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선교 - 영광스러운 복음, 효과적인 전달
손창남 지음 / 죠이선교회 / 201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손창남 선교사님의 세번째 책을 읽습니다.

 

제가 저자님의 전작들을 읽고 느낀 바는,

1) 참 진솔한 이야기를 쓰십니다. 선교사님 정도의 위치에 계신 분 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도 막상 털어 놓으려면 참 민망하겠다 싶은 사연들도, 전혀 거리낌 없이 독자들과 공유하시겠다는 듯 다 이야기해 주십니다. 전작에서는 "그저 선교사님 개인의 스타일이려니" 하고 가볍게 받아들였는데, 이번 책을 읽어 보니 이것은 그 차원을 넘어 "선교의 철학, 신앙상의 원칙"과 관계된 것이었습니다.

 

2)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시면서도, 결론은 언제나 보편의 원칙,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만한 명제로 이끌고 가십니다. 이는, 듣거나 읽는 이의 신앙 문제를 초월해서의 일입니다. 책을 읽다 보면 그저 자신만의 생각에 지나지 않는 것을, 모든 이가 동의해야만 하는 양 강경하고 편협한 어조로 몰고 가는 저자를 흔히 봅니다. 책은 물론 저자 자신의 의견을 내어 놓는 장이지만, 그 의견을 표명하는 방법은 보편적인 원칙에 따라야만 합니다. 손창남 선교사님은, 정확하고 반듯한 문장(언제나 느끼는 바입니다)을 구사하시면서, 내용 역시 신앙인, 비신앙인을 떠나 누구나 공감할 주제로 거부감 없이 이끌고 가시는 게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3) 참 겸손하신 분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강연을 들은 적도 없고(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 출강도 하셨으니 예전에 제가 살던 곳과 가까운 편이었는데도요) 사진으로나마 접한 적도 없지만, 글만 읽어도 얼마나 겸손한 분이신지 알 것 같습니다. 선교사의 직분에 어울리시게 엄청난 수양이 쌓인 분이실 것 같지만, 어떤 겸손한 행동을 하실 때, "누가 나를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볼 것 같아 자제했다."라고만 말씀하실 만큼 솔직하고 겸손하십니다. 수양과 내공의 결과가 아니라, 그저 남 보는 시선 때문에 참았다는 표현을 들을 때마다, 읽는 독자로서 부끄러워진 적이 많았습니다. 나에게 어떤 행동 중 100 중 99가 나쁜 동기이고 단 1만 착한 뜻이었다고 해도 그 1 쪽으로 합리화를 하는 게 보통입니다. 그런데 손창남 선교사님은 100 중 99가 올바른 동기이신 것 같은데도 굳이 부끄러운 1로 돌리고 마십니다.  진정한 인격자는 이런 점에서도 남들과 다르다는 걸 느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은 <문화와 선교>입니다. 말 그대로, 외국에서, 그것도 기독교라는 정신 체계를 전혀 알지 못하는 외국에서, 어떤 데에 유의하고 조심해야 할지, 그리고 그런 실용적 팁을 떠나서, 선교사로서 근본적인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책입니다. 그런데 저는, 선교나 신앙 문제를 떠나서, 나와 다른 문화권에 속한 의식을 가진 분들을 상대할 때, 어떤 점을 조심하고 어떤 점에 신경 써야 하는지, 그 원칙을 가르쳐 주는 책으로도 읽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교과서에서 "문화 상대주의"라는 개념을 배웁니다. 내가 옳다고 믿은 것이, 예의에 바르다고 믿은 것이, 다른 문화권에 가면 전혀 반대의 의미로 통할 수있다는 내용입니다. 그 "문화상대주의"의 생생한 모습에 대해, 이 책처럼 재미있게 가르쳐 주는 책을 여태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는 1) 손창남 저자께서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며 책을 쓰셨고(독자 입장에서 전달이 잘됨) 2) 저자의 진솔한 체험이 그대로 적혀 있기 때문에, 이해가 빠르고 공감이 잘됩니다. 적당히 가공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슬쩍 고친 책은, 이런 감동을 전달할 수 없죠.

 

손창남 선교사님의 전작을 읽은 독자는 다 알지만, 저자께서는 주로 인도네시아에서 선교를 해 오신 분입니다. 인도네시아는 엄청나게 인구가 많은 곳이고, 프로테스탄트 국가라고는 하나 매우 세속적인 경향의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을 뿐이므로, 이웃 필리핀에 비해 기독교 신봉 인구는 거의 없다시피 하죠. 이런 곳에서 오랜 기간, 교육(회계학 교수님입니다)과 선교를 동시에 진행한 분이라, 신앙 외적 측면에서도 인도네시아라는 나라에 대해 생생하고 진솔한 지식을 많이 배울 수 있는 이야기를 해 주고 계십니다.

 

이번 책에서는, 우리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인도네시아는 고맥락 문화"의 사회라는 점을 아주 의미심장하게 여러 곳에서 가르쳐 주고 계시더군요. 예를 들어 가사도우미를 해고할 때(이유는 절도 등입니다), 인사를 안 받아 준다든가, 평소에 베풀던 대접을 안 한다든가 하는 방법으로 눈치를 줍니다. 그러면 도우미는 무슨 뜻인지를 알고 제 발로 나갑니다. 이렇게 해야만, 해고 당한 이가 원한을 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해고하는 입장에서도 최대한 체면을 지켜 준 것으므로, 마음이 찜찜한 바가 적습니다.

