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능의 충격 - 심리학의 종말
이일용 지음 / 글드림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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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은 보시다시피 "지능의 충격"입니다만, 저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지능의 충격의 충격"을 받았다고나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자분에 대해선 일절 약력 표시 사항이 없어서 대체 어떤 분이실까 하는 궁금함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가능하면 찾아 뵙고, 테이블 아래에 떨어진 가르침의 부스러기라도 좀 주워서 가져 왔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요즘 "이것이 퓨처다"라고 선언될 만한 R&D의 화두는 단연 "인공지능"분야가 되겠습니다. 얼마 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은 과거에 스티븐 호킹 박사는 "인공 지능이 이 추세대로 발전하면, 인류는 그 생존에 위협을 맞이할 것이다"라는 취지의 발표를 한 적 있습니다. 사실 저는 "아무리 회로 집적 기술이 발전하고, 또 빅데이터의 이용 방안이 개선된다 해도, 과연 CPU와 하드, 메모리가 그 본체에 불과한 EDPS가 인간의 두뇌를 넘보는 일이 과연 생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감정"이라는 요소를 아무리 분석한다 해도, 이를 부호화(코딩)하거나 프로그램으로 구축할 수 없는 이상, 지능은커녕 지능 유사의 어떤 시스템 구축도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는데요.


이 책의 저자분께선 일단 지능의 정의를 달리 잡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지능이란, 아주 제한된 분야에 특출한 솜씨를 보이는 게 지능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훈련을 통해, 혹은 타고난 천성, 선호 본능에 의해 뭐 하나를 제한적으로 잘 수행하는 건 "지능이 뛰어나서"가 아니란 거죠. 돌고래가 곡예를 펼치는 모습을 보십시오, 우리는 일상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애완 동물이 신기한 짓을 하면, "지능이 높다"는 칭찬을 자주 해 줍니다.

그런데 이건 모순이 있습니다. 만약 "지능이 높다"는 말을 그렇게 해석하고 활용하면, 왜 그 애완동물은 그 단계에서 한 치의 발전도 못 보인 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까요? 인간은 나무 위에 머물러 있다가 "이렇게 사는 것보다는 저 나뭇가지를 손으로 집어, 손으로 못 하는 일을 하는 게 낫겠다"는 자각을 했습니다. 존재하는 도구(처음부터 도구로 존재한 게 아니라, 인간이 손을 뻗어 도구로서 활용하고 나서야 그것이 도구가 되었습니다)를 그대로 손으로 잡고 휘두를 게 아니라, 간단한 건 이어붙이기도 해서 기능과 모양을 게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였겠습니다만, 여튼 기존 패턴의 반복에 그친 게 아니라 발전이요 진화였습니다. "지능"을 가진 주체라면, 이처럼 우연히 습득한 행동 패턴을 반성 없이 되풀이하는 게 아니라, 머리 속의 아이템을 종합, 통합하여, 새로운 컨텐츠와 행동 지침을 만둘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동물한테는 그게 있습니까? 우리는 그래서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을 규정하는 "지능"이라면, 그 지능은 단순한 "흉내내기", "베끼기"의 기술에서 벗어난 것이라야 합니다. 어리석은 인간은 "귄위 있는 소스를 베낌"을 자랑으로 삼고(실제로 그 저자들 급의 뻬어난 선생에게 배운 적도 없으면서, 몇 십 년 전의 활자 잔해를 두고 자기 기만의 페티시로 삼습니다. 실제 저자들이 보면 어이없어할 일이죠), 굳어 버린 머리로는 단 한 줄의 신선한 컨텐츠도 창조해 내지 못합니다. 이십 년 전 대학 리플렛 쪼가리에서 주워 들은 구호의 파편이 머리에 든 것의 전부일 분, 정작 정평이 난 텍스트 본의는 해석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부실한 정보 조각과 일치하는 것만 골라 근근히 꿰어 맞출 뿐입니다. 


저자분은 "지능이란, 특수한 분야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사항에 대해 두루 통하는 이해, 발견, 응용력, 그리고 재창조"에 연관된 것이어야 한다는 취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만 잘하는 건 지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저 우연히 감정적 선호가 그 대상에 꽂힌 결과일 뿐입니다. 저도 싧제로, 어느 전기 작가가 처칠에 대해 논한 글에 이런 말이 나왔던 것이 생각납니다. "처칠이야말로 정치, 예술, 문학, 군사"에 두루 능한 사람이었으므로 진정한 천재라 할 만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저 뛰어난 장군이었을 분이니 천재라 불릴 자격이 없다." 여기서 이 사람은 "천재"란 단어를 쓰고 있지만, 그건 단어의 오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 말("천재")을 "(이 책의 저자분처럼) 우리가 계발하고 지향해야 할 참다운 지능"으로 해석한다면, 앞뒤가 척척 들어맞는 맥락이 완성됩니다. 


