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기계 시대 - 인간과 기계의 공생이 시작된다
에릭 브린욜프슨 & 앤드루 맥아피 지음, 이한음 옮김 / 청림출판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참신하고 획기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무엇에 대한 접근 방식이냐면, 책이 주제로 삼고 있는 대단히 심각한 이슈에 대해서입니다. 그 이슈가 무엇이냐면, 바로 최근에 심화되어 모두의 이마에 깊은 주름을 남기고 있는 "불평등"입니다.


"불평등"이란 체제의 근본 모순에 대해 우려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이의 심각성과 원인, 나름의 처방에 대해 저명한 학자, 전문가들은 한마디씩 하려 듭니다. 그런 저자들 중에서서는 최근 전지구적으로 단연 큰 화제가 된 토마 피케티가 있었지요. 그가 기존 경제학이 발전시켜 온 tool만을 활용하여, 다른 누가 좀처럼 생각하지 못하던 기발한 논증으로 이 분야 담론의 신기원을 이뤘다면, 브린욜프슨, 맥아피(기업용 바이러스 백신 개발자-창업주와는 무관합니다) 등의 공저자들은, 문명사관, 혹은 과학사가(史家)의 입장에서 해답을 내어 놓고 있습니다.

경제사 공부할 때 "러다이트 운동"이라고 들어 보셨을 겁니다. 산업 혁명 당시 기계와 공장제 시스템이 급속히 확산되자, 길드에 소속된 장인이나 독립 숙련공들은 자신 또는 자신의 가문이 배타적으로 보유하던 일자리가 축소되거나, 이를 상실했습니다. "루드 장군이 배후에서 이를 지휘하신다"는 가공의 믿음 하에, 이들은 공장주가 보유하던 기계와 설비를 파괴하는 대규모의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근현대 들어서 제도적으로 보장 받고 있는 노동자 파업과는 다른, 생존권의 보장과 경제인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투쟁의 양상이었는데요. 오늘날에 들어와서는 "생산으로부터의 인간 소외" 극복이라는 면에서 주목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이 러다이트 운동에 대해, 저자들은 오늘날의 불평등 심화 현상과 긴밀한 역사적 연계를 찾습니다. 저 시기에도 시스템은, 일찍이 존재한 적 없던 이노베이션을 통해 생산성의 급격한 향상을 겪습니다. 생산성이 혁명적으로 개선되었다 함은, 분배의 문제만 해결된다면 사회 전체의 복리 향상으로 이어지는 대단히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여기서 분배의 문제라면, 세습적 특권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결국은 공동체 보편의 잉여 증가로 필연적 귀결을 보이게 마련입니다. 생산성 증가 자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문제는, 최초 혁신자 - 극소수이겠지요-의 손에 쥐어진 엄청난 규모의 부(富)가, 언제쯤에나 보편적 풍요를 달성할, 아니 체감할 만큼, 빠른 순환이 이뤄지느냐에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뿐이 아닙니다. 최초 혁신자-다시 강조하지만 극소수입니다- 가 결과적으로 빼앗아 간 숱한 일자리, 이 때문에 당장 생계를 위협받기까지 하며 한계 상황에 내몰리거나 나이에 걸맞지 않은 거센 도전에 직면하게 될 평범한 노동자들은, 뚜렷이 감소한 share가 가져다 주는 궁핍을 현실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급작스러운 불평등의 심화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특이점적 혁신(레이 커즈와일의 규정입니다)을 맞고 있는, 우리 시대의 대박에서 기인한 희비극이라는 게 저자들의 주장입니다. 산업 혁명 당시, 경이적인 생산성의 증가는 보편 대중의 편익과 풍요에 분명 유의미하게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광공업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이나, (앞서 언급한) 숙련공들의 몰락은, 당사자들이 어디서도 보상 받을 수 없는 시대적 비극이었습니다. 최근 물꼬 터지듯 각 산업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혁신의 대열을, 두 손 들고 환영할 수만은 없는 게 이런 딜레마에 기인합니다.

이 책 전반부는 우리 조상들이 경험할 수 없었던 놀라운 규모와 파장의 기술적 혁신에 대해, 전문가들의 눈썰미를 발휘하여 예리하게도 하나하나 짚어 가고 있습니다. 1960년대 무어의 법칙부터 시작해서 최근의 모바일 혁명까지, 발전과 발견 그리고 그 모두를 뛰어넘는 혁신은, 과거 쿠즈네츠가 지적했듯 최장주기를 지닌 간헐적 이벤트가 아니라, 이제 대세와 추세가 되어 버린 일상 환경, 상수적 팩터의 위상입니다. 이제 눈만 뜨고 일어나면 상상 속에서만 가능했던 새로운 진보가 어엿한 현실이 되어 그 자리에 서 있는 모습입니다.

이런 진보가 왜 모두에게 희소식이 되지 못하는가. 앞서 말한 대로입니다. 어느 분야에서 혁신이 일어나면, 전통적 방식으로 그 분야 생산에 참여하던 이들은(노동자이든 화이트컬러이든 무관하게) 종래의 중요성을 잃어버립니다. 평생 직장의 신화가 무너지고 40대의 나이에 직장에서 몰려 목 좋은 치킨집 개업을 알아 봐야 하는 건, 그나마 요식배달업에서는 최초 부가가치 창출 단계에서 혁신이 더디므로, 낮은 진입 장벽으로 인한 무한 경쟁이라는 요소(이게 더 무서운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외에는 아직은 기술적 위협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두려운(?) 기술 진보와 혁신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저자들의 인상적인 인용을 다시 적어 보자면, "인류의 최대 약점은 지수함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수함수는


이런 모양인데요. 생략한 더 오른쪽의 형태는 거의 수직 상승이라 할 만큼 경사가 가파릅니다. 저 역시 인류의 약점을 그대로 공유한지라, 무의식 중에 저렇게 상대적으로 평탄한 부분만 그리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느릿느릿 증가하다가 어느 순간 지금까지의 추세를 모두 무시하겠다는 듯 급격히 상승하는 이런 패턴을, 선형적 사고에만 길든 우리들은 이해 못한다는 뜻입니다. 100을 2로, 10000를 4로 치환하는 로그의 도입이 수학자 네이피어에 의해 이뤄지고 나서야, 우리는 지수적으로(exponentially) 증가하는 추세의 공포와 위력에 대해 알 수 있었습니다.