우리는 아주 다르죠. 그 당사자가 평생에 잊지 못할 만큼 혼쭐을 냅니다. 사안이 중대하면 공권력에 호소하는 게 보통입니다. 물론 한국은 이후 고용 계약상의 시비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사안을 분명히 정리하는 게 나으므로, 이런 저맥락적 문화가 발달한 것도 있겠습니다만, 그보다는 "당장 내가 분한 건 무조건 그 자리에서 표현을 해야 내 직성이 풀리는" 미숙한 심성의 탓이 더 큽니다. 이 경우, 남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후진국 미개인으로만 알아 왔던 인도네시아인보다 훨씬 못한 면을, 이 책에서 재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손 선교사님은 물론 "우리가 이런 점은 그들보다 못하니, 그들에게서 배우자."라고 말씀하시려는 게 아닙니다. 저자는 그저, "다른 문화에서는 다른 가치가 통용된다"는 점만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책을 읽으면서, 우리도 예전 양반 문화, (좋은 의미에서의) 체면 문화가 통할 때는 얼마든지 이런 아름다운 풍속이 사회를 지배할 때도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업화가 무리하게 진행되면서, 물론 경제적 풍요를 누리게는 되었지만, 인간이 인간을 존중하는 풍습이 간데 없이 사라지고, 웬 나쁜 악다구니만 남아서 민족성인 양 탈바꿈한 현실이 개탄스러웠다고나 할까요.


손창남 저자께서 회계학을 가르칠 때, 부정행위를 한 학생에게 공개 주의를 준 것도, 그런 의미에서 현지에선 크게 꺼려지는 행동이었다고 합니다. 조용히 경고를 해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인도네시아에서만 통하는 방법이겠습니까? 또 하나, 서울에서 유학을 할 수 있게 선발된 어느 여학생이, 살짝 손 선교사님을 찾아 와 "사정이 있어 못 갈 수 있는데, 다른 학생을 보내 주셨으면" 하고 부탁을 해 왔답니다. 저자는 당연히 양해하고 다른 학생에게 기회를 주었지요. 그런데 이는, 처음 선발된 그 학생이 다른 동료들에게 미안해서 일종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지레 겸양한 것 뿐이라고 합니다. "나는 사양했는데, 선교사님이 가라고 하시지 뭐야?"

어쩌면 이는, 단지 문화의 차이에만 기인한 게 아니라, 진정으로 현지인의 마음에 접근하려는 시도 없이, 그저 피상적인 소통에 머무르려 한 자신의 잘못일 수 있다고 저자는 토로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사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 상대의 영혼을 일깨우는 선교가 가능하겠습니까? 우리 역시, 마음은 덥썩 받고만 싶지만, 예의상 명분상 일단 몇 번 사양하는 아름다운 문화가 일찍부터 있었습니다. 그 좋은 미풍양속이, 저 먼 열대의 인도네시아도 같은 동양권으로서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데, 우리만 어딘지도 모르게 내동댕이치고 만 것이죠. 읽으면서 거듭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선교를 한다면서, 본국에 보고(報告) 편지를 쓸 때마다 한국 험담을 후렴처럼 쓰곤 하는 영국인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손창남 저자께서는 이를 볼 때마다 극히 마음이 불편했지만, 그때마다 자제하셨다고 합니다. 어느날 기회가 생겨 이를 지적하자, 그 선교사는 "내가 그러고 있는 줄 몰랐다."며 사과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손 선교사님이 이끌어 낸 결론은,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모르는 사이, 인도네시아의 형제들을 우습게 보는 행동을 하고 있었을 지 어떻게 알겠는가?"라고 하시네요.

 

일단 저는, 선교사라는 분이 현지인을 우습게 하는 행동과 말을 그처럼 습관적으로 반복한다는 자체가, 소명 의식이 결여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가 진료하는 환자, 의뢰를 맡은 고객, 가르치는 학생의 험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모두가 다 기본이 되어 먹지 않은 이들입니다. 하물며 선교사라면,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저자는 "나 역시 그러고 있었을지 모른다"며,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동양적 의미의 "군자적 인격, 태도"가 보이는 처신입니다. 가장 안 그러실 것 같은 인격자가 오히려 자신을 탓하고, 가장 천박한 인격자가 허위로 남을 고발하는 법입니다. 선교의 기본, 아니 더 나아가 외지인을 대하는 기본 자세가, 그 사람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생각해 보는 겸허한 자세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그 서양 선교사의 행태에 분개하기보다, 저자의 겸손한 자세에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저자가 그저 양순하신 성품인가 하면, 한국인들이 예의가 바르다는 주장에 대해, "일본의 오랜 식민 지배를 받은 영향이다."를 가당치도 않게 들고 나오는 어느 일본인의 주장에 대해,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를 느끼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그 자리에서 시정이 되고 사과를 받은 건 말할 것도 없구요.

 

저자는 인도네시아어를 상당히 잘 구사하시는 편입니다. 그런데도 현지인이 아니기에, 틀린 어법 구사로 학생들에게 웃음을 사고(아무래도 대학 과정 강의이므로 그럴 수밖에요). 소통이 안 되다 보니 조교가 대신 시험 출제를 하겠다는 제의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이런 어려움을, 그는 "앞으로 내가 틀린 표현을 하면, 적어서 제출해 주는 학생들에게 점수를 주겠다."는 방침을 정해서 해결했다고 합니다. 이러니 괜한 웃음으로 수업 분위기가 나빠지고, 권위가 실추되는 일도 줄어 들었습니다. 여기서 저자가 내리는 결론이 일품입니다. "나 자신을 낮추고 약점을 드러내는 게, 그들 사이로 다가가는 지름길이다." 방법도 좋지만 그 바탕에 깔린 철학이 더 멋집니다.

