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구나무
백지연 지음 / 북폴리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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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시절, 아니 유아, 청소년기부터 거의 한 시기도 빼놓지 않고, 엘리트, 정상의 위치만 골라 디뎌 온 인생이 우리 나라애 그리 흔할까요? 그런 분들이 있다고 해도, 대중의 시선 한복판에 자리하며 전 국민의 선망과 애정이 되기까지 한 경우는, 드물다기보다 아예 없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입니다. 요즘 자라나는 세대들도 이 방송인 백지연씨의 이름은 알 정도니, 한국에서 이분이 얼마나 희귀한 인생을 가꿔 온 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남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고 사신 분이니만치, 한때나마 어처구니없는 비방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사필귀정이라고 그 모든 소동은  진실이 밝혀지고 정의의 요구에 따라 마무리되었습니다, 저는 그런데 그 사건이 터질 무렵, 뉴스를 통해 이분이 얼마나 광범위한 인맥을 구축하고 있었는지 부수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인맥"이라고 하니까 무척 타산적이고 속물스러운 느낌을 풍기는 단어 같습니다만, 그런 의미에서의 인맥이 아니라,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치며 정(情), 그리고 가식 없는 교분을 나눈 "1차 집단"성 지인들을 말합니다. 사회 나와서 쌓은 인맥은, 결정적일 경우 사이가 틀어지는 게 빈번합니다. 혹은 요즘 말로 "갑을권력관계"가 선명해서, 인맥이라기보다 일방통행성 소통에 가까워지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명문 학교만 거친 백지연씨의 경우, 자신과 비슷한 출신과 레벨의 인사들을, 오랜 세월 살가운 친구들로 두고 교류하다 보니, 사회 생활의 기반이 누구보다도 탄탄하겠다는 추측도 해 보았습니다.

 

이 책은 물론 소설입니다, 그러나, 어느 작가의 무슨 작품이라도 그러하듯이, 허구로 꾸며진 세계라도 자신의 체험과 그 과정에서 얻어진 절실한 생각이, 그 구조와 내용 안에 물씬 묻어나는 법입니다. 백지연씨처럼 인생의 어느 한 순간도 허투루 지냄 없이, 치열하고 효율적인 삶을 살아 온 분이라면, 그 과정에서 마주쳤을 만한 사람들도 다 자신 못지 않은 순도 높고 성취 가득한 인생들이었을 텝니다. 이분이 처음으로 장편 소설- 방송인들이 자주 시도하는 에세이 집필이 아니라 창작 소설 - 을 펴내셨다는 소식을 듣고, 냉큼 주문해서 읽어 보았습니다. 여성 독자라면 아마 자신의 삶 궤적 하나하나와 비교, 대조해서 공감하거나 혹은 선을 긋거나 하는 재미가 있겠습니다만, 남자인 저는 저 위에 적은, 그런 면들에 주안을 두고 솜솜 뜯어 읽어 보는 맛이 있더군요. 제 주위에도, 학생 시절 잘나가다가 최근에 좌절한 친구, 학창 시절 내내 문제아로 찍혀 죽을 쑤다가 성년을 넘기고 의외의 대박을 친 친구, 성적이나 교우 관계나 모두 별볼일 없었지만 여튼 아버지 사업 물려 받아 한량 행세 하는 친구, 초등학교 때 천재 소리 들었으나 부모님과 크게 싸운 후 대학 진학에도 실패한 이래 과연 어떻게 풀렸을지 궁금해지는 친구.. 뭐 다양합니다.


그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그때 그 친구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뭐하면서 지낼까?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절실한 감흥으로 와 닿는 질문입니다. 그에 대한 대답 역시, 꼭 백지연씨 같은 유명인의 그것이 아니라 해도, 누구의 사연이건 제 나름의 답안이건 간에, 재미있고 감동적일 수 있습니다. 하물며 제가 평소에 개인적으로 궁금해하던 이분의 창작 - 다시 말하지만, 어느 창작이라도 순수 픽션은 없습니다 - 이라니, 페이지를 넘기는 손이 마치 19금 소설을 읽을 때처럼 살짝 떨리기도 하더군요(물론 이 책에 그런 점잖지 못한 내용은 없습니다만). 다 읽어 갈 무렵에는(일부러 천천히 읽었습니다), 창 밖에 발그스레하게 동이 터 왔고, 알게모르게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세르지오 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서, 로버트 드 니로가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허무함, 해탈이 가득 담긴 미소를 만면에 머금는 그 장면을 본 후처럼...

 

극중 화자이자 사건의 중심에 서서, 내러티브를 취합하고 그에 대해 해석을 가하며 지면 밖을 향해 전달하는 이는 백민수입니다. 이름에 무관하게(혹은 깊은 관련을 맺고?), 이 인물은 작가 백지연씨 자신의 페르소나라고 봐야겠습니다. 제가 처음에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고교(여고) 졸업 후 지속적으로 만나 온 친구들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O 헨리의 <20년 후>처럼, 기억의 한편에 선명한 음각으로 새겨져 있으나, 단지 직접 접촉만은 단절되어 왔던 그런 관계더군요. 조금 작위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장편 하나에다 6인의 이야기를 쏟아내듯 풀어 놓으려면 이처럼 "어느 날 그녀들을 갑자기 만났더니..." 같은 구성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이해도 되었습니다.

 

남자는 이후 인생이 어떻게 풀렸건, 다 자기 책임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백지연씨 세대 여성들은, 자신 아닌 다른 변수에 의해 인생이 좌우되는 면이 크다는 사실, 아직까지 우리 나라에서는 힘이 센 진리가 아닌가.. 새삼 확인하게 되더군요. 물론 그 점을 인정하더라도, 주된 책임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건 변함이 없습니다. 이 소설(물론 소설이긴 합니다만)에서도, "제 발등을 찍었다"며 큰 아쉬움을 토로하긴 하지만, 결국 별 유감 없이 후련한 인생을 사는 인물은, 어려서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는 승미 아니겠습니까?

