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고금통의 1 - 오늘을 위한 성찰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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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義)"가 "통(通)"함은 예[古]와 지금[今]이 다르지 않다.

이 얼마나 호쾌하고 희망 가득한 말입니까? 만약 세상이 폭력과 사술만 판치는 곳이고, 우매한 대중을 기만하는 정상배와, 아집 가득한 폭군이 두려움 없이 전횡할 뿐이라면, 책을 읽을 필요도 없고 정의를 세울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고"와 "금"을 통하는 "의"인지는, 보다 나아간 논의가 필요합니다. 이덕일 저자는 이 책에서, 다양한 주제를 취한 단문 논평 여럿을 통해, 본인과 독자 모두에게 '의"가 과연 무엇인지 귀납적 탐구의 과제를 던지는 듯합니다. 그는 힘 있는 필치의 장문 논설에 능한 저술가이지만, 모 일간지에 장기간 칼럼을 연재한 이력에서 알 수 있듯 촌철살인의 단문에서도 그만의 컬러와 기량을 과시할 수 있는 재사입니다.

 

무엇이 과연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의(義)"인지를 구명(究明)하기 위해, 저자는 자신의 소견이나 퍼뜩 떠오른 영감에만 의지하지 않고, 옛 문헌을 비교 검증하는 데에서 화제의 단초를 찾습니다. 그런 작은 발단에서, 어느 새 이런 거대한 결론과 박력 있는 비전이 도출 가능한가 싶게, 마주보는 두 페이지 분량의 짧은 칼럼은 어느 새 대용량 저서 한 권의 무게를 우리 독자의 정신에 올려 놓습니다. 이 비결은, 옛 문헌의 뜻[義]을 정확히 풀어 주는[解] 그의 능력에 크게 빚지고 있습니다.

 

최근에 저도 판사, 검사의 과도한 권력에 대해 큰 우려를 표명하는 어느 책을 읽은 바 있지만, 저자는 조선 시대 법제에서 이 큰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국사 교과서에서 배운 바대로, 율(律)학은 무과보다도 품계가 낮은 잡과에 속했습니다. 품계가 낮은 하급 관리가 행하는 직분이니, 자의(恣意)가 개입하지 않고, 기계적 법 적용이 가능했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법조의 적용이 개인적 세계관이나 취향, 경향에 영향을 받기보다, 천편일률로 행해지는 편이 차라리 낫다는 그의 생각에 한편으로 수긍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과연 다른 부작용은 없을지 잠시 생각하게 되었네요.

 

이념이 난무하면 국력이 쇠한다. 효종의 죽음이 뭔가 의문스러운 사연이 개입했다고 보고 있는 그의 입장에서 나올 만한 결론입니다. 필자는 북벌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고 여기고 있으며, 특히 오삼계 등이 일으킨 삼번의 난이, 조선 측에서 동병(動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고 합니다. 저자는 특히 현 중국 당국이 주도하고 있는 동북 공정이, 벌써 이 청대부터의 침략적 경향의 연장선상에 있다 보고, 강한 민족주의적 각성으로 이에 대처해야 한다고 책의 여러 파트에서 반복 역설하고 있습니다.

 

고인돌은 동북아 일대에 널리 뻗쳐 있었던 대제국의 흔적이라고 그는 주장합니다. 같은 형식의 고인돌이 일정 강역에 분포하면, 동일 정치 체제의 통치 시스템 존재의 증거라고 보는 게 상식인데, 대동강 유역에 고조선의 판도가 한정되었다고 보는 고정관념(저자의 입장대로라면, 이는 식민 강단 사학의 잔재지요) 때문에 뻔한 진실을 보지 못한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이런 입장이라면 대동강 일대에 분포하는 고인돌을 두고서조차 논리적 분석이 불가능하다는 거죠. 특히 저는 후자의 모순을 지적하는 저자의 입장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역사는 기록자의 왜곡과 정치적 입장이 언제나 개입한다는 씁쓸한 확인이, 송첸캄포를 다룬 <唐史>에도 나온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실제의 팩트는 토번의 승승장구와 이세민의 비굴한 회유에 불과한데, 사서의 기록은 정반대로 열심히 중화의 영예와 승리를 주장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는 현대에 이르러, "서남 공정"이라는 중국 측의 부단하고 집요한 정책으로 그대로 계승되고 있습니다. "동북 공정"으로 동병 상련을 겪고 있는 우리가 결코 좌시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라고 그는 비장하게 주장합니다.