 

어느 가톨릭 신부와 이런 대화를 나누신 경험도 들려 주고 있습니다.
"신부님, 선교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가요?"
"불을 붙이려 하지 말고, 부채질만 하십시오. 불은 이미 그들의 마음 속에서 타오르고 있습니다."
신앙의 관점에서도 그러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모습을 본따 만드신 인간인데, 이미 신앙을 받아들일 준비는 그 척박한 영혼 안에 다 내재되어 있습니다. 이미 싹이 튼 자리를 마다하고 엉뚱한 지점애서 새 불을 만들려 하면, 기존에 자라던 심성마저 망칠 수 있습니다. 이미 자라고 있는 그 불씨를 찾아, 요령껏 부채질을 해야 합니다. 그 요령을 알려면, 그 문화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찌 선교에 국한한 이치겠습니까? 인간 사는 세상, 소통이 이뤄지는 근본의 철칙이 아닐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화를 디자인하라 - 비즈니스 프레젠테이션을 성공으로 이끄는 20가지 전략
러스 웅거 & 댄 윌리스 & 브래드 넌널리 지음, 추미란 옮김 / 정보문화사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사실 영어 단어 "디자인"에는, "기획하다, 설계하다"의 뜻이 더 우선입니다. 그러니, 우리 한국인들이 대뜸 이 단어에서 "미술적 아름다움"만을 떠올리는 건, 우리만의 오해요 원칙에서도 벗어난 일이라 하겠습니다. 최근에 들어 소위 "혁신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은 애플의 성과와 평판 때문에, "이제는 기능 뿐 아니라 겉모습도 상당히 중요하게 되었나 봐."처럼 생각하는 건, 그런 의미에서 좀 오해에 가깝습니다. 잡스나 조니 아이버의 생각이나 의도는 "올바른 모양에서 최선의 기능이 나온다"는 원칙론에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대화의 기획, 설계" 역시 그런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저는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저자(들)의 의도 역시 그런 것이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고 해도, 그 생각이, 생각을 짜낸 이의 머리 속에 머물러 있는 이상, 그 사람의 외계를 향해 어떤 유익한 결과를 빚어내지 못함은 당연합니다. 생각이 성과를 내려면, 외부와의 유의미하고 효과적인 소통을 거쳐야 합니다. 효과적인 소통을 거쳤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오라는 법은 없지만, 목적지에 가려면 일단 다리를 놀리고 걸어야 하듯이, 올바르게 걸음을 걷는 방법을 몸에 익히는 건, 그 사람의 가진 체력(때로는 의지 포함)을 최대한 활용하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바른 디자인에서 바른 기능이 나오고, 바른 (운동) 자세에서 최대한의 효과와 파워가 발휘되며, 대화를 하는 시스템과 관습, 룰이 올바로 잡혀 있을 때 모임의 성과가 극대화되는 건, 다 같은 이치의 결과입니다. 이 책은, 요즘 많이 출판되는, "어떻게 하면 획사에서 열리는 그 많은 회의를, 무용지물 아닌 성과의 장으로 바꿀 수 있을까?'하는 고민을 덜어 주기 위해 나온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런 말을 합니다. "회의 많이 하는 직장치고 제대로 된 곳 없다. 회의를 다 없애 버려야 한다." 그런데, 이런 분도 "소통의 중요성"은 강조를 합니다. 회사가 조직인 이상 회의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회의가 문제가 아니라, "소통이 안 되는 잘못된 회의"가 문제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대화하는 교육, 토의하는 버릇"을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에, 직장에서도 자기 의견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줄을 모르고, 남의 의견에 일단 귀 기울인 후 그 장점, 단점을 정리해서 전체 분위기를 생산적으로 바꾸는 데에 전혀 익숙하지 않습니다. 결국 몇몇 소수끼리 뭉쳐 "뒷담화까는" 자리가 가장 신나는 자리이며, 아예 중상 모략의 장으로 회사를 변질시키기도 합니다. 안 되는 조직은 이래서 안 되는 거지, 회의가 많아서 안 되는 게 아닙니다.

 

이 책은 일단 "촉진의 기술"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요즘 대세가 또, 이 "촉진"의 방법을 일러 주는 책들의 기획이더군요. 그럴 수밖에 없죠. 앞에서 제가 적은 대로, 말은 많은데 전부 각개약진입니다. 오히려 독재자(즉 사장)가 이끌고 가는 것만도 못한 결과가 나오며, 실제로 그 많은 회의가 다 무용지물이며 결정은 다 사장이 합니다. 그런데 이 결과는 사원 모두가 꺼리는 상황이며, 실제로 사장 역시 이 분위기를 마냥 즐기는 것만은 아닙니다. 머리를 여럿 맞대게 헸으면, 그 머릿수만큼의 성과가 나오는 게, 사장 입장에서도 월급이 아깝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이 "촉진"이란 무엇이냐. "일을 술술 풀리게 하는 것"입니다. 1) 일단 대화가 잘 풀려야 합니다. 사원들이 각각 좋은 아이디어를 내놓고 있습니다. 잘만 뭉치게 하면 작품 하나 나옵니다. 그런데 서로 오해, 감정 싸움 때문에 말이 얽히고 꼬이며, 이 때문에 그 좋았던 아이디어가 다 묻히고 맙니다. 2) 일단 대화가 잘 풀렸다면, 전체 기획안의 성사를 위해 이 대화의 성과가 최대한 반영되게 "촉진"해야 합니다. 촉진(퍼실리테이팅)은 바로 이 두 가지 의미에서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이 책은 1)에 더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2)는 주로 경영자가 조직 구조 개편 과정에서 고민해야 할 분야이니까요.

 

