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모른다
카린 지에벨 지음, 이승재 옮김 / 밝은세상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뒤의 역자 후기에 보면 "1988년작 스티븐 킹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미저리>는, 이제 이 소설 때문에 아이들 동화나 마찬가지가 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먼저 소개된 <그림자>를 재미있게 읽으신 독자는, 카린 지에벨의 이 작품도 전혀 실망하지 않고 즐기실 수 있을 것 같네요. "즐긴다"는 말에 좀 어폐가 있긴 합니다만.



리디아는 빨간 곱슬머리를 기른, 늘씬하고 아름다운 이십 대 중반의 여성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녀에게는 정상인으로 행동하거나 사고할 수 없게 하는 큰 상처가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그녀는 일란성 쌍둥이 자매로 태어났는데, 그녀들이 열한 샬 되던 무렵 오렐리아라는 이름의 이 자매가 실종된 것입니다. 아마 성폭행 당한 후 살해되고 암매장당한 걸로 추측되지만, 범인도 알 수 없고 사체의 행방도 여태 묘연한 채,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때부터 경찰에 대한 불신까지 같이 품게 됩니다. 오렐리아는 죽었지만, 죽지 않고 그녀 의식 한 구석에 자리잡은 채 리디아를 놓아 주지 않아, 남은 리디아는 일생을 두고 오렐리아의 복수를 대신 해 주어야 한다는 집착에 시달리게 됩니다. 오렐리아와는 마침 사건 발생 직전, 같이 애정을 다투던 한 남자아이 때문에 생전 처음으로 싸움까지 한 터라, 그녀의 죄책감(자매를 지켜 주지 못하고 혼자 살아 남았다는)은 더욱 깊어갑니다.

리디아는 그러던 중, 누가 그 끔찍한 살인과 성폭행, 사체 은닉을 저질렀는지 암시하는 편지를 받습니다. 놀랍게도 그 편지가 지목한 범인은, 매력적인 외모를 지닌데다 아직 젊은 나이에 경감직에까지 오른 현직 경찰, 브누아 로랑이라는 남성이었습니다. 가뜩이나 무능한 경찰에 대해 적대감을 품고 있던 그녀는, "먕백한 물증(무엇인지는 소설을 직접 읽어 보십시오)"이 손에 들어 오자, 앞뒤 가리지 않고 브누아를 납치합니다. 그녀는 약제 지식과 초급 간호학에 밝았기 때문에, 건장하고 영리한 남자- 게다가 현직 경찰 신분- 인 브누아를 힘 안 들이고 납치하는데, 여기에는 천성적으로 여자 꼬시기를 좋아하는 브누아 자신의 성격적 결함과, 브누아의 눈에는 꽤 매력적으로 비친, 그리고 웬만한 남자에겐 꽤 강렬한 인상을 남길 만한 리디아의 미모도 각각 한몫 거들었습니다.

 



리디아는, 자신의 쌍둥이 자매를 강간, 살해, 사체 유기했다고 철석같이 믿은 이 남자를 시골 한적한 곳에 위치한 지하실에다 잡아다 두고, 강도를 서서히 높여 가며 각종 고문을 가합니다. 혹시 이상 성격을 지닌 사이코패스 여성이 있다면, 이 소설을 읽고 모방범죄를 저지르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만큼, 이 과정은 대단히 치밀하고 긴장감 넘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위에 적은 대로, <미저리>에서 묘사되는 악녀의 행적 따위는 저리가랄 만큼, 특히 남성 독자들이 읽는 도중 몸서리가 쳐지고 자신의 국부, 어깨, 허벅지, 가슴 등이 무사한지 수시로 더듬게 될 만큼, 아주 신랄하고 생생하게 이 과정이 그려져 있습니다. 육체적 가학 절차 뿐 아니라, 가해자 여성과 피학대자 남성이 벌이는 심리전, 그리고 특히 일방적 열세에 놓여 있는 브누아의 의지와 결의가 어떻게 무너져 가는지에 대한 실감나는 서술이 압권입니다.



브누아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봉변을 당하면서, 온갖 생각과 상상을 머리 속에 교차시킵니다. 그는,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극한의 고통을 다 치르면서도, 자기 눈에 지나치게 매혹적인 외모를 소유한 이 여자에게 수시로 반하기까지 합니다(워낙 천성이 여자를 밝히는 쪽이다 보니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매저키즘적 쾌락을 느끼는 데까지 가지는 않습니다(그러는 편이 차라리 그 자신에게는 나았을 텐데요). 오히려 독자는, 이 사나이가 강력한 의지와 체력을 겸비한, 보기 드문 타입이라는 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서, 읽는 도중 그에게 열심히 몰입하게 됩니다. "이 순간에도 아들 제레미를 생각하며  절대 포기하지 않으려 드는군! 그래, 조금만 더 힘을 내 보라구!" "어차피 그 광녀는 널  살려 줄 생각도 없고, 혼자 힘으로 빠져 나갈 가망도 없는데, 차라리 그 여자의 광기를 깨우쳐 준다는 의미에서 장렬하게 죽음을 택하는 게 어떨까?" 독자의 반응은 같은 남성이라고 해도 이처럼 천차만별이겠으나, 캐릭터 브누아는 그 지옥 같은 시간 동안 자신의 한 의식 안에서 양 극단, 즉 포기와 오기 사이를 오가는 진자처럼 감정과 이성의 격변을 겪습니다. "내가 이 처참한 지경에서 행여 살아나간다 해도, 이미 미쳐 버려 있을 지도 모른다."



여성 입장에선 어떻겠습니까? 쌍둥이로 태어나고 자라보지 않은 입장에서 알 수 없는 일이기는 하나, 만약 리디아와 같은 경험을 했다면, 자신의 분신이, 그것도 어린 나이에, 악마나 짐승 같은 어느 사내에게 죽음과도 같은 고통과 치욕을 겪고, 어느 컴컴하고 차가운 지하에서 백골만 남아 썩어가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견딜 수 없는 죄책감과 증오에 타오를 수도 있겠습니다. 여성 독자라면 경우에 따라 리디아에 공감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게다가 이 브느아라는 남자는, 쉽게 여자를 만나고 쉽게도 버리는 질 나쁜 바람둥이인데, 정작 미인은 자기 아내(가엘)은 따로 감춰 두고 순도 높은 사랑을 바친다니, 좀 당해도 싸다는 느낌 마음 한 구석에서 비밀스럽게 키울 만도 하겠습니다. 게다가 소설을 끝까지 읽기 전엔, 기가 막힌 반전으로 "그래! 사실은 내가 진짜 유아 강간 살해범이었다!"라고 자백하는 브누아의 모습이 나올지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내용 누설의 위험을 무릅쓰고 한 마디 하자면, 다 읽은 독자로서 브누아는 결백하다는 점 미리 확실히해 두겠습니다)

조금만 더 내용 누설을 하자면, 사실 브누아도 죄가 없지는 않습니다. 오렐리아를 죽이지는 않았습니다만, 어느 누군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죽음 근처까지 몰아간 적이 있습니다. 지하실에서 그가 받은 지독한 고초는, 어쩌면 그가 저지른 악행의 대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소설에서 묘한 건, 죄를 저지른 자들은 예외 없이 자신의 악행에 대한 응보를 치르게 된다는 점입니다. "최종 보스" 한 분만 빼고 말입니다. 오렐리아를 25년 전에 죽인, 이 소설에서 최악 극악의 등장 인물이라 할 조아킴(이름 밝혀도 별로 내용 누설은 아니니 안심하십시오)도 결국 죽습니다(더 지독한 방법으로 죽어야 했을 수야 있겠지만). 사실, "그분"도 소설 끝날 때까지만 죽지 않았다뿐, 반드시 가까운 시일 안에 제 죄과를 치를 것 같은 느낌을, 소설은 강하게 풍기기도 합니다,. 따라서 책을 다 읽은 독자는, "이렇게 끝나면 안되는 거잖아!" 같은 의분을 느끼게 되진 않습니다.  사실 반전이 나름 절묘하기 때문에 독자가 그럴 정신적 여유도 못 가집니다만.

이 소설에서 다른 등장인물도 흥미롭습니다. 타지에서 급파된 파브르 경감은, 늙고 추한 외모의 소유자지만, 침착하고 이성적이며 직감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결국 브누아의 행방은 그가 찾게 되고, 아마 사건도 그가 해결해 주리라 독자는 기대를 갖게 됩니다. 소설 초반에 "이런 실종 사건은 초동수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지?"하는 대사가 나오는데, 이 말은 25년 전의 미제 사건 희생자인 오렐리아에게도 (읽다 보니)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라, 독자는 특히 아동 성폭력 사건의 경우 뭔가 특별한 시스템적 조치가 필요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과 불안을 짙게 가지게 됩니다. 조아킴 한 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희생되었습니까.

피해자이긴 하나 리디아의 정신 상태와 인격 역시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물증이라고 그녀는 확신했지만, 다른 가능성도 있다는 걸 조금은 생각을 했어야죠. 브느아가 진짜 범인이라고 해도 법치국가에서 사력(私力) 구제는 안 될 말입니다만, 한번 생각을 정한 바를 귀를 막고 안 바꾸려하는, 말이 안 통하는 모습을 보며 독자는(특히 남성이라면) 분명 피해자인 그녀에게 동정을 가지기가 힘듭니다. 물론 일부 비뚤어진 사이비 여권론자라면 이 경우에도 "남자가 무조건 잘못!"이라며 폭주할 수 있겠으나, 어차피 건전한 상식을 갖지 못한 자에게 어떤 경우라도 온당한 반응을 기대하기는 힘든 법입니다. 남자분들은 제발 이 소설 좀 읽고, 밤 늦게 행여 만취 상태로 다니다 정신이상녀에게 몹쓸 봉변이나 안 당하도록, 간통죄도 폐지된 이 마당에 특히나 조심들 좀 하십시다.

파브르 경감(이름이 오귀스트라서 더 밉살맞다는)이 가엘 부인을 잡아들였을 때, "생긴 것도 멍청한 위인이 과연 생긴 값을 하는구만!"하고 짜증을 낸 독자도 많았을 겁니다. 브누아 로랑 경감 실종 건과는 무관했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직감이 뭔가 하나 건지기는 한 셈입니다. 카린 지에벨은 이처럼, 엑세서리 플로팅을 꾸려 독자의 긴장감이 도중에 낭비되지 않게 하는 데에도 아주 능합니다. 제가 이분이 쓴 스릴러를 읽을 때마다 감탄하는 대목이죠.

