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널 MBA - 비즈니스 성공의 불변법칙, 경영의 멘탈모델을 배운다!
조쉬 카우프만 지음, 이상호.박상진 옮김 / 진성북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법학이니 의학이니 하는 건 제대로 된 교수진과 빼어난 시설에서 배워야만 훌륭한 인력이 양성될 수 있죠. 하지만 경영학도 과연 그럴까요? 명문대에 설치된 소위 "최고경영자 과정"을 보면, 어떤 교육이나 연구가 이뤄진다기보다는 사교(social)나 인맥 형성이 주된 목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경영학이란 샤프한 두뇌가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학문 대상은 아니라고 봅니다. 경영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빼어난 창업자나 CEO가 되는 건 아닙니다. 역대 미국 대통령은 거의 대부분이 법률가 출신인데, 오직 조지 W 부시만은 MBA가 최종 학위죠. 한국에서는 MBA에 대한 상당한 거품이 형성되어 있어 이 이름에서 괜한 선망과 권위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본토에서의 평판은 별 것 없습니다, 한국인들 중 학력 콤플렉스가 강한 이들의 공연한 호들갑이 빚은 해롭고 비생산적인 거품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퍼스널 LAWYER"라든가, "퍼스널 닥터"라는 책이 그것도 한 권 분량으로 나온다면, 그것은 식자층의 비웃음을 사기에나 딱 좋을 것입니다. 한 권으로는 죽어도 마스터할 수 없는 게 그 코스들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퍼스널 MBA"라면, 이것은 잘만 편집하면, 스타트업, 기업 실무자 등이 두루 참고할 수 있는 좋은 핸드북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경영학이라는 게 본디 심오한 학문이 아니라는 점, 사업에서 정말 성공하고 싶다면 굳이 경영학을 배울 필요가 없다는 점, 두 가지 이유에서 타당합니다.

 

이 책은 한 권 분량으로는 상당히 두꺼운 편이지만, 경영학이 커버하는 영역이 매우 방대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독자들로선 불평을 가지기보단 "이 한 권으로서 퍼스널하게나마 뭔가를 뗄 수 있구나."하는 안도의 마음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내용은 총 11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장의 제목은 "가치 창조"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업가, 기업의 소명은 무엇인가. 단 한 마디로 요약하면 "수익의 창출"이지만, 그 수익이란 타인에게 모종의 가치를 제공해야 창출이 가능합니다. 말하자면 이 챕터는 경영학의 본질과 기업의 존재 이유를 설명해 주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장 "가치 전달"의 내용은, 1장 가치 창조와 함께 설명되기 쉽습니다. 다만 2장 마케팅, 3장 영업 의 뒤에 배치된 건, 비즈니스의 실제 활동이 이뤄지는 순으로 고찰하다 보니 그리 되었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사실, 현장에서 갈고 닦은 감, 소위 "촉"을 자랑하는 이들에게는, 이런 "가르침"이 별반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도 어느 자리에서 보다 고상한 표현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필요가 있을 때는, 이런 교과서에서 다루는 용어를 사용해야만 할 것입니다. 현장에서 이를 실적을 젊은 나이에 다 이룬 이들에게도, 이런 부분이 부족해서 언제나 높은 이들과의 만남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5장은 재무와 회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이런 부분이 가장 난감합니다. 나름 이쪽에 적성이 있어서 그리 큰 힘 들이지 않고 테크닉을 일찍 깨친 입장에선, "알고 보면 별것도 아니다" 같은 말이 가능하고, 따라서 그 방대한 지식이 한 권도 아닌 한 권의 한 챕터(채 100페이지도 되지 않습니다)로 마무리된 모습을 봐도, "그럴 수도 있겠거니" 넘깁니다. 하지만 고생고생해서 회계학을 배운 이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주면, 바로 코웃음을 치거나, 심지어 분노에 가까운 태도를 보입니다(과민반응에 불과합니다).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은, 이 책이 한 챕터 분량으로 처리하고 말면 본래 그런 것인가 보다 하며 장님 코끼리 더듬는 반응, 저자의 권위에 무비판적으로 기대는 태도를 보입니다. 아슬아슬하죠.

 

제가 느낀 점은, "최고 경영자인데, 회계에 대해 샅샅이 알 필요까지는 없고, 실무자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감독은 가능한 정도의 개념 잡기"까지만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시중에 나온 스타트업 참고 서적을 보면, 제법 상세한 회계 실무 지식을 가르치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분량의 한계가 있는지라, 그 책만 봐서는 기법을 마스터하기 어렵습니다. 분명한 건, 당신이 만약 누군가의 밑에서 회계-재무 실무를 담당하는 위치라면, 이 책 한 권(의 챕터 하나)으로 "퍼스널"하게 때우려는 기대는 절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솔직한 말로, 여기 실린 내용은 정말로 "회계와 재무의 개념이 무엇인지" 정도까지만 배울 수 있는 수준입니다.

 

인사관리 이론의 테마와 관련하여 비교적 무난하게 읽읗 수 있는 포맷으로 6, 7, 8과가 이어집니다. 아마 이 파트를 읽으신 분 중 좀 정직한 분이라면, "웬 자기관리 레퍼토리?"하는 의문이 들만도 합니다. 사실 엄밀히 말해, 이 세 챕터는 자기관리 서적에서 줄창 다루는 오랜 소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지적되듯, 같은 물을 마셔도 "암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며, 독사가 마시면.... "인 법입니다. 규모가 착건 크건 경영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다지는 데에, 아무리 뻔한 소리라도 그게 뻔한 소리로만은 다가오지 않게 마련이죠.