레이 커즈와일이 누구보다 앞서 지적했지만, 우리는 지금 이 같은 혁신의 폭포, 위험하기끼지 한 이노베이션의 홍수 속에 몸을 맡기고 있습니다. 커즈와일이 문명사관적 혁신의 기술적 측면에 주목했다면, 이 저자들은 그로부터 파생되는 필연적인 불평등 추세에 대해 날카롭게 짚어 주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두 가지 효용을 가집니다. 1)우리가 직면하게 될 기술 진보가 어떤 추세적 패턴을 지니고 진행될 것인지에 대한 예견 2)이 불평등의 암울한 물결은 과연 언제 진정되기나 할지의 추측. 저자들은 다양한 논의와 논거들을 분명하고 유용한 프레임에 맞춰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현명한 독자는 그로부터 자신에 필요한 통찰을 알뜰하게 챙길 수 있습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써니람다 2014-12-22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봤습니다.
 
피바람 인수대비 - 상
이은식 지음 / 타오름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깨닫게 된 바는, 수양대군 세조로부터 시작된 비정통 차자(次子)의 왕계가 이뤄 낸 역사에, 이처럼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도 꿰어져 등장하는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걸출"하다는 말은 반드시 긍정적 의미만을 지니는 것은 아닙니다. 한명회 같은 이도 나쁘게 보면 간신이자 정상배였지만, 아직 그 건국의 기반이 내내 튼튼하지만 않았던 조선 초기에, 각종 행정 수완을 발휘해서, 시스템상으로 흔들리지 않는 펀더멘털을 형성한 게 분명한 사실입니다.

배신의 아이콘 신숙주는 어떻습니까? 아무도 왜구의 발호를 국제정세적 주요 변수로 간주하지 않을 무렵 "거리가 가깝고 인구 수가 많으며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으니 화친하며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그의 저서 <해동제국기>에서 선구자적 안목으로 적어 둔 바 있는 경세가였습니다.

세조의 아들이자 소혜왕후의 부군이었던 의경세자가 낳은 아들이 성종이었는데, 묘호가 성종인데에서도 알 수 있듯, 할아버지가 시작한 국체(國體)의 공사를 튼튼히 마무리한 이가 바로 9대 임금인 그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감상적으로 봐 주자면 비운의 군주라 할 수 있는 연산군이었습니다.

고려 때에야 신하에 의한 폐립이 잦았지만, 확고한 유교 통치 이념이 정착한 후로는 극히 드물게 보는 일이 소위 "반정"이었는데요. 단 두 명의 폐출 군주 중 하나가 이 연산군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큰 정변을 겪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고(위화도 회군에 이어진 우왕 폐위는 얼마 가지 않아 고려의 멸망으로 이어졌죠), 오히려 중앙 집권을 더 강화하며 확고한 농민 장악과 수취 체제의 완결에 성공했던 게 바로 이 시기의 모습입니다.


 


이 책은 바로, 조선 시대의 척추에 해당하는 세조 말년~ 연산군 시기의 모습을, 한 편의 드라마처럼 구성하고 있는 책입니다. 보통 소설의 포맷이라면 작가의 과도한 상상력이 끼어들어 정사(正史)의 이해에는 방해를 끼칠 수도 있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대중서에서는 흔히 보기 어려울 정도로, 왕실 세계도와 각종 자료를 풍부히 집어 넣어, 본문 이해가 어려울 때마다(이 왕족이 누구의 몇째 아들이던가?) 수시로 참조할 수 있게, 독자의 편의를 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유용한 사료가 많이 삽입되면 딱딱한 학술서가 아닐까 선입견을 갖기 쉽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소설처럼 술술 읽힙니다. 정사의 정연한 체제와 팩트 사항은 그것대로 담고, 다만 문제가 격의 없이 물 흐르듯 읽히는 게 소설의 맛은 그것대로 살렸습니다. 이 점이 이 책의 가장 우수한 매력입니다.

최근의 소설은 지나치게 현대어를 자주 삽입하여, 지난 시대의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독자의 머리 속에 피어오르게 하는 일에 실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린 독자들에게는 그저 생경함이 적어서 좋을지 몰라도, 월탄 박종화 같은 정통파 역사소설 작가의 고풍스러운 필치에 맛을 들인 독자에게는 그런 시도가 유치하게 느껴질 수 있죠. 그러나 이 소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스러운 어휘가 적재적소에 쓰이고 있어, 시대물의 참맛을 제대로 느끼게 해 줍니다. 또 이 책의 중요한 장점은, 이야기가 시대순으로 기계적인 서술을 따르지 않고, 저자분께서 상상의 방향이 옮겨가는 대로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흐름을 취하고 있다는 데에도 있습니다.