저는 처음에, "브누아를 선배라고 부르는" 토레즈 경사가 범인인 줄 알았습니다. 동기는 뭐냐, 남자로서 잘난 그에 대한 시기심과 적대의식, 그리고 브누아의 아름다운 부인 가엘에 대한 이룰 수 없는 연정, 이 정도면 뭐 적절하죠. 그래서 처음 파브르가 그녀에게 혐의를 두었을 때 그토록 격하게 반응했던 거고, 가엘이 자신에게 "삼천 유로의 진짜 용도"에 대해 털어 놓았을 때 "아니 매춘을 하다뇨!"라며 길길이 (필요 이상으로) 날뛰었던 것 아니었을까. 하지만 범인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용의자 하나 정도 배제하는 게 큰 스포일러는 아닐 것 같습니다. 범인을 찾는 데에 가장 큰 힌트는, 지하에 갇힌 브느아가 입으로 계속 반복하는 그 한 마디에 있습니다. "그 말"은,. 비록 브누아가 그 진위를 판명할 전문지식은 없었으나, 결국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브누아의 그 말이 사실이라면, 누구 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거짓말을 했다는 겁니다. 바로 그 거짓말을 한 사람이, "최종 보스", 범인입니다. 트릭이 치밀하면서도 독자가 너끈히 풀 수 있는 게임이라는 점에서, 카린 지에벨은 애거사 크리스티나 엘러리 퀸보다 최소한 "공정성" 면에서 더 나은 작가라고도 하겠습니다. 이 소설의 진상, 당신의 머리로 풀 수 있으므로, 제레미의 말처럼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풀어 보십시오. 당신은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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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백작부인
레베카 존스 지음, 이나경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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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네스북에 그 기록이 올라 있는, 세계 역사상 최악의 연쇄살인마가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인 에르제베트(엘리자베스) 바토리 백작부인입니다. 삼백 년 후에 등장한 하층민 출신 잭 더 리퍼 따위와 나란히 악인의 대명사로 일컬어져 왔고, 현재에도 그 악명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서구권에서는 악녀의 아이콘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한 실존인물인데, 예를 들어 일라이 로스 감독의 <호스텔 2>를 보면, 여대생 로르나를 납치하여 천정에 매달아 놓은 후, 상처에서 떨어지는 피를 욕조에 받아 가며 바로 아래에서 목욕을 하는 변태성욕자(이자 살인자)인 어느 여성 캐릭터가 나옵니다(당연히 이 영화는 현대가 배경이구요). 조금만 변형을 가해 줬어도 좋았을 텐데 너무 전형적인 기믹으로 출연시킨 까닭에,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코믹한 느낌까지 풍기는 장면이고 설정이었습니다.

 

여튼 이 소설은 종래에 완전히 굳었다 할 이런 통념을 뒤집고, 그녀의 진면목이랄까 대안의 해석 비슷한 것을, 작가 레베카 존스의 관점에서 시도하고 있습니다. 여성의 시선에서 언제나 "역사상의 마녀"들이 억울하고 불쌍한 희생양으로 비치는 건 아니더군요. 엉뚱하게도 자신의 비뚤어진 심성 같은 걸 맹목적으로 악녀의 (정당한) 악평에 투사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그저 타인의 미모와 고귀한 출신 성분 따위가 부러워서 별 근거도 없이 매도와 폄하를 일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도 그런 말을 내뱉을 때는 "정의, 객관"의 이름을 빌리며 절절한 말투의 외관을 덮어쓰니(예를 들면 이 소설에서, 바토리 백작부인에게 추궁당한 후 본인 혹은 죄르지 투르조에게 항의하는 하녀들도, 자신의 잘못과 거짓은 조금도 의식하지 않은 채 제 나름 크게 억울하다는 듯 거짓말을 울며불며 늘어놓죠),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첫인상만으로 오판을 하지 않게 주의할 일이겠습니다. 사회생활 하면서 이런 중상모략은 흔히 겪는 일입니다.

 

아무튼 작가 레베카 존스의 이 최근작 하나로, 그 악명 높은 바토리 부인이 당장 오명을 벗는다든가 복권된다든가 할 가망은 거의 없습니다. 수백 년 동안 흔들림없이 굳은 선입견이라는 게 있고, 사람들은 대개 이성과 근거에 의해 판단하기보다 오래 간직해 온 자신의 느낌과 가치관에 따라 편한 판단을 하는 게 그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바토리 백작 부인에게는 대단히 안된 일이지만, 역사적 자료와 증거 따위가 남은 바로도 그녀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바가 없습니다. 이 소설의 액자처럼 기능하는 "성의 탑루에 감금되어, 아들 팔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에서 드러나듯, 그녀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부지한 채, 상당히 열악한 조건 아래에서 몇 년이나 더 연명하였습니다. 그녀의 성정이 독한 까닭도 있었겠지만, 처우가 (이 소설에서 드러나듯 추위가 심했다는 점 말고는) 그다지 열악하지 않았기 때문도 있었겠고, 무엇보다 사형이 집행되지 않은 건 그녀가 너무도 고귀한 혈통을 지니고 있었던 이유가 큽니다. 소설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녀가 저지른 죄과는 모조리 그녀의 하인, 하녀들이 받았습니다. 이 소설에는 일로너 요, 도로처 센데시 정도만 큰 존재감으로 부각되지만, 실제 재판 기록에는 그보다 더 많은 수의 하인, 하녀들이 그녀의 잔혹행위에 관여했다고 합니다.

 

이 시대 역사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서양 독자라면, 아마 개중에 "이것은 역사 왜곡이다!"라며 분노를 표시하는 이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근거가 딱히 있어서라기보다, 자신의 선입견에 묘하게 침투된 신조 한 자락에 어긋나는 바가 있으면, 대개 평범한 사람들은 "윤리적 거부감(본인은 이를 두고 "정의감"이라고 인지합니다)"을 느끼기 마련이죠. 하지만 바토리 백작 부인에 대해 별반 아는 바 없는 한국의 독자들은, 이 재미있게 쓰여진 소설을 읽고 신나게 주인공에 공감하면서 1부까지 읽어나가다, 2부 중반 남편 페렌츠의 죽음 이후로 급전직하하는 그녀의 운명을 보고 격하게 안타까워할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녀를 마녀, 살인마로 몰았던 당대인과, 사태의 진상도 모른 채 남 따라 증오를 퍼붓는 대중들에 대고, 한심하다며 혀를 끌끌 찰 것 같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여인은 흔히 남들의 질시를 사는 법이지!" 어디 여인 뿐이겠습니까.

 

이 소설에서 묘사된 에르제베트 바토리 부인은, 애만 안 낳고 결혼만 안 했다 뿐 스칼렛 오하라의 면모와 비슷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복당하길 싫어하고 시시한 남자에게는 눈길도 안 주는 그녀와는 달리, 바토리 부인은 남자를 꽤나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렇게 야심과 자긍으로 뭉친 여성치고는, 언드라시 같은 시시한 귀족(더부살이꾼)에게 너무 쉽게 몸을 주고, 피임도 서투르게 해서 고향까지 먼길을 가 해산하는 수고를 겪고, 자신의 배로 낳은 첫 딸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들려 보내며 차마 못할 짓을 행합니다. 이런 게 다 자기 자식에게 못할 짓일 뿐 아니라, 본인의 마음 한구석에 씻지 못할 죄의식이 남는다는 점에서, 부도덕하기 이전에 어리석은 짓입니다.

 

물론 진성 마녀 스타일로 비판받아 마땅한 인간형은, 아예 이런 거리낌이나 죄의식, 명예감 따위가 없더군요. 손톱만한 이득이 된다, 혹은 이 남자와 자는 게 향후 로또식 요행이 터질 통로가 된다 싶으면, 기꺼이 상대가 늙은이든 추남이든 행동에 옮기고 터무니없는 합리화를 일삼습니다. 도덕률이나 양심이 자신의 품위와 존재 가치를 위한 게 아니라, (가상의) 남성 우월 세력이 자신에게 부과한 부당한 속박이기라도 한 양 여기나 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자기를 파괴하는 줄도 모르고, 무슨 투사로서 대단한 명분이나 수행하는 줄로 자신을 기만합니다. 하긴, 즐기기도 하고 투쟁했다는 허영(환각)도 채우니 일석이조이긴 합니다.

 

소설을 읽으신 분들은 공감하겠지만, 1부에서 어렵사리 페렌츠의 마음을 얻고, 삼십을 넘기면서까지 남편과 사이에서는 불임인 채로 있다 늦게나마 딸 하나를 본 후로는 아이 넷을 연달아 낳고, 드디어 이 백작이 그토록 갈망하던 아들-즉 후계자-를 낳은 대목에서는, 주인공과 함께 환희, 뿌듯함 같은 걸 느꼈을 겁니다. 또, 제발 좀 에르제베트에게 잘해줬으면 하고 우리가 바라던 페렌츠가, 예쁜(예쁘기야 하겠지만 절대 미인은 아닌 것도 같은 게, 소설 초입에 거울을 보면서 아쉬워하는 캐릭터 본인의 고백도 있으니까요) 부인, 약혼자를 오래도 외면하고 천한 하녀들과만 어울리는 게 그리도 밉살스럽다가, 하녀 어말리어를 "별차기" 수법까지 가르쳐 줘 가며 가학적으로 혼내는 데 동참하고서부터 친해지는 장면에서, (하녀가 겪을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큰 안도를 느끼기도 했을 겁니다. 이상하게 저도, 소설 속 주인공에 대해 필요이상으로 감정이입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러다가도, <엉클 톰스 캐빈>이나 <노예 12년> 같은 걸 읽으면서는 무자비한 귀족들의 처사에 얼마나 분노하겠습니까? 사실 이 소설에서, 얼굴 좀 예쁜 하녀는 무조건 주인을 홀리려 들고, 반대로 어느 이성도 거들떠 보지 않을 것 같은 추녀는 같은 하녀 계급 중 예쁜 이를 시기하고 모함하는 타락한 성격으로 묘사되는 게 거의 정해져 있습니다.

 

에르제베트의 어머니인 언너 바토리야말로, 미모와 영리함, 귀족으로서 나름 고충일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지혜와 무자비함을 고루 갖춘, 이 소설의 주인공 에르제베트보다 더 "바토리스러운" 원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가 사위에 대해 예언한 대로 "그는 좋은 사람이니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라"는 말은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어쩌면 에르제베트는 자신만의 매력(이라기보다 결점)이 아니라, 어머니에게 후천적으로 배운 잔혹함을  그대로 실천하고서야, 남편의 마음을 얻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걸 보면 페렌츠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 장모 언너의 눈에 찼을 뿐인 "우둔할 만큼 아랫사람에게 잔인하고 냉혹한" 전형적 귀족이라는 점에서만 "좋은 귀족"이었나 봅니다. 소설을 읽어나가다 보면, "아랫것들이란 그저 하루가 멀다 하고 버릇을 고치고 제 분수를 깨닫게 하지 않으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존재로만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런 전제가 깔려야, 바토리 백작부인이 행한 엄한 처분이 합리화도 되겠고 말입니다.

