있는 건, 짤린 직원도 이 멘로라는 회사의 분위기만은 정말 그리웠는지, "내 여길 향해서는 오줌도 어디 누나 봐라!"같은 원한이 아니라, 현재 직장의 상사를 모시고 와서 계약을 성사시키기까지 했다는 에피소드가 이 책에 나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면에는 "우리 회사도 여기 멘로처럼 만들자구요, 네?" 같은 애교어린 희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봐야 하지 않을지요?


책 의 구성은 약간 두서없는 편입니다. 저 같으면, 차라리 심풀하게 시간적 순서를 따라 적어 가고, 마지막에 "무엇이 문제였는데, 이렇게 해결되었다"고 전체를 요약 정리하는 식으로 책을 적었을 겁니다. 하지만 워낙 책의 내용, 저자의 증언이 충격적이라 다른 생각 할 겨를 없이 책 내용을 따라가는 독서가 되었습니다.


리 치 셰리던은 제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전문 프로그래머로 커리어를 시작한 사람이지 경영자가 아닙니다. 이 책은 지금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의 특성이나 현황에 대해 적은 책이 아니고, 일개 프로그래머 출신이 여태 어느 산업사회에서도 존재하지 않던 조직 형태를, 그럭저럭 돌아가던 중견 업체에 적용해서 큰 성공을 거둔 경영 혁신 사례를 소개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기술 개발보다 더 어려운 게 조직 혁신입니다. 사람들의 타성이나 관행은, 물리적 한계보다 더 완강하게 현상을 유지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이노베이션은 확실히, 인적 자원의 자발적인 흥(興)을 돋우는 데서 이제는 그 원천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직원들이 이처럼 "즐거움"이란 동기로 업무에 헌신하는 모습은 일종의 경이에 가깝습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책 후반부에 나오듯 리치 셰리던은 일일이 수작업으로 회사 조직 개편의 세부적인 상황까지 손수 점검하고 기능적 개선을 이뤘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 기업들이 시사받을 점이 혹 있다면, 역시 디테일은 각 회사의 형편에 맞게 새로 짜 나가야 한다는 점이겠습니다. 이 익스트림 프로그래밍 체제를 수용한다 해도, 멘로에서 쓰던 알고리즘을 그대로 이식하는 건 아마 큰 부작용이 따르를 것으로 예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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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카의 1분 get it BODY - 원하는 부위만 골라 빼는 라인 다이어트
제시카 지음 / 비타북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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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은 남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자신들의 외모를 끊임 없이 가꾸고 다듬어야 하는 직종입니다. 따라서, 외모를 관리하고 흉 잡히지 않는 데에는 도가 튼 사람들이 또한 연예인들입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제시카 최현정 님은, 그런 연예인들에게 몸매 관리를 가르치고, 그녀만이 터득할 수 있었던 각종 테크닉을 통해 최상의 셰이프를 유지시켜 주는 코치 역할을 오랜 시간 동안 해 오셨다고 합니다.



건강한 몸과 아름다운 몸은 동의어라고도 하지만, 몸의 구석구석 예쁜 라인이 살아나는 그런 육체는 분명 따로 있는 듯도 합니다. 몸의 벌크를 키우는 데에 운동의 포인트를 둘 수도 있고, 여성스럽고 날씬하며 원만한 곡선이 잘 사는 몸매에 더 치중할 수도 있는데, 제시카 선생님은 이 중 후자의 몸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에 그녀만의 비법이라고 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아 무리 좋은 방법이라고 해도, 따라하기 어렵고 실행에 공간적 시간적 제약이 많이 따르는 방법이라면 역시 바쁜 일과에 시달리는 직장인에게는 곤란한 대안일 것 같습니다. 책 제목에 "1분"이란 말이 있어서 무슨 뜻일까 했는데, 책에 나오는 기본 동작을 따라하는 데에 1분, 실행하는 데에 1분밖에 안 걸리는 간단한 동작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실제로 책을 받고 모든 동작을 다 따라해 보았는데,"이렇게 간단한 걸 조금의 시간을 내어 연습하길 주저한 까닭에 몸매 관리가 그동안 뜻대로 되지 않았구나."하는 자책감이 밀려 왔습니다. 