 

미묘하게나마 저는, 인터뷰어 백민수가 "수경의 실패"에 대해 다소 안도를 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가장 찬란하고 성공한 인생을 살아야 마땅했던" 그녀가, 저처럼 외화내빈의 피곤한 여정을 끌고 가는 모습이, "난 차라리 괜찮구나."하는 이기적 위안을 제공해 주는 좋은 소재나 아닌지. 그리고 이 소설의 제목인 <물구나무>에도, 제재적으로 가장 잘 부합하는 케이스가 아니었는지. 우리 모두는 확실히, 질시와 부러움의 대상이 될 만한 이의 좌절로부터 가장 만족스러운 쾌감을 얻는 속물들이 아닌지. 이 소설은 그런 점에서, 솔직하기에 공감이 되는 공범의 회고담이었다고나 하겠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 삶이나 다른이들의 삶이나, 어쩌면 물리적으로 거꾸로 서기 전부터 이미 시선을 뒤집은 채로 지켜 보거나, 훔쳐 보거나, 혹은 마땅히 그리 되어야 한다는 듯 내 욕구를 투사하여 왜곡해 보거나... 그렇게 꿈을 품고, 혹은 욕구와 희원을 덧칠한 대로, 세상의 만화경은 어느 새 그대로의 현실이 되어 이처럼 기묘한 풍속도를 그려 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사실 더 살아 봐야 그 깊은 묘미를 알 수 있겠습니다만, 확실한 건 지금의 모습, 추세가 그의 미래를 그대로 반영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너무나 뻔하고 통속적이어서 재미없는 인생이라고 하지만, 끝에 가면 이만큼이나마 의외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불공평해서 공평하고, 속살을 들춰 보면 누구나 고르게 아픔을 나눠 갖는 것, 이 법칙은 누구의 인생에 있어서도 비껴 가지 않는,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철칙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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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처음 하는 진짜 리더십 공부 - 사람도 성과도 놓치지 않는 스마트한 팀장 리더십
박봉수 지음 / 퍼플카우콘텐츠그룹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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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 단계를 넘어 관리직 초입에 이르면, 나의 능력을 계발하고 다듬는 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게 바로 아랫사람들 도닥여 주는 스킬과 요령입니다. 책임이라는 게 그래서 무서운 거고, 사람의 자질을 평가함에 있어서 지식이나 능력보다 더 높은 비중을 두어야 하는 영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현장에서 다양한 체험과 인사관리를 맡아 오신, 업무와 조직 경영의 달인이라 할 박봉수 원장님의 저서입니다. 보기 참 편하게 편집되어 있습니다. 일을 해 본 적 없는 분들에게는 "아 역시 다 좋은 말씀이구나" 정도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나, 실제 사람들을 독려하고 윗분 비위 챙겨가면서, 납기와 품질은 그것대로 다 준수, 달성해야 하는 피를 말리는 긴장과 스트레스를 겪어 본 분들한테는, 요즘 영화 국제시장에 나오는 지난 시절 유행어처럼 "피가되고 살이되는" 교훈으로 가슴에 와 팍팍 꽂힙니다.




사실 이 책은 내용 중 버릴 게 없는 책입니다. 260여쪽 분량의 얇은 책인데, 이 책에 나온 내용도 도그마, 지짐으로 삼고 소화하지 못한다면 사실 팀장급 이상 관리직으로는 살아남기가 어렵습니다. 개별 근무 환경에 맞춰 이에 더해 몇 가지 현장에 특화된 요령을 더 알아야 최고위직까지, 아니면 임원에까지 승진할 수 있을 테고요. 이 책에 나온 내용은 기본적으로 몸에 배게 하고, 하루에 두 챕터씩 읽고 외우고 마음에 가슴에 새겨야 할 줄 압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박봉수 원장님께서 다양한 기업을 두루 거치고 현재 본인의 컨설팅사 대표까지 지내시는 분이라, 한국 도처에서 각개 약진 중인 그 무수한 기업 환경의 최대공약수라 할 만한 것들만 잘도 추려 주신 것 같습니다.

저의 눈에 일단 먼저 들어 온 가르침은, "일 못하는 사람에게라도 일단 일을 맡기라"는 것입니다. 하긴 대한민국의 노동관계기본법이 무분별한 해고를 허용하고 있지 않으니 그런 의미에서도 실용적인 조언이긴 합니다만(게다가 중간 관리자에 불과한 팀장이, 행여 더 고참 사원에게 모질게라도 하면 좋은 평판이 퍼질 리가 없기도 하고요), 박 원장님은 (제 추측으로) 아마 인적 자원(HR)의 효율적인 관리, 운용 차원에서 이 원칙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일단 회사가 그를 적정하게 평가해서 입사시킨 사원인데, 이를 홀대하면 결국 스스로의 안목과 가치 지향을 부정하는 결과도 되니 말입니다.



박 원장님은 여기서 노자의 가르침도 인용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란 물 흐르는 것과 같아서 무리와 압박 등의 수단이 끼어들면 반드시 그 전체가 어그러지게 되어 있다." 자계서의 요즘 첨단 흐름으로서, 중국 고전에의 전거 의존이 이 책에서도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위기는 곧 기회다, 이 말 참 공허하게 들리시죠? 제가 중학교 때 기술가정 선생님(담임 선생님이시기도 합니다. 타지에서 오신 분인데 아주 근성과 카리스마가 강한 분이었습니다. 신입생 전체 조회 때 갑자기 제 뺨을 꼬집으며 "너 공부 잘혀?" 라고 물으셔서 깜짝 놀랐죠. 이런 분들은 서류 이런 걸 안 봐도 역시 동물적 육감이 남다르신... )이 해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촌X들은 낡은 차가 부왕! 하는 소리를 내며 뒤에 먼지를 자욱히 일게 하고 달리면, 우와 힘 좋다고 감탄하는데, 그거 다 차 배기통이 낡은 X차서 그런 거여!" 저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웃겨서 혼났는데, 이 책에도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할리데이비슨이 그 주행 시 소음이 지독해서 소비자들에게 평판이 일시적으로 나빠졌는데, 이를 해당 제조사는 오히려 홍보의 기회로 삼았다는 거죠. "남성적 주력과 외관을 느껴 보고 싶은 분들을 위해!" 역으로 이게 크게 어필해서, 젊은이들에게 그 이상과 활력의 영원한 우상, 상징으로 남았다는 게 업계의 전설입니다. 다만 한국에서 배달 오토바이가 이래서는 큰일나겠구요. 대림씨티 시리즈가 안정성과 저소음, 내구성으로 시장을 꽉 잡고 있습니다.