 

그는 진보적 스탠스를 유지하는 논객답게, 아마 남녀 평등을 주창하는 인사들과 잦은 교류가 있을 것이며, 그 중에서도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 상당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런 이들이 지닌 명함을 보면 다성(多姓) 표기가 많죠. 모계 쪽 성(姓)을 병기하는 이런 관행은 그러나 큰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는 게 그의 주장입니다. 취지에는 찬성하지만 말입니다. 왜냐 하면, 모친의 성 역시 부계 혈통의 대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며, 이는 결국 운동의 본의마저 오히려 훼손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을 저자는 은근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칼럼에서 저자는 오히려 다른 쪽의 결론으로 내딛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미 남녀 평등의 관념을 강하게 유지하여 왔으며, 모여성의 성이 결혼 후에도 (서양이나 일본과 달리) 남편을 따르지 않고 제 부친의 것을 유지한 본의는, 양 집안의 대등한 결합 사실을 강력하게 상징하려는 데 있었다고까지 합니다. 양반 가에서 정실 부인은, 언제나 남편에 대해 당당하고 강한 어조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다성(多姓) 표기는 이런 관점에서라면 그 타당성 여부를 심각하게 재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신간회 초대 책임자를 지낸 이상재 선생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 여럿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높고 굳건한 지조를 지녔다고 해도, 현실의 벽이 너무도 높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월남 선생이 택한 방법은 해학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제시된 몇몇 일화는 그 암울한 정치적 상황과는 너무도 잘 대비되는 익살이라 재미있고, 한편으로 도저히 웃을 수 없는 시대 배경을 감안하고 다시 읽으면 눈물이 고이는 비애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킵니다.

 

이렇게 다양한 주제를 놓고 모인 단문이니 지루할 틈이 없고, 짧은 분량 속에서 할 말은 다 해 놓고 토픽의 완결성도 잃지 않는 그의 솜씨에 경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형식적 치장에 구애 받음 없이 본연의 주제의식과 명분은 언제나 찔러 두고 가는 그이기에, 독자는 편안함과 도덕적 만족을 동시에 맛보게 됩니다. 이런 칼럼이 역사라는 큰 줄기에서 언제나 일정 거리 밖으로 논점을 이탈하지 않는 것도 신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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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65
브램 스토커 지음, 이세욱 엮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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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 참 이름만으로도 괴기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 먼 동양 땅에 살고 있는 독자라고 해도, 드라큘라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습니다. 어른은 물론이고 아이들에까지도 이 이름은 익숙합니다. 고유명사가 아니라, "뱀파이어"처럼 보통명사로 받아들여지곤 하죠. 창백한 얼굴, 날카로운 송곳니, 커다란 망토에 붉은 칼라 따위의 이미지는, 루마니아나 (브램 스토커의 고향인) 영국, (장르 영화와 고전물의 본산인) 미국 외에서도, 맥도널드 햄버거나 코카 콜라 이상으로 보편성을 획득하고 통용되는 "언어, 기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고전이 보통 겪는 운명처럼, 잘 알고 있고 벌써 여러 차례 읽어 내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진상을 알고 보면 거의 바른 지식이 없고, 책을 들춰 보면 처음 대하는텍스트나 마찬가지란 거죠. 이 작품처럼 확고한 고전의 위치를 점함과 동시에, 그 모든 장르 소설의 부모격이자 타 장르 예술의 영감 원천이 된 경우라면, 그 뜻밖의 생경함이 더합니다. "이게 이런 소설이었어?"

 

고전이 고전인 이유는, 그 많은 상징과 상상력의 원천이 이미 그 오랜 텍스트 안에 다 포함되어 있었다는 놀라움을, 이후에 나온 그 무수한 아류작의 모태가 다 마련되어 있었다는 경이감을, 독자에게 아낌 없이 선사한다는 데에도 있습니다. 심지어, 아류작이 아닌 줄 알았는데 이 오리지널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것이 카피캣이었음을 깨닫는 충격도, 오로지 고전만이 선사할 수 있는 근사한 각성입니다.

 

고전이 고전인 또하나의 이유는, 그 창조해낸 세계의 완벽하다 할 자체 완결성입니다.  이 1권을 보십시오. 흡혈귀 드라큘라라는 캐릭터를 소개하고 사건만 재미있게 전달하면 될 것을(현대의 2류 장르물은 언제나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굳이 번잡한 디테일을 빈틈없이 마련해서 자격 없는 독자를 다소 피곤하게 만듭니다. 영국의 특정 지방(영지)이 "카트르 파스(처음에 저는 赦免 같은 걸 떠올렸는데, 불어 단어 원형이 뭘까 곰곰 생각하니 四面이더군요. Quatre Face)"인지 뭔지, 그저 장르물에 길들여진 독자가 신경이나 쓰겠습니까. 브램 스토커는 꼼꼼하고 자상하며, 때로는 경건하게까지 느껴지는 필치로, 텍스트 안에서 빠져 나갈 구멍 없는 완벽한 별세계를 창조해 내고 있습니다.