 

9, 10, 11과는 조직론, 생산관리 테마입니다. 사실 이 영역은, 각론에 너무 치중하면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오류에 빠지기 십상인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최소한 저는요). 이 조쉬 카우프만이라는 저자에 대해 저는 처음 들어 봤습니다만, 이 마지막 3 챕터를 읽는 것만으로도 독서의 보람이 있다 할 만했어요. 누구나 다 하는 이야기를 해도, 그 강조의 포인트가 다르고 쌓인 내공의 깊이가 다르면, 듣는 청중의 감동도 달라지게 마련이며, 독자의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저자는 MBA 학위가 없는 분이지만(사실 MBA 코스에서 가르치는 것도 별로 없습니다. 지금 귀국해서 아까운 학위 썩히며 놀고 있는 이가 한둘이 아니죠. 그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자신만의 깨우침, 귀한 각성을 책 한 권에 녹여 놓고 있기에, "그 요약하는 방식이 예사 내공이 아니다" 하는 생각이 읽으면서 계속 들더군요. 이 책의 효용은, "경영에서 진정한 배움은 책 한 권으로도 가능하며, 과시용, 세탁용 학위가 꼭 필요한 게 아니다"는 점을 가르쳐 주는 데에도 있습니다. 책 한 권이 (퍼스널이라는 수식어를 달고는 있으나) 엠비에이 전 코스 대체를 자처할 정도면, 그 허울 좋은 MBA라는 것에 대해서도 대략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p431 맨 처음에 헨리 포드의 말이 인용됩니다. "내가 일손을 원할 때 왜 머리 좋은 놈이 항상 따라붙는 것일까?"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 되실까요? 이 말의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Why is it every time I ask for a pair of hands, they come with a brain attached?
이 말의 뜻은
"나는 그저 손 두 개만 원했는데(단순 반복 노동력), 왜 맨날 그 손에 머리가 딸려 오는 거지?" 입니다. 포드 같은 구시대적 CEO는, 노동자는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고용주가 시키는 일만 하기를 원합니다. 책의 이 부분은, 단순 반복형 노동을 시키는 데에도, 그게 기계가 아닌 사람인 이상 소정의 목표를 달성하게 만들기란 그만큼 어려움을 뜻합니다. 물론 이는 지극히 반 휴머니즘적 발상이지만, 지금 여기는 경영학 논의의 장이니 잠시 사회학적 시선은 접어 두고 하는 말입니다.

W. Edwards Deming의 말이 인용되고 있는데, 이 이름이 잘못 적혀져 있습니다. Deming이 옳으며, Edming이라고 적힌 이 책의 표기는 틀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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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사랑 - 순수함을 열망한 문학적 천재의 이면
베르벨 레츠 지음, 김이섭 옮김 / 자음과모음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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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같은 대중 사회에서는 생각하기 힘들지만, 20세기 초엽만 해도 세상은 귀족, 상류층, 자산가 계층의 호흡과 관심사 위주로 돌아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구조에서는, 문인들, 그리고 고급 기예를 몸에 익힌 예술인들이, 오늘날 우리들이 사는 대중 사회에서 연예인들이 누리던 위치를 대신하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헤세의 여성 편력도 그런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눈에 띄게 드러나지만 않을 뿐 자의식 강한 문인들이 한 반려자를 그리 오래 곁에 두지 않는 경향은 오늘날이라고 해서 특히 달라진 게 아닙니다. 이는 바람기라든가, 성실성의 결핍 등과는 또 다른 정신적 특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게다가 헤세는 "배고픈 시기를 오래 거친 후" 비로소 세간의 관심을 받은 경우가 아니라, 일찌감치, 스타 연예인처럼 문단과 독서인의 주목을 끈, 젊은 나이(20대 중반)에 데뷔한 케이스였습니다. 그를 괴롭힌 건 물질적 곤궁이 아니라, 내면에서 휘몰아치던 격정과 불안, 균형의 파괴 같은 것 뿐이었습니다.

 

그가 언제나 갈구했던 건, 따라서 (이 책에도 잘 나와 있듯) 아늑한 자궁과도 같은 여인의 진정어린 배려였습니다. 또한, 문인의 숙명으로 타고 난 노스탤지어의 추구를 도와 줄 영감의 제공이었습니다. 우리 평범한 이들에게는 불가능한 소명이요, 필멸의 존재인 인간의 외피를 하고 태어난 이상 그 성취는 영원히 불가능할 이같은 미션을 그는 영혼 한켠에 자신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지닐 수밖에 없었던 듯합니다., 따라서 그는 요즘 용어로는 "리셋 증후군" 같은 고약한 근성을, 스스로 지녔던 도덕 관념(그가 적잖게 의존했던 프로이트식 프레임으로는 "슈퍼에고"라 할 만한)이 지독히도 혐오했을 만큼, 자신의 연약하고 선병질적인(막내 동생 뿐 아니라 이런 성향은 그 자신 역시 부친으로부터 고스란히 물려 받았습니다) 정신의 한 특성으로 내내 유지했던 것이겠습니다.

 

연예인이라면 우리 평범한 대중의 시선 앞에 무시로 노출되는 게 그들의 비즈니스입니다. 따라서 세련된 행동과 외양의 꾸밈에 그들은 자신의 모든 자원을 투입합니다. 그러나 그 시절, 헤세 같은 문인의 경우(연주자나 작곡가, 화가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부르주아지가 몸소 나서지 못하는 영적 여행의 대행을 그들 셀러브리티는 제 일생을 걸고 해 내어야만 했겠죠. 특히 헤세처럼 가풍 자체에서 유래한 고립자적 기질을 물려 받은 이는, 행동거지나 말투, 처신의 면에서 "은둔자적 개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게 누구의 눈에도 뚜렷해 보였겠습니다. 오늘날의 연예인과는 이 점에서, 외견상 도무지 양립할 수 없는 특징을 가졌다고도 하겠습니다.