태도가 좋아야 한다고 어디서나 강조합니다. 박주영도 아스날 구단주에게 "의외로 태도가 좋지 않다"는 지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재능보다 때로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 바로 태도라는 자질입니다. 의지, 열정, 성품, 도전의 4요소를 이 책에서는 "태도"의 자질로 거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착각하기로는 "성품= 태도"로 알기 쉬운데요. 사실 성격만 좋았지 매사에 무사안일인 직원도 회사 입장에서는 참으로 달갑지 않은 존재입니다. 의지, 열정도 다 갖추었는데 새 분야에 도전을 안 하는 사람도 문제는 문제입니다. 태도란 이처럼 4요소가 복합적으로 갖춰진 후에야 인재의 자질로 바르게 기능할 것 같습니다.

요즘은 직설적인 말보다, 은근 돌려 말하는 우회어법이 널리 쓰입니다. 일류 조직 아니라 최근에는 사적인 동창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고위직이나 CEO들은 본인 위신도 있기 때문에 바로 본심이 드러나는 언급을 삼가는 편입니다. 이때 이분들이 쓰는 은유, 메타포어를 잘 알아들어야 한다는 게 저자의 조언입니다. 은유로 말하는 단계에서 진의를 빨리 캐치해야 하며, 이 단계를 넘어 버리면 사태 수습이 곤란하다는 겁니다. 대개 듣는 이에게 유리한 언사는 은유를 굳이 통하지 않습니다. 상급자가 은유를 말할 때에는 반드시 긴장해야 하더라는 게 제 경험입니다.



훈계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랫사람도 모이고 모이면 세력이 되고, 그 이전에 이미 마음을 다친 하급자는 결국 나에게 부담의 부메랑이 어떤 모습으로건 되어 나에게 다시 돌아옵니다. 하급자가 열의를 잃거나 상심하고, 혹은 적의나 원한을 가지면 나에게 좋을 게 하나도 없죠. 당장 쫓아낼 사람이 아닌 이상, 그런 사람도 기를 살려 자원으로 활용하는 게 올바른 선택이기도 합니다. 결국 사람에서 시작해서 사람으로 끝나는 게 올바른 경영이고, 직장 생활의 준칙이라는 점을, 이 깔끔한 책을 통해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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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만들다 -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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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가 "특별한 기회에 쓴 글"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사실 그가 쓴 글은, 특별한 기회(이 "특별하다"는 말도 그의 기준에서 평가한 말입니다만)에 쓰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모든 글들이 특별합니다. 어려서 저는 그의 명작 <장미의 이름>, 그리고 (너무도 어려웠지만) <푸코의 추(초판 제목은 이러했고, 저는 아직도 제가 읽은 첫 판본이라 이 이름이 더 친숙합니다)> 등을 읽었고, 앞으로 성인이 되어 독서를 하고 머리 속에 무엇을 정리하고 가꿔 나가야 할지에 대해 기본 프레임을 정하는 계기로 삼았더랬습니다. 그 후에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같은 책을 읽고, 저렇게 똑똑하고 박식한 분도, 그 때문에 짊어져야 할 업보, 숙명 같은 것이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어렴풋하게나마 가졌더랬습니다.

 

총 14편의 글들이 실려 있습니다. 역시 에코 교수는, 자기 책에 달린 부제 한 문구에도 무심하게 지나치는 법이 없어, "특별한 기회에 쓴 글"의 의미가 무엇인지 간단하게나마 서언에서 해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 글들은 독자의 눈길을 끌기 위해 어떤 과장이나 미화 같은 의도를 담았다기보다는, 정말로 특별한 투고 요청, 강연, 혹은 주목할 만한 사건 발발에 즈음하여 집필 계기를 마련했다는 사정이 있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어느 정도는 부담을 지니고 있었는지, "집필 계기가 특별했다고 해서 반드시 내용까지 창의적("특별"이란 형용사는 피하고 있습니다)일 필요는 없을 것"이라며, 행여 독자나 팬이 쏟을 과도한 기대를 완화하거나, 자신의 부담을 좀 덜려는 "귀여운"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의 그답게, 책임 회피라든가, 혹은 대가로서 편안하게 루틴, 매너리즘에 젖은 채 비블리오그래피의 길이만 늘이고 인세수입만 늘리려는 마음은 전혀 먹지 않고 있다는 듯, 자신의 새 글들이 실린 이 책에 대해 "(최소한) 독자가 읽기에 즐거운 글들이 되어야 한다는" 요청에는 변함이 없을 테고, 자신은 그러한 (가상의) 요청에 충실한 글을 썼노라 자부한다는 선언을 온건하게 펴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부분에선, 각 글들이 어떤 동기, 어떤 환경에서 집필되었는지에 대해, 간단한 소개와 회고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책 읽으시려는 분들은 요 파트를 꼼꼼히 읽어 보셔야, 본문의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에코의 책을 읽다가 언제나 중도 포기하시는 분들은, 죄송한 말씀이지만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배려(독자로서는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우리는 이런 대가의 책을 읽을 때만은,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읽는 것이지 쇼 프로그램을 즐기듯 편안하게 뭘 먹으며 소파에서 즐길 수는 없는 것 아닐까요)가 부족해서일 가능성이 큽니다. 언제나 에코가 무슨 의도로 이런 말, 이런 표현을 쓰고 있는지, 이미 서언에서 작가 본인이 충분히 힌트를 준 바에 따라 읽어 나가는 게 정석이며, 또 유일한 해독(?) 방법입니다.