대화를 두고 일정 룰과 틀을 만들어서 행하는 관습에 거부감을 느끼는 분도 있습니다. "그건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해야지, 틀을 짜면 더 비효율적이야." 이 말도 일리가 있지만, 우리나라 회사처럼 중구난방, 아니면 정반대로 일방통행식 지시 하달인 환경에서는, 초보적 룰의 정립이 꼭 필요합니다. "를을 정립"한다고 하면 그런데 너무 경직화한, "초등학교 발표, 토의"처럼 수준이 떨어져 버릴 수 있으므로, 이 책(그리고 다른 논자와 주장들)은 한 발 물러서서 "원칙적으로 자유롭되, 대화가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경우에 활용하는 '촉진술'"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보통 대화 촉진 기법을 다룬 다른 책은, 단일 저자가 자신만의 체계를 세워서 독자에게 전달합니다. 이런 책은, 머리에 정리하기는 쉽지만 실제 응용을 해 보면 좀 힘든 수가 있었습니다. 1) 미리 상정한 경우의 수가 적다. 2) 이 체계에 대해 다른 성원이 거부감을 느끼면, 회의 전체에 적용하기 힘들다. 반대로 이 책은, 1) 다양한 저자들이 다양한 상황을 가정하여 의견을 펴고 있다. 2) 하나가 안 되면 다른 방법을 꺼내 쓸 수 있다. 는 게 좋은 점이었죠.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독자가 기대한 건 대회 촉진술인데, 여기에 등장한 많은 분들은 명강사가 상당수입니다. 물론 우리는 PT 자리에서 많은 "청중"을 상대로 내 의견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능력도 키워야 합니다. 그러나 더 많은 상황에서는, 회의 자리에서 중구난방이 되기 쉬운 의견을, 나라됴 나서서 정리하는 게 더 시급한 상황인데, 이 책에서 다룬 "촉진'은 포커스가 좀 분산되어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여기에, 한국과 미국이 서로 회사 소통 환경 면에서 크게 다르다는 점도, 책의 효용을 보다 직접적인 것으로 하지 못하는 하나의 장벽이었고요.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주로 관리자, 경영자 입장에서 참고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번역이나 편집은 아주 깔끔합니다. 통독보다는 레퍼런스 용도로 더 탁월한 책이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크리에이티브란 무엇인가 - 세계 최고의 예술대학,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의 크리에이티브 명강의
로잔느 서머슨 & 마라 L. 허마노 지음, 김준.우진하 옮김 / 브레인스토어 / 201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의란 무엇인가, 왜 도덕인가, 같은 질문과는 달리, 누가 "크리에이티브"의 본질에 대해 묻는다면, 그건 그리 한가(?)하지 않고 꽤나 심각한 질문으로 여겨집니다. "정의"나 "도덕"이 사소한 이슈라는 게 아니고요. 무엇이 "창의성"인지를 알고, 이를 자신의 것으로 삼는 건, 앞으로, 아니, 이미 진즉부터, 생존의 문제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죠.

 

기존에 정립된 지식과 기능을 열심히 익히고, 스승이나 명인 못지 않게 발휘하도록 반복 연습하는 건, "도제식 교육"이다 뭐다 해서 저 예전 봉건사회, 아니면 그의 안티체제로 등장한 산업사회 시절에나 통하던 덕목이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은, 남들이 아무도 생각지 않던 기발한 아이디어와 발상, 사물을 보는 눈을 갖춘 사람이라야 멋지고, 존경 받고,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다들 편하게 여기는 세상이 된 듯한 느낌입니다. 이런 것이 사회적으로 새로운 가치, 지향성인 양 자리 잡은 줄로 다들 아는 탓에, 창의력 없이 창의력스럽게 보이게 꾸미기만 하는 허위가 판치는 모습 역시 간혹 보이기도 합니다. 남의 것을 훔쳐 와서 제 것처럼 꾸미는 얄팍한 사기인데, 이런 술책 역시 언젠가는 백일하에 드러나서 "무엇이 정의인지"가 판명되기도 하지 싶습니다.

 

아무튼, 학교란 본디 기존의 지식 체계를 교습, 전수하는 곳임을 감안하면, "창의력을 가르치는 학교"란 그 자체로 큰 모순, 역설을 안고 있는 개념처럼 보입니다. "배워서 습득될 수 있는 거라면 그게 과연 창의력일까요? 창의력은 설사, 좋은 스승을 만나 후천적으로 개량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타고난 바가 어느 정도 있어야 그게 창의력이라 불릴 수 있지, 어떤 시스템 아래에서 훈련을 받는 일만으로는 과연 순수한 의미에서의 창의력이 길러질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더랬습니다.

 

여기, 아이들을 창의력 만땅의 인재로 키워 주는 학교가 있습니다. "아이들'이라곤 했지만 "줄리어드 스쿨"처럼 대학교 학부 과정에 상당하는 학교입니다. 한국에서 특별한 지명도를 지닌 줄리어드가 음악 분야의 세계적 인재를 키워내는 산실이라면, 이 학교,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스쿨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디자인 쪽의 적성을 적극 자극하여, 빼어난 미적 감각을 함양하고 실제로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능력을 배양하는 데에 그 교육 취지의 중점이 놓여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면 아마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화가, 조각가, 의상 디자이너, 행위 예술가 정도로 진로가 정해지는가 보다." 같은 생각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아예 이 대학을 모르거나, 미대 진학을 염두에 둔 부모들 사이에서만 지명도가 있을 뿐이죠. 줄리어드 같은 곳은 음악과 전혀 연이 없는 이들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사실과 크게 대조된다고 할까요. 이곳은, 물론 졸업한 후에 가장 좁은 의미의 전공을 잘 살려, 훌륭한 예술가로 진로를 잡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좁은 문"을 애써 통과하지 않는 이가 더 많습니다.

 

이 학교의 졸업생 중엔 로스쿨을 진학하여 변호사가 되는 이들도 있고, 영화 제작 분야로 나아가는 이들도 있으며, 정치인이나 철학자가 되는 경우도 종종 나옵니다. 특히 변호사(그것도 성공적인 커리어의)가 된 이는, "내가 학생 때 이 학교에서 배운 것 중 가장 중요한 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결 방안을 설계할 것인지 착상하는 능력이었다"고도 술회합니다. 어떻게, "미대를 나온 아이(한국식 개념으로라면 그 이상이 아니죠)"가 변호사로, 그것도 간신히 로스쿨 졸업장만 딴 채 변변한 개업 활동도 못하는 잉여인력이 아닌, 의뢰 사건이 폭주하는 일류 변호사가 될 수 있었을까요?

 

해답은 창의력입니다. 교과서에서 배운 깔끔하고 단정한, 정형화된 사례와는 달리, 학교 밖으로 나와서 직면하게 되는 세상은 혼란과 모순 투성이입니다. 그런데 예술가들은, 그 속에서 질서와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예술의 정의가 본디 그것입니다. "숨어 있는, 감추어진 진 선 미를 찾아서 눈 앞에 보여 주는 것". 변호사의 일 역시, 혼동과 다툼, 갈등 속에 파묻힌 정의와 진실을 법정 앞에서 재구성하는 것 아닐지요? 이런 의미에서 심미안과 창의력은 서로 밀접히 통하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아름다운 곳으로 다시 바꾸어 놓는 과정에, 이 능력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창의력을 "문제 해결 능력"으로 정의하는 앞의 저 말에 다시 주목해 주십시오.

