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버 고 백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 / 오픈하우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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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잭 리처의 정신적 본향은 어디까지나 군대입니다. 그는 아직도 특수 부대 대장으로서의 정체감이 자아의 최우선이며, 그를 가장 존경하고 따랐던 이들도 군인들이고, 그의 가장 자랑스러운 행적도 군인으로서의 그것들입니다. 하지만 그는 전역 후에는 영낙없는 떠돌이 신세인데, 사실 사내로서 멋진 그의 모습에 감탄하기도 하면서도, 대체 왜 저 정도 되는 사람이 저렇게 살아야 하는지 잘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여튼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군대로부터, 그 중에서도 모부대發로, 커다한 위기가 바로 그에게 닥칩니다. 하나는 그가 특수부대원 시절 모 민간인(이라고는 하나 질 나쁜 깡패입니다)을 구타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 또 하나는 서울(!)에 군인 신분으로 체류하던 시절(군인 신분이 아니었으면 큰 문제가 안 됩니다), 한 여인과 간통 끝에 아이 하나를 낳게 한 사건입니다. 이상하게도 이 두 사건이 동시에 소송의 형식으로 그의 발목을 옭죄어, 그는 간만에 접근한 부대 소재지로부터 멀리 떨어지라는 압력을 받습니다.  

 

범법을 저질렀으면 공권력으로부터 구금이나 출두의 압박이 가해져야 정상인데, 이상하게도 그를 최우선적으로 찾은 물리력은 "당장 이곳을 떠나." 같은 어설픈 협박입니다. 누가 이런 시도를 했던 간에, 그 방법이 옳지 못했습니다. 옳지 못했다고 판단하는 이유 중 하나는, "FIGHT OR FLIGHT"의 상황에서 그는 언제나 "맞서 싸우는 편"을 선택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가 대단히 치밀하고 잘 돌아가는 두뇌를 가진 이여서, 사리에 맞지 않다 싶은 상황에 대해서는 겁에 질리기보다 "왜 이런 현상이 내게...?" 같은 의문을 먼저 품는다는 점입니다. 

 

람보(의 완력, 용기)와 셜록 홈즈(의 두뇌)를 결합한 사기 유닛 답게 그는 이 거대한 음모에 맞서 싸우는 편을 선택하고, 반(半) 자진(自進)하 여 영창에 구금되었다가, 같은 시설에 수감된 터너 소령(시리즈 역대급으로 꼽아야 할 미모의 소유자인데다, 사리 판단도 참으로 현명하게 돌아가는 여성입니다. 리처와의 두어 번 정사신을 통해 우리 독자에게 주는 서비스의 강도도 녹록지 않습니다)과 함께 동반 탈옥하여, 모든 정보망(카드 결제 내역, 항공기 탑승 이력, 거대 호텔 체크인 사실 등등)을 손 안에 넣고 둘을 추적하는 가공할 적을 따돌릴 뿐 아니라, 오히려 상대를 역으로 압박하기까지 합니다.  

 

리 차일드의 이 시리즈를 가리켜 페이지 터너라고 하는 건, 단지 스토리 전개상의 재미라든가 캐릭터의 매력 형성에 과다 투자된 자원 따위의 덕분이 아닙니다(매력이 고작 그것뿐이었다면 이 시리즈가 그리 장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건의 진행은 최대한 빠르게 하되(따라서 간결하고 호흡 짧은 문장이 사용됩니다만), 리처의 심리 묘사(특히 상대의 육체적 공격 전술을 미리 읽고, 자신의 대응 방법을 연구하는 모습)나,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풍경, 배경의 묘사(외계인이 보았을 때, 이 별의 생명체들은 음료수나 손톱 관리가 외과 시술 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여길 것이라는 등의 표현),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블랙 유머와 repartee가, 마치 이 소설이 헤밍웨이식 간결체로 일관하는 듯한 착각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읽는 독자에게 안기기 때문입니다. 밀도와 깊이 있는 내용 이해를 버거워하는 독자에게도 그 수용 범위 안에서 선택적으로 쾌감을 안겨 주고, 소설에 푹 몰입하고 싶은 독자에게는 그만의 깊이를 따로 선사하는 데에서, 리 차일드의 작가적 역량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과연 15세 소녀 사만다는 잭의 딸일까 아닐까? 악당들의 하수인들을 마침내 거리에서 퇴치하고, 이 가공할 음모 최종의 mastermind를 마침내 밝혀 내는 과정 말고도, 이런 자잘한 재미를 곳곳에 심어 놓아 독자가 대체 딴 데 정신을 못 팔게 만듭니다. 페이지 터너가 아니라 페이지키퍼입니다. 빨리 읽어내고 나면 그 아까움과 아쉬움을 어찌할까 하는 행복한 걱정에, 아끼고 살펴 가며 책장을 넘기게 하기 때문이지요.