 

페렌츠는 아내에게 완전히 마음을 준 후에도, 지속적으로 하녀들과 통간하는 걸로 나오는데, 그 중에 별로 예쁘지도 못하고 (그가 그렇게도 소중히 여기는) 가문의 위신과 부를 위태롭게 할 만한 여인에 대해서도 분별 없이 가까이하는 걸 보면, 봉건 질서에 의심 없는 충성과 신념을 간직한 인물일지는 몰라도 지혜는 결여된 타입으로 보입니다. 투르조가 그처럼 악질적인 배신자(이 소설의 관점에서만 그렇다는 걸 유의해야겠습니다. 역사적 판단은 별개입니다)일 줄도 모르고 생전에 그와 재혼하라고 아내에게 권하는 장면을 보면 알 수 있죠. 이는 물론 지극한 아내 사랑이긴 합니다. 그가 가문의 보존, 후계자 승계에 얼마나 큰 집착을 보였는지를 감안하면 큰 파격입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천한 하녀들을 건드리고 다닌 걸 보면 참... 아시아의 술탄이나 파디샤도 한 여인에 대해서만 일생의 순정을 유지한 경우도 있는데 말이죠) 그가 어리석다는 건, 사촌이라기보다 하인과 같은 존재였던 언드라시가, 자기 약혼녀와 놀아나는 걸 방치한 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약혼녀에게 본인이 애정을 느끼고 안 느끼고와는 별개로,  아랫사람이 본인 허락도 없이 "자기 물건"에 손대는 짓은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바토리 벡작부인은 역사상 기록으로는 각종 고문 기구를 들여 놓고, 하녀뿐 아니라 귀족의 영애들까지도 교육의 명목으로 자기 성에 들인 후, 가학적 만행으로 목숨을 앗은 걸로 나옵니다. 이 소설에는 하녀, 하인들의 권익도 당시 헝가리 법제가 제법 잘 보호한 것처럼 나오지만, 사실 귀족의 영지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누가 번거롭게 정의를 내세우며 개입하려 들었겠습니까? 이 소설에서 설정한 대로, 그 귀족의 재산과 지위를 빼앗는다거나 정치적 공작이 깔려 있지 않았으면, 하녀 따위야 죽든 말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겁니다. 실제 역사에서 이 바토리 부인이 파멸을 맞은 건, 1) 종교적으로 문제가 될 법한 방식으로 하녀들의 목숨을 앗앗고, 2) 귀족 자제들의 신변에 위해를 가했다는 이유가 끼어들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뿐입니다.

 

소설 속에서도 그렇고, 실제 행적으로도 바토리 백작 부인은 대단한 교양과 학식을 갖춘 인물로 보입니다. 한국의 일부 부유층 자제가, 영어는커녕 모국어로 행하는 의사 표현마저도, 정신박약이나 문맹자의 그것이나 다름 없는 수준을 보이고도 부끄러운 줄조차 모르는 모습과는 크개 대조됩니다. 귀족이 되려면 아래 신분에게 존경을 받을 만한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는 서양의 컨벤션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율 브리너,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영화 <아나스타샤>를 보면, 로마노프 대공을 두고 집사가 "이 글씨 쓴 꼬락서니 하곤.." 하며 경멸 가득한 표정을 짓는 장면이 있습니다. 자신보다 필체가 안 좋다는 뜻이 아니라(자신은 당연히 그게 자기 본연의 일인데 필체가 좋아아죠), 귀족이 으레 갖추어야 할 자질을 연마하지 못한 채 세상에 나온 "불량품"이라는 뜻입니다. 귀족이 되려면 지식 뿐 아니라 판단력도 좋아야 합니다. 이 소설에서도, 하녀들 사이의 분쟁을 말끔히 해결하지 못하면, 아랫사람들로부터 조소의 대상이 된다는 분위기가 분명히 제시되고 있죠.

 

언너 더르불리어는 그 음산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서 거의 유일하다 할 만큼 긍정적 인간형으로 묘사됩니다(실존 인물은 아닌 듯합니다). 에르제베트는 그녀와 처음 마주칠 때부터, "당신이나 나나 여기선 똑같은 하녀 처지니, 형식적이고 외교적인 모습만 보이지 말고 속을 터 놓아 보라"고 요구합니다. 이때 에르제베트의 속셈이 따로 있어서 정보 따위를 캐내려는 게 아니라, 진짜 외로워서 친구가 필요했던 걸로 보입니다. 가식이 아니라 이 소설에서 에르제베트가 유일하다시피 사람 제대로 알아 본 게, 사심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이 더르불리어를 두고서였습니다. 사람이 자기 분수와 본분을 안다는 것만으로, 이처럼 가치가 올라갈 수 있구나 하는 점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실 에르제베트는 나름대로 순수한 성격이지, 음모를 꾸미고 계산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타입이 못 되는 것 같습니다. 언드라시, 투르조, 그 외 그녀를 거쳐 간 인물들을 보면 대개 그녀를 이용해 먹고 버린 셈이지(소설의 시점이 1인칭이라 이 점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독자가 냉정히 생각해 보면 그런 결론이 나옵니다), 정작 악녀라는 그녀는 상대의 속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피해만 보았습니다. 페렌츠가 처음에 그녀에게 끌리지 않았던 것도, 가슴과 둔부가 덜 발달한 아이라서기보다는, 어딘가 맹해 보이는 타입이라 매력이 안 느껴진 건 아니었는지, 그러다가 의외로 독해 보이는 면을 발견하고서야 마음이 열린 게 아니었는지 생각해 봅니다(물론 이건 졍상이 아닙니다. 남자라면 당연히 순수한 여성을 좋아하기 마련이죠).

 

페렌츠의 대사 중에 "난 처음에 돈과 작위만 보고 내게 시집 온 여자인 줄 알았소."라고 하는 게 있는데, 사실 계보를 따지고 보면 에르제베트의 바토리 가문이 더 높은 지위이기 때문에, 이건 좀 사실성이 결여된 대목 같습니다. 결혼 후에도 바토리라는 성을 유지한 건 그런 내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에서 "왕"이라는 칭호로 자주 나오는 루돌프, 마티아스 등은, 물론 "헝가리의 왕"이지만, 그 이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이 두 사람은 바토리 백작 부인 사후에 터진(물론 상관관계는 없습니다만) 30년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무능한 군주들이었습니다(같은 시기 프랑스에는 앙리 4세라는 현명한 왕이 나와 여튼 프랑스의 중흥을 이끈 것과 대조되죠). 마티아스 왕은 헝가리 왕으로는 마티아스 2세이며, 제국 황제로선 그냥 마티아스 황제일 뿐입니다. 이 사람은 사실 친계 조모가 헝가리 왕실 공주 출신입니다. 따라서 바토리 부인과는 그리 멀지 않은 친척인데, 이 소설에서는 투르조의 농간에 넘어가 커니저이 가문의 돈(따라서 상속자 바토리 부인의 채권)을 떼먹는 걸로 나옵니다. 소설에는 명시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투르조가 마티아스와 황제 사이에서 얼마나 이중플레이를 열심히 벌였는지는 눈에 선히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앞서 말했듯 "나름 순수한" 캐릭터 바토리 부인은 자신만 그 사정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고, 결국 이때 마티아스 황제와 사이가 벌어진 게 그녀의 몰락을 자초한 걸로 암시됩니다.

 

이 소설 최대의 악역인 투르조의 신분은 "영주"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약간 이상한 느낌입니다. "영주"라고 하면 남작도 종남작도 그저 기사 신분도 자기 영지 안에서는 다 영주입니다. 그런 시시한 보편 지위에서, 불입권을 지닌 백작 부인의 성 안에 범죄 조사차 수색을 할 수 있고 처분을 내린다는 게 어색하죠. 영어 원문은 "영주"가 아니라 "팔라틴"입니다. 우리 나라 역사책에서 흔히 "궁정백" 혹은 "궁중백"으로 번역되는 그 작위입니다. 이 자리는 법적으로 황제의 대리자이기 때문에, 바토리 백작의 영지에 이처럼 진입을 하는 게 경우에 따라 가능한 것입니다. 그저 친분만 있다고 이런 실력 행사가 가능한 게 아니죠. 투르조의 이름은 죄르지인데, 이는 사실 바토리 부인의 아버지의 그것과 같아서 묘한 아이러니를 풍기는 듯 보이지만, 조지, 조르쥬, 게오르그 따위가 다 같은 계통이며, 유럽에서 가장 흔한 이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리 큰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헝가리 인명은 안드라시, 안나 등으로 쓰는 게 보통이나, 이 책에서는 액센트가 놓인 a는 "아", 없는 a는 "어"로 철저히 구별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좀 어색해도 정확한 현지 발음에 가까운 표기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왕국 수도 "포조니"는 현재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의 헝가리식 이름입니다. 슬로바키아는 역사상 오랜 기간 헝가리의 지배를 받았기에 이런 사연이 있고, 저 위에 적은 현대 호러물 <호스텔 2>에도 느닷 바토리 부인 캐릭터가 나오는 게, 배경을 브라티슬라바로 삼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연관 고리가 있다고 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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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스쿨
리처드 와이즈먼 지음, 한창호 옮김 / 와이즈베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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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등생명체인 인간에게 특히 중요한 활동은 휴식이고, 그 중에서도 수면은 활력의 회복에 있어 중추적이라 할 만한 비중을 지닌 프로세스입니다. 저는 예전, 김대중 대통령이 야인으로 지내던 시절, 수사기관에 연행되기 전 그를 끌어가려고 온 수사관들에게 단 한 가지를 부탁했다는 에피소드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부탁인데 단 15분만 자게 해 주시오."