 

"창의력은, 규칙과 상상력 사이의 긴장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저 제 멋대로 늘어 놓고 난잡한 자의적 진술, 표현을 하는 게 창의력의 소산이 아니라는 걸 이 말은 여실히 가르쳐 줍니다. 상상력은 그 자체로는,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소재일 뿐입니다. 제아무리 고기의 육질이 좋다 한들, 사람이라면 생으로 그 피 뚝뚝 떨어지는 살점에 입을 대고 뜯어 먹을 수 없습니다. 규칙을 염두에 두고, 그것도 상당 부분 신경을 써서 반드시 자기 것으로 만든 후, 그에 대한 구속이 나의 프레임 일부를 형성함에 일종의 희열을 느끼는 정도가 되어야, 그 머리에서 나온 상상이 진정 가치 있는 질료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창의력은, 방종과 태만의 아들이 아닙니다. 언제나 "긴장"된 삶을 살아가는, 질서라는 아버지의 잘 교육 받은 단정한 자제입니다. 어떤 학생은 그렇게 물었다고 하는군요. '미국 이민의 역사와, 내가 받으려는 미술 교육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나요?" 아마도 이 질문에서, 이 학교의 커리가 대충 어떤 성격인지 짐작이 되실 겁니다. 왜 이 학교에서, 정치인, 사회 운동가, 기업인, 법률가가 배출될 수 있었을까요? 답은, 미대에서 미술만 가르치지 않고, 인간 문명이 지금껏 일궈 온 그 모든 지혜와 요령, 기본 원리(이를 두고, 이 학교의 교수진은 "파운데이션"이라고 부른다 합니다)를 가르치며, 그를 바탕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진정한 창의성"을 이끌어 내기 때문입니다.

 

창의력은 자의(姿意)의 산물이 아닙니다. 가장 정직한 영혼이, 엄격한 규칙의 체스판 위에 정연히 펼치는 수(手)의 향연입니다. 저는 이 책의 교수진이 설명하는 "인재와 창의성"의 내용을 듣고(읽고), 마치 영화 <X-men>에서 (타고난) 초능력을 학생의 개성에 맞게 섬세히 전정(剪定)하는, 익재비어 교장 이래 그 빼어난, 마법의 교사, 교수의 강의처럼 받아들였습니다. 한국의 명문대 열 곳이 덤벼들어도 당해내지 못할 것 같은, 이 작은 미술 학교의 저력 그 원천이 어디인지 잘 알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로드아일랜드 주의 프로비던스는, 잘 아시다시피 미국 건국 선조들이 최초 정착한, 아주 유서 깊은 도시입니다. 그 이름도 "프로비던스", 신의 섭리와 통한 듯한 신성하고 경건한 느낌마저 주는 보통명사죠. 이런 곳에서, 세상의 어느 관습에도 속박되지 않을 것 같은 자유로운 영혼들이 모여 그 재기를 닦는다니, 참 역설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작은 학교의 저력은, 왜 합중국이 강할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하는 유력한 가설 중의 하나를 잘 지탱하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미래는 인재의 힘에 달려 있으며, 그 인재의 힘을 구성하는 결정적 인자는 창의력입니다 어찌 미술에만 국한한 재주이겠습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구 청문회 1 - 독립운동가 김구의 정직한 이력서
김상구 지음 / 매직하우스 / 201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구 선생은 독립운동의 권화였는가?
김구 선생은 애국심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는가?
김구 선생은 통일의 화신이었는가?
김구 선생은 (심지어) 진보 세력의 아이콘이기도 한가?

이 네 가지 질문에 대해, 저는 현대를 사는 한국인이라면 거의 거리낌 없이 "그렇다"는 대답이 나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심지어 저는, 애국심이다, 독립운동이다, 통일 운동이다, 하는 개념을 배우기도 전에, 백범의 생애와 인격을 먼저 배우고, 그를 통해 "아 애국심이란 이런 것이구나, 독립 운동가의 전형적인 모습이 이것이구나."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백범이 먼저고 애국심 등 추상적 덕목은 배우는 게 오히려 나중 순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최소한 저희 세대는 그랬고, 지금 어린 세대도 대체 그들이 애국심, 민족애라는 관념을 최소한 마음에 품고나 있다면 그러하리라고 다소 성급한 추측마저 합니다.

그런데 저자 김상구 선생(백범과 이름마저 비슷하죠?)은, 제가 위에 적은 네 가지 질문에 대해, 완전히 부정적인 답을 내어 놓습니다.
1) 백범은 자신의 독립 운동에 대해 스스로 과장하기도 했고, 그의 미화에 친일파들이 앞장서기도 했다.
2) 일신의 안녕과 체면을 위해 대의에 어긋나는 결정을 하기도 했으며, 경무총감이나 주석으로서 그가 내린 조치에는 월권, 반인륜적인 것이 상당했다. 귀국 후에는 일종의 쿠데타를 시도하기도 했으나 힘에서 밀려 좌절되었다.
3) 통일운동은커녕 반탁운동에 무분별하게 나섬으로써, 이승만의 단정 수립 운동에 결과적으로 기여하고 말았다. 그의 행보에는 일관성이 없고, 지켜보는 이를 어리둥절하게 만들 만큼 노선 변경이 잦았다.
4) 진보는 고사하고, 평생을 두고 반공 노선을 유지한 극우분자다. 심지어 독립 운동 도중 공산당에게 입은 은혜마저 배신한 적이 있다.