수 세기 전 그토록 뛰어난 천재들도(특히 조선 시대라면), 기초적인 수의 개념이나 도형을 이해하는 데에 그토록 애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저자분도 지적하시다시피) 지금 세상엔 유치원생들도 장난처럼 다루는 내용들에 불과합니다. 이 아이들이 머리가 특별히 뛰어나져서 그런 걸까요? 결국 인간은 자기 두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자기가 속한 시대의 첨단 지식 정도는 얼마든지 자유자재로 소화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특별한 컨텐츠의 창조야 천재의 전속 권한이라고 가정해도 말입니다.


저자분께서는 "어떤 사람이 학습에 실패한 것은, 정말로 실패해서가 아니라, 에너지 소모를 줄이기 위해 무가치한 학습에 대한 자발적 차단을 행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공감가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도 예전에 "이런 걸 뭐하러 배우나" 싶어 미뤄 놓았던 분야를 지금 다루고 있습니다만, 이게 이렇게 재미난 분야였나 라고 지금 깨달아서 신나게 하는 중이죠. 과연 머리는 쓰면 쓸수록 좋아지는 건지, 다만 어깨 근육에 무리가 안 갈 정도로 몰두하면 이 분야에서 못할 게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저자분이 말씀하시는 학습의 새로운 쾌감 발견 아니겠습니까?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좋은 내용, 평소에도 어렴풋이 이거 아닌가 하고 여겨 왔던 생각들을 콕콕짚어 주셔서, 정말 큰 기쁨과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완독은 했으나 아마 제가 채 캐치 못하고 지나간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두고두고 읽어서, 남 좋은 일 시키는 게 아니라 내 능력을 계발하는 소스, 영감의 원천으로 삼고 싶네요. 이런 책을 써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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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목민심서 - 상
황인경 지음 / 북스타(Bookstar)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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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다산 탄생 250주년이 된다는 건 이 책 뒤표지를 보고 알았습니다. 다산 정약용은 아마도, 성리학 그 지구 최후의, 그리고 유일한 보루로 조선 반도를 지키고 있을 무렵, 그 땅에서 용감하게, 그리고 외로이, 그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땅에서 굶주리고 수탈당하는 백성들을 위해 대안(代案)의 사상을 궁구한 분입니다.

공자는 일찍이 학문의 바른 길을 올곧이 걷는 이들을 두고 실학(實學)에 몸담는다며 규정한 바 있었지만, 주희가 유학을 하나의 도그마로 만든 이래 현실과 유리된 무익한 논의만 일삼는 풍조를 결과적으로 조장한 후, 조선의 성리학은 허학(虛學)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다산은 명문가의 소생이고, 금상(今上)의 총애를 받았으며, 용모도 준수했고, 타고난 재능도 출중했기에, 당대 사대부들이 선택한 표준적인 경로만 밟았어도 입신과 출세에 아무 지장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편한 길, 넓은 문을 마다하고 구태여 가시밭길 걷기를 선택했습니다. 그의 집안은, 다산의 대(代)에 이르러 그 총명한 자질을 높이 산 정조대왕이 젊은 그를 아끼고 요직에 등용했기에 벼슬길에의 전망이 비로소 트이기는 했으나, 소속 당파가 남인이었기에 여전히 주위의 견제와 압박이 심했습니다. 정조 같은 걸출한 임금이 등장하여 실질적 탕평책을 펼쳤지만, 노론의 굳건한 인맥이 곳곳에 심어 둔 인의 장막을 걷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이었던 셈이죠.

 

남인 진영의 젊은 인재들이 하필 당시에 쉬이 경도되었던 흐름이 천주학, 즉 가톨릭이었습니다. 괴력난신을 논하는 걸 금기로 삼았던 유학과는 달리, 서양의 이 신선한 종교는 태초에 어떤 원인이 작용하여 만물이 생성(창조)되었고, 그 창조주의 모습을 따라 빚어지고 입김에 의해 영혼을 갖게 된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평등한 존재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소설 속에서 이벽과 그의 부친이 벌이는 짧은 논쟁처럼, 존재와 이치의 근원을 논하는 서양 종교의 가르침과, "영원 따위가 어디 있냐"면서 눈 앞에 보이는 인륜과 질서를 더 중시해야 한다는 전통의 입장이 서로 맞서고 있었습니다. 다산의 형 정약전은 동생과 거의 같은 시기에 과거에 급제한 인재였는데, 이 천주학에 대해 동생보다 더 경도된 입장이었습니다.