이 책은 컬러 사진이 유독 많습니다. 종이 질도 최상급입니다. 이런 책 중에 이처럼 편집과 외관에 큰 공을 들인 경우는 좀처럼 보지 못했을 정도였어요. 책값이 좀 비싸긴 하지만, 그만큼 제값을 한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표지에 나온 것처럼 수능에 과연 도움이 될까요? 최근 출제 경향은 단편적 사항 암기를 테스트하지 않고, 문헌이나 사적을 원형 그대로 제시하여 시대 속성의 정확한 이해에 성공했는지를 묻는 문항이 많다고 합니다. 이 책에 실린 다양한 사진과, 풍성한 배경 설명은 역사의 입체적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오타가 (이렇게 미려하게 편집된 책에 어울리지 않게) 종종 등장하고, 예컨대 "네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네 아들을 데려가겠다."며 문종비가 세조의 꿈에 등장한 후 의경세자(추존 덕종)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단종보다 의경세자가 먼저 죽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야사에 가깝습니다. 아쉬운 점도 적잖게 있는 책이었습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써니람다 2014-12-22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읽었습니다.
 
미치광이 예술가의 부활절 살인 - 20세기를 뒤흔든 모델 살인사건과 언론의 히스테리
해럴드 셰터 지음, 이화란 옮김 / 처음북스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예술가란 그 정신의 일면에 반드시 광기를 잠복시키는, 서글픈 운명의 소유자여야만 할까요? 그저그런 성취와 재능의, 대중영합적 예술가 부류를 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저분은 예술보다는 비즈니스나 정치를 했어야 옳았다." 싶은, 누구의 원한도 사지 않고 누구에게나 환심을 얻어낼 수 있는 처세의 달인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일류의 예술혼과 불멸의 천재성을 지닌 예술가라면, "아니 굳이 저럴 필요까지 있나?" 싶을 만큼, 자신의 주변과 잦은 충돌을 빚습니다. 피카소만 해도 싸움질하다 무의미하게 흘려 보낸 청춘의 시간이 많았고, 빈센트 반 고흐는 뭐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신체 자해까지 서슴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성질 좀 죽이고, 그렇게 생긴 여유로 작품 창작에나 더 열의를 쏟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절로 일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또 그렇게 되기가 힌힘든 모양입니다. "난 네가 너무 싫어! 이건 보기 흉해! 저건 미적으로 무가치하다고!" 그때그때 정직한 영혼의 표백을 직설적으로 해 주지 않으면 영혼에 곰팡이가 슬어서, 신이 자기에게 부여한 그 모든 영감과 재능이 손상되기라도 하듯 여기나 봅니다. 안 그렇고서야 그리 과격한 모습을 보일 리 없죠.

이 논픽션의 주인공은 로버트 어윈이라는 젊은이입니다. 대공황 시기에 살았고, 직접 저지른 사건 때문에 당대에 큰 화제가 되었던 실존 인물입니다. 그를 당시에 보았고 부대꼈으며 직접 사귀기도 했고(유난히 이런 사람들이 많이 나와 증언합니다. 그만큼 일단 개인적 매력이 넘쳤다는 증거입니다). 심지어 그에게 큰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 상처를 입은 이들도 부지기수입니다. 재능이 분명 넘쳐났는데, 그 재능을 하나도 꽃피우지 못하고, 역사에 남을 범죄자로만 이름을 높인, 진정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조우한 누구라도, 일단 그 불 같은 정열과 조각처럼 빚어진 단아하고 아름다운 외모에 반하게 되었습니다. 거기까지는 그리 보기 드문 예도 아니라고 하지만, 그의 진짜 천분은 조각하는 재능에 있었습니다. 이는 당대 일류 조각가들이나 평론가들이, 그의 손놀림과 작품을 보고 이구동성으로 인정한 바라, 그가 예술사에 이름을 올려 놓지 못했다고 해서 쉽게 무시할 일은 아니겠습니다.

이 책 서두에 자세히 설명되고 있는 장소적 배경은 "빅맨플레이스"입니다. (철자는 Beekman place입니다. 추가 정보가 필요하신 독자를 위해 적어 놓습니다) 서두에도 자세히 나와 있고, 역자 후기에도 그런 취지로 되풀이되는 서술이 있습니다만, 한때 빈민가로 위상이 굳었다가 이후 몰아닥친 호황의 붐에 힘입어 고급 주택가로 거듭난 교과서적 사례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상계동이나 용산 일부가 이에 해당하겠구요. 저자는 당대에 큰 화제가 되었던 이 범죄 사건을 두고 그런 시대적 맥락과 연결하려는 듯한 의도를 책 곳곳에서 노출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런 단순화, 혹은 일반화가 쉽사리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자가 너무도 충실히, 연대기적으로 수집하고 복원한 이 책의 전 체계로부터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이 사건은 단지 한 지역의 시대적, 경제사적 특징이 빚어낸 비극은 아닙니다. 일차로는 한 개인의 유전적 질환이 큰 동인으로 작용한 비극이요, 다음으로는 인간의 얼굴을 오래 전에 도랑 밑으로 떨구어 버린 비정한 미국 자본주의가 주조한 괴물, 바로 젊은 로버트 어윈이 주연을 맡은 참극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아메리카의 비극"이라고 해도 좋은 것이, 그 넓은 미국 땅 중 안 나오는 데가 없을 만큼 대서양에서 태평양, 중서부에서 딥 사우스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지명이 구석구석 언급됩니다. 배경으로 단지 그치는 게 아니라, 로버트 어윈이 그 배경을 자기 행동과 생각의 자양으로, 장애물로, 화려한 무대로, 그리고 범죄의 기반으로 충실히도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숨길 수 없는 끼와 재능, 그리고 격정으로 뭉친 사내아이로, 주위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얼굴도 잘생겼는지 가는 곳마다 여성들의 구애를 받았고, 동성애자와 질 나쁜 남성 불량배로부터도 달갑지 않은 접근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자를 싫어하지는 않았으나 의외로 겁이 많았는지 성 경험은 미국 표준으로 대단히 늦은 21세때가 처음이었고, 그것도 매춘부하고의 만남을 통해서였습니다. 자기애가 강한 타입은 보통 (아무리 급해도) 매춘부를 상종하지 않는데, 이런 걸 보면 자기 존중감이 약한 구석도 있었나 봅니다. 처신 반듯한 여성을 꼬시려면 품고 있는 화제가 많아야 하고, 그 세계관이 보편 지향이라야 하는데, 아마 어윈은 그런 점에서도 한계가 있었을 겁니다.