1권은 주로 백범일지에 대한 비판과 분석, 검토가 주종을 이룹니다.  특히 치밀한 역사 고증을 시도하고 있어, 백범에 대한 찬반 여부를 떠나 독자로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우 리가 어려서부터 잘 아는 내용이, 어느 주막에서 일본인 하나를 구타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내용입니다. 이른바 치하포 의거라는 것인데, 사실 어린이용 전기에서도 이를 두고 마냥 미화하지는 않습니다. 심지어 <백범일지>에서도 이를 두고 그저 자랑하거나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투는 아닙니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는 정도이며, 다만 아직 젊은 나이라 생각이 미숙했을 수 있고, 여튼 방법상 옳지 못했다는 것 뿐이지 애국심의 절절한 표현이라는 건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당시의 인권 의식이 아주 낮은 수준이었다는 것도 감안해야겠습니다. 잘했다는 게 아니라 이방인이 타지에서 시비 끝에 목숨을 잃는 건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가 지적하는 건, 옥중의 백범이 <황성신문>을 통해 자신의 사형집행 예정을 알게 되었고, 집행 직전에 고종의 전화 한 통으로 중지되었으며, 그 전화는 조선에 갓 가설된 문명의 이기였다는 점에서 실로 극적인 사건이었다는, 우리들에게 아주 익숙한 "신화"의 허구성입니다. 이 이야기는 "최초의 통화"와 "독립운동의 레전드 백범"이 한 에피소드에 얽혀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꽤나 인기가 높았습니다. 저자는 <황성신문>의 창간과 최초 전화 부설 시점이, 백범 석방 이후라는사실을 들며, 이 이야기가 완전히 허구임을 증명합니다. 더군다나 이 일화는 백범이 자신의 책에서 아주 자랑스럽게 증언하고 있다는 점을 들며, <백범일지> 자체의 신빙성에 결정적 의문을 제기하는 증거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백범이 치하포 사건 당시 공초를 받으며 소위 "좌통령" 직함에 대해 출처를 중국인으로 댄 것(일제의 기록)과, <백범일지>에서 스스로 술회하는 내용 사이의  현격한 차이를 들며, <백범일지> 집필 당시 그가 품었던 의도에 꿰어맞춘 조작 내지 은폐의 시도라는 주장을 저자는 하고 있습니다. <백범일지>를 여러 차례 읽고 큰 감동을 받았던 저로서는, 저자의 이런 분석과 지적이 실로 흥미롭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그토록 큰 신뢰와 존경으로 접해 왔던 텍스트가, 날카로운 분석 앞에서 모순과 약점을 노출하며 (그 일부라도)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언제나 당혹감과 비애를 유발할 수는 없습니다. 특정인에 대한 존경과 경모감보다, 더 중요한 건 진실 그 자체니까요.

저자는 백범일지에 대해, "이처럼 오류와 거짓, 허위로 가득한 기록을 두고 1차 사료로 평가하는 건 역사에 대한 모독"이라고까지 단정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을 말하자면, 모든 사료는, 크로스체크, 교차 검증을 거쳐야 합니다. 심지어 사마천의 <사기> 역시, 그 단독으로 진실의 보증이 있는 절대 무류의 기록은 아닙니다. 개인의 기록, 수기가 개인의 부정확한 기억에 의존(설사 메모가 있다 해도 말이죠)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며, 백범이 아니라 그 누구의 증언도 타 기록과 대조하여 그 진위를 평가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럽죠. <백범일지> 아니라 그 누구의 책에 대해서도, 저자분이  지금 이 책에서 이렇게 성실하고 치밀한 비판을 가하시는 것처럼, 한 톨의 의심도 남지 않게 철저한 검증이 이뤄져야 합니다.

오히려 저자분이 그 소중한 시간과 노력을, 오류 지적과 진실 규명에 쓰셨다는 자체가, 이 <백범일지>의 기록적 가치와 중요성을 (반대로) 입증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더불어, 제아무리 이 책이 중요한 의의를 지녔다 해도, 이 책을 두고 1차 사료로까지 평가하는 입장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로 압니다. 물론 백범기념사업회 같은 특수한 처지의 단체야 또 생각이 다르겠습니다만. 그저 평균적인 독자의 시선을 염두에 두고 쓰셨으면 될 것을 너무 과민한 스탠스를 잡으신 것 같습니다. 책은 특정 단체가 아니라 붙툭정 시민, 독자가 읽는 게 원칙인 데도요.

백 범의 상해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도 저자는 깊은 의문을 제기합니다. 일본에 항거한 흔적보다는, 그 죄상이나 평가가 애매한 같은 동포를 적으로 몰아 생명을 앗은 예가 더 많지 않느냐는 겁니다. 특히 어느 17세 소년을 두고 부역으로 몰아 사형을 집행한 건, 그 비인간성과 냉혹함에 전율이 느껴진다는 정도의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대의 관념으로, 눈감으면 코베어갈 살벌한 국제 도시 상해의 조계에서 나름 자기 사업(?)을 벌인 17세 소년이 과연 요즘 철없는 고등학생들과 같은 모습이었겠는가는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또한 기록이 워낙 미비하고, 별 물리력도 자금력 여유도 없는 임정이, 설사 절박하게 필요한 사정이 있어 집행한 조치를 두고, 그리 넉넉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부분은 보다 신중한 평가가 필요합니다. 이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결론이, "백범은 포악하고 사람 목숨을 우습게 여기는 월권 성향의 독재자"일까요? 그런 선입견을 가지고 보면 그렇게 파악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논거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 가장 뼈아프게 다가오는 부분은 이봉창 의사의 의거입니다. 비록 히로히토를 죽이는 일에는 실패했으나, 당시 아무도 감히 상상도 못하던 거사를 감행했기에, 내외적으로 끼친 충격은 엄청났습니다. 거의 한 세기가 지난 우리가 봐도, "아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고 생각이 드니 말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1) 이 일은 싷제로 백범이 주도한 것인지 다소 의문스럽다
2) 이 의사는 일제에 잡힌 후,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자신의 행동을 "어리석다"고까지 평가하고 있다.
3) 이 의사는 백범의 본명도 신분도 몰랐으며, "그리 학식이 높지 않고 뛰어난 인격자도 아닌 것 같았다. 그에게 속은 것 같아 분하다"고 진술한 기록이 남아 있다.
4) 이 의사가 의거에 실패한 이유는 폭탄이 불량품이었던 까닭이며, 이는 백범의 무능력을 보여 준다.
5) 이 의거는 사실 공산주의자 들의 지원이 상당 부분 작용했다