 

장르물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면 대개 평면적인 성격입니다. 하지만 이 고전(그리고 그 모든 판타지, 괴기물의 원조)에 등장하는 이들의 성격상 평면성은 그리 역겹거나 지루한 느낌을 주지 않습니다. 플롯과 분위기, 스타일, 주제의 핵심을 이루는 드라큘라의 개성(과 매력)이 워낙에 강렬하기에, 반 헬싱, 조나선 하커, 미나 등의 전사(戰士)들도, 다른 데 눈을 주지 않는 성실성과 일관됨으로 무장해야만 할 필연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대단히 고아한 인격과, 어디 한 구석 빠질 데 없는 건전한 시민성을 갖춘 사람들이며, 이런 비현실적 도덕성이야말로 모든 악의 화신인 백작과 맞서 싸울 유일한 무기요 자산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또한 납득할 만한 이유 때문에 공권력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데, 이런 대목 역시 이후 무수히 쏟아져 나온 후배 장르물이 모조리 따르다시피 하는 공식이죠. "지구는 그들 소수의 선량한 시민이 지켜 내었다!"

 

타인과, 심지어 자신으로부터 그 남성성의 순도를 끊임 없이 의심 받았던 브램 스토커는, 과연 그런 시선에 부응이라도 하듯(?) 이 소설의 아름답게 짜여진, 역대 최고라 부를 만한 서두에서 조나선 하커의 (기념비적) 감금 씬(!)을 펼쳐 냅니다. 조나선 하커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흠 잡을 데 없는 "아름다움"을 지닌 인물입니다. 감금을 당해도 이런 사람이 감금을 당해야, 독자나 관객이 짜릿짜릿한 흥분을 느끼죠. 늙은 백작은 어이 없는 노골성으로 그를 위협하며, 그 주변에는 치명적이고 불길한 아름다움으로 무장한 또다른 정체 모를 여인들(...)이 배회합니다. 이 공포와 절망으로 지레 삶을 포기할 만한 상황에서, 젊은 변호사는 차라리 자기 자신(지레 포기하려는)과의 혈투에 진을 다 빼다, 모종의 결단을 암시만 한 채로 일기를 일단 마무리합니다. 과연 귀추가 어찌 번져 갔는지는 몇십 장을 한참 넘겨야 알 수 있습니다. 각각의 사건이 모두 등장인물 자신의 1인칭 시점으로 설명되고 있기에, 이 작품은 요즘 말하는 "모큐멘터리" 기법을 선구적으로 채용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긴, 빅토리아 시대 책임 있는 작가가, 어찌 그윽하고 불순한 판타지를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펼칠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무슨 의도였건 간에, 이 작품은 내용이나 형식 모두 현대의 관점에서조차 gorgeous합니다.

 

가장 착하고 상처에 취약할 것 같은 성격의 루시가, 이 가공할 에일리언에게 희생된 최초의 제물임이 밝혀지고, 정의롭고 선량한 주인공들이 당장 취해야 할 결단이 무엇인지도 곧바로 드러나자, 캐릭터들 못지 않게 독자 역시 경악하게 됩니다. 때묻지 않고 정직한 심성을 고스란히 가진 선남선녀, 그리고 이들을 리드하는 박식한 현자로 이뤄진 "팀 구성" 역시, 이 <드라큘라>가 거의 원조라 할 만큼 그 프로토타입을 제대로 다듬어 놓았습니다. 아주 적절한 대목에서 1부가 끊어지는 열린책들 편집진과 역자의 센스가 돋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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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법 - 상 - 제66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대상 수상작
야마다 무네키 지음, 최고은 옮김 / 애플북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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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간의 정신, 그 깊숙한 곳에 자리한 본질 중 하나는 욕구에 관한 것입니다. 한편, 욕구가 아무리 다양하다고 해도, 오래 살고 싶은 욕구, 불멸을 지향하는 욕구만 하겠습니까? 충족될 수 없는, 아니, 그래야 만 할, 갈망, 희구가 충족되는 그 순간, 인간은 바로 신(神)이 되거나, 아니면 바로 파멸할지 모릅니다. 인간의 정신은 불멸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나의 불멸 뿐 아니라, 타자의 불멸, 혹은 추상으로서의 불멸도 감당할 수 없어 종교에 열광하는 게 인간입니다.  