책 에 나와 있는 동작은, "이 동작을 하면 이런 효과로 바로 연결되는" 구체적이고 세분화한 지도 방침이었습니다. 자기 몸의 어느 부분이 특히 아쉬우면, 그 동작만 찾아서 집중적으로 따라하면 될 것 같습니다. 책에서 여러 번 강조하는 내용인데요. 마르고 날씬한 사람도 턱만 이중턱이라든가, 유난히 쇄골이 묻혀 있다든가 하는 부분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는 거죠. 전체적으로 뚱뚱하고 유연성이 부족한 사람은 피트니스 센터나 비만관리 병원에 가야겠지만, 몸의 구석 일부가 아쉬운 분들은 이 책의 해당 파트만 집중적으로 연습하셔도 개선이 이뤄질 것 같습니다.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겉보기에 큰 문제가 없는 분들이, 약간 어깨가 굽었다. 팔뚝 살만 유난히 쪘다고 해서 많은 시간 들여 관리를 받을 수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과연 이렇게, 간단한 동작과 신체 부위 자극이, 그 부분만 날씬하고 예쁘게 만들어 주는 개별 효과로 연결되는 건지 의문도 생겼지만, 책의 사진에 잘 나와 있는 제시카님의 실제 모습이 최종적인 증거 자료라고 여겨졌습니다.



얼굴 생김새도 좌우 균형이 안 맞는 이가 있지만, 어깨 모습도 유난히 한쪽만 솟았다거나 해서 고 민이 있는 분도 꽤 됩니다. 그렇게 되는 원인에 대해, 추위 따위에 잔뜩 긴장하거나, 무거운 짐을 들거나 하는 별 것 아닌 일 등을 저자는 지목하고 있습니다. 이건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낫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천장을 향해 누운 후, 호흡을 자연스럽게 하여 가슴을 위로 들어 올리는 동작을 반복합니다.



이 책에서 아주 강조하는 방법이 바로 "바른 호흡"입니다. 그저 숨 바로 쉬는 습관이, 이처럼 신체의 구석구석과 바른 자세 만들기에 관련이 되어 있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팔의 라인이 잘 살지 않는 분도 많이 보게 됩니다. 이 원인에 대해, 저자는 근력이 약해서라고 진단합니다. 따라서 근력이 강화된 팔은, 라인도 예쁘게 살아난다는 게 되겠습니다.



탄력 있는 엉덩이와 허벅지는 둘이 함께 가는 미덕입니다. 이 역시 그리 어려운 동작이 아닌데요. 엎드려서 무릎을 궆히지 않고, 고대로 들어 올리는 동작으로 탄력을 키운다고 합니다. 무릎을 굽히지 않는 게 포인트입니다.


많은 여성들이 선망하는 S라인은, 앉아 있는 시간이 많은 분들에게는 특히 갖기 어려운 대상이라고 합니다. 옆구리 근육을 자극하여, 림프순환을 원활하게 해야 이 라인이 몸에 붙는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밖에서 보이지 않는 내부 순환계의 자극에, 일일이 포인트를 두고 설명해 주시는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냥 이렇게 따라 하라구!" 같은 강요가 아니라, 왜 그런지 이유까지 납득시켜 주는 선생님의 능력이 돋보였다고 할까요?