정도의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2) 3)을 과연 어디까지 믿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죠. 백범의 말에도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일제의 공식 기록은 글자 그대로 믿는다는 건 과연 어떨지요. 더군다나 이 의사는 고문과 취조로 극한 상황에 놓여 있었을 텐데, 그 중에 입에서 나오는 말이 과연 다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저자는 이상하게도, 고문 가능성은 거의 배제하고 있습니다(철저하게 "가정법"으로만 언급합니다). 또, 윤 의사는 의거 전후 시종 일관하여 백범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내고 있고, 임정에서 그를 따른 이들 중 해공 신익희라든가 장준하 같은 엘리트가 많았던 점도 기억해야 합니다. 한쪽만 보면 왜곡된 결론이 나올 수밖에요.

4)와 5)는 저자의 자가당착입니다. 만약 공산주의자들의 기여가 그만큼 컸다면, 불량품 폭탄 건은 백범의 무능이 아니라 공산주의자 탓입니다(책에 폭탄의 출처가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되어 있으며, 이조차도 확실한 건 아닙니다). 또한 설사 백범의 준비가 부실했다고 해도, 그가 가진 자금과 능력으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 아니었겠습니까? 돈이 있어야 폭탄 실험도 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윤의사 홍구 공원 의거에서는 엄청난 위력으로 요인이 대거 죽었다는 사실이, "두 번 같은 실수를 하지 않는" 백범의 능력을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백범의 학식이 높지 않다는 건 당대인들은 거의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남북 연석 회에서 "나는 배운 바도 없고,... "로 시작하는 그 어눌한 연설을 하는 모습이, 아직도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교육방송 다큐에서 자주 보여 주고, 아마 유튜브에도 찾아 보면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인들은 백범을 존경했고, 백범은 자신의 학력 부족을 굳이 숨기려 들지도 않았습니다. 인간의 위대함이 그 학력의 깊이에  있지 않다는 건 우리 모두가 다 압니다. 백범이 자신의 생을 통해 보여 준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우리가 그에게 더 이상 무엇을 요구하겠습니까? 무식한 인간이 자기 목소리만 빽빽 높이고, 말이 막히면 오히려 남을 두고 "저 자는 자기 주장만 한다"며 얼토당토않은 모함을 하는 게 못 배운 근성의 인간들입니다. 이런 게 문제지, 백범 같은 인격자에게는 아무 문제가 될 게 없습니다.

저는 이 책의 저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 책을 썼든 간에, 참 유익한 책이라는 생각을 그러나 하고 있습니다. 왜냐. 백범은 있는 그대로 위대한 분이지, 다른 윤색이나 가공이 필요 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식에 그간 거품이 있었다면, 그건 걷어내어져야 합니다. 왜냐면 백범은 그런 게 전혀 필요 없이도 그 자체로 위대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백범일지>에 허위나 오류가 있다고 해도, 저자의 주장대로 이광수가 제 한 몸 살아 남으려 과잉 충성을 하느라 저지른 잘못으로  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우익 진영에서 백범의 행적이 다 소거되면, 독립 운동의 치적이라고 내세울 건 거의 전무합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좌익의 업적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뿌리부터 무너지는 것 아닐까요? 백범이 쓰러지면 그 결과는 이처럼 중차대한 파장을 낳죠. 이 책을 두고 백범기념사업회에서 "그 의도가 불순하다"고 평가한 건, 혹시 이런 점을 지적하려는 것 아니었을까 저는 짐작합니다. 그러나 이 책은, 여튼 역사의 진실을 밝힌다는 점에서 좋은 책입니다. 이 책에 대해서는 너무 핳 말이 많고, 책 내용 토씨하나에까지 제 개인적 감상을 적을 수 있지만, 2권 리뷰로 미루겠습니다. 2권도 다 읽었기 때문에, 이 1권에 대한 리뷰 안에 총체적 평가를 담을 수 있었습니다. 2권은 1권과는 좀 성격이 다릅니다. 해방공간사를 저자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백범 뿐 아니라 다른 역사까지 자세히 고찰할 수 있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년 헤겔의 신학론집
게오르크 W.F. 헤겔 지음 / 인간사랑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칸트와 헤겔은 근대 독일, 나아가 유럽 철학의 토대를 확립함에 있어 큰 공헌을 세운 두 위인입니다. 두 사람의 뚜렷한 공통점이라면, 철학의 어느 한 분과에 한정하지 않고, 거의 모든 분야의 철학, 그리고 당대의 성취 수준 범위 안에서 자연과학, 역사학, 문학, 종교학 등 포괄적인 영역에 대해, 그 이전까지의 성과를 거의 망라하다시피하여, 후배 학자들에게 잘 정리된 형태로, 넘겨주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종합과 편집에 그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는커녕, 이 두 거인은 종전의 철학자들이 전혀 엄두를 내지 못하던 방식으로 사물과 현상을 보고, 비판하고,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기까지 했습니다. 위대한 종합 만으로도 그것은 큰 성과인데, 두 사람은 종합을 뛰어넘어 철학 전반에 새로운 지평을 제시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종합을 성취해 낸 이들은, 대체로 그 세계관이 보수적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바로 "종합"이라는 개념 속에 이미 그 (보수주의의) 단초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종합"이라면, 그것은 기성, 기존의 것들에 대한 종합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종합의 대가들은 대체로 conservative의 아성에서 그리 먼 발짝을 떼려 하지 않습니다. 아퀴나스의 성 토마스가 그런 인물이며, 심지어 적폐 타파의 상징과도 같았던 마르틴 루터마저도 그 학문상 방법론이나 정치적 노선의 특징은 극히 보수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거인, 칸트와 헤겔은 어떻습니까? 임마누엘 칸트는, 생애 단 한 번도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현 러시아령 칼리닌그라드)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고 하죠. 물론 자신의 고향에 진중히 은거했다고 해서 항상 보수적 기질을 지녀야 한다는 단정은 대단히 억지스럽지만, 칸트는 실제로도 그러한 성향의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유명한 어구를 보십시오. "네 자신의 의지의 격률이 항상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게 하라." 이런 도그마대로라면 아마 숨조차도 마음 놓고 못 쉴 것 같습니다. 실제로 저는 학부 시절 그의 <실천이성비판(삼성문화사판)>을 읽던 때에, 그 서문에서 자신을 후원한 모 주권자(soverign)에 바치는 그의 헌사를 읽고, (좋게 말해서) 그의 질서와 체제에 대한 강한 신뢰와 외경심을 감지할 수 있었고, (나쁘게 말해서) 그의 다소 비루하다 싶은 권력 추종 성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이런 말투와 형식은 당대의 관습이었다는 사실을 넉넉히 감안해도 그렇습니다).