 

능력은 떨어지지만 출세욕, 과시욕은 그 누구에 못지 않게 발달한 이들이 많죠. 간신히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성적이 낮고 업무에 미숙하며 글재주가 부족하다 보니, 각별히 영명했던 임금의 눈에 들 길이 없어 절치부심하던 무리가 있었습니다. 이기경 같은 이는 처음에 다산의 좋은 벗이었으나, 그의 끝없는 총기와 기억력, 바른 마음, 심지어 번듯한 용모 등의 장점에 깊은 열등감을 느낀 나머지 홍낙안 같은 간교하고 사악한 무리의 모략에 동조하기도 했습니다. 이 소설은 이처럼, 노론과 남인의 대립이라는 익히 알려진 프레임을 통해 다산의 고초를 분석하지만은 않고,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세상에 언제나 있기 마련인 뭇 인간들 사이의 시기, 질투, 모략, 중상 등을 잘 묘파하고 있습니다.

 

작가분은 이 시대 양반층에 대해 자주 처분되었던 "유배형"에 관하여, "요즘 식으로는 집행유예에 해당한다 할, 편의를 좇은 조치"라고 평가합니다. 천주학이 분명 체제 윤리와 원칙에 반하니 여론(양반 지배층의)에 따라 처벌은 해야겠고, 살펴 보니 아까운 인재인데 신체형(곤장 등)을 내리기는 망설여질(이 책에도 자주 나오지만, 장형은 대부분 상처가 악화되어 목숨을 잃는 지경까지 이르릅니다. 사실상 유예된 사형 집행이나 마찬가지였죠) 때 이런 선택이 쥐해졌습니다.

 

민생이 도탄에 빠지면 (이 시대로부터) 삼백 년 전의 상황처럼, 도적이 들끓는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이 소설에도 박만덕이라는 자가 등장하여, 탐관오리 김양직에 대한 성토를 늘어놓고, 당시 정조에게 암행어사직을 부여받아 지방 행정 감찰에 나섰던 다산은 이 불학무식한 악민(惡民)의 사연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남다른 귀골과 태도에서 배어나는 배짱에 이미 이 젊은 선비가 이인(異人)임을 눈치챈 만덕, 그리고 그 졸개들과 다산이 서로 소통하는 장면도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큰 재미입니다.

 

빼어난 학자, 관리가 다른 이들이 채 보지 못하는 바를 보고, 태연히 자행되는 기만과 비위를 있는 그대로 그르다고 지적하면, 이를 역으로 타매하여 구린 속을 감추고 도명하려는 악당들이 흔히 있기 마련입니다. 학문이 부족한 자는 열등감 때문에, 부정을 저지른 자는 추급 , 사정에의 두려움 때문에,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 지도 모르고 옳은 이를 도리어 매도하게 마련입니다. 다산은 이로 인해, 벼슬길에 머물 때보다 더 많은 기간을 유배지에서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유배지에서도 저술 작업에 몰두하고, 평민과 토착민 사이에서 능력 빼어난 이를 뽑아 제자로 기르는 등, 가장 어려운 시절에도 애민과 애국에 실천으로 나선 인물이었습니다. 민족의 스승으로 모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 다산의 생애에 대해, 재미있는 소설 형식을 통해 많은 공부를 할 수 있는 유익한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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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 최신 인지심리학이 밝혀낸 성공적인 학습의 과학
헨리 뢰디거 외 지음, 김아영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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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과목이 절대 평가로 전환된다든지 하는 조치로, 앞으로 학생들은 입시 지옥으로부터는 점진적인 해방을 맞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사실 과거와는 달리, 요즘은 입사 전형에서도 대학 간판을 잘 보지 않는 추세라, 이 책에도 나오는 표현처럼 과연 명문대 졸업장이 당사자에게 과연 큰 도움이 될지는 의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 있지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과거에는 고3 시절 열심히 공부하다 좋은 대학 진학 후엔 (특별한 일 없으면) 무난히 졸업해서 좋은 직장 얻는 게 정해진 코스였습니다. 그러나 평생 직장 신화가 무너지고 나서는, 중간 간부직 이상으로 승진한 후에도 공부 안 하면 하루도 못 버티는 형편이 되었죠. 오죽하면 삼전에 근무하는 이들이, 라이벌 모 전자 직원들을 두고 "너희들이 여기 오면 얼마나 버틸 것 같냐?"고 조롱하는 분위기가 아주 어색하지만은 않은 반응을 얻습니다. 그 모 전자 역시, 입사하기에 얼마나 어려운 곳입니까.

 

입시를 앞둔 아이들뿐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접한 후 이른 시간 안에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업은, 이제 경제 활동을 하는 인구 모두의 미션이 되어버린 현실입니다. 일단 현장에서 바로 써먹어야 하기 때문에, 신속히 습득하는 것도 문제이고, 이 습득한 지식으로부터 2차 성과를 내기 위해, 자신의 머리 속에 진득히 장착하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가면 갈수록, 그저 무난한 직장인 정도로 사는 것조차 힘들어지는가, 그건 (역시 이 책에도 나와 있듯) 지금 세상이 유난히 지식 폭발, 신기술 이노베이션이 인류 역사상 초유의 모드로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라서 그렇습니다. 앞 세대들은 이런 곤란을 겪은 적이 없고, 은퇴한 지금은 노동 능력이 부족하니 기득권에 집착하고, 요즘 세대들은 일은 일대로 힘들고 손에 떨어지는 건 더 빈약하니 세대 간 갈등이 생기는 건 당연하죠. 그렇다고 개인 차원에서 당장 구조를 뒤집을 힘은 없으니, 현 직장이 요구하는 바 과업을 충실히 해 내는 게 그나마 최선의 선택입니다.