 

아주 불만이 없는 건 아닙니다. 소송 사건(그 중 하나는 형사사건인데요)의 개시와 진행이, 변호사(군인 신분이라고는 하나)들의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붊명확할 수도 있을까 하는 의문이 가시질 않았습니다. 한때 그렇게나 리처를 옭죄던 압박이, "편하게도(리처의 해명에 대해 불만을 털어 놓던 당국자들의 표현이기도 하죠)" 한순간에 그리 "관련 서류 열람"만으로 해소될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습니다.리뷰에서  결말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결국 "태산명동에 서일필" 아닌가 하는 생각도 좀 들었구요. 정경호씨의 시원시원한 번역은 언제나 감탄스럽지만(번역문 같지가 않습니다), "파슈툰"처럼 굳이 우리 눈과 입에 익은 고유명사를 "패쉬턴"으로 쓸 필요가 있었을지요. I'll see what I can do를 "내가 할수 잇는 게 무엇인지 찾아 볼게요."라고 옮긴 건 좀 기계적이라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불만은 다 잠재울 수 있습니다. 이야기 자체가 너무나, 너무나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오래 전 원서로 한 번 읽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독자인 저에게도, 이 한국어판은 여전한 쾌감, 스릴러가 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만족을 다 안겨다 주었습니다. 영화도 빨리 개봉했으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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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왜 삽질을 시킬까?
데이비드 디살보 지음, 김현정 옮김 / 청림출판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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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군대에서도 "삽질" 위주의 업무 부과를 지양한다고 합니다^^ 사람이 머리가 좋게 태어나건, 그렇지 못하건 간에, 창의적이고 역동적인 쪽으로 머리를 쓰지 못하고 단순 반복 노동에 몰리면, 누구를 막론하고 억 울한 느낌이 드는 건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뇌가 우리에게 삽질을 시킨다"고 합니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만약 "삽질"이라는 게 (그런 걸 우리에게 시킨다는) 뇌를 머리에 품고 살아야 하는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면, 기왕 시키는 그 "삽질"의 방향과 질(質)을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돌릴 수 있을지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은 좀 놀라운 깨우침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더군요. 첫째는, 생 각이라는 것에도 단계가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물론 하고 삽니다. 몸 곳곳에서 체액이 분비되거나, 체온 유지를 위해 갖가지 일이 다 벌어지는 것처럼, 생각이라는 건 우리의 뇌 속에서 멈출 줄 모르고 지속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에도 단계가 있어서, 지금 하는 생각을 두고 이를 반성하는 생각이 따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위 "메타적인" 생각 입니다. 저자는, 이런 메타적인 생각을 하되(일단 보통 사람들은 메타적인 생각 자체를 잘 떠올릴 줄 모릅니다), 자신에게 유익하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둘째는, 이 메타적인 생각을 고리로 해서, 개념, 판단, 행동으로 옮김 따위의 단계가 끊임 없는 고리를 이루어, 그 사람의 내면과 외면을 이어 주는 피드백 시스템을 형성한다는 점입니다(이 과정에서, 사람의 성격은 바뀔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오더군요). 지난 시대의 통념이라고 할 수 있는 좌뇌/우뇌의 분립 가설(그동안 여러 책에서 그림 같은 걸 보셔서 아시겠지만, 좌뇌와 우뇌는 구조적으로 뚝 떨어져 있다는 게 통설이었습니다)이 거의 오류나 환상에 가까우며, 좌뇌와 우뇌는 끊임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라는 게 오늘날 학자들 거의가 동의하고 있는 포인트라는 겁니다. 뇌는 이처럼 역동적인 기관이며, 그러기에 오늘날처럼 진화된 모양과 기능을 이룰 수 있엇습니다. 어른신들 하는 말씀 중에 "머리는 쓰면 쓸수록 좋아진다"는 것도 다 이를 두고 이름이며, 뇌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런 특성을 두고 "신경가소성(뉴로플라시티)"이라고 부른다 합니다.