 

첫번째 실린 글 <적을 만들다>에서, 에코는 다양한 인용문을 들고 있습니다. 하긴 뭐 언제는 이분이 그런 형식을 취하지 않았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바로 이런 재미로 우리는 그의 책을 읽어 나가는 거죠. 혹시 이런 게 지겹다 싶으신 분들은, 자신의 태도를 재고하지 않으시면, 에코 책 읽기는 지속적인 고문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는 본디 이 방대한 문헌의 세계에서 보물 찾기를 하며 "혼자 노는" 사람이며, 이런 데에 공감 못 하는 분들은 처음부터 그의 책을 읽을 이유가 없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그에겐 이 세계를 무대로 한, 또 시간의 총체를 배경으로 한 책읽기와 기호 분석이 삶의 유일한 소명이요 존재 이유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이에 공감을 못하면 우리 역시 자신의 시간을 더 생산적인 다른 작업에 바쳐야 현명한 태도이겠습니다.

 

그의 인용문을 읽는 데 큰 거부감이 없는 분들도, 과연 이런 지식을 머리 속에 새로 정리해가며 읽어야 하는지(다시 말해 어느 정도의 암기가 수반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저 에코가 말미에 덧붙이는 코멘트만 소화해 가도 충분한지 갈등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봅니다. 에코의 초심자는 전자의 수고를 하려 들어도, 처음부터 그게 불가능한 과제입니다. 그 사람이 만약 에코 급의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 있다면야 또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그의 책(소설 포함)을 읽다 보면, 그가 인용하는 저자와 문헌에 대해 자연스럽게 흥미가 붙습니다. 이런 자연스러운 과정을 밟지 않으면, 괜한 거리감과 권태감만 첫 단계에서부터 몸에 밸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 <성문종합영어> 등에서 "Beauty is only skin deep." 같은 말을 접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대개, 이 말이 누구의 입에서 나온 건지는 모르고 지나칩니다. 어떤 이는 <성문종합영어> 옆 페이지 쯤에 나오는 "용자만이 미인을 차지한다(None but the brave deserve the fair)."와 착각을 일으켜서, 이 말의 출처가 드라이덴인 줄 잘못 아는 수도 있습니다. 이 책 27페이지를 보십시오. 에코는 "10세기에 살았던 클리뉘 수도원장 오도"라는 분이 이 말을 언급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클리뉘 수도원이야 당연히 알아도, 오도 수도원장이란 이름은 태어나서 저는 처음 들어 봅니다. 에코가 이 책에서 "최초"라는 평가나 단정은 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우리는 저 말의 이제 전거나 출전을 논할 때 이 어카운트를 거론해도 큰 실책은 아니지 않을까 하며 안심해도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대변이나 타인의 땀 같은 체엑이 내 몸에 묻는 것만으로도 소름끼쳐 한다. 그런데 여자란, 아름다운 피부 속에 감추고 있는 것이 온통 그런 것들이다." 사실 우리는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 군 제대한 예비역 선배들한테 그 비슷한 말을 듣곤 합니다. "여자의 배를 갈라 보면(의대생 등의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남자보다 훨씬 많은 지방과  노폐물로 가득차 있다. 여성의 몸은 그저 겉으로만 아름다울 뿐이며, 사실은 남자보다 성분, 체형, 구조면에서 훨씬 추한 존재이다." 하긴 이런 인식이 근래 확산되어 여성들도 몸매 관리, 특히 체지방 관리를 하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 제게 이런 말을 해 준 선배 본인은, 어쩌다 캠퍼스를 지나칠 때마다, 혹은 시내 번화가에서 만날 때마다  매번 다른 여성을 곁에 두고 있더군요. 여성분들은 하여튼 말만 번지르르 잘하는 남자한테 절대 솔깃하면 안 됩니다.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남자한테는 자기 신조와 정반대되는 감언이설을 퍼뜨리는 게 이런 분들이고, 오늘 나한테 잘해주고 내일은 다른 여성에게 더 잘해주는 게 이런 분들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저 위의 오고 수도원장 같은 분은 그렇지 않고, 진심과 깊은 성찰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해 주시는 분입니다. 사실 그렇죠, 아름다운 "거죽" 밑에 숨겨진 실체를 상상하면, 마음에서 육욕이 끓어오르더라도 한순간에 스러지고 마는 효과를 내는 게 저 말입니다. 에코는 이 글을 최근에 썼으나, 아마 그보다 훨씬 오래 전에 읽고 머리 속에 정리했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장미의 이름>에도 그 비슷한 말이, 윌리엄 수도사의 입을 통해 나오기 때문입니다. 아드소가, 마을에서 도둑질하러 온 가무잡잡한 피부의 다람쥐 같은 소녀와 마주치면서, 그녀의
"젊고, 미남이시군요."
한 마디에 넘어가, 태어나서 처음이라 할 열락과 환희의 하룻밤을 겪은 후, 이를 통회하는(아드소는 평생 순결을 서원한 수도사이니까요) 그에게 해 주는 말이 이겁니다. "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그 추함, 그 비루함, 그 부조리함, 그 덧없음에 대해, 내가 지금 아무리 이야기해 줘도 너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건 지금 네 나이에 알 수 있는 지혜가 아니다." 하지만 이 말을 해 주면서 老윌리엄 수도사 역시 평소의 침착을 잃고 어조가 떨리는 품입니다. 서평을 쓰면서 저 역시 타자를 치는 손이 흥분되기도 하네요.