 

사회의 실정이 이러니, 아이들에게 현실을 들려 주면 "이 지옥을 통과해도 더한 지옥이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깊은 절망에 시달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현실 도피, 왜곡이 정답일 수는 어느 경우에도 없는 법입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결국 평생 공부하는 길만이 생존의 비결이라면, 바르게 공부하는 방법을 익히는 수밖에 없죠. 흔히 하는 말로, 물고기를 먹이지 말고 그 잡는 비결을 가르쳐 주라고 합니다만, 거액의 유산- 그 형태에 따라 시세의 변동, 혹은 경솔한 판단으로 하루 아침에 날아가 버릴 수도 있는- 을 물려 주는 것보다, 배운 후 평생 재활용, 변형 응용이 가능한 지식을 아이의 머리에 깊이 심어 주는 게 더 고마운 부모의 은혜일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읽으면서 충격을 선사하는 내용을 가득 담고 있더군요. 저는 제 나름대로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공자님의 그 유명한 학이(學而)편 서구(序句)처럼, "배우고 때때로 익히는 것"만한 공부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말이죠, 지금 이 책에 따르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었더군요. 그것 참....

 

먼저, 무작정 기계적으로 행하는 복습은 아주아주 해롭다는 게 저자들의 결론입니다(이 책은 단일 저자가 쓴 게 아니라, 학습 방법론과 심리학에 정통한 여러 학자들의 콜라보, 그리고 실증적 실험과 연구의 결과물입니다). 사실은 본인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꾸 보기만 보다 보니, "모르는 걸, 혹은 깊은 이해도 이뤄지지 않은 걸, 안다고 착각"하고서는, 약점을 보충하거나 깊은 내용으로 파고들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지적은 정말 너무도너무도 타당한 사항입니다. 제가 현재 실무에서 자주는 아니라도 종종 겪는  일이거든요. "아니 그게 그런 뜻이었어?" 마치... 뭐랄까요. 와이프의 고마움을 모르고 그녀의 진가를 평가하지 못한 채(와이프 좋은 일 시키는 게 아니라, 내 아내가 이런 사람이었어?를 먼저 알고 그녀를 즐겁게 해 주면 그건 나에게 좋은 일이라고 상무님이 그러시더군요 ㅎㅎ) 맨날 보는 여자라면서 심드렁하게 대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나쁜 습관의 반복은 권태기로 이어지고, 뜻하지 않게 "위기의 부부"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죠.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즉 메타적 재귀적 비판 없이, 반복적으로 그저 보다 보니 내가 아는 것, 내가 잘하는 것이겠다 착각하는 건, 누적이 되어 치명적인 업무 실책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겪은 건, 처음에 좀 고생이 되더라도 이해 안 되는 부분을 확실히 짚어 가며, "이 모호한 설명은 진짜 의미가 뭘까?", "이 부분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까?" 라며 물어가고 검색하고 여러 권의 책을 찾아 보는 노력이, 그 지식을 진짜 머리 속에 오래 남게 하는 비법이더라는 겁니다. 이건 제가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부분입니다. 엉터리로 의대 공부 마친 놈팡이가 평생 돌팔이 노릇하는 것이나 비슷하다고 할까요?

 

이런 의미에서, "배우고 (기계적으로) 때때로 익히"는 건, 만약 그 "습(習)"의 의미가 종래 피상적으로 이해한 바의 확인에 불과하다면, 아주 치명적으로 해로운 방식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자, 그러면, 그 구절의 앞부분, 즉, "배우고"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아니, 무엇이어야 할까요?

 

요즘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게, "자기 주도 학습법"입니다. 누구 다른 이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해 나가는 방법이야말로, 이상적인 공부 패턴이요 자립형 인격의 완성이기까지 한 의의를 지니고 있겠죠! 누가 감히 동의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위에 제가 스스로 찾아 나가는 학습법의 미덕을 적어 두기도 했습니다. 아닌게아니라요) 이 책 저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것도 문제가 크다는 말입니다. 무슨 소리인가.