"생각은 우리 자신 그 자체가 아니다." 저는 이 말이 가장 충격으로 와 닿았습니다. 데카르트도 자신의 존재 근거를 "생각하는 자신"에서 찾았는데, 이제는 그게 아니라는 뜻일까요? 저자는 그보다, 머리 안에서 대뜸 떠오르는 생각의 익숙한 흐름은, 오랜 시간 동안 나도 모르게(그게 내 생각인데 나도 모르다니!) 형성된, 일단의 습관 결과물이지, 바로 나 자신인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 습관적인 생각의 뭉치들은, 앞으로 환경이 급변하거나 내가 다른 생각 습관을 가짐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합니다.


기왕 그렇게 바뀔 수 있다면, 종 더 영리하게 바뀌어 보는 건 어떤가? 이것이 저자의 제안입니다. "메타 생각"의 유용성은 여기서 나옵니다. "잠깐, 내가 지금 이 생각을 왜 하고 있는 거지?" 처럼, 생각을 한 단계 위애서 내려다볼 수 있는 "멈춤 생각", "생각을 제어하는 생각"을 해 보자는 거죠. 이렇게 되면 외부 요인이 새롭게 바뀌어 나의 생각 습관을 고쳐 주길 기다리지 않아도 되며, 동시에 머리의 씀씀이가 더 효율적이 되고, 뇌는 더 유연하고 변신에 적합한 유능한 도구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 책은 뇌 신경과학과 심리학의 최신 성과를 정리한 제 1부와, 그러한 연구 결과를 어떻게 우리 생활에서 응용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제 2부로 나뉘어 있습니다. 2부의 내용은 "메타 생각을 잘하는 똑똑한 뇌 만들기"를 위한 30가지 요령(많죠?)을 제시하고 잇는데, 제 생각에는 이 30가지 오령 중 자기에게 맞는 것만 추려서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껌 씹기 같은 것도 있습니다. 껌 씹는 활동으로 뇌가 메타적으로 단련된다는 착상에 귀가 솔깃하실 분도 잇을 겁니다).


아인슈타인은 "우리는 평생 뇌의 3%도 쓰지 못 하고 죽는다."고 했는데, 다만 나머지 97%를 어떻게 해서 끄집어 낼 수 있는지를 모르니 결국 그 3%가 100%나 뭐가 다르겠는가 하는 비관적인 생각을 가졌더랬죠. 메타적 생각은, 과학적 근거에서 이 잠재되고 그간 사장되었던 뇌의 기능을 최대한 활성화시키는 비책이었습니다. 꼭 그 묵혀 두었던 옛 쌈짓돈을 내어 쓴다는 식이 아니라도,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더 많은 통제와 반성을 할 수 있는 습관을 가진다면 그만으로도 보람된 일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착한 삽질, 남는 게 있는 삽질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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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독스의 힘 - 하나가 아닌 모두를 갖는 전략
데보라 슈로더-사울니어 지음, 임혜진 옮김 / 처음북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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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옛 말에, "게도 구럭도 다 놓친다."는 게 있습니다(혹은 비슷한 말로, "집토끼와 산토끼 모두 손에서 놓고 만다"도 있죠). 어느 한 가지 목표를 정했으면, 가능성이 높은 것에 (속된 말로) "올인"해야 하지, "두길마보기"를 하다가는 모든 것을 다 잃는 최악의 수를 둘 수 있다는 뜻입니다.