세 상 모든 일이, 특별한 비법을 누구만 가지고 있다는 식의 이야기는 틀린 거라고 여겨 왔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최소한 몸매 관리, 그것도 부분적으로 예뻐지는 방법, 노하우는 정말 달인이 따로 있다고 생각이 되더군요. 누구나 다 아는 걸 실천이 안 따라주었다는 식이 아니라, 처음부터 방법이 잘못 되었기에 들인 노력이 허사가 된 것이엇습니다. 그저 몸매만 가꾸어 주는 걸 돕는 책이 아니라, 혈액 순환이 바르게 되고 있는지 어디에 독소가 쌓이지는 않는지 체크해 주는 건강 진단서도 겸하고 있다고 여겨졌어요. 앞으로는 중단하지 않고, 귀한 가르침을 꾸준히 따라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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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를 훔치는 사람들 - 누군가 당신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다
데이비드 루이스 지음, 홍지수 옮김 / 청림출판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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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생각, 의지의 주인이 아니라고 어느 순간 판단이 된다면, 사실 그것만큼 무서운 일도 없을 듯합니다. 명 백하게 외부의 강요에 의한 상황이야, 그를 벗어난 후 취소를 하면 그만입니다. 반면, 내가 TV룰 시청하고, 영화를 관람하고, 쇼핑을 하면서 내리는 결단, 선택이, 알고 보니 교활한 상인, 영리한 기업의 농간에 놀아난 것이었다면? 불쾌감을 넘어 불안까지 생깁니다. 별 필요도 없는 곳에 돈을 지출했다는 자책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나의 기호, 나의 취향이, 고작 외부적, 혹은 생리적(이 역시 외부에 의해 조작된) 자극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면, 대체 나(최소한 "나"의 일부)는 누구이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정한 자아의 소산인지 근본적인 회의가 닥치는 것도 당연합니다.


저자 데이비드 루이스는 "뇌" ,"인간 심리", 그리고 "구체적인 구매 결정" 사이의 연관 관계를 파헤치는 "뉴로마케팅"에 탁월한 업적을 남기고 있는 분입니다. 뉴로마케팅을 주제로 한 책은 요즘 여럿 나오지만, 이 책은 1) 현재 최신의 연구 성과가 빠짐 없이 제시되어 있다. 2) 광고에 관한 그 최초라 할 시기에 대해서까지 다루고 있다. 3) 다루는 주제의 무게에 비해 재미있게 적혀 있다. 이 세 가지 점에서 뼈어납니다. 이런 좋은 점을 두루 갖출 수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저자가 이 분야 최고의 권위자란 사실이 크게 작용했을 겁니다.


광고의 정의는 무엇인가? 서양인들은 어느 분야에서건 흔히 "이성"의 중요성만을 강조한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한국 전 당시 맥아더를 만난 눈물을 펑펑 쏟았다는 모 인사의 모습을 두고 "한국인들(나아가 동양인들)은 터무니없이 감정적이다."라며 비웃었다는 이야기가 있죠. 그런데 광고란, 대중의 감성에 특히 호소해야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먼저 발견한 것도 이들입니다. "광고란, 종이에 인쇄된 세일즈맨십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오늘날 당연하게만 여겨지는 이 사실을, 그리 당연하다고 여겨지 않았던 전 시대의 통념은 그럼 무엇이었을까요? "광고란, 제품에 대한 정보를 사실적으로, 정직하게 전달하는 작업이다. 소비자의 이성에 호소하기만 하면, 광고는 그 할 일을 다한 것이다."


어찌 보면 사고의 퇴보, 도덕의 타락처럼 들리기도 하는 시대의 변천(이라기보다 그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 내지 환멸)입니다. 정직한 말보다 달콤한 사탕발림이 우선이라는 암시도 되니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선택 중 대체 얼마 정도가 사탕발림에 혹한 결과이며, 어느 정도가 이성적 판단, 독립된 나 자산의 선택인지 아는 건 중요합니다. 1) "파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라는  이 시대의 모토처럼, 생존 경쟁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이며, 2) 나 자신만이라도 외부의 자극이 아닌, 이성적으로 나 자신만을 위한 소비를 하는 데에 필요한 정보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우리에게는 뇌가 두 가지 있다."고 말합니다(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충격을 받은 게 이 진술이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아는, 머리에 자리잡은 그 뇌요. 다른 하나는 장 부위에 자리한 신경계입니다. 우리는 머리가 시키는 대로도 반응하지만, 장이 시키는 대로도 따라서 한다는 말입니다. 감정적으로 상처를 받거나, 기대가 배신 당했을 때 속이 쓰리다거나 한 건  "유령 감각"처럼 착각의 소산이 아닙니다. 실제로 "거기에서" 무언가를 두고 감각과 의사의 중추로 작용하는 "또 하나의 뇌"가 느끼는 것입니다. 식욕을 절제 못하고 쉽게 먹어서 살이 찌는 사람은. 비유적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배와 뇌가 싸워서 배가 이기는 횟수가 더 많은 사람입니다.