 

단 한 명의 개체라도 불멸의 혜택을 입는 순간, 인간 사회가 애써 가꿔 왔던 윤리, 도덕, 예술적 가치, 정치 제도는 모두 무너지고 맙니다. 불멸을 관장하는 그 권좌를 차지하기 위해, 인간은 제 터전이 초토화될 때까지 싸우고 또 싸울 것입니다. 모두가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이는 바로 모두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요, 이 중에서 누군가는 영원히 살고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면, 그 선택된 자의 특권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모두가 같이 죽는 길을 걷자고 들 것입니다. 불멸은 바로 즉시 파멸을 부른다는 역설이 눈 앞에 뻔히 드러납니다.

 

멀지 않은 미래에 이런 혁명적인 의학 기술이 고안되기보다, 차라리 그런 감당 못할 결과를 미연에 방지할 사회제도적 장치의 마련이 더 시급하다는 사실(그리고 더 까다롭다는 사실)은, 이 인간 불멸의 시술(소설에서 HAVI라고 설정된)이란 게 까마아득한 공상의 세계에나 소속되어야 함을 반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는 과학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정신의 성숙 문제, 사회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HAVI의 본체는 사실 불멸불사의 레시피가 아니라, 불로(不老)의 시술입니다. 물론 후자가 더 좋은 것입니다(쭈그렁바가지로 천 년을 산들 그게 뭐가 부럽겠습니까). 소설의 설정에 따르면, 병에 걸리거나 교통사고을 당하거나, 아니면 국가 기관에 의해 사형이 집행되거나 해서, 인간들은 목숨을 "여전히" 잃을 수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가끔, "영원히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건 정말로 끔찍해."라고 말하는 캐릭터가 나오는 건, 그런 의미에서 약간 일관성을 결여한 미장센이자 자리를 잘못 잡은 클리셰 같은 인상마저 줍니다. 그런 회오(悔悟)는 버지니아 울프의 "올란도", 스탠 리(혹은 제임스 맨골드)의 "울버린"의 입에서 나오기에나 어울리죠. 

 

그저 현생 인류가 지니고 있는 일상 수준의 주의력만 유지해도 영원한 청춘("청춘"이라는 단어도 이미 오래 전에 死語가 되었다는 재미있는 설정도 등장합니다)이 가능하다니, 그보다 훨씬 하잘것없는 가치를 놓고도 목숨을 거는 인류의 원시성에 비추어 보면, 고작 법안의 효력 발생 여부를 두고 "정상적인 수준의 여론 충돌"을 보인다거나, 지극히 국지적 수준에서 제도에 대한 개별적 도전을 보인다거나 하는 모습이 차라리 우습게 보입니다. 그 정도면 얌전한 것입니다. ID의 소비행위, 계좌 관리, 소속 직장 배당 등의 통제 장치가 있지 않느냐고요? 그 시스템은 누가 장악하고 있나요? 고위 정치인, 행정 관료의 권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양순한 일본인"들만 사는 사회라야 이 모든 상황이 최소한의 설득력을 지니고 다가옵니다. 

 

영원히 늙지 않고 20대의 미모를 유지하는 건 좋은데, 정신도 성숙하지 못한다는 게 큰 함정입니다(명확히 규명되지 못한 의학적 미스테리라고 하네요). 해서, 가족이라는 게 또 의미를 못 가집니다. 영속적인 배우자 관계를 맺는다든가, 2세를 낳는다든가 하는 게, 알고 보면 다 "나"란 존재의 사멸을 가정하고 벌이는 일종의 안전 장치였으니(정말요?), 이제 영원한 청춘(낡은 유행어입니다)을 얻은 지금, 결혼과 이혼은 밥 먹듯 되풀이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패밀리 리셋"이라는 제도적 장치도 등장하네요. 아직 그래도 부모가 아이를 양육할 책임은 있는지, 스무 살 정도까지만 같이 살다가 이후 헤어져서 수십 년 동안이나 생사도 모르고 지내기 일쑤입니다. 늙지 않는 양친과 같이 살면 서로의 자유로운 생활을 서로가 방해할 뿐 아니라, 여태 인류가 채 알지 못하던 다른 종류의 온갖 불편이 끼어들기 때문이랍니다. 사실, 성년기 이후 부모와 떨어져 소식이 뜸해진 채 살거나, 그 부모가 새로운 배우자를 만나 전혀 다른 생을 시작하거나 하는 모습은, 서구에서는 지금도 흔히 보는 일입니다. 개인주의적 삶을 보다 지향하거나, 자신의 잘 관리된 외모에 자신이 있다거나 하는 개인들이 주류를 이루는 사회에서는 HAVI 따위의 도움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가능한 현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렇게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는 인간, 아니 괴물들(마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엡실론 분자들을 연상시킵니다. 물론 엡실론들은 늙습니다. 늙기도 하는 주제에 아무 불평 불만 없이 사회 최하층 노동 공급을 담당하며 말초적 쾌락에 탐닉한 채 소모품으로서의 역할을 열심히 수행합니다)은, "유니온"이라는 시스템에 등록되어 실직에의 위험 없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3개월마다 한 번씩, 유니온의 지침에 따라 직장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러면 자생적 노조(레이버 유니온)의 결성을 애초에 차단할 수 있고, 생산 설비로부터 노동자를 철저히 소외시킨다는 점에서 더없이 좋은 통제 장치로 기능합니다. 이런 단조로운 삶, 아무 지향성이나 성취 가치 없는 삶이 환영을 받을 리 없지만, "영원한 청춘"이라는 닽콤한 당근이 그 모든 아쉬움을 잊게 해 줍니다. 결국, 피지배계층은 영원히 그 바닥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또 하나의 장치가 생기는 셈입니다. 사실 저는 이 소설에서 불로의 시술보다, 이 사회제도적 장치에 대해 더 큰 관심이 가게 되더군요. 물론 HAVI라는 반대급부가 없으면 유지가 어려운 면이 있겠지만 말이죠.  