 

종래 경제학이나 경제학에서도, 한 가지 goal에 전력을 쏟다 보면 다른 부문에서 소홀해지고 마는 것, 혹은 상쇄(offset) 효과가 일어나고 마는 걸 두고 항상적(恒常的) trade-off 라는 개념 술어를 써 왔습니다. 이는 학자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실무를 맡은 경영자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한 목표를 추구하다 보면, 다른 걸 소홀히할 수밖에 없다는 아쉬움, 두 가지 미덕을 한 몸에 동시에 갗출 수 없다는 제약은, 인간사 어디서도 통용될 수밖에 없는 원초적 제약 사항으로만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궁(窮)하면 통(通)한다고 했던가요? 최근 글로벌, 로컬 할 것 없이 워낙 시장 전방위적으로 경쟁이 치열하게 일어나다 보니, 기업가들과 그 밑의 실무가들 역시 그 두뇌의 내연 엔진에서 김이 다 날 만큼, 쓰고 쓰고 또 머리를 써서 위기와 한계 상황을 탈피하려 애씁니다. 이러다보니, 과거에 안 되었던 것이 (어느 새) 지금은 되고 있고, 과거에 철칙에 가까운 상식이던 것이 지금은 우습게 보이는 낡은 구호로 전락해 있기도 합니다. 워낙 변화가 빠르다 보니, 일일이 log를 적어 가는 일조차 무의미하며, 그저 현황의 첨단(art of the state)를 하루하루 추격하기조차 버거운 게 현실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이제는, 토끼 한 마리를 쫓아서 무슨 일이 그냥 이뤄지는, 자기 맡은 소임을 다한 걸로 밖에서 쳐 주는, 그런 만만한 세상이 아닙니다. 한 마리 토끼를 추격하다 보면, 그 한 마리나마 수중에 확보되는 게 아니라, 한 마리는 결국 그 한 마리대로 놓치고, 다른 녀석을 다른 기회에 다른 길로 포획할 여지도 상실하고 마는 그런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어디 가서 일 잘 한다 소리를 들으려면, 두 마리를 토끼를 동시에 몰아 나가야 합니다.

 

이는 단지 욕심에 불과한 것도, 출세욕 때문에 무리수를 두는 것도 아닙니다. 저자 슈로더사울니어 박사는, 그 자신이 뻬어난 경영 이론가일 뿐 아니라, 컨설팅 회사 대표직을 맡은 경영자이기도 합니다. 이분의 말에 따를 것 같으면,

 

어느 한 목표(A)를 추구해 가면서, 동시에 다른 목표(B)에서 시선을 놓치지 않고 있어야만, 원래의 목표(A)까지 완수할 수 있다.

 

한번 제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A는, 이번에는 반대편 추에 놓여 있던 B에까지 영향을 주어, 선순환이냐 현상 고착이냐 그렇지 않으면 악순환으로 이어지냐의 새 상황을 열게 된다.

 

즉, A가 안 되면 B도 안 되는 것이며, A가 잘 되다가도 어느 순간 B에 주의를 놓치기 시작하면, 이번에는 그나마 잘 되던 A도 침체에 빠질 수 있다.

이상의 이 책의 골자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제한된 능력과 자원으로 어느 하나라도 확실히 잡아야지, 둘 다에 신경을 분산하는데 일이 잘 될리가 있는가? A도 잘 되는데, 동시에 B까지 잘 된다는 게 상식적으로 가능한가?

 

말이 안 되는 듯 보이면서도, 그 속에 진짜 진리(피상적 표피적 진리가 아닌 근원적 타당성을 가진 명제입니다)를 내포하고 있는 걸 두고, 우리는 국어 시간에 패러독스(역설. 逆說)이라고 배웠습니다. 저자 슈로더사울니어 박사는, 작금의 경영은 패러독스 경영의 묘미를 깨닫는 이와, 그렇지 못하고 낙오하는 이, 둘로 갈릴 것이라고 이 책에서 말합니다. 얼핏 들어 대담하기 짝이 없지만, 한편으로 우리가무의식 중에 은근 수긍하고 있던 진리이기도 합니다.