 

<섬은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는, 혹시 <전날의 섬>을 읽으며 많은 피로를 느끼셨을 분들에게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에코의 독자들 중, "왜 이분은 지난 시절의, 이미 극복된 과학 기술에 대해 이렇게 천착, 혹은 집착할까?"하며 불만을 가지는 분들도 있습니다. 과학 기술(심지어 경제학이라고 해도 그렇습니다)은, 아웃오브데이트 된 것은 이미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코는, 본연의 영역을 넘어선 이 경계에 대해 대단히 고집스럽게, 그러면서도 깊이 있고 정확하게 연구하여, 이를 독자들에게 흥겨운 분위기로 들려주는 일을 즐기죠(흥겹고 즐거운 건 물론 화자인 그고, 듣는 우리는 보통은 그렇지 못하다는 게 문제입니다만).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인문이란 당대의 과학, 기술에 대한 인식과 이해 없이는 반쪽짜리의 불구입니다. 둘째, 설령 자연과학의 첨단을 이해하는 순간에도, 그의 지난 과거 이력을 어느 정도 알지 못하고는, 이미 그것은 천박한 암기이거나(공대생들은 아쉽게도 시간에 쫓기기 때문에 이런 길을 밟는 수가 많죠. 예컨대 수학 정리의 증명은 사치입니다. 그냥 외워야 합니다! ㅜㅜ), 부정확한 타협인 수가 많습니다. 어느 교수님 말마따나 "모르면 모르는 거고 알면 아는 거지 그 중간은 없"는 법이니까요.

 

에코는 비판적 성향의 지식인입니다. 그래서 이 책 말미에 실린 <위키리스크에 관한 고찰>은 누구나 안 읽어 볼 수 없는 중요한 문헌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특히 마지막의 이 아티클을 통해, 에코가 진정 과거에 매몰된 화석이나 고립된 천재가 아닌, 우리 모두와 소통하며 친교를 즐기는 고마운 동시대인임을 피부로 실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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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니그마 세계 2차 대전 3부작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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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 생각과 감정을 타인에게 정확히 표현하고 싶은 욕구에서 만들어진 것이 언어, 그 중에서도 문자 언어입니다. 내 생각과 감정을, 마음이 맞지 않는 타인에게는 숨기고, 나의 친구, 동료에게만 알아 보게 하려는 보다 세련된 욕구에서 만들어진 것이 암호입니다. 나의 정확한 의도를 숨기고 상대를 착각 속에 빠뜨리려면, 머리를 열심히 짜내어 도구를 고안해야 하는데, 이에는 상당히 큰 노력이 요구됩니다. 이렇게 들인 노력의 보람이 있으려면, 상대를 속이고 얻는 물질적, 혹은 정신적 대가가 상당히 큰 것이라야 했겠습니다. 암호 통신이 전쟁에 있어 필수 수단으로 발전한 건 이 때문입니다. 전쟁 자체도 무엇인가 큰 것(돈이든, 땅이든, 자존심이든, 대의 명분이든)을 얻기 위해 내 목숨을 걸고 벌이는 싸움입니다. 한번 벌인 싸움을 이기려면, 갖은 꾀를 다 짜내어 적을 속여야 하고, 그런 책략에 말려들어 적이 제 풀에 넘어지면, 나의 피를 흘리는 수고 없이 효율적인 승리를 거두는 셈입니다. 아군의 통신을 우수한 암호 속에 잘 숨기고, 적의 소통 수단을 그 주고받는 암호 해석을 통해 교란시키는 일은, 탱크 수 천 대, 전투기 수백 대,  보급 선박 수백 척, 무엇보다 소중한 인명 수십 만을 아끼고 살릴 수 있는 첩경입니다.

 

2차 대전 당시 그 승패가, 연합국 측에 그 속내와 전략을 속속들이 간파 당한 추축국 측의 안이한 통신 정책 때문이었다고 지적하는 이가 많습니다. 한번 무적의 암호 체계를 개발한 후, 우수한 게르만 인이 구축한 방벽을 타 민족의 두뇌 따위가 뚫을 수 없을 것이라고 과신한 독일군, 아예 그런 대비책조차 개발하지 않은 채 원시적 복호화 작업만으로 열심히 기밀과 작전 사항을 송수신하여 속내를 미국 측에 훤히 읽힌 일본군, 이들의 잘못된 방침과 판단이 그들을 파멸로 몰고 갔다는 점에 많은 이들이 동의합니다. 고작 암호 전술 운용 따위가 전쟁의 승패를 가를 수 있겠냐고 생각하는 분들은, 이 소설을 읽어 보시면 생각이 바뀔 지도 모르겠습니다. 상대의 움직임이 적시에 간파되면, 아군 수천 수만의 기동을 안전하게 하고, 그 효과는 고스란히 적군측의 피해로 전가됩니다. 물량도 물량이지만, 내 생각이 상대에게 속속들이 읽히고 있다는 자각은 결정적인 사기 저하를 불러 옵니다. 사기가 떨어진 군대갸 적에게 이길 방법은 없습니다.

 

가상의 주인공 토머스 제리코는 아직 서른도 안 된 신출내기 수학자입니다. 돌아가신 부친이 수학자였고(소설의 설정에 따르면, 1차 대전 격전지였던 이프르에서 전사했다고 합니다), 성장 과정에서 의붓아버지와의 원활하지 못한 관계가 끼친 악영향 때문에, 약간 냉소적이면서도 소심한 성격을 지니게 된 그는, 조국 영국이 독일과의 전면전에 돌입하자 바로 차출되어 암호 해독반에서 병역 의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그의 재능은 영국 최고 명문 학부에서 일찍이 교수들에게 인정 받은 바 있고, 부친의 유지도 유지였거니와 무엇보다 제리코 본인이 수학에 살고 수학에 죽는 몰입형 인간입니다. 현대 수학은 워낙 복잡다기하게 발전하여, 적성을 빨리 찾아 전공을 특정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힘듭니다만, 이 시절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나 봅니다. 그는 소설 속에서 수학 전반을 사랑하고 능숙히 내용을 다루는 모습을 보이는데, 특히 그가 강점을 드러내는 분야는 패턴 분석과 퍼즐입니다.