어윈은 아주 골빈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층민 출신으로 고르게 지성이 발달하지 못한 유형이 흔히 그렇듯(다른 예로는 히틀러가 있죠), 편향된 지식을 머리에 집중적으로 몰아 넣고, 제 3의 가능성 없이 선과 악, 흑괴 백으로 세상을 이원화하여, 충분한 근거 없이 폭주하는 성향이 뚜렷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필연적으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자신의 세계관에 어긋나는 모든 것을 악으로 쉽게 단정합니다. 만약 이런 사람이 재능까지 부족하거나 외적인 매력이 결여되어 있다면, 상황에 따라 유력자에게 떳떳지 못한 방법으로 영합하는 모습(매춘이라든가)을 보이기도 합니다(참으로 표리부동한 성격이죠). 로버트 어윈은 정반대로, 도무지 타협이라는 걸 모르는 외골수였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그는 진정, 가는 곳마다 머무는 곳마다 싸우고 다투었습니다. 타고난 완력도 센 편이었는지, 그는 싸울 때마다 상대를 다 때려 눕혔고, 그래서 피해자로 둔갑하여 시스템의 비호를 받는 일도 전무했습니다. 그는 검사나 의학 전문가들로부터 "충동 조절 장애"라는 거의 일치된 진단을 받고, 정신 병원이나 교화학교에 수용되는 일로 청춘을 다 보내다시피했습니다. 어이가 없는 일이지만, 한편으로 근 80년 전의 미국이 이처럼 사회 방위 시스템(이런 시설은 우선 환자-죄인을 배려함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사회를 그 비정상 행위자로부터 지키기 위함이기도 합니다)이 잘 갖춰져 있구나 하는 감탄이 들기도 했어요. 여기에 나오는 갖가지 시설, 학교, 정신병원(진짜 이 책은 정신병원 교도소 교화시설 백과사전 같습니다. 안 나오는 이름이 없어요^^) 중에는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위디어 학교(책에는 "위티어"라고 적혀 있습니다)가 있는데요. 그 근방에 같은 이름의 위디어라는 로스쿨이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그곳에 출장차 가봤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로스쿨은 사실 미국에 있는 동종학교 중 삼류에 속하는 곳인데, 여기가 왜 유명하냐면, 바로 리처드 밀하우스 닉슨이 이곳을 졸업하고 변호사, 상원의원, 부통령, 그리고 대통령까지 당선된 신회를 이뤘기 때문입니다. 물론 닉슨은 탄핵의 흑역사가 있고, 여긴 여전히 삼류 로스쿨의 멍에를 못 벗고 있죠.

로버트 어윈은 조각 실력도 뛰어났고, 잘생긴 외모로 가는 데마다 인기를 끈 대단한 매력이 있기는 했나 봅니다. 그가 한때 사귈 뻔했던 여성 중에는, 나중에 큰 인기를 끈 연예인이 되거나, 될 뻔한(왜 되지 못했냐면, 바로 그의 손에 죽음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여인도 있고, 알고 지냈던 동생뻘 후배 중에는, 이수르 다니엘로비치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유태계 러시아 이민의 후손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당대 최고의 남우로 인기를 모았고, 할리웃에서 인맥, 돈줄로 막강한 영향을 행사했던, 커크 더글라스(이 사람은 빈센트 반 고호 역을 영화-1956년작 러스트 포 라이프. 한국어 제목으로는 "열성의 랩소디"입니다-에서 맡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원초적 본능'에 나온 마이클 더글라스의 아버지이기도 하죠. 아무튼 이 책은, 마치 솜씨 없는 작가가 이야기만 잔뜩 부풀리게 위해 억지로 지어낸 이야기처럼, 믿을 수 없이 다양하고 충격적인 사건으로 점철된 인생을 산 어느 불쌍한 젊은 범죄자의 사연입니다.

누가 사랑하는 여인이 있어, 이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활화산과도 같았던 열정을 품고 산 가능성의 총체를 곁에서 잘 보살펴 주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전혀 터무니없는 예상은 아닌 것이, 서양 역사를 보면 "이런 사람도 위인의 범주에 드나" 싶게, 충동과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불협화음을 빚은 이가 많았습니다(동양에는 이런 예가 잘 없죠). 그런 이들과 이 로버트 어윈은 종이 한 장 차이의 궤도를 걷지 않았겠습니까? 그저 환경이 불우하여 어떤 이는 희대의 범죄자, 광인으로 남았을 뿐이었겠죠. 책 읽는 분들이 조심하셔야 하는 게, 잔인한 묘사가 많습니다. 역자는 재미를 위해 "셀프 거세"라는 표현을 자주 적고 있는데, 남자들에게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효과를 내는 게 바로 "거세"일 것입니다. 해당 대목을 읽을 때 주의가 필요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의란 무엇인가 - 한국 200만 부 돌파, 37개국에서 출간된 세계적 베스트셀러
마이클 샌델 지음, 김명철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보는 관점에 따라 정말 기념비적인 현상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어요. "정의"란 개념이 이렇게나 대중의 화제에 오르고, 한 교수님의 저서와 강의가 베스트셀링 트렌드를 형성한다는 게 말이죠. 전 좀 시니컬해서인지, 어려서부터 "이런 논쟁나 연구에는 답이 있을 수 없으니, 참여하거나 관심을 둘 필요도 없어!"라고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시험에 나오기 때문에, 아 정의는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것(To Each His Own)이구나."라든가, 지난 시대 롤스의 definition 대로 "평등한 자유, 그리고 보충적으로 차등의 원칙" 같은 게 시험(중고등학교)에 나오니 딸딸 외우는 게 고작 그 한계였습니다. 그래서 몇 년 전의 그 열풍 때에도 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이번의 이 책은 번역 개정판입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해설서가 별개의 책으로 딸려서 온다는 거죠.