 

똑같이 늙지 않는 인생이라고 해도, 상류층과 지배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기존 가족 관계가 더욱 공고화됩니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정략 결혼이 확고히 자리잡고, 장래 유권자 앞에 나서서 선택을 받아야 하는 정치인은 불로 시술을 비교적 늦게 받기도 하는데, 어느 정도 관록이 잡힌 외모가 필요하기 때문이라네요. 위에서는 전통적 컨벤션이 완결성을 더해가며, 반대로 아래에서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감각적 즐거움만 추구하는 사회, 사실은 바로 지금 우리들이 수렴해 가고 있는 일종의 디스토피아로 봐도 되는 모습들입니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은 현실 풍자 소설입니다. SF라기보다 말입니다.

 

하권 리뷰에서, 이 소설의 "백년법"이 과연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에 대해 제 생각을 더 구체적으로 적어 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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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일본 - 한 몽상가의 체험적 한일 비교 문화론
유순하 지음 / 문이당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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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퍼져 있는 이런저런 주장들, 의견 표명들을 보면 우려스러운 게 많죠. 예전에 어느 중국인은 한국의 특정 사이트에 올려져 있는 아주 극단적인 주장 몇을 미국 사이트에 퍼 가서는, 한국인 전체를 매도하곤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일부 혐한들이 즐겨 쓰는 모략 역시 아주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일부의 모습을 두고 과도한 일반화로 치닫는 건, 그 방법상의 오류만 노출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오류를 범하는 사람의 인식 능력, 지각 과정 자체가, 일부를 전체로 쉽사리 단정하는 미숙함을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자체 폭로이기도 합니다.

 

타인이 나를 두고 "쉽사리 단정"하는 행태에만 억울해하고 분개할 일은 아닙니다. 나 역시,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는 습관이 몸에 밴 사람이라야, 그런 호소를 할 최소한의 자격이 있습니다. 인터넷에 퍼져 있는 일부 극단적인 주장이나 행태를 두고, 우리 민족 일반의 행태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자기 변호의 편한 태도가 아니라, 실제로 일상에서 많은 사람들을 대해 보면, 무작정 반일 스탠스로 치닫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회사에서 주된 거래선을 일본 쪽에 대고 있는 사람들도 많고, 유학이나 개인적 교분 따위의 경험으로 인해 일본을 적대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이들도 많습니다. 아니, 일본이나 일본 사람들과 업무상으로건 개인사로건 전혀 접촉할 일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눈 감고 반일 같은 막무가내식 태도를 보이는 사람은 좀처럼 만나기 힘듭니다.  

 

저자는 원로 소설가입니다. 한국 문학에 겨우 어제오늘 취미를 붙인 독자가 아니라면, 구체적인 작품 명까지는 기억을 못 해도, 이분의 함자 정도는 귀에 낯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전 지식의 도움이 아니라도, 이 책의 문장은 물 흐르듯 유려합니다. 주장 자체의 찬반과 무관하게, 문장의 아름다운 매력 만으로도  결론에 휩쓸릴 만큼 매력적입니다.  