 

반면 헤겔을 보죠. 이 사람이 남긴 무수한 명언 중에 "예술가는 군주의 기상을 가져야 한다."는 게 있습니다. 물론 제 분수도 모르고 날뛰라는 게 아니라, 군주의 처지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현실에 굴하지 않고, 오로지 예술혼을 불사르며 불멸의 미학적 성취를 남기라는 그의 당부가 주된 취지였겠지만, 그렇다손 쳐도 함부로 군주를 거론했다는 자체가 그리 예사롭지만은 않은 분위기를 풍깁니다.

 

또한, 헤겔의 연구에 있어서는, (이 책 역자 정대성 교수님도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청년 헤겔"이라는 분과가 따로 있을 정도입니다. 노년 원숙기에 이르러 헤겔은 그 엄청난 폭과 깊이를 자랑하며 후세 독자와 연구자들에게 극악의(?) 하중을 안기고 떠났지만, 반면 38세가량까지의 청년기(이 시절이라면 더군다나 38세라는 나이가 "청년" 범주에 들기 어려워겠습니다만, 헤겔의 그 아득한 사상 반경을 감안한다면 진정 자연스럽습니다. 시점을 20세로 잡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겠습니다)까지의 헤겔이라면. 그 진취성과 대담함, 기존의 사유 체계와 그를 둘러싼 현실의 낙후성에 대한 비판이 워낙에 강경한 모습이라, 그를 피상적으로 알던 이들을 당혹하게 만듭니다. 최소한 "청년 해겔"은 누구 못지 않은, 강경 좌파였던 셈입니다!

 

본디 프랑스에서도 그러했듯, 기독교(특히 구교)는, 계몽주의의 대두 무렵에서는, 사회 발전을 가로막고 온갖 구폐와 기득권을 대변하는 사회의 公敵 비슷하게 치부되어 왔습니다. 우리가 놀라는 건, 헤겔 역시 기독교에 대해 일반의 상식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으로 신랄한 비판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두고입니다. 헤겔은 기독교의 구, 신 을 가리지 않고, 민중의 자발적 개과천선과 자유에의 희구를 철저히 가로막는 장벽 구실을 하고 있다면서, 새로운 오성과 자유의지를 자극하는 종교의 탄생을 강력히 열망하고, 그에 대한 試論까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자칫하다가는 사이비 종교 창시자(?)로 오해 받을 지경입니다. 물론 이성과 오성에 대한 철저한 숭배자인 그가, "묻지마"와 "막무가내", "거짓과 허위 선전"으로 대표되는 사이비 세력과 엮을 가능성은 전무합니다만 말입니다.

 

이 책 제목은 <신학론집>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실제로 헤겔이 생전에(혹은 사후에라도) 이런 제하의 단일 저서를 출판한 건 아닙니다. 역자 정대성 교수님이, 헤겔의 저작 중 그의 의도에 맞는 여러 저술을 추려 이렇게 모양 좋은 한 권으로 번역해 낸 것입니다. 엄밀하게는 "신학"의 주제에서 다소 벗어나는 것도 있고, :"논문"이라기보다는 중수필에 가까워 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청년 헤겔" 나아가 "인간 헤겔"을 이해하는 데에, 지금까지 미처 보지 못했던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는 문헌들이라서, 독자는 잠시 충격을 받고 생각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진정 헤겔의 글이었단 말인가?"

 

마르크스, 아니 그 이전의 유물론 전통이, 헤겔을 깊은 사상의 호수로 하여 태동하게 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변증법"을 빼면 대체 무엇이 남을까요? 헤겔의 適子는 우파 체제 옹호론자일지 모르지만, 설사 마르크스를 사생아로 분류한들 이 사나운 자식을 빼면 그 가계의 족보가 심심해지는 것도 분명 사실입니다. 확실한 것은, 마르크스야말로 이런 아버지의 씨가 아니었다면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여태 아들을 보고 그 범상치 않은 기질에 놀라곤 했지만. 이제 그 아비의 젊은 시절을 보니 "씨도둑질은 못한다."는 우리 속담의 타당성을 되씹게도 됩니다.

 

칸트는 저 먼 동방의 벽지, (그 당시에도)거의 러시아에 가까운 고장에서 평생을 보내고, 게르만 겨레가 일군 나라 중에 가장 보수적이었던 프로이센의 신민으로 생을 마친 사람입니다. 반면 헤겔은 그때나 지금이나 게르만 종족의 거주지 중 가장 서편에 치우친, 프랑스와 등을 대다시피한 뷔르템베르크 공국 출신이고, 상당 기간을 타지 유람으로 보낸 이력이 있습니다. 종합의 거장이자 초인적 두뇌의 소유자인 두 사람이지만, 이처럼이나 남긴 업적의 성향이 차이남은 반드시 그들이 각각 산 시대의 격차에만 기인하는 건 아닐 것입니다.

역자 정대성 교수님의 해제가 일품입니다. 번역도 유려하지만, 과연 이처럼이나 명쾌한 헤제가 아니었다면 헤겔과의 대화가 가능했을까 하는 회의가 듭니다. 됵일 본토에서 정통 코스로 박사를 따신 분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감탄, 이 서평에 덧붙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