 

제리코는 원주율 파이가 테일러 급수식으로 전개되는 모습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며, 이런 패턴의 미를 추상적인 수식 속에서 찾을 줄 아는 그의 직분을 두고 시인이나 화가, 작곡가의 소명이나 마찬가지 성격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술과 음악, 문학의 아름다움에 대해선 직관이 가능하면서, 수학을 놓고서만은 맹인이 되어 버리는 주변 사람들의 무지를 오랜 동안 지켜 봐 왔기에, 그로서는 더욱 평균적 인간에 대해 회의적 태도를 굳히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대상을 놓고 그 가치에 대해 이해를 못하는 저열한 지성과 감성만 지녔을 뿐인 이들이, 오히려 우월한 이의 기준과 능력을 두고 "이상하다"는 평가를 서슴없이 내리는 모습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을 법도 한 제리코입니다.

 

이런 제리코이지만, 국가에 대한 원칙적 충성심은 순결할 만큼 간직하는 명예로운 인간입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에 대해 한없는 신뢰와 애정을 보내면서도, 고위 당국자들의 한심하고 무능하며 경멸스러운 작태를 봐 오면서 그런 초심이 사멸해 버리는 게 보통인데, 제리코는 군사 기밀의 먼 범주에 속하는 사항까지도 어머니에게 숨길 정도로 고지식한 애국자입니다. 이런 제리코이건만, 괴퍅하고 비사교적인 성격 때문에 동료나 상관에게 언제나 오해를 사고, 혹시 적과 내통하지는 않는지, 사명감이 미적지근한 위인은 아닌지 의심받기가 일쑤입니다. 국가의 운명을 좌우핳 수 있는 결정적 임무를 수행하는 중인데도(그래서 비공식적으로 국왕과 수상에게 격려 전화까지 받은 요인인데도) 일개 대학 짐꾼에게까지 미덥지 못한 시선을 받고 구설수에 오르는 꼴이니, 우리 독자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뿐입니다.

 

이런 제리코라지만, 혈기가 넘쳐 흐르는 팔팔한 20대 사내로서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마음이 격동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블래츨리로 오는 기차 객실 안에서 그는 옆에 앉은 아가씨가 신문 오락란의 크로스워드 퍼즐을 풀다 모르는 문제를 물어 오는, 다소 황당한 체험을 합니다. 마치 제리코가 누군지 알고 있다는 듯, 이런 문제는 당연히 그에게 물어야 한다는 듯, 초면의 여성, 게다가 미모의 여성이 자신에게 접근해 온다... 그러나 제리코는 그답게, 마치 기다렸다는 빛의 속도로 문제를 해결하고, 나에게 과분한 이런 여성과 말을 틀 기회가 생겼다는 사실이 그저 기쁘기만 합니다.

 

제리코를 이처럼 전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수학 외에 처음으로 아름다운 다른 존재를 만나, 밤을 새워 그 연정에 설레게 만든 이는 클레어입니다. 제리코에게는 자신 존재의 본질을 이루다시피하는 암호 풀이의 미션이, 국가 존망의 문제와 맞물려 이제 필생의 과업으로 등장한 형편인데, 여기에 여태 경험해 보지 못한 방법으로 삶의 희열을 느끼게 해 준 아가씨마저, 수수께끼 같은 경로로 나타났다 사라지고 있습니다. 독일군의 암호도 풀어야 하고, 동시에 자신의 영혼을 흔들어 놓은 "베아트리체"의 정체도 밝혀 내야 합니다. 어느 "에니그마"가 그 풀이로 인해 이 젊은이의 정력을 더 소진시키는지는 모르겠으나, 제리코는 점차 두 문제가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달아 갑니다. 클레어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 자신과 국가의 운명을 동시에 구하는 것임을, 우리 독자와 함께 알아 가는 그 긴장과 재미, 서스펜스가 이 소설의 핵심을 이루는 매력입니다.

 

암호학에 대해 학문적으로 접근한 책도 있고, 어린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초보적 원리부터 자세히 풀어 놓은 책도 있습니다. 그러나 폴란드인이 상업적 용도로 처음 발명했고, 이에 본질적 혁신을 가해서 난공불락의 체계를 구축한 전설의 암호 기계 에니그마에 대해, 평소에 잘 모르겠다 싶은 분들은 이 책을 읽고 소설적 재미와 함께 그 원리를 깨칠 수도 있겠습니다. 왜 에니그마가 철벽의 시스템이었는지, 그런 시스템이 결국 다른 방향의 지혜에 의해 뚫릴 수밖에 없었는지, 로버트 해리스는 이보다 더 쉬울 수 없겠다 싶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이해시켜 주고 있습니다. 물론 소설의 줄기는 전쟁사 해설이나 암호학 강의가 아닌, 피와 살을 가진 개성 강한 캐릭터들 사이의 애정, 갈등, 긴장, 대립, 화합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로버트 해리스가 언제나 자기 작품에서 보이는 솜씨지만, 비열한 악한은 독자의 공분을 일으키고, 때묻지 않은 영혼을 지닌 주인공은 전폭적인 지지와 공감을 부르게끔 제시되고 있습니다.

 