수사관들은 차마 거부할 수 없었고, 그는 양해를 얻은 후 잠시 소파에 누워 잠을 청했습니다. 거짓말처럼 15분 후 정확히 깬 후 수사관들과 동행했는데, 더 놀라운 건 불과 15분 동안 수면을 취하고 일어난 그의 얼굴이, 다른 사람처럼 달라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15분간의 수면만으로 저처럼 원기가 회복될 수 있을까?" 비슷한 경우로, 전(前) 대우그룹 회장 김우중 씨 역시, 바쁜 스케줄 때문에 항공 여행이 일상이 되다시피한 터라,  기내에서의 수면이 에너지 충전을 위해 필수적이었다며 여러 매체를 통해 회고한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은 "왜 어떤 사람은 그토록 단잠을 잘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은 잠을 못 자서 그처럼이나 고생을 하는가?"에 대해, 체계적이고 풍성한 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수면제의 적절한 처방을 받기만 하면 무리 없이 수면을 이룰 수 있는 이가 따로 있고, 수면제가 잘 듣지 않거나, 건강에 큰 지장을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의 체질에 따라, 잠을 못 이루는 원인과 해결책이 천차만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잠을 잘 자려면 이러이러한 방법을 쓰면 된다"는 안이한 팁, 요령은, 대개 효과도 보기 어려울 뿐 아니라, 오히려  위험하기까지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잠이 안 와 고생한 게 아주 오래 전 일일 뿐입니다. 한 2년 정도, 밤에 잠이 오지 않아 제법 속을 썩였는데, 그때마다 의존한 건 대학원 과정 실해석학 교과서를 읽는 방법이었습니다. 머리를 한창 혹사하고 나면,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듯 잠이 쏟아지더군요. 요즘은 "머리만 대었다 하면 자는" 스타일로 바뀌어서, 가벼운 소설책을 읽다가도 곯아떨어지기가 예사입니다. 물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당연 숙면이 가능한 쪽이겠죠. 잠이 안 와서 다음날 스케줄을 걱정해야 할 때의 그 초조함이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이 책은, 수면 부족이라든가, 질(quality)가 떨어지는 수면이, 얼마나 당사자의  활동과 (심지어는) 운명에 큰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지, 여러 사례를 들어 경고하는 말로 시작합니다. 잠을 잘 못 자는 처지라 해도, 그저 "스트레스 과다나 컨디션 저하, 슬럼프" 정도로 가볍게 넘어갈 뿐, "존재의 위기"까지를 떠올리고 경각을 갖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자 리처드 와이즈먼 교수는, "어제 자지 못한 잠은, 오늘 당신의 직장과 명성을 눈 깜짝할 사이에 날려버릴 수 있고, 내일 당신이 가진 모두와 다른 사람의 이익까지 무(無)의 상태로 돌려 놓을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잠은 이미 목숨이 달린 문제라고단정하는 셈입니다.



우리는 잠이 안 오거나 할 때, 인터넷에서 간편한 요령을 검색하는 게 보통이고, 위험 부담이란 조금도 의식하지 않은 채, 아무도 책임지지 않을 그 지침(?)들을 쉽사리도 행동에 옮깁니다. 거듭 말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이치적으로 생각해 볼 때 근본적 효과가 나올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합니다. 왜인가. 당신이 잠을 못 이루고 있다면, 그에는 당신 고유의, 생활 습관이든 타고난 체질이든 인생에서 겪은 어떤 체험의 기억이든, 무언가 강한 연결 고리를 지닌 원인이 있기 때문이죠. 이 책은 제법 두꺼운 볼륨 안에서, "잠을 못 자게 되는, 체계적이고 심리학적이며 심지어 인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자세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잘 풀리지 않는 문제나 애로에 봉착했을 때에는, 그 근본 원인을 파헤치고 다방면에서의 접근을 해 봐야 합니다. 저는 이전 <문제는 무기력이다>라는 책을 읽고 큰 각성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무기력"이란 얼마나 모호하고 막연한 "병명"이겠습니까. 보통 누군가가 무기력의 고통을 호소하면, 그 사람은 "한가한 소릴 한다"며 주변으로부터 면박이나 듣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기력이다>라는 제목의 그 책은, 무기력이 얼마나 치명적인 질환이며, 만만치 않은 이 늪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체계적인 전략이 필요한지, 상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었습니다. 가벼운 위험을 두고 과잉대응하는 것도 어리석은 선택이지만, 결코 경시해서는 안 될 불길한 재앙을 두고 그 위험의 중차대함을 간과한 채 "패기"만으로 맞서는 것 역시 피해야만 합니다.




이 책의 분류에 따르면 저는 "슈퍼 슬리퍼"인 것 같습니다. 다행입니다. 잠 때문에 다음날 제 일정에 지장을 받은 적이 최근에는 없었으니, 이 책을 읽어 내었을 필요나 이유가 없지 않냐고 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만에요. 잠이 안 와서 그렇게 고생하시는 이들보다, 오히려 저야말로 이 책을 읽어야만 하는 케이스였습니다. 암환자라고 해서 여태 인생을 암과 투병만 하며 살아온 게 아닙니다. 진단을 받기 전까지는 그도 평생 암이란 녀석과 인연이 없을 줄로만 낙관해 왔을 것입니다. 암에 비길 건 아니라고 하나, 불면증도 언제 어디서 (현재 슈퍼 슬리퍼인) 당신을 엄습하여, 결코 만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재앙을 당신 코 앞에 들이댈지야 누가 알겠습니까? 이 책의 존재가치는 바로 거기 있었습니다. "불면은 선명한 원인을 지니고 있는 병이니, 당신의 경우에 맞는 처방을 찾아 바로 치료하라!" 하물며 저 같은 경우, 오래 전이라고는 하나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린 적이 있으니 "병력"도 보유한 셈입니다.




이 책의 제목은 보시다시피 <나이트 스쿨>입니다. 왜 "스쿨"이 붙냐면, 첫째 앞서 말씀 드린 대로 "불면"에 대한 종합적, 망라적인 설명과 분석을 담고 있기 때문이며, 다음으로는 이 책의 형식이, 마치 학생들에게 조곤조곤 설명해 주는 선생님이나, 문센에서 주부님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명강사처럼, 경어체의 자상한 말투를 쓰고 있기 떼문입니다. 당신은 올빼미형입니까, 아니면 종달새형입니까? 책은 독자, 아니 청중에게 이 두 유형의 분류를 제시하고, 스스로 범주 진단을 한 다음 각각 그에 알맞은 상세한 솔류션을, 제법 두꺼운 책 안에 담아 내고 있습니다. 이 책은 또한 "꿈"의 기능과 본질에 대해서도, 참신하면서도 현실 설명력 높은 탐구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건강 이슈에 한정된 게 아니라, 인간 존재의 해명 영역에 대해 한 발 들여 놓는 대담한 도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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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명화 한 점 - 명화 같은 인생, 휴식 같은 명화
이소영 지음 / 슬로래빗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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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저술을 읽어 보면, 인간의 지각과 이성에 대해 대단히 유보적인 정의를 내려 놓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명하다고 여기는 수학이나 자연과학의 공리에 대해서도, 그 출발점은 "동시대인 사이에서 합의된 선지식" 정도로만 파악하고 있을 정도죠. 그 이른 시기에조차 "절대 진리"에 대한 섣부른 인정을 이처럼 꺼리고 있는 신중함이 놀랍습니다. 심지어, 가시광선 7색이 섞이고 교차하며 빚어내는 시각을 비롯한 오감에 대해서도, 그저 "인간의 망막과 광선 사이의 상호작용이 유발하는 한계" 안에서의 현상이라는 점을 명확히하고 있습니다. 객관적 실재(만약 그런 게 있다면)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고, 다만 우리 눈에 그저 그렇게 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비치는 상, 색깔, 모습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에 동의하고 나서야, 사실주의, 고전주의 이후에 꽃을 핀 그 모든 개성적인 화풍이, 제각기 자기만의 타당성 있는 어법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런 이성적 사유 이전에도, 우리는 마네, 쇠라, 고흐, 피카소의 그림을 보는 중에, 마음이 평온해지고, 채 잊고 있었던 푸근한 심상을 아득히 먼 이전으로부터 끌어올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눈에 비치고 우리의 뇌가 해석하는 바 한 가지 가능성만 존재한다면, 사진을 제외한 모든 시각 예술품들은 그저 우리 마음만 산란하게 하는 유해물일 것입니다. 화가들이 그런 파격을행하고도 우리의 환영을 받는 건, 현실 혹은 형이상에 대한 그런 식의 포착이, 지금 우리 망막이 놓치고 있는 어떤 비주얼을 "영혼의 눈"을 통해 전달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림은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하고, 이 책 저자인 이소영 대표가 우리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도 그런 쪽의 메시지일 것입니다.



요즘 9호선 연장 때문에 배차간격이 늘어서, 해당 노선 이용하시는 분들은 극한의 불편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자차를 이용하지 않고 대중교통에 몸을 싣는 건, 그나마 그 시간을 독서 등에 선용할 수 있기 때문인데, 이걸 꿈도 못 꾸게 되었으니 실망이 더 크죠.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내 마음을 푸근하게 이끌어 주는 그림, 조형은 어떻게 해서건 출근길의 벗이 되어 줄 수 있더군요. 이 책은 요일에 따라 총 7부로 나뉘어 편집되었는데, 아침에 집을 나오기 전 해당 페이지를 펼치고 내 눈에 뚜렷하게 이미지를 새겨 놓습니다(마치 튜브 물감이 발명되기 전 야외에서 재빨리 스케치를 한 후, 기억을 되살려 아뜰리에에서 채색 작업을 하던 이전의 화가들처럼 - 이 책에 실려 있는 이야기입니다). 전철에 몸을 실으면 눈을 감고(사람이 많으니 손잡이를 잡을 필요도 없고, 때가 되면 인파에 쓸려 저절로 내려지죠), 그 그림의 이미지만 재생하고 있습니다. 이러면 마음이 편해지고, 동시에 그 그림 밑에 저자 이 대표가 적어 놓으신 이 구절을 떠올리면서, 예컨대 "당연한 것에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같은 말을 떠올리면서 짜증을 가라앉힙니다. 그림을 통해 이 각박한 물리계를 넘어 저 피안의 조형도 떠올리고, (인위적이지 않은) 마음 수양도 하니 일석 이조입니다.



이 책은 기계적이지 않은 구성이 가장 큰 매력입니다. 요일에 따라 7부로 나뉜 각 챕터는, 챕터마다 시대에 따른 유파를 설명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런 책은 이미 많이 나와 있고, 그런 책들을 익히 읽은 우리 독자들도 웬만한 지식은 갖추고 있단 말이죠. 이 책은 그런 우리 심리를 미리 꿰뚤어보기라도 했다는 듯, 교과서적인 설명은 최대한 자제하고, 대신 (얼핏 보아) 신변잡기나 개인 회상 같은 작가 개인의 말을 적어 놓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림의 해설(이 역시 필자 개인의 주관이 강하게 배어 있습니다. 물론 개인 감상이라 해도 전문가의 그것이니 무게가 다르긴 하지만)로 자연스럽게 옮겨가니, 그냥 친구나 아는 분이 옆에서 들려 주는 이야기 같아 공감이 더 빠르게 이뤄지더군요.



설명도 입체감이 있습니다. 이런 책들은 보통 보면 필치와 기법에 대한 기술적 설명을 나열하거나, 앞 유파, 그리고 이후의 전개와 고립된, 당해 트렌드에 대해서만 자세한 이해를 의도하는 게 보통인데요. 이 책은 (때로 느닷없다 싶은) 통시대적 설명이 적시에 끼어드는 게 좋았습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이처럼 자유롭게 여기저기를 넘나드는 건, 저자가 오랜 세월 이 주제와 밀착한 환경에서 살아올 수 있었기에 이런 정직한 표백이 가능했을 텝니다. 자신만의 아이템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뻔하고 흔한 구호의 나열 끝에, 세상이 자기 부모처럼 제 응석을 안 받아주더라는 어처구니 없는 원한을 싸구려 무족보 페미니즘 타령과 얼기설기 섞은 넋두리와는 크게 구별됩니다.