영어에서 or이라는 접속사는, 양가적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는, A와 B 사이에 배중(排中)의 원칙을 적용하여, 이것이면 이것이고 저거면 저거지 중간 지대가 없음을 뜻하는 택일적 의미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수학 시간에 배운 대로, 각각의 영역(차집합)과, 교집합, 이 둘을 모두 포함하는, 합집합으로서의 or입니다. 철학 서적에서는 이를 두고 and/or이라고 표기하는 예도 아마 많이 보셨을 겁니다.

 

저자 슈로더사울니어 박사는, 이 두번째 의미의 and/or 개념을, 우리가 일상(그리고 비즈니스 영역)에서 마주치는 모든 상황에 적용시켜 나갈 것을 패기만만하게 제안하고 있습니다. 회사는 단기적 수익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장기적 성장을 바라볼 것인가. 전통적 의미에서 이 두 목표는 택일적 성격이었지, 동시에 달성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죠. 하지만 지금은? 수익을 내지 못하는 회사는 장기적으로도 성장을 못 합니다. 성장을 못할 회사는, 단기에마저 수익을 올릴 능력이 없습니다. 아니 생각해 보면, 당연한 상식이 아니었습니까?

 

화폐금융론이나 재무 관리 시간에 배우셨을, 고수익이라는 메리트는 반드시 고위험이라는 달갑지 않은 장벽과 마주친다, 수익과 위험 회피라는 두 가지 미덕은 결코 동시에 추구되거나, 단일 벡터상에 놓일 수 없다는 명제 역시, 최근 극한의 부진과 불황을 맞고 있는 증권업계에 큰 경종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역시 궁하면 통한다고, 옹색하게 청담동, 대치동에 호화 점포만 차리고 프라이빗 뱅킹 마케팅만 할 게 아닙니다. 매력적인 상품을 꾸려 고객에 제시하여, 슈퍼 리치 노멀 리치들에게 "제발 내 돈 좀 맡아 주세요"라며 매달리게는 왜 못하겠습니까.

 

이 모든, 가망 없고 허황되어 보이는 상황들에 대해, 저자 슈로더사울니어 박사는 "당신이 눈만 크게 뜨고 마음만 긍정적으로 먹는다면, 안 될 것이 없음!'을 책 내내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반론이나 대전제만 내세우는 게 아니라, 실제 사례가 많다는 것도 이 책의 강점입니다. 이는 실무의 현장에서, 저자 슈로더사울니어 박사 자신이 다양한 처지에 있는 기업들과 호흡을 같이했다는 사실에 크게 기인합니다. 아마 실무종사자들, 그리고 당장 운영의 한계점에서 묘수가 없을까 전전긍긍하는 자영업자들에게, 이 책은 아마 좋은 영감과 활력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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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은 왜 이디야에 열광하는가 - The EDIYA Story
김대식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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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디야, 언젠가부터 거리를 지나다보면 자주 마주치는 브랜드이고 그 로고입니다. 라틴어 edere를 그 어원으로 했을 것 같은 이 신선한 메이커는, 다른 경쟁자들과는 달리 너무 자주 눈에 뜨이

지도 않고, 소비자들의 괜한 허영심을 자극하지도 않는 조용한 행보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커피점을 보았을 때 느끼곤 했던 이미지는 친근함과 믿음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저의 주관적인 느낌일 뿐, 실제로 이 회사가 어떤 원칙으로 제품을 만들고, 개별 점포를 관리하며, 고객을 보는 시선을 어떻게 가지는지야 알 수 없었습니다. 소비자, 혹은 지나가는 손님이 그런 것까지 알 수는 없는 게 당연하죠. 막연하게 형성된 이미지만큼, 합리적인 구매에 지장을 주는 건 없습니다. 그런데 마케팅이라는 게, 씁쓸하지만 바로 이런 소비자의 심리와 허점을 노리고 들어오는 겁니다. 이디야에 내가 언제 이런 식으로 "마케팅을 당하"기라고 했던가? 뵨디 소비자 마음에 언제 파고들어왔는지도 모르게 하는 게 마케팅의 정석이긴 하지만요.