 

자기 주도 학습의 크나큰 맹점은, 말 그대로 자기가 주도하다 보니, 크로스 체크, 혹은 메타적 시선에서 자기 반성이 이뤄지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쉽게 말해, 틀린 게 있어도 자기 확신에 빠져(똑똑한 사람일수록 더 이런 경향이 강합니다), 틀린 줄을 모르고 그대로 프로세스를 진행해 나간다는 거죠. 이게 예를 들면, 단어 뜻을 잘못 알고 있거나, 수학 문제를 잘못된 방법으로 접근해 나가도, 내가 본래 잘하는 사람이니 내 방식이 맞겠거니 하고 고칠 줄을 모릅니다. 그러다가 그 방법이 안 통하는 문제에 처음 직면하고서야 큰 낭패, 회복 불가능한 실패를 겪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들은 타이거 우즈 같은 천재형 스포츠 선수도, 우수한 코치를 언제나 곁에 두는 팩트를 지적합니다. 우수한 인재일수록, 매너리즘에 빠져 어느 순간 잘못 들어선 경로를 수정하지 않기 때문에, 곁에서 쓴소리를 하는 멘토를 필요로 한다는 겁니다. 역사의 예를 들면 당 태종 이세민 같은 사람이 그랬습니다. 이 사람은 머리도 좋았고, 무예도 뛰어났으며, 전술 전략의 판단도 아주 명쾌하고 신속하게 내리는, 한마디로 사기 캐릭터였습니다. 위징은 반면 자신의 정적이었던 형의 최측근 모사였고, 형의 세력이 완전 파멸한 후에도 (이미 최고 실력자가 된)자신 앞에서 죽을 각오로 할 말은 하는 위인이었죠. 그러나 이세민은, 메타형 자기 체크를 언제나 곁에 두고행해야 내가 살아남는다는 뚜렷한 자각이 있었기에, 위징을 죽이지 않고, 아니 죽이기는커녕 지근거리에 중신으로 대접하며 그의 쓴소리, 멘토링을 경청했습니다. 잘나가는 사람일수록 더 코칭이 필요하다는 건 이를 두고 이름입니다.

 

저자들은 그런 주장을 합니다. "요즘은 뛰어난 학습자일수록, 그리고 머리에 더 정돈된 지식과 판단 체계가 구축된 사람일수록, 자기 교정 작업에 능숙하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일이 안 풀리고 성과를 못 내는 사람일수록, 잘못을 고치기는커녕 비뚤어진 보상 심리로 오히려 자기주장의 고수에 더 맹목적으로 집착한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자신의 본업에 몰입하기보다, 도피 심리에서 거대 담론에만 빠져들기 쉽기도 하고요. 일이 안 풀릴 때, 귀인(歸因)을 외부에서 찾기보다, 나의 학습 방법이 잘못된 바가 없었는지 먼저 반성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참으로 유용한 지침을 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읽고, 공부가 잘 안 되는 아이에게 마음을 터놓은 대화를 시도하기에 좋은 책입니다. 이런 방법론을 주제로 하고, 기존의 통념을 다 뒤집고 실무에까지 도움을 주는 책을 극히 드물게 보았기에 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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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공명 병법서 - 마음을 공략해 천하를 얻는 최고의 전술서 마니아를 위한 삼국지 시리즈
제갈공명 지음, 조영렬 외 옮김, 모리야 히로시 해설 / 서책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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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결국은 인간의 마음을 파악하고 사로잡는 것이 병법의 요체라는 게 이 책의 포인트라 하겠습니다. 제갈량은 <연의>에서 신출귀몰의 반신반인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사실 그는 일반의 선입견과는 달리 충직한 공무원, 섬세한 관료형에 가까웠다는 게 정사에 나온 그의 진면목이라는 점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정사 <삼국지>를 저술한 진수의 평가에 따르면 그는 대단히 치밀한 사고의 소유자요, 그리고 정석적인 매뉴얼(요즘 표현을 굳이 쓰자면)에 충실한 하이 레벨 뷰로크라시의 미덕을 신봉하는 인물이었지만, "임기응변"에 약하다는 게 치명적 단점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진수 개인의 평가이며, 야사에 따르면 제갈량 가문과 진수가 개인적으로 알력이 적지 않았다는 설도 있고, 이에 맞게 <연의>의 일부가 윤색, 곡해되었다는 설도 있으므로 다 믿을 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주목할 건, 실제로 촉으로부터 잦은 동병으로 중원을 노렸음에도 불구, 그 결과는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촉의 국력이 위보다 현격히 떨어졌고, 가용 자원도 크게 빈약했다는 점도 고려는 해야겠지만 말입니다.