 

한국인은 과연 자기 정체성을 "반일" 하나에만 목을 매고 유지하는 미개한 민족인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이 책에 나오는 한 가지 예(일본인 저자의 책으로부터 저자가 재인용한 대목입니다)만 들어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하면 일본 아가씨들처럼 우리 점원들도 친절이 몸에 배게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일본인에게 던진 한국인이 있다는 자체가, 저는 "배울 게 있으면 그 누구로부터도 배워야 한다"는 열린 생각을 가진 태도의 한 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질문에 대해 "그건 엄마 뱃속으로 들어가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안 됩니다."라고 대답하는 모습이야말로, 개별 사안을 민족성과 불필요하게 일일이 결부시켜 생각하는 병적인 우월감에 사로잡힌 저열한 인간성의 자기 고백이라고 오히려 봐 줄 만합니다. 이런 예는 우리 민족의 열등성을 드러내는 증거가 아니라, 차라리 반대쪽 주장에 대한 논거로 쓰일 만한 성질입니다.

 

저자는 노무현 대통령을 책 곳곳에서 예로 거론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 책의 취지와 노 대통령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저자분이 다나카 가쿠에이와 노 전 대통령을 연관시킨 것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마 정치인의 중요한 배경이 되는 요소인 "학력"의 팩터에서, 두 사람 다 소속 집단의 평균에 미달하였다는 사실, 여기서 굳이 공통점을 찾으신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노 대통령의 경우는 사법시험(요즘하고는 다르죠. 100명도 채 안 뽑던 시절이고,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판사 임용까지 되었으니) 페스라는 사항이 있기 때문에, 말 그대로 국졸이었던 다나카와 비교할 건 아닙니다. 노 대통령에 대한 반대자들이 그를 비난하고 조롱했던 건. 학력의 부족에 주된 초점이 맞추어졌던 건 아닙니다(그런 사람들도 분명 있었지만. 자기 진영에서조차 다수는 아니었죠). 다나카는 일본 주류층, 기득권층의 평균을 훨씬 넘을 정도로 체제 옹호적인 사상("사상"이라는 게 있었다면)을 가진 인물이었고, 야당이 아니라 집권 여당에서 최대 계파의 보스로 내내 군림한 사람이었습니다. 공통점이 있는 게 아니라, 극과 극의 인생을 살아 왔다고 봐도 되겟습니다.  

 

학력이라는 배경이 없음에도 그런 높은 자리에까지 출세할 수 있었던 게, 다나카가 과연 노 대통령처럼 좌파 스탠스였으면 그 폐쇄적인 일본 사회에서 가능한 일이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일본은 더군다나 수상을 의회가 뽑는 내각첵임제입니다. 우리처럼 국민이 최고 지도자를 직접 뽑는 시스템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직접 국민의 손으로, 고졸 대통령을 만들어 낸 사례가, 열린 국민성의 더 전형적 증거로 원용되기 적합하지, 그 반대의 경우가 더 설득력이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다나카는, 권력형 비리 때문에 자민당 소수파와 야당으로부터 탄핵되어 물러난 자 아닙니까? 저자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이 둘은 나란히 놓고 비교 선상에 오를 일이 애초에 아닙니다.

 

황우석 등의 인사가, 연구에 허위를 개입시키고도 버젓이 화제에 오르고 미디어를 타는 모습을 두고, 죄인이 깨끗이 물러나지 않고 대중의 주목을 받는 한국 사회의 미숙하고 병든 모습이라며 저자는 질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황의 드러난 비리 이전에, 그가 부분적이나마 동물 복제 분야에서 이룬 업적을 대중이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공정한 모습을 유지하는 한국인들의 태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나마 황이 공직이나 기타 어떠한 포스트에 복귀한다고 하면, 비난의 여론이 봇물을 이룰 것임은 우리 뿐 아니라 황 자신도 알고 있기에, 당사자 역시 저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죄인이 완전한 단죄를 받지 않고 계속 제 자리를 지키는 예로, 이 황씨의 경우를 드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후지무라 신이치는 변변한 학자도 아닌 아마츄어였다는 점에서 이 건과 비교될 게 아닙니다.  

 

오히려, 저자분이 그토록 모범적인 예로 보시는 다나카 가쿠에이야말로 록히드 사건 유죄가 확정되고 나서도 계속 정계에 일정 영향력을 유지했다가, 다케시다 노보루의 배신 행위, 하극상이 있은 후에야 최종적으로 정계 퇴출이 가능했지 않습니까? 다케시다는 그 대가로 다나카로부터 정치 보복까지 철저히 당하기까지 했고 말입니다. 이런 점은 일본이 우리보고 뭐라 할 자격이 있는 게 결코 아닙니다. 한국에서 대통령의 아들 신분으로 온갖 비리에 개입했다가, 현재까지도 여당은커녕 야당의 공천도 못 얻어서 야인으로 남아 있는 어떤 사람을 보십시오. 우리가 차라리 그들보다 나은 모습이네요.