 

20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성공적인 데뷔를 이룬 그 가능성과, 샘솟듯 표현되는 영감과 상상력을 지녔던 청년은, 그 쟁쟁한 베르누이 가문 안에서, 아마도 "재능 콤플렉스"에 내내 시달렸을 만한 여성, 더군다나 전성기를 막 지나려고 하는 노처녀에게 큰 매력을 지닌 남성으로 느껴졌을 만합니다.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나 신분적 우월감이 아니었다 해도, 베르누이 씨는 이 괴퍅하고 매력 없는 외모를 한 청년을 제 가문의 일원으로 쉬이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만합니다. 저자의 말처럼 그 정신적 지향이 각각 향하던 "과학과 종교 사이의 심연"을 극복하기 난감해서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여성으로부터 필요한 자양분만 취하고 냉혹하게 버리기를 반복한 이기적인 남성상은, 우리가 위인이라고 본 여러 서양인들에게서 아주 드물게 보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중에는, 극단적 페미니스트 관점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과정에서 빚어진 터무니없는 사실 왜곡도 적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부인 밀레바를 이용만 하고 그녀 곁을 떠난 아인슈타인" 같은, 논거와 개연성을 결여한 "악의적 신화"가 그것입니다. 비단 비뚤어진 세계관을 지닌 일부 여성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잘난 수컷"을 애써 폄하하려 하는 일부 낙오자형 남성 사이에서도 이는 인기 있는 레퍼토리이자 과장된 피해의식, 공정하지 못한 비열하고 미숙한 이중잣대입니다. 둘 다 겉으로야 비슷한 품의 "성장 거부 몸짓"으로 보이지만, 헤세의 경우와는 달리 후자의 경우 자기 합리화와 타자에 대한강박적 폄하로 점철되어 있다는 점에서 극과 극의 대조를 보입니다.

 

이기심과 약탈자적 근성이기는커녕, 헤세가 남긴 흔적을 보면 오히려 그가 살았던 시대의 질곡이 그대로 반영되는 것도 있습니다. 아무리 이질적인 배경을 지녔다고 는 하나, 그 역시 게르만 족속의 일원이었기에, 특히 니논 돌빈과의 관계는 일종의 대속자적 행로라는 느낌마저 줍니다. 단 한 명의 여인마저 넉넉히 곁에 둘 능력이 없는 이들의 눈에 엽색 행각으로 비칠 수 있는 이 같은 그의 갈짓자 걸음은, 알고 보면 그러나 제 영혼의 순수성을 지키고 사명감을 고결한 형태로 간직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던 셈입니다.

 

어리석은 속물주의를 끊임 없이 경계하고 경멸하는 그의 목소리는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세계를 바꿔 보려고 애쓰던 그 미친 광대 같은 독재자들이 급작스럽게 몰락한 후, 이제 대중은 관심조차 주지 않고 있다." 파시즘의 특성은 대중의 광기를 기반으로 탄생하고, 그 대중이 광기를 각성한 후 포말처럼 사라지는 게 있음을 그는 간파했던 것입니다. 그가 개탄했던 건 차라리 "두루미의 도래를 갈구했던 개구리떼의 어리석음"이었습니다. 히틀러가 한 줌의 재로 화하고 무솔리니가 제 정부들과 창틀에 거꾸로 매달려 치욕스러운 죽음을 한 후, 어제 그에게 열광을 보냈던 대중은 오늘 격렬한 책임전가로 여념이 없거나, 파렴치한 무관심을 가장합니다. 무고한 희생자들만 여전한 궁지에 몰려 있을 뿐.

 

헤세에게 있어 여성은 "재생"의 원천이었습니다. 그가 가장 감당할 수 없었던 건 영혼의 타락이었습니다. 게르만인이었음에도 그의 정신 깊은 곳에서는 라틴적, 가톨릭적 "성모 마리아"를 간절히, 끊임 없이 원했으며, <데미안>의 싱클레어는 이런 그의 자아 한 면을 선명히 대변하는 아바타였습니다. 그는 타락한 대중으로부터의 오염이라는 공포에 일생 내내 시달렸고, 그가 이를 피해 "은둔"하려 했던 곳은 어머니의 자궁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그 나름으로 수행했던 "사랑"이요 일반인의 눈으로 기이하게 보였던 "애정 편력"이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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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옥과 함께하는 클래식 산책 - 영혼을 울리는 클래식 명작, 그 탄생의 비하인드 스토리
최영옥 지음 / 다연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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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말하기를, 서양인들이 빚어 낸 가장 멋진 발명품이 바로 그들의 고전음악이라고 합니다. "정격(正格)"이란 의미에서의 고전, 클래식은 특정 문화권의 전유물이 아니므로, 우리에게도 우리 나름의 "고전 음악"은 어엿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속물 근성이나 사대주의의 발로가 아닌, 솔직하고 냉철한 접근을 통해서도 저들의 음악에는 뭔가 모호함을 걷어낸, "논리"와 정교함, 명징한 의식의 계획적 활약 같은 요소가, 우리 동양의 음악보다 더 많이 개입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음악 뿐 아니라 저들의 모든 문화가 그러하지만, 그것을 만든 이에게 정당한 크레딧을 부여해 주는, 건전하고 깔끔한 개인주의 문화가 위대한 성취를 조장하는 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무엇을 한다 한들, 그 공이 어느 위대한 분(군주나 세력가)의 몫으로 돌려진다면, 기술적인 의욕이 생기지도 않을 뿐더러, "예술 자체를 위한 예술"이란 숭고한 내적 동기가 십분 발휘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윗분 마음에 드는 선에서 적당히 하고 그만두는 분위기와, "내 작품은 위로는 신(神)이 보고, 아래로는 후대인이 두고두고 가치를 평가할 것이다" 같은 생각을 언제나 염두에 두는 예술가 중, 누가 더 완성도 높은 작품을 남길 수 있을까요.