 

 

 

 

 

 

 

 

 

 

보시다시피 래핑이 아주 튼튼하게 두 권을 묶어 주고 있습니다. 처음 받았을 때 뜯기가 아까웠어요.
(안 뜯고 안 읽으려면 뭐하러 산 건지?)

 

이 책은 첫째, 음..... 제목을 배신하는 책입니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는 건 우리 모두가 이해를 하고 넘어가는 사항이니, 붕어가 없다고 해서 소비자가 분노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정의가 무엇인가?"하고 제목을 달아 놓았으면서, 결국은 롤스나 아리스토텔레스만큼도, 정의(定義)의 결론적 제시에는 노력을 보이지 않으니(뭐라도 명제 형식으로 내놓았어야죠), 정말로 "정의가 뭔지 교수님한테 배워서 알고 싶었다"고 마음 먹고 있었던 이들에게는. 다소의 허탈감을 안겨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었어요...

 

두번째 그러나, 이 책은 절대, 읽고 난 독자가 배신감을 느끼게 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했더라면, 본전 생각을 언제나 간절히 잊지 않는 한국 독자들이 이 책에 대해 센세이션을 불어 넣었을 리가 없습니다. 답도 없는 문제를 갖고 왜 이렇게 난리들인가 하며 반신반의하는 느낌으로 책을 열어 보고, 완독하고 나서, "아 사람들이 그럴 만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은 정의에 대해 어떤 명제화한 답을 내놓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저자 샌델 교수님은, 오히려 책 곳곳에서 일부러 그런 시도의 무의미함, 무익함, 나아가 해로움에 데해 경고까지 하는 모습이었네요. 그러니 제가 처음에 품은 회의감은, 오히려 책을 읽고 나서 원군을 얻은 형국이었다고 할까요? ("그래, 니 말이 맞아!"라고)

 

정의가 부르는 가장 큰 문제점은, 왜 그것이 정의임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많은 이들에 의해 무시되고, 또 준수되지 않고 있는가에 있다고 우리들은 흔히 생각합니다. 물론 이 역시 심각한 문제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보편적으로 관측되는 현상은, 사회적 약자일수록 정의라고 합의된 바에 대해 존중(respect)하는 태도를 띠고, 강자일수록 어떻게 하면 교묘히 정의의 제약을 넘어서느냐, 나아가 어떻게 하면 자신의 권위와 능력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이를 공개적으로 능멸하기까지 하느냐 정도이겠습니다. 사람들이 정의에 대해 그토록 민감해하는 이유는 "나는 이렇게 열심히 정의를 지키는데, 왜 너희들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분노에 기인한다고 봐도 됩니다. 어떤 의무를 나만 (내키지 않게) 이행하는 것만도 불만스러운데, 어떤 이들은 아예 정면으로 그 가치를 부정하는 모습까지 보이니 말입니다.

 

샌델 교수님은 그런데, 의외의 처방을 이런 우리들의 불편함 해소를 위해 제시합니다. 책은 결론뿐 아니라, 그 논의 과정에 있어서도, 많은 이들이 착각하고 있는 바와는 달리 "정의가 무엇인지"애 대해서는 우리들 사이에 아무 합의된 바 없다"는 전제 위에서 논의를 시작합니다. 합의된 바가 없다면, 어떤 방법론을 통해 무슨 합의에 이르러야 할지 같이 찾아 내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책의 장점은 여기에 있더군요. 저자는 각종의 사고 실험과 재치 있는 논변을 통해,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던 기존의 도그마들이 결코 당연하지 않았음을 증명합니다. 그토록 집착하던 상식이 실제로 그리 단단한 기반을 갖지 않았음을 알았을 때 우리는 소모적 허탈감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샌델 교수님의 대단한 점은, 우리들 반응의 귀착점을 그리 몰아 가지 않고, 생산적인 각성 쪽으로 능수능란하게 유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책은 따분한 도덕 강의가 아닙니다. 읽어가다 보면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끝까지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안 나옵니다. 그러나 같이 정의의 정의에 대한 모색을 하는 와중에 얻는 묘한 윤리적 쾌감이 있습니다. 어떤 난제라도 그 초석을 어찌 놓느냐에 따라, 결국에는 해답이 얻어지고 말리라는 낙관적 비전이 도출될 수도 있습니다. 답은 아직 없지만, 그 답은 반드시 나올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정의이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다 : 박정희 vs 마오쩌둥 - 한국 중국 독재 정치의 역사
박형기 지음 / 알렙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얼핏 들어 참 섬뜩한 말입니다. 제아무리 도덕과 윤리, 사상과 철학적 배경을 강조해도, 정치 투쟁은 결국 어느 쪽이 더 강한 무력과 배짱을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는 뜻이죠. 이 말을 한 마오는 다음과 같은 "명언"도 남겼다고 합니다.

 

"혁명은 디너 파티가 아니다."

 

어려서부터 가부장적이고 대단히 억압적으로 아이들을 다뤘던 부친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기를 보냈던 마오는, 그래서 "무산 대중의 정의로운 복리"라는 극한의 이상을 추구하는 혁명 수행 과정에서도 이런 리얼리즘 스탠스를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일본제국주의와 장개석 정권(그 배후에는 미국의 지원, 그리고 때때로 소련의 응원까지 있었던)이라는 가공할 만한 두 적수를 상대로 싸워, 최종의 승리를 쟁취한 사실이었습니다. 세계를 놀라게 했고, 현재까지도 진행 중에 있는 세계사 거대 형성 흐름 중 으뜸 변수를 새로이 만들어 낸 엄청난 사건이었죠.