존 윌리엄 고드워드는, 인상파와 입체파가 화단을 풍미하던 시대에 신고전주의 터치를 고수한, 일종의 낙오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후기 인상주의 파트 뒤에 이 사람 이야기를 뜬금없이 싣고, 또 그의 대표작 몇 점을 같이 실어 독자에게 감상을 권합니다. "나는 그가 좋았고, 이런 그림을 남겨 준 그에게 감사한다." 그 말을 듣고 나서 그런 느낌이 드는 게 아니라, 독자 중 한 사람인 저도 그의 선명하고 깨끗한 화풍이 마음에 들더군요. "스타일을 개창하고 열어 젖힌 사람뿐 아니라, 그를 마무리하고 떠난 이에 대한 기념도 있어야 한다." 사실 고드워드 같은 사람은 "마무리를 했다"고 하기엔, 루벤스 등의 시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죠. 피카소 같은 이도 그런 기법 구사에 서툴러서가 아니라, "새로운 표현법으로 세계와 소통하고 싶었던" 욕구가 강했기에 대가가 될 수 있었겠죠. 고드워드 같은 이는 사실 안이하게 자기 세계에만 머물렀지, 거듭나려는 의지가 부족했기에 그가 동시대로부터 박한 평가를 받은 건 당연합니다. "어쨌든 나는 내가 잘하는 걸 계속하겠다!"라는 타협과 거짓 없는 그의 정신은 그러나 높이 평가해야 하겠죠. 다만 저는, 고드워드가 작품 제목을 잘 지었다는 평에 대해서는 그리 동의하고 싶지 않습니다.



전시회를 자주 가 보지 않으면, 유명한 화가가 생전에 얼마나 많은 작품을 남겼는지 감을 잡기 힘듭니다. 전시회란 그래서, 그 많은 작품들 중 어떤 피스들을 모았느냐를 통해서도 모종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으며, 오너십이 단일하지 않은 그 작품들을 한 장소에 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이, 대가들의 대표작 아닌,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컷 여럿을 싣고 있다는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을 소개할 때에도, 사진 중에 번호를 삽입하지 않고(사소하나마 벌써 감상을 방해하는 요소죠), 매개 인덱스를 거치는 방식을 쓰신 점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림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저자 이 대표는 개인적으로 소중히 여겨 온 다른 미디어에서의 체험과 감상도 곁들이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점도, 이 책이 입체적 개성을 지니게 하는 비결 아닐까 생각합니다. 영화, 서양고전음악, 대중가요, 소설(예를 들어 최근 히트작인 요나스 요나손의 <창문...>).. 또한 그런 추억을 환기하는 배경으로는 반드시 홍대, 건대앞 등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장소, 아니면 친구들과 함께 다녀온 파리 등이 곁들여져, 일종의 공감각 효과를 유발하고 있습니다. 심오한 감상이나 상념이 아니라, "서른을 넘기니 불안하다" 같은, 친근하고 보편적인 느낌이 대부분이라서, 이 책에 실린 그림들과 우리 평범한 독자 사이의 거리를 더 좁히고 있습니다.

결국 예술이나 업적이 먼저가 아니라, "사람이 우선"입니다. 이 책에 실린 예술가들 중 일부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내세웠겠지만, 그들이 남긴 작품은 평범한 대중인 우리 같은, 관객과 청중이 있어야 그 존재 의의도 사는 법입니다. 심각하지도, 고매하지도 않은 채, 그저 팍팍한 일상을 사는 우리 곁에 머물며 작은 위안을 주고, 다시 일선의 경제활동으로 복귀한 우리들에게 재생산의 활력을 부여하는 그런 그림들이야말로, 예술을 넘어 영원의 가치에 기여하는 그런 불멸의 존재로 남는 것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시각의 창조와 해석에는 한 가지 정답만 있는 게 절대로 아니겠습니다. 정직한 인생과 함께하는 우리 모두에게 고유의 해석권이 주어지는, 완벽한 민주주의의 장이 바로 그림이기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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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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퓰리처 상이라고 하면 미국에서 활동하는 작가에게는 최고의 영예입니다. 이 상 중 문학 부문에서 이뤄지는 영예를 입은 사람이라면, 그 기쁨과 긍지란 노벨 문학상 수상자 부럽지 않을 정도죠. 이 귀하고 존엄한 상을, 서른을 조금 넘긴 나이에 처녀 소설집으로  받아낸 줌파 람피리는, 미국 문단의 기린아로 부상(浮上)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녀는 다작을 하는 편이 아니며, 이 책으로 문단에 데뷔한 지 16년이 지난 지금까지, 두 권의 단편 모음과 두 권의 장편 소설을 펴 내며 알찬 비블리오그래피를 일궈 가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초장의 상쾌한 출발이 도리어 "루키의 저주"가 되었다 할 만큼 이후의 성장에 부담, 멍에로 작용하는 수도 있지만, 그녀는 두 번째 단편집 <Unaccustomed Earth> 역시 대성공을 거둬 그해 미국 문단에서 선정하는 주요 상 다수를 휩쓸었습니다. 이게 이 첫 단편 <축복받은 집>이 나온 후 9년 뒤의 일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이제 오십을 바라 보는 그녀로선 중견 작가로서의 입지를 완전히 다졌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두 단편집과 두 장편소설은 한국어로도 모두 번역되어 이 "마음산책" 출판사에서 펴낸 에디션으로 판매되고 있는데요. 두 번째 단편집 <Unaccustomed Earth>은 한국어판 제목이 "그저 좋은 사람"으로 붙어 있습니다. 두번째 단편집도 이 책처럼 총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려 있고, 다만 차이라면 1부와 2 부로 나뉘어 각각 5편과 4편의 작품을 나누어 싣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저 좋은 사람"은 1부의 네번째 작품이며, 원서의 표제작 "길들지 않은 땅"은 1부의 첫 작품이자 책 전체의 서두를 장식하는 단편입니다.



 


출판사의 방침이라 할 만한 것과 어떤 관계가 있어서인지, 이 책 역시 원서는 "질병 통역사"가 표제작이었던 것을 This Blessed House(축복받은 집)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단편 소설의 완성도만 놓고 봤을 때는 "질병 통역사"가 풍자의 맛, 톡 쏘는 구성의 충격을 안겨서 더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 단편집 전체 분위기를 대표로 묻어내는 역량은 "축복받은 집"이 더 빼어나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컬렉션이라고 해서 반드시 개별 구성품을 하나의 코드, 맥락으로 꿰어 내어야만 하는 건 아니고, 이 책도 그렇듯 서로 발표시기를 달리한 채 간격을 두고 나온 작품들이 어떤 공통점을 또렷이 가지길 기대하는 건 무리입니다. 어느 작가도 매번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작품집을 이루는 개개 단편들이 표제작의 컬러 아래 어떤 연관을 지닌 듯 보이는 건 작가 라히리 여사의 개인적 사연이나 인종적, 문화적 배경에 따른 소재들의 특성에서 연유했을 뿐 아닐까, 그러면서도 이분의 작품 세계를 지탱하는 그 많은 심상과 주제의식이라는 게, 어느 작가의 경우나 마찬가지이듯 작가의 아이덴티티와 떼어 놓고 판단하는 게 불가능하기에, 이 컬렉션 하나만을 두고 선명한 가치를 부여한다 해도 그리 억지스럽지 않겠다고 여겼습니다.

1. 일시적인 문제


 

나이 서른을 훌쩍 넘기고 30대 중반이 되어서도 여전히 "학생 신분"에 머물러야 하는 두 대학원생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부모로부터, 혹은 이미 어엿한 사회적 기반을 잡은 또래들로부터, 어딘가 마뜩지 않은 시선을 받을 소지가 있다는 강박관념에 적잖이 시달리는 모습입니다. 만족스러운 논문이 지지부진인 상황과 대칭적으로, 이들 부부는 아이를 수월히 가지지를 못합니다. 논문도 난산이고, 2세를 물리적으로 빚는 일도 어려움이 따릅니다. 그러나 둘은 서로에 대한 애정을 결벽적이다 싶게 순수히 유지하는 부부입니다. 그들의 행복과 성취를 방해하는 요소는 사실 간단치도 않고, 그들의 주변에 단단히 뿌리를 박은 만성적 인자에 가깝기 때문에, 밖에서 보나 안에서 판단하나 그들의 장래는 큰 희망을 품기 어려운 부류라 하겠습니다. 전기가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건 물론 일시적인 문제입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불은 다시 들어옵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하루이틀 거주자를 곤란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열악한 주거가 끼치는 지속적인 손해라면, 그것은 이미 "일시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쇼바와 슈쿠마 두 학생 부부가 겪는 모든 문제, 불편한 상황은, 일시적 문제들의 구조적 지속이란 속성을 지니기에, 단속적으로 아픈 현실을 깨닫는 그들은 마침내 서로를 껴안고 눈물을 흘립니다. 이를 "이국 땅에서 유학생, 소수 인종 출신이 겪는 비애"까지로 확장시키느냐 아니냐는 개별 독자의 몫이겠습니다.

2. 피르자다 씨가 식사하러 왔을 때


 

작품에 어떤 에쓰닉한 요소를 집어 넣는 것과, 모종의 역사의식을 주제화하여 강조하는 건 서로 구별됩니다. 인도인, 그 중에서도 뱅골인으로서의 정체성과 특유의 고민을 소설 안에 한 장치로서 꾸려넣는 건 이 작품집 전체에 공통된 점이지만, 이 두번째 단편에서는 "이제 어떤 뱅골인은, 뱅골인일 뿐 인도인이 아니다."는 언명을, 작중 인물의 말을 통해 명시적으로 언급함으로써, 이 책에 수록된 아홉 편 중 가장 뚜렷한 역사의식이라 할 만한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심지어, "아이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 캄캄하게 모르고 있으니, 요즘 학교에선 대체 뭘 가르친다는 말인가!"라며 개탄하기까지 합니다. 그의 아내는 "요즘 아이들은 역사 외에도 배울 게 많아요."라며 분위기를 달래려 들지만, 사실 아버지의 저 말은 현실감을 잠시나마 잊은 판단입니다. 이곳은 그들이 이민 온 미국이며, 그들의 아이들이 미국 시민권자라면 미국 역사를 우선적으로 배울 테고, 미국 역사를 배우기도 버거운 아이들이 (비록 그들의 고국일망정) 지구 반대편(말 그대로 지구 반대편이죠. 이 책에서 여러 번 등장하는 표현입니다)의 작은 나라(문제의 방글라데시는 인구 대국이지만 국토는 아주 작습니다)의 최근 사정을 알 수 있을리가 없죠. 더군다나 소설의 시간적 배경을 감안하면 이는 역사라기보다 시사 사항이기도 합니다.