 

이 책에 소개된 32편의 이야기들은, 모두 뚜렷한 주인공이 있습니다. 그것이 개별 작품이건, 작곡가이건, 연주자이건, 대지휘자이건, 재능 있는 개인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그들의 역사부터가 개인 중심으로 무슨 스토리건 짜여지게 아예 판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반면, 종묘제례악은 누가 작곡했는지 모릅니다. 수백 년 간 개량을 거듭해 오다 오늘의 모습을 갖춘 것이라 해도, 최초에 틀을 만든 이가 있을 테고, 완성된 꼴을 갖추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이가 분명 있었을 텐데, 왕실의 존엄과 엄숙한 공맹의 도를 강조해 왔을 뿐, 악곡을 빚은 개인의 공은 간 데가 없습니다. 이런 풍토에서 예술 뿐 아니라 학문으로서 체계를 갖춘 과학 따위가 발전을 할 여지가 적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서양 고전 음악은 그 완성도도 완성도지만, 저자분 같은 이가 이처럼 재미있는 책 한 권을 엮어 낼 수 있을 만큼(이 아니라 그 훨씬 이상이죠), 개인과 작품에 얽힌 사연이 무궁무진 이어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로서 우리는 눈으로 보는 음표와 귀에 익은 선율 뒤에 숨은, 인간과 인간의 사연, 감정과 의지의 충돌 등을, 시공을 초월하여 불멸의 독립적 자태로 남은 그 음악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모른다고 해도 작품의 가치가 감소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지만(어려서부터 자주 접하고 많이 듣는 게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런 지식을 알고 곡(작품)을 들으면(감상하면) 서양 고전 음악에 평소 낯섦을 느껴 오던 이도 이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음악의 어머니라 불리는 "헨델"이지만, 정말 그를 여성으로 착각한 사람이 있을까요? 저자분의 말씀에 의하면 엄청 많다고 합니다. 여성이 음악 창작에 종사할 수 없었던 그 오랜 차별적 풍토를 생각하면, 오히려 그런 착각을 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여튼 저는 처음부터 이 <Lascia ch'io pianga>를 그리 좋아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영화 <파리넬리>의 그 분칠한 천박함의 분위기와 어우러진 모습으로 감상한 후에는 더욱 멀리하게 된 곡입니다. 당시에 영화 제작진 측에서 "최첨단 과학으로 빚어낸 당대 카스트라토 음색의 완벽한 재현"이라고 요란하게 선전해 대었지만, 저자 최영옥 씨는 이에 대해선 "두 성악가(카운터테너와 소프라노)의 목소리를 디지털로 합성"한 것 정도로 담백하게 서술하는 데 그치고 있습니다. (저자 추천의) 유니버설에서 낸 두 음반 중의 해당 작품 연주는 누구에게도 권할 수 있을 것 같긴 합니다.

 

전 예전에 저 제목에서 ch'io 같은 낯선 단어가 끼어 있길래, 이게 대체 어느 나라 말인가, 이태리 어디 방언이기라도 한가 궁금해했었습니다. 이게 che io의 단축형입니다. io는 영어의 me겠구요. 이런 간투사가 붙으면 뉘앙스가 더 간곡해지고 더 우아한 시적 분위기를 자아내겠지요.

 

저자는 프란츠 리스트에 대해 1장과 2장 두 꼭지에 걸쳐 다루고 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아마 어느 전문가라도 할 말이 많을 것입니다. 이 사람의 생애를 다룬 영화도 있는데, 1960년작 미국 영화 <Song Without End>가 그것입니다. 리스트 역은 더그 보가트가 맡고 있는데, 그가 <베니스의 죽음>에서 (사실상) 구스타브 말러 역을 맡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꽤나 재미있는 대목입니다. 언제나처럼 그의 연기는 최고입니다. 제목이 "나치에 유린된 참혹의 선율"인 이 장에서 저자가 추천한 음원 중 상위권 두 개가 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의 그것입니다.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숭어"나 "송어"냐의 문제는 제기된 지 상당히 오래되었고, 정답도 일찌감치 나왔었습니다. 다만, 슈베르트의 시대라면, 오스트리아는 내륙국이 아니었죠. 합스부르크 황실은, (이 책 중 다른 장, <나부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파트에서 잠시 설명하는 것처럼) 왕년의 유럽 열강 베네치아를 조공국으로 거느린 대제국의 주인이었습니다. 펄떡거리는 숭어를 굳이 구경하고 싶다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텝니다. 그렇든 아니든 답이 "송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겠습니다만. 이 문제는 "왜 송어인 줄을 모르냐?"라기보다는, "틀린 줄 알면서도 다들 왜 아직까지 안 고치고 있는가?" 때문에 심각함을 더하는 이슈입니다.

 

<오 솔레 미오>는 제목부터가 시칠리아 방언이라는 설명은 많은 이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줄 것입니다. 시칠리아는 사실 초기 역사에 그리스 식민지였기 때문에, 그 방언의 형성 과정에서 그리스어의 영향을 받았지요. rough breathing의 o가 그리스어에서는 ho에 가까운 발음이지만, 어두의 h가 탈락하며 남성형 주격 단수 정관사가 현재의 모습으로 굳었을 것입니다. 저자는 "일 미오 솔레"가 표준 이탈리아어라고 하시지만, 어순은 두 다이어렉트가 서로 큰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일 솔레 미오"가 무난합니다.

 

서양 고전 음악을 다룬 책이지만, 한국인의 기여에 대해서도 적지만은 않은 비중이 주어지고 있네요. 신예 성악가 새뮤얼 윤(윤태현씨)는 두 장에 걸쳐 등장하고, 저자는 그의 기량과 장래성에 대해 상당히 높은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명태>, <사월의 노래>, <보리밭>, <향수> 등의 네 곡에 대해선 독립된 장을 할애하여, 저자의 애정이 듬뿍 담긴 설명으로 독자의 가슴에 와 닿게 합니다. 나탈리 드세이(이름 철자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유익했습니다. 전 몰랐던 내용인지라)가 프랑스 현지에서 "조수미의 라이벌"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니 뿌듯하기도 했구요.