 

한편, 우리는 잘 실감을 못하지만, 이민족의 지배에서 간신히 벗어났다가 내전(이후 국제전화하기까지 한)으로 초토화된 형편에서, 세계 10권 안에 드는 무역 규모와 GDP 수준을 이뤄 낸 한국의 성취 역시, 세계적으로는 대단한 주목을 받고 있나 봅니다. 얼마 전 베링 해에서 침몰한 원양 어선에 타고 있다 큰 인명 피해를 본 인도네시아 선원들의 가족 측에서, "한국 같은 선진국이 어떻게 해서 그런 노후한 배를 운항할 수 있는가."를 놓고 크게 분개했다는 뉴스를 접했는데요. 여기서 저는 해당 사건의 비극성보다 오히혀 "인도네시아인들도 의심 없이 인정해 주는 선진국"이 바로 한국이구나 하는 느낌이 더 빨리 와 닿았습니다.

 

도대체 가망이 없어 보이던 작은 나라가, 이 정도 어엿한 모습을 갖추기까지 가장 큰 기여를 한 건 과연 어떤 팩터였을까요? 주로 한국의 기성 세대들은, "지도자 박정희"를 그 첫손에 꼽곤 합니다. 물론 이는 논란이 아주 많은 이슈입니다만, 저자분이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는 "11월 14일(이날의 그의 생일이라고 하는데 저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습니다. 김일성의 생일이 4월 15일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요), 모든 언론에서 반신반인으로서의 박정희를 언급한 사실"이었다고 합니다.

 

반신반인이라.. 영어로는 DEMIGOD라고 하는 그 말이지요. 한국에 (일부 기성 세대가) 반신반인이라 칭송해 마지 않는 박정희가 있다면, 중국에는 거의 전 인민이 반신반인으로 숭모하는 마오가 있다. 이들은 공통점도 있지만, 서로 다른 점도 너무나 많다.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르며, 마오를 섬기는 민족과 박 장군을 섬기는 민족은 어떻게 그 장래가 달라지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어떤 지향을 가져야 하는지 모색해 보자는 게, 이 책을 다 읽은 독자로서, 저자의 의도가 이것 아니었을까 하고 파악한 테마입니다.

 

이 책의 특징은 첫째 교차 편집을 취하고 있습니다. 한 장(챕터)에서 마오를 다루다가, 몇 장 건너 박을 다루다가, 다시 중국의 사례로 돌아오는 식입니다. 이 둘은 인생의 청년기, 장년기, 커리어의 절정기, 깔끔하지 못했던 말년 등등 여러 국면에서 서로 비슷하거나, 반대로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점이 있습니다. 저는 과거 이이화 선생의 <한국 현대사의 라이벌>을 읽으며, 이런 서술 방식을 통해 두 feature의 실루엣을 비교, 대조하는 작업이 이처럼이나 인식상의 큰 도움을 주는구나 하고 놀라곤 했었는데요. 이 책은 책 전체가 "두 문제적 인물"에 초점을 두고 있어, 종전의 평면적 인식 한계 몇이 크게 극복된 느낌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이 책은 두 인물만 다루지 않습니다. 이 책은, 제 개인적으로는 박정희를 다룬 한국 현대사 일부보다는, 중국 근현대사를 다루는 파트가 (굳이 따지자면) 상대적으로 더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만큼, 마오를 중심으로 한 중국 관련 부분이 알차게 쓰여졌다는 뜻입니다. 비록 반신반인으로서 그토록 중국 전인민으로부터 치켜 세워지는 마오지만, 마오 혼자서는 오늘날의 이 과분한(?) 영광을 절대 누릴 수도, 그리고 그럴 자격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자분의 생각은 제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 책에서 마오 외에도 덩샤오핑에 대한 논의가 이처럼 자세히 이뤄진 것도 아마 그런 배경과 이유가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특히, 대약진 운동 실패, 문혁의 파국적 결과, 사인방의 횡포 방관, 조장 등 말년의 행적이 크게 어지러워진 채 타계한 마오가, 후계 문제까지 어정쩡하게 마무리한 상황에서, 화궈펑(화국봉)이 그대로 대권을 이어받았다면, 오늘날의 G2 중국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브레즈네프 치하에서 활력과 포텐셜을 모두 상실한 소련처럼, 몇 개의 민족 단위로 사분오열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죠. 이 책의 저자가 뚜렷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덩샤오핑이라는 걸출한 후배(저자의 표현입니다)가 아니었으면 이 모든 번영도, 그리고 반신반인으로서 숭배 받는 마오도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명 제국을 망하게 한 농민반란군 이자성 정도의 인물로 기억되는 게 고작이었겠죠.

 

사실 마오와 박은 같은 논의의 선상에 서기가 좀 곤란한 면이 있습니다. 박은 건국의 리더 혹은 국부 비슷한 존재가 아니며, 파산 직전에 몰린 국가의 거시 경제를 잘 핸들링하여 회생시킨 유능한 관료형 인물에 가깝습니다. 단지 그 권력을 장악한 과정이 군사쿠데타였고, 역시 무력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마오와 겉모습상 유사점이 있다는 것 뿐입니다. 굳이 박을 중국의 어느 지도자와 매칭시키자면, 마오가 아닌 덩이 되어야 그나마 균형이 맞죠. 물론 인구나 영토의 규모로 보나, 현재 점유하고 있는 글로벌 위상으로 보나, 한국과 중국이 비교선상에 오르는 것도 어찌 보면 무리입니다. 여튼 "그 가진 권력이 총구로부터 나왔던 두 사람"을 주제로, 이 책은 아주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펴 나가고 있습니다.