이 책은 그러나 제갈량의 바로 그 장점, 즉 임기응변에 능하지는 못하더라도 결정적 시기에 큰 패착을 저지르는 과오를 면할 수 있는, 확고한 매뉴얼을 (평소의 시행착오를 통해) 완성한 후, 그에 충실히 따르며 파국을 면하는 바로 그 장점을 확연히 엿볼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정사 삼국지에 나온 그 모습 그대로, 마치 음성 지원이 되는 듯한 제갈량의 컬러 가득한 명제와 가르침을, 이 책은 한자 원문의 소개와 더불어 우리에게 일러 주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모든 병법의 기초임을 역설하는 그의 논지입니다. 맹자는 그의 저서 중 공손추 편에서, "천시는 지리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만 못하다"는 유명한 논변을 펼친 적이 있습니다. 평범한 인간들은 반대로 이치를 새기기 일쑤입니다. 나의 주변을 바로하지 못하고, 환경과 조건을 탓하며, 환경과 조건이 유리하게 조성되면 이번에는 천운이 좋지 못해 일을 그르쳤다는 등의 핑계를 댑니다. 거꾸로라고 봐야 합니다. 제아무리 시운이 승(勝)하고 물적 조건이 유리한 상황에서도, 측근 인사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한 채 추진하는 프로젝트는 모두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업도 전쟁이고, 수주 하나를 확보하는 것도 중원의 요충지를 누가 먼저 점령하느냐만큼 중요한 쟁탈전입니다. 이런 점에서, 亮의 육성을 고스란히 담은 이 책은 일의 진퇴를 결정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잘 일러 준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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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화 - 원형사관으로 본 한.중.일 갈등의 돌파구,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도서
김용운 지음 / 맥스미디어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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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듭니다. 비슷한 생김새, 피붓빛, 신장(身長)을 가지고 있는데도, 왜 이렇게 서로 부딪히고 갈등하는 일이 잦을까요? 한, 중, 일 3국의 서로 차별되는, 그리고 많은 경우 상충하는 정서가 이 모든 사단의 근원이 아닐까 짐작은 합니다.

 

우리 동아시아 3국은 유교 문화권이라는 점도 비슷하고, 감성이 풍부하며 쌀밥을 주식으로 한다는 점에서도 닮아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역사를 통해서도 그렇고, 현재 격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국외자(局外者)인 서양인들이 보면 대단히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도 동남아시아에 자리한 타이, 베트남, 캄보디아, 미얀마, 말레이시아인들이 서로 얼마나 감정이 좋지 못하며 민족 간에 분쟁이 잦은지를 접할 때마다 놀라곤 하죠.

 

냉정히 돌이켜보면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남들이 보기에나 닮았지, 내부 당사자끼리는 엄청 이질감이 느껴지고, 닮은 듯하면서 속이 엄청 다른 것이 오히려 곁에서 더 못 견딜 일일지도 모릅니다. 환경과 섭생의 산물인 외모와는 달리, 내면의 원형적 정서는 외관을 배신하며 서로 상극의 차이를 보이는 일이 허다합니다. 이를 두고, "원형(原型)적" 정서의 차이라고 지적하는 학자들이 많았습니다. 싸움을 하고 갈등을 빚고 서로 증오하는 일이 너무 잦으면, 당사자의 생존이나 세계 평화에 큰 지장을 줍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각 민족의 마음과 생각, 지향을 구성하는 문화 원형적 요소에 눈을 크게 뜨고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 김용운 박사님은 "한국의 버트란드 러셀"이라는 평가를 받는 분입니다. 러셀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20세기 전반에 활약한, 수학자(수학자로서의 경력이 가장 먼저입니다), 철학자, 그리고 사상가이자 세계평화를 위해 노력한 운동가이기도 했습니다. 박학다식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투옥도 겪으면서 자신과 생각을 달리하는 이들을 감화하고 설득한 분이었죠, 러셀 경과 생각을 같이하는 이들의 노력이 아니었으면, 세계는 이미 지난 세기에 3차 대전을 겪고 핵전쟁의 여파로 멸망했을지도 모릅니다.

 

김용운 박사님 역시 수학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펴시고, 기초과학의 대중화에 공헌한 대원로이십니다. 그는 일본에서 수학하고 미국에서 청장년기 연구 활동을 행한 국제적 석학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어린 시절 이분이 쓰신 <재미있는 수학(數學) 여행>을 읽고 기본 마인드를 다진 경험이 있어서, 박사님의 존함이 나온 모든 책들을 읽을 때 각별히 호기심과 신뢰가 생기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이 책을 읽으면서, 전에 전혀 알지 못했던 신세계를 체험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우리가 아놀드 토인비의 <세계사 대계> 같은 책을 읽으면, 그 보는 시야의 웅대함과 비전의 깊이에 압도되곤 합니다. 책을 읽을 때는 각론을 세밀하게 판 전문서를 읽어 줘야 할 때가 많고, 그런 책을 읽어 내어야 뭔가 뿌듯하니 공부한 느낌이라도 들곤 하죠. 그러나 때로는 아주 높은 하늘 위에서 아래를 조감하기도 해야, 정신이 맑아지고 방향 감각을 잘 조율할 수가 있습니다. 애를 써서 한 분야를 천착하긴 하지만, 너무 좁은 범위에만 집중하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도 잊어버리는 우를 범하는 게 보통이죠.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탁월합니다. 토인비도 우리 한국인의 역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인 석학이었지만, 이 책은 마치 그 토인비가 잠시 한국인의 몸과 영혼과 언어와 스탠스를 빌려, 자신의 저서에 대한 동북아시아판 각론을 차분히 설명해 주고 있는 느낌입니다. 박사님은 지금 치열한 대립, 소모적인 감정 싸움을 벌이는 한 중 일 3국의 갈등, 그 근원이 과연 어디에 있었는지를 세밀하고도 거대한 스케일로 해명 해 주고 계십니다.