오타가 좀 자주 보이는 것 말고는 재미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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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므랑 이영민
배상국 지음 / 도모북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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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여쪽의 분량입니다. 옆에서 딱 놓고 봐도, 학부 과정 교과서 정도나 되는 듯 두껍습니다. 활자 크기가 작은데도 이 정도 두께이니, 어느 기준에서도 장편 소설이겠습니다. 실존 인물이기도 하고(그 정도가 아니라, 당대, 즉 일제 강점기를 사신 분들께는 "어떻게 그 이름을 모를 수가 있나." 하실 만큼 유명인사였겠습니다만), 이 소설의 주인공인 故 이영민 선생이 워낙에 거한이기도 했기에, 그분을 다룬 소설이니 책이 이 정도 볼륨은 되어 줘야 하지 않겠나 싶기도 하더군요.

 

실제로 이런 소설이 흔히 그런 모습을 보이듯이,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기만을 집중 조명하고 느닷 끝나는 구성이 아니었습니다. 탄생과 성장기가 비교적 간략하게 처리되었을 뿐, 중노년에 접어들어 야구 협회 부회장을 맡아 일하던 중 불미스러운 사고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는 그 시점까지, 위인이자 호걸,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이영민의 전(全) 생애를 다루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야구를 보아 왔고, 열혈 야구팬이 보통 그러하듯 각종 통계(흔히 "스탯"이라 말하는)를 다 챙겨 가면서 보아 온 편이었습니다. 지금도 누가 물어 보면, 프로야구 출범 이래 몇몇 슈퍼스타들에 대해서는 그 자리에서 특정 연도의 스탯을 댈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수치까지는 몰라도, 프로에서 주전으로 뛴 웬만한 선수들에 대해서는, 대략 몇 년도가 커리어 하이였고, 통산 성적 기준으로 역대 몇 위 정도라는 건 맞힐 수준이 됩니다.

 

야구가 팀 스포츠이긴 하지만, 개개인을 대상으로 다차원 통계 분석을 할 수 있는 극히 드문 팀 스포츠이기에, 스탯에 밝은 건 바로 야구에 대한 정열을 가늠하는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탯 뿐 아니라, 누가 몇 년도에 시즌 MVP였으며, 골든 글러브 수상자였다는 등의 "경력"에 대해서도 (박식 경쟁이 붙다 보면) 아는 게 보통입니다.

 

그런데, 이 이영민 선생에 대해서는, "젊은 타격 유망주에게 주는 영예로운, 그리고 역사가 오래된 어떤 상에 그 함자를 딴 분"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뿐이지, 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 그가 식민지 조선에서 절대적인 지명도와 인기를 누리던 민족 스포츠 영웅이라는 점조차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요즘 같이 정보가 흔한 세상에선, 간단한 검색 몇 번으로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도, 굳이 찾아 보려는 수고를 하지 않은 건, 아마 "그리 자랑스럽지 않은 역사의 장에서, 설사 그 중에서 특출했다 한들 별반 매력이 느껴지지 않을 법한 인물"에 대한 흥미가, 크게 동하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지 싶습니다.

 

장태영 선생, 남우식 선생 같은, 지난 시대의 레전드들은, 지역 명문고에 (공부 실력으로)입학할 정도로 수재였던 데다, 당대의 그라운드를 평정한 발군의 야구 기량까지 만인 앞에 증명해 보인, 요즘 시대에도 보기 힘든 불세출의 인재였습니다. 하지만 왠지, 우리 시대와 너무 멀리 떨어진 분들에 대해서는, 스포츠 스타로서의 친밀감이 느껴지지 않고, 스포츠 저변 확대가 불비했던 시절 고만고만한 실력으로 뜬 것 아니냐는, 아주 못된 생각마저 살짝 들었던 게 사실이었습니다. 이영민 선생에 대해서도, 막연하나마 저분들 연배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이영민 선생이 어느 정도 까마득하니 예전 분인가 하면, 제가 앞에서 열거한 저 두 분 대원로의, 아버지 뻘입니다. 남 선생 같은 분은 근년까지 대구 경북 지역에서, 대기업의 중역으로 한창 활동하시다 은퇴하신 상태죠. 이런 분들에게 연배상으로 거의 부친 세대일 뿐 아니라, 이분들이 야구에의 꿈을 키우고 성장하기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까지 했으니, 야구팬으로 이영민 선생에 대해 몰랐다는 게 부끄러울 뿐 아니라, 왠지 죄책감까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엄복동의 자전거, 안창남의 비행기" 이는 일제 시대 어린이, 혹은 일반 민중의 노랫가락으로도 익숙할 만큼 유명한 구절입니다. 이런 스포츠 영웅의 대열에, 이 이영민 선생은 결코 빠질 수 없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분입니다. 사실 다른 분들과 달리, 선생의 함자가 다소 "모던"한 이유 때문에, 그 정도로 옛날 분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개인적) 이유도 있습니다(한자로는 榮敏이라고 쓰십니다. 이름과 그 실물의 생애가 서로 참 잘 어울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모던"한 함자를 지닌 이 선생은, 그 이름으로부터 출신 성분의 짐작이 가능하다 할 만큼, 대구 경북 일대 큰 갑부, 대지주의 자제로 태어났습니다. 아주 어려서는 공부도 잘했던 덕에, 부친은 아들이 공부로 대성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영민의 재능은 공부보다는 운동 쪽이었고, 야구를 비롯, 축구, 육상, 복싱 등 못하는 게 없었습니다. 이 집안이, 그 본심은 어떻든 간에 자제들이 어른의 말에 잘 순종하지 않는 불운한 내력이라도 있는 탓인지(농담이 아니라, 이는 중대한 복선이 됩니다. 스포일러라서 더 이상은 말 못 하지만요), 영민은 중학생 시절 부친과 큰 불화를 겪고 지원을 중단 받습니다.