 

마오의 생애 전반기 이력은 마치 수호전이나, 잘 쓰여진 일류 무협지의 주인공의 그것처럼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입니다. 이 책에는 저우(나중에 "영원한 총리"가 되는 바로 그이)와, 마오가, 대장정 도중 망중한의 모습으로 한 컷에 찍힌 사진이 있습니다. 저는 그 사진을 보며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참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저우는 촌스러운 상관, 주군 마오와는 극히 대비되는 세련된 매너와 외모로 잘 알려진 국제 신사이지만, 이 사진에서의 젊은 모습은 그의 노년기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그만큼 곱게 늙었다는 의미도 됩니다만). 반면, 사진 속의 젊은 마오는 얼굴선이 갸름하고, 다소 수줍게 보이는 미소까지 머금고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제가 알던 마오가 아니라서, 몇 번을 두고 거듭 들여다 보았는지 모릅니다. 이런 미청년이, 어쩌다 관리를 잘못해서 그런 투박한 모습으로 바뀌었을까요? 흔히, 마오안잉(한국전에서 전사한 그의 맏아들)을 두고, "어떻게 저런 아버지한테서 저런 아들이 나왔나"며 의아해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이 사진에 나온 마오의 미모(!)를 한번 봐야 합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 불러 줘도 지나칠 것 없습니다.

 

저 사진이 잘 상징하는 것처럼, 마오의 대장정은 그저 정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추악한 투쟁이나 살벌한 아귀다툼이 아니었습니다. 마오가 이끄는 홍군은 가는 곳마다 토지 개혁, 엄격한 군율이 바탕이 된 치안 유지 등의 시책으로, 기층 민중의 환영과 지지를 확보했습니다. 전쟁이 아니라 도덕과 정의의 실현이었고, 그렇다고 전투 능력이 취약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맹장 밑에 약졸 없다고, 마오의 휘하에는 주더(주덕), 펑떠화이(팽덕회), 임표(린뺘오) 등 쟁쟁한 영웅, 지략의 천재들이 즐비했습니다. 장군 한 사람이 원맨쇼를 한 게 아니라, 이처럼 신화의 전형적 패러다임에 속속 아귀가 맞는 아름다운 서사 구조를 지니고 있었던 게 바로 마오, 아니 홍군, 아니 중국공산당의 대장정이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이런 고아한 십자군(물론 진짜 중세의 십자군은 말할 수 없이 타락한 강도떼들이었습니다만)의 캠페인은 존재한 적이 없었습니다.

 

자, 그런데, 그 이후는 어땠습니까? 말 위에서 천하를 얻어도, 말 위에서 다스릴 수는 없다던 육가의 말도 있습니다만, 마오는 일단 천하를 얻고 난 후에도, 동란과 내전시에 통하던 방식으로 대륙을 다스리려 했습니다. 대약진운동은 목적과 수단이 완전히 뒤바뀐, 권력자의 치적과 자기 만족을 위한 광기 어린 정치 쇼였습니다. 쟁기를 녹여 저품질의 철강을 생산하려 든 탓에, 농기구가 없는 농민들은 일제가 남경에서 학살한 수에 맞먹는 규모로 아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어찌해서 권력을 잡기 전과 후가 이렇게도 달라질 수가 있는 건지요. 이런 참사는 지도자가 무능해서 빚어진 일이 아닙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대장정 당시의 제스처가 거짓이 아니었을진대!)이 조금만이라도 있었다면, 이런 어이없는 인재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터입니다.

 

문혁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아까운 인재, 그리고 공산당의 영걸과 국부들이 죽어갔는지를 살펴 보십시오. 이 책에도 잘 나와 있지만, 펑 원수는 손자뻘도 안 되는 홍위병들에게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모욕을 당하며 조리돌림을 당했습니다(저자분은 이 대목에서 팽 원수가 팽 당했다는 재담을 하시던데, 저는 그게 그리 좋게 읽히지 않았습니다). 류사오치와 그 영부인 왕광메이의 사진을 보십시오. 악의라고는 조금도 없는, 동양인이 보여 줄 수 있는 모습 중에서 가장 안온한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 건국 이후 마오의 모습은, 대머리가 벗겨진 채 탐욕과 야심이 기름기로 가득 배어 나온, 누가 봐도 그리 좋은 인상이라고 할 수 없는 분위기랄까요. 인상이 그렇다는 것뿐 아니라, 그가 실제로 남긴 행적만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유능한 지도자 덩을 후계에 점찍고 물러나기만 했었어도, 마지막에 자신의 과오를 일점이나마 회오하는 바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신의 고집을 이어나갔고, 그가 죽는 즉시 끈 떨어진 인형 신세가 될 4인방을 미리 척결하지도 않고 어정쩡한 무마형 지도자인 화 원수에게 자리를 물려 주었습니다. 덩이 그 자리를 차지한 건 자신의 능력과 의지, 책략에 의함이었지 마오가 도와 준 바 하나 없습니다. 4인방이 그대로 폭주하다 망했을 법한 중화인민공화국은, 천행으로 덩 같은 지도자를 만나 오늘날의 G2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저자는 역사 인식의 면에서 "중국분, 한국인, 일본놈"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저는 이에 대해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간악한 일본놈 이야기는 할 것도 없고, 문제는 과연 저런 폭력적인 지도자를 내내 "반신반인"으로 섬기는 중국인의 역사 인식이 동아시아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돈은 나중에 벌면 되는 거고, 그는 체면을 살려 주었다." 그렇다면, 대약진운동과 문혁 과정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원혼들은 어디 가서 보상을 받아야 할까요? 마오가 한 일은 마오가 한 일이고, 덩이 한 일은 덩이 한 일입니다. 덩이 사후 땜질을 잘하고 제 2의 건국을 이뤘다고 해도, 그 때문에 마오의 과오가 덮이는 건 결코 아닙니다.