이제 인도인이 아닌, 방글라데시 사람으로서 정찬("식사"보다는 원어의 의미에 맞게 "정찬"으로 옮겨야, 손님을 환대한다는 분위기가 살아날 것 같습니다)을 함께하는 피르자다 씨, 이분은 아이들에게 매우 자상한 분입니다. 아이들 부모가 "그렇게 잘해주시면 아이들 버릇이 나빠집니다."라고 하자, "저는 버릇이 결코 안 나빠질 아이들만 골라 버릇을 나쁘게 하는 걸요."라고 대답합니다. 얼마나 온화한 신사입니까. 국적이 어디에서 어디로 바뀌었다가, 30여년 만에 다시 어디로 또 바뀌는 사정은, 이국 땅에서 서로 의지하고 같은 근원이라는 동질감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 남아시아인들의 살가운 소통에 있어 어떤 장애가 되질 않습니다.

이 소설은 두 가지 역사의 아픈 곡절을, 현지 출신다운 명쾌한 비유로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가 인도에서 떨어져 나간 일은, 마치 캘리포니아와 코네티컷이 합중국에서 분리독립하는 형국과 비슷하다는 설명이 그 하나입니다. 인더스 강 유역의 드넓은 평야는 사실 인도 역사에 있어 중핵을 이루던 정치적, 경제적 본간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파키스탄"이란 이름으로 갈라졌으니, 인도 역사는 문명 발생 이래 처음이라 할 만한 큰 상처를 입은 셈이죠. 그 파키스탄에서 다시 분리된 방글라데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곳은 서부 인더스 강 유역보다는 늦게 정착이 이뤄진 곳인데, 마치 미국에서 동부와 서부가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묘한 라이벌 의식을 가지듯, 갠지스(강게스) 강 유역 사람들도 서쪽의 지배자들에게 뿌리 깊은 이질감과 대항의식을 가지고 살아 왔습니다.

광동인들이 흔히 자신들을 중국인이라 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광동인"이라고 자칭하듯, 이 뱅골인들도 독자적 자긍심과 정체성이 무지 강해서 "인도인"이란 말을 잘 입에 담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이 점을, 뱅골인 이민자 가정에서 나고 자란 작가 줌파 라히리 여사 자신이 잘 알고 있을 터입니다. 하물며 종교의 분계를 기준으로 이미 다른 국적으로 갈라져 있던 "방글라데시인"이야 더 말할 게 없겠습니다(그 나라 옆에는 인도의 한 주를 이루는 "웨스트뱅골"이 따로 있으며, 이 지역의 거주자는 힌두교인이 다수입니다).

또 하나는, 동파키스탄으로 아직 남아있던 시절, 서파키스탄 군대가 미국의 지원을 받아, 현지의 독립 추진 세력을 잔인하게 탄압한 사실입니다. 이 소설 처음에는 "군인들이 교사들을 끌고 가 처형하고, 여인들은 잡아다 강간했다."는 진술이 있습니다. 미- 파키스탄 진영과, 소련- 인도- 방글라데시 진영이 대립한 사실은 알아도, 그 과정에서 그런 비극이 발생한 줄은 다른 세계 사람들이 아마 모르고 있었을 겁니다.

3. 질병 통역사


 

누구나 어린 시절에는 꿈을 크게, 아름답게 간직하고 꾸기도 합니다만, 성장 과정에서 여러 한계에 부딪혀 상처를 입다, 마침내 상황의 제약과 타협을 이루게 마련입니다. 이제 중년의 나이에 들어서는 주인공도 그런 사람입니다. 아니 어디서든 누구의 인생이라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인도는 인종이 아니라 언어를 권계면으로 해서 주와 지역의 경계가 나뉘는 나라입니다. 그는 실제로 인도의 각 토착어를 고루 구사할 수 있어서, 자신에게 어학적 재능이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자라서는 다양한 유럽계의 언어들까지 습득하여 외교관으로서 화려한 인생을 살아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TV로 외국 컨텐츠를 즐기는 자신의 아이들보다 외국어 능력이 더 뒤떨어짐을 자인합니다.

그나마 교육 받은 인도인이라면 어느 정도 구사가 가능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주말에는 관광 가이드라는 부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주된 생업은 "병원에서 의사를 보조하는 일"인데, 구자라트어를 할 줄 모르는 의사를 위해 이를 통역해 주는 일입니다. 구자라트는 고대로부터 페르시아와 잦은 교역을 이뤄 온 지역이며, 인도의 다른 지방과는 사뭇 구별되는 풍토로 경제적 번영을 누려 온 곳입니다. 간디도 이곳 출신이고, 이곳에서 경제적 주도권을 지닌 자이나 교 신자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구자라트 인들을 상대하는 직업은 따라서 경제적 전망이 좋다는 암시도 됩니다. 하필 소설에서 구자라트를 배경으로 삼은 건 이런 내역이 있습니다. 여기는 안 나오지만 구자라트에는 자이나 교 신도 공동체 말고도 파르시인들의 커뮤니티가 따로 있는데, 이들 역시 경제력이 막강한 인도 내 소수파들로 유명합니다. 에이즈로 죽은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도 이쪽 혈통이죠.


자신이 언제나 꿈꾸던 신분이나 생활, 그 비슷한 레벨에서 살고 있는 듯 보이는 다스 씨 부부를 맞아, 그 주말에 주인공은 가이드를 맡게 됩니다.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어린 사내애가 유난히 피부가 흽니다(나중에 나오지만 다스 부인이 저지른 뷸륜, 부정의 징표입니다). 체구가 자그마하나 중산층 부인 특유의 세련미와 고혹적 분위기를 풍기는 다스 부인을 두고, 주인공은 남모를 연정 비슷한 것에 빠져 듭니다. 이런 착각에 기반한 짝사랑이 흔히 밟는 패턴이 그렇듯, 그는 여인 역시 자신에게 약간의 호감을 갖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무럭무럭 키워 나갑니다. 찍은 사진들을 자신에게 보내려면 항공 우편으로 육 주 정도가 소요되겠지만, 그 정도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이미 아내가 있고 -그녀는 병원 통역사라는 남편의 직업을 존중하지 않은 채 그저 "보조"로 부릅니다 - 나이도 지긋한 그이지만, 현실 감각 떨어지는 남자들이 흔히 그렇듯 즐거운 성적 판타지에서 벗어날 줄을 모르다가, 잘 짜여진 단편의 주인공들이 흔히 맞는 운명처럼 드라마틱한 파탄으로 마무리됩니다. 마지막에서 "주소를 적은 쪽지"가 바람에 날아가는" 줄 자신만 알고 있었다고 처리한 건, 그나마 남은 자존을 지킬 줄 아는 주인공의 안간힘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우편을 받아 보려고 그 사실을 부인 혹은 다른 가족에게 알려주거나, 혹은 부인이 일부러 버리는 구성이었다면, 주인공의 알량한 위신은 어디서도 챙길 수 없었을 텝니다).

압권이다 싶었던 건, "결국 정직이 최상이다" 싶어 나름 직언을 해 줬는데. 다스 부인은 어이없어 하며, 반박을 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그를 무시해버리는 장면이었습니다. 부인의 심리야 우리 독자가 알아서 해석하게 내버려 둬도 되었을 텐데, 주인공(아니, 전지적 작가)은 그 정확한 상황 묘사를 일일이 독자에게 전달하기까지 합니다. 연인으로 내심 간주한 상대 여인이, 자신을 그저 아버지뻘 되는 익명의 휴지통으로, 제 마음만 편하고자 임의대로 취급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평소 아내에게 무시받고 살던 상처를 보상 받으려 했던 이 중년 남성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겠습니까. 마치 김동리의 <화랑의 후예>에서처럼, 신랄한 해학과 골계미가 풍기는 소설이었습니다.

4. 진짜 경비원


durwan 은 그저 힌디어라기보다, 거의 영어 코르푸스에 깊숙히 들어온 외래어이기도 합니다. 이 durwan은 그저 "수위"라거나, "경비원"이란 의미가 아닙니다. 예전에 왜 저기 식모, 입주 가정교사 등이 존중받는 직종이 아니라 남의 집 하인 비슷한 존재였듯, 이 durwan 역시 갈데 없는 처지의 하층민이 남의 집에 입주해 살면서, 방세 지불 대신 방호의 업무를 대신해 주는 개념입니다. 이걸 수위, 경비원 등으로 옮기면 의미가 안 살아나는데, 그 이유를 지금부터 적어 보겠습니다.

"부리 마"라는 이름을 지닌 할머니는 이 공동주택의 durwan입니다. 남들에게 천시받는 처지지만 그녀는 대단한 자존심과 입담으로 이웃들에게 가끔 경이감을 선사하는데, 듣는 이들은 이 노파를 일종의 구연 광대 취급하고 있습니다. 노파가 떠드는 사연을 믿지 않으려 드는 데에는 확실한 이유가 있지요. 사람은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사람을 두고서도, 미미한 근거를 들어 자신이 낫다고 여기는 습성이 있습니다. 하물며, 만약 현재의 처지가 자신만 못한 이가 있으면, 그 사람은 과거에도 역시 자신보다 나은 적이 없어야만 합니다. 대부분의 이들이 지닌 뇌 용량은, 서로 모순되는 정보를 동시에 처리할 역량과 여유를 갖지 못합니다. 과거에건 현재에건 어떤 타인이 나보다 나은 처지에 있다는 사실은, 그 정보를 처리해야 하는 당사자의 머리에 과부하를 주고, 감정상의 반감을 유발합니다. 일개 durwan인 노파에게 뭐하러 그런 수고를 들여서 내 뇌를 피곤하게 만들겠습니까? 그들은 현재 우월자로 섬기고 있는 그 누군가(직장상사, 지주 등)의 허풍과 거짓에 대해 일일이 순종하며 그 권위를 인정하는 일만으로도 바쁘고 지칩니다.

여기서 "애정남" 캐릭터 한 분이 등장하시는데, 바로 차터지란 이름의 노인입니다. 그는 묘한 말로 상황을 정리하는데, 일단 "부리마의 입은 거짓으로 가득차 있다"고 하며 모두의 "감정"을 존중합니다(우리말에서 "입"과 "부리"가 묘하게 의미연속체상에 놓인 단어라서, 이 말이 한국어번역판 한정으로 재미를 주기는 합니다. 물론 여기서 "부리"는 힌디어일 뿐이므로 제가 한 말은 그저 농담입니다만). 그러나 부리마의 구체적 진술에 담긴 개연성을 부정할 수 없고, 부리마 노파가 지금 이 공동주텍에서 행하는 유용한 기능을 포기할 수 없어서, "그녀도 시대 변화의 피해자"라는 모호한 말로 비호를 하기도 합니다. 이 말의 실용적 모호성은 결말에 가서 잔인한 효과 하나를 발휘합니다. 말은 역시 애매하게 내뱉어야 나중에 책임질 일이 안 생기나 봅니다.