 

소설에서는 이 시절에 대해, 김윤희라는 이름의, 소작농의 딸과 소년 영민이 정분이 난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영민의 부친은 노발대발했고, 윤희의 아비를 불러 물고를 내고 소작 부쳐 주던 땅을 다 빼앗았다고 합니다(이 부분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소설의 설정이 그렇습니다). 소설에서는 "영민은 뒤늦게서야 이 사실을 알고, 수습에 나섰"다고 하지만, 성년에도 못 이른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겠죠. 근데 사실이라면, 영민의 부친은 대단한 비위를 저지른 게 사실입니다. 또, 윤희가 비록 영민 오빠의 사정을 잘 이해할 만큼 철이 든 소녀였다고는 하나, 자신의 아버지와 집안이 풍비박산나다시피한 이 사건을 겪고 얼마나 마음에 상처가 컸겠습니까?

 

소설은 제법 절묘하게, 이것을 훗날 광주학생운동을 기점으로, 김윤희가 본격 민족 해방 투쟁에 나서고, 동시에 좌경 사상을 갖게 되어 해방 후 월북까지 한다는 식으로 인물의 행적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영민의 마음 속에 아주 뿌리깊은 죄의식까지 심어 주어, 그에게 완벽한 배필(외모, 지성, 같은 스포츠 선수라는 배경, 어마어마한 재력가 집안 등 모든 조건이 부합)이었던 이보패와, 끝까지 화합을 이루지 못한 동인이 되기도 합니다. 제가 처음에 책장을 넘길 때는 소설의 뽄새가 (솔직히) 좀 허술해 보였는데, 읽어갈수록 빠져 드는 게 이런 의외의 치밀한 구성 덕이었습니다(물론 이마저도, 왠지 어렸을 적 읽던 스포츠 만화책에서 흔히 접하던 패턴이라고 누가 말하면, 별로 대꾸해 줄 말이 없긴 합니다만).

 

제가 좀 이해가 안 된 건.... 김윤희가 바로 일경에 적발되어 구타 등 모진 고문까지 당하고 난 후라면, 3년 형을 살고 나온 후 대구에서 소학교 교사로 근무한다는 건 불가능하지 않냐는 의문이었습니다(전과자, 더군다나 "후데이센진"이 교원이 될 수 있을까요?). 소설에서는 백기주와 이영민, 김윤희 3자 간의 관계도 다루고 있고, 고향인 대구로 돌아 온 백기주와 영민의 조우가 이런 에피소드를 빚어야 이야기가 풀렸겠다 하는 정도로 넘어갔지만요.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는, 아무래도 비열한 성격에다가 사사건건 영민의 진로를 훼방 놓던 마쓰모토를, 인격적으로도 한 수 위였던(과연?) 이영민이 "인간 말종 하나 사람 만들어 놓는 장면" 아닐까 싶습니다. 역시 구체적인 건 스포일러이므로 말 못 하구요. 알고 보니 이 마쓰모토란 녀석, 그런 사연이 있었더군요! 어려서부터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우리의 영민 사마와 비교가 될 수 없죠! 마쓰모토 역시, 머리 돌아가는 수준에서나 현실의 권력에서나 단지 먹은 나이에서나 비교가 되지 않는 스즈키 상의 졸(卒)에 불과했습니다만, 이 가공할 악마 스즈키조차(그는 요미우리 신문 사주의 하수인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호프 이영민 선생의 그 순일한 투혼(일본 애들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단어 "투혼"!)이라든가 인격적 깊이라든가 모든 면에서 결국 무릎을 꿇고 맙니다.

 

저는 그 일본인 경찰 서장이라는 자가, 이보패 여사한테 "조건"을 다는 장면에서, 혹시 무슨 추악한 요구라도 하는 것 아닌가 해서 가슴이 철렁했습니다(아마 작가도 그걸 노리고 잠시 장면을 분할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영화 <300>에서도 그런 비슷한 설정이 있었으니, 귀부인이라 해도 식민지 피지배민족에게야 무슨 짓인들 못할까 싶어서였죠.

 

이 소설은 스포츠 이야기만 다룬 게 아닙니다. 작가는 별 자세한 사정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표현 몇 구절 만으로, 읽는 독자에게 "이런 개만도 못한 쪽xx들!" 같은  격분을 불러일으키는 재주가 있더군요. 소설 읽으면서 스스로 민족 감정 고취할 생각은 별로 없었는데, 읽으면서 이렇게 자주 열이 받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이 소설의 부제를 보면 "조선의 베이브 루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영민이 실제로 자기 시대에 얻었던 별명일 뿐 아니라, 그의 생애를 놓고 봤을 때 참 어울리는 호칭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 알듯, 베이브 루스는 당대의 기준으로 "말도 안 되는 괴물급 히어로"였을 뿐 아니라, 너무도 결함이 많은 영웅이기도 했습니다. 이영민 역시 소설의 몇몇 장면에서 뭇 사람을 감동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보다 더 많은 장면 속에서 독자를 사정 없이 실망시키는 나약하고 허점 많은 인간 그대로의 모습을 노출합니다. 이 소설 말미에 귀한 자료로 나와 있지만, 그는 실제로 1920년대에 전미 올스타 팀 일원으로 일본 투어 경기를 할 시절 이 베이브 루스와 조우했고, 사진에도 나오듯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기념 촬영을 하기도 했습니다.

 

소설은 이영민 한 사람만을 부각시키지 않습니다. 그의 "연인"으로 당대 경성과 평양을 들었다 놨다 했던 숱한 기생들, 여배우들, 그의 "친구"로 당대 스포츠 스타였던 함용화(정확히는 형뻘), 백기주(유격수에 주로 3번을 치는 교타자, 준족이었다고 하니 홈런 타자보다 팀에서는 더 요긴한 선수겠죠. 예나 지금이나요), 영화감독이자 배우였던 나운규, 기자이자 시인, 소설가였던 심훈(심대섭), 이영민에게 선배였던 복싱의 레전드 성의경 등 당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저명인사들이, 이영민을 중심축으로 하여 등장합니다.