광고란 바로, 이 불가사의한 생리작용, 감성적 반응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배"를 공략하는 작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식역하 광고"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으실까요? 식역이라는 말은 한자로 識閾이라 쓰며, 우리의 인식 범위를 지칭합니다(역치 이상의 자극이라고 할 때 그 "역'입니다). 이것을 벗어나는 부위를 자극해도,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린다는 결과가, 여러 연구, 그리고 직관을 통해 이미 알려져 있었습니다. 1957년 제임스 비케리는 사람들이 채 알아챌 수 없는 짧은 간격으로 스크린(영화가 상영되고 있는)에 여러 번 "코카콜라", "팝콘" 같은 메시지를 쏘아서, 이를 본(볼 수 없었으나 어떤 경로에서인지 "본") 이들에게 해당 상품을 구매하도록 "조작"한, 당시로서나 지금이나 혁신적인(그리고 충격적인) 광고(과연 광고라고 할 수 있다면요) 기법을 공개하여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공공의 적이 된 그는 잠적했다가 몇 년 뒤 돌아와서는, "식역하 광고란 유명세를 타 보려고 거짓을 과장했을 뿐이었다. 그런 개념은 존재할 수 없다."며 고백 반 발뺌 반의 의사표명을 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지식 수준이 일천했던 그가 그 위험성, 위력을 제대로 이해했건 그렇지 않았건 무관하게, 식역하 자극이란 실재하는 개념이고 실체"라고 확언합니다. subliminal에서 limin-라는 어근은, 저 위에 적은 閾과 의미가 같습니다. 한자나 영어(라틴어 어근)나 모두 "문지방"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감성적 결정을 관장하고 구체화하는 부분은, 현재는 감각시상(sensory thalamus)과 섬피질(insular cortex, 더 흔히 쓰는 lobe라는 용어를 적용하면 뇌섬엽이라고도 합니다. "섬"은 한자가 아니라 우리말 섬 그것입니다)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간의 뇌는,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슈퍼컴퓨터보다 강력합니다. 슈퍼컴보다 더 많고 효과적인 연산을 할 수 있고, 슈퍼컴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의 연료를 소비합니다. 수백만 년 사이에 걸쳐 실로 신비하게도 진화해 온 뇌에 대해, 그것을 쓰는 우리 자신도 아직 작동 기제의 실체나 구조를 모르고 있습니다. " 모른다"는 의미는, 이성의 존엄한 본질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고, 이성과는 전혀 별개의 영역에서 거의 반대 성향의 게릴라전을 효과적으로 펼치는 "감정, 생리, 욕구"의 부분에 대해서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분명한 건, 과거에 성공한 광고의 사례는 이 영역을 아주 효과적으로 공략했었기에 성공했고, 그렇지 못한 건 그 "숨겨진 뇌"를 제대로 파고들지 못해서 실패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 슈퍼볼 결승전에서 광고한 애플 매킨토시의 경우, 경 영진은 한결 같이 "1984의 모티브를 채용한 새 광고"에 대해, 소기의 전달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라며 낙제점을 주고 기각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없고 괜히 광고비를 날릴 위험에 처하자 그대로 집행했는데, 이것이 사상 초유의 대박을 치고 오늘까지 전설적 사례로 남았습니다. 광고의 본질은, 가장 물건을 팔아야 할 필요가 절박한 판매자조차 확실히 판단할 수 없는 곳에서 그 성패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이 책에는 카너먼의 행동 경제학 원리부터 해서, 뉴로마케팅에 대해 거의 담을 수 있는 이야기는 다 담고 있습니다. 과거로부터의 사례가 풍부하며, 정보의 나열이 아닌 권위자의 진단, 스토리가 뚜렷하므로 독자가 어떻게 읽어도 배울 게 있습니다. 한 권만 읽어야 한다면 이 책을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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