 

일본인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에게 가업을 물려 주곤 하는 모습을 보고, 혈연에 무관하게 사람의 능력을 보고 대사를 결정하는 태도를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당장 현대 그룹 창업자 정주영의 청년 시절 그 됨됨이 하나만 보고 총애했던 그 고용주의 일화에서도 확인이 가능하죠. 감동적인 일화 하나만으로 민족성 전체를 재단하는 건, 저 위에 제가 적은 대로 인터넷 일각에서의 극악스런 덧글 몇으로 민족성을 평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위험합니다. 과연 돈 한 푼 없는 자가 제 힘으로 일어서기에, 한국과 일본 중 어느 나라가 더 열린 구조를 가진 사회겟습니까? 한국은 계층 이동이 이제는 대단히 힘듭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신분제가 고착된 사회입니다. 한국도 요즘은 지역구 세습이 어느 정도 고정화된 모습을 보이는 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오기와 参(まい)った의 구별 역시 마찬가지. 저자의 논리를 조금만 연장하면, 승자에 깨끗이 승복하고 현실을 인정하는 자세로, 1910년에 일체의 항일을 중단하고 그저 내선일체를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결론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도 않아 보입니다. 일본은 원폭 투하 직후에 미국에게 당장은 철저한 굴복을 했지만, 살만해진 지금은 오히려 평화 헌법을 훼손하려 들지 않습니까? 이게 더 더러운 뒤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시는지요? 이런 논리대로라면 일본과 굴욕의 외교 협상을 하려 들었던 박정희는 대단한 세계시민으로서 저자분께 칭송을 들어 마땅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저자분이 책에서 칭송하는 분은, 웬걸 <친일 인명 사전>을 국책으로 추진했던 노 대통령이니, 독자는 이 혼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무작정 반일"은 무지하고 혐오스러운 태도고, 그런 일차원적 마인드를 가진 사람은 현대 한국처럼 복잡다단하게 돌아가는 사회에서 초보적 적응조차 쉽지 않습니다.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인은, 그런 원시적인 태도를 갖고 싶어도 자신이 처한 현실이 이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저자께서 지목하는 그런 무지몽매한 "그들"의 정체가 궁금합니다. 만약 이 "그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전체를 지칭한다면, 이런 주장을 하시는 1인칭 화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오히려 궁금해집니다. 이런 제목과 내용은, 구로다 가쓰히로 같은 일본인의 입장에서 쓰여졌으면 딱 어울릴 것입니다. 그런 분이 만약 이런 주장을 한다면, 그 외국인의 입장에서야 당연한 발상이겠으므로, 겸허하게 귀 기울이고 배울 건 배운다는 자세로 읽어 나가겠습니다. 저자는 "주장"이 아닌 "진술"을 하고 있다고까지 서두에서 말씀하십니다만, 저는 이런 "진술"부터가 실망스러웠습니다. 초인, 도인이 아니고서야 "진술"과 "주장"의 준별이. 기술서적도 아닌 이런 긴 수상록에서 과연 가능하다고 생각하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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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와 프란치스코 - 세계를 뒤흔든 교황, 그 뜨거운 가슴의 비밀
김은식 지음, 이윤엽 그림 / 이상한도서관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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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프란치스코와 프란치스코"이지만, 저는 "와(et)"라는 접속사 대신에, "대(對, vs)"를 써도 좋을 것 같아요. 이탈리아의 오래 전 성인(聖人)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바로 며칠 뒤면 한국을 찾을 현 교황 사이에는 닮은 점도 물론 많지만, 이 책을 읽고 새삼 떠올리게 된 건 "두 분이, 서로 떨어진 세월만큼이나 이처럼 차이가 많았었구나." 하는 점이었네요.


저자는 김은식 씨입니다.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이 란 책 읽어 보신 분들 많이 계시죠? 호남이 소외되고 극심한 상처와 상실감에 시달리고 있을 무렵, 그들의 마음을 달래 주었던 두 아이콘에 대해, 아주 솔직하고 쉬운 회고를 털어 놓았던 바로 그 책. 저자는 이 신작에서도, 서로 무척이나 닮은 행보와 개성을 지닌 두 분에 대해,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고,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깊은 공감을 할 수 있게 친절하고 자상하게, 그러면서도 현실에 대한 비판을 잊지 않은 냉철한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책의 시작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술회와 짧은 감상으로 시작합니다. 교황하고 세월호가 서로 무슨 관계인가 하시는 분도 있겠죠?, 이 교황은 시칠리아 람페두사에서 벌어진 난민선 침몰 참사에 대해 강력하게 주의를 환기한 바 있습니다. 연 대의 가치, 박애의 신념이 서서히, 우려스러운 속도로 퇴색, 퇴조하고 있는 이 때, 교황은 "가장 소외되고 가장 무관심하게 버려진 이웃들에 대해 관심을 쏟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 가장 수치스러운 현실임"을 우리에게 깨우치고 있습니다.