회전자 하나가 늘어나면 왜 암호 해독이 26배로 어려워지는가. 다름 아닌 키가 작동하여 종이에 찍어내는 알파벳의 수가 26자이기 때문이죠. 회전자의 수가 n이라면, 이를 통해 부호가 담고 있을 수 있는 메시지의 경우의 수는 26의 n제곱이 될 것입니다. 특정 키가 결코 자신을 타이핑할 수 없어, 오히려 문자열의 대조를 통해 정체를 똑바로 노출시킬 수 있다는 치명적 약점은, 가장 교묘한 위장이 가장 적나라한 폭로라는 심오한 역설을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역사적 실존 인물은 그 이름만 간간히 거명될 뿐 무대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앨런 튜링이 주인공 제리코의 스승으로 그나마 대사 약간이 주어진 채 나오는데, 얼마 안 되는 비중으로나마 독자는, 왜 이 사람이 종전 후 잔인하게 영국 지배층으로부터 폐기 처분되어야 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국이나 일본 군담 소설에 자주 나오는 클리셰처럼 "주군, 이 자를 건사 못하시겠거든 차라리 죽여버리십시오." 같은 거죠. 동성애 습벽 따위는 그저 핑계에 불과했겠고.. 중반 들어서 자주 이름이 나오는 되니츠는 해군 제독이고(소설 중에서는 "장성"이리고 합니다만...), 히틀러가 죽은 뒤 독일 국가 수반 지위를 계승한 거물입니다. 상처 입고 거칠어진, 조심스러운 외양 아래 한없이 달콤하고 아름다운 속모습을 감추고 있는, 클레어의 룸메이트 헤스터가 아마 많은 독자들의 지지를 받은 여성 캐릭터일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제리코(그 이름도 승리의 상징이죠. 구약성서에서 여호수아의  극적인 성취가 있었던 바로 그곳을 딴 이름)에게 크게 하나 배운 건, 앞으로 영자 신문에서 크로스워드 퍼즐을 풀 때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는가 하는 요령이었습니다. "문제를 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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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사랑해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유혜자 옮김 / 밝은세상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사랑과 집착, 경계 넘어 하나됨과 범죄 사이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요.

오스트리아 출신의 떠오르는 베스트셀러 작가인 글린타우어가 내놓은 이 신작은, 좀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사연은 희귀하고 이례적인데, 다만 겉으로 봐서는 흔한 남녀 사이의 사랑 다툼입니다. 두 당사자 중 적어도 한 사람은 그렇게 몰아가려 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이것은 사랑 다툼이 아니라, 당장 해소되고,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상 복구 되어야만 하는 끔찍한 사고"로 간주합니다. 이 두 사람 주위의 친구들은, 두 사람 모두를 존중하지만, 그 중 한 사람에 더 공감한 나머지, 그 사람의 관점, 즉 "사랑 싸움으로의 해석"에 동의하여, 다른 사람을 살살 달래면서 좋은 결말, 해피한 골인 지점에 도착할 수 있게 노련하고 애정 어린 조율을 시도합니다.

이게 겉으로 드러난 모습입니다. 그럼, 내막, 속사정은 어떠할까요?




모릅니다. 알 수 없습니다. 주인공인 여성 유디트의 입장이 주로 반영된 설명이 소설의 뼈대를 이루며 이어지고 있지만, 그건 유디트 개인의 "시선, 생각, 감정"일 뿐입니다. 일방적인 주장만 듣고 사태를 판단하지 말라고 하죠. 소설에서 어떤 인물이 주인공 위치라는 건 일종의 특권인데요. 우리 독자는 그게 누구의 것이든, 특권을 인정하는데 인색합니다. 주인공이 아주 특별한 매력이 있어서, 특권 부여가 용서가 되겠다 싶으면 모를까, 잘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로 누구 편을 들어 주면 안 되겠다며 신중해집니다.

유디트는 매력이 부족해서, 우리 독자가 함부로 손을 들어 주기 주저하는 걸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삼십 대 중반을 넘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꽤 아름다운 편인가 봅니다. 한창 피부의 윤택과 광채가 꽃필 나이,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자연산 방향을 풍길 나이는 비록 지났지만, 그녀는 대신 성숙함과 정서적 안정이라는 면에서, 여인의 다른 매력을 뿜어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 나이를 먹었다고 여성이 다 그런 건 아닙니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볼품 없이 시드는 이들도 많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생활력 있고 강단이 넘칩니다. 그럴다고 사람 안 가리고 되바라진 모습을 보이냐면, 절제할 줄도 압니다. 남자가 비록 도에 넘친 바람둥이인 사정이 있다고는 하나, 20대의 절정이라 할 육체적 매력을 풍기는 남성 크리스와 아무 무리 없이 뜨거운 하룻밤을 지낼 수 있었던 것도, 일단 유디트 이 여성이 매력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자, 사정이 이런데, 유디트의 친구들도 그렇고, 그 남동생, 심지어 어머니(아버지는 아닙니다. 이상하게 아버지는, 이 딸의 인생에서 몇 발짝 거리를 두더군요)까지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해 유디트의 해석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유디트가 스토커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남자 (이 역시 유디트의 주장일 뿐입니다) 한네스에게 더 공감하고 동조합니다. 너 왜 그러냐고, 너 아니라 어떤 여자도 반할 만한 남자고, 너 아니라 어떤 여자한테 가도 사랑받고 존경 받을 남자인데, 니가 부족하다는 건 아니지만 너한테 좀 넘쳐보이기까지도 하는 남자인데, 덥석 물 생각은 안 하고 왜 이상한 내숭, 혹은 신경 과민이냐고.




우리 독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디트 이분 너무하는 거 아냐? 하긴 성격이 저러니 저 나이를 먹도록 혼자였지. 다 이유가 있다니까. 그런데 이건 편견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읽고 있는 제가 남자라서, 유디트가 저러는 건 다 이유가 있는데 마땅히 해야 할 이해를 베푸는 데에 주저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 주위의 여성 한 분에게 물어 봤습니다만, 저하고 별로 생각이 다르지도 않더군요. 유디트, 흠, 이분을 이제 좀 편한 마음으로 비난해도 될 것 같네요.