 

음, 그런데 이 책을 보고 확실히 알았습니다. 이 기업은 간단히 말해 "마케팅을 잘 안 하는 기업"이더군요. 이런 요식 브랜드에서, 지나친 마케팅은 어찌 보면 이미지 조작이요 나쁘게 말해 세뇌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사전 작업에도 다 돈이 들게 마련이니, 그 투입 원가는 고스란히 우리가 마시는 커피 값에 입혀져서, 기분 한번 내느라 내 호주머니는 그만큼 가벼워지게 됩니다. 근사한 옷 입고 넷북이나 모 패드를 보며 그렇게 숍 바깥에 풍경으로 전시되는 무드에 빠지는 걸 두고 우리는 "된장질"이라는 점잖지 못한 용어로 부르기도 하죠.

 

된장질은 결국 거품입니다. 이 거품은 기업이 부추겨서 최종 소비자에게까지 이전되는, 없어도 그만이고 너무 잦으면 결국 부작용을 일으키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해악 중 하나죠. 커피 한 잔에 과도한 거품을 쏟는 건, 결국 모두를 위해 좋지 못한 일입니다.

 

지나가며, 혹은 가끔 문 열고 들르기도 하며 느낀 친근감은, 괜한 착각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품을 뺀 경영은 합리적인 가격을 낳고, 또 우리의 진짜 혀와 뇌를 만족시킬 수 있는 맛으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커피, 아니 어떤 상품이라도, 그것을 구매하며 원하던 것은 기분이었을까요, 아니면 상품의 본체적 효용이었을까요? 게다가 커피는 우리의 인체에 흡입되는 것이니, 될 수 있으면 건강도 함께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기업은, 소비자의 눈을 가리고 주머니를 노리는 곳이 아니라,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우리들과 공유하기를 원하며, 이를 실천으로 옮기는 곳입니다. 진심이 아닌 마케팅은 속임수일 뿐 아니라, 이미 소비자에게 통하지도 않습니다. 책을 읽고 느낀 건, 내가 거리를 지나며 느낀 감흥이 괜한 환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죠. 이 각박한 도심에서 때론 이런 진심이 전해져 올 때도 있구나 하는 안도와 희망이었다는 걸 오히려 깨달았습니다.

 

이디야는 또한 직원들을 존중하는 내부 풍토를 가지고 있나 봅니다. 고객과 직원은 먼 과거에는 업주의 착취 대상이었죠. 현대에 들어선 고객 접대 때문에 직원을 닦달하는 행태도 흔히 봅니다. 그런데 이디야는 그런 게 없다고 합니다. 직원의 기를 최대한 살리고, 이로부터 창의적 업무 성과를 이끌어 내어 서로가 윈-윈 하는 풍조가 제대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디야의 철학 중 하나는 개별 점포를 상대로 "갑질"을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기업이 그를 둘러싼 사회, 공동체와 분리된, 생태계 포식자적 존재가 되지 않는 모습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공존을 위한 소통을 해야 하고, 영업에 있어 진심을 먼저 내세우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는 아침에 바쁜 발걸음으로 출근하면서 마시는 한 잔의 커피에, 검은 속셈이 아닌 선명한 채도의 낭만이 담기길 원합니다. 마냥 오래 앉아 있을 수 없는 그 짧은 점심 시간에도, 우리는 진정한 회복과 위안을 커피 한 잔에서 얻길 바랍니다. 이디야가 이런 지친 직장인과 소비자에게, 가식 없고 서로 통할 수 있는 친구로 오래 남아 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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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에 비친 달
정찬주 지음 / 작가정신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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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들은 세종대왕을 두고, 위대한 정치가다, 혹은 탁월한 리더십의 소유자였다, 같은 생각을 맨 먼저 떠올리지는 보통 않습니다. 물론 그는 가시적인 정치적 업적을 너무도 뚜렷이, 다수 남긴 군주였고, (이 소설에서도 잘 묘사되는 것처럼) 때로는 강경하게, 때로는 온화하고 너그로운 모습으로 관료와 사대부, 뭇 백성을 잘 다독인 리더였습니다. 하지만, 세종 대왕 하면 그 무엇보다 먼저 떠오르는 개념, 단어는 바로 "한글"입니다. 한글이야말로 우리에게 세종대왕이 선사해 준 가장 값진 선물이요, 이후 그 숱한 민족적 수난을 겪으면서도 우리가 우리의 혼과 정체성을 잃지 않게 해 준 근원적 신분증이자 고통과 간난의 항해 중 가라앉지 않게 우리를 꼬옥 품어 준 방주와도 같습니다.