 

스포츠 소설, 영화에 언제나 감초처럼 등장하는, 날카롭고 삐딱한 기자 한 사람도등장합니다. 실존 인물 이길용이 바로 그입니다. 사실 그가 실존 인물이긴 하나, 마치 영화 <내츄럴>에서 로버트 듀발이 맡았던 맥스 머시 역처럼, 그런 스테레오타입의 인물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특히, "큰 걸 노리다 보니 헤드업이 되면서 어깨가 열리고.. "고 같은 말은, 현대 야구에서나 하는 말 아닐까요? 그나마 강타자가 좀 부진하다 싶으면 너무 흔하게 갖다 붙이는 "진단 아닌 돌팔이 진단"이기도 하고요. "종속이 좋다. 볼끝이 묵직하다" 같은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의 처음과 끝은 이용훈 옹이라는, 작가의 외조부되는 분이 등장하는 걸로 되어 있습니다. 이 이용훈 선생은, 그 모친이 일본에서 허드렛일로 모진 고생을 하고  있을 때, 소년이었던 그를 따스하게 감싸 안아준 청년 이영민에 대한 기억으로 맺어진 걸로 나옵니다(이 설정은, 반은 픽션이라고 작가 스스로가 밝힙니다). 이용훈 옹은 아흔의 연세에, LG- 두산의 2014년 한국 시리즈 시구를 맡는 걸로 나옵니다. 한 2,3 년 뒤로 잡아도 될 것을, 곧 다가올 미래로 이렇게나 앞당겼으니, 작가분이 얼마나 열렬한 두산 팬인지 짐작도 됩니다. 두산은 사실 세기가 바뀌고 나서 누구도 부인 못할 강팀으로 이미 자리를 잡은 지 오래인데, 굳이 "좀 강해진" LG를 불러 잠실에서 자웅을 겨루는 걸로 무대를 꾸밈은, 이 작가분이 청년기를 보낸 1990년대에 "강팀 엘지- 약팀 OB" 구도에서 얼마나 맺힌 한이 컸는지를 짐작게 합니다.

 

이용훈 선생을 인터뷰하는 기자는, 야구팬이면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모를 수가 없는) 그 유명한 박동희 씨로 설정됩니다. 아마 작가분과 박 기자도 비슷한 연배겠죠? 일제 시대에 이길용이 있었다면, 우리 시대에는 (다소 평이 갈리긴 하나) 바로 박식하고 날카로운, 현장 중심의 취재에 강한 민완 기자로서 바로 박동희가 있을 것입니다. 작가는 이처럼, 실존 인물을 자기 작품에 갖다 쓰는 데에거침이 없고, 그만큼 재미도 있습니다.

 

호므랑 이영민, 물론 동대문구장(지금은 철거되었고, 구 "서울운동장야구장"이었습니다)에서 조선인 1호 홈런을 날린 그였기에 이런 제목이 가능했겠지만, 그는 걸출한 능력, 파란 많은 인생, 주변을 휘어잡는 강한 개성과 카리스마로, 인간 자체가 "홈런"인 존재였습니다. 이 소설에 잘 나오지만, 그는 비단 야구 한 종목에만 강한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사람, 아니 일류 스포츠 선수 몇 명 역할을 혼자 도맡아 할 만큼 "원 맨 특수부대" 같은 영웅이었지만, 그의 인생에는 기쁨과 행운 못지 않게 짙은 그늘도 적지 않았죠. 투수의 공을 받아 쳐 담장을 넘기고 천천히 그라운드를 도는 홈런 타자가 결국 돌아오는 곳은 담장 너머가 아닌 홈 플레이트이듯, 우리네 인생도 결국 잘난 이 못난 이 할 것 없이 귀착하는 지점은 같은 게 아닌가 하는 덧없음도 깨닫게 해 주는 소설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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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성 이론이란 무엇인가?
제프리 베네트 지음, 이유경 옮김 / 처음북스 / 201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상대성 이론이란 무엇인가? 과거에는 이 이론에 대해 정확히 이해한 사람이  전 지구를 통틀어 세 사람밖에 없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물체의 좌표와 위치, 운동의 방향이란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정량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물리학의 대전제로서는 일반 대중에게 아주 익숙한 편입니다. 부모님들이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는 좋은 예로, "정말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열차 안에서는, 내가 움직이는 것인지 창 밖 풍경이 뒤로 가는 것인지 느끼지 못한다." 같은 게 있습니다.

 

하지만 영리한 아이들은, "그저 느끼지만 못한다는 것 뿐, 현실은 분명, 나와 내가 탄 기차가 앞으로 가는 것이며, 저 큰 건물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뒤로 빠지고 있는 게 아님"을 잘 압니다. 이렇게 되면, 상대성 이론이란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진실을 잘 분별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혼란을 끼치는 셈입니다. A와 B가 비슷해 보여도, 특정 기준을 적용하면 서로 다른 것임을 가르치는 게 교육인데, 반대로 진즉부터 구별이 되던 것도 "본질적으로 같다"고 해 버리는 셈이니 말입니다. 더군다나, 현실에서는 엄격한 의미의 등가속도 운동(등속도 운동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죠)이 존재하지 않으니, 아주 둔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내가 움직이는지 나를 둘러싼 환경이 움직이는지 분간 못하기야 할까 싶습니다.

 

이런 관점에서만 상대성이론을 이해하면, 이 이론은 별 쓸모도 없는 듯 보입니다. 그렇게 보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쓸모가 없습니다.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요? 지금으로부터 다섯 세기 전에 정립된 뉴턴의 고전 역학이, 그 오랜 세월 동안 절대 진리의 지위를 누려 왔던 것은, 그만큼 이 이론 체계가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을 완벽하게 설명해 왔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도 설명되고 있는 것처럼, 뉴턴 역학은 몇 가지 역설(예: 어떻게 해서 중력은, 그처럼 빠르게 다른 물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지구나 다른 물체에 중력을 감지하는 센서가 달려 있는 게 아니지 않는가?)이나 미심쩍은 점만 제외하면, 모순도 없고 이론적으로 완벽하게 정리된 체계였습니다. 기존의 이론이 수많은 모순과 역설에 직면하여, 쓸모 없는 누더기가 된 후에 나온 게 아니라, 아직 완벽에 가까운 효용을 자랑할 때 나온 게 상대성이론입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이 더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기존 뉴턴 역학이 자기 방식대로 설명하던 모든 현상을, 빠짐 없이 커버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이론이 설명 가능한 바를 빼 먹고 설명 못 하는 바가 있다면, 그 새로운 이론은 그리 빼어난 것이 못 됩니다. 상대성 이론은 그렇지 않고, 고전 역학의 장점을 모두 대체하여, 그 중 어떤 현상에 대해서건 빠짐 없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새 이론은, 뉴턴의 기존 체계가 엄두도 내지 못하던 현상을 설명할 수 있었으며, 앛으로 벌어질 천문 현상을 예측할 수도 있었습니다.