 

제목에 대해 착각하시는 분들도 있는데요. 풍수화는 독립 키워드 세 글자를 하나씩 따서 연결한 형태입니다. 한국인의 정서는 바람 즉 風으로 대변되고, 중국인의 마음 그 원형은 물, 水이며, 일본인의 그것은 불, 즉 火란 뜻입니다. 음양오행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 동아시아인들이 그 사상과 세계관을 형성하는 기본 프레임으로 쓰이고 있습니다만, 박사님은 그 중 한 글자씩만을 골라 내어, 복잡다기하고 그 깊이를 모르게 꼬이고 꼬인 동아시아인 무의식 심층 구조를, 정말 재미있게 해부해 주고 계십니다.

 

박사님은 과연 전공이 어느쪽이신가 궁금할 만큼, 역사와 언어학에 대해 탁월한 식견과 통찰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계십니다. 일단 박사님은, 백제 멸망을 확정지었던 백강 전투에서, 왜군이 패퇴하고 열도로 물러나 앉은 사건이, 이후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형성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십니다.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한반도에는 본디 백제계와 신라계가 그 남부를 반분하고 있었으며, 백제계와 신라계 모두 일본 열도에 진출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던 것이, 당나라 세력을 등에 업은 신라가 수륙 양면에서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 왕실이 무너지고, 그 잔존 세력이 일본 천황가를 세워 반도에 대한 극단적 적대 의식을 갖게 되었다는 겁니다. "일본"이라는 국호가 생긴 것도 이때 이후이며, 엄청난 트라우마를 안긴 한반도 패주사에 대해 철저히 망각하고자 정반대의 기술로 새로운 정체성을 앙양하고자 한 것이 바로 이 책이라는 게 저자의 시각입니다.

 

일본서기를 두고 저자는 신화적 접근 방식으로, 저술 당시의 일본인들이 지난 역사와 앞으로 열도인들이 취해야 할 방향성이 어떠했는지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진구 황후가산욕을 참으며 돌로 자궁을 막고 반도에 진출하여 정벌을 마치고 귀국하였다는 대목은,  낯선 중국인들의 힘을 빌려 백제계의 토대를 말살한 신라계에 대한 적대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보여 준다고 합니다. 알려진 것처럼 일본에는 두 천황가가 양립하며 남북조를 형성하고 대립한 분열기가 있었는데요, 저자는 이 역시 다이라씨(平氏)와 미나모토씨(原氏) 사이의 항쟁도, 백제계와 신라계의 싸움으로 봅니다.

 

이는 참으로 흥미진진한 게, 실제로 다이라씨의 후손을 자처한 풍신수길은 임진왜란을 일으키며 한반도를 쳐들어 왔고, 신라계라는 미나모토 씨의 후예(역사적으로는 확실치 않습니다)인 덕천가강은 조선 왕국과 화친을 꾀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하나하나 맞아 떨어지죠. 그뿐이 아닙니다. 메이지 유신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조슈 - 사쓰마 번 연합체가 일으킨 패권 전환 모멘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서쪽에 웅거한 번 세력도, 알고 보면 일본 열도 서쪽에 기반을 둔 백제계의 후손이라는 거죠. 결국 백제계는 끊임 없이 반도를 적대하고, 외세와 연대하여 자신들을 반도에서 쫓아 낸 신라계에 응징을 꾀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실증적 근거를 떠나 참 재밌는 논의이며, 아귀가 척척 맞기도 합니다. 중일전쟁 등 일제의 대륙 침략도 백강 전투 괴멸의 분풀이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도 하겠네요.

 

박사님은 이처럼 고대사에 대한 개관을 마친 후, 언어적 탐구를 통해 2라운드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반도인들이 쓰던 언어는 "가라어"라는 게 있었는데, 이를 반영한 게 향찰 문자이며, 가라어의 원형을 계승하고 향찰을 개량한 게 가나라는 주장입니다. 재미있는 건 가나가 고안되기 전 쓰이던 만요 문자(만엽집에서 쓰던 문자)를 보면, 이 가라어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는 건데요. 가나가 쓰이고 나서는 역으로 문자 언어가 음성언어를 규제하는 일이 벌어져, 현대 일본어는 가라어 원형에서 거리를 두고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말은, 한자어의 대대적인 침투로. 가라 어 원형은 거의 찾아볼 수도 없게 바뀌고 말았구요.