 

저자는 부친과의 대화를 책 중에 적어 두고 있습니다. "민주화가 밥 먹여 주냐?" 이제는 대답하실 수 있다고 합니다. "예, 민주화는 밥 먹여 줍니다." 민주화가 밥을 먹여 주든 말든, 민주화는 그 자체로서 추구할 가치가 있으므로 이런 논의는 어차피 무의미합니다. 문제는 말입니다. 왜 이 말을 중국에 대해선 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마오는 근 백년 간 서양 제국주의에 유린되고, 최근세사에는 왜놈들에게 능욕을 당한 민족의 자존을 지킨 공적이 있습니다. 경제 발전은 마오가 아닌 덩의 치적입니다만, 여튼 이 둘을 백보 양보해서 세트로 볼 수도 있다고 합시다. 민주화는 어디로 갔습니까? 중국 국민들은 대학생, 아니 대학 교수라고 해도 인터넷도 제 맘대로 쓰지 못하는, 철저히 표현의 자유가 억압된 국가입니다. 영화배우 주윤발(그는 관화로 "저우룬파"라 하지 않고, 광둥어 "초우 윤 팟"이란 발음을 고집하죠)은 최근 홍콩 정세에 대해 비판적인 언급 몇 마디를 했다고 바로 대륙 활동 금지를 당했습니다. G2면 뭘합니까. 몇몇 슈퍼리치가 호사를 누릴 뿐, 절대 다수 국민들은 입에 풀칠을 할 수 없어 남의 나라 바다에까지 와서 해적질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나라가, 과연 세계의 표준을 정할 자격이 있을까요. 과거 중국은 공맹의 가르침으로 세계를 교화하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명나라, 심지어 병자 호란 이후의 청나라도, 적당한 예의만 갖추면 속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고 우의를 도모하는 쪽으로 정책을 잡았습니다. 지금의 중국은, 마오의 광기어린 책동으로 유교 도그마를 모조리 파괴한 적도 있는, 과거와의 전통이 단절된 국가입니다. 중국과 마찰을 빚는 건 일본뿐이 아닙니다. 필리핀이나 베트남과 그리도 끈질기게, 대국답지 못한 좀스러운 영토 분쟁을 이어나가는 건 무슨 이유일까요? 이런 폭력적인 노선을 이어가는 것도, (저자분 자신이 이야기했듯) 폭력의 화신이었던 마오를 반신반인으로 떠받드는 중국인들의 인식이 미개해서가 아닐지요. 마오가 민족 자존을 위해 큰 업적을 남긴 것과, 통일 후 국민들의 진정한 존엄과 복리를 위해 과연 뭘 했느냐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박정희 따위가 무슨 반신반인입니까. 반신반인이라는 개념도 기준도 필요 없습니다. 박정희가 자격이 없다 해서, 반대로 마오가 그만큼 더 위대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폭력으로 권력을 장악한 자는, 그 원죄와 업보를 영원히 안고 가는 것입니다. 박정희가 헌정 질서를 문란케 하고 그 자리에 올랐다면, 마오는 스스로 수립한 헌정 가치 체계를 파괴한 자라고 해도 됩니다. 사람이 대체 얼마나 죽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박정희가 딸 뻘되는 연예인, 여대생을 술자리에 불러 희롱했다면, 마오는 손녀뻘 되는 미성년자를 떼로 불러 환락의 난장판에서 노리개로 써먹었습니다. 도찐개찐이지 둘 사이에 무슨 우열을 가른단 말입니까.

 

우리 민족이 위대한 이유는, 그런 박정희에 대해 우상화의 더께를 씌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줄도 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중국에서 마오를 그렇게 보는 이가 누가 있습니까? 저자가 말씀하신 대로, 민주화를 이루지 못한 국민은 애초에 논의의 장에 나서질 말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아닌 남의 노예로 사는 자가 무슨 기준을 정하고 세계 정세를 논할 발언권이 있단 말입니까.

 

枪杆子里面出政權

枪杆子는 총자루라는 뜻입니다. 里面은 우리식 한자로 쓰면 裏面, 즉 "속" 정도의 뜻입니다. 政權은 말 그대로 정치 권력이죠. 그래서 "총구 안에서 권력은 나온다"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중국어에는 과거, 현재, 미래 하는 시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오의 이 유명한 말은, 과거는 물론 현재에도 불변이 진리라는 오만한 선포로 들립니다. 마치 아돌프 히틀러가 "거짓말은 크게 떠들어야 대중이 속는다"고 공갈을 친 것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누가 들어도 이게 좋은 뉘앙스를 안 풍깁니다.

 

저는 "박정희의 경제 치적은 인정해야 한다."는 저자의 평가도, 그 전후의 맥락에 비추어 볼 때 괜한 구색맞추기로 들립니다. 저자의 논리대라로면, "경제 발전 역시 그 시대에 땀흘려 열심히 산 민중의 공이다"가 되어야 앞뒤가 맞지 않을까요? 반신반인이라는 건 없습니다. 역사는 객관적, 과학적으로 판단해야지 신적인 지도자라는 게 어디 있단 말입니까? 박 장군이든 마오든 반신반인은 결코 아니고, 그 이전에 반신반인이라는 건 있어서도 안 됩니다.

 

권력이 과거에 총구에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으나, 현재 그리고 미래에는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모두 권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에 대해 컨센서스를 이루고 있습니다. 헌법 제 1조 2항을 보십시오. "권력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외에 어떤 정답이 필요합니까?

책 제목은 묘하게도 과거형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저자분의 의도가, 총구에서 구권력이 나오는 비극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에 있다고 새기고 싶습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중국에 있어 가장 필요한 건 반신반인 같은 게 아니라 민주화입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민주화는, 밥보다 중요한 인간 존엄 본체에 해당하는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