 

다만 지금도 우리가 뉴턴 역학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눈 앞에 벌어지는 모든 물리적 현상을, 뉴턴 역학처럼 매끄럽게, 또 흠결 없이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성 이론을 써서 설명할 수 있지만, 그것은 케이크 커팅에 소 도살용 칼을 들이대는 격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일을 설명할 때에는, 뉴턴 역학을 쓰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고 효용이 높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현실에서 벌어질 수 없는 일들(예컨대 스페이스 셔틀 안에서의 체험)을 두고, 사고 실험을 통해 상대성 이론의 관점을 독자에게 이해시키려는 의도로 쓰여졌습니다. 일단, 상대성 이론만이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을 독자에게 자세히 풀어 주고, 이렇게 해서 익숙해진 이론적 틀을 이번에는 일상적 현상에도 적용시켜 보는 겁니다. "뉴턴 역학으로 요러요러하게 설명되던 것이, 상대성 이론으로는 이렇게 설명 가능하다." 어느 하나가 맞고 어다른 하나는 틀린 것이 아닙니다. 이론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단수가 아닌 복수로 존재함은 당연합니다. 다만 지구에서 벗어나 거대 우주나 극소 물리계를 다룰 때, 뉴턴 역학이 통하지 않음은 명백합니다. 그런 현상을 다루려고 나온 이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브라이언 그린의 책(<우주의 구조>)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상대성 이론이 던져다 준 가장 큰 충격은, 중력이란 걸 전자기력 따위의 "힘"으로 꼭 파악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중력이 작용해서 물체가 특정 방향으로 이동하는 게 아니라, 공간이 굽어졌기에, 물체의 질량 때문에 공간이 곧지 않고 휘어져 있기에, 물체가 그런 경로로 이동할 뿐입니다. 이런 관점을 취하면,  저 위에 적은 "왜 중력은 무엇의 매개 없이도 곧바로 전달되는가? 중력은 어떻게 빛의 속도로 물체에 감지(?)되는가?"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왜 호주에 사는 사람들은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가? 이 문제 역시, 뉴턴 역학 체계 안에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절대적인 북쪽 남쪽이 방위로서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내 발 밑으로 중력이 작용하는 방향이 아래요, 그 반대가 "위'인 것입니다. 호주쳐럼 우리에게 멀리 떨어진 예를 들 것도 없습니다. 거대한 빌딩 외벽을 거꾸로 오르는 개미 따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에게 더 압도적인 방향으로 인력을 미치는 쪽이, 그에게는 바른 방향이 될 것입니다.

 

서로 다른 우주선을 타고 있는 두 사람이, 이제 어느 한쪽만 (일부러 조정하여) 중력 가속도와 같은 크기로 엔진을 돌리기 시작했다고 하죠. 그러면, 가속을 시킨 쪽이 움직이고, 그렇지 않은 쪽이 정지한 게 분명하지 않은가? 이렇다면, 모든 운동과 위치가 상대적이란 말도 틀린 게 되지 않은가? 설득력 강한 질문이지만, 엔진 가속 없는 우주선이 "자유낙하"하고 있다고 쳐 버리면, 깔끔한 해결이 됩니다. 가속 있는 우주선은 정지하고 있고, 가속 없는 우주선은 자유낙하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 결론을 우리는 애써 머리를 굴려, "사고 실험"을 통해 알아 내었습니다만,  만약 정말로 우리가 개인용 우주선을 타고 우주를 유영 중이라면, 굳이 번잡한 노력 없이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눈에 뻔히 그렇게 보일" 테니까요. 사람은 누구나 제 눈에 보이는 대로, 가장 편한 설명을 찾게 마련이니까요.

 

고등학교 때 물리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독자는, 이 책에서 여러 번 강조하는 "무중력= 자유낙하"가 무슨 말인가 할 것입니다. 자유낙하만큼 중력의 영향이 강하게 초래될 운동이 어디 있을까요? 그런데, 일정 시간 경과 후 지면에 추락하여 벌어질 그 끔찍한 결과는 잠시 잊고라도, 최소한 공중을 자유 낙하 중일 때엔, 이른바 중력의 힘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를 무중력 상태라 부르는 것입니다.

 

왜 빛의 속도를 능가하는 물체, 운동이 없는가? 빛은 질량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물체는 최단 거리의 이동 경로를 찾아 움직이게 마련이지만, 빛은 더군다나 자체 중량이 없기 때문에, 물리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죠. 아인슈타인은 이를 바탕으로 갖가지 사고 실험을 전개했고, 이로부터 타임 머신 등 우리가 아는 모든 역설이 새롭게 등장했습니다.

 

이 책에서 하나 아쉬운 점은, 블랙홀이 주변의 모든 물체를 끌어당길 수는 이유에 대해, 그리 시원한 설명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또, 왜 공간과 시간이 별개 좌표가 아닌, "시공간(영어로는 spacetime)"으로 파악되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직관적인 설명이 다소 부족하다는 것도 아쉽습니다. 독자가 확실하게 배울 수 있는 건, 모든 이론은 언젠가 더 나은 이론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에 대해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즉 절대 진리란 존재하기 힘들다는 그런 의미에서도, "상대성"은 타당성을 갖는 용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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