그래도, 그래도... 한네스- 이분 나이도 지극히 먹은 사람입니다. 사십대 초반이니, 처신이 똑바르지 않으면 좋은 소리 못 듣을 처지입니다- 가 뭔가 잘못한 게 있으니까 여자가 저러는 거겠지. 여튼 여자가 마음 안 주고, 싫다는 의사 표시 분명히 했는데도 남자가 계속 그러면 그건 남자 잘못이지. 남자라면 더군다나 스토킹으로 오해 안 받도록 더 분명한 주의가 필요한데 말야. 뭐 이렇게 생각?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음, 한네스 씨가 일방적으로 유디트를 쫓아다닌 건 아닙니다, 선수답게 멋진 구애를 처음에 시도한 건 맞지만, 이후에는 쌍방 동의 하에 교제가 이어졌습니다. 친지들에게 소개하는 과정도 있었고(이상한 건, 한네스 씨가 뚜렷한 사회적 지위, 재력이 있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유디트를 자신의 주변에 소개시키는 일이 없었다는 겁니다. 유디트는 반대로, 자신의 주변 모든 이들, 진짜 한 사람도 삐놓지 않고 이 한네스를 소개 시켜 줬습니다), 한네스 씨가 유디트에게 무례한 행동을 한 바도 없습니다. 유디트도, (독자를 향해) 말이 많은 주인공이 아니라서(어떤 소설을 보면 내면의 가장 은밀한 부분까지, 여성이 자기 자아를 해부하듯 독자에게 간청해 가며 들려주는 것도 있죠. 그러나 유디트는 이런 케이스에 비하면 차라리 과묵하다 하겠습니다), 정확히 유디트가 어떤 계기로 한네스에게 마음을 끊었는지 알기가 힘듭니다. 겉으로 봐서는 둘이 베니스 여행(이것도 한네스 씨가 경비와 계획 모두를 마련한, 여자친구 유디트에의 선물이었죠)을 갔다 온 후, 무슨 변덕인지 유디트가 갑자기 절교를 선언한 게 전부입니다.

여튼 여자가, 남자를 향해 싫다는 의사 표시를 분명히 했으면, 자기가 소년 청년도 아니고 중년 남성이라면 "알았다"며 분명히 발을 끊어야죠. 그런데 딱 한번(일단 드러나기로는), 한네스 씨는 유디트 주변에서 죽치고 앉아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는 했습니다. 이건 안 되죠. 하지만 분명히 경고를 하자, 그는 물러납니다. 최소한, 문자를 발송하고 꽃을 선뭏하고 집 주변을 배회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타격을 받아 병원에 먼저 입원하기까지 하는 게 한네스 씨였습니다.

자, 이렇게 되니, 애정을 줄 듯하다가 매정하게 끊어버려 남자 하나 폐인 만든 유디트라며, 보는 이에 따라서는 여성을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남자가 더군다나 신분도 버젓히 갖추고 매너도 좋다는 평판이 자자한데 말이죠. 게다가 한네스 씨는 능력도 있어서, 유디트의 실직 상태인 동생 알리에게 근사한 일거리를 마련해 주기까지 합니다. 이러니 예비 처남, 처남댁, 장모님까지 반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어디서 니가 이런 재주로 이런 일등 사윗감을 데려왔냐고, 유디트의 어머니는 딸을 다시 보기까지 합니다.

유디트는 그러나 주변에서 자기 편을 안 들어 주고, 환상이든 현실이든 원치 않은 남자가 자기 인셍에 끼어들어와 나가질 않는다고 생각하자, 미치기 직전까지 갑니다. 나중에는 약간의 정신분열증을 일으켜, 모르는 사람에게 길에서 말을 걸고 마구 울다가 실신하는 일이 벌어져, 병원에 입원하기까지 합니다. 이쯤 되니 유디트 편을 드는 이들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독자도 여기에 이르러선 짜증이 슬슬 일기 시작합니다. 자기 감정에만 충실해 가지곤 주위에 민폐 끼치는 거 아니냐고 말이죠. 여자가 신사 한 사람 범죄자 만드는 거 아니냐고 말이죠. 여기까지는, 소설이 사태를 모호하게 몰고 갈 뿐 진상이 안 드러납니다. 독자는 자기 감정과 취향애 따라, 대채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마음대로 해석할 자유가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말입니다.

불과 세 쪽 정도를 남겨 놓고, 소설은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결말,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는 결론을 지어버립니다. 혹시 이러다 열린 결말 비슷하게 가지 않나 생각했던 독자에게는 천만 뜻밖으로, 열린 결말은커녕 "쾅!" 소리 내고 닫히는 철제 도어 같습니다. 다시 말하지면 불과 세 페이지를 남기고, 그간 숨겨져 왔던 진상이 밝혀지는 겁니다. 독자가 마음의 준비도 채 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내용 누설이 있으니. 혹시 소설을 읽을 마음이 있는 분은 주의하십시오)



유디트는 조명 인테리어 가게 사장입니다. 상당히 잘 안풀리던 외조부의 가게를 이어받아 어머니가 고전하던 사업을, 자신이 맡은 후로는 제법 좋은 태깔로 살려 놨습니다. 이 가게에는 비앙카라는 여직원을 두었는데, 스무 살도 안 된 여성답게 수다스럽고 행실이 좀 조신하지 못한 면이 있지만, 의외로 생각이 깊고 세상 물정에 밝은 면이 있습니다. 유디트가 유능한 경영자이니까 사람 보는 눈이 있어 잘 가려 뽑은 게죠. 이 비앙카가 큰 공을 세웁니다. 비앙카도 애가 똑똑하니까 자기하고 잘 맞는 남친 하나를 잡아 사귀고 있는데, 이 남친이 아니었으면 유디트 사장은 인생 망칠 뻔했습니다.

세상 일은 진정,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으로는 모릅니다. 유디트 주위의 가족, 친구들도 어제오늘 사회 생활을 시작한 풋내기가 아닌데, 어느 남자의 노련한 매너와 재력, 그럴듯한 분위기만 보고 모두 속았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며칠 동안 밀착해서 함께  지내 보니, "왠지 이건 아니다!" 같은 여자의 육감으로, 한네스 씨의 본모습이 턱 하고 감이 왔던 게 아닐까 합니다. 그날 이후 유디트는 이 뭔가 모르게 꺼림칙한 존재를 자신의 인생에서 지우려 노력했고,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속 검은 한네스는 범죄의 경계를 애써 넘지 않으면서 또 한번의 수작을 부리려다 마침내 임자를 만난 거죠. 애정소설, 반전 스릴러라기보다, 진실이 무엇인지 인간의 진심이 무엇인지 무척이나 판단하기 힘든, 우리네 현대 사회의 실상을 풍자하는 우화 소설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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