 

일본 학자들이 <만엽집>을 해석할 때 애로를 겪거나 "알 수 없음"으로 얼버무리고 마는 대목은, 바로 이 가라어라는 유용한 도구를 적용할 때 바로 해결이 난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저자가 대단히 안타까워하는 대목은, 일본인들의 한반도 컴플렉스, 즉 "우리는 저 반도인들과 아무 관계 없어!' 같은 열등 강박 때문에, 분명히 보이는 해답도 애써 외면하며 먼 길을 우회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자는 이 책 말미에 "천 년 동안 풀리지 않았던 난제를 내(저자 김용운 박사님 자신)가 풀 수 있었던 건, 바로 한국어와의 연관성에 처음부터 주목했기 때문"이라고도 적고 있습니다. <만엽집>의 해석은 예전에 이영희라는 수필가가 조선일보에 성적 담론으로 일관한 해독을 장기간에 걸쳐 연재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지요. 저자는 그 일에 대해서도 실명 거론 없이 잠시 언급을 합니다. 참고로 이것 관련해서 저자분은 좀 특이한 이력을 갖고 계시기도 한데요. 혐한 중상 모략이 요즘에만 있는 게 아니라서, 1970년대에 한국인을 가장한 익명의 저자가, 한국의 문화와 정체성에 대해 대대적으로 헐뜯는 책을 낸 적이 있습니다. 이때 자신의 명의로 그에 대해 일일이 반박하는 주장을 정리해서 대응한 분이 바로 이 김용운 박사님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도 그에 대한 회고가 있습니다.

 

박사님은 한국어에 대해서도 신선한 분석과 시각을 내어 놓습니다. 저는 예전에 재미 음악인들이 "한국어는 받침이 많아서 음에 가사 달기가 어렵다"고 하는 걸 들었습니다(요즘은 랩 때문에 오히려 유용하다는 평가를 듣죠). 과연 일어나 중국어(관화 보통어 기준)에는 받침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본디 가라어는 받침이 거의 없고, 이런 종성의 보편적 확산은 한자어를 수용하며 이뤄진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럼 현대 북경어에 받침이 거의 없는 이유는 뭔가(광둥어는 그렇지 않거든요). 이는 언어의 간이화라는 대세를 겪기도 했고, 저자도 이 책에서 (명시적으로는 아니라도) 은근 암시하는 대로, 몽골 족의 침략을 대거 겪고 나서 남은 흔적이라는 겁니다. 몽골 역시 우리와 형제뻘인 알타이 어족이므로(논란이 있는 이슈지만 일단 저자의견해를 따릅니다), 받침이 없는 원형을 그대로 간직했기에 가능하죠.

 

이 다음부터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한중일 삼국의 민족성 분석입니다. 일본인은 원수를 곁에 두지 않고, 자기가 죽든가 철저히 복종하든가 둘 중 하나이며, 한국인은 "두고 보자"는 태도이고, 중국인은 대륙 문화에의 장기적 흡수로 이를 해결한다는 거죠. 대담한 도식화를 열 두어 가지 토픽에 대해 시도하고 있는데, 하나 하나 읽어 보면 공감이 가면서도 대단히 재미있습니다. 유교에 대해서도, 일본인은 열도의 체질에 맞게 변형하고, 중국인은 실용적으로 융통성 있게 활용하며, 우리 한국인만 별나게 원리주의적 집착을 보인다는 겁니다. 참 맞는 말입니다. 이 책에는 왜 유독 한국인만 평등주의에 집착하는지에 대해서도 이른바 "문화적 원형"에 의한 재미있는 설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근래 우리 주위(특히 수도권이라면)에서 자주 마주치는 게 중국인이고, 그런 중국인들의 특이한 습성을 본 이들이라면 정말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간결체 문장(석학 중에서는 드문 개성이죠)을 구사하셔서, 독자가 읽기 편하다는 것도 마음에 들더군요.

 

저자는 결론적으로, 중국인은 동아시아 질서의 중심이 될 수 없다고 단정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도, 저자는 문화적 원형(저자의 시각에 따른)을 동원한 체계적 분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사실 날마다 긴장이 고조되는 동아시아의 정세를 볼 때, 저자의 이런 진단은 의미심장합니다. 저자는 우리 민족의 특성에 대해, 종족적 개성을 죽어도 포기하지 않으나, 한 중 일 삼국 중 단연 높은 수치로 "보편 문화를 지향"하는, 매우 바람직한 성향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이로써, 한국이 동아시아 중심, 벨런서로서 그 위상을 확고히해야, 항구적인 평화가 자리핳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일본인에 대해서는, 애써 왜곡된 정체성으로 반도인을 경원, 적대할 게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자신을 응시할 것을 권합니다. 이는 "일선동조론"이나 "만선사관" 따위와는 달리, 미래지향적 한일관계의 정립에 매우 중요한 인자로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갖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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