9백 년 전 아시시에서 태어난 성 프란치스코 역시, 말 못 하는 동물들, 가난하고 버림 받았으며 멸시와 천대에 시달리는 이웃들에게 우리가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가르치며, 말 뿐이 아닌 행동으로 몸소 실천에 나섰던 위인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처음 안 사실인데, 그는 말 솜씨만큼은 어눌한 편이었다고 하는군요. 그가 설교에 나설 때에도, 사용하는 표현은 그리 현란하거나 다채롭지 않았다고 합니다. 단문의 반복, 평범한 진리에 대한 강조, 그 이상의 레토릭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말씀을 듣고, 그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보려고 모여 드는 군중은 언제나 많았습니다. 그는 권력층과 부자들의 견제와 질시를 언제나 받았고, 심지어 같은 가톨릭 교단 안에서도 이단이란 의심의 눈초리를 받은 사람이지만, 민중과 빈민들의 가슴 속에 언제나 참된 가르침을 설파하는 성인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말보다 앞선 실천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실증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그는 즉위 초에 "1세"라고 덧붙이지 말라는 당부를 따로 했습니다) 역시, 진보적 성향에다, 현란한 말이 아닌 실천의 가치를 중시하는 분입니다. 서민 출신답게 전철 등의 교통 수단을 애용하는 분이었고, 즉위를 축하하러 온 군중에게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할 줄 아는, 권위의식이라곤 전혀 몸에 지니지 않은 겸손한 분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기꺼이 빈민들 틈으로 파고 들어 자신의 가진 것을 다 나눠 주고, 심지어 끔찍한 병을 앓고 있는 나병 환자들에게까지 입맞춤과 광범위한 신체 접촉을 허용한 그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 점과 매우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가톨릭 교회가 근래 보였던 행적 중 크게 아쉬웠던 것은, 동성애에 대해 강력한 반대 교의를 고수하면서도, 아동 성추행 등 비리를 저지른 성직자들의 처벌에 대해서는 왜 그리도 미온적이었을까 하는 사실입니다. 현 교황이 이 문제에 대해 앞으로 어떤 강력한 조치를 취할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 다만, 이 책에서도 지적하는 바처럼, 레이먼드 버크 추기경의 해임 단행에서 알 수 있듯, 종래 가톨릭의 주류를 형성했던 보수파 인사들의 행보에 대해서는, 보다 강경한 태도로 나갈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 그저 보혁 간 정치 투쟁 정도의 인상을 주지 않고, 교회의 근본적 쇄신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아동 성추행 사건 같은 지독히 불미스러운 일이 다시는 재발하지 않을 어떤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이분은 이미 바티칸 시국(市國)의 국가 원수 지위로서, 특별 형법의 마련을 지시했다는 사실이, 이 책에 잘 나와 있습니다.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모시는 분 중에는, 특별히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방탕한 생활로 청 춘을 허비하다가, 어느 순간 회심하여 신앙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분들이 몇 있죠.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러했고, 바로 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인이 그러했습니다. 앞서 제가 "두 프란치스코"가 서로 다르다고 한 건, 바로 이런 점에서입니다. 호르헤 베르고글리오(베르골료)는 서민 집안 출신이고, 어려서부터 바르고 모범적인 처신으로 유명한 아이였습니다. 반면 프란치스코 성인은,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모든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자라난 청년이었고, 환경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다소 껄렁한 행각으로 젊은 시절을 낭비한 케이스였죠. 이러던 아이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거리에서 동냥을 하고, 안 찾던 예수 타령을 하니 아버지가 기겁을 할 밖에요. 매섭게 다그치는 아버지에게, 청년은 먼저 절연을 선언하며, "당신께 받은 것을 다 돌려 드리겠습니다."며 알몸으로 등을 돌립니다. 주교는 이 청년에게 옷 한 벌을 내어주는데, 그게 바로 수도 생활의 거룩한 첫 발걸음이었습니다.


현 교황은, 화려한 의상과 장신구로 상징되는 번잡한 겉치장, 즉 권위를 혐오한다는 점에서 그 성인과 닮아 있습니다. 현 교황이 책임지고 처결하여 시성된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즉위 초기부터 이처럼 큰 기대를 모으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이 낮고 폄범한 출신이었고, 그 초심을 잊지 않아 언제나 낮은 곳으로 향하는 이 대성적자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건강하고 청렴한 교회를 세우는 데에 큰 공적을 남기실 것 같아요.


책 곳곳에 삽입되어 있는 이윤엽 님의 판화 작품을 절대 놓치지 마세요. 이 책의 가치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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