 

이런 한글의 창제 과정에, 집현전 학사 외에 다른 누군가가 개입하여, 없어서는 안 될 소금 같은 역할을 해 내고 있었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크게 당혹스러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피치 못할 곡절이 있어 그의 공헌이 기록에서 누락되었다면, 우리는 매우 늦었으나마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저 당연히 우리에게 주어진 게 아니라 그의 공적이 아니었으면 영영 우리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던 한글에 대해, 다시금 고마움을 되새겨야 할지도 모릅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일단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한 것은 서력으로 1443년이고, 이를 시용(試用)한 후 세상에 반포한 건 그로부터 3년 후입니다. 한편, 조선이 대체한 고려 왕조의 대(代)에, 승려 묘청이 서경 천도 운동을 통해 민족 정기의  부활을 시도한 건 1135년의 일입니다. 두 사건 사이에 대략 삼백 년의 간격이 뜨나, 한글 창제의 시점과 우리 시대는 그 곱절인 육백 년을 격(隔)하고 있습니다. 아주 큰 관점에서 보자면(더군다나 기계적으로 측량 불가요 순환적이기까지 한 불가적 시간 개념에서는) 묘청과 세종의 시대는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서로이웃의 구간인지도 모릅니다.

 

신라 원광 법사가 세속 오계를 통해 해동 식의 호국 불교 개념을 정립한 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자처하는 이들은 이웃의 거대한 중화 제국의 유교적 문화 유입에 맞서, 민족적 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해 치열한 움직임을 보여 왔습니다.  김부식으로 대표되는 사대주의적 유교 관료에 맞서, 이들은 대체로 풍수 지리 사상, 전통의 풍류도를 대폭 수용하여, 차츰 의식과 예법이 대륙의 그것을 좇아가는 겨레의 모습을 필사적으로 바로잡으려 애썼습니다. 그 중에 원효가 있었고, 묘청이 있었으며,  무학 대사가 있었고,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실존 인물인 신미대사가 있었습니다. 아마 백 오십 년 후의 휴정, 유정 대사 같은 이들도 이 범주에 넣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이 소설은, 신미 대사를 축으로 하여, 민족 정기와 부처님의 가르침(유학보다 이 땅에 정착한 지 훨씬 오래된)을 지키려는 세력과, 반대편에 서서 사대와 모화를 촉진하여 자측의 기득권을 유지, 확장하려는 세력 간의 집요하고 처절한 투쟁을 그리고 있습니다. 세종 대왕은 그 선왕인 태종 이방원과는 달리, 한편으로는 억울하게 유명을 달리한 모후 원경왕후에 대한 애틋한 추모의 정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개인적 소신과 성향 때문에, 유학도들의 등쌀 때문에 궁지에 몰린 불교계를 음으로 양으로 후원합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어리석은 백성에게 행정적 통치 지침이 잘 전달되게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그 행적을 정확히, 그리고 널리 깨우치게 하기 위한 의도로, 한글이라는 표음 문자를 창제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세종 자신도 산스크리트어의 문자 표기인 범자의 원리에 대해 밝은 편이었지만, 신미 대사 역시 남다르게 영특한 두뇌와 스승인 함허 대사의 가르침에 힘입어, 젊은 시절부터 범자의 원리에 익숙한 편이었습니다. 세종 대왕을 우연히 알현하고(꼭 우연은 아닌 게, 법석에서 신미 대사의 독경 소리가 유난히 낭랑하고 우렁찼다고 합니다), 그의 신임을 받아 여러 차례 독대한 끝에, 그는 민족 고유의 문자를 고안하라는 밀명을 받게 됩니다. 한자와 다른 문자를 만들어 내는 건 사대의 원칙에 반하고 공맹의 가르침(특히 성리학인 걸로 이 소설에선 설정되고 있습니다)에 어긋난다 하여, 이 사실이 알려지면 대역죄로 추포되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현대의 우리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소설은 그런 정황을 치밀하고 설득력 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신미대사를 남몰래 사모하던 희우(기쁜 비라는 뜻으로, 신미대사처럼 몰락 양반가 출신의 처녀입니다)는 역시 우연한 기회에 미행(微行) 중이던 세종 대왕을 만나 사헌부의 다모로 발탁됩니다. 양반가라고는 하나 이 집안 역시 불교를 오래 숭상하던 가풍이 있었고, 그 때문에 풍비박산의 아픔을 겪은지라, 희우는 행동거지 말 한 마디마다 부처님 섬기는 마음을 숨기질 못합니다. 물론 이를 지켜 보는 우리 독자는 조마조마하기 이를 데 없구요.