부리 마 역시, 나이가 많다는 점을 감안해도, 문제가 많은 사람입니다. 이불에서 자꾸 진드기들이 나와 자기 등을 갉아먹는다면서 끊임 없이 이불을 털어내는데, 열악한 주거 환경을 감안하면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습니다만, 실상은 그저 등에 땀띠가 난 것뿐입니다. 만약 진드기의 잘못이라면, 이건 그녀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사정입니다. 그러나 그게 낡은 이불의 잘못이라면, 이불을 교체할 수 없는 경제형편이란 그녀가 좌우할 수 없는 상황 변수입니다. 부리마 노파 역시, 자신의 능력 범위 안에서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해 현실을 왜곡하는 나쁜 습관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웃들을 탓할 것도 없습니다. 이웃들이나 부리 마 자신이나 다 낡은 과거의 잔재 같은 존재들입니다.

이 공동주택에 살던 이들은 현대화의 바람에 힘입어(인도판 새마을 운동?) 세면대 등 가구 집기를 교체하며 들뜬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해당 사항 없는 가구는 혼자 사는 빈민인 부리 마 노파 뿐입니다. 공사를 위해 인부들이 무시로 드나들자, 낯선 사람을 차단하고 계단을 청소해야 하는 durwan으로서의 임무는 거의 포기 상태입니다. 그녀는 하릴없이 시장을 돌아다니는데, 이때 불운하게도 평생 모은 돈을 보관한 전대와 열쇠꾸러미를 소매치기당합니다. 늙은 분의 재산을 가로채다니 도둑 중에서도 참으로 나쁜 도둑인데, 이 도둑의 정체에 대해서는 소설이 끝나도록 전혀 단서가 안 주어집니다.

노파의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집에 돌아 와 보니, 입주한 사람들이 전부 다 집에 도둑이 들었다며 난리입니다. 사람들은 부리 마 노파에게 모든 책임을 씌우는데, 일단 durwan으로서의 임무를 소홀히했다고 매도하며, 한 술 더 떠 "직접 훔치지는 않았어도 도둑에게 정보를 주었다"며 범죄의 혐의까지 씌웁니다. 우리 독자는 바로 앞에서 부리 마 역시 소매치기의 피해자임을 알았기 때문에, 동정과 연민을 금할 수 없습니다. 소설에는 끝까지 한 마디 암시도 없지만, 우리 독자는 도둑의 정체가 아마 집에 드나들면서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된 - 부리 마 노파가 전대에 평생 모은 돈을 보관한다는 사실까지 - 어느 공사 인부의 소행임을 눈치 챌 수 있습니다. 모르긴 해도, "부리 마가 책임져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여 선동을 시작한 이 중에 도둑이 있었을 텝니다. 그저, 소설 속으로 들어가 정의의 주먹을 날릴 수 없는 게 분하기만 한 게 우리 독자고요.


"먹고 살 방법이 그런 것밖에 없었어?"

여기서 냉혈한처럼 보이는 애정남 할배가 다시 나옵니다. "부리 마의 입은 거짓으로 가득해. 하지만 그건 새로운 사실이 아니지. 새로운 사실은, 이 건물의 표정이 바뀌고 있다는 거고, 이 건물에 진짜 경비원이 필요하단 거야."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약, 진짜 식모, 진짜 머슴, 뭐 이런 말을 쓰면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최신식 쥐덫"이란 말이 웃기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과거의 잔해에는, "진짜"니 "첨단"이니 하는 엘리베이션이 필요 없는 겁니다. 그것들은, 저 위에서 차터지 노인이 말한 대로, "시대 변화의 희생양"으로서, 그저 새로 등장한 대체물에 의해 쓸려 나가면 그만인 것입니다. durwan이란 초라한 말 앞에 "진짜"가 붙는다는 자체가 웃기는 거죠. 우리는 1990년대 초에 법제를 정비하여, 부동산 중개업을 허가제로 바꾸었습니다. "복덕방"은 그래서 동네의 할 일 없는 노인들의 소관 사항이 아니라, 데이터베이스를 갖추고 법률 지식 최소한을 머리 속에서 부릴 줄 아는 준(準) 전문직으로 대체되어 멀리멀리 시대의 저편으로 쓸려나갔습니다. 공인중개사면 공인중개사지, 그걸 두고 "진짜 복덕방", "첨단 복덕방"이라고 부르나요? 이 단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이런 시대의 변화에 떠밀려 사회의 가장 취약한 자리에 선 약자들이 겪는 설움과, 과거의 때를 벗어내려는 인간들의 무정함, 이기심, 뭐 이런 쪽입니다.


5. 섹시


이 단편은 그저 흔하디흔한 불륜 이야기를 다룬 게 아닙니다. 순진무구한 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性의 실체, 그리고 그것이 유발하는 인간 관계의 한 단면을 냉엄하게 포착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단편집에 실린 작품들이, 하나하나가 다 수학적 증명과 같은 클래식 구조를 갖추고 있다고는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적시에 던져지는 재담이나, 삶의 이면 그 진실을 짚어내는 날카로운 표현, 대사가 일품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말이죠(예를 들면 위 작품 "진짜 경비원"에서, 낡은 이불이 요쿠르트처럼 되었다는 표현이라든가). 평론가들의 화려한 언사가 주는 권위에 주눅이 들어, 그들이 기계적으로 표현하곤 하는 근거가 부족한 언명에까지 일일이 동의를 보내는 독자가 과연 얼마나 진실성, 정직함을 갖춘 사람일까요? 이런 사람이 스토킹까지 한다면 그건 그야말로 끔찍한 일입니다.

여기서 제 머리를 강타했던 한 마디는, 엄마뻘인 미란다에게 꼬마 로힌이 던진 말입니다. "아줌마는 참 섹시한 것 같아요." "넌 섹시하단 말이 무슨 뜻인지나 알고 그러니?" "섹시하다는 건, 알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이에요." 이게 꼬마 로힌이 자기 나름으로 내린 "섹시함의 정의"입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바로 섹시함의 뜻"라는 이 명제의 전제에는, "사랑은 아는 사람끼리만 해야 하는 것"이란 요구가 먼저 깔려 있습니다. 사랑이란, 아는 사람끼리만 해야 합니다. 모르는 사람 사이에선 사랑이 이뤄지면 안 됩니다. 그런데도, 그 모르는 사람끼리의 금지된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게 바로 "섹시"라는, 순수하기도 하고 고루하기도 한 정의가 바로 이 꼬마가 수행한 작업입니다.

"안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예전에 남녀가 교류를 트기 위해서는 양가 부모 등 어른들의 분위기 조성이나, 믿을 만한 사람의 소개가 있어야 그게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야합"이 아닌 건전한 남녀 사이의 교제였습니다. 인도도 우리와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겠으나, 꼬마 로힌이 꺼낸 건 그 정도로 제한된 함의는 아닐 것입니다. 이 꼬마의 말은 "사전에 정신적 교감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육체적으로 첫눈에 반해 끌리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육체적으로 사랑을 나누려면, 먼저 그 사람의 정신, 개성, 영혼의 컬러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몸으로 먼저 번지는 충동과 애정이, 혹시 그런 게 존재한다면, 그게 바로 "섹시'라는 게 이 꼬마의 정의입니다. 그래서 "섹시'는, 사악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합니다.

이 소설에서 데비가 미랜다(미란다)에게 하는 말, "당신의 이름 일부에는 인도식 요소를 갖고 있네요."라 말은, 아무 타당성이 없는 헛소리입니다. "미라"는 인도에서, "미란다(이 한국어판은 구태여 "미랜다"라고 발음대로 옮겨서 소양 없는 일부 독자를 헷갈리게 합니다. 안 그러는 편이 나았을 텐데요)"는 영미에서, 각각 여자 이름으로 흔해 빠진 아이템들입니다. 미란다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그리고 얼마나 영어권에서 오래된 전통을 가진 이름인데 - 당장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서 프로스페로의 딸 이름이 미란다 아닙니까? "오, 얼마나 멋진 신세계인가!를 외치는 그 처녀), 이름이 미란다라고 해서 그 사람의 정체성 일부가 인도스럽게 된다는 건가요? 소설을 잘 읽어 보면, 인도인으로서의 정체성 때문에 약간의 열등감을 가진 데비가, 미란다에게 작업을 용이하게 걸기 위한 일종의 친근감 수작으로 해석하는 게 무난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미라니 미란다니 하는 이름은, 바로 뒤의 단편 "센 아주머니네 집"에서 나오는 "센"만큼이나 흔하고 흔한 이름입니다.

중국의 장씨 처녀: 자기 이름에는 중국인의 정체성 일부가 들어 있네?
한국의 이씨 총각: 설마? 우리 만옥이 또 뻥치시네. 훗.
장: 이씨는 중국에서 가장 흔한 성씨거든. 몰랐지 명박아? 오늘부터 자기는 절반은 중국 사람이야, 알겠지?
이: ............ ?????


꼬마 로힌의 킬링 라인이 비록 나오기는 하지만, 이 소설은 억지스럽고 작위적인 구석도 참 많더군요. 미란다는 자기 이름을 힌디 글자(데바나가리)로 쓰며, 글씨가 서툴러서 "미라"인지 "마라"인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건 데바나가리의 필기 구조를 알면 나올 수가 없는 말입니다.




"마"는 이것이고

मि
"미"는 이것입니다. "마"라는 글자 머리 위에서부터 왼쪽으로 내려오며 꼬리를 덧댄게 "미"입니다. 따라서, "모", "무", "마아" 같은 것과 헷갈릴 수는 있어도, 아무 것도 안 붙인 "마"와 헷갈릴 수는 없는 게 "미"입니다. 헷갈릴 수가 없는 걸 헷갈린다고 하는 건, "악마"라는 의미의 '마라"와 억지로 연결을 시키려는 의도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이걸 영어로 쓰면 독자들이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겠으나, 힌디 권 사람들이 읽으면 피식 실소가 나오는 대목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미란다는 초딩일까요?

아까 그 이씨 총각: 내 이름은 잘못 쓰거나 발음하면 "면박"이 된다. 남에게 직설적인 말로 상처를 주는 걸 면박이라고 한다. 내 이름에 나의 숙명이 어느 정도 깃들어 있었단 말인가?

누가 이런 말을 하면 그게 재미있고 재치있거나 심오하게 보일까요? 한국인이라면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할 겁니다.


6. 센 아주머니의 집


이 단편은 기묘한 슬픔을 자아냅니다. 센 아주머니란 분은 베이비 시터 구직란에 오른 이름인데, 소개엔 "교수의 부인임. 책임감이 강함"이란 코멘트가 있습니다. 교수의 부인이 뭐하러 이런 허드렛일을 해야 할까요? 수학, 공학 교육 열기가 드높은 인도에서, 자기 분야에 두드러진 재능을 발휘하여 이곳 미국에서 교수 자리까지 얻었지만, 아직 평판을 굳히고 넉넉한 보수를 받기까지는 갈 길이 멉니다. 그래서 그 부인이 이런 수고까지 해야 하는 형편인데, 여기에도 유색인종, 아시아 에쓰닉 아이덴티티를 갖고 살아가야 하는 이들의 쓸쓸한 처지가 묻어나는 설정입니다.

아이 엘리엇을 센 부인이 돌보기보다, 여러 모로 서투르고 영어도 잘 못하는 센 부인을 엘리엇이 챙겨줘야 하는 모습입니다. 사실 엘리엇은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워서 보모가할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여럿을 바꿔가며 계속 베이비시터를 두는 이유는 그저 그 부모가 이 점에서 있어서만 좀 유난스럽기 때문입니다. 베이비시터는 엘리엇네 집으로 출퇴근을 하는 게 정상인데, 이 센 부인이 운전을 못하다 보니(여기서 배경이 드러나죠. 차 없이는 어딜 갈 수가 없는), 엘리엇이 하교 후 센 부인 집으로 가야 합니다.

센 부인은 정말 본인이 "베이비시터"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외로움도 많이 타는 성격인데, 전화번호부에 이름인 "센"인 사람은 자기네밖에 없다며 씁쓸해합니다. 자신의 고향에 가면 발에 채는 게 "센"인데 말이죠. 사람은 이처럼 자신의 육신과 영혼을 키운 토양을 그리워하고, 넉넉하게 살았건 어느 카스트에 속헸건 저를 낳아준 땅의 공기와 풍광을 몽매간에도 못 있는 존재입니다. 이런 그녀가 기어이 교통사고를 내 베이비시팅은커녕 돌보는 아이와 자신에게 큰 피해를 줄 뻔한 건 그야말로 신의 가호라 하겠습니다. 이런 골칫덩어리 마누라가 있으니, 센 교수는 남의 나라에서 출세하기 글렀군요.



7. 축복받은 집


이 단편도, 미국에 와서 한번 신세 펴고 떵떵거리며 살고 싶은데, 두 군데에서 문제가 생기는 어느 젊은 이민자 전문직 남성의 사연입니다. 하나는 갓 결혼한 자신의 아내가, 순수하고 귀엽긴 하지만, 어딘가 칠칠맞고 살림도 못 하는 데서 연유한 불안감과 불만족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로 자기 문제인데, 남자 자신은 미처 못 깨닫고 있지만, 힌디적 정체성에 과하게 집착하며 무의식 중에 확고히 간직한, 미국 기독교 백인 문화에 대한 반감입니다. 이 두 요소가, 거침 없이 뻗어나갈 것만 같은 자기 장래에 깔린 프릭티브 팩터라고 하겠습니다.

원제는 정관사 the 도 아니고, 지시형용사 this가 앞에 붙어 있습니다. "이 축복받은 집" 정도의 의미인데, 여기서 this는 다소 대상과 거리를 두며 냉소적 감정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한국말로도 어느 정도 그 느낌이 전달됩니다). 저렇게 그저 "축복받은 집이라고만 하면, 막연히 따스하고 은혜롭고 해피하고... 이런 심상만 떠오르는데, 소설을 읽은 이들은 알겠지만 이 내용이 그런 내용이 아니죠.

새로 장만한 집은, 젊은 나이에 회사 중역직을 맡은 그에게 잘 어울리는 깔끔하고 기품 있는 모습입니다. 그는 돈도 많고, 이민자들이 언제나 중시하는 "고향의 배경"도 잘 갖춘 사람입니다. 이민 와서 새로 잡은 기반만 버젓해선 안 됩니다. 자기가 고향에 두고 온 커넥션도 좋아야 그게 조건 완성이 됩니다. 사실 그는 마음대로 신붓감을 골라잡을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카스트도 좋고, 돈도 많고, 매력도 적절하며, 야심과 비전도 있습니다. 이런 처지인데도 그는 평소처럼 주도면밀하고 치사한 계산을 하지 않은 채, 순전히 느낌에만 이끌려 아내를 골랐습니다. 결혼이야말로 일생일대의 사업인데도 말입니다.

새로 이사 온 집에서는 가치 있는 기독교 미술품이 자꾸 발견됩니다. 아내는 그것들이 너무 예뻐서 잘 간직하자고 하나, 남편은 이런 태도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비록 현실의 요구 때문에 남의 나라에 와서 일은 하고 있지만, 혼이나 정신에까지 이교의 요소가 들어오는 건 질색이라, 그는 이 정신사나운 건 눈에서 얼른 치웠으면 할 뿐입니다. 아내는 마룻바닥에 흠이 안 생기게 한다거나, 가구를 잘 관리하는 일(이런 것들은 이 집의 부동산 가치를 유지하는 데에 중요합니다)은 못하면서, 좀 갖다 버려야 할 건 반대로 집착을 보입니다. 자신과는 가치 지향이 정반대로 꼬인 셈입니다. 결혼하고 나서 며칠 뒤에 "아차"라는 후회가 갑자기 드는 예가 있다고 하는데, 이 경우가 딱 그런 셈이죠.

이제 직장 동료들을 불러 집들이를 해야 합니다만, 주인공은 자꾸 준비에 엇박자를 부르는 아내가 밉기만 합니다. 그러나 정작 당일 파티가 열리자, 눈부시게 아름다운 아내가 자연스럽게 중 심에 서서 모든 이의 시선을 집중하게 하고 파티를 완전 살게 만드는데, 반대로 이것저것 정치적 기술적 배려를 해 온 자신은 오히려 곁다리로 밀리네요. 결과는 만족스러워지지만, 뭔가 남편 자신의 통제 방향, 기대와는 어긋난 느낌이라 이걸 좋아해야 할지는 망설여지는 기분입니다. 이 와중에 웬수 같았던 기독교 미술품은 자연스럽게 "보물 찾기" 게임을 유발하여, 주인공은 새 집에서 맞게 되는 이 "내키지 않는 축복"에 대해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지 난감하기만 합니다.


8. 비비 할다르의 치료


 


마지막 두 작품은 사뭇 대조되는 분위기입니다.


비비 할다르는 자꾸만 어디가 아픈 노처녀인데, 돌팔이 토착 의사들은 갖가지 엉터리 모순된 처방을 내놓아 노처녀와 가족들에게 혼란만 가중시킵니다. 저 위 "진짜 경비원"처럼 인도만 그 배경으로 등장하는 작품인데,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리석고 편견과 인습에 가득찬 모습이라, 우습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저러다 자신과 주위에 큰 피해를 주지나 않을지 보기에 아슬아슬하기만 합니다. 순수함이란, 그것이 무지와 몽매를 요람으로 할 경우, 아무 미덕도 되지 못한다는 교훈을 다시 일깨우기도 합니다. 비비는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 하나를 출산하고서야, 그 정체 불명의 증상들이 말끔히 나았는데, 병이 치료되었다는 안도에 그 주변 사람들은 여인의 과거를 묻는 번거로움을 애써 회피합니다. 이것이 유일하게, 그들이 선택한 현명한 태도였습니다.



 

9, 그리고 대단원


 

"세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이 문구 자체로서 갖는 의미는 plain 할 뿐입니다. 아시아에서 나고, 유럽을 거쳐, 이제 아메리카에 제 자리를 잡은 아버지의 사연입니다. 이 마지막 작품이 풍기는 분위기와, 그 함의한 메시지는 너무도 뻔해서, 앞의 여덟 작품으로부터 잘 소화되지 않고 남은 잔유물만 그러모은, 잉여 구색맞춤이 아닌지 하는 생각도 처음에는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살펴 보면, 이 작품에는 한 세기를 살아 오며 미 대륙의 현대사를 지켜 봐 온 아이 위트니스, 크로포트 부인이 나와 "나"와 진정어린 소통을 이룹니다.

노부인은 아주 고루하게, 과거의 미풍과 관습에 집착하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자기 또래와 후손 백인들이 얼마나 자주, 많이, 지켜야 할 가치와 미덕을 저버리고 배신했는지도 한 세기에 걸쳐 지켜 봐 온 사람입니다. 하버드와 MIT 출신이 아니면 하숙을 안 받는다는 그녀(대신 하숙비는 쌉니다)는 인도에서 건너 온 피부가 검은 젊은이를 찬찬히 본 후, "이런 신사가 또 없군!"이라며 recognition을 행합니다. 동족에게도 잘 해주지 않는 이런 인정은, 이 노인에게는 매우 드문 파격입니다.

이곳에서 그는 육 개월 정도 머물렀을 뿐이지만, 과묵한 노부인과의 담백한 교감이 있었기에, 마치 육 년은 머문 듯한 착각이 다 듭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딸과 이 하숙집을 다시 찾고 나서 "내가 그렇게도 싼 하숙비를 내고, 그렇게도 짧은 동안만 이곳에 머물렀다는 말인가?"라며 놀라움과 추억에 흠씬 젖습니다. 노부인은 자신의 친자식보다 주인공 부부(나중에     비자를 받아 인도의 아내도 미국에 부르는데, 이때엔 여성을 들일 수 없다는 계약의 조건이 있어 이 하숙집을 나가야 했습니다)를 더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는데, 노부인은 첫만남(이자 마지막 대면)에서 그 아내를 두고도 "이런 숙녀가 또 없군!"으로 acknowledgement를 합니다.



 


 

여기서 작가는, 인종 차별이다 뭐다 해도 그 체제를 지탱하는 근저에 도도히 흐르는 공정함, 휴머니티, 정의를 사랑하고 배덕을 경멸하는 미국 사회의 펀더멘털에 경의와 애정을 표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크로포트 부인 같은 이가 있고, 그런 작은 배려를  감시히 여겨 잊지 않는 이민자들이 있었기에, 자신 같은 빼어난 작가가 성취를 이룰 수도 있었겠고 말이죠. 이게 바로 큰 지붕을 함께 이고 살아 온, 미국이라는 거대한 축복 받은 집이요. 자(自)와 타(他) 사이에 발병의 징후를 보이는 malady를 통역, 전파 하지 않고 차단, 중화하는 합중국의 저력이자 희망이 아닐까 하는 한 줄기 희망의 피력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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