 

우리는 한글 창제 작업이라면, 세종 대왕이 주도하고 그 기술적 실무를 집현전 학사 정인지가 맡아, 책 <훈민정음>에 그 서문까지 쓴 걸로 알고 있습니다(이른바 정인지 序). 그러나 이 소설은, 정음청 학사를 제수 받은 신미 대사야말로 創과 製 중 후자의 핵심 직무를 위임 받아,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 자 모 28자를 만든 장본인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왜 정인지가, <훈민정음> 서문까지 쓴 공로자로 기록되었는가? 그 속깊은 사연(작가가 창조해 낸)은 이 소설을 직접 읽어 보셔야겠죠.

 

문장이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표현이 많아, 월탄이나 김성한 풍의 역사 소설 줄겨 읽으시는 분들이 크게 반길 만합니다. 몇몇 고문(성녕대군 추도문)은 작가님의 뻬어난 한문 실력과 우리말 표현력으로 (원문인 한문으로부터) 번역되어 있어, 그것만으로도 좋은 공부가 되고 뜻 깊은 문학 감상이 됩니다. 다만 생소한 불교 용어가 몇 있어서(예를 들어 院主 같은 말은 한자 표기도 빠져 있어, 저는 사람 이름인 줄 알았습니다),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은 읽어 나갈 때 다소 어려움이 예상됩니다.

 

세자 문종, 수양, 양녕, 이 세 왕자가 모두 신미 대사를 스승으로 섬기고, 그에게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꼼꼼히도 받아들이는 모습은 흥미롭습니다. 실제로 삼형제는 하나같이 불교에 경도되었고, 수양은 특히 <석보상절>을 직접 지어 부왕 세종으로부터 그 화답인 <월인천강지곡>을 받아들기도 했죠. 천 개의 강에 달 하나가 그 빛을 고루 내린다는 이 소설의 제목은 여기서 따 온 것입니다. 신미대사는 소설 말미에 세종을 "살아 있는 부처님"으로 칭하는데, 결국 백성을 살리고 바른 정치를 베푸는 위정자가 부처님이나 마찬가지고, 부처님처럼 중요한 위상이라는 작가의 메시지로도 들립니다. 아니면, 깨어 있는 백성 하나하나의 몸짓과 덕행이 모여 이 더러운 땅(예토)을 서방의 극락으로 바꿀 수 있다는 뜻일까요? 오늘 밤에도 떠오를 달을 보며 깊이 생